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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이치로

last modified: 2014-08-30 13:46:10 by Contributors




1959년 01월, 사망 두달 전.

鳩山一郎 1883.01.01~1959.03.07

역대 일본 총리
48 - 51대 요시다 시게루 52, 53, 54대 하토야마 이치로 55대 이시바시 단잔

일본정치인. 총리. 아시다가 세운 민주당의 마지막 총리이자, 자유민주당의 첫 총리. 장남은 외상을 지낸 하토야마 이이치로이고, 장손자는 후일 일본의 총리에 오르는 하토야마 유키오다.

도쿄 출생. 명문 정계 가문인 하토야마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하토야마 가즈오는 도쿄에서 중의원을 지내고, 후일 중의원 의장을 지냈던 정치 거물이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이치로도 젊어서부터 정계에 입문해 1915년, 32세에 중의원 입성을 시작으로 이후 정계에 매진했다.

젊어서는 일본 군부에 협력하는 관료층 중의 한 명으로 활동했다. 문부상 시절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 대학 교수들의 처분을 놓고 의회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그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문부상 하토야마의 질의답변이 걸작이었다. "상관 없습니다. 따르지 않는 교수가 있다면, 전부 해고시키면 됩니다." 이런 과격한 행동으로 군부 치하에서 계속 중용되는 반사이익을 누렸지만, 일본의 패전 이후 들어온 연합군에게 당연히 찍혔다.

패전 이후 하토야마는 순식간에 전후 일본의 정치 지도자급의 인물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던 하토야마는 패전 직후인 1945년 발빠르게 보수 우익 정당을 하나 창당했는데, 그것이 자유당이다. 그러나 하토야마의 과거 전력과 성장세는 이후 들어온 GHQ에게 눈엣가시로 작용했고, 결국 1946년 하토야마는 GHQ에 의해 공직 추방 명령과 금고형을 먹었다.[1]

공직 추방을 당하자 정계에 나설 수 없게 된 하토야마는 부랴부랴 그가 세운 자유당을 맡길 만한 인물을 찾아나섰는데, 그렇게 찾아낸 인물이 친밀했던 요시다 시게루였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다. 요시다 시게루가 자유당을 접수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첫 총리직에 오른 걸 보면, 하토야마는 권력 접수 직전에 뼈아픈 추방을 당한 것이다.

하토야마는 요시다에게 자유당을 넘겨주며 네 가지 약속[2]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요시다와 하토야마의 관계는 친밀했었지만, 1951년 하토야마가 공직 추방령에서 풀려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다. 하토야마는 공직 추방령에서 풀려난 이후 요시다에게 약속대로 총리직을 요구했지만(병신), 이미 권력을 확고하게 틀어쥔 요시다는 당연히 그 요구를 거부했다(배신). 이후 두 사람은 앙숙지간이 되어 버렸다.

약속을 거절당한 후 하토야마는 자신이 창당했던 자유당이 아닌 아시다 히토시가 창당한 민주당으로 가 버렸다. 당시 민주당은 아시다 히토시의 실각 이후 구심점을 잃어버려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 있었는데, 하토야마가 입당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하토야마의 정당이 되어 버렸다.(...)

새로운 구심점을 얻은 민주당은 곧 요시다 시게루에 대한 꼬투리 잡기에 나섰는데, 요시다의 장기 집권에 여론이 염증을 내기 시작한 시점이라 매우 운이 좋았다. 특히 1953년의 "바카야로 해산[3]"으로 자유당에 한 방을 먹인 민주당은 계속 공세를 올려서 1954년 요시다의 '지휘권 발동 사건'이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시다를 공격하기 시작해, 결국 요시다 시게루가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타인이 창당한 정당에서 자신이 창당한 정당을 상대로 싸워 이긴 무서운 양반.

그러나 처음 집권한 하토야마의 민주당은 7년을 장기집권한 자유당에 비해 세력이 약했다. 의석도 전체의 1/4 수준에 불과했고, 아직 거대정당으로 남아있던 자유당이 하토야마의 집권을 반길 리가 없었다. 그러나...

1955년 2월, 중의원 선거가 치러지면서 자유당 강세의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이른바 '하토야마 붐'으로 불리는 이 선거에서 하토야마와 민주당은 드디어 1당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면서 하토야마 이치로는 처음 몇 개월 간 불안정했던 권력 구도를 안정적으로 굳히는 데 성공했지만, 역으로 좌우 양파로 분열되었던 사회당이 중의원의 1/3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하토야마가 내세웠던 헌법 개정, 즉 평화 헌법 개정[4]을 무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당 좌우파가 1955년 10월 화해하고 양파로 갈라진 사회당을 통합하자, 일본 내 우익 정치가 및 재벌들 사이에서 사회당 재집권에 대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토야마는 이때부터 자유당과 다시 접촉하기 시작해, 11월에 자유당과 민주당을 같은 정당으로 흡수해 이른바 통합 보수우익 정당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자유민주당통칭 자민막부이다. 사회당 좌우파와 민주당, 자유당이 서로 통합해 양당체제[5]로 정리된 1955년을 일컬어 55년 체제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일본 내 보수우익 세력의 대부. 새로 생긴 자민당 내에서 하토야마는 미키 부키치, 오가타 다케토라, 오노 반보쿠 등과 함께 공동 임시 총재를 맡았으나, 경력이나 집안이나 당내 세력으로 볼 때 하토야마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당 통합 이후 임시 소집 기간 동안 세 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아 첫 자민당 내각을 열었다. 이후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에 의해 자민당이 처음 실각할 때까지 무려 38년 간을 자민당에서만 총리가 나오는 일당 독재독주 체제를 형성했다[* 사실 이건 1960년대 이후 다당화와 중선거제의 영향이 컸다.]

이후 기간 부터는 정당 통합으로 안정적인 권력 기반을 갖추면서, 점차 대외적인 활동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소련과의 국교 회복을 서두르기 시작했는데, 처음 집권할 때 내세웠던 공약이기도 했지만 특히 위에 썼던 헌법 개정이 수포로 돌아가자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미국에만 의존하는 국제적인 고립을 막고[6] 유엔 가입을 빨리 서두르기 위해 하토야마는 소-일 국교 회복에 상당한 노력을 했다.

처음 1956년 10월에 하토야마가 직접 소련으로 가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회담하였고, 이후 오노 반보쿠가 소련으로 건너가 협상한 끝에 1956년 12월 소련과 일본은 다시 국교를 맺는 데 합의했다. 일본의 유엔 가입을 반대하던 소련이 찬성으로 의견을 바꾸자 일본의 유엔 가입이 그대로 해결되었다. 하토야마는 일본의 유엔 가입 직후 총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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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추방의 공식적인 이유는 그가 1937년부터 영국과 더불어 이탈리아와 독일을 다녀온 것을 여행기로 작성했기 때문이었는데, 1937년부터 독-이-일 추축동맹이 논의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걸 꼬투리 잡힌 것이었지만, 실제적인 이유는 그의 과거 전력이었다.
  • [2] 혹은 세 가지 약속. 요시다 시게루 참조 바람
  • [3] 이것도 요시다 시게루 참조 바람
  • [4]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의 패전국 위치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평화헌법을 앞장서서 주장했다. 그러자 국방비 부담 감소와 한국전쟁 특수가 맞물리면서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부활했고, 하토야마 내각 즈음에는 완전회복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자, 일본 내 우익들 사이에 다시금 재무장에 대한 헛된 망상야욕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하토야마는 이것을 간파하고 헌법 개정을 공약으로 걸어서 일본 우익들의 지지율을 그야말로 쓸어 모았다.
  • [5] 사실상 양당제였지만, 규모상이나 조직력 상 자민당이 훨씬 우위였기 때문에 1.5정당 체제로 부르기도 한다.
  • [6] 이런 하토야마의 탈미노선은 그가 공직 추방을 당하고 난 직후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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