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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갑옷

Contents

1. 개요
2. 청동기시대
3. 고조선 멸망무렵~ 원삼국시대
4. 삼국시대
4.1. 갑옷 양식
4.1.1. 판갑
4.1.1.1. 종장판갑(수신판단갑)
4.1.1.2. 방형판갑
4.1.1.3. 장방판갑
4.1.1.4. 삼각판갑(삼각판단갑)
4.1.1.5. 횡장판갑(횡신판단갑)
4.1.2. 찰갑(괘갑)
4.2. 투구(주)
4.2.1. 종장판투구(몽고발형주)
4.2.2. 비늘투구(소찰주)
4.2.3. 차양투구(미비부주)
4.2.4. 충각부주
4.2.5. 이형주
4.2.6. 원주투구
4.2.7. 농오리산성투구
4.2.8. 금동장투구
4.3. 부속갑옷
4.3.1. 어깨가리개(상박갑)
4.3.2. 치마갑옷(갑상)
4.3.3. 목가리개(경갑)
4.3.4. 팔보호대(비갑)
5. 고려시대
5.1. 갑옷 양식
5.1.1. 투구
6. 조선 시대
6.1. 초중기
6.2. 후기



1. 개요

한국에서 사용된 갑옷을 총칭한다. 한국에서 출토된 갑옷은 대부분 찰갑이나 판갑(플레이트 아머)같은 철제 갑옷이다. 목갑(나무)과 골갑(뼈) 그리고 피갑(가죽)등의 경우 사막과 같이 건조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는이상 썩기 쉽기 때문에, 거기다 한국의 산성토양 문제로 인해 출토된 예가 상대적으로 적으나, 대체로 중국 또는 일본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종장판이나 횡장판갑 등의 판갑(단갑)이, 고구려등 북방 지역에서는 찰갑(괘갑)이 주류를 이루었고, 고구려의 남하 이후 판갑이 찰갑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양상을 띄게 된다. 찰갑 형식의 갑옷은 몽고의 영향을 받게 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변함없이 차용된다.

한국 사극. 특히 고려 이전 시기를 다루는 사극에서 고증 문제로 가장 많이 까이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조선 갑옷이 제대로 고증되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대체로 사극의 의상 고증은 복식학자들이 하는데, 일반적으로 한복 고증에 주로 힘을 쏟기 때문에 갑옷은 소품 제작자에게 만들어달라고 대충 의뢰하거나 다른 작품에서 사용한 것을 돌려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 기본적으로 주연급 인물들에게 투구를 안씌우는 것은 애교수준이고, 주인공과 주연급 인물은 고증과는 전혀 무관한, 마치 판타지 게임에서나 등장할 법한 화려한 비닐 소재 갑옷을 입는 경우가 태반이다. 음 미개한 오랑캐놈들! 하하하 하하하!

한류에 힘입어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등의 많은 국내 사극이 해외로 수출되고 있는데, 보다시피 예로 든 해당 두 작품은 발고증 판타지 갑옷의 끝판왕, 종결자라고 불리는 물건이다(…)[1] 한국 드라마를 보는 외국의 시청자들에게 고대 한반도의 갑옷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상황.

드라마 한편 나올때마다 갑옷고증으로 신나게 욕먹는 게 일상다반사가 되다보니 다들 포기하면 편해 그러려니 했지만 결국 방송사 측에서도 이 문제를 느꼈는지 2010년대 들어서 제작되는 사극은 그나마 고증 자료를 슬쩍 엿보기라도 한 듯한 갑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욕먹는 것은 게속 욕먹지만 근초고왕(드라마)대왕의 꿈은 드라마 본편의 평가와는 별개로 갑옷만은 상당한 수준으로 재현해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2. 청동기시대

가장 오래된 만주-한반도 지역 갑옷은 청동기 시대인 청동기시대 문화층이며, 이층의 연대는 B.C. 2000년기 후반에서 1000년기 전반(약 B.C10세기 전후)에 드는 것으로 보인다. 함경북도 무산 호곡유적에서 출토된 뼈찰갑편이 이 시대의 유물에 속한다. 청동기 시대인 2기층 40호 집자리에서 발견되었는데, 부서진 흔적이 있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2003년 길림성 쌍요(솽랴오)시의 후태평 유적에서도 뼈찰갑편이 발굴되기도 한다.#

이 갑옷편들은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문화인 세이마-뚜르비노(seyma-turbine)문화의 찰갑편들과 유사하며#, 또한 오늘날에도 제작법이 전해지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원주민들(추크치족, 틀링깃족 등)의 갑옷과도 매우 유사하여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투구로는 기원전 8~7세기로 추정되는 만주 오금당 돌곽무덤에서 출토된 투구편 일부가 있는데, 비록 1/4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남은 조각의 모습이 몽골과 연나라 지역에서 발견된 투구와 유사한점을 감안하였을때 북방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타 부속갑으로는 BC 1000년 전반기에 해당하는 함경남도 북청군 토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통토시가 있다(비갑으로 추정됨).#


3. 고조선 멸망무렵~ 원삼국시대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교역, 혹은 한사군 설치이후 유입된 한나라계통의 갑옷이 발굴되기도 했다. BC2~B.C1세기경 낙랑무덤인 평양 정백동 219호에서는 가죽찰갑편이, 평양 정백동 1호 무덤에서는 현존 국내유물 중 최고로 오래된 철제 찰갑편이 발굴되었다.(출처: 북한문화재 자료관)

기원전후의 갑주 유물로는, 부여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의 M56, M67, M97 무덤에서 출토된 종장판주 3점과 한나라 어린갑으로 추정되는 찰갑이있고, 한성백제로 추정되는 인천공항 옆 운북동 레져단지 건설도중에 발굴된 운북동 유적에서 출토된 찰갑편이 있다.# 한편 한성백제 유적인 경기도 가평 대성리 유적인 40호 집자리, 44호,46호,49호 수혈주거지에서는 한나라때의 어린갑으로 추정되는 찰갑편이 출토되었다.(출처: 군사연구 131권 수록 논문 "百濟甲胄의 形成과 그 背景(백제갑주의 형성과 그 배경)/이현주/ 부산임시수도박물관장)

그리고 4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많은 수량의 철제 갑주유물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고분 부장품과 함께 부장되기 시작했다.

4. 삼국시대

4.1. 갑옷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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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판갑

찰갑이 퍼지기 전까지 삼국시대 초기에 사용된 양식. 판갑은 결합 방식에 따라 혁철판갑(가죽끈으로 결합)과 정결판갑(리벳못으로 결합)으로 나뉜다. 발굴 빈도로 볼 때 정결판갑이 좀 더 높은 빈도로 나오고 있는 편.

한반도 남부에서 자체적으로 개발된 것이 종장판갑이며, 이에서 더 발전한 횡장판갑 계열 갑옷.. 이른바 대금계 갑주에 대해서는 한일 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건너가거나 한반도의 제철 기술을 습득한 현지 기술자들이 개발한 일본계 갑옷으로 분류하고 있다.[2][3][4] 고대 한국에서는 일본보다 앞서 더 방어력이나 활동성에서 유리한 찰갑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사용했던 후기형 판갑에 해당하는 갑옷들은 일본에서 제작한 것을 수입해 사용했거나, 한반도 내에서 해당 디자인으로 제작하여 사용했다는 것이 한/일 학계의 통설. 찰갑의 경우 제작, 보수가 어려운 점을 볼 때 찰갑이 보급된 이후에도 일반 보병용 방어구는 필요할 경우 판갑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한국, 일본의 판갑의 경우 모두 입고 벗기 편하도록 문짝처럼 열리는 형식으로 만들어 오른쪽 옆구리 부분에 가죽띠나 경첩(돌쩌귀) 형태의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다. 전자는 종장판갑에서, 후자는 삼각·횡장판갑에서 사용된다. 참고로 찰갑은 자체적으로 유연성이 있기 때문에 따로 개폐보조장치를 달지는 않았다.

4.1.1.1. 종장판갑(수신판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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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15개의 세로로 긴 철판을 연결해서 제작된 것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목갑/피갑 바로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판갑 중에서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며, 국내 출토 빈도도 가장 높게 나온다. 제작에 사용된 철판이 갑옷마다 다소 들쭉날쭉한 편인데, 당시의 제작 환경이나 제조기술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5] 그러므로 이는 한반도를 대표하는 양식으로써, 3세기부터 5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에 고르게 분포하였다.

백제나 고구려 지역,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는 사실상 거의 출토되지 않고 낙동강 하류 지역인 김해와 부산, 그리고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만 출토되고 있어, 가야와 신라만의 독자적인 갑옷으로 분류된다.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으며, 갑옷 테두리에 깃털로 장식하는 등 장식성이 많이 가미된 갑옷이다. 또한 세부적인 용어를 한복에서 차용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4.1.1.2. 방형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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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형의 지판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든 판갑으로, 역시 종장판갑처럼 목갑, 피갑 바로 다음 단계에 있는 원시적인 형태의 갑옷이다. 종장판갑과는 달리 후술할 소찰주(비늘투구)와 함께 중국에서 그 형태와 양식을 들여와 4세기 백제에서 만든 갑옷이다.

4.1.1.3. 장방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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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 7단으로 구성되고 직사각형의 지판 여러장을 가로로 긴 테두리에 고정시킨 형태이다. 각 지판은 가죽끈으로 결합했으며, 방형판갑과 종장판갑의 제작기법이 혼재되어 생겨난 판갑으로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서 사용된 왜계 판갑인 이른바 대금계 판갑의 가장 초창기 형태에 해당한다.

4.1.1.4. 삼각판갑(삼각판단갑)


삼각형의 지판을 이어붙여 만들었다. 부산·김해지역과 고령·합천 지역에서 출토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상당수 출토되고 있어서 고대에 이루어졌던 한일간의 교류를 반증하는 귀한 자료이다. 국내에서 출토되는 대금계 판갑 중에서는 가장 출토빈도가 높다.

4.1.1.5. 횡장판갑(횡신판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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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판갑과 동일한 형태로, 이 역시 가로로 긴 철판을 이어붙여 만들어졌다. 고령과 합천 그리고 망이산성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더하여 일본에서도 다수 출토되고 있으며,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의 갑옷으로 재현되었다.

4.1.2. 찰갑(괘갑)



복원된 가야의 찰갑

미늘갑옷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여러개의 철판들을 연결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된 갑옷 형태로써, 고구려에서 한반도 남부와 나아가 일본으로 전래되었고, 가야는 고구려의 것을 좇아 찰갑으로 완전히 개량하였다. 이를 일본에서는 괘갑(挂甲)이라고 한다.

고구려(북방)계 찰갑은 부품수가 많고 관리가 힘들었지만 그 유연함으로 인해 화살에 대한 방어력이 남부식 판갑에 비해 월등했다. 이는 현대에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갑옷에 대한 화살 시험 사격에서도 확실히 드러났고, 제철 규모가 현대에 비해 극히 작고 기술력이 떨어져 그 품질 균일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4~5세기 경의 철판으로 만든 판갑이라면 더욱 심한 결과가 나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고구려의 갑옷으로 사용했다.

4.2. 투구(주)

4.2.1. 종장판투구(몽고발형주)



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붙인 형태의 투구. 마치 고대 로마의 투구를 보는 듯한 형태가 특징으로, 원형의 복발(투구의 꼭대기부분에 있는 일종의 뚜껑)의 형태가 지닌 북방계 투구와의 유사성으로 몽고발형주라고도 불린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발굴 빈도를 보이고 있으며, 한반도를 대표하는 투구 형식이다. 삼국시대 모든 국가가 종장판주를 주력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보다 적지만 일본에서도 출토된 예가 있다. 크게 철판이 일반적인 돔을 형성하는 종장판주와 철판이 S자로 휘어있는 만곡종장판주로 나뉜다. 그리고 볼가리개와 수미가리개(뒤통수 가리개)가 달려있으며, 이들 가리개는 초창기에는 2~3매의 철판을 연결하거나 투구와 같은 종장판으로 만들다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찰갑과 같은 소찰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소찰 형식은 철판과는 달리 유동성이 있어 활동하기에 훨씬 유리했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고구려군의 투구로 사용했다.

본래 종장지판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들지만 합천 옥전 고분군 28호 출토품은 유일하게 원두정으로 고정된 형태이다(리벳팅).

4.2.2. 비늘투구(소찰주)



철판을 이어붙여 만든 투구. 종장판투구에 비하면 출토 예가 드문 편이며, 중국에서도 소찰주가 출토된 예가 있으므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관모 형태의 복발이 존재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출토된 유물 자체가 적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 투구로 사용했다. 드라마 계백 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관모가 달린 투구를 사용하는데, 잘 쓰지도 않을뿐더러 일단 참고는 한 것 같지만 비늘투구라고 보긴 좀 이상하다.

4.2.3. 차양투구(미비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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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판주처럼 세로로 철판을 이어붙인 뒤, 이에 차양을 단 형태이다. 고대의 투구 중 가장 화려한 편에 속한다. 이 투구는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양식으로써, 한반도 남부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국내에는 백제와 가야지역에서 출토되나, 그 예가 적어서 일본 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이 일본에서 만든 것을 국내로 역수입했다는 학설을 제시하였고, 국내에서도 대체로 그런 학설을 따르고 있다.[6][7]

드라마 근초고왕과 계백, 광개토대왕에서 백제 병사 및 장군의 투구로 사용했다.

4.2.4. 충각부주


특징적인 부품인 이마에서 정수리에 이르는 세로로 긴 철판을 중심으로 횡장판 또는 삼각판을 이어붙여 만든 투구이다. 역시 고대 일본을 대표하는 투구 형식이며, 한반도 남부에서 사용하였지만, 차양투구처럼 출토 예가 적다. 가야 무사를 재현한 자료에서 종종 보인다.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백제 병사의 투구로 사용.

4.2.5. 이형주

4세기 신라의 무덤인 경주 사라리 5호에서 출토된 신라투구이다. 장방형 철판을 가로로 휘어 배치한 뒤, 원두정 으로 고정한 투구인데, 비슷한 투구를 찾을 수 없어 이형주라고 한다. 코가리개나 볼가리개 부분등이 유사하여, 종장판주와 크게 다른 형태는 아니다.

4.2.6. 원주투구

4세기 말 5세기 초로 추정되는 고구려 사찰 정릉사지의 우물퇴적층에서 발견된 투구이다. 부식이 심하지만 투구 정개부에 리벳팅한 흔적과 고리를 철사로 고정한 장식부분은 구분이 될 정도이다.

4.2.7. 농오리산성투구

6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평안북도 태천군 농오리산성 출토품이다. 철판의 형태(화염문철판)와 리벳팅 기법 등이 후대 투구(발해-조선중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2.8. 금동장투구

6세기 후기로 추정되는 경상남도 합천군 옥전고분군 M3호 고분에서 출토된 투구이다. 부식전에는 금동으로 장식되어 화려했을 것이다.

화염문철판 여럿을 원두정으로 이어붙이고, 유사한 미간부를 근거로, 농오리산성 출토품같은 고구려 투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4.3. 부속갑옷

4.3.1. 어깨가리개(상박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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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서 팔꿈치까지(상완부) 보호하는 부속이다. 판갑, 찰갑과 세트로 사용되며, 판갑에는 긴 철판을 휘어 겹쳐서. 찰갑에는 쇠비늘들을 일렬로 늘어놓아 만들었다.

단, 국내에서 판갑용 상박갑이 발굴된 예는 극히 드물다. 종장판갑과 세트로 이루어진 상박갑은 현재까지 출토된 예가 없으며, 횡장판갑용 상박갑만이 일부 발굴되었을 뿐이다. 일부 복원 자료에서는 공격에 노출되기 쉬운 상완부분 방어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인지 종장판갑에도 상박갑을 적용시킨 경우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 검증된 고증은 아니고, 추측의 영역에 가깝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종장판갑에는 가죽으로 만든 상박갑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내기도 했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직 불명이다.

4.3.2. 치마갑옷(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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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치마
그림에서 판갑 아래에 보이는 치마 형태의 갑옷. 허리 아랫부분을 보호하는 부속이다. 실제로 상갑이 짧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고분 벽화를 참조하여 만드는 찰갑 고증에서 흔히 보이는 바지 형태의 다리를 전부 감싸는 갑옷 부속의 경우 실제로 제작하여 입게 될 경우 상식적으로 말에 올라타는 것은 고사하고 걸어다닐 때에도 활동성이 매우 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사실은 바지가 아니라 앞뒤로 트임이 있는 갑상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존재한다.

4.3.3. 목가리개(경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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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목을 보호하는 데에 쓰이는 부분. 목가리개는 삼국시대 갑옷의 특징적인 부품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종장판갑에 사용된 목가리래는 못을 사용해 완전히 갑옷에 붙어있지만, 찰갑에 사용된 목가리개는 가죽끈을 사용해 갑옷과 엮어서 연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찰갑용 목가리개 연결에 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각 지판을 연결할때는 가죽끈을 엮어서 사용하거나 원두정(리벳)을 사용하였는데, 초창기에는 가죽끈을 사용하가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원두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두정을 사용한 목가리개는 판갑처럼 개폐보조장치가 달려있는데, 철제 고리경첩 혹은 가죽끈 경첩이 사용되었다. 가죽끈으로 만든 경첩이 제작의 편의성이 있어서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드라마 연개소문과 근초고왕, 계백(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재현됐다.

목가리개는 조선 중기까지 찰갑경번갑 등에 쓰였고, 조선시대에는 이를 가리켜호항(護項)이라고 불렀다.

4.3.4. 팔보호대(비갑)


토시 형태로 팔목을 감싸서 보호하는 갑옷. 발굴 당시에는 다리에 착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팔에 착용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기에 들어서 찰갑 형식의 비갑도 나온다.


5.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독자적인 형식의 갑주를 고수했으나, 원나라의 침략 이후로 사회가 원나라의 문화를 급속하게 받아 들이면서 이를 따라 갑주도 비슷하게 변한다. 사실상 고려 후기의 갑주와 조선시대의 두정갑과 그 투구는 원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나라

5.1. 갑옷 양식

고려 시대의 주된 갑주 양식은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찰갑경번갑그리고 쇄자갑이다. 경번갑은 쇠사슬과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며, 쇄자갑은 서양의 체인메일처럼 쇠사슬을 이어 만든 갑옷이다.


고려시대 정지 장군의 경번갑 유물.


복원된 정지 장군의 경번갑


여말선초의 쇄자갑 무장[8]

5.1.1. 투구


이 투구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상당히 흔했던 첨주형 투구라고 한다. 드라마 용의 눈물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영남과 기타 제장들이 쓰고 나온 투구가 바로 이 투구라고 할 수 있다. 첨주형 투구의 제작 방법은 긴 철판 4개가 세로 방향으로 둥글게 배열되고 철띠와 쇠못으로 이를 고정한다고 한다.

6. 조선 시대

6.1. 초중기


책 '조선전쟁 생중계'의 일러스트 중 하나.


부산 동래부성 해자에서 발굴된 찰갑의 복원품

초기에는 찰갑(철제,피제,지제)이 가장 많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 실록에서 다른 갑옷은 고유의 이름을 가졌지만, 찰갑만은 그냥 갑이나 피갑 또는 지갑 그리고 철갑등 재료만 구분해서 불렸다. 조선시대의 찰갑은 고구려 때 쓰이던 찰갑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 외에도 쇄자갑, 경번갑, 두두미갑, 그리고 엄심갑 등이 있다.


두두미갑. 갑찰이 없는 의장용이다.#

세종실록 오례의 병기조 부분에 묘사된 그림을 통해 당시에 성행했던 갑옷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기존에 두두미갑만 존재하던 의-두정형 갑주(직물에 갑찰을 두정으로 고정한 형태의 갑옷 종류를 통틀어 일컫는 용어)는 이때부터 두정갑과 두두미갑 그리고 황동두정갑으로 세분화 된다.

유물로는 유성룡의 가죽 찰갑 갑옷이 대표적으로써, 이는 조선시대의 가장 오래된 찰갑 유물로써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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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유물로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중에 발견된 수안동 찰갑이 있다.

6.2. 후기


임진왜란 종전 후 전쟁에서 겪은 갑옷과 무기의 장단점을 따져, 기존의 찰갑에 비해 유지와 보수가 수월하고, 오히려 뛰어난 방어력을 보여준 두정피갑이 점차 최신 방호구로써 자리잡는다. 원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투구의 형태와 장식까지 상당히 유사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같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청나라의 갑옷과도 유사해진다. 그러나 호항(목가리개)이 몸에 고정되는 형태 등을 한 원나라 및 청나라 갑옷과는 달리, 한국의 갑옷은 분리되어 있어 유연성을 강조하며, 장식에 있어서도 청나라와는 재료나 문양의 배치 등이 다르다.


또한, 오늘날 조선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두석린갑도 이때 등장하였는데, 이는 두석으로 된 비늘 갑옷을 의미한다. 어린갑 또는 용린갑으로 불리는 갑옷들도 두석린갑과 같은 갑옷이거나, 거의 유사한 갑옷들이다.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고위급 장수는 두석린갑을, 중간~하위 계급 장수들은 두정피갑을 입고 있는 것으로 흔히 묘사된다. 물론, 두석린갑은 실제 전투용 이라기보단 의장용의 성격이 강했으며 방어력이나 내구성 자체도 두정갑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두정갑 외에 지갑(=엄심갑, 조선 중기부터는 지제찰갑이 쓰이지 않아 지갑으로 부름)과 면갑 그리고 삼승갑 등이 군사들의 갑옷으로 널리 쓰였다.


면제배갑 유물


조선 말기에는 면제배갑, 삼승갑주, 흉갑(철엄심갑으로 추정), 면주 그리고 등투구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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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애당초 제작진이 '퓨전'을 지향한다며 고증이란걸 염두해두지 않은 작품이긴 하지만.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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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금계 갑주의 경우 종장판갑의 완전한 직계 후손은 아니고, 고대 중국계 갑옷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백제의 방형판갑이 종장판갑과 함께 그 형태, 제작기법의 혼재가 이루어져서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쉽게말해 짬뽕. 아니, 사생아.. (참조)
  • [3]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연구사는 "당시 제철/갑주 제작기술은 가야에 있었지만 실제 제작은 일본에서 이루어졌을 수 있다." 고 이야기했다.
  • [4] 한국 학계에서는 백제, 가야 지방 고위 계층의 무덤에서 대금계 판갑이 발굴되는 이유에 대해 일본과의 교류와 군사적인 동맹관계를 상징하는 위세품(군사적인 과시에 의한)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한반도 출토 왜계 갑주(倭係 甲冑)의 분포와 의미/김혁중>
  • [5] 이를 들어 몇몇 일본 학자들은 고대 한국의 제철기술 수준이 조악하다는 주장으로 연결하기도 하는데, 까놓고 제철기술의 전파 경로를 따져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 실제로 종장판갑이 생산될 당시 일본은 쇠를 거의 다루지 못했다.
  • [6] 고대 한·일의 관계나 갑옷을 비롯한 복식사적(한복, 기모노 등) 발달 양상 등을 볼 때 이 투구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견해가 있으나 유물의 부족 등의 문제로 아직은 소수 의견이다.
  • [7] 일본 현지에서는 종장판주와 미비부주가 혼합된 몽고발형 미비부주(종장판 차양투구)라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투구도 소수 발굴되고 있어서 현지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일단 한일 교류 과정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 [8] 출처는 책 '조선전쟁 생중계' 의 일러스트 중 하나. 일러스트 작가의 블로그를 참조해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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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14: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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