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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

Contents

1. 개요
2. 계급
3. 군가
4. 광복 이후
4.1. 광복 이후 관련 인물들의 사건
5. 출신인물들
6. 참고항목

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에 창설되었던 직속 군대. 1939년 창군된 한국독립당 당군을 기반으로 충칭에서 1940년 9월 17일 결성되었다. 초기 인원은 30여 명이었으나 이는 한국독립당 내부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장교급 인사만 참여한 것이었으며 이후 사병을 모집하였다. 1942년에는 김원봉과 함께 잔류하던 선의용대 300여 명을 흡수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1,000명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1]

이 부분은 많이 안타까운 사실인데, 사실 광복군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의 규모보다도 못했던 게 현실이었다. 광복군 창설 초창기에는 청년들이 모여들지 않아 30명의 간부들로 편제만 짜서 결국 '병사는 거의 없는 군대'를 만들었던게 시초였다. 나중에 1942년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300여명이 합류한 이것이 광복군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전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한 김원봉은 화북의 조선의용군과 통합시켜 규모를 확대시키고자 노력했으나, 임정의 원로계 인사들의 반발로 이게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그나마 1945년 일제패망 직전이 돼서야 주석인 김구가 건상을 옌안으로 보내 김두봉과 연락맺을려했지만...) 남의사출신도 많다.

때문에 전면전의 전투 역할은 참여하지 못했으며, 중일전쟁이나 미얀마 전선에서 첩보와 통신, 한국인 회유 등의 업무를 맡았다. 중국 국민당은 "한국 광복군 9개 준승 사항" 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했으며, 이러한 제약은 1944년 말에 가서야 풀렸다. 즉, 초창기에는 중국군의 지휘를 받다가 광복 직전에 지휘권을 환수받은 것. 사실 이에 대해 뭐라고 하기도 힘든 것이,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아프리카 어느 망명 정부가 들어와서 산골짜기에 사령부를 차리고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군사활동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닌 셈이다.[2]

이 즈음 미국 OSS(오늘날의 CIA)와 접촉해 연합 훈련을 받고 50여 명의 대원을 국내 진공 작전에 투입하려 하기도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한편 일부는 임팔 작전에 영국군과 함께 참전하기도 하였다. 김구의 비서인 선우진고려대학교 전 총장이었던 김준엽 등의 인사들이 광복군 출신.

일부에서는 일본이 며칠 조금 늦게 항복 선언을 했다면 광복군이 국내 진공 작전(일명 독수리 작전)에 성공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의 힘으로 광복을 해서 지금처럼 분단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주장인것이, 당시 광복군은 많아야 1,000명 수준으로 광복군이 진공 작전을 했다고 하더라도 해방시킬만한 힘/능력이 없다고 보아야 맞다.[3]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2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헌병 제외). 하지만 체 게바라의 경우 17명(12명이라는 설도 있다)으로 시작해서 쿠바 혁명을 완수한 바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광복군 요원들이 상륙 후 생각보다 선전했다면 어느정도의 후방 교란은 가능했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만약에 당시로서도 생환 가능성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던 작전이었다.

또, 만약에 한반도의 일부를 점령한다고 가정했을 경우(그럴 확률도 낮지만) 당시 파죽지세로 진격해오던 붉은 군대의 먹잇감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바르샤바 봉기까지 했던 자유 폴란드군도 소련은 시크하게 씹고 자기네 괴뢰정권을 만들었는데, 그보다 세가 더 약했던 독립군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한반도 전체는 공산화 테크를 타고 지금 우리는 이런 사이비 종교를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병력차이가 크게 나는 일본군도 상대하기 힘들어 죽겠는데 소련군과도 전투를 벌이면 그냥 전멸하는 것 외에는 다른 답이 나오기 힘들어 보인다.

8월 18일, 김준엽, 장준하, 능서 등 광복군 대원들이 미 고문단과 같이 미군 비행기를 타고 국내진입을 시도했으나 일본군격렬한 저항탓에 발길을 돌려야했다.

2. 계급

계급장은 이 블로그를 볼 것. 계급 체계는 상당 부분 대한제국군에서 따왔다.

  • 장관급 장교
    • 정장
    • 부장
    • 참장
  • 영관급 장교
    • 정령
    • 부령
    • 참령
  • 위관급 장교
    • 정위
    • 부위
    • 참위
  • 준사관
    • 준위
  • 부사관
    • 복무정사
    • 정사
    • 부사
    • 참사

    • 상등병
    • 1등병
    • 2등병

3. 군가

여담으로 자유 프랑스 국가로 쓰이기도 했다.

4. 광복 이후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국민당은 한국 광복군의 이름 아래 패전 후 포로 혹은 항복한 일본군 부대 내 조선인들을 자신들의 군사 세력으로 편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11월 장제스의 발언 마찬가지로 중국 공산당 또한 선의용군의 이름으로 패전 후 갈 곳을 잃은 일본군 내 조선인들을 규합하였다(그리고 조선의용군은 2~3만 명 수준까지 성장하여 6.25 전쟁조선인민군으로 편입되게 된다.). 장준하베개에 의하면 아편장수나 일본군 위안부 조선인 포주도 있었다고 한다.
6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논하기는 복잡하지만, 이러한 일들의 영향으로 가짜 광복군 서훈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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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후 광복군들 대부분이 개인자격으로 귀국을 해야하는 아픔을 겪었고 국방경비대 창설에서 본위주장으로 광복군들 스스로가 반발하여 입대를 대거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졌다.[4] 하지만 광복군들 대부분이 대한민국 국군에서 장교와 부사관에 입대함으로서 한국전쟁때 한국군에서 활동했다. 거의 대부분의 광복군 출신들이 한국군에 입대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숫자 자체가 워낙에 적은 탓에 군에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이 많았지 광복군들도 분명히 참여했다.[5]

이후 광복군이 조선을 광복(해방)시키기 위한 거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참여해서 건국실천원을 양성하는 일을 했다(주로 강사로써 교육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재하, 조소앙, 엄항섭 등. 김학규도 강사로 있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강사명단 언항섭은 사실 엄항섭인데, 오타가 났다. 평화재향군인회에 있는 명단을 보면 장덕수김활란도 있다. 졸업생(1~2개월 단기 강습형식)은 건국실천원양성소 졸업생 명부는 해당논문 후반부에 있다.#

4.1. 광복 이후 관련 인물들의 사건

  • 월북, 양민학살 최덕신 : 그는 광복군출신으로 장준하우전과 달리 중국군관학교 출신으로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했다. 그래도 해방 이후에는 육군사관학교에 입소(…)해서 소위가 되었다가 3년도 안 되어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는 초특급 승진을 한다. 그래서 한국전쟁때 사단장도 되었지만...거창학살 사건과 관련되었다(…). 물론 신성모도 책임이 크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선 반정부 활동(후술)을 하다가 1986년, 부인과 함께 월북했다.

5. 출신인물들

6. 참고항목

  • 대한민국 국군 - 뭔가 좀 웃길 지 모르겠지만, 건군기 당시 대다수의 인원이 일본군 학병, 지원병, 조선인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더라도 광복군과 군인 출신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국군 창설에 참여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정부와 군 스스로도 일단 국군의 뿌리를 대한제국군과 구한말 의병, 광복군이라 자처하고 있다.# 더군다나 현 대한민국 정부 또한 구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 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논란이 있을진 모르나 어쨌든 일단은 그렇단 얘기다. 광복군 다 해봐야 1천도 안되는데 소수일수밖에 학교의 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희전믄(1915년)보다 세브란스의전(1885년)으로 역사를 30년이나 앞당긴 연세대학교와 비슷하다

    특히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 창군시부터 일본군 출신자들이 아닌, 독립운동가인 손원일 제독을 위시한 상선사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도 광복군 참모처장 출신의 최용덕 장군의 주도하에 창군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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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의 규모는 쭉 줄어드는 추세였다. 1920년 경 독립군은 약 4,000여 명 규모였으나 일본이 만주를 점령해 퇴각하고 이어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반토막 이하로 줄어들었고, 만주에서 게릴라전을 펼칠 당시 국 독립군의 병력은 약 1,600여 명 정도였다. 그나마 한인 거주자가 많았던 만주에서 이 정도였는데 중국 본토에서 사람을 모으려니...
  • [2] 단 한국이 중국 침략의 선봉기지 역할을 했고, 장개석은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윤봉길 의사 의거를 보고 독립운동을 나름대로 도와주던 상태였다.
  • [3] 단, 당시 국내에서 나름 비밀결사 형태로 활동했던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음은 염두해둬야겠지만 워낙 전력차가 압도적이고 설령 이렇게 저렇게 일본군을 상대로 이긴다고 해도 뒤이어 진주해 오는 소련군은 절대 감당불가다. 큰 변수는 되지 않을듯. 냉정하게 보자면 아무리 패전 직전의 일본군이라 해도 광복군 1000명 정도 가지고는 조선 주둔군조차 이길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었다. 그간 광복군이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선전해온것은 어디까지나 우수한 게릴라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국내 진공을 한다면 좁은 한반도에서 마냥 게릴라전만 할수 있는게 아니라(애초에 독립군이 만주로 나가서 활동했던게 이거 때문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반드시 일본군과 정면대결을 했을수밖에 없는데, 이정도 전력차로는 절대 이길수가 없다.
  • [4] 덕분에 한국군 초기 고위장교단의 형성에서 광복군의 비중이 극도로 낮은 것은 이 이유때문이다.
  • [5] 국사편찬위에서 낸 건군기 장성들의 회고 책자에 따르면 광복 당시에 군경력자를 보면 일본이나 만주에서 군생활을 경험한 사람은 약 40만, 중국 등에서 경험한 사람은 3만5천 수준이었다고 한다.
  • [6] 물론 김정렬처럼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도 있었다. 항공계 인물들이 중국과 일본을 빼면 극소수인 탓. 최용덕 장군도 중국군에서 복무하면서 동시에 광복군 참모처장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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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3 14: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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