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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화

last modified: 2015-04-05 06:51:36 by Contributors


한대화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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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시절 아....

한대화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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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선동열과 같이 나와 시구와 시타를 하고 인사하는 장면.


2013년, 기아 타이거즈 2군 총괄코치라는 호칭으로 타이거즈 공식 트위터에 올라온 사진[2]

이름 한대화(韓大化)
생년월일 1960년 7월 8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대전광역시
출신학교 대전고-동국대
포지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OB 베어스 1차 3지명
소속팀 OB 베어스(1983~1985)
해태 타이거즈(1986~1993)
LG 트윈스(1994~1996)
쌍방울 레이더스(1997)
지도자경력 동국대학교 감독(1998~2003)
삼성 라이온즈 타격코치(2003~2004)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2004~2009)
한화 이글스 감독(2010~2012)
KIA 타이거즈 2군 총괄코치(2013)
KIA 타이거즈 수석코치(2013~2014)

역대 전적
경기
총계 371 147 218 6

1986 ~ 1991년 한국프로야구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한대화(해태 타이거즈) 송구홍(LG 트윈스)
1993 ~ 1994년 한국프로야구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송구홍(LG 트윈스) 한대화(해태 타이거즈) 홍현우(해태 타이거즈)

1988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한대화(해태 타이거즈) 허규옥(롯데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김인식 (2005~2009) 한대화(2010~2012)[3] 김응용 (2013~2014)

OB 베어스 등번호 5번 (1983~1985)
프로야구 개막 한대화(1983~1985) 박창언(1986)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8번(1986~1993)
양승호(1983~1985) 한대화(1986~1993) 박재용(1994~1999)
LG 트윈스 등번호 9번(1994~1996)
김상훈(1984~1993) 한대화(1994~1996) 이병규(1997~2006)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8번(1997)
정기창(1996) 한대화(1997) 윤재국(1998~199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6번 (2004~2009)
박정환(1994~2000) 한대화(2004~2009) 김한수(2010~)
한화 이글스 등번호 80번(2010~2012)
한대화(2010~2012) 전대영(2013~2014)

한대화와 한 대화

Contents

1. 소개
2. 현역 시절
3. 지도자 시절
3.1.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
3.2.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3.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3.3.1. 2010 시즌, 안습의 꼴칰
3.3.2. 2011 시즌, 野王時代
3.3.3. 2012 시즌, again 2010? again 2010!!
3.3.4. 총평
3.4.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수석코치 시절
3.4.1. 2013년
3.4.2. 2014년
4. 김성근의 제자???
5. 기타
6.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현역시절의 모습.미소가 아름다운 남자, 누구세요??

별명은 해결사.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달리 찬스에 강했던 원조 해결사.

선수 시절의 등번호는 5번(OB)-8번(해태)-9번(LG)-8번(쌍방울)이다.

2. 현역 시절

대전고-동국대를 졸업했으며 동국대 졸업반이던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국가대표로 선발, 사실상 결승이나 다름없던 일본과의 최종전[4]에서 2-2로 맞선 8회말 2사 주자 1, 2루 상황에 타석에 나와 풀카운트 씨름끝에 오른쪽 폴대를 강타하는 결승 쓰리런 홈런으로 대한민국 야구 사상 2번째 세계 대회 우승[5]을 이룩하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날 이후 한대화는 해결사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진다. 그리고 이때 홈을 돌고 나서 상심한 일본투수의 팬티끈을 잡아당겼다!...고 불암콩콩코믹스 한대화 편에서 밝히고 있다.

1983년 고향 팀인 OB 베어스[6]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시즌 개막전에서도 3점 홈런을 기록하며 라뱅 쓰리런3점 홈런의 사나이라는 묵직한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그 해 타율 0.272에 5홈런이란 평범한 성적에 그쳤고, 1984년과 1985년에는 오히려 타율이 2할대 초반으로 뒷걸음질치며 팀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1985년 시즌 직전에는 대전에서 개인훈련 도중 뒷산 약수터의 돌려쓰는 바가지가 화근이 되면서 간염이 발병, 체력 관리에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고 거기에 임태훈처럼 척추 분리증을 앓고 있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OB가 재일동포 출신 내야수 창언을 영입하면서 한대화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특히 부상으로과 질병으로 인해 훈련을 소화할 수 없게 되어 훈련덕후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과 불화가 생기게 된다.

결국 1986년 시즌을 앞두고 양승호, 기선과의 2:1 맞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당초 한대화는 새로운 고향 팀인 빙그레 이글스로의 이적을 원했지만, 그 당시 빙그레 이글스는 신생구단이라 선수층이 극히 얇았던 탓에 OB 베어스로서는 한대화와 맞바꿀 만한 전력감이 없었던 바 해태 타이거즈와의 트레이드를 적극 추진한 것이었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한대화는 결국 임의탈퇴로 몰리게 되었다. 이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임의탈퇴 사례이다. 하지만 동국대학교 시절 은사였던 김인식 당시 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의 설득 끝에 해태 타이거즈 이적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이후에는 OB 베어스에 있을 때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며 대활약, 왕조를 이루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주전 3루수로 활약한다.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였고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한 초반에는 2루수로도 출전했으나 붙박이 3루수로 자리 잡으면서 타격도 살아나고 수비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 3루수였던 이순철중견수로 자리를 옮기고 중견수였던 김일권은 벤치 신세로 전락하는 포지션 연쇄이동이 일어났다.[7]

한대화가 해태행을 거부했던 것은 고향팀인 빙그레로 가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해태 특유의 빡센 팀 분위기와 김응용 감독의 철권통치를 두려워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한대화가 해태 유니폼을 입자, 김응용 감독은 되려 한대화에게 훈련할 때 시간 맞춰 올 생각 말고 오후에 느즈막히 운동장으로 오라 지시했다고 한다. 이는 간염을 앓고 있던 한대화가 늦잠을 자고 몸을 추스리도록 한 김응용 감독의 따뜻한 배려였다... 간질환 환자에게 충분한 휴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보약이다.

이후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반드시 실력을 톡톡히 보여주는 클러치 히터의 면모를 과시하며 김성한, 이순철과 함께 당대 최강의 타선을 이루며 1986년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6회 우승에 큰 공을 세운다. 3루 수비에 있어서도 좌우 수비폭은 넓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글러브 핸들링과 정확한 송구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연봉 문제 등으로 구단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한대화는 매년 연봉 협상에서 함께 주축 타자로 활약했던 김성한에 준하는 대우를 해줄 것을 해태 구단에 요청하였으나, 구단의 대우는 항상 그에 미치지 못해 관계가 좋지 못한 편이었다. 니 연봉 줄려면 과자를 얼마나 팔아야 되는지 알아? 그 이유로 한대화가 김성한같은 전라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랬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그를 뒷받침하는 설로, 공식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해태에 있을 때도 고향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트레이드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한편 김응용 감독과의 관계 악화가 트레이드의 원인이라 보는 이들도 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1993년 올스타전 때 김응용 감독이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한 것. 당사자들은 그저 장난삼아 저지른 해프닝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카메라에 잡힌 장면을 보면 꽤나 살벌한 분위기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하여간 1994년 LG로의 트레이드는 이런 상황을 기반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1993년 시즌 종료 후 팀 동료 신동수와 함께 김상훈, 이병훈과의 2:2 트레이드로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 한대화는 LG 트윈스에서 팀의 4번타자를 맡으며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신인 3인방과 노찬엽, 김동수 등의 중견급 타자들과 더불어 견고한 타선을 구축하여 신바람 야구의 한 축으로 1994년 한 번 더 한국시리즈 우승의 축배를 들었다. 개인통산 총 7회째 우승이었다.

당시 경기 도중 중요한 시점에 한대화가 나오면 구장이 일순 조용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한대화에 대한 믿음이 컸다. 프로야구의 재미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줬다고 할 수 있는 선수. 이런 이유로 인해 당시 언론에서 붙여준 별명이 해결사. 확실히 저 별명 하나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선수.

1996 시즌 후 투수 신영균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되나, 당시 노장이었던 한대화에게 이전같은 3루 수비는 보이기 힘들었고 지명타자 슬롯도 마땅하지 않았다. 게다가 쌍방울 트레이드 당시 감독은 김성근. OB 베어스 시절 갈등이 있었던 사이었는데 김성근식 훈련에 맞지도 않았고, 소화도 하기 힘들었던 한대화는 구석에 몰리고 만다. 한대화는 은퇴를 결심하고, 이에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은 3루수 레전드인 한대화에게 은퇴식을 준비해 주려 했으나 김성근감독이 쌍방울에서 한 것이 없는데 무슨 은퇴식이냐며 거절했다. 결국 한대화는 방출로서 쓸쓸하게 은퇴하고 만다.

통산 성적으로 1983~1997년까지 15시즌동안 1,331경기에 출장, 타율 0.279, 홈런 163, 타점 712, OPS 0.820을 기록. 커리어 하이인 1990 시즌에는 타율 0.335, 홈런 15, 타점 86, OPS 0.937을 기록.

그 외에도 역대 최다 골든글러브 수상(8회, 양준혁과 타이.), 6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이라는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부문 1위는 이승엽의 7년 연속 수상 기록.

3. 지도자 시절

3.1.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

쌍방울 레이더스를 끝으로 97년 현역생활을 마감하고 그해 겨울에 바로 동국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한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었던데다가, 프로 출신 1호 대학 감독이었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게다가 당시 나이가 37세로 상당히 젊은 나이.

그러나 2000년에 체육특기생 입학과 관련, 학부모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약식기소되었다는 흑역사가 존재한다.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사건 이후 2003년까지 동국대 감독으로 재직. 이 사건은 완전히 잊혀지는 듯 했으나…. 이후에 한대화까들에 의해 성지가 발굴되었다.(…)

3.2.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2004년 해태 시절 둘도 없는 선후배 사이였던 선동열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하자 삼성의 타격코치로 영입된다. 그리고 2005년부터는 술친구수석코치로 활약.

3.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3.3.1. 2010 시즌, 안습의 꼴칰

2009년 9월 24일, 계약이 만료된 김인식 감독의 뒤를 이어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비록 빙그레 혹은 한화에서 선수생활은 하지 않았으나 구단역사상 첫 연고지역(대전) 태생 감독이라 지역내에선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2009시즌이 종료되자마자 팀의 주축 선수였던 김태균이범호가 모두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해버렸고, 마무리투수였던 브래드 토마스마저 미국으로 떠났다. 그야말로 차포 떼고 시작하는 격.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이게 리빌딩이냐 재창단이지!!라는 안습한 대사까지... 그리고 왠지 시즌이 진행될수록 만화 속에서 자꾸 개그 캐릭터가 되어가고 있다. 칰익진! ㅆ! 야신에 의해 지옥으로 보내질 때 했던 대사가 음…, 차라리 지옥이 나을 수도 있지.(…) 실제로도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위트있고 재밌는 답변이 많다. 주로 암울한 팀 사정을 빗댄 자학개그지만…. 한술 더 떠 남의 팀 트레이드때마다 "우리도 선수 필요한데 선수 좀 주세요." 하면서 구걸개그까지 시전한다.

별명으로 대전간디, 대전호구, 돌대화가 추가되었다. 보다시피 하나같이 안 좋은 의미의 별명들.

자세한 것은 한대화/2010년 항목 참조.

3.3.2. 2011 시즌, 野王時代


올스타전 피규어 2011년 07월 23일 올스타전에서.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10에 유일한 현역 1군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야왕 전하로 칭송받았는데...

2011년 들어 한화가 작년과 같이 어이없이 무너지지 않으며 탈꼴찌에도 성공하고 5월에는 SK 와이번스와의 3연전에서 야신 김성근 감독과의 지략싸움에서까지 승리를 거두며 와이번스를 터는 등 선전하자 팬들 사이에서 새로이 나온 별명은 야왕. 쓸데없이 멋있다 한대화 본인은 야왕이란 별명을 아들에게 전해 들었고 야갤러 인증, 비교적 만족하는 듯 하다. 간혹 야황(野皇)으로 불리기도…. 야왕 예끼니미 18세 하지만 다음해에는...

자세한 것은 한대화/2011년 항목 참조.

3.3.3. 2012 시즌, again 2010? again 2010!!


2012년 돌대화 고물상에 어서오세요


시즌 개막 전에는 선수들이 감독의 재계약을 원한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언론과 팬들이 호의적이었다. 2011 시즌에 끈기를 보여주며 6위에 올랐고 한대화의 작전 야구가 잘 통하기도 했으니 기대가 있을 만했다. 거기다가 김태균박찬호가 팀에 합류하면서 올해는 정말 뭔가 일을 낼 것만 같이 보이기도... 희망과 기대에 찬 2012 시즌이 개막, 그리고 한화는 멸망했다.

팀의 총체적인 부진도 그렇고 본인의 용병술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재계약을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중도 퇴진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화의 부진은 계속되었고, 결국 9월도 안 됐는데 한화는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됐다. 이에 대한 대가로 한화 프론트는 태풍 볼라벤이 상륙하기 전 밤이었던 8월 27일 한대화 감독을 전격 경질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씁쓸한 점은 김성근과 달리 한화 팬들 중 아무도 한대화의 경질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한대화 감독의 후임으로 그의 스승이었던 김응용 전 해태/삼성 감독이 선임되었다.

자세한 것은 한대화/2012년 항목 참조.

3.3.4. 총평

부임 당시 한화 감독으로 한대화가 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언론이나 팬 모두 다음 한화 감독에게 펼쳐진 것은 고난과 욕의 행군 뿐(..)이라고 한마음 한뜻으로 말하던 상태. 심지어 앞으로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구단의 총알받이 역할 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즉, 누가 한화 감독이 되더라도 자신의 경력만 망칠 게 뻔한 상태였던 것.

그런데 갑자기 이전까지 한화 구단과 별 연관성이 없었던 한대화가 감독에 임명된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등장이었고, 한화 감독직을 수락한 한대화는 대인배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었다(..)[8]이 때문에 감독 부임 초창기에는 웬만하면 까지 말자는 공감대가 은연중에 형성돼있었다. 즉 반쯤 까방권을 획득한 상태로, 2010년 그의 행적이나 팀 성적에 대해선 어느정도 눈 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2011년 야왕이라 불리며 인터넷 야빠계의 스타 자리에 등극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2010년에 비해 한대화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거나 한화의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운이 좋았던 시즌이었다... 그저 한때 유행이었을 뿐. 사실 세이버메트리션 사이에서 도는 2011 시즌 최고의 미스테리는 어떻게 한화가 6위나 했는가(...)일 정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2년에는 박찬호, 송신영을 영입하고 김태균이 복귀하여 갑작스럽게 한화 4강 가능이라는 설레발이 등장한다. 결국 이전 해의 야왕 신드롬과 그 해의 전력보강 설레발로 어느 정도 성적은 내야 되지 않겠느냐는 팬들이 늘어났으나,

결과는 망했어요.

이 과정에서 한대화가 보여준 감독으로서의 능력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인간성 좋고 유머감각 있기로 소문난 사람이라 기자들 상대로 드립치는 능력만은 전임 감독 정도로 탁월하긴 했다. 그마저도 성적이 워낙 좋지 않자 기자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곧 잊혀졌다. 그 밖에 불펜 운영, 2진급 선수 발굴 및 활용, 작전 수행 능력, 어려운 상황에서의 리더십 등등은 평범 혹은 평범 이하였다. 특히 지나친 좌우놀이나 1루 주자 나갈 시 자동 번트, 히트 앤드 런 등등 유치원생도 예상가능한 작전을 즐겨 썼는데, 한화 선수들은 이마저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신통한 모습을 보이며 번번이 실패. 돌 같은 감독에 돌 같은 선수가 무엇인지를 팬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2012년은 각 팀의 전력평준화 현상이 유독 심한 해로 6개 팀이 옹기종기 모여 비슷한 성적을 찍어준 시즌인데, 유독 한화만 저 멀리 아래쪽에 머물러 있으니 팬들로선 환장할 노릇.

이로 인해 2012년 중반기가 되자 부임 당시 획득한 까방권이나 2011년 야왕놀이 따위는 모두 잊고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감독 경질을 외치게 된다. 심지어 몇몇 팬들은 야왕이라고 불렀던 것을 창피하다고 까지 말하는 상태. 야왕이란 별명도 '야구 왕 병신' 이라며 까는 용도로 전락했다.

결국 부임 당시 누가 와도 망함이라고 사람들이 예상한 그대로의 결과. 누가 감독으로 오더라도 현 한화 이글스의 성적에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한대화는 리빌딩이란 최소한의 목표도 없이 타팀 30대 노장선수 영입에 유망주를 다 퍼다 주고도 성적이 똥망했기에 까여야 마땅하다. 리빌딩은 고사하고 암흑기만 연장시킨 꼴... 그야말로 잃어버린 3년이 되었다.

그래도 업적을 굳이 꼽아보자면, 그의 재임기간에 최진행, 김혁민, 안승민, 오선진, 송창식 등의 성장이 있었다는 것 정도를 꼽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견제 구호에 예끼가 추가된 것도

3.4.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수석코치 시절

2012년 10월 24일, KIA 타이거즈가 2군 감독으로 한대화를 선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선동열이 삼성 감독 시절 수코를 역임한 바 있었기 때문에 선동열과의 인맥으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잘리자마자 다시 부활...

3.4.1. 2013년

2012년 시즌 후 KIA가 본격적으로 2군 물갈이를 시작하면서, 2013년에는 2군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2군에서도 강제 리빌딩 하지만 2군에 다녀온 안치홍이 컨디션을 회복하고, 무엇보다도 김주형이 살아나면서(!) KIA 팬덤에서 야왕매직은 실존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즌이 지나면서 여론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퓨쳐스리그 남부리그 최하위권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타자진이나 투수진 모두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투수 전향 1년차 김윤동이 과부하에 걸려 재활군으로 가면서 선수 발굴은커녕 없는 자원마저 갉아먹냐며 비난을 들었다. 당연히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도 돌대화라고 까였다. 어차피 선동열 사단인 점도 있고, 선동열 감독이 경질된다 하더라도 후임 감독으로 선임될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3.4.2. 2014년

2013년 10월 5일 이순철 수석코치가 경질되면서 후임 수석코치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10월 17일에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마른 하늘에 날벼락

이후 2014 시즌 동안 선 감독을 보좌했고, 선동열이 자진사퇴하고 김기태 신임 감독이 부임하면서 같이 정리되었다.

4. 김성근의 제자???

일반적으로 SK 팬이나 OB(현 두산) 팬들은 김성근이 감독을 하는 동안 그 밑에서 활동했기에 다른 여느 감독들(조범현, 김경문, 박종훈 등등)과 같은 김성근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썩 달가운 소리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일단 OB 시절 한대화가 건강 문제로 팀 훈련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자 훈련광인 김성근 눈 밖에 나면서 구단과의 사이도 틀어지게 되었다. 이후 선수 말년에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은퇴할 때도 구단 측에서는 그래도 3루수 레전드니 은퇴식은 챙겨줄게 하는 마당에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잉여에게 무슨 은퇴식? 이라고 김성근이 디스를 넣은 통에 더 사이가 틀어졌다. 지금도 표면적으로 디스는 걸지 않지만 아마 속은 상당히 곪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9]

게다가 김성근 밑에서 활동한 시간보다는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이후 김응용 감독과 야구를 한 시간이 훨씬 더 많다.[10]

5. 기타

대전 출신으로 대학교 빼고 초중고 모두 대전에서 다닌 레알 대전 박이지만 광주광역시를 연고지로 두고 있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통에 광주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 OB시절 트레이드 대상 명단에 올랐을 때도 자신은 새로 창단될 대전 연고 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가기를 매우 희망했지만 구단은 그 말을 쌩까고 해태로 트레이드 해버렸다. 때문에 한때 대전구장에 '배신자 한대화'라는 플래카드가 붙었을 때 상당히 억울함을 피력하기도 했다. 훗날 디씨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조공을 받았을 때 자신의 이름이 마킹된 빙그레 이글스 유니폼을 보면서 뭔가 짠해지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고... 지금은 칰갤 흑역사

성격이 상당히 순하고 유들유들한 편이다.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심판들에게 항의할 때 한대화 감독이 만만해 보이는지 심판들이 막 뻗대는 경향이 있다. 그러고 나선 필드의 지배자에게 쳐발린다

모 언론사에서 야구 감독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을 뽑으라고 했을 때 유일하게 답변 곤란이라는 답변을 했던 감독이다. 이만수[11]박종훈[12]의 답변이 상당한 논란이 된 것을 보면 꽤 현명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왜 성적은 그 모양

독실한 천도교 신자이다. 부친이 대전의 천도교 교구장이었다고. 한창 리즈시절 인터뷰에서 치성을 드려 성적이 잘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시진과 무척 친하다. 고교부터 대학. 프로시절, 코치시절에도 같이 있었던 적이 없는데 사이가 가깝다. 한화 이글스 감독 당시 넥센전이면 넥센 덕아웃으로 찾아가 김시진에게 "꼴뚜기 형님"이라 별명을 부르며 아이스크림을 먹여주는 정도로 친하다. 이런 관계로 한때 둘의 관계를 소재로 한 혀갤문학이나, 칰갤문학이 판치기도 했다.(......)

한편 2014년도마저 한화가 부진하자 일부 팬들은 지금보다 안 좋은 팀 상황에서 어떻게 6위를 했는지에 대해 재평가를 내리기 시작했다.진짜 기적이라 말할 수준 물론, 결론은 2011시즌이 플루크 시즌이라는 것이고, 그러한 플루크는 기아 2군에서 그대로 밑천이 드러났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3 OB 베어스 88 313 .272 85 17 5
(2위)
5 44 39 4 19 .406 .313
1984 74 189 .238 45 8 1 1 16 22 5 29 .307 .339
1985 38 53 .226 12 1 0 2 7 5 0 1 .358 .241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6 해태 타이거즈 103 342 .298
(5위)
102 24
(2위)
2 14
(5위)
66
(2위)
50
(10위)
8 42 .503
(2위)
.372
(5위)
1987 94 301 .236 71 16 0 13
(5위)
36 39 5 52 .419 .347
1988 101 356 .320
(7위)
114
(5위)
18
(8위)
1 18
(3위)
57
(6위)
51 6 51 .528
(3위)
.403
1989 106 358 .279 100 14 2 13
(5위)
63
(6위)
52 15 81 .439 .409
(1위)
1990 119 418 .335
(1위)
140
(2위)
20
(7위)
3 15
(5위)
86
(2위)
73
(2위)
10 76 .505
(5위)
.432
(1위)
1991 92 336 .301 101 17 3 22
(4위)
73
(8위)
62 8 55 .565
(3위)
.392
1992 110 362 .268 97 16 1 20
(9위)
74
(9위)
69 8 67 .483 .379
1993 107 335 .266 89 13 1 13
(8위)
46 46 4 53 .427 .36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4 LG 트윈스 106 357 .297
(9위)
106 15 1 10 67
(9위)
49 3 53 .429 .384
1995 98 295 .241 71 13 0 8 37 25 1 26 .366 .300
1996 52 138 .232 32 5 0 5 16 12 1 16 .377 .312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7 쌍방울 레이더스 43 111 .225 25 2 0 4 24 16 1 20 .351 .344
KBO 통산
(15시즌)
1331 4264 .279 1190 199 20 163 712 610 79 641 .450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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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셋다 커리어 내내 한 포지션만 본건 아니지만(양준혁의 경우 1루수로 뛰기도 하였다) 셋다 각각 우익수, 중견수, 좌익수로써 전성기를 보냈다.
  • [2] 조범현 체제 이후 KIA 타이거즈는 다른 구단들과는 달리 1군 감독이 1군은 물론 2군, 3군까지 직접 총괄하는 형식이고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그러한 경향이 더 강해졌다. 이는 선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선 감독 후반기에 2군 감독 대신 2군 총괄코치로 故장효조를 임명한 바 있다.하긴 KIA 2군이 워낙 부실하기로 유명하다보니 1군 감독이 직접 총괄하는 것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 [3] 2012년 8월 27일 시즌 도중 경질. 남은 시즌은 한용덕 수석코치가 감독대행.
  • [4] 당시 쿠바가 불참한 가운데 9개 국가가 풀리그로 대회를 치루었고 대한민국일본간의 최종전을 앞두고 공교롭게도 두 나라가 6승 1패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대한민국일본의 패배는 모두 이탈리아에게 당한 것으로,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그것이 유이한 승리였다.
  • [5] 첫번째 우승은 1977년 니카라과 슈퍼 월드컵 대회였고, 당시 김응용이 대표팀 감독이었다.
  • [6] 당시 OB 베어스대전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었다.
  • [7] 김일권은 1984년 이른바 불고기 항명 사건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 [8] 하지만 대전태생에 성인되기전까지 대전에서 컸다. 선수시절에도 대전으로 오고싶어 트레이드파동을 일으킨 만큼 한화가 대전연고팀이라는게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야구 커리어 첫 프로팀 감독도전이라는 점도 있었으리라
  • [9] 2010년 류현진 등판으로 김성근과 한대화 사이에 설전이 오갔을때의 분위기에 의하면 여전히 좋지 않는 관계로 보인다.
  • [10] 선수시절만 해도 김응용과 더 오래 있었으며, 코치직도 김응용과 같이 시작했다. 물론 이 당시엔 김응용은 삼성 라이온즈 사장.
  • [11] 노무현을 뽑았다.
  • [12] 이명박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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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5 06: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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