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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

last modified: 2015-04-02 02:00:24 by Contributors

Contents

1. 전한황제
1.1. 황제가 되기까지
1.2. 한무성세(漢武盛世)
1.3. 한무성세의 그림자
1.3.1. 토목공사
1.3.2. 흉노 원정과 재정 문제
1.3.3. 여태자(戾太子) 사건(무고의 화)
1.4. 후일담
2. 1의 인물을 소재로 한 중국 드라마

1. 전한황제

전한의 역대 황제
6대 한경제 유계 7대 한무제 유철 8대 소제 유불릉

무제무제.jpg
[JPG image (24.69 KB)]
묘호 세종(世宗)
시호 효무황제
(孝武皇帝)
유(劉)
철(徹)
출생지 장안 미앙궁(未央宮)
사망장소 장안 미앙궁(未央宮)
아버지 유계(劉啓)
어머니 왕지(王娡)
생몰기간 음력 B.C 157 ~ 87 (71세)
재위기간 음력 B.C 141 ~ 87 (55년)

한나라의 위대한 황제로 한의 위세를 제대로 떨쳤기에 오늘날 중국인들이 한이라는 나라에 자부심을 갖게 한 인물. 또한 전한의 법령을 완성시키고 관료체계 또한 완비하였는데, 이는 후한은 물론이고 그 이후까지 두고두고 영향을 끼첬다. 유학 또한 그의 시대에 국학의 위치로 올라선다. 때문에 중국 역사 전체를 놓고 봐도 매우 중요한 황제이며, 또한 위대한 황제로 추앙받는 인물.

그러나 또한 길고 거대한 대원정을 일으키고, 마찬가지로 큰 규모의 토목공사를 단행하였으며, 재정확보를 위해 염철전매법, 균수법, 평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였다. 또한 초기에는 신비주의를 배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에 빠졌다가 황후, 황태자와의 내전, 즉 무고의 화라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사마천고자로 만들기도 하였고 본의는 아니지만 괴철의 이름을 바꾼 사람이기도 하다. 복잡다단한 인물.

그의 치세를 상징하는 단어로는 한무성세가 있으나, 그보다는 진황한무가 더 많이 쓰인다. 그만큼 여러모로 진시황과 비슷한 인물이다.

1.1. 황제가 되기까지

원래 한무제는 부황 경제(景帝)의 10번째 아들이었다. 당시 경제는 황후에게서는 자식이 없었고, 대신 6명의 후궁에게서 14명의 아들을 보았다. 또한 무제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적장자인 유영이 황태자로 있었으니 적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한 한나라에서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인 왕 미인은 경제의 누이인 장공주의 딸과 유철을 혼인시킨 후 장공주가 경제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통해 황태자 자리를 빼앗으려 하였다. 이러한 시도에는 당시 태자였던 유영의 생모 율희의 실수도 있었는데, 처음에 장공주는 유영과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율희가 이를 거부하였던 것. 또한 경제가 자신의 사후에 자신의 자식들을 부탁하였을 때도 오히려 황제에게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경제는 율희에 대한 마음이 떠났고,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왕 미인과 장공주의 공작의 결과 유영은 폐위당하였다. 이후 경제는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주아부, 유영의 스승이자 두 황후의 조카였던 두영, 자신의 동생이기도 한 양 효왕 유무 등 공이 많은 조정 대신들을 압박, 숙청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야 유철, 한무제는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2. 한무성세(漢武盛世)

즉위 직후 널리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대책을 묻고, 여기에 응한 동중서의 대책을 채택함으로써 유교를 중국의 국교로 만드는 길을 열어 세계 최초로 유학을 관학으로 공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위청, 이광, 곽거병 등의 명장들을 파견해 한과 대립하던 흉노족을 박살내고, 남월조선을 정복하고, 장건을 서역으로 보내(원래는 흉노에 맞설 동맹을 구하려 했지만...) 실크로드를 발견하는 등, 여러모로 대활약했다. 한무제의 중요 업적인 흉노 원정에 대해서는 위청, 이광, 곽거병 항목을 참고하고 조선 정복에 대한 내용은 왕검성 전투 항목 참고. 비록 한무제의 과시로 인해 한이 훗날의 후한에 이르기까지 망조가 낀다 하나, 이들 원정들은 모두 까마득한 기원전이라는 고대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초월적인 물량을 지속적으로 쏟아부음으로 동서남북을 모조리 쓸어담아서 중원 패자가 어떤 것인가를 이 세상에 처음 알렸다.


즉위 초에는 할머니 두태후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녀가 죽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고 두태후의 일족을 숙청해버렸다.

1.3. 한무성세의 그림자

1.3.1. 토목공사

그러나, 백성들과 신하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폭군이다. 문제, 경제시대부터 이어진 '곡식이 썩어나고 창고에는 온갖 재화가 가득한' 태평성대를 박살낸 원수에 가깝다. 즉위 초의 백성을 위하던 시절은 할머니인 두태후의 간섭을 받던 시절이 대부분이며, 두태후가 죽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선, 즉위 2년째부터 자신의 능을 건설하게 했는데, 능을 일찍 건설하는 것 자체는 그 당시의 황제라면 당연히 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규모를 진시황의 여산릉에 버금갈 정도로 크게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말년에는 미앙궁과 장락궁을 놔둔 채 새로 크고 화려한 건장궁을 건축하고 또 별궁을 이곳 저곳에 지었으며,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천자의 위엄을 보이는 목적 외에도 그것이 불로장생과 연결된다는 속설이 작용했다고 한다.

1.3.2. 흉노 원정과 재정 문제

그리고, 흉노와 수십년간의 소모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인명피해 및 자금지출을 해서 국가 재정을 확실하게 말아먹었다. 의외로 삽질도 적잖게 했고, 당장 역사서에서 흉노와 전투하는 것을 서술한 것을 보면 흉노의 중심지까지 쳐들어가서 이겼으나, 군마 수십만필을 상실하였고식의 문장이 많이 나온다. 일부러 전사자에 대한 언급을 피한 것도 문제지만, 애초에 중국 본토에서 이라는 동물을 많이 키울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금전과 물자가 허공으로 날아갔음은 누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이 평야가 넓은 것은 사실이지만, 마찬가지로 사람이랑 다른 가축도 많다. 더욱이 농지가 아닌 군마를 키울 목초지는 상당히 부족하다. 이때문에 왕안석의 신법 중에 농가에서 군마를 양성하자는 내용도 나온다. 동시에 이 개혁안이 실패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을 정도로 역대 중국 왕조들은 물론이고, 원이나 청조차도 중국 내륙을 지배한 이후로는 말 공급 부족에 시달렸다. 강력한 기병대를 만들고 기병을 주력으로 했던 나라도 목초지를 위구르랑 티베트에게 잃은 후로는 군마 부족으로 골골거렸다. 그래서 중국의 군대는 로마 제국처럼 항상 보병중심이었다. 기병을 양성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유목민들을 비싼 돈주고 용병으로 고용을 했다. 이렇게 말이 공급이 부족하니 중국에선 말이 부의 상징일 정도로 정말 비쌋다. 말을 타고 여행할 정도면 부자라는것을 증명했다.

단 흉노와 전한이 한문제한경제 시절처럼 소극적으로만 일관할 수는 없고, 언젠가는 패권을 겨뤄야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물자 소모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덕분에 문제, 경제시절을 거치면서 국고에 저장중인 동전을 묶은 끈이 썩어서 동전꾸러미가 쓰러질 정도였으며, 일시적이지만 직접세를 폐지하기도 할 정도로 쌓아놓은 막대한 재정흑자를 당대에 대규모 재정적자로 만들었다. 게다가 이런 희생을 치르고도 흉노를 완전히 박살내지는 못했으며, 이후 흉노와 한은 모두 과거의 전성기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이좋게 멸망테크를 타게 된다.

한과 흉노 멸망의 여파는 다른 정복 지역에도 퍼져서, 조선을 비롯한 각 지역들은 군사적으로 점령한 지 오래 되지도 않아 통제력이 극도로 약해지거나 독립한다. 돈과 군사력을 쓸 대로 쓰고, 본전은 다 잃은 셈. 대표적으로 한사군만 해도 낙랑군을 제외한 다른 3개 군은 세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폐지/이전되고, 낙랑군의 경우 폐지되거나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세력 축소는 기본에다가 진압하긴 하지만 한인이 군사를 일으켜 태수에 오르기까지도 하는 등 막장화되었다. 부여와의 충돌이 적었던 게 그나마 다행일지... 그러나 한무제 이후 부여와의 관계는 계속 서먹해져, 나중에는 부여가 대규모로 한사군에 대한 간헐적 침략을 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생한 유민들과 영토는 고구려가 냠냠.

덕분에 거대해진 제국을 유지하고 계속되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무제는 새로운 농업생산량 증대 기술을 도입하고, 소금과 철을 전매했으며, 물가 조절을 빌미로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해 심한 상업 통제로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박박 긁어 많은 원성을 샀으며 이로 인해 사마천에 의해 엄청나게 까이기도 했다. 게다가 무제 사후, 이 정책의 당위성을 놓고 외조(찬성파)와 내조(반대파)가 사상적,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는데, 당시의 논의를 기록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염철론"이다. 외조와 내조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아 결국 직접적으로 충돌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정쟁 끝에 내조가 승리하여 외조의 수장이었던 상관걸과 상홍양 등은 주살되고 균수, 평준을 비롯한 무제 시기의 신정책들은 대부분 폐기되고 만다.

이런식으로 낭비를 거듭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부담이 엄청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0년쯤 뒤 하후승은 그런 피해를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기아를 면치 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었다"고 묘사했다. 단 그렇다고 아예 방조한 것은 아니고, 무제 자신은 구난사업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편이다. 문제는 구난사업을 펼쳐도 자신이 백성들에게 입힌 피해가 너무 막대했기에 구난사업이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저 불만 달래기에 불과한 것이다.

1.3.3. 여태자(戾太子) 사건(무고의 화)

게다가 그 스스로가 후궁에서의 음모의 결과로 옥좌에 앉았기 때문인지, 옥좌를 둘러싼 음모와 유혈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122년부터 종실인 회남왕, 형산왕, 강도왕의 반역 음모가 차례로 발각되어 처형이 줄줄이 이어졌는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더구나 말년에는 노망이 나버려 손권이나 조선영조처럼 모함에 넘어가 자신의 아들인 여태자 유거(劉據)를 죽음으로 내모는 과오를 범한다. 무제는 구익부인을 총애하여 그 와의 사이에서 늘그막에 어린 황자 유불릉을 낳았는데 태자를 바꿀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평소 강직한 성격의 태자를 싫어헸던 수형도위(水衡都尉) 강충(江充)이 무당과 짜고 여태자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하자 무제는 여태자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함에 화가 난 여태자가 사전에 강충을 살해했으나, 이런 행동은 엄연히 무제에게는 모반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무제는 태자를 폐위시키고 체포를 명하였다.

하지만 체포에 불복한 여태자는 거병하여 장락궁과 호위 군사와 황후궁의 궁노수와 병사를 풀어 장안을 통제하려 했다. 무제는 보고를 받은 후 우선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피게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기세에 밀려 장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 태자가 기어이 반란을 꾸미고 있으며 사자인 자신도 죽일려고 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이에 진노한 무제는 군대를 파견해 장안을 포위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아 장안 내에서 한 명도 도망쳐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에 태자는 장안 내에서 간신이 난을 일으킨다고 선포했고 임안에게 북군을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임안은 북군에 들어가자 군영의 문을 단단히 닫게 했다. 태자는 장안 동서남북 네 시장에서 인부들을 잡아 군사로 수만 명을 충당했다. 이 군대로 그는 승상 유굴리와 5일간 혈전을 벌였다. 장안의 백성들은 태자가 반란했다는 말을 듣자 점점 유굴리에게 합류했다. 자신의 불리함을 안 태자는 장안 동쪽 복양문으로 나가 도망쳤다.

무제는 명을 내려 위황후의 인끈을 회수하여 폐후로 만들었는데 이에 위황후는 자신의 말로를 예감하고 자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 대신은 누구 하나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방의 한 장자가 무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부자간에 원수처럼 되지 말아야 하며 태자가 함부로 부친의 군대를 일으킨 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결코 모반은 아니라며 사면을 요쳥했다. 무제는 이 상소문을 보고 다소 감동은 했지만 태자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태타즌 민간에 도망쳤으나, 결국 발각되자 자신의 비인 양제 사씨와 함께 자살했다. 뒤이어 잔당을 이끌던 여태자의 아들이자 무제의 손자 유진과 그의 아내 왕씨 내외 역시 자살하고 반군은 진압되었다. 그 후 태자의 모후 위씨 일족과 태자의 친지들도 숱하게 처형했다.

하지만 여태자의 손자이자 무제의 증손자로 아직 갓난 아기였던 유순(劉詢), 훗날의 선제는 다행히도 위씨 일족에 의해 목숨을 부지해 무제와 소제가 사망하고 폭군 창읍왕을 쫓아낸 원로 대신들에 의해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

원래 여태자의 다음 서열은 제회왕 유굉이었으나 일찍 죽었고, 창읍애왕 유박을 태자로 삼자는 여론도 있었으나, 그도 얼마 못 가 죽었다. 광릉여왕 유서와 연날왕 유단은 무제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막내아들 유불릉을 태자로 삼았다.

이듬해에 조사를 거쳐 이 사건은 무고로 밝혀졌고 증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무제 역시 태자의 거병도 강충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거기에 전천추의 말을 듣고 감동한 무제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여 아들을 위한 궁궐의 건축을 명해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궁이라는 뜻의 '사자궁(思子宮)'을 지어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강충의 삼족을 멸하고 강충의 일당들을 불태워 죽였다. 하지만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이 심했는지 얼마 안가 실의에 빠졌고 흉노 정벌의 명장인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흉노족 태자 출신인 김일제 등에게 후사를 맡기고 B.C 87년 세상을 떠났다.

1.4. 후일담

세종대왕은 "대체로 인간이란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진다. 아무리 강직한 사람이라도 마침내는 해이해지기 쉽다. 임금이란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정치를 잘할 수 있다. 문제경제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성공하였으나, 무제는 방종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비판했다. 세종이 세종을 깠다.

한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은 지금까지도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데 전술했듯이 국고를 탕진해 만든 만큼 굉장히 크고 아름답다. 전한이 멸망하고 일어난 적미군이 무릉의 부장품을 꺼냈지만 전부 꺼내지 못했으며 서진 말기 민제 사마업은 자금이 없자 무릉을 털어 확보했다는 기록도 있다.

2. 1의 인물을 소재로 한 중국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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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제목은 <한무대제(漢武大帝)>. 중국의 여섯 방송국이 연합해 3년간 제작했으며 66억의 제작비가 들었다고 한다. 총 58부작. 감독은 옹정제를 다룬 드라마인 <옹정왕조>의 감독을 했던 호매.

한무제 역의 배우는 '진보국'이란 사람으로 작중에서 가공할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드라마 내내 소년 시절부터 판단력이 혼미해져 태자와 대립하는 등의 노년기의 모습까지도 잘 보여주고 있다.

첫화의 첫 장면은 말년의 한무제가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고 사마천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여기서 무제는 사마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짐은 그대가 쓴 책을 보았다. 너는 짐이 너를 죽여버리기를 바라겠지. 천추만대가 모두 너의 충성과 절개를 찬양하고, 짐을 폭군이라 욕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너는 이 책을 가지고 가도 좋다... 어떤 이들은 짐에게 너의 책을 태워 버리라고 말했지만, 짐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짐이 너의 책을 국가의 정사로 삼을 수는 없지만 한 사관의 말로 남길 것이다."

멋있는 장면이긴 하지만, 애초에 사마천을 고자로 만든 것도 한무제고, 사마천의 최후 중 현실성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다시 한번 황제를 비판했다가 처형당한 것의 실행자가 한무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사마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병주고 약주고에 가까웠을 것이다. 한무제 개객기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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