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한사군

last modified: 2015-03-26 15:43:50 by Contributors

漢四郡
hansagoon.jpg
[JPG 그림 (136.77 KB)]


상기 지도의 좌측이 현재까지 학계의 정설인 한반도 북부설이다. 우측은 난하요수설을 기반으로 한 요서설에 따른 지도.

목차

1. 개요
2. 위치
3. 지배 성격
4. 최씨낙랑국과 동일한가?
5. 기타

1. 개요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 합병한 뒤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는 네 번군. 4군이 꼭 유지된 것이 아니라서 학술적으로는 '한군현'이라 부르는 것이 보통이며, 한나라 이후에도 유지되었다는 점 때문에 '동방변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위치

역사적으로는 주로 위치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특히 별로 사서에 이름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 나머지 세 군현보다 낙랑의 위치가 떡밥이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들이 있는데 한반도 북부 및 만주설, 요동 요서설, 이동설 등이 있다. 현재 정설은 한반도 북부설이며 시기에 따라 이동해갔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이 한사군은 대개 설치 백년을 전후해서 토착민들의 반항으로 폐지되거나 위치가 이동해갔으며 고구려 미천왕때 마지막 남은 낙랑군을 공격해 멸망시킴으로써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한편 신채호는 평양 지방의 지명이 '낙랑'이며, 진번, 임둔, 현토 역시 마찬가지로 각각 가리키는 지명이 있을 것이라 했고, 한사군은 한 무제가 삼조선 전체를 공격해 합병한 뒤 각각의 지명의 위치에 세우려고 하다가 실패한, 즉 '가설'된 군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평양에는 열국시대최씨낙랑국이 존재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곳은 불명이다. 어느 사서에는 (漢)나라의 침략군을 조선이 있던 자리에 있던 국가들이 속속 물리쳤다고 했으며, 이것은 신채호의 주장에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신채호는 한사군의 위치를 난하 부근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사학계는 한반도 북부설이 정설로 여기고 있으며, 한사군중 제일 규모가 컸던 낙랑군의 중심지 또한 고조선이 멸망했을 때의 중심지였던 평양으로 보고 있다. 또한, 한사군에 관한 신채호의 견해의 경우, 대부분이 원전의 한문을 오독했거나 신채호 본인의 추측이나 바람에 따른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 대한민국의 사학계는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최근에 평양 부근에서 나온 유물들 덕분에 낙랑군이 평양 위치에 있었음을 부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1]

한편, 한사군이 난하 부근에 있다는 주장은 고대의 요수가 현재의 난하라는 "난하요수설"을 그 근거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대한민국의 사학계는 이미 1970년대에 여러 차례 난하요수설을 논파한 바 있다.

유물로 한사군의 영역을 파악하는건 비파형동검으로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측정하는거나 마찬가지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젠 이게 고조선의 것이 맞는지도 의심스럽다고 평가되는 비파형동검과 행정통치를 입증하는 호구조사 목간 각 군현의 인장 유물(봉니)등 한사군, 특히 낙랑군의 평양 비정을 증명하는 다수의 유물들 모두를 단순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 거기다 현재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파악하는 방식은 유물과 유적을 통한 고고학적 연구의 방식을 취하므로 애초에 주장의 밑바탕부터가 사실과 틀리다. 세력범위를 파악하는 연구에 근거로 사용되는 많은 종류의 유물 중 '비파형동검'이라는 애매한 한가지 유물만을 골라잡아 억지로 확대해석하는 것에 불과한 주장.

문헌사료에서 한가지 지명, 즉 '갈석산'만을 물고 늘어지면서 문헌적 근거도 없다는 주장은 분명히 고려를 해봐야 한다. 애초에 고대의 지명이라는 건 똑같은 지명이 여러곳에서 튀어나오고[2], 세월이 지나면서 변경된 곳도 많다.

3. 지배 성격

한사군에 대해 일제의 식민지배와 비교하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으나.[3] 한사군을 조선총독부와 비슷한 수준의 식민지배로 보는건 곤란하다. 한나라 출신들이 많이 흘러들어오긴 했으나 여전히 토착 지배층들이 지배했고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론 한나라의 군현이지만 사실상 토착민(고조선 출신)들이 자치에 의존하는 간접적인 지배였다.(참조링크) 오히려 중국의 선진문물이 많이 들어오면서 삼한과 삼국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기에 긍정적으로 볼수도 있다.

4. 최씨낙랑국과 동일한가?

미천왕 때 합병당한 낙랑군이 대무신왕 때 합병당한 최씨낙랑국과 같은 존재인지 별개의 국가인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별개의 국가로 보는 쪽에서는 낙랑군을 평양과 그 주변으로, 낙랑국은 평양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한 이에 관해서 경북대학교 사학과 주보돈 교수 등은 낙랑군과 낙랑국이 평양 부근에 위치하면서 서로 다른 곳이라 보았다.

별개의 국가라고 보는 쪽에서는 낙랑공주의 아버지인 최리가 낙랑국의 이라고 기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태수'가 아닌 것이다. 삼국사기 등이 쓰여진 시대에 '군'과 '국', '태수'와 '왕'을 구별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4]. 또한 중국의 기록을 보더라도 낙랑 태수중에 최리라는 사람은 없었다.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는 쪽에서는 낙랑군과 낙랑국의 이름이 같고 지리적으로도 같은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 유물의 발굴로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만큼, 고구려와 맞설 만한 강국이 공존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최리 이전에는 전혀 기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약점이다. (옥저동예 등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셈이다.) 또한 대무신왕이 낙랑을 함락시킨 후 후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낙랑 지역을 점령한 것도 대무신왕의 고구려가 점령한 것이 한의 군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양쪽 모두 정황증거에 불과하다. 실제로 평양 주변에 낙랑국의 별개의 유적이 있는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최씨낙랑국 항목 참조)

5. 기타


그러다가 최신 떡밥이 하나 나오기는 했다. 바로 1993년 요녕성 금서시 소황지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가 발굴된 것이다. 이 발견은 임둔과 진번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군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지만, 한사군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 논란을 재점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임둔은 낙랑의 동쪽에 있었다고 되어 있고, 요녕성에는 창려군이 있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이 봉니에 대해서는 임둔군에서 창려군으로 보낸 봉니로 해석하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이다. 낙랑의 봉니에서 말하는 도착지의 봉니가 발견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서, '그러해서 이건 임둔군이 보낸 봉니이다' 라는 답변이 된다.

그리고 코에이의 삼국지7에서도 낙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는데... 다음 번 시리즈에서는 그게 문제가 되어서 이름 또는 위치가 달라졌다.[5]
----
  • [1] 신채호는 애당초 사료에 충분히 접근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금 부족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 [2] 당장 갈석산만 해도 한 지도 내에 같은 지명이 네다섯개 이상 튀어나온다.
  • [3] 국사 교과서에도 한사군이 아예 없었다는 듯이 서술되거나 설명이 매우 적었다.
  • [4] 다만 최씨낙랑국 항목에 지적된 대로, 삼국사기에는 '대방왕'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 [5] 국내판 한정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3-26 15:43:50
Processing time 0.0035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