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한일기본조약

last modified: 2015-03-31 19:46:36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상세
3. 전문
3.1.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3.1.1. 이미 무효 논란
3.2. 청구권 협정
3.2.1. 일부 문제는 협정에 언급이 안 되었다?
3.2.2. 보상만 했다? 배상만 했다?
3.2.3. 독립축하금이니 배상은 해야한다?
3.2.4. 개인 청구권의 소멸 여부
3.2.5. 협정의 무효 여부
3.2.6. 역청구권 논란
3.2.7. 독일의 사례
3.2.7.1. 독일은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을 끝냈음에도 추가로 배상을 했다?
3.2.7.2. 독일은 재단을 만들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했다?
3.2.7.3. 독일 대법원의 개인 배상 기각 판결
3.2.7.4. 이탈리아의 배상 판결에 대처하는 독일의 자세
3.2.8. 미국의 사례
3.3. 문화재 협정
3.3.1. 문화재 문제
4. 한국 정부의 문서 공개 거부 논란
5. 한국 정부의 문서 완전 공개와 그 파장
6. 일본 정부의 문서 완전 공개와 그 파장
7. 관련 항목
8. 기타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1]

1. 개요

1965년, 대한민국일본 사이에 체결 된 조약.

이후 한일관계를 첫 단추부터 꼬이게 한 만악의 근원.
현재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와 같은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를 도와줄 수 없는, 그리고 도와줄 자격도 없는 이유.
이 조약이 맺어진 이후 벌어진 행태로 한국 정부는 식민지 시절 피해자들의 돈을 강탈했다는 원죄를 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약으로 일본은 자신의 법적 배상-보상 책임을 완전히 끝맺었다.[2]

2. 상세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정부를 전복해 정권의 정당성이 없던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쿠데타 공약을 이행하는 것이였다. 이에 따라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할 자금이 급히 필요했다. 국내 정치가 아직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박정희는 오른팔 김종필을 앞세워 전국민적인 반발을 무시한 채 일본과 수교하고 이 조약을 체결한다. 급한 쪽은 한국이였기에 일본 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체결이 진행되었다. 결국 일제 36년간 입은 모든 피해(국토의 수탈, 국민의 수탈)를 피해자 개개인의 의사는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유상 원조와 무상 원조를 '배상금'이 아니라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당시 국제법상 배상금이란 명목으로 받아내긴 힘들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일제의 한국 강점기에 대한 배상을 공식적으로 완료하였으며 추가적인 배상 책임이 끝났다. 허나 한국의 언론계에서 한일기본조약에 크게 초점을 맞추기 않기에 한국인들은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대해 정당한 배상을 하지 않았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 극우파들이 도의적 책임마저 이해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이 역시 문제이다. 합의한 보상은 당시 일본이 가지고 있던 외환의 전부이자 한국 국내 총생산 1/4 수준이었기 때문에 얼마 주지도 않고 생색부린다고 할 수는 없는 상당한 금액이었으며[3] 오히려 비판은 일제 피해자들의 몫을 멋대로 다른데 사용한 박정희에게 해야 한다.

1965년 체결 당시, 전국 각지에서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서울특별시로 올라와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6월 3일의 시위. 이른바 6.3 항쟁. "6.3 동지회"도 결성되어 수십년동안 존속하고 있다. 현재는 많은 숫자가 기성 정치인이 되어서 나이먹고 변절한 사람들 집단으로 불리기도 한다 카더라.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 중 고려대 쪽에서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회장 대행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이명박(!)이다. 그는 이 시위를 주도했다는 명목으로 6개월 간 유치소에 구금된 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전과 때문에 졸업 후 한동안 취직을 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이명박의 고려대학 졸업과 현대건설 입사는 1965년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이 청와대에 편지를 썼다는 것도 이르면 현대건설 입사가 진행되던 시기, 좀 박하게 보는 경우는 입사한 다음이다. 한편 북한은 이 날은 남조선 청년학생 봉기일이라고 기념일로 지정해 놓고 있다. 남한의 민중운동을 북한이 끌어다가 자기들이 한 일인양 자랑하는 북한식 전인수의 대표 사례 중 하나. 그러나 이런 강한 반대에도 박정희는 계엄령까지 선포해가며 끝내 조약을 체결했다.

계엄령까지 선포해가며 조약을 체결했으면 박정희 정권은 이 조약의 의미(일본의 배상 종결)에 대해 국민들에게 설명했었어야 했으나, 설명하지 않았다. 결국 박정희 정권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한국인들은 일본이 배상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한국인들의 이러한 인식 때문에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한일협정의 성격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후술하겠지만 결국 오늘날 험악한 한일관계의 책임은 박정희에게 상당히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역사에 조예가 좀 있고 관심이 있으면 거의 다 기억하고 있는 조약이다. 한일관계에 관심이 많은 젊은 학생들은 웬만하면 다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일본에선 "한국인들은 왜 배상을 다 받고나서 입 딱 씻은다음 또 배상을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 입장에선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조약을 맺은지 거의 40년이 다 되었고 돈도 조약에 따라 지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현재까지도 반일 시위가 벌어지고 배상 문제가 언급된다. 일본인들 입장에선 한국인들이 감정적으로 나온다고 생각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것이다.[4]

반면 한국에서는 일본의 전쟁 피해자 보상 관련 뉴스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나마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언급되고 관련 사료 인용도 되어있긴 한데 비중이 거의 없다. 그냥 언급만 하고 지나가는 수준. 또한 시험에 가끔씩 나올 때에도 조약의 내용은 하나도 안나온다. 네이버나 다음 같은 대형 포털 검색에도 많은 내용이 안 나오고, 지식IN 같은 곳에서 언급된다고 해도 세부 내용은 두리뭉실하게 넘길 뿐, 박정희 정권의 병크를 성토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박정희 정권이 배상금을 받아서 어디다 썼는 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피해자들한테 줬겠... 냐?

이 조약으로 받은 자금중 8천만 달러 정도가 포항종합제철(現 포스코) 산하 포항제철소 건설에 쓰여졌다. 포항제철이 한강의 기적의 상징으로 칭해지는 걸 생각하면... 사실 받은 금액이 당시로서는 한국에게나 일본에게나 큰돈이었다.

당시 일본의 외화보유액이 총 14억불인데 8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유상 차관 2억 달러, 상업 차관 3억 달러[5])의 지원을 얻어낸 것은 분명히 큰 금액이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해 배상하는 것은 만국공법에도 없다고 일관되게 거부하며 오히려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면서 만들어놓은 사회간접자본(학교,농장,철도,공장 등)에 대한 역청구권[6]에 대해 주장을 하다가 1957년에 역청구권을 포기했으나 일본이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역청구권을 포기한 것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하다고 주장하였다.

배상 금액에 대해서 불과 3~4년간 일본에게 점령당했던 필리핀(무상지원 5억 5천만 달러, 상업차관 2억 5천만 달러)이나 베트남(무상지원 3900만 달러, 상업차관 910만 달러), 인도네시아(무상지원 2억 2300만 불, 상업차관 4억 달러, 무역채권 1억 7천 만 달러 포기), 미얀마(무상지원 2억 달러, 추가지원 1억 4천만 달러)의 배상액과 직접 비교하면 부족하다는 소리가 있으나 이들 나라들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준거한 전쟁당사국들이었다는걸 염두해둬야 한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약 체결 과정에서 철저히 외면당했고, 결국 전쟁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미 2차대전 이전부터 일본에게 점령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식민지를 지배했던 열강들 중에서 조약을 맺어 식민지 배상 문제를 끝낸 국가는 일본 밖에 없다. 엄청난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이나 프랑스는 물론[7] 과거 반성을 하는 것 같은 독일이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횡포가 덜했던 이탈리아도 옛 식민지에 대한 보상은 없는걸 생각하면 입장차로만 생각하기 어렵다.

거기에 미국 중앙정보국(CIA)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일본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수수했음을 밝히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기업이 1965년까지 5년동안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달러를 지원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액수는 오늘날의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이다.

분명 일본의 배상금을 통해 한국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진 것도 사실이다(엄청난 적자로 결국엔 세계 4위의 빚더미에 내려앉았지만..)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일제강점기 피해자(=국민)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 되지 않았고 한국 근대사를 뒤흔든 식민지 문제를 군사 정권이 멋대로 처리해 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한국에 들어온 돈 중 정작 분명 배상받아야 할 피해자들에게 간 돈은 고작 5%[8]에 불과하다는 것. 덕분에 문서 최상단에도 나와있지만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은 일본을 상대로 보상을 청구할 때마다 이 조약을 근거로 기각당하고 있다.[9]

사실 이 당시 지급된 금액이 피해자에게 제대로 전달됐거나 교육과정에서 박정희의 업적 운운하기 이전에 이러한 병크를 확실히 가르쳤으면 일본은 지불했는데 박정희가 다 쳐먹었구나 식으로 양국 시민간의 악감정이 이토록 심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만한 점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조약의 존재 유무조차 모르는 한국인이 많다는 것이며, 덕분에 양국간의 정치적 논쟁이 빚어질 때마다 일본이 '배상'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국인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박정희가 희생 위에서 성립된 발전을 이뤄냈음에도 발전만을 조명하는 교육과정이 가장 큰 문제이며, 덕분에 한국의 반일감정과 더불어 소모적인 논쟁을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한일기본조약은 민감한 한국 현대사에서도 건드리기 어려운 역린이 되었다.

이 문제는 한일관계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고 있는데, 일본인들 입장에선 배상금을 줬는데 또 달라는 한국이 좋게 보일리가 없고, 한국인들 입장에선 배상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니 일본을 욕한다. 21세기가 다된 지금도 대다수의 한국 네티즌들은 "어차피 '독립축하금'으로 받았으니 배상금을 받은건 아니다", "배상금을 더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고, 일본 네티즌들은 이것에 대해 "우리도 잘못한게 있지만 배상을 받고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국인들 뻔뻔하다.", "욕할거면 너네 정부를 욕해라", "식민지 역사도 오래전 일이고 배상을 한지도 오래됐는데 이걸 언제까지 울궈먹을 건가"식으로 맞받아 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들어가면 한국 정부의 병크인데 양국 국민들의 소모적 감정싸움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조약을 맺으면서 양측에서 대립한 것은 당연히 명분으로서의 지급 명목, 그리고 실질적인 지급 액수가 있었지만 또 하나의 쟁점이 지급방법이었다.
일본은 줄기차게 "우리가 일본강점기에 대한 서류와 자료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피해자 개개인에게 직접 지급하겠다."고 주장했고, 우리 정부측에서는 "피해금 지급을 위해서는 일본 관원이 한국에 출입해야하는데 이는 곤란하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대했다. 나중에 일본이 정식으로 피해자에게 지급할 것을 약속하라고 하자 "우리 못믿냐?"면서 '일본이 자료와 지급액 초안을 넘기면 한국이 책임지고 지급한다'는 이면구두합의 끝에 결국 지급에 대한 전권은 한국 정부가 가졌으며, 알다시피 이 때 들어온 돈은 피해자들에게 거의 지급되지 않았다.[10]

일본이 1962년 배상금 산정시 강제동원에 대한 배상부분은 빠져있었다는 기사가 있다.링크1 링크2 보상항목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부분들은 빠져있었다. 유가증권, 미지급임금, 은급(恩給·연금) 등 식민지 지배시 법률관계를 전제로 한 돈 에만 할당을 하였고, 강제동원에 대한 배상에 대한 항목은 산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1965년 이전의 모든 청구권 문제에 대해 끝내기로 합의했다는 점에서 현재 한일간의 법적 배상 논쟁 관련해선 의미가 없는 자료다. 비엔나 협약에 의한 조약 해석은 조약 체결 이전 문건 내용보단 조약 문구가 우선시 되기 때문이다. 만약 1965년 이후 비슷한 일본 내부 문건을 찾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한일협정에서 정의하는 바와 관계없이 '실질적인' 배상금 산정이 있었나 하는 사항을 파악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위안부 문제 관련 시민단체들이 우리에게 와야할 보상금이 포항제철이 만들어지는데 쓰였고 포항제철과 국민경제가 이처럼 성장했으니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말의 보상이라도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포스코는 거절도 아니고 무대응과 쫓아내기로 일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도움을 얻고자 만남을 요청했으나 이마저도 묵묵부답. 피해자들이 노구를 이끌고 사무실까지 찾아갔으나 문전박대.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법적 판단 이외에는 언급을 최대한 금기시하는 판결문 작성 관례로는 이례적으로 "포스코가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법적 의무도 없지만, 도의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는 판사의 의견이 들어갔다.

3. 전문

3.1.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관계와 주권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상호 희망을 고려하며, 양국의 상호 복지와 공통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양국이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긴밀히 협력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또한 1951.9.8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의 관계규정과 1948.12.12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호(III)을 상기하며, 본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여, 이에 다음과 같이 양국간의 전권위원을 임명하였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이동원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김동조

일본국

일본국 외무대신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다카스끼 신이치(高杉晋一)

이들 전권위원은 그들의 전권위임장을 상호 제시하고 그것이 상호 타당하다고 인정한 후 다음의 제 조항에 합의하였다.

제1조 양 체약 당사국간에 외교 및 영사관계를 수립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대사급 외교사절을 지체없이 교환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또한 양국 정부에 의하여 합의되는 장소에 영사관을 설치한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총회의 결정 제195호(III)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

제4조 (가)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을 지침으로 한다.

(나)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의 상호의 복지와 공통의 이익을 증진함에 있어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협력한다.

제5조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의 무역, 해운 및 기타 통상상의 관계를 안정되고 우호적인 기초 위에 두기 위하여 조약 또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을 실행 가능한 한 조속히 시작한다.

제6조 양 체약 당사국은 민간항공 운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실행 가능한 한 조속히 교섭을 시작한다.

제7조 본 조약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조약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각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서명 날인한다.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 일본어 및 영어로 2통을 작성하였다. 해석에 상위가 있을 경우에는 영어본에 따른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이동원 김동조
일본국을 위하여 椎名悅三郞 高杉晋一

3.1.1. 이미 무효 논란

논란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에서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부분이다. 조약은 한국어,영어,일본어로 각 각 1통씩 총 3통이 작성되었는데 기준이 되는 영어로는 already null and void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이미(원천) 무효라는 입장을 일본에서는 이제는 무효라는 입장이 다수설이다. 이미 무효이라고 하면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탈하면서 단행한 일련의 조약들 자체가 그 당시부터 무효였으므로 일본의 한일병합은 원천 무효이며 불법 행위가 된다.

이제는 무효의 경우에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경술국치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즉 제2차 한일협약 등의 협약이나 조약이 체결 당시에는 합법적이었으나 단지 현재 효력을 상실(무효)했다는 입장이다. 당연히 국권침탈의 연장선상이자 최종 도착지인 한일병합조약은 무효가 아니므로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된다.

당연히 식민지배 자체가 불법인 경우와 현재 무효로 되는 것은 청구권의 규모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null and void를 일본에서는 already null and void를 각 각 주장하였다. 영문판의 already null and void는 일본측의 주장이 수용된 것이다.

3.2. 청구권 협정

대한민국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서명
1965년 12월 18일 발효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양국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할 것을 희망하여,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 1 조
1. 일본국은 대한민국에 대하여

(a) 현재에 있어서 1천8십억 일본 원(108,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억 아메리카합중국 불($ 30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본 협정의 효력발생일로부터 10년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한다. 매년의 생산물 및 용역의 제공은 현재에 있어서 1백8억 일본 원(10,8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천만 아메리카합중국 불($ 3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액수를 한도로 하고 매년의 제공이 본 액수에 미달되었을 때에는 그 잔액은 차년 이후의 제공액에 가산된다. 단, 매년의 제공 한도액은 양 체약국 정부의 합의에 의하여 증액될 수 있다.

(b) 현재에 있어서 7백20억 일본 원(72,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2억 아메리카합중국 불($ 200,000,000)과 동등한 일본원의 액수에 달하기까지의 장기 저리의 차관으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요청하고 또한 3의 규정에 근거하여 체결될 약정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업의 실시에 필요한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대한민국이 조달하는데 있어 충당될 차관을 본 협정의 효력 발생 일로부터 10년 기간에 걸쳐 행한다. 본 차관은 일본국의 해외경제협력기금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하고, 일본국 정부는 동 기금이 본 차관을 매년 균등하게 이행할 수 있는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전기 제공 및 차관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유익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2.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의 실시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권고를 행할 권한을 가지는 양 정부간의 협의기관으로서 양 정부의 대표자로 구성될 합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의 실시를 위하여 필요한 약정을 체결한다.

제 2 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2. 본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치의 대상이 된 것을 제외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a) 일방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년 8월 15일부터 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사이에 타방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 및 이익

(b)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들어오게 된 것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제 3 조
1.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

2. 1의 규정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었던 분쟁은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타방체약국의 정부로 부터 분쟁의 중재를 요청하는 공한을 접수한 날로부터 30일의 기간내에 각 체약국 정부가 임명하는 1인의 중재위원과 이와 같이 선정된 2인의 중재위원이 당해 기간 후의 30일의 기간내에 합의하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당해 기간내에 이들 2인의 중재위원이 합의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과의 3인의 중재위원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에 결정을 위하여 회부한다. 단, 제3의 중재위원은 양 체약국중의 어느편의 국민이어서는 아니된다.

3.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당해 기간내에 중재위원을 임명하지 아니하였을 때, 또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제3국에 대하여 당해 기간내에 합의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중재위원회는 양 체약국 정부가 각각 30일의 기간내에 선정하는 국가의 정부가 지명하는 각 1인의 중재위원과 이들 정부가 협의에 의하여 결정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으로 구성한다.

4.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에 의거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복한다.

제 4 조
본 협정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협정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대표는 각자의 정부로부터 정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정에 서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토오쿄오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일본어로 본서 2통을 작성하였다.

대한민국을 위하여(서명) 이동원 김동조
일본국을 위하여(서명) 시이나 에쓰사부로오 다까스기 싱이찌

3.2.1. 일부 문제는 협정에 언급이 안 되었다?

이 부분은 협정의 해석 관련 내용으로 사실 기본적인 독해력의 문제임에도 오인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서술하기로 한다.

한일청구권협정 관련하여 "XX 문제나 OO 문제는 협정에 언급이 안되어있으므로 이 부분은 일본이 배상을 해야한다"라는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은 협정문의 내용을 전혀 모른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협정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래와 같은 부분이다.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중략)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한일 양국 정부와 한일 양국 국민들은 협정의 서명일(1965년) 이전의 서로에 관한 재산, 권리, 이익, 청구권 문제를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고, 이는 청구권 문제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이라고 못 박은 것이다.

한마디로 1965년 이전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선 이유불문하고 배상을 끝낸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느어느 사건이 포함되었다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아예 1965년 이전의 사건은 모두 포함된다고 당시 한일 양국 정부가 합의를 본것이다.

즉, "XX 문제는 협정에 언급이 안되어있으므로 해결되지 않았다"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XX 문제는 1965년 이전에 벌어진 사건이므로 협정에 포함된다"라고 알려주자.

3.2.2. 보상만 했다? 배상만 했다?

간혹 이 조약을 두고 "보상만 한 거고 배상은 한 게 아니다. 고로 일본은 배상을 해야 한다!" (아니면 배상만 한 거고 보상은 한 게 아니다. 고로 일본은 보상을 해야 한다!) 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위에 써있는 조약문을 읽어봤으면 알겠지만 애시당초 이 조약에는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이익,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정의가 되어있다. 즉, 보상과 배상 모두 저 조약에 포함되는 거지 어느 한 쪽만 이루어진게 아니다. 그러므로 보상만 했으니 무효, 배상만 했으니 무효란 식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3.2.3. 독립축하금이니 배상은 해야한다?

이 협정으로 인해 받은 돈은 독립축하금일뿐 배상금은 아니니 일본은 배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이 협정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는 한일간의 '청구권 문제의 해결'과 '일본의 자금 지원'이 명시 되어있다. 즉, 이 협정으로 '청구권 문제의 해결'과 '일본의 자금 지원'은 이미 확정되어 있는 사실이었고, 한일 양국 모두 이 확정된 두 사실을 자신들 입맛에 맞게 해석한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자금 지원'이 '청구권 문제의 해결'의 대가성이 있다고 주장했고,
일본은 '일본의 자금 지원'이 한일 우호를 위한 독립축하금 성격이고 '청구권 문제의 해결' 역시 한일 우호를 위한 대가 없는 대승적 차원의 결단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독립축하금이든 배상금이든 청구권 문제는 해결이 된 것이다. 만약 한일협정의 일본의 돈을 대가 없는 독립축하금으로 여긴다면, 일본이 다시 배상해야 되는게 아니라 한국 역시 아무런 대가 없이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일본의 자금 지원을 애매하게 규정하도록 허용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다면 모를까, 독립축하금이니 일본이 배상해야 한다는건 아전인수격 해석이다.

3.2.4. 개인 청구권의 소멸 여부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중략)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한일협정을 두고 국가와 국가간의 배상만 끝났을뿐 국가와 개인, 개인과 개인간의 배상은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딱잘라 말하자면 모두 끝났다. 위 협정문에 나와있듯이 한일청구권협정은 국가뿐만 아니라 국민(개인)의 청구권까지 포함시켰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청구권에는 법인(기업)의 청구권까지 포함되었다. 즉, 기업과 국민간의 청구권 문제까지 끝난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개인 청구권의 문제인데, 개인청구권의 개념을 혼동해서 배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일본은 이 조약으로 개인의 청구권 자체가 완전히 소멸된 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일본인들도 많이 혼동하는 부분인데 좀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한일기본조약(한일청구권협정) 그 자체로 실체적 청구권까지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 청구권을 한국인들이 어떻게 법적으로 구성하고자 해도 일본과 그 국민은 이에 '응할 법적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국제법상 개념인 외교적 보호권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한일청구권협정의 결과 한국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 그리고 청구권에 대해 일본이 이것을 어떻게 처분해도, 즉 한국 국민의 청구권이 일본에 의해 구제되지 않아도 대한민국으로서는 일본에게 이의를 주장할 수 없으며, 결국 일본 및 그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의 청구에 응할 법적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개인의 청구권 그 자체가 소멸된 건 아니지만, 한일기본조약으로 인해 그 청구권이 법적 의무를 가지게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한국인들의 청구권은 살아있지만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들은 그 청구권에 응할 법적인 의무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요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개인의 청구권 자체가 완전히 소멸 된 건 아니지만 한일기본조약으로 청구권에 응할 법적 의무가 없다[11]는 것이다. 그러니까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으니 법적 배상을 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건 잘못된 주장이다.

사실 이게 쉽게 이해가 되는 내용이 아닌지라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소멸된 거 아니었어?"란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3.2.5. 협정의 무효 여부

국제법상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 가해국을 면책하는 조약은 원칙적으로 무효라는 주장도 있다.#
한마디로 한일청구권협정은 무효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이 몇가지 있다.
1. 한일청구권협정 같은 조약은 전 세계에 널리고 널렸다. 아래 독일의 전후 배상 관련해서도 나오지만 독일도 중대한 인권침해 범죄를 국가간 협정으로 해결했다. 오늘날 이렇게 논란이 생긴건 박정희 정권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받은 돈을 피해자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 한일청구권협정 자체는 흔한 조약중 하나다. 이걸 무효라고 하는건 세계적으로 굳혀진 2차대전 전후 배상 체재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2. 한일청구권협정은 가해국을 면책 하는 협정이 아니라 가해국이 책임을 진 협정이라고 봐야한다. 독일의 전후 배상 조약이 독일의 죄를 면죄한게 아니라, 독일이 죄에 대해 책임을 졌다고 평가하는 것처럼 일본 역시도 한일협정을 통해 한일 양국 사이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진 것이지 한일협정이 죄를 면책하는 협정이라고 하는 건 곤란하다.
3. 강행규범의 범위와 강행규범으로 조약이 무효가 되는 경우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여러가지로 의견이 갈린다. 애시당초 이런 식의 청구권 협정이 강행규범으로 무효화된 사례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협정이 강행규범에 위반되고, 따라서 무효라고 하는건 설득력 없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정부 역시 한일청구권협정이 무효라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종합하면 차라리 협정에 대해 다른 해석을 시도하는거라면 모를까, 협정 자체를 무효라고 하는건 무리수다.

3.2.6. 역청구권 논란

이 조약에 대해서 '한국의 대일 배상 청구권도 소멸되었지만, 일제시대 당시 일본인의 재한(在韓) 재산에 대한 청구권도 소멸되었으니 상쇄된 것이 아니냐?' 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애초에 일본인의 재한 재산에 대한 처분은 미 군정에 의해 내려진 것이고(미 군정 법령 제 33호), 그 주체가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었다(물론 이것이 차차 대한민국 정부에 귀속되거나 기업가들에게 넘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이 일본인의 대한 청구권이라는 것은 연합국의 대일 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당시 제 4조 b항에서 '일본국은 제 2조 및 제 3조에 언급된 모든 지역의 미 군정에 의해 또는 그 지령에 따라 행해진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재산 처리의 효력을 승인한다' 라고 하여 1951년 당시 이미 소멸되었던 것이다. 출저

일본에서 이른바 '역청구권(재한 일본인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52년 제 1차 한일회담(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때부터였다. 이것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의 역청구권이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여 조정역을 부탁하였다. 이에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근거한 유권해석으로 일본의 역청구권을 부정했고, 일본은 1957년 시점에서 이미 역청구권 주장을 철회했다.

3.2.7. 독일의 사례

일본을 독일과 비교하며 일본은 독일을 본받아 법적 배상을 해라! 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애초에 비교할 대상이 아닌데다[12] 사실과 180도 다르다. 독일은 실질적으로 일본과 비슷하다. 관련 내용을 정리하자면...

3.2.7.1. 독일은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을 끝냈음에도 추가로 배상을 했다?
사실이 아니다. 1950~1960년대 독일이 서유럽 국가들과 나치 피해 관련해서 청구권 협정을 맺은건 사실이다. 그러나 해당 청구권 협정은 일반적인 전쟁범죄에 대한 청구권까지 포함한게 아니라 나치즘에 의한 피해에만 한정한 협정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독일은 강제징용은 나치즘에 의한 피해가 아니라며 청구권 협정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그 뒤에도 끝끝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하지 않았다. 또한 1950~1960년대 독일은 공산권이었던 동유럽 국가와는 아예 청구권 협정조차 맺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니 당연히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 동유럽 국가 배상 문제나 전쟁범죄 배상 문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을 모르는 한국 네티즌이나 기자들이 독일-프랑스의 사례를 들어 일본의 배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독일은 프랑스와 1960년에 포괄적 배상 협정을 맺어서 피해자에 대한 모든 청구권 문제를 해결 시켰음에도 나중에 추가로 배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당시 상황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독일과 프랑스는 '독불간 나치피해 박해조치로 피해를 입은 프랑스 국민을 위한 지불에 관한 조약'을 맺은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독일과 프랑스간의 나치 피해에 관한 포괄적인 배상협정이었다. 즉, 나치 피해 이외의 전쟁범죄나 강제징용 등의 배상 문제는 빠졌고, 나중에 프랑스측에서 강제징용 문제 등 추가 배상을 요구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배상 요구에 독일은 해당 문제에 대해선 배상 한 적이 없기에 당연히 배상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독일은 배상을 한 적이 없어서 배상을 한거지 배상을 했음에도 다시 배상을 한 게 아니다.

3.2.7.2. 독일은 재단을 만들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을 했다?
사실이 아니다. 2000년도에 설립된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은 법적인 책임이나 배상이 아닌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차원의 보상과 지원을 하는 재단이었다. 독일은 개인의 청구권 자체는 소멸되지 않았다고 인정하였으나, 끝내 법적 배상을 하지 않았다.

참고로 일본도 1995년 위안부 피해자들 관련해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 재단을 설립하였다. 일본도 위안부 문제의 법적 배상은 청구권 협정으로 끝났다는 입장이었으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인도적 차원의 보상과 지원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였다.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 중 다수는 이 보상을 받아들였으나, 정대협측은 일본정부의 법적 배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그리고 보상받은 사람들을 배신자라고 욕했다
3.2.7.3. 독일 대법원의 개인 배상 기각 판결
2003년, 나치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그리스인들의 유족들이 독일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건 적이 있었다. 이에 독일 정부는 "1960년대 그리스 정부와 협정을 맺어 더 이상 그리스인들에 대한 배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그리스 유족들은 "국제법 상 독일 정부의 면책은 국가 대 국가 간의 관계에 한정하며 정부와 개인 간에 관한 책임은 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사

그러나 독일 연방대법원은 "1960년대 독일 정부가 그리스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독일 정부에게 개별적으로 배상금을 받을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기사
3.2.7.4. 이탈리아의 배상 판결에 대처하는 독일의 자세
심지어 독일은 이탈리아의 강제징용 피해자, 학살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에 불복하여 이탈리아를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한 적도 있다.

2008년, 독일이 강제징용 피해자 및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배상이 끝났다며 배상 하길 거부하자 이탈리아 법원이 독일에게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기사

이에 독일은 1. 강제징용, 학살 등의 배상 문제는 국가간 조약으로 이미 끝났으며 2. 국가 면제 특권을 무시한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기사
그러자 이탈리아는 1. 강제징용, 학살 등의 배상 문제는 국가간 조약으로도 끝나지 않았으며 2. 반인륜적인 범죄에 국가 면제 특권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다시 반박했다.

한일 양국의 입장과 굉장히 유사했던 이탈리아-독일의 대치는 결국 독일의 이탈리아 제소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판가름이 나게 되었는데...

독일이 승리했다.
15명의 국제사법재판소 판사 중에 단 3명의 판사만이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배상 청구권은 국가간 합의에 의해 포기될 수 없다며 이탈리아의 손을 들어줬고, 나머지 12명의 판사는 반인륜 범죄라도 국가 면제 특권은 적용된다고 독일의 손을 들어줬다. 기사

결국 2015년 현재까지도 독일은 강제징용이나 학살 등 전쟁범죄에 대한 법적 배상은 끝났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실상이 이러니 독일만 높이고 일본을 비난하는건 잘못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적어도 배상 관련해선 독일과 일본의 입장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상에 한정해서는 일본이 독일보다 나은 점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1965년 이전의 일에 대한 법적 배상에 대해 모두 종결시켰으나, 독일은 강제징용 등 일부 문제에 관해선 특별히 청구권 협정을 맺지도 않았으면서 법적 배상을 거부했다. 이러한 독일의 태도에 분노한 독일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1990년대 소송을 걸었으나 결국 독일은 법적 배상은 거부한 채 인도적 차원의 보상만 했다.[13]

3.2.8. 미국의 사례

1999년 캘리포니아주에서 2차대전 피해자들이 독일, 일본 기업 등에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미국 연방정부에서 "배상 문제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끝났고, 정부의 외교권한을 침해했다"며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은 위헌라고 주장했다. 기사

이후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에 자극 받아 2차대전 전쟁포로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합작으로 미국에서 독일, 일본 기업에 배상 소송을 걸었다.

재판 결과 전쟁포로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패소했다.

1심에서 재판부는 "미일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르면 전쟁포로들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고 판결했다. 기사

2심에서 재판부는 "미국이 서명한 협정들은(샌프란시스코 조약) 포로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1999년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에 대해서도 "외교문제에 관한 연방정부의 독점권을 침해하여 위헌"이라고 밝혔다. 기사

3심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포로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패소하며 재판이 끝났다. 기사

한국에서는 국가간 협정으로 개인의 배상을 끝내는건 불가능하며, 설령 끝냈다 하더라도 무효라는 인식이 다수지만 오히려 세계적으로는 국가간 협정으로도 개인의 배상 문제를 해결시키는건 가능하다는게 대세다.

3.3. 문화재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문화의 역사적인 관계에 비추어,
양구의 학술 및 문화의 발전과 연구에 기여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 1 조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는 양국 국민간의 문화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가능한 한 협력한다.

제 2 조
일본국 정부는 부속서에 열거한 문화재를 양국 정부간에 합의되는 절차에 따라 본 협정효력 발생후 6개월 이내에 대한민국 정부에 인도한다.

제 3 조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는 각각 자국의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및 기타 학술문화에 관한 시설이 보유하는 문화재에 대하여 타방국의 국민에게 연구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의 편의를 제공한다.

제 4 조
본 협정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협정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하기 대표는 각자의 정부로부터 정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정에 서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토오쿄오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 및 일본어로 본서 2통을 작성하였다.


대한민국을 위하여(서명) 이동원 김동조
일본국을 위하여(서명) 시이나 에쓰사부로오 다까스기 싱이찌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서명
1965년 12월 18일 발효


한국측 대표는, 일본 국민의 사유로서 한국에 연유하는 문화재가 한국측에 기증되도록 희망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일본측 대표는 일본 국민이 소유하는 이러한 문화재를 자발적으로 한국측에 기증함은 한일 양국간의 문화협력의 증진에 기여하게도 될 것이므로, 정부로서는 이를 권장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토오쿄오에서

3.3.1. 문화재 문제

문화재 협정에서 문제가 되는 건 반환이 아닌 인도란 표현이 사용된 점이다. 당초 문화재 협정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게 빼앗긴 문화재를 반환 받기 위해 체결한 협정이었으나 '인도'란 표현을 씀으로써 일본의 문화재 강탈을 정당화 시켰다. 또 일본의 문화재 반환 책임을 의무가 아닌 '가능한 협력', '기증되도록 희망' 등의 표현을 씀으로써 우리의 문화재를 돌려받는데 일본의 자비를 구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이 협정으로 돌려받은 문화재도 소수라서 더 암담한 상황.

4. 한국 정부의 문서 공개 거부 논란

현 한국 정부의 관련 문서 공개 거부 역시 문제이다. 법적으로 비공개 기간이 지난 30년이 훨씬 지난 마당에 문서 공개를 거부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협정 과정에서 스스로 배상청구권이라는 무기를 버린 점이나 협정 체결 이후 개인에게 돌려줘야 할 배상금을 거의 돌려주지 않고 관련 공지도 거의 하지 않았으며 협정당사자 중 한 사람인 김종필이 당시 일본 기업으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받고 그 대가로 협정을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했다는 문제점을 한국정부 측에서 자행했다는 점이 문서 공개 거부의 원인이다. 이쯤되면 국가의 기본 의무인 국민의 편의와 안전을 책임지는 것을 한참 어긴 셈이다. 정부가 안티. 이 문서를 읽을수록 멘붕 중


5. 한국 정부의 문서 완전 공개와 그 파장

2004년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이 정부에 협정문 공개 소송을 걸었고, 일부 승소했다. 그 결과 전체 협정문 중 청구권 관련 5권이 일부 공개되었다. 이후에도 시민단체들과 일제 피해자들이 문서 완전 공개를 요구했다. 결국, 정부는 2005년 8월, 알 권리를 명분으로 협정문을 완전히 공개하였다.

6. 일본 정부의 문서 완전 공개와 그 파장

일본정부도 2006년 8월부터 2008년 5월까지 여섯차례에 걸쳐 협정문을 공개해서 어느정도 대조해 볼 수 있었으나, 6만페이지중 25%의 중요부분에 먹칠되어 있었다. 1 2 3 4

8. 기타

----
  • [1] 大韓民國과 日本國間의 基本關係에 관한 條約
  • [2] 물론 도의적 책임이나 과거사 부정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이 역시도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이 분명히 남아있고 교육 과정 상에 식민지배에 대한 서술 역시 포함되어 있으므로 일본이 '역사를 마냥 부정한다'는 통념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공식 입장은 변화가 없다 해도, 2014년의 고노 담화 재평가 추진 등으로 볼 때 진정으로 계승할 의지가 있는지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는 것을 무시할 순 없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 [3] 물론 충분한 배상이었느냐의 주관적인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다.
  • [4] 전술했지만 양 국가의 경제규모를 생각하면 일본에게나 한국에게나 결코 적지 않은 액수의 금액이었다. 그래서 자민당 의원 우쓰노미야 도쿠마는 "이 조약은, 전제적으로 일본으로서는 양보하는 바가 지나치게 많고...... 무상 공여 외에, 한국에 부여하는 경제적 이익이 과다하며, 그로 인해 일본 국민이 치르는 희생이 너무 크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상 공여 3억 달러, 장기 저리의 차관 2억 달러, 기타 민간 차관의 틀 약 3억 달러 이상, 모두 합해서 8억 달러 이상의 금액은, 법적 근거가 있다고 인정되는 대일 청구권에서 보자면 부당한 거액이고, 한국 경제의 반제 능력에 비추어 보건데 극히 위험한, 전망이 없는 투자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다. (윤노 후쿠쥬, 한국 병합사 연구, p.57.)
  • [5] 유상차관의 연 이자는 3푼 5리 3.5퍼였다.
  • [6] GHQ의 조사에 의하면 그 가치는 60억 불 가량이였다고 한다.
  • [7] 심지어 영국은 미국에 대한 보상도 없다!
  • [8] 그나마 이 5%도 일제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하라는 야당의 강한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준 것이었다. 당초 박정희 정권은 피해자들에게 단 한푼도 줄 생각이 없었다.
  • [9] 애초에 일본이 식민 지배 보상금을 주면서 내세운 조건이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전달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군사 정권은 이 돈을 경제 개발에 사용하고 피해자들에겐 입을 싹 닦아버렸다. 경제 성장의 결과를 떠나서 과정은 독재정권스러운 병크였다.
  • [10] 경제개발을 명목으로 강탈한건 기본이고 사전공지도 제대로 안해서 배상지급 대상자들중 5%정도만 받았다고 한다.
  • [11] 그리고 이는 한일기본조약(한일청구권협정)으로 청구권 문제는 해결되었다와 동일한 의미이다.
  • [12] 한국은 독일로 따지면 아프리카 식민지의 위치지 유럽 국가처럼 전쟁 피해국의 위치가 아니다
  • [13] 이게 위에서 언급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 얘기다. 법적 배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과 '아시아여성기금'은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3-31 19:46:36
Processing time 0.2083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