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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도회복
         [[조선족]]이 많은 [[연변]]만 해도 [한족]이 반이며, 그 밖에 [만주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간도가 회복되면 한족은 중국으로 돌아가고 조선족은 간도로 돌아갈 거라고 망상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왜 한국이 독립해도 [재일 한국인]이 있고, [소련]이 해체되도 떨어져 나간 독립국에 [러시아인]들이 많은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만주족]]들 등 30만명 가량의 소수민족이 생기게 되는데 이들 소수민족과 한족은 [[대한민국]] 정부를 지배자로 쉽게 인정하지 못할것이고 각종 사회갈등의 씨앗이 될 것이다.
  • 강희제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할 당시 앞잡이로 활약했던 한족 무장인 [[오삼계]], [[상가희]], [[경중명]] 3인은 이른바 삼번(三藩)을 형성하여 강남 일대에서 사실상의 반(半) 독립 왕국을 세워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군사력과 경제력은 청나라 조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강희제는 삼번이 청의 강남 직접 통치에 방해되는 애물단지라고 판단하고, 이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다.
         이로 인해 자칫하면 청 왕조는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했으나, 강희제는 서전의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엄격히 병사들을 단속하고 직접 전략을 총괄하였다. 민족 반역자 출신인 오삼계는 중국 한족에게조차 이념적으로 어필하는 바가 적었고 청군이 강력한 반격을 가해오자 순식간에 오삼계의 세력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결국 8년 간의 전쟁 끝에 1681년 오삼계의 근거지였던 쿤밍이 함락되고 오삼계의 일족이 몰살되면서 삼번의 난은 청 왕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이로써 1644년 입관(入關)한 후 약 40년 만에 실질적으로 청 왕조가 중국 전토의 직접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삼번의 난]] 때 조선은 [[wiki:"숙종(조선)" 숙종]]이 즉위하고 있었는데,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윤휴]]가 북벌을 무척 지지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이 북벌론을 좋아하지 않아 폐기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상과 같은 전쟁을 마친 뒤 강희제는 전력으로 국내 통치에 주력했다. 강희제는 효율적인 중국 통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한족 지식인을 포섭하려고 노력했는데, 지식인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사절을 보내 초빙하면 등용을 거부하니까 가마에 억지로 태워 시험장으로 끌고 와서 응시하도록 해 관료로 등용하려고 했더니 아예 도망쳐 버리거나 시험을 엉망으로 보아 일부러 낙제했기 때문에 강희제는 쓸만한 한족 관료를 얻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또, 그렇게 가까스로 얻은 관리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중국의 황제로서의 위엄과 지혜를 보이기 위해 강희제는 유교 경전을 비롯해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여 막대한 지식을 쌓아올렸다.
         === 만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천하 ===
         강희제는 [[홍무제]]를 [[영락제]]와 함께 높이 평가했으며, 남순 중에 주원장의 효릉에서 세 번 절을 올리기도 했다. 개인적인 존경심과 한족을 포섭하려는 정치적인 제스처였는데 강희제는 사람을 쓰면서도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크게 차별하지 않았다. 대만 정복 당시의 인사 등용만 해도 그렇고, 삼번의 난 진압 중에서도 한족 장수들을 크게 등용했다.
         [[팔기군]] 아래의 녹영(綠營)은 [[삼번의 난]] 때 활약한 주배공, 대만 정복 때 정씨정권의 군사들을 격파하는 공적을 세운 시랑 등 한족 출신 장군들과 병사들이 소속되어 있는 군단이었다. 강희제는 녹영을 팔기군과 황제 직속 부대 아래로 편제하였다. 이로서 만주족의 한족 지배를 강화하고, 동시에 한족을 군대에 받아들여 포용하였다. 이는 팔기군의 전력 약화를 보충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강희제는 [[당나라]], [[송나라]]의 [[과거 제도]]의 하나였던 전시(殿試)를 발전시켜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실시하였다. 많은 인재, 특히 [[강남]] 지방의 한족 출신 학자들을 모아서 박학홍유로 삼았고 이 가운데 뛰어난 학자들을 [[한림원]] 학사로 삼아 한족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정통성에 관련된 문제에는 강하게 대처했다. 1711년, 한족 학자 대명세(戴名世)는 자신의 저서인 《남산집(南山集)》에서 [[남명]](南明)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사용하였다. 청나라는 [[숭정제]]까지의 명나라와 달리 남명 정권은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청나라는 [[이자성]]이 숭정제를 죽였고, 자신들이 숭정제의 복수를 하면서 명나라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정작 명나라 황족이 세운 남명은 정통성이 없는 참칭 왕조로 취급한 것이다.] 대명세는 삼족이 모두 처형되었다. 청나라 왕조가 일으킨 [[문자의 옥]](文字獄) 중 하나이다.
         청나라 중국에 처음 들어왔을 무렵, 명나라는 상황이 엉망이었고 여진족 역시 한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는데, 그때문에 사방에 산적과 반란군이 들끓었다. 강희제는 물론 이들을 진압했지만, 사정을 살펴보고 단순히 생계가 어려워 가담한 사람들은 오히려 살 곳을 마련해주고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다.
         [[문자의 옥]] 문제도 있다. 이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은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통제를 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옥(文字-獄)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하고 분서시켰는데, 덕분에 많은 [[한족]] 학자들이 죽어야만 했다. 단, 문자의 옥은 강희제 때가 가장 심한것이 아니라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가경제]] 때부터 줄어들었고. 정작 강희제 본인은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려 굉장히 노력한 편이다.
         실학자 [[홍대용]]은 [[정조]]의 세손 시절,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연행 경험에 대해 묻는 세손에게 '''"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였다"'''고 극찬했다. 김종수, 세손, 홍국영, 정민시 등 꼬장꼬장한 노론계 인물들 앞에서도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였으니, 홍대용이 강희제에 대해 엄청 감동을 받긴 했나 보다.[* 그런데 홍대용은 김종수의 형 김종후(홍대용 본인에게는 서원 선배가 된다.)에게 '''한족이라 하나 변발을 튼''' 중국 선비들을 만났다고 마구 까였다.] 그런데 홍대용은 [[원명원]]이 사치스러웠던 점을 들어 [[건륭제]]는 깠다. 건륭제 때부터 청나라가 속에서 곪기 시작한 것을 생각해보면, 홍대용의 통찰이 실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라고 하겠다.
         이에 대하여 비판적인 학자도 있다. 강희제는 과거 [[한족]]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하고 적대시하던 [[만주족]] 출신이다. 한족이 중심이 된 중화인민공화국이 강희제를 추켜세우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렬한 강희제 칭송은 단지 대만 수복 등의 정치적 목적을 의도한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악비]]처럼 현대 중국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평가가 바뀐 인물이라고 할수있는 셈.
  • 객가
         객가(客家)란 [[중국]] 남부에 거주하는 [[한족]]의 일파를 말한다. 하카라고도 불리며, 이는 객가를 [[광동어|광동지역 방언]]으로 발음한 것. [[보통화]]로 발음하면 커자(Kejia)가 된다.
         [[서진]](西晉) 시절 [[영가의 난]]을 피해 마을이나 [[씨족]]단위로 뭉쳐 이주한 북중국인([[한족]])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이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 정설이 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대이동은 청나라 중기에 여러 자연재해로 인한 이동이 있으며, 청나라 말기에 발발한 [[아편전쟁]] 이후에 개항 항구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이동한 자들도 객가라고 부른다. 덕분에 객가의 정체에 대한 연구는 꽤나 까다롭다.
  • 객가어
         [[한족]]의 일파인 객가족(하카족)이 쓰는 언어이다. 별도의 민족은 아니며, 한족의 부분집단인 [객가]인의 언어로서, 객가족은 중국 중원에 있던 한족이 오호십육국 시대의 혼란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 문화적으로 갈라진 일파인데, 고대 중국어의 발음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다. 대만에도 객가어 사용자가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한다.
  • 거란
         원래의 한자 독음은 '계단/글단(契丹)'[* 좀 옛날에 나온 무협물이나 중국 사극을 보면 역자들이 생각없이 계단족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이지만, 세월을 거치면서 계단/글단→글란→그란→거란으로 변화했다. [[신채호]]가 남긴 글만 봐도 거란이 아니라 '글안'으로 적고 있는 게 보인다. 즉, 거란은 한자의 외국식 발음이 아니라 한국 내부에서 변화된 발음이다. 거란족들은 자신들을 거란어로 '''키탄(Khitan)'''이라고 불렀다. 키타이(Khitai)[* [[코난]]의 세계관에서 동방의 부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혹은 키단(Kidan)이라고도 한다. 키타이의 경우는 이란식 명칭이다. 그 영향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계 국가들과 중앙아시아 국가에서는 중국 혹은 한족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른다. [[위구르]]어의 히타이(خىتاي)나 [[포르투갈어]]의 카타이(Catai), [[몽골]]의 햐타드(Хятад), [[카자흐어]]의 크타이(Қытай) 등이 예이다. 참고로 홍콩의 항공사인 [[캐세이퍼시픽 항공]](國泰航空有限公司, Cathay Pacific Airways Ltd.)의 캐세이(Cathay)는 영어의 고어로 중국을 말하는 또 다른 단어인데, 그 어원은 거란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몽골과 중국은 이 종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 안습인 점은 거란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한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거란은 그저 [[오랑캐]]였다 보니 티베트 문제와 달리 이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안가진다. 애초에 현재 거란을 계승한 민족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지만 안습. 뭐 어차피 거란과 몽골이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고 몽골도 동계로 여기기 때문에 이점은 크게 상관없지 싶다. 정식으로는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에 사는 다우르족이 거란족을 계승했으며, [베이징] 등 화북 한족들 역시 거란족과 몽골족의 피가 진하게 섞여 있다.
  • 거세
         [전쟁 포로]에 대해서도 행해졌는데 적의 대를 끊고 적의 여자들을 차지하기 위해 이런 고자만들기가 대거 행해졌다. 그리고 적에 대한 모욕의 의미도 있었다. 특히 명나라 때 이것이 심했는데 [원나라] [고관](몽골족 혹은 색목인)의 아이를 [포로]로 잡으면 대체로 이렇게 고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몽골]족이 약탈혼 또는 [NTR]로 악명 높아서 [한족]은 이런 식으로 보복. 이렇게 고자가 된 사람 중 젤 유명한 사람이 바로 명나라 함대를 이끌고 [동남아]를 원정했던 [정화]이다. 또한 명나라에서는 묘족의 반란을 진압한 후 수 천명의 [묘족] 남자애들을 이렇게 고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바이킹]인 [노르만족]이 포로에 대해 실시. [이슬람] 세계에서도 포로를 고자로 만들기가 널리 실시되었다. [이란]에서는 19세기까지 왕조 교체가 일어났을 때 새 왕조가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을 고자로 만들었다고.
  • 건륭제
         건륭제는 황제가 된 후 존경하는 할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건륭제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벌였는데 대부분은 강희제처럼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하기보다는[* 다만 강희제가 직접 군을 이끌고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한 것은 [[준가르]]의 갈단 정벌 때 뿐이다.] 전쟁은 장군들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독려를 하는 편이었다. 이때 건륭제의 부대는 팔기군 대신 만주족과 한족이 합쳐진 군대였는데, [[준가르]] 정벌군 총사령관이었던 반제(班第), [[준가르]] 및 동투르키스탄 정벌에서 활약한 조혜(兆惠), 만주족 출신의 장수 아계(阿桂), 건륭제의 처남인 부항(傅恒), 그의 아들인 복강안(福康安)[* 여담이지만 황제의 딸에 등장하는 이강과 이태가 복(福)씨로, 극중 영비의 사촌 친정(즉 영비가 이강과 이태의 이모뻘)으로 나온다.] 등이 활약하였다.
         건륭제의 치세 후기에 총신 [[화신#s-5|화신]]이 막대한 축재를 감행하였고 이를 건륭제가 눈감아 주어 순식간에 청의 관료사회는 부패하게 되었다. 화신이 해먹은게 당시 청나라 20년치 예산에 맞먹는다고. 심지어 건륭제 본인도 말년에 생일선물로 '''금'''불상 3만개를 받는 등 재산을 모으는 데 골몰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곧바로 민생에 나쁜 영향을 주어서 건륭제가 퇴위한 이듬해인 1796년에는 한족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쇠퇴의 조짐은 보다 일찍부터 있었는데, 이미 1774년 백련교도 왕륜(王倫)이 난을 일으키다 진압된 바가 있고, 1786년에도 대만의 임상문(林爽文)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건륭제 말년의 문제들은 [[가경제]]와 [[도광제]] 대에 고스란히 짐이 된다.
         이후에는 [한족] 출신인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 위씨를 총애하였으며, 그녀의 아들인 15황자 영염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가경제]가 된다. 그녀는 사후 효의순황후 위가씨(孝儀純皇后 魏佳氏)로 추증된다.
         [[김용]]의 [[서검은구록]][* 우리나라에서는 청향비로 소개되었다.]에서도 건륭제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건륭제가 한족인데 아기 때 바꿔치기를 해서 황족이 되었다는 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나?~~ 주인공인 진가락의 친형으로 그가 한족이라는 증거와 교환 및 히로인 객사려(향향공주)와의 결혼 등의 대가로 한족의 나라를 만들기로 계약하나 태후가 그 일에 대해 알아차리는 눈치이자 대뜸 배신을 때린다. 작중에 주인공 진가락이 이끄는 홍화회에 사로잡혀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당하는 장면도 있는데 김용은 이 부분에 덧붙여 쓰기를 '''이때 손모가지가 날아갔어야 명작에 도장찍고 글자 끄적거리는 미친 짓을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까기도. 이외에 불륜까지 저질러 [[복강안]]이라는 사생아를 두는 등 전반적으로 찌질한 악당으로 묘사되고 있다.
  • 고구려
         ||[종족]||[예]족,[맥]족,숙신(말갈)족,[동호]족,[wiki:"한국인" 한](韓)족,[wiki:"한족" 한](漢)족 등||
         고구려 시기 상당기간 동안 중원이 혼란했던지라 중원에서 상당한 인구의 한족이 고구려로 유입되기도 했다.
         동북공정의 기원은 의외로 중국의 일본에 대한 방어적 외교에서 비롯되었다. [[중일전쟁]] 중 [[만주]]를 무력점령한 일본이 역사적인 정당화를 위해 만주는 중국중원왕조와 역사적으로 관계없는 지역이라는 학술연구를 시도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원한족왕조와 만주의 연결고리로서 등장한 것이 고구려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패망으로 신생중국의 만주지배는 확고한 것이 되었지만, 이후 더불어 현재 영토 영역내의 모든 옛 역사를 중화민족의 역사로 하려는 역사 프로젝트가 만들어졌고, 결국 한국과의 역사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중국의 이러한 정치에 복속된 역사공정은 물론 거의 모든 중국주변국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고 있다.
  • 고구려(소설)
          고구려가 정기적으로 낙랑에 철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을불은 숙신의 반란을 가장하여 공물로 가던 철을 빼돌린다. 이것이 들통나자 을불은 낙랑에 전쟁을 선포하고, 주아영을 노리는 모용외까지 여기에 끼어들면서 전쟁은 삼파전으로 번진다. 을불은 주아영과 함께 고구려로 철군하여 전쟁은 일단락되고 두 사람은 혼인하지만, 최비가 여전히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음을 안 주아영은 소청을 암살함으로써 양운거를 자극해 [[wiki:"분서왕"백제의 왕]]을 죽이게 만들어 최비의 눈을 돌린다. 더욱이 최비의 힘을 빌어 평정되었던 중원은 [[wiki:"영가의 난"흉노의 침입]]으로 무너져버리고, 을불은 십 년 만에 낙랑을 다시 침공하여 최비의 [[wiki:"방진#s-1.5"방진]]을 [[wiki:"전단#s-3.3"화우의 진]]으로 격파하고는 한족의 지배로부터 낙랑을 해방시킨다.
         사회적으로도 낙랑군의 토착 조선인들은 [[일제강점기]]마냥 한족들의 핍박 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서술되지만, 실제 역사는 매우 딴판이었다. 낙랑군 설치 이전부터 이미 고조선에서는 한족이 세운 [[위만조선]]의 출현으로 한족과 조선인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있던 상황이었고, 목곽묘로 대표되는 전반기 낙랑군의 고분에는 그전부터 존재해오던 토착 문화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이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린 뒤에도 일단 기존의 토착 세력들을 인정하는 가운데 문화와 인구의 이식이 실시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그들 사이에서는 조선인과 한족의 경계가 무너진 '''낙랑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집단이 형성'''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기자의 후예를 자처하며 스스로를 낙랑인이라 했던 낙랑 왕씨와 낙랑 한씨이다.
         이것이 확장되어 나타나는 것이 요하족([[동이]]) 대 황하족([[한족]])의 대결이라는 인식 구조. 애당초 고구려가 요하에 가지는 역사적 연고권이 없다거나, 역사의 대부분 시기에 요하가 중원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한 요하족이라는 개념이 어디에서 튀어나왔고 어떻게 정의되는 것인지부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최근 중국에서 '요하문명'의 존재가 부각됨에 따라 기존까지의 동이족 드립을 이름만 달리하여 반복하였다는 것인데... 우리가 서양인이라 묶어서 부르지만 이탈리아인과 영국인이 한 민족이 아니듯 애당초 선비인, 부여인, 고구려인, 숙신인, 삼한인은 있어도 그들을 하나로 포괄하는 요하족이나 동이족이라는 정체성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wiki:"동이"해당 문서]] 참조.
         거기다가 가장 가관인 것은 미천왕이 낙랑군을 점령한 뒤 낙랑에서 모든 황하족(한족)들을 추방해 버리는 대목. 아직 국가에 의한 체계적인 통제와 지배가 미발달한 고대에, 있지도 않은 민족의식보다도 계급의식이 우선하는 시대상 속에서, 그것도 고조선이 망한 지 수십 년도 아닌 400년이나 더 지난 시점에서 고조선의 유민과 한족을 구분하는 괴이한 장면이 나온다. 애초에 수백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둘은 구분되지도 않을 뿐더러 구분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 한족이든 조선인이든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굉장한 인적 자원이고, 특히 중원에서 유입되는 선진 기술과 문물을 영위하던 이들의 경우에는 고급 인력으로서 그 가치가 말할 것도 없는데 미천왕은 이들을 그냥 문전박대하고 있는 것이다! [[wiki:"태산불사토양 하해불택세류"태산은 한 줌의 흙이라도 물리치지 않았기에 클 수 있고, 바다는 한 줄기 물이라도 가려받지 않았기에 깊을 수 있다.]]
  • 고양
         고양은 [[후경]]의 난으로 인해 [[wiki: "양(육조)" 양나라]] 내부가 시끄러운 틈을 타서 공격하기 위해 이 때 팽악을 국경에 보냈다. 이 전투에서 동위는 회수와 양자강 사이의 영토를 얻었다. 550년 고양은 효정제에게 압력을 가했고 두달 후 그는 제왕(濟王)에 봉해졌다. 여름 관료들인 고덕정(高德政), 서지재(徐之才), 송경업(宋景業)등의 제안으로 황위를 얻으려했는데 어머니 누씨는 조금 주저했다. 그는 업성으로 향했는데 업성과 진양의 중간에 있는 평도(平都)에 도달했을 때다. 관료들은 고양이 황위에 오르려 예비교섭을 마쳤다는 것을 모른 체했다. 그래서 고양은 다시 진양으로 돌아갔고 효정제를 다그쳐 [[구석]]을 받은 다음 다시 업성으로 갔다. 이에 효정제는 고양에게 [[선양]]함으로써 동위는 멸망하고 북제가 개국되었다. 고양은 치세 초기 제국의 일을 주의 깊게 처리했는데 법전을 교정하고 국경의 방어진으로부터 [[선비족]]이나 [[한족]] 가릴 것 없이 정예 병사들을 골랐다. 또 세금을 공평히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부의 정도에 따라 가문들을 9개 등급으로 나누었다.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더 거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덜 거둬들인 것이다. 아버지 고환과 형 고징처럼 [[수도]]를 업성과 진양 둘로 나누고 진양을 효율적인 제2의 수도로 사용했다.
         고양은 인종적으로는 한족이었지만 아버지 고환처럼 스스로 선비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족 문화와 전통을 낮게 보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고덕정(高德政)과 고융지(高隆之)등 관료들은 고양의 이종사촌이자 강력한 장군이었던 단소(段韶)[* 단소의 모친 누씨가 고양의 모친 누씨의 언니였다.]의 환심을 사고 단소의 누이였던 단씨(段氏)를 황후로 삼으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고양은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규정에 의하여 이씨(李氏)[* 이름은 이조아(李祖娥)로 문선황후(文宣皇后)]를 황후로 삼고 그녀의 아들인 장남 고은(高殷)을 황태자로 삼았다. 대신 단씨는 놓치지 않고 소의로 삼았다. 고양이 북제를 개국하자 [[서위]]의 [[우문태]]는 대대적인 공격을 실시했고 고양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방어했다. 우문태는 북제군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557년 동생 고환이 황제가 되리라고 의심하여 고환을 체포을 하려 하자 고환은 저항했지만 끝내 사로잡혀 업성으로 압송되었다. 이에 동생 고준(高浚)이 고양의 행동을 비판하자 고준 역시 체포되었고 두 명의 형제는 나란히 지하 감옥에 갇혔다. 558년 겨울 진패선은 소장비를 몰아내고 [[wiki: "진(육조)" 진나라]]를 세우고 소방지를 죽였다. 양나라 장군 왕림은 진패선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양나라의 황족을 찾았는데 북제에 억류되어 있던 소방지의 조카 소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558년 봄 북제군은 소장을 왕림에게 보냈는데 왕림은 소장을 황제로 옹립하고 북제의 봉신이 되어 강하(江夏)를 수도로 삼았다. 559년 고양은 잦은 원정과 그의 낭비벽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났다. 그리고 황태자 고은과도 관계가 틀어졌는데 고은이 너무 한족의 풍습에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은을 폐위할까 생각했는데 한 번은 고은에게 사형을 직접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고은에게 금봉대에서 죄수의 목을 직접 치라고 명령내렸지만 고은은 이를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문선제는 채찍을 들고 그를 때렸고 이 때부터 고은은 정신상태가 불안해졌다. 그 후 고양은 술만 먹으면 황제의 자리를 동생 고연(高演)에게 물려주겟다고 말했는데 이런 말이 황위 계승의 분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한 양음과 위수는 이를 말렸다.
  • 고연
         그래서 고양의 행동을 견제할 수 잇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한 번은 고양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시종을 고연에게 주었는데 술이 깨자 왜 시종을 훔쳐갔나고 하면서 고연을 때렸다. 화가 나고 억울한 고연은 [[단식]]을 감행했고 미안해진 문선제는 전에 붙잡아 두었던 고연의 심복 옥희를 풀어주었다. 또한 고양은 동위의 황족인 원씨 일족을 모두 죽였는데 고연의 아내도 원씨 일족이었다. 고양이 고연에게 아내와 헤어지라고 했지만 고연은 그러지 않았고 그 대신 청원하여 원씨 일족이 모두 죽는 가운데 아내 원씨의 아버지 원만(元蠻)과 그 일족만은 살아남았다. 고양의 아들 [[고은]]은 총명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지만 고양은 [[한족]]이면서도 [[선비족]]의 풍습을 쫓아 생활했기 때문에 고은이 한족 문화에 너무 젖어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술만 먹으면 그는 황위는 고연에게 넘겨준다고 [[술주정]]을 해댔다. 559년 고양이 죽기 전 '''황제 하고 싶으면 니가 해라. 대신 내 아들은 죽이지 마라.'''라고 말했지만 결국 고은이 황제가 되었다.
  • 고은
         원래 할아버지 고환의 후계자는 큰아버지 [[고징]]이었다. 547년 고환이 죽자 고징이 뒤를 이어받았고 고징은 곧 동위의 효정제로부터 황위를 빼앗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549년 고징이 시종 난경(蘭京)에게 [[암살]]당했고 아버지 고양이 그 뒤를 이었으며 고양은 550년 효정제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아 북제를 건국했다. 즉위 후 고양의 아내 이씨가 [[한족]]이라는 이유로 황후가 되는 것을 몇몇 관료들은 반대했지만 고양은 이씨를 황후로 삼았고 고은을 황태자로 삼았다.
         고은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사려깊었다. 예를 들어 그는 북궁에서 연회를 베풀어 사촌들을 초청했는데 고징의 아들 고효완(高孝琬)은 초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효완의 아버지 고징이 바로 이 북궁에서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적으로 도덕적인 관료인 허산수(許散愁)를 포상하고 많은 [[비단]]을 주었으며 고은 역시 스스로 도덕적이고 학문을 좋아했다. 한족 학자들과 교류를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면 때문에 고양은 고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고은이 한족 문화에 영향을 받아 너무 유순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양은 고은을 폐위할까 생각도 했는데 한 번은 금봉대에서 고은에게 사형수를 직접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고은은 끝내 하지 못했고 [[채찍]]에게 얻어 맞았다. 이 사건 이후 고은은 [[공황장애]]가 나타나 마음이 떨리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 후 고양은 [[술]]만 먹으면 동생 고연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주정을 부렸기 때문에 계승문제가 일었다.
  • 고징
         고징은 재능은 뛰어났으나, 확실히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 고환이 살아있을 때 첩과 정을 통하기도 했고 아버지 사후에는 아버지의 첩들과 또 정을 통했다. 고환은 효무제와 마찰 끝에 효무제가 도망친 것을 알고 효정제를 존중하여 정사를 먼저 효정제에게 상주하고 연회가 있을 때에는 땅에 절을 한 뒤에 술을 올렸다. 하지만 고징은 전혀 달랐는데 [[한족]] 출신의 선비들을 등용하여 지지를 얻었지만 효정제를 완전히 무시했다. 우선 심복 최계서를 시켜 효정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잠시하게 했다.
  • 고창
         [[전한]] 시대에 이 곳은 [[흉노]]족을 막기 위한 [[둔전]]이 있었다. [[오호십육국시대]]에 [[북위]](北魏)가 화북지방을 통일하자, 서쪽으로 도주해온 흉노족 출신의 저거씨(沮渠氏)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450년 차사국을 멸망시키고 고창국을 건국하였다. 지배층은 [[한족]]으로, 한족 출신의 왕들이 통치하였다. 피지배층은 [[돌궐]]계였다. 문화는 중국적 ·서방적 요소가 혼합되었고 특히 불교가 번성하였다.
  • 고환
         [[자]]는 하륙혼(賀六渾)으로 원래 [[북위]] 발해(渤海)군 수현(蓨縣) 사람이지만 본인은 북위 6진 중의 하나인 회삭진(懷朔鎭)에서 태어났다. 고환의 집안은 [[한족]]이었지만 할아버지 고밀(高謐)이 북위 정권에서 관료로 지내다 죄를 얻어 회삭진으로 이주했다. 이 후 고환의 조상은 회삭진에서 살아 [[선비족]]의 풍습에 익숙했다. 고환의 아버지는 [[고수]](高樹)[* 고수생(高樹生)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바람. 훗날 손자 고양에 의해 문목제(文穆帝)로 추존되었다.]였고 어머니는 한씨(韓氏)[* 이름은 한기희(韓期姬)로 훗날 손자 고양에 의해 문목황후(文穆皇后)로 추존되었다.]였으며 그들의 [[장남]]이었다.
         사실 동위의 지역과 군사력이 서위에 비해 더 좋았기 때문에 고환은 서위를 공격해 제국을 통합하려 했다. 하지만 전투는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고 그 동안 서위는 점점 강해졌다. 이전에 고환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서위의 장군들이 동위로 전향했고 동위는 이 기회에 서위 진영 깊숙히 쳐들어갔다. 하지만 서위는 고환이 황제를 내쫓은 배반자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지역의 백성들은 서위의 군대를 도와주었다. 고환은 선비족과 한족의 융합을 꾀해 선비족들에게는 한족의 농사와 육축을 배우게 했고 한족들에게는 선비족의 군사적 기술을 배우게 했다. 무엇보다 효무제의 탈주는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기 때문에 효정제에 대해서 극진히 대우하며 정통성을 내세웠다. 535년 장안의 효무제는 여자 문제로 우문태와 사이가 벌어졌는데 효무제는 세 명의 사촌과 [[근친상간]] 관계였다. 하지만 우문태는 이 관계를 싫어했고 그 중 하나를 죽였다. 효무제는 화를 냈고 자기가 화를 냈다는 것을 인사를 하지 않는다던가, 궁에서 테이블을 쾅 치고 [[화살]]이 없느 빈 [[활]]을 당기는 것으로 표시했다. 결국 우문태는 효무제를 [[독살]]했고 그의 사촌 문제(文帝) 원보거(元寶炬)을 황제로 삼았다.
  • 금나라
         기본적으로 요와 비슷하게 분리적관인 통치를 했다.[* 건국 초창기에 요나라와 [[발해]]의 제도를 많이 참조했다.] 초창기에는 [[한자]]와 거란 문자를 본떠 여진 문자라는 독자 문자를 개발하는 등 여진족의 자주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중원에 정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진해서 [[유교]]를 받아들이고[* 중원을 침략한 초창기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불태웠으며 [산둥성|산동]에 있는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 역시 공자가 뭔지도 모르는(...) 여진족 병사들이 도굴하고 파헤치려고 하던 것을 마침 지나가던 [[발해]]인 출신 금나라 관료가 그 광경을 보고 '''"대성인(大聖人)이 계신 곳이다."'''라고 뜯어 말려서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중원에 정착하고 한족 왕조화된 이후에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학을 장려하였고 황제가 공자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금나라에 거주하는 [[공자]]의 직계 자손들에게 '연성공'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다른 한족 왕조들이 했던 것처럼 이들을 우대했다.] [[한족]]을 적극 기용, 남송이랑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기가 힘들어져버렸다. 송사 금열전에 따르면 '''황제와 관료들의 조복, 공복, 제복 및 황후와 비빈들, 명부의 복장은 모두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한다.''' [* [[북송]]황실의 [[면류관]]등 다수의 황실 제복들이 [[카이펑]]에 남아서 금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은 그 의상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금희종]]이 처음으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었다. [[해릉왕]]때부터 한족 문물들을 급속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금세종]]때 다시 여진의 의상을 고수하지만 [[장종]]이후로 다시 급격한 한화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중국 [[사극]]이나 [[무협]] 드라마에는 이런 점을 무시하고 한족화된 금나라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금나라 출신 인물들은 [사조영웅전|벙거지를 쓰고 가죽옷을 입은 전형적인 북방민족 복장]을 하고 나온다. 서민들은 흰색 의상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금세종]]은 여진족들의 복장과 풍습이 [[한족]]의 것과 유사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한족]]복장의 착용과 머리 모양을 법으로 금지하기도 하였지만 흐지부지되어버렸다. 당시 금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남송 의복을 입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나온 정책이었다. 금은 남송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상국 노릇을 했지만 지배층을 중심으로 남송 문화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남송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게 되고 세종 이후 재정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청나라]]는 금나라가 한족 문화에 빠져버린것을 금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보고 중원에 들어오자 [[만주족]]의 옷과 변발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여진 문자는 [[금세종]]의 보급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츰 여진족 스스로가 배우는 것을 경시하고 한자 사용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초창기의 여진 부족 체제에서 유래한 정치 제도는 유명무실화되고 경의와 사부를 설치하여 한인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도가 실시되었다. 또 중국식 신관제가 반포되고 중국식 백관의 의제와 조복이 채택되었다. 초기에는 [[악비]] 같은 걸출한 무장이 남송에 있어 이래저래 고생했지만 나중엔 [[혼인]]도 빈번해 적인지 아군인지도 애매한 입장이었고...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기를 쓰고 공격은 했다.
         금나라의 두번째 문제로, 터무니 없이 부족한 여진족의 숫자 때문에 민족 갈등이 벌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여진족은 금나라 인구의 7분도 1도 안되고, 또한 문화 수준이 본래 낮은데 극단적인 속도로 지배층이 되었기 때문에, [[한족]](漢族)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가 되어 어느새 여진족들이 자기네의 낮은 문화 등을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생겼고,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여진족의 수렵 경제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농경으로 전환이 되면서, 그 과정에서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들이 생겨난 것이다.
         금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했는데, 마땅히 그들의 빈곤도 구제해야 했다. 그런데 어떠한 방법으로? 관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한족들의 땅을 빼앗아 여진족에게 주고, 세금을 내지 않는 토지는 바로 몰수해서 여진족에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진족을 구제하면 절대 다수인 한족들의 반감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웅장한 겉과는 달리 당초에 내부적인 문제가 크던 나라이기도 하다. 나라 자체를 급하게 세웠고 소수의 여진족과 앙숙인 거란족,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과도 감정이 영 나쁜 민족 문제부터 해서 송이 공물을 끊자마자 경제가 마비될 만큼 산업 구조도 엉망인 등(...)
  • 금세종
         이후 그는 1163년 남송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본격적으로 내치에 집중했다. 우선 1164년부터 여진 문자로 경사(經史)를 번역하는가 하면, 영토와 국방력뿐만 아니라 경제와 문화에도 힘을 쏟아서 금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여진 문자가 대단히 널리 퍼져 단순히 만주지역 뿐만 아니라 화북전역으로 이 글이 퍼져 수많은 책들이 여진 문자로 번역되었고, [[한족]]들도 여진 문자를 먼저 배우게 되었다. 해릉왕 말기의 금의 인구는 1900만에 불과했는데, 1170년에 이르면 화북의 인구가 2000만을 넘고 대금제국의 전체 인구수가 3000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세종 말기, [[금장종]] 초기에 이르면 무려 5000만명에 가까운 수치까지 상승한다.
  • 김경징
         심지어 강화도의 해안선인 갑곶과 연미정 이북 사이에 보초 하나 세워두지 않고, 청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진주만 공습|바다가 있는데, 청군이 어떻게 건너오겠느냐?]"'''면서...그러나 [[요하]], [[송화강]], [[압록강]], [[목단강]] 같은 큰 강은 물론이고 [[동해]] 끼고 [[wiki:"해적"해적질]]도 하고[* [[삼국지]] 읍루전에까지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큰 사건으로는 고려시대인 1018년에 울릉도를 탈탈 털어서 우산국에게 멸망크리를 먹여버렸고, 그 이듬해에는 도이(島夷)가 [[고려]]와 [[일본]]에 침입한 바 있는데 이것도 얘네들로 강력히 추정된다.] 바다를 낀 섬 지역인 [[대만]]과 [[하이난]]도 합병 먹어버리고 [[아편전쟁]], [[청일전쟁]]때 함대 끌고 [[남중국해]], [[서해]] 바다에서 영국, 일본 해군과 해전도 치뤘던 [[만주]]의 [[청]]은, 물에 대한 금기로 말미암아 해전이 약했던 [[여몽전쟁]] 당시 [[몽골]]의 원나라[* 내륙 중의 내륙이고, 외몽골의 홉스골 호수, 부랴트의 바이칼 호수나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정도를 빼면 큰 물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다. 홉스골은 큰 호수는 아니지만 몽골공화국 영내에서는 가장 큰 물로 배도 다니며 시라무렌 강은 내몽골 자치구 내의 유일한 큰 물이다. 물에 몸을 씻는 것을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여겨 금기시하고, 칭기즈칸 때 제정된 법에 물에 [[배설물]]을 싸면 '''너 사형'''.(...) 게다가 물에서 나는 물고기나 새우 등의 수산물은 먹지 않을 정도로 물에 대한 금기가 강했다.]가 아니었다.[* 그러나 해전에 약한 것은 고비사막에서 놀던 몽골부족 시절 이야기이고 남송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원나라를 세운 뒤로는 바다 사정에 밝은 광둥, 푸젠, 저장성 출신의 중국 한족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몽골도 해전에 몹시 능해졌다. 범문호, 유복형 등 옛 남송의 수군 항장들과 한족 출신 선박 기술자들의 가세를 바탕으로 원나라 시기 배를 타고 베트남이나 일본을 쳐들어가거나 여몽전쟁 종전후 [[고려]]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나자 삼별초 세력들의 거점지인 제주도와 진도를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일본 침공하다가 해상기후를 고려하지 않은 바람에(...) 태풍에 박살이 난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 그런데 [[금나라]]나 [[청나라]]등을 세운 만주, [[여진족]]들이 실질적으로 해전에 강했는지는 의문이다.[[내륙국]]인 몽골과 달리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동해와 서해등 해안선을 맞대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해적]]질도 여러번 하는 등 해상 경험이 약하진 않았으나 조직적인 해전력은 몽골의 원나라보다 더 형편이 없었고 대만도 정성공의 난을 일으키던 [[정성공]]이 죽고 정씨 세력의 내분을 틈타 겨우 합병했다. 게다가 청나라 해군의 실제 지휘권도 [[만주족]]이 아닌 [[한족]] 출신들이 잡고 있었다. 그러니깐 요점은 말하자면 청군이 수전의 스페셜리스트는 결코 못 되도, 초기의 몽골군 같이 전형적인 물을 두려워 하는 생 초짜 유목민들은 아니었으며, 더더욱 얄랑한 강물 하나 믿고 강화도에 박혀 있을 만큼 안이하게 대응 할 수 있는 바보들은 아니었다는 거다.]
  • 남구로역
         여담이지만 남구로역 3번 출구에서 200m만 걸어가면 가리봉시장이 있는데, 그 곳에 [[차이나 타운]]이 위치해 있다. 일명 동포타운. 수많은 [[조선족]]동포와 [[한족]]들이 모여서 생활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중국어 안내방송이 나온다. [하나은행] 구로동지점도 간판이 중국어로 되어 있다.
  • 남북통일
         [한반도]는, 사실상 [[민족]]이 같으면서도 분단된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단, 정확히 말하면 민족이 같으면서도 분단되거나 다른 나라들로 갈라서 사는 사례는 많이 있다. 냉전 시대 때 독일과 베트남, 루마니아와 몰도바, 중동 아랍국가들, 코소보를 제외한 구 유고 연방 국가(코소보는 알바니아인들이 주류인데 반해 다른 구유고 연방의 국가들은 국가는 다르지만 민족적, 언어적으로 남슬라브인 계통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로루시 등 옛 소연방의 동슬라브 국가 등 민족은 같으나 나라가 갈리거나 다른 나라들로 지내는 국가는 생각보다 많다.] --[[김일성]] 개새끼-- [[키프로스]]에 있는 [[북 키프로스]]와 남 키프로스는 기독교 동방정교를 믿는 그리스 족와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족의 민족, 종교간 분쟁, 갈등이 분단의 원인이었다. 한편 [[중국]]과 [[타이완]]은 같은 언어와 문자, 혈통, 종교(유교와 불교)를 공유하는 중국의 [[한족]]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사상적인 [[국공내전|유혈 분쟁]]으로 인해 결국 각기 다른 체제의 국가들로 분단되는 등 남, 북한과 어느 정도 유사하기도 하나 국력의 크기에서도 양국 모두 [[넘사벽]]의 차이가 나는데다 역사적인 배경에서도 936년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통일된 국가를 900년 넘게 지속해온 한반도의 남한, 북한과 달리 청나라 이전까지 중국 대륙과 문화적, 민족적으로 서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으로 분리, 단절되어 지낸 시기가 상당히 길다.[* 굳이 비교하자면 남한과 북한보다는 고려, 조선시대 이전 한국의 한반도와 제주도 사이 정도?]이러한 역사, 지질학적 배경과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민주진보당]]같이 [[분리주의]]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 내몽골자치구
         몽골은 [[고비 사막]] 내외부에 따라 외몽골과 내몽골로 나뉘며 독립국인 몽골국(구 몽골인민공화국)[* [[1992년]] [[공산주의]] 폐기 후 민주공화제를 채택했다.]은 외몽골이고 중국에 속해있는 몽골은 내몽골자치구라 명명한다. [[유목민]]이 다 그렇지만 [[부족]]이 다르면 남남이라서 내외몽골은 같은 몽골인이라지만 서로를 상당히 적대시한다. 물론 내몽골의 몽골인도 엄연히 몽골의 정체성을 가지기에 동족의식을 가지는 경우도 많고 반대로 중화민족주의 같은 의식은 희박하고 가끔 [[한족]]과 마찰이 일어난다.
         현재 내몽골에서는 고대 몽골문자와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외몽골에서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동유럽]]권에서 주로 쓰는 [[키릴 문자]]를 몽골어 표기에 사용한다. 물론 고대 몽골문자도 사용하지만 그 사용 빈도는 높지 않다.] 내몽골인들은 외몽골을 [[소련]]의 [[식민지]]로 간주해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자부한다.[* 외몽골은 [[1921년]] 몽골의 장군인 [[담딘 수흐바타르]]에 의해 독립국 지위를 얻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단 외몽골은 할하 족, 내몽골은 차하르 족이며 차하르족은 일찍이 [[후금]]에 [[충성]]을 맹세하고 [[만주족]]과 계속 [[호흡]]을 같이 해 왔다. 이것과는 별개로 현재 내몽골에선 [[중국어]]가 더 많이 쓰이는데, 이는 인구의 80%가 한족 이주민으로 채워져 본진에서조차 [[소수민족]]으로 전락해버려 수치상의 약점이 크다. 그래도 내몽골의 몽골인은 외몽골 인구보다 더 많다.
         [[2012년]]에 내몽골에서 한족과 몽골족 간 마찰이 벌어지는 등 이쪽도 한족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아 보인다.
         원래 북만주에 살던 원시 몽골족인 몽올실위족이 초원으로 진출 한 후, 그들 중 한 씨족인 보르지긴 씨족에서 [[칭기즈 칸]]이라는 걸출한 전략가가 나와 몽골 부족을 통일하면서 몽골족이 생겼다. 이 몽골족은 나중에 북중국에서 [[금나라]]와 [[서하]]를 멸망시키고 [[몽골 제국]]을 세웠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 사후 후손들에 의해 나뉘어 지게 되고 그 중 하나인 [[원나라]]는 몽골과 중국을 가로 지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원나라는 100년 조금 못 가서 한족에게 밀려 몽골 고원으로 물러나 북원이라 칭했다. 한동안 내몽골 일대에는 북원과 몽골 칸국들이 일어나 명과 대치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다시금 몽골부족을 통일한 다얀 칸과 베이징을 털어먹고 원나라 부활 일보직전까지 간 알탄 칸이 있다. 이후 계속하여 이들 차하르 부족이 다스리다가 만주족이 세운 후금에 릭단 칸의 아들 에제이가 항복해 이후 만주와 함께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청나라는 18세기에 건륭제 시기에 외몽골과 신강, 티베트에 걸쳐있던 준가르 제국을 없애버리고 이 지역들까지 정복해 버린다. 외몽골은 러시아 적백내전 직후인 1921년 소련의 후원으로 사실상 위성국화되어 독립에 성공해 세계 두 번쨰 공산국가가 되었고 일찌감치 만주족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중국과 호흡을 계속 같이하여 현재에 이른다.
         인구 구성은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漢族)을 비롯하여 몽골족, 다구르족, 에벤키족, 오로촌족, 러시아족, [[조선족]] 등 49개 민족이 있다. 소수민족의 비중은 자치구 전체 인구의 약 20%이며, 몽골족은 약 400만 명에 이른다. 몽골 자체가 인구가 워낙 적어서 대부분의 주민이 결국 원나라와 북원, 차하르 통치시기에 이주한 한족으로 채워졌다. 오히려 몽골족은 원 지배기에 대거 중원으로 이주해 버렸고, 오늘날 베이징과 산시 성의 한족들에게 진하게 몽골족의 피가 섞였다. 베이징의 지명 대부분이 몽골어에서 유래할 정도로 많은 몽골인이 살기 좋은 중국으로 빠져 나가 거의 빈 땅이 되다시피한 곳이 몽골인지라 한족 이주민이 빈자리를 채우는 게 당연하다.[* 인구의 80%가 한족이라는 현실 때문에, 티베트와 달리 내몽골에서는 분리독립 움직임이 매우 미약하다. 이것을 후원할 수 있는 나라인 몽골의 힘이 중국과 천양지차인 것도 크지만...]
         이곳의 몽골족은 [몽골]보다도 더 머릿수가 훨신 많지만 [* 중국 전체의 몽골족 수는 600만, 몽골공화국은 300만에 불과하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중국 조선족이 남북한 인구보다 많은셈..], 대부분 몽골어를 잊어버렸다. 현지를 답사한 위키러의 증언에 의하면, 게르에 사는 유목민들 조차도 대부분 한어(중국어)를 말하며, 몽골어를 말하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한다. 하지만 외모를 보면 작은 눈에 광대뼈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둥근 눈의 한족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내몽골 출신의 역사적 인물로는 18세기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명안도(明安圖)가 있다.[* 몽골족이 아닌 한족이다.]
  • 노벨화학상/수상자
         || 1986 ||더들리 로버트 허슈바크(미국)[[br]]리위안저(미국)[* [한족]으로서 유일한 노벨화학상 수상자며, [대만] 출신으로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다(단, 대만에 일시 거주한 외성인을 포함한다면 하나 더 있긴 하다). 본성인.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가 포기하여 현재는 [중화민국] 국적.][[br]]존 찰스 폴라니(캐나다) ||기초 화학반응을 분석하기 위한 방법 개발 || ||
  • 단령
         단령이 본래 중국 [[한족]] 왕조들이 고안한 의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단령의 기원은 서역, 혹은 북방 유목민족 의상인 호복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북조시대]]에 처음 등징하며 이후 당나라와 송나라가 단령을 관복으로 채택하면서 중국 고유 의상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당장 [[삼국지]]등 남북조 시대 이전 시대를 다루는 창작물을 봐도 당시 중국 관리들은 단령이 아닌 다른 의상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드라마 삼국에선 관복이 이후시기에는 특별한 행사에 입는 조복으로 표현되었다.]
  • 단일민족국가
         따라서 '단일민족'이라는 단어가 일단 애초에 '''엄청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어느정도의 '단일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족] 및 기타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상위개념으로서의 민족인 [중화민족]같이, 여러 민족의 상위 집합체로서의 민족이 존재할 수 있고, 이런 경우에는 단일민족이 아닌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당(통일왕조)
         민족적인 계보상 최소한 지배층은 한화(漢化)된 [[선비족]]이거나, 한족화된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이라고 추정된다.~~그런데 사실 족보를 따지면 수와 다르게 선조가 이신이기는 하다. 중간에 섞인 케이스. 이걸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추가 설명을 하자면 이연부터가 한족계 왕조인 서량 후주 이흠의 6대손이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06999&cid=928&categoryId=1982|#]][[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03801&cid=928&categoryId=1982|#]][* 물론 수나라나 당나라 때 누군가가 황족이 선비족 후손이라고 했다간 목이 달아났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북위 효문제만 가도 선비족의 피가 100분의 1 이하로 떨어지기 때문. 그리고 당나라 황실은 성이 같은 [[노자]] 이이(李耳)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을 정도였으니...]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 불리는 [[문벌귀족|고위층]]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북조시대 이후로, 중국사를 파악하면서 북조와 수, 당을 단절된 개별 시대가 아니라 지배층 내의 정권 교체로 인해 왕조 변천이 있었던 시대로 보는 편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재야사학 분들의 주장에 주의할 점은 당나라는 선비족 국가가 아니며 선비족의 한족 식민 국가도 아니다. 사서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순혈 한족주의가 심해서 씨족지~~수백 년 전 선조까지 따지는 막장 수준의 족보였다고 한다.~~가 없어 혈통을 증명할 수 없으면 같은 한족이라도 차별을 받았다. 오죽하면 순혈 한족들에게 무시당하던 측천무후~~한족이지만 앞의 문제 때문에...~~가 씨족지를 죄다 불태우고 한족 출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민족 출신을 등용했는데 한족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정도
  • 대만계 미국인
         [한족] 등 [중국인]들의 미국 이민은 19세기 초중반부터 시작되었으나 이들은 민족적으로 Chinese로만 구분되었고 [청나라]나 [중화민국] 시절에는 중국의 분열이 없었기 때문에 따로 대만계란 정체성이 나타날 일이 없었다. 게다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탓에 대만계란 정체성을 지닌 미국인이 나타나기 힘들었다.
  • 대왕 세종
          * [[황엄]] : 고인범[* 실존인물인데 의도적으로 출신과 시대를 변경했다. 실제 황엄은 [[한족]] 출신이나, 작중에서는 조선에서 차출되어 명나라로 보내진 [[환관]]으로 설정했다. 위키백과에도 [[평안도]] [[신의주]]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대왕세종에 의한 자료로 신빙성은 없어보인다. 원래 [[영락제]]가 연왕일때부터 내관이었던 자로, 무려 3대가 지난 [[정통제]] 때의 환관 이란 주장은 근거가 없다. 조선 초기 명나라의 환관 중 조선 출신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므로 차라리 가상인물로 설정했다면 더욱 고증에 맞을 법 했다.]
  • 돌궐
         수말의 혼란 시기에 돌궐은 약 40만의 대군을 거느렸고, 그들의 힘을 빌어 중원의 황제가 되려고 돌궐로 찾아가는 [한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 동남아시아
         그런데 이 "동남아 사람처럼 생겼다."라는 말도 사실 편견이다. 동북아시아인과 이질적으로 생긴 말레이인이나 크메르인의 모습만 생각하고 동남아시아인들은 전부 그렇게 생겼을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경우 인구의 70% 이상이 중국인으로 구성된 [[중화권]] 국가이며 동남아 각국에 적지 않은 [[화교]]가 존재한다. [[타이]]와 [[베트남인]]은 본래 중국 남부에 있다가 [[한족]]에 밀려 현 위치로 이동해 온 민족이으로,[[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 베트남 사람들은 [[광둥 성]]을 비롯한 남부 중국인과 외형상 큰 차이가 없다.[*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 베트남인들이 베트남 북부에 자리잡은 후 현 베트남 남부에 있던 말레이계 [[참파]]와 크메르인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역사다. 그러니까 베트남 역사의 중심은 북부라는 이야기.] 즉, 한국인이 생각하는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동남아인'이라는 스테레오 타입과는 다른 외형을 가진 동남아 사람들도 적지 않은 편.
  • 동북공정
         중국 주변의 작은 국가들이 사실은 중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여 그 나라를 '''시조부터 뿌리채 중국으로 만들어버리는''' 실로 교묘하고도 [[병맛]]나는 작업이다. 전쟁이 나기 힘든 요즘에는 최대의 침략계획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 [[하상주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을 통해 중국문화의 유서 깊음과 우월함을 입증(?)한 이후로는 [[위구르]], [[티베트]], [[몽골]], [[만주]], [wiki:"윈난성" 윈난] 지역처럼 [[한족]]의 정통성이 부족한 변경에 집중되어 있다.
         참고로 [[중국인]]의 역사 의식은 민족보다는 '''땅에 중심을 두고 있어''' [[민족]]으로는 한족이 순수 중국인이라고 하면서도 중국땅에서 일어난 다른 민족의 역사도 중국 역사라고 본다. 동북공정은 이것의 연장선상으로, 이들이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는 건 고구려 일부가 현재의 중국 땅이기 때문이고, 민족으로 따지면 몽골의 역사인 [[원]]나라를 자기네 역사라고 하는 것도 이래서인 걸로도 볼 수 있다.
          * [http://www.segye.com/Articles/News/International/Article.asp?aid=20070605000442&ctg1=01&ctg2=00&subctg1=01&subctg2=00&cid=0101040100000&dataid=200706051750000313 태조 왕건이 한족이라고? 중국 지린성 학술지 논문 파문 (기사링크)]
          단, 이것은 중국 사학계의 주류적인 입장이 아니다. 구태여 비교하면 한국에서 [[환빠]]랑 비슷한 취급이랄까. 왕건이 한족이라는 주장은 중국 내에서도 광범위하게 인정받지는0 못한다.
  • 동아시아
         베트남과 싱가포르는 지정학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한자문화권]]이라서 그렇다. 싱가포르야 아예 [한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고. [[중동]]=이슬람문화권이라고 보듯이 동아시아=한자문화권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어서... 다만 일반적인 분류는 아니다. 애초에 이 두 나라는 [[ASEAN]]의 멤버고 정치/경제적으로도 완전한 동남아시아 국가이다. 다만 베트남 일부 특히 인터넷에서 자국 베트남은 동아시아 국가이며 절대로 동남아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인근 동남아 국가들에게 우월감(...)을 가지는 경우도 존재한다. ~~동아시아인으로서 이걸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 할지~~
  • 리콴유
         [[1923년]]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국]] 광둥성 출신의 [[객가]](客家)[* 객가인들은 한족에 속하는 작은 집단으로, 이들이 사용하는 객가 방언은 고대 중국어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어]] 항목 참조.]로, [[중국인]], [[화교]]의 후손 중에서도 [[한족]] 이주민 집안의 후손인 셈이다. 집안은 사업을 통해 꽤 성공했는데 그 덕분에 리콴유도 좋은 교육을 받았고, 본인도 열심히 공부했는지 [[1935년]]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학교인 래플스에 수석 입학했고, [[1940년]]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체를 통괄(영국령 말레이 연방)해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 마잉주
         [중화민국]의 현직 [[총통]]. 특이하게 출생지가 '''[[홍콩]]'''이다. 부모 모두 국민당원으로 [후난 성] 출신이다. 부모가 고향을 떠나 타이베이로 옮기는 과정에서 임시로 머물렀던 홍콩에서 태어났던 것. 아버지는 2차대전 직후, 국부천대 전에 근무지가 잠시 대만였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누나 중 하나는 대만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국적은 당연히 태어났을 때부터 [중화민국]([* 현재 그의 자매는 모두 중화민국과 미국 이중국적자다. 자신만 유일하게 미국 국적이 없다.]이다. 아기 때인 1952년에 가족과 함께 타이베이에 와서 성장하였다. [[한족]]의 한 갈래인 [[하카]](객가인) 출신이다. 후난 성에 외가 쪽 친적이 아직도 살고 있다.
  • 만주
          * [[연]] (중국 한족의 국가, 허베이성 동북부와 난하 유역 중심)
         [[내몽골자치구]]의 중심도시. 후허하오터(呼和浩特)는 고전 [[몽골어]]로는 쾨케호타라고 읽으며 현대 몽골어로는 후흐허트(Хөх хот)라고 읽는다. 몽골어로 푸른 성 혹은 푸른 도시라는 의미이다. 16세기에 남몽골(투메드 몽골)의 알탄 칸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도(古都) 후허하오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역사적인 도시이지만 현재 인구의 대부분은 [[한족]]이며, [[티베트 불교]] 사원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몽골]] 특유의 요소는 별로 없다.
         원래 한족의 영토가 아니었던만큼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래도 한족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한국]]과 관계가 깊은 [[재중동포]]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약 200만명 정도. 동북3성부터 베이징까지 전체적으로 분포되어 있긴 하지만 주로 지린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 참고로 국공내전에 가장 협력하여 중국에서 최초로 생긴 자치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의 주요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네이멍구자치구(내몽골자치구)도 이름과는 다르게 한족들이 전체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몽골족의 비중은 17% 정도.
         공교롭게도 한국인의 기질과 비슷한 부분이 꽤 많으나 둥베이 인구 1억의 대부분이 한국과는 별 문화적 연고가 없는 산동지방에서 이주한 한족이다. 200만 정도의 조선족은 [[구한말]]~[[일제강점기]] 때 올라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현대 한국인과는 유교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으며 북한을 사이두고 수십년동안 동떨어져 살다 보니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굳이 비유하자면 과거 한국인의 모습을 간직한 화석같은 존재. 다만 교류가 워낙에 잦다보니 한국가요를 부르거나 위성TV를 통해 드라마, 예능프로그램을 보는 등, 한국 문화에 심취하는 경우는 많다. 한마디로 [수렴진화]~~
  • 만주/역사
         >>예맥족은 한반도 남부의 한족(韓族)과 더불어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고조선, 부여와 고구려, 발해를 건국했다. 그리고 만주 동부와 한반도 북부에는 옥저 세력도 있었다.
         >>중원의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으나 고대에는 주된민족이 아니었다. 만주사의 흐름은 세 계통의 종족이 각각 터전을 잡아 활동하면서 때로는 세력을 키워 중원과 대적하는 형세를 취했다. 반면에 한족은 점차 만주로 손길을 뻗쳐 지배권을 강화해나가는 양상을 띠었다.
         전근대에는 만주라는 분리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만주족이 요동을 통일하고 한족의 유입을 막기 위해 유조변을 설치하면서 이 지역의 내셔널리즘이 강화되었으며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의 중국으로부터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주를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이런 근대의 만주 발명과는 별개로 전근대 내내 현재 만주(또는 동북)로 여겨지는 영역은 중국과 별개의 영역이였다. 사실 남북국시대까지는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가 요동이라는 하나의 인문지리적 영역으로 묶여 있었으며 고려의 서희가 여진족을 몰아내기 전까지만 해도 평안도와 함경도는 여진족의 땅이였다. 지금처럼 만주와 한반도가 칼처럼 나뉘게 된건 세종이 두만강,압록강을 국경으로 확정하고 만주족이 요동을 점령하면서부터.
         [[청나라]]는 유사시 왕조가 멸망했을 경우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잔존한 만주인을 기인(旗人), 즉 [[팔기군]] 휘하 제도로 편성하여 농장을 마련해 주었고, 17세기 후반 이후 만주 지역을 만주인 외의 다른 민족이 들어갈 수 없는 '봉금(封禁)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족]] 농민들은 봉금을 무시하고 농경을 위해 만주로 넘어갔고 농경에 익숙하지 않은 만주인들의 토지를 탈취하면서 청 후기에는 이미 만주인들을 압도했다. 여기에 정계비 설치가 무색하게 [[조선]]인도 여기에 합세한다(이는 후에 [[간도]] 떡밥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변수가 등장하면서, 그리고 청이 말 그대로 국가의 전면 붕괴를 맞게 되면서 청의 만주 보전 계획은 모두 수틀리고 만다.
         다만 만주 중국인들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탓에 더 이상 만주인만의 독립적인 지역으로 만주가 남아 있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 중국인들은 인구 팽창 정책과 [[산둥 성]]의 기근으로 인한 한족들의 대대적인 이주로 1997년 시점에 이미 1억 697만명이라는 인구를 차지했다. 이렇게 한족이 압도적인 상황인 데다가 이미 한족은 [[민족주의]]의 아래에서 뚜렷하게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인식하는 상황이니 중국에서 만주가 떨어저나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다못해 근대에 세워졌다는 만주 국가가 기껏해야 폭력과 제국주의적 사고로 점철된 [[만주국]]이었으니...
  • 만주족
         청대의 만주족은 자신들의 100배가 넘는 한족 인구를 정복하고 지배했다. 청의 인구에 비해 만주족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제도를 통해 혈통을 유지해야 했고, 한족과의 결혼은 엄격히 제한을 두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통계자료 조사에서 1982년 430만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8년 뒤인 1990년에 985만 명, 8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는 비정상적으로 증가한 수치로 신빙성이 떨어져 구라일 확률이 높다[*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많은 한족들이 세제혜택이나 두자녀 혜택 등을 노리고 소수민족으로 등록하곤 한다.]. 물론 反만주족 분위기 하에 성씨를 바꿔서 한족인 척 살다가 만주족으로 커밍아웃한 인구도 상당할 것이다. 애초에 만주족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되는 것이 과거 [[팔기군]]에 속했는지 여부인데, 팔기군 자체에 한족도 상당히 있었으니 이것으로도 구분은 불가능하다.
         중국 정부의 출신민족 구분 방법이 상당히 정치적이기때문에 내무부 소속 보오이[* 흔히 한역 음차로'포의노'(包衣奴)로 알려져 노비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노비는 아니다. 음차할때 당시 한인들도 생소한 개념이라 노비를 뜻하는 이름으로 음차했느데 최근 연구론 정복 당한 한인이 대부분라고 알려진 기존 통설도 틀렸고 만주인이 오히려 숫적으로 다수로 알려져있다. 명나라 정복이전 만주 사회에서 생산계층을 담당한것으로 평민에 해당한다. 다른 만주인들 소속인 [[팔기군]]은 기적에 포함되면 남녀노소 가릴것없이 군인 호적이다. 물론 보오이를 소유하는건 만주 귀족만 허용된다. 내무부 소속 보오이는 황제휘하 상삼기에 속하고 나머지는 팔기군 하오기 산하 만주 귀족 보오이로 속한다.]거나 한인팔기[* 팔기군 내에서 한족출신.]속했거나 혈통상으로 만주인이 아니더라도 신고하는게 가능하다.[* -마크 C.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2010년 조사에서는 10년 전보다 인구가 감소했다. 입관(1644년)당시 기준으로 [[팔기군]]내 만주인 비중은 40~45%정도였다.[* 나머지는 보오이를 제외하면 몽고팔기가 20~22% 35~40%는 한인팔기] 따라서 현재 호적상 만주인으로 신고 한 사람가운데 절반이상은 혈통상 만주인이랑 연결 되지 않는다. 이것도 청나라 시절 돈을 주고 한인 출신이 만주족 양자로 들어가거나 하는 호적 세탁을 감안하지 않은 숫자다... 사실 누르하치 시기만 해도 군대의 4분의 1이 투항한 명군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었고
         [[청나라|청]]을 세운 후에는 점점 중국에 동화되기 시작해서 나름대로 민족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장려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보도록 했다. 한자와 만주문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현판을 자금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이후 현실적으로 한인 문인들을 지배계층에 끌어들인 [[강희제]] 시대에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청 황실에서도 [[중국어]]의 사용을 허가하게 되고, 그 후에는 서서히 중국화되기 시작했다. 집단 거주지인 만주를 떠나 베이징 등 각지로 옮겨 간 만주족은 적은 인구로 300년 가까이 한족을 지배했지만, 결국은 한족에게 점차 녹아들었다.~~심지어 나중에 가면 황제도 만주어를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연구로는 만주족이 선진 문화를 가진 한족에 일방적으로 동화되었다는 결론은 지지받지 못한다. 동화되지 않으려는 노력도 있었고 지배계층은 오로지 만주인이었고 초기에도 명목상 한인을 껴주었지만 실권은 만주족이 쥐고 있었다.~~물론 후기에는 한족 출신이 다 먹어서 반란으로 나라가 망한다. 청 말기 주요 장군들이 위안스카이, 이홍장, 증국번 등 다 한족이니...~~ 강희제 후반까지 고관들은 전부 만주인들이었다. 예외는 있는데 평서왕 오삼계 일족 같은 만주족에 매우 협력적인 계층들은 좀 예외.~~물론 이런 놈들은 말이 한족이지 당시에는 한족들도 사실상 만주족 취급했다.~~ 강희제의 여동생 건녕공주가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에게 시집가기도 했긴 했다. 애초에 최소 한족들은 만주족을 동화된 상태로 보지 않았다.
         ~~백련교도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 때 함락된 성의 만주족은 죄다 학살 당했다. 심지어 오삼계 등의 만주족에게 포섭된 계층도 나중에 반란을 일으킬 때 확실하게 한족과 만주족을 구분하고 명분으로 삼았다.~~
         1912년에 청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족들의 행보에 대해 무엇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흔히 만주족들이 청이 무너진 이후에도 별 사건을 겪지 않고 독립의 의지도 없이 현 상태까지 흘러왔다는게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사실은 [[태평천국의 난]]과 [[신해혁명]]이 반청복명, 반만흥한적 성격을 띠며 혁명파 및 한족들이 만주족을 마구 학살하는 사태가 계속해서 벌어졌다. 남의 나라를 정복해서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는 구호와 분노가 더해져 아예 만족축출운동이 전개되며 가족 단위로 제거되었다[* 실제로 [[루쉰]]의 전기를 보면, 폐허가 된 구 [[팔기군]] 군영터에 살고 있는 두 명의 만주족 노파가 살고 있는데 주변 동네의 한족 어린아이들이 몰려와서 돌을 던지며 노파들을 괴롭힌다거나 건장한 남성이 근처에 올 때마다 두 노인이 겁에 질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우' 라는 이야기만 반복하더라는 일화가 소개된 바 있다. 해당 일화 자체는 구 군영터 곁을 지나가면서 그 모습을 본 루쉰과 친구의 입장에서 소개된 거라 '예전에 청나라가 득세하던 시절에는 한족이 말을 타고 이 주변을 지나가면 만주족들이 한족 주제에 말을 타고 다닌다고 비웃고 괴롭혔다'는 루쉰의 한탄으로 끝나지만, 청나라의 붕괴에서 중화민국 건국 사이에 만주족에 대한 학살이나 약탈이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
         결국 만주족들은 한족에게 분노하며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움직이지만 힘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 때 손을 내민 적이 바로 일본이었다. 즉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설립은 만주족 독립운동가들이 주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대표적인 인물로 금벽휘([[카와시마 요시코]])가 있겠는데 일본의 힘을 빌려 만주족의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생각을 가진 만주사변의 배후였다. 물론 일본의 진짜 의도는 괴뢰 국가 수립에 있었기에 요직은 전부 일본인과 친일 한족들 차지. 만주족들은 이용만 당했고, 결국 이는 일제 패망 이후 만주족들이 스스로 나라를 포기하는 결과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중화민족]]논리로 따지면 이 역시 왕징웨이처럼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악질만 아니다 뿐 엄연한 친일매국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당연히 만주족에게는 자치구가 주어지지 않았고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조기부터 분열의 싹을 잘라놓았다.
         혁명파와 그 직계인 [[국민당]]이 원수라선지, [[국공내전]]에 참여한 만주족들은 공산당의 편에서 싸웠다.[* 물론 만주족 중에서도 [[국민당]]과 붙어먹은 일파도 있었다. 이들은 국공내전 때 [국민당]과 함께 [타이완]으로 이주하였으며 오늘날 [대만] 내 만주족의 대부분이 이들의 후손이다. 그 이전에 이주한 만주족들은 거의다 한족과 동화되었다.] 공산당이 한족 민족주의가 아닌 평등을 구호로 내세운 탓도 있을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족은 만주국의 공용어조차 만주어가 아니라 중국어(한어)였을 정도로 20세기 들어와 민족성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는 거의 자취가 없어질 정도로 사라졌다. 중공당국이 특정하게 강제적 동화책을 펴진 않았지만, 소수민족 문화가 주류민족의 문화수준이 압도적인 다민족국가에서 제대로 살아남기가 힘들기 때문에 만주족은 순식간에 동화되어 버렸다. [* 이는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남아있던 루이지애너의 프랑스계나 펜실베니아의 독일계, 네덜란드계 주민들이 현재 완전동화되어 씨가 마른것도 다 비슷한 측면.]
         어찌되었던 가까운 근현대까지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민족이 쫓겨나는 일은 유럽의 식민 지배자들이나 일제 등 아주 흔하지만 현지인에게 밀려 아예 소수 민족으로 전락한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만주족은 죽쒀서 한족에게 준 셈.
         여기에는 청 왕조의 실책에 그 원인이 있다고도 한다. 심지어는 조선으로 건너가 사당패가 되기도 했던 하층민들과는 달리, 만주에 계속 남은 귀족들은 청 황실의 우대정책 덕택에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봉금정책 때문에 타민족들이 만주로 들어올 일도 없었다. 청 황실은 당연히 한족 피지배층의 반란을 최우선의 위협으로 여겼으며, 만약 한족의 반란이 일어난다면 만주는 최후방으로써 만주 귀족들의 도피처가 될 터였다. 동양의 일반적인 구도대로라면 만주는 최전선이 될 일이 없었다.--조선은 위협도 아니라 이거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문제는 전혀 새로운 세력인 러시아가 등장하면서 만주가 최전선이 되고 만 것이다!]][[러시아 제국]]은 연해주는 물론이고 하얼빈까지 직할령으로 만들었고 청 정부는 만주를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러시아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그들을 막기 위해 봉금령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중국인]], 그러니까 [[한족]]들은 기근을 피해 만주로 미칠듯한 [[러시]](...)를 시전했고, 원래부터 농부들이었기에 당연히 만주에 가서도 열심히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평생 놀고먹기만 하던 만주 귀족들은 당연히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이러한 한족들에게 땅을 임대해 주면서 지대를 받아먹고 사는 등의 생활을 했다.
         그러나 농사를 미친듯이 짓던 한족의 경제력이 어느샌가 만주 귀족들을 뛰어넘기 시작했고, 수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우위에 서게 된 한족들은 결국 만주 귀족들을 누르고 만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군의 만주국이 만주를 지배하던 시대에도 만주의 중국인들은 3등 민족으로 여겨져서 탄압을 받긴 했지만 다른 땅으로의 강제이주나 철거령 같은 건 없었기에 그 기반을 잃진 않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는 확고한 주도권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만주족은 이용만 당한 셈.[* 도리어 일설에 돌았던 "중간 민족 조선인"들보다 관직을 더 많이 받았다. 일본인>>>넘사벽>>>만주족>중국인>=몽골인>=조선인이었던 것. 조선인의 만주국에서의 위상은 거의 없었다.]
         한족과 조선족이 [[개]]를 식용으로 열심히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인들은 개를 먹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 태조 [[누르하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가 구해줬다는 전설 때문이다.
         현재 중국에선 [[소수민족]] 중 하나이며, 만족(滿族)이라 부른다. 이는 만주(滿州)족이라 부르면 만주 대륙은 모두 만주족의 땅이라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어서 억지로 만족으로 바꿔 부른다. 청나라 시대에 자기 언어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한족에 동화되었으나,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는 나름 자부심 있는 민족으로 광시좡족(약 천6백만명~2천만명)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이다.[* 인구 수로 만주족 바로 뒤를 잇는 소수민족은 후이족(회족)이다.] 약 1068만명 정도가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살고있다(2000년도 통계). 자치현이나 자치구도 군데군데에 있긴 한데 어차피 한족에 거의 다 [[동화]]된 상태라 한족이랑 별 차이는 없다. 차이점이라면 진(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신라나 가야와는 전혀 관계 없고''' 청나라의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성씨일 뿐이다.
         물론 민족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하느냐에 따라 만주족을 한민족으로 볼 소지도 있긴 하다. 어쨌거나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민족인 것 자체가 한 때는 한 혈통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화적인 민족의 범위를 기준으로 보면 만주족=한민족 설은 상당히 무리가 많은 것도 사실이라는 점이 문제. 무엇보다 그런 식이면 중국 한족=한민족 설도 어느 정도는 말이 된다. 한민족의 혈통에는 중국 한족의 피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으니까. 또한 한국인=일본인 설도 틀린 게 아니다. 당장 일본인 중에 상당수는 백제계 유민이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엄청난 무리지만, 딱히 한국을 겨냥한 대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대외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즉 한족의 영역에 포함된지 얼마 안되는 만주를 중국 고유의 것으로 확정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 명나라
         || [민족] |||| 한족 ||
         명나라의 전 시기인 몽골 진출 초기와 원 제국 초기, 그리고 말기에 엄청난 난세로 인해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가 쇠퇴한 점도 고려해줘야 한다. 몽골 진출 극초기의 학살[* 이 학살은 오고타이 칸 시절에 끝난다. 북중국을 다 정복했기도 했고 쿠빌라이가 북중국 통치를 잘했기 때문인데, 이렇게 통치를 잘 해서 얻은 세력으로 아릭부카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남송의 경우도 쿠빌라이 칸이 친중적이어서 전과같은 학살은 없었다. 그래서 학살로 인한 인구감소는 생각보다 적었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그리고 원나라의 가혹하고 무능한 통치와 극심한 인종 차별[* 위에서 말했다시피 북중국의 경우 쿠빌라이가 다스리는 시기 이후로는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는 등 이 원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쿠빌라이 칸]] 항목 참조), 그 후에도 중국 전체로 보더라도 이 원인으론 인구감소가 일어나지 않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령, 원나라의 인구는 대부분이 한족(몽골과 색목인 층의 수는 약2~300만인데 비해 한족의 수는 일단 한인의 수는 약1,000만, 남인의 수는 약6,000만, 합쳐서 약 7,000만 정도. 한인이 아무리 발해인, 거란, 여진 등을 포함한다 쳐도 원나라 인구의 대부분은 한족이었다.)인데도 계속 늘고 있었다. 1290년에 약77,000,000, 1293년에 약79,816,000, 1330년에 약83,873,000, 1350년에 약87,147,000, 명나라의 인구는 1393년에 약65,000,000. 영문위키참조.],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염병[* 흑사병으로 죽은 인구수는 중국이 유럽보다 더 많았다. 약 3300만명이 죽은 것으로 보여진다. [[흑사병]]항목 참조]의 발병으로 인해 중국의 인구는 많게는 30 ~ 40%가 감소했으며, 특히 북중국 지역은 4천만을 바라보던 인구가 1천 5백만 이하로 감소해 버렸다. 경제에 관해서는 사실, 원 대 대부분엔 중상주의적 정책과 항저우와 대도(베이징)를 잇는 운하, 그리고 원의 국내 상업로와 국제무역선의 연결을 통한 수공업생산과 판매와 톈산 남,북로를 통한 내륙의 상업로등의 이유로 경제력이 강력했다.[* 두산백과 '원의 사회경제' 참고] 애초에 몽골제국이 해준 역할로서 언급되는 것이 '역전설치와 도로정비등을 통한 동서문물 교류 촉진'이 있다. 하지만 원은 말기에 유목민 지배층의 낭비와 엄청난 군사비로 인한 적자를 교초를 많이 발행해 해결하려고 해 지폐가치가 폭락하게 했었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참고] 명 초기에 자급자족의 경제정책을 선택한 원인은 원이 교초를 무더기로 찍어내면서 화폐 경제 자체가 무너져 버린 탓도 있다.
         조선은 명의 복식을 받아들였으며, 명나라가 청나라에 침공당하여 멸망한 뒤에도 많은 부분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 때문에 명나라 문화가 조선에서 보존되는 효과가 일어났는데, [[청나라]]로 왕조가 바뀐 뒤에는 [[한족]]의 복식은 [[만주족]]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족]]이 겪은 문화적 상실감을 조선에서 보충받은(…)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같은 일화가 있다.
  • 몽골
         [[2010년]] 들어 [[wiki:"반중" 반중국주의]]가 확산되어 중국인을 대상으로 폭행하는 집단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http://web2.ruliweb.com/ruliboard/read.htm?num=188981&table=society_news&main=cmu #] 워낙 이쪽의 역사가 [[한족]]과 [[유목민족]]의 싸움이다 보니 이런 성향은 제법 예전부터 있었다. 중국인을 호자(хужаа)라고 부르기도 했다. 호자는 돼지를 기르는 놈이라는 얘기다. 몽골은 목축을 고결하게 여겼기에 돼지를 기르는 것을 멸시했다. 하지만 반중의식이 본격적으로 커진 것은 [[한족]]에 대해 크게 경계심을 가지게 된 근대에 이르러서이다. 그래도 [[중화민국]] 시절은 그럭저럭이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감정은 최악 중의 최악. [[중국]] 측에서 먼저 몽골을 자신들의 영토에 포함시킨 지도를 그리는 등의 [[병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건 사실은 대만에서 나온 중국 지도의 영향을 받은 거다. 공식적으로 하자면 대만은 몽골을 자국 땅이라 주장하지만 중국은 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 다만 대만이 현실적으로 힘이 없다 보니 대만과 몽골은 오히려 그런 충돌이 없다.
         현재의 몽골-중국간 갈등의 기원을 찾자면, 일단 청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몽골은 [[중원]], [[티베트]], [[위구르]] 지역과 함께 청에 병합되어 있었다. 다만 청은 한족이 아닌 [[만주족]]의 국가였고 오히려 [[후금]]시절 '''만몽 연합정권의 성격을 가지고 중국을 다시 정복'''했으며, 청은 주변부 지역들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중원과 남부에서는 명나라를 계승한 중국의 천자를 칭하고, 북방에서는 몽골제국을 계승한 칸이 되는 여러 얼굴을 가진 황조였다. 티베트는 존중해 주었고 위구르는 식민지 취급, 만주는 성지 취급하여 만주족 외의 민족은 출입금지, 몽골은 일찍 복속된 내몽골과 후에 정복된 외몽골을 따로 취급, 분리했고 [[징기스칸]]의 성씨를 계승하는 내몽골의 보르지긴 황족과 만주의 애신각라 황족은 정략 결혼을 했으며 청의 황제는 칸위를 겸했다. 당연히 몽골 입장에서는 '한족의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wiki:"신해혁명"한족의 독립혁명]으로 청이 멸망하고 몽골 역시 독립을 선언하지만, 중국은 근대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그 소속부 지역, 민족들의 관계에 대해 [[서구]]식 [[식민지]] 개념으로 이해, 도입하였다. 구 청나라의 모든 영토와 민족에 대한 지배권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주장, [[티베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에서도 이를 승인하여 [[몽골]]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소련이 [[중화민국]]과 전쟁을 치르던 [[중국]]을 지원하는 대가로 외몽골의 독립을 보장해준 것이다. 중화민국은 소련 때문에 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였다가 소련과 단교한 후 이를 취소하였다. 따라서 대만은 몽골과 비공식 관계를 유지하기는 하지만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냉전 시대 땐 비공식 관계조차도 없었다.
         중국 역시 과거에 워낙 몽골에게 당했던지라 매우 감정이 좋지 않다. 여기서는 반대로 [[한족]]주의자들의 몽골인 폭행도 일어난다. [http://china.huanqiu.com/zhuanti4/2012-01/2369943.html 몽골은 잃어버린 중국의 영토(...)라 카더라.] 일단은 청나라의 영토를 운운하지만, 민족감정을 들여다보면 대놓고 '[wiki:"모택동" 현 왕조의 태조]는 최초로 만주고 몽골이고 뭐고 북방을 완전히 장악해버린 한족이다' 라며 뭔가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중국이 몽골을 지배하는 것을 복수 정도로 여기는 듯(...). 이따금 몽골인과 중국인 키배를 보면 매우 살벌하다... 어쨋든 수틀릴대로 수틀린 골이 깊은 관계.
  • 몽골 제국
         정작 심하게 피해를 입은 국가였던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꽤나 우호적으로 보는 편. 나름대로 잘 나가던 [[송]]이 싸그리 갈린 것도 그렇고 [[고려]]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문화재가 파괴되고 사회가 개판이 되는데 일조한 것도 그렇고 솔직히 좋게 볼 이유는 없는데...[* 강자에 대한 동경, 같은 동북아시안이라는 동질성, 그리고 고려 침략기의 피해중에는 몽골의 직접적인 간섭 말고도 고려 정부의 삽질에 의한 것이 컸던 사실도 기반한다.] 다만 중국은 정부적인 입장 및 공정 외에 별개로 일반적인 [[한족]]들과 [[몽골인]]들의 감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특히 남부지역 한족들의 몽골에 대한 감정과 외몽골의 [[몽골인]]들의 한족에 대한 감정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웬쑤'''.[* 전체적으로 중국 내에서 북방구과 남방구의 사이가 안 좋기도 하다. 이런 중국의 지역감정은 [[둥베이]]vs[[광저우]]로 대표된다. 일명 [[경상도]]vs[[전라도]]의 대륙판. 사실 신해혁명 발발시에도 [[위안스카이]]의 적절한 조치(?)로 어정쩡하게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광동을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인 남군과 북양군으로 남북이 갈릴 뻔 했으니...] 바이두나 해외 아시아인 포럼에서 [[몽골인]]과 [[중국인]]의 키배를 봐도 무지 살벌하다. 한족주의자들 에게는 한족에게 가혹한 통치를 펼친 [[원나라]]는 야만적이라는 평가가 일반적. 그런데 어쨌든 넓고 강했으니까 원나라를 최고로 치는 [[한족]]들도 꽤 된다. 물론 이런 반감은 만주족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청나라 역시 야만족이라고 폄하하고 한족 명나라를 마지막 중국왕조로 보는 입장도 많다. 이 입장에서 청나라는 그냥 만주의 식민지배였을 뿐이다.
         현재는 중국 내의 몽골족들에게 민족차별이 존재하기도 한다. 외몽골에서는 [[중국인]]이나 [[한족]]의 혼혈을 심하게 경계한다. 보통 반중은 [[중공]]에 대한 반감을 얘기하는데 [몽골](외몽골)의 경우는 한족, 화하족 자체를 민족적으로 혐오, 증오한다. (그런데 따져보면 [[몽골]] 자체를 [[중국]]과 엮이게 만들어버린 주범인 [[만주족]]에게는 왠지 호의적이라고...[* [[여진족]]의 후손들이 살고있는 중국의 '완안촌'에서도 멸망의 주 원인인 몽골이 아니라 [[악비]] 등 한족 장수들을 증오하는 풍습이 남아있다고 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즈음해서 반중정서가 크게 확산돼 지금에 이른 듯. 그런데도 왠지 서양과의 논쟁에서는 서로 치켜세워 주는 훈훈한 광경이 연출되기도... 중국 학계나 넷상에서 영어권에 맞서 최대 제국 순위에 대영제국이 아닌 몽골제국을 1위로 주장한다던지, [[몽골인]]들도 "서구는 [[산업혁명]]과 대항해 시대로 중국을 넘어선 거잖음?" 한다던가.
         서구 학계에서는 원래 야만적인 파괴의 제국이라는 평가가 강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동서양 교류의 촉진을 통해 세계사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는 재평가도 힘을 얻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도 이전까지는 몽골과 유목민족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자체가 부정적이었지만, 현재는 정체된 한족의 중화문명에 유목민족이 끊임없이 일종의 문화적, 인적 수혈을 해주었다는 긍정적인 견해 또한 제시되고 있다.
         결국 [[홍건적]]과 같은 반원 한족 세력이 크게 대두되는 중 [[주원장]]이 득세하였고, 원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만리장성 북쪽인 내몽골의 후룬부이르(응창)로 도망가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이 일대에 잔존했다. 그러나 1388년 이마저도 주원장에게 멸망당했으며, 칭기즈 칸계 왕통은 15세기 후반 다얀 칸 시대까지 끊겨 있었다. 그 사이 몽골 초원의 공백은 다른 몽골계 민족인 오이라트가 메웠다.
          * [[북원]] - [[한족]] 왕조인 [[명]]에 밀려서 내몽골 고원으로 후퇴한 뒤의 원나라. 지금의 후룬부이르인 응창에서 항거했다. 그러나 금방 멸망했다. 그리고 외몽골에는 또 다른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 인이 자리잡았고 이들이 몽골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며 최초의 오이라트 계통 대칸인 에센 칸이 나오지만 그 역시 금방 암살당한다. 북원의 영역은 현재 내몽골 자치구와 만주 북부이다.
          * [[거란]] - 몽골계에 속하는 요서 지방의 유목 부족으로 요나라를 세웠다. 현재 중국 소수민족 다우르족이 후계 민족이며 한족과 몽골족에 동화된 이들도 많다. 아니 사실상 베이징 등 북방 중국인의 조상은 몽골계 종족들이라 봐도 된다.
  • 문익점
         [중국] 본토에서 [한족] 부흥을 내세운 [[홍건적]]이 [고려] 영토까지 침범해 공민왕이 피난을 가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원나라]와의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들이 [wiki:"하라는 공부는 안하고"하라는 사행은 안하고]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왕으로 옹립해버린 것.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문익점과 그 일행들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반발한 [원나라] 조정[* 이라기보다는 [[기황후]]의 불만이었다. [공민왕]은 반원자주정책 과정에서 부원배인 기철 등을 제거하는데, 이게 [기황후]의 일가인 것이다. [기황후]는 자기 친정을 박살낸 것에 불만을 품고 [공민왕]을 적대한 것이다. 사실 [원나라] 입장에서는 당장 [홍건적] 처리가 더 큰 국가적 문제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기황후]의 이런 행동은 그야말로 답이 없다.]에서 [충선왕]의 손자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임명해서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 이에 [원나라] 조정에 있던 사신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와 [공민왕]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1차 사신단은 [기황후]와 [원나라] 황실에 설득되어서 덕흥군 지지파로 임시 조정까지 꾸리고 앉아있었고, 2차 사신단에 대해서 포섭이 이뤄졌는데 이들이 갈렸다.] 이중 일부 사신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귀국을 미루었는데[* [공민왕]을 지지했던 홍순, 이자송, 황대두, 김유는 돌아왔고, 이공수는 붙잡혀 있으면서도 협력을 거부하면서 결국 덕흥군 일파의 움직임을 [고려]조정에 알려서 [공민왕]이 이를 대처하는데 최대 공로를 세웠다. 그러니 이공수를 제외한 나머지 잔류 2차 사신 일행은, 원래부터 자리잡고 있던 1차 사신 일행과 엮여 덕흥군파가 되거나, 덕흥군파로 분류되고 말았다.], 잔류했던 문익점 역시 '''덕흥군파인 셈.'''
          * 이 시기 강남은 [[홍건적]]이 득세하고 [[한족]]이 난리를 치던 상황이라서 [원나라] 조정의 힘이 미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목화]] 하면 강남산이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권근]]이 처음 언급할 때는 그냥 '강남에 가서 가져왔다' 였는데, 그걸 [[남효온]]이 쓴 책에서는 강남에 유배간 것으로 고쳐버렸다.[* [[생육신]] 중 한명인 그 남효온이 맞다. 다만 [[사육신]]에 대한 '''전기 소설'''인 '육신전'도 그렇고, 남효온도 같은 생육신인 [[김시습]]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달인이었다. 남효온이 문익점을 띄워준 것은 앞서 언급한 온건파 사대부의 계보 때문이다.] 그리고
  • 뮬란
         이 이야기의 원작인 화목란 서사시의 배경은 [[남북조시대]]이다. 목란이 사는 나라는 북방에 살던 [[선비족]]이 중국에 침투해서 세운 나라인 [[북위]]이고, 실제로 목란이 자신의 황제를 [[가한]](可汗)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원조 [[중국인]]인 [[한족]] 입장에서는 황제나 샨유나 모두 사이좋은 [[오랑캐]] 친구들.(...)[* 물론 북위가 한화 정책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뭐, 한화 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6진의 난]]으로 나라가 망하긴 했지만...]
  • 백제
         ||[종족]||[예]족,[맥]족,[wiki:"한국인" 한](韓)족,[wiki:"한족" 한](漢)족 등||
         백제는 낙랑군, 대방군의 한족과 접촉하면서 일찍부터 중국 문명을 받아들이며 [[유교]]를 수용했다. 유교를 국가적으로 장려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시기에 역사서〈서기(역사서)〉가 편찬되었으며,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흥성했다.
  • 베트남
         베트남인의 원주지(原住地)는 [[중국]] 남부라는 설이 있다. [양쯔강] 이남에 살다가 황허 근방에 살던 [[한족]]에게 계속 밀리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당나라때만 해도 이 지방은 밀림에 둘러싸인 오랑캐 영역이었다. 베트남인의 유전자 조사에 의하면 현재 화남 지역 중국인과 중국 소수민족인 [묘족]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도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베트남 본토 자체도 중국에게 여러 번 공격당했기 때문에 중국과는 역사적으로 사이가 매우 나쁘다.
         베트남 정부가 공인한 소수민족 숫자는 54개이다. 하지만 전체 민족의 82% 정도를 킨족이 차지하기 때문에 킨족이 사실상 베트남인인 셈이다. 여기도 주변 동남아 나라들이 거의 그렇듯이 [[소수민족]]들에게 장난아닌 [[탄압]]과 차별을 해왔다. [[중국]]에서는 [[한족]]이 실세이듯이 베트남에서는 비엣인(Người Việt, 越人)이라 불리는 킨족(Người Kinh, 京族)이 왕초 노릇을 하기 때문에 오죽했으면 [베트남 전쟁] 당시 므엉족이나 참족같은 [[소수민족]]들은 미군에게 붙어 베트남 녀석들을 아주 다 죽이겠다고 이를 갈았을 정도였다. 물론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은 그린베레 등의 특수부대를 보내 훈련시켰다. 사실 베트남 다수 민족인 킨족의 역사가 참족의 나라인 참파를 정복해 나가는 역사인데다가 19세기가 되어야 지금의 베트남의 영토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남북간의 문화가 상당히 이질적이다. 인종적으로도 확 구분이 갈 정도다. [미군]들은 이 므엉족 참족을 실컷 이용하다가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가차없이 철수했, 남겨진 이들은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 전역에서 매국노로 몰려 엄청난 학살과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이웃 나라로 수많은 난민들이 탈출하기도 했고 지금도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온 미국 영화 <그랜 토리노>를 보면 이런 소수민족 출신의 이민자들의 삶이 묘사되고 있다.영화 자막에서는 '몽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므엉'족이다.
  • 베트남인
         베트남인의 대부분은 킨족(징족)으로, 그 외에 54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킨족의 원주지(原住地)는 [[중국]] 남부라는 설이 있고 실제로 [[광시좡족자치구]] 일부지역에도 [[중국/민족#s-43|킨족(징족)이 거주하고 있다]]. [양쯔강] 이남에 살다가 황허 근방에 살던 한족에게 계속 밀리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당나라때만 해도 이 지방은 밀림에 둘러싸인 오랑캐 영역이었다. 베트남인의 유전자 조사에 의하면 현재 화남 지역 중국인과 중국 소수민족인 [묘족]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도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오래전부터 중국과 얽히고 섥히다 보니 [[한족]]들도 산다.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때 함께 들어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대부분이었고 이 쪽으로는 시 니엡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사섭]]이 있다. 리 왕조(1009년~1225년)를 건국한 이공은(李公蘊)도 원래 [[복건성]]에서 이주해온 중국인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명나라]]가 망해버리자 명나라 유민들이 대거 베트남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이 유민들은 훗날 베트남이 [[메콩강]] 일대로 진출할때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베트남이 예전부터 워낙 좋지 않았고 [[베트남 전쟁]]과 [[중월전쟁]]의 여파로 1978년~1979년 2년 사이에 [[화교]]를 포함한 중국인 45만명이 베트남을 떠났기 때문에 베트남에 소수민족으로 남아있는 한족의 수는 적은 편.
  • 변발
         [[중국]]을 정복한 유목민족들은 이 머리를 [[한족]]들에게도 강요했는데, 특히 이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에 심했다. 1644년, [[순치제]]는 치발령을 내려 이 머리를 모든 한족들에게 강요했으며 이는 청 대를 이어가며 중국의 풍속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치발령이 떨어질 당시에는 아직 [[남명]]과 같은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한족들은 야만족의 풍습을 따를 수 없다면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다. 게다가 머리를 한 가닥만 남긴다는 자체가 조선의 유생들이 [[단발령]]에 반발한 것 처럼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에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특히 보수적 경향이 강했던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 때문에 본보기로 성 하나를 전부 도륙한다는 도성(屠城)을 시행해 양주 대학살과 가정삼도가 일어났다.
         오늘날 중국에서 제작된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절 남자들의 머리 모양이 당시의 금전서미가 아닌 청 말기에 나타난 음양두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만일 진짜로 그들 시대에 음양두를 하고 있었다면 [끔살|당장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차라리 [[강철의 연금술사 FULLMETAL ALCHEMIST|강철의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배커니어|버커니어]]의 머리 스타일이 원래의 변발에 가깝다. 한편 이러한 변발령에서 예외인 자들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승려'들이었다. 때문에 변발을 피해 [[승려]]가 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변발보다는 삭발이다~~ 비교적 종교에는 관대한 유목민 왕조의 특징인지 일부 [[도사]]들도 제외되었다고 한다. 만약 청나라 시대, 그것도 한창 변발 보급하던 초창기가 아니라 변발이 정착된 시기가 배경인 사극에서 예전 한족 옷을 입고 속발을 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무조건 도사다.[* 영화 무인 곽원갑에서도 중간에 순식간에 지나가긴 하지만 도사로 추정되는, 변발이 아닌 속발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어떤 드라마에도 다른 남자들은 다 단발을 하고 있는데 도사인 듯 유독 혼자서 속발을 한 사람이 나와 뭐라뭐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런 게 괜히 나온 것일 리도 없고... 비록 속발이 청에 의해 금지되고 일부 도사에게만 허용되긴 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의외로 변발이 없어진 것보다 더 뒤일지도 모르겠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이렇듯 엄청난 반발이 있었는데, 점차 '역시 남자라면 변발이 멋져야 함'같은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변발을 전문으로 가꿔주는 직업이 등장하는 등 한족들, 특히 화북 지역 중국인들의 경우 만주족들의 풍습처럼 중히 여기게 된다. 그래서 [[신해혁명]]을 전후로 혁명의 의미로 변발을 자르고 민간에도 '변발금지령'을 내렸는데 여기에 대해서 다시 저항이 있어 가위를 들고 변발을 잘라가는 광경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북방민족에 동화된 일부 지식인들은 '변발은 우리의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것이므로 자를 수 없다.'같은 주장으로 반발했다고... 사실 이런식으로 변발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거의 현대 초기에까지 내려오다 보니 변발이 폐지된 뒤에도 아예 '''머리를 그냥 밀어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지금도 중국에서 나이 드신 분들은 거의 '''[스킨헤드](...)'''이신 분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현 중국 정부의 제재 탓도 있긴 하지만 중국에서 장발을 자주 볼 수 없고 오히려 '''천진반'''들을 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만들어진 전통(?) 때문.
         19세기 말 청나라 사람들의 [[미국]] 이주가 활발해졌는데, 미국인들은 중국인의 변발을 보고 [[돼지]] [[꼬리]](pig tail)라며 조롱했다..[[능지처참]]과 마찬가지로 이런 머리를 하는 중국인은 야만적이므로 우리가 개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널리 이용되기도 했다. [[손문]] 등의 혁명가들은 외국인 친구들에게 변발은 원래 중국의 풍습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오해를 풀고 다녔다고 한다. 극단적인 경우 원래 한족의 상투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과거 한족이 어떻게 머리를 묶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변발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실전(...).
         오늘날 중국에서는 아무래도 전통 한족의 문화는 아닌데다가 비주얼적(...)으로 좀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에서도 변발을 비난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얼른 변발같은 유목민족의 풍습이 아니라 전통 한족의 모습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고...~~어찌보면 한족민족주의 지식인들 입장에선 정말 흑역사다. 자기들 풍습이 아닌 걸로 외국에 그런 이미지가..~~
  •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 국호를 고친 [[청태종]] [[홍타이지]]가 [[명나라]]와의 전면전 전에 친명 성향의 조선을 확실하게 무력화시키려고한 전쟁이다. 또한 경제적 이유에 대한 논의도 있다. 당시 청나라는 내몽고를 제압하고는 만리장성 축조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내몽고 지역으로 우회하여 명나라의 북부에 들어가 대규모 약탈과 공격행위를 벌이고 있었지만,[http://baike.baidu.com/view/8961370.htm 바이두 백과사전의 청병입새][*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변방에서 명나라가 청나라를 막고는 있었지만 우회해서 들어온 청군이 베이징 주변의 현대 행정구역 기준으로 허베이성, 멀게는 산둥성까지 내려가서 약탈을 행했다는 내용. 병자호란이 있던 1636년도에는 홍타이지의 동생인 아지개가 만리장성을 우회해 현대 행정구역상 베이징시 외곽구역인 창핑구 외 16곳을 공격해서 가축 17만여 마리를 약탈하였다. 명나라로서는 수도 앞마당까지 약탈당한 셈. 병자호란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약탈은 계속되어, 병자호란 2년후에는 명으로부터 가축 46만마리를 약탈하였으며, 1642년, 즉 병자호란 6년 후에는 금 2200냥, 은 200만냥, 진주 4400개가량, 가축 32만마리를 약탈하는 등 청나라는 지속적으로 명나라를 약탈해서 엄청난 물자를 얻어냈다. 조선이 금화 100냥, 은화 1000냥을 청에 바치는 것도 힘겨워한 것에 반해, 병자호란 6년 후 시기에 명나라로부터 청나라가 약탈한 물자는, 조선이 바쳤던 공물을 기준으로 금 22배, 은 2000배에 달한다.] 이와 별개로 1626년 [[영원성 전투]] 이후 대명 전선은 사실상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지됨에 따라서 태조 [[누르하치]] 때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명과의 [[인삼]], [[모피]] 교역은 파탄상태에 있었으며 청은 [[만주족]]뿐만 아니라 요령의 [[한족]], 새로이 손에 넣은 [[몽골인]]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이미 청나라의 인적 자원은 약탈 경제로는 유지되기 어려운 수준이었고, 일종의 현물로 가지고 있는 인삼, 모피 등도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지됨에 따라서 의미가 크게 떨어지고 만다. 인삼, 모피가 썩어문드러지도록 많고 금은보화가 있다한들 생필품과 밥을 먹어야 사람이 살 것이 아닌가. 이미 누르하치 시대부터 청나라는 시하(柴河)·범하(范河)·삼차얼(三岔兒) 등을 개간하며 상업에서 농업 위주로 경제 전환을 노려봤으나 기상 악화로 실패했다. 결국 만주족은 요령의 한족에게서 식량을 쥐어짜내야 했기 때문에 한족과 만주족의 대립이 심각해졌고 상황은 1633년의 식량위기까지 겹치면서 경제적으로 극한 상황에 달해있었다. 새로 항복한 뱅성들에게 줄 땅이 없었고, '''병자호란 직전인 1635년과 직후인 1637년에도 식량 위기에 직면했다.'''[* 출처는 예일 대학의 중국사 교수이자 청나라 시기의 변경사에 대하여 세계적인 권위자인 피더 퍼듀 교수의 China Marches West 중 pp.166 ~ 167] 청나라가 영원성 - 산해관을 뚫지 못했다고 쳐도 길게 우회하여 베이징 앞쪽까지 공격 할 수 있었으니 명나라의 동북 방어선이 방어가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연운십육주 획득 후의 요나라나 금나라와 같은 수준도 아니고 '습격 후 약탈' 이라는 전형적인 유목민식 전략 외엔 바로 당장의 돌파구도 없었던 상황이니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청군은 식량 등의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며 기동력을 발휘해 한성에 들이닥첬다. 현지조달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청군도 상당한 모험을 벌인 것이었다. 일단 몽골은 정리했지만 배후에는 아직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명군이 있었으며, 당시 만주에는 기근이 들어서 식량도 부족했다. 청이 비록 요동의 한족 인구를 흡수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인구에서는 조선이 많았으며, 청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후방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오직 "왕"만 노리고 공격해왔다.
         물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선은 얼마 뒤 멸망한 명나라에 비해 매우 관대하다고 볼 수 있는 피해를 받았다. 조선 국왕 인조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퇴위당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여러 방법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탈출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강제적인 송환 요구도 초기의 일이지, 나중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쪽으로 바뀐다.[* 그래도 많은 백성들이 속환되는 일이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병자호란 후 인조정권의 권력자들이 포로로 잡혀간 본인들 가족들만 빨리 구하기위해 은 수천냥에서 수만냥의 몸값을 치르자 조선인 포로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당연히 이런 돈이 없는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 가족이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조선인 포로 주인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속된 말로 삥을 뜯겼지만 명나라처럼 점령당하지도 않고, 한족들처럼 [[변발]]로 머리가 밀리는 등 풍습에 변화를 겪지도 않았다. 당시 동북아시아 각국의 군사적 외교적 관계가 어느 정도 적용이 되었겠지만, 청이 조선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위 왕족들이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하려 한다거나[* 이 경우는 극소수 였으며 포로에서 첩으로 끌려간 조선여인들은 청나라 남편이나 본처들에게 심한 학대를 받아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자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여인을 학대하는 남편은 처벌하고 조선인 첩을 학대한 본처는 남편 사망시 무조건 순장하도록 칙령을 내릴 정도였다], 명을 칠 때 조선을 끌어들이거나, [[러시아]]가 남하하자 [[나선정벌]]에서 병력을 요청한다거나.
  • 본성인
          * 상위항목 : [[중화민국]], [[한족]], [[타이완 섬]]
         [[중화민국]]에서 조상 대대로 [[타이완 섬]]에서 살아온 [[한족]]을 가리킨다. 대체로 [[명나라]], [[청나라]] 때 중국 [wiki:"푸젠 성(중화인민공화국)"푸젠 성] 지방[* 중화인민공화국 [wiki:"푸젠 성(중화인민공화국)" 푸젠 성]이 위치한 지방으로, 중국 대륙의 동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대만 섬의 서북쪽 대만 해협 건너편에 바로 위치해 있다. [wiki:"푸젠 성(중화인민공화국)"복건성]의 위치는 [[중화인민공화국]] 항목의 행정구역 부분에 나와 있다.]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그들과 접촉하면서 언어적으로 동화된 원주민들의 후손으로[* 이 '동화된 원주민'의 비율 또는 '한족과 원주민의 혼혈인'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가가 일부 대만 독립파들과 이에 맞서는 사람들의 떡밥이다. '우리는 한족이지만 중국과는 다르다'는 독립파도 있지만 '우리는 한족이 아니므로 중국인도 아니다'는 독립파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화되지 않은 원주민들은 한족계 본성인 독립파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대만어]](민남어)를 모어로 하고 있다. [[중화민국]] 인구의 80%를 차지하며, 주로 [[가오슝]]이나 [[타이난]] 등 남부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간혹 대만 관련 문서에서 [[대만 원주민]]과 본성인을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물론 본성인의 기준을 넓게 잡으면 대만 원주민을 포함한다. 이걸 잘 모르면 마치 소수의 한족이 대다수 원주민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대만 독립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한족의 비율은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보다 높다.], 원주민은 본래 대만에 살던 민족으로, 한족이 아니다. 원주민들은 아예 [[중국티베트어족]]이 아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언어를 사용한다.[* 즉, [[말레이시아]]어, [[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필리핀]]의 공용어) 등과 같은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얘기.] 물론 그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공용어인 표준중국어나 사용 인구가 많은 대만어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원주민들을 본성인이나 외성인들, [[중화인민공화국]] 사람들은 [[고산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말하는 중국 56개 민족은 대만 원주민들을 고산족 하나로 분류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대만에서는 중국 내의 민족 수를 56개라 콕 찍어 말하지 않는다.]
         다만 원주민 중 상당수는 [[명나라]]나 [[청나라]]시절에 들어온 [[한족]]과 [[wiki:"동화#s-4" 동화]]되었는데 그들의 후손들은 외관상이나 생활 습관상 한족과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원주민이 아닌 본성인, 한족으로 간주된다.
  • 불교
         중국 [[후한]] 시대에 불교가 들어올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오랑캐의 가르침이라면서 불교 유입에 민감했다. 한대에 융성했던 [유교] 문화는 현실적, 윤리적인 도덕 철학을 강조했는데 그 때문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불교 이론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시대]],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며 중국 대륙이 쑥대밭이 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 이유는 불교의 사상이 민중의 정신적인 귀의처가 되어주었고, [[윤회]]론에 입각한 내세관, 방대한 경전체계, 인도 의술에 능통한 [승려]들의 의약구제, 위정자들에게 부담이 없는 구세이념[* 말그대로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치세'의 이념과는 다르다. 군주에게 엄격한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에 비해서 위정자들에겐 상대적으로는 널널한 것이었을 듯], 전술 지식을 알려주는 신승들의 전술적 가치, [[한족]] 중심적이었던 유교와는 달리 호(胡)족들에게 친화적이었던 이방 이념들이 당시 [중국인]들의 필요조건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 사마가
         '''[[사마의]], [[사마염]]의 사마 일족과는 아무런 관계 없다. 한족은 사마司馬씨인 반면 사마가는 일단 한자가 沙摩로 다르다. 또 게임상에서는 사/마가로 나온다.''' 애초에 [[한족]]이 아니니까 이 이름은 무릉만 고유어(?)를 음차한 것이겠지만. 오늘날 모래 사씨가 중국에 있는 걸 보면 이쪽이 정설인듯하다. 이 모래 사짜를 쓰는 대표적인 고전 인물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게 바로 [[사오정]]..
  • 산월
         복건, 절강, 안휘, 강서의 경계 지역에 출연해 주로 안휘성의 단양에서 활동했고 [[한족]]도 산월에 섞여 이러한 자들은 산월적(山越賊)이라고 불렀으며, [[종부]]라는 군사 집단을 만들어 [[후한]]이나 오나라에 저항한 자들을 산월이라고 부르는 등 산적(山敵)과 산월(山越)의 경계가 애매하다.
         그 외에 [[황개]] 등 여러 장수의 기록에서 산월 토벌의 기사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렇게 지속적으로 토벌된 산월족은 오나라에 붙잡혀 와서 호족들에게 편입되어 [[세병제]]에 묶인 병사가 되면서 서서히 농민이 되어 한족에 동화되었고 오나라 이후로는 다른 백월 계열의 종족들과 함께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 삼민주의
          * [[민족주의]](民族主義) : 근대적 주권국가의 이상을 천명한 것으로 당초에는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한족]]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것 즉, 멸만흥한이었으나 청나라가 타도된 이후부터 티베트, 위구르 등 소수민족들이 분리독립을 선언하며 투쟁하자 심화발전하여[* 신삼민주의로 분류하기도 한다.] 밖으로는 외세에 대한 '''반[[제국주의]]'''를 명확히 하고, 안으로는 국내 여러 민족의 융합 특히 '''오족공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과거 만한병용제 등 청나라의 융화정책은 대차게 깠기 때문에 스스로 [[모순]]을 불러온 감이 있다.(...)~~한치 앞 모르는 세상~~
  • 삼합회
         기본적으로 삼합회의 명칭 자체는 직역하면 알 수 있듯이 [천지인] "3"개가 "합"쳐져서 만들어졌다고 설도 있으며,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마피아"와 마찬가지로 옛날 반[[청나라|청]]복[[명나라|명]]을 꾀하던 [[한족]]의 비밀결사인 청방(靑房), 홍화회(紅花會), 흑사회(黑蛇會)의 이 3개 조직이 모여서 삼합회가 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화교가 세계적으로 퍼져 있고 [[중국]], [[홍콩]], [[싱가포르]], [[중화민국]]([[대만]]) 등 중화권 국가와 자치지역이 여럿이다 보니 [[야쿠자]]와 달리 꽤 국제적으로 노는 편이며, 폭력의 스케일도 아무래도 좀 더 큰 편이다. 차이나타운이 있는 곳에는 삼합회가 있다고 봐도 된다. 예를 들어 화교들 중에는 [[객가]]인이라는 [[한족]] 내 소수민족이 있다. 한족 자체는 화교들 사이에서 소수민족이 아니지만 한족에 속하는 여러 하위 민족 중에서 객가는 소수계다. 이들 중에도 삼합회 소속이 있다고 한다.
  • 상투
         [[동아시아]]의 전통적 [[헤어스타일]]의 하나. 보통 성인 남자가 [[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치른 뒤 꾸민다.[* 다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결혼하지 않아도 상투를 트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걸 외자상투라고 부른다.] 조선의 상투와 비슷하게 묶는 것 자체는 한반도에 꽤 이전부터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상투가 가지는 의미는 신체발부수지부모의 유교적 예절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묶는 방식과 남는 머리 처리 등에 있어 중국 [[한족]]의 전통 머리와 꽤나 차이가 있었다.
  • 샹그릴라
         [[wiki:"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은 [티베트] 지역에 있는 중뎬(中甸)현[* 정확하게는 티베트 자치구가 아닌 [[윈난성]] 서북부 디칭(데첸) 티베트족 자치주에 위치해 있다. 단, 행정구역상 티베트자치구에 속하지 않을 뿐 역사적으로 티베트인의 영역이다. 사실 윈난성 서북부 지역과 쓰촨성 서부 고원도 티베트족 거주지이다.[[http://ko.wikipedia.org/wiki/%EC%83%B9%EA%B7%B8%EB%A6%B4%EB%9D%BC_%ED%98%84 영어위키백과의 '샹그릴라 현' 항목]] 참조.]이라는 동네를 2001년부터 샹거리라(香格里拉)현으로 이름을 바꿨다. 여기가 샹그리라 같은 곳이라면서 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이지만, 국제적으로 비웃음만 받고 있으며 욕심없고 모두가 잘사는 곳이었지만 돈이 된다면 [[아프가니스탄]] 가서 [[치파오]] 차림으로 식당을 연다는(...) [[한족]]들이 해발고도가 3000m를 넘는 이 곳에서까지 진출하면서 이름만 샹그릴라인 머니리라인 곳이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다. 정작 현지인은 없고 외지 사람들만 판치면서 돈 달라고 손내미는 곳이 무슨 샹그릴라냐는 것. 그리고 [[2014년]] 1월, 화재로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world/201401/h2014011117272122510.htm&ver=v002 도시의 1/3이 전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원인은 조사중이지만 만약에 외지인에 의한 방화...라던가 쪽으로 밝혀지기라도 하면 조용한 동네 이름 바꿔서 관광객 들이더니 이러려고 그랬냐 같은 식으로 욕 꽤나 먹을 듯. ~~그리고 욕한 당사자는 [wiki:"코렁탕" 코로 보이차]~~
         [[인도]]도 질세라 옛 라다크 왕국 수도인 [[레]]를 샹그릴라라고 홍보하기도 한다. 가본 사람들 평에 의하면 한족이 깽판치며 돈뜯는 저 동네보단 훨씬 낫다고 한다. 그밖에도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부탄]]이야말로 더 샹그랄라 이미지에 가까운 곳이라는 이들도 있다.--하지만 거기도 외부문화가 들어 오면서....--[* 부탄 사람들도 티베트인과 언어, 문화, 인종적으로 가까운 계통에 속하고 거주하는 해발고도, 지형, 위도도 비슷하고 부탄과 운남성, 티베트자치구가 서로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해 있기까지 하니까.]
  • 서하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그리고 몽골군에게 완전히 짓밟혀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론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 아니다. 물론 서하인이 많이 학살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서하인이 [[몽골]]에 흡수되었으며 실제로 서하 출신 장수 Cha'an은 몽골군을 이끌고 [[남송]]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서하인의 후손 중 일부는 안후이 성 근처에서 살다가 원이 망한 뒤에 [[한족]]에 흡수되어 소멸하였다.([[명나라]] 말기까지는 서하 문자를 오랫동안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몽골 정복 후 살아남은 서하인의 후예로는 중국 쓰촨 성, 간쑤 성, 칭하이 성 등지에 사는 창족(羌族)이 있다. 다만 서하의 [[DNA]]적 특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CCTV]] 보도.
  • 석경당
         자기를 믿어준 황제를 두 번 배신한 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는 받기 힘들지만, 무엇보다 [[중원]]을 [[요나라]]의 [[위성국가]] 수준으로 만들어버렸기에 [[한족]] 입장에서는 욕 먹기는 충분한 인물이다.[* 중국어 위키에는 아예 '한간'(漢奸)으로 규정!(사타족인데?) [http://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 #]]
         [[요나라]]에 줘버린 연운십육주는 거란이 중원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오대십국시대]] 내내 거란에 시달리고 [[송나라]] 시기까지도 그중 몇개 주만 간신히 되찾는데 그치고 만다. 송나라는 건국 당시부터 [[요]]라는 강국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였는데, 거기에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인물. [[남송]]과 [[칭기즈 칸]], [[원나라]]의 흥기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중국사 전반을 --한족의 입장에서는 나쁜 의미로-- 뒤바꾸어놓은 인물이다.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549 #] [[유주]](계, 탁 등), [[삭주]] 등의 연운십육주가 얼핏 보기에는 중원 전체의 입장에서 결정적인 면적의 영토가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의 지형. 만리장성은 험준한 방어요충지를 이어 건설되었는데 그 이남이라는 것은 '''하북 평야지대를 방어하는 중요한 지형적 방어물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저항 없이 중원으로 내려올 수 있을 뿐더러 이 지역에서 나는 물산을 바탕으로 이전까지의 유목연맹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중앙집권화까지 가능하게 해 준 지역을 __스스로의 손으로__ 넘겨주었으니 병크 중의 병크.

  •      [[한국의 성씨]] 중 하나. 보성 선씨(寶城宣氏) 단일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한민국]] 선씨의 인구는 약 38,000명이며 총 인구의 1[[퍼밀]](1/1000)도 안 되는 소수 성씨. 시조는 선용신, 참고로 [[한족]]계이다.--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 사람 절반이 다 한족-- 유명인으로는 ~~전 [[원더걸스]] 멤버인 가수 [[선미]]와~~[* 본래 본명이 '선미'였으나, 어머니의 재혼으로 이름이 '이선미'가 되었다.] 투수 출신의 [[야구]] ~~각동님~~감독인 [[선동열]], [[성우]] [[선은혜]]와 [[선호제]], [[배우]] [[선동혁]],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선호산]] 등이 있다.
  • 선비족
         [[오호십육국시대]]에 중원에 뛰어들어 많은 왕조를 세웠다. 이 시대의 북방민족 왕조를 [[침투왕조]]라고 부르는데, 후에 등장하는 [[요]], [[금]], [[원]], [[청]]의 [[정복왕조]]와는 달리 아직 문화적 기반이 약해서 한족의 문화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며 동화되어갔다. 그리고 이 침투왕조에서 두드러진 민족이 선비족이었다. 특히 유명한 선비족 왕조로는 [모용부](慕容部)가 세운 정복국가 [[전연]], 모용수가 세운 [[후연]]과 탁발부(拓跋部)가 세우고 균전제를 실시했던 [[효문제]]가 집권했던 [[북위]]가 있다. 북위는 우문씨의 [[북주]]와 고씨의 [[북제]]로 갈라졌으나 결국 북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점점 [한족]에 동화되어 가다가 [[수]]나라, [당]나라가 세워질 때 중국역사에서 소멸한다. 하지만 황실 문화나 개방적인 국가 성향은 [[당]]나라까지 이어진다. 당장 수의 황족 양씨와 당의 황족 이씨부터가 한화된 선비족, 혹은 선비족의 혼혈이며 북위의 황족 [원](元)씨, 연의 모용씨, [독고]씨, [[고구려-수 전쟁]]에서 등장하는 "[우문부|우문]"씨는 북주의 황가인데, 죄다 선비족의 후예라고 보면 되겠다.
  • 성룡
         물론 이러한 상업적인 성격과 달리 성룡의 보수적인 정치 행보가 설명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부모랑 떨어져서 좀 불우한 시절을 보낸 데는 [[wiki:"국공내전" 하나의 중국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이 관련되어 있으며, 성룡 본인이 [[중국인]], 그것도 [[한족]]이기 때문에 [[하나의 중국]] 원칙에 어긋나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하는 게 [중화사상|한족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또한 홍콩의 중국 반환 전까지만 해도 본토에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보수적인 성향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시선도 있다. 전인대의 정협 의원으로까지 활동하는 걸 보면 정치적으로는 확실히 베이징 정부인사들과 뜻을 같이 하는 듯.
  • 세계인구
         [[민족]] 단위로 볼 때 중국의 [[한족]]이 세계 인구의 19%이다. 다음은 [[벵골족]]으로 4.8%를 차지한다. [[제1언어]]로 가장 많이 말해지는 언어는 [[만다린]][* 중국 표준어]으로 세계 인구의 약 12.44%이다. 그 다음은 4.85%를 차지하는 [[스페인어]], 4.83%의 [[영어]], 3.25%의 [[아랍어]] 순이다. 가장 많은 [[종교]]는 [[기독교]][* [[가톨릭]]+[[개신교]]+[[정교회]].]로 약 33.35%이다. 그 다음은 [[이슬람교]]로 22.43%이며 [[힌두교]]는 세 번째로 13.78%이다. 약 16%는 종교가 없다.[* [[무신론자]]랑 그냥 종교가 없는 경우.]
  • 소수민족
         참고로 중국의 민족 숫자는 56개(한족+55개 소수민족)라고 하는데, 이 숫자는 중공 수립 후의 "민족식별공작"에 의해 소수민족을 분류하면서 얻어진 것이다. 대만에서는 중국의 소수민족이 몇 개라고 단정지어 말하지는 않는다. 비슷하게 단일문화국가를 유지하는 일본의 경우는 [[재일]],[[류큐]],[[아이누]]등의 소수민족이 존재한다.
          * 좡족[* 중국 내 최대 소수민족. 다시 말해 [[한족]]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민족이다. 인구수로 [[만주족]]을 눌렀다. 즉 인구 순으로 보면 한족>좡족>만주족>…… ~~비록 한족과의 인구수 차이가 [[넘사벽]]이긴 하지만~~ [[http://en.wikipedia.org/wiki/Ethnic_groups_of_China 참고]] 오죽하면 광시성(省)이 광시좡족자치구로 바뀌었을까]
          * 후이족([[회족]])[* 혈통적, 언어적으로는 한족과 동일하지만, [[wiki:"이슬람교" 종교가 달라]] 소수민족으로 여김. 단, 여기서 언어적으로 한족과 다른 민족임에도 별도의 민족으로 분류되지 않고 그냥 회족의 일부로 간주되는 소수민족도 있다.[[http://en.wikipedia.org/wiki/Utsul 이들은]] 중국 최남단 하이난성에 거주한다.]
  • 소태후
         요나라 황후들은 [[요세종]]의 황후 견씨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한족]]이었다.] 모두 소씨(술율씨)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요나라의 다른 황후들도 '소태후'이나 소작이 워낙 출중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소태후'는 소작 한명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역시나 유명한 [[야율아보기]]의 황후는 술율평(述律平)이라는 본명으로 부른다.[* [[한고제]]를 흠모한 야율아보기가 술율씨를 소씨로 개성한 것이다. 자신한테도 [[소하]]같은 명재상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 때문에.]
         거란인과 한족의 차별을 없애 서로 공평하게 대우를 받도록 했다.
  • 손권/인간 사냥
         손권의 오나라가 자리잡은 강남 지역은 넓은 땅에 비해서 [[한족]] 인구가 그리 많은 지역은 아니었으며, [[무릉만]]이나 [[산월]] 등으로 불리는 [[먀오족]], [[야오족]] 계통의 남방 민족이 많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손권 당대는 물론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이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강남 지역에 한족 인구가 급격히 유입되는 것은 [[오호십육국시대]]를 맞아 북방이 이민족에게 초토화 되어 한족이 대대적으로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남북조시대]]에서야 가능했다.
         물론 당시의 강남만 해도 한족들은 전염병 때문에 곤란을 많이 겪었는데, 더욱 낯선 환경으로 많은 병력이 이동한다면 전염병 문제가 심각할 것은 뻔한 일이다. 결국 처음부터 대군을 보낸다는 탐험 계획부터가 오류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 수문제
         [한족]이 아니라고 하며 [선비족]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03801&cid=928&categoryId=1982 또는 선비족과의 혼혈인 무장 집안 출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 스파이역
         역명은 청나라 시대에 [[한족]]과 [[대만 원주민]]의 구역 경계선을 설정할때 쓰였던 돌로 만든 패(석패(스파이)/石牌)가 놓여진 지역명이 그대로 역명이 된것이다. ~~[[간첩]]을 의미하는 [[스파이]]와는 전혀 관계없다~~
  • 신세계(영화)
          * 이자성의 이름을 보고 또 골드문을 [[명나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골드문이란 사명 자체가 明을 [[파자]]한 日+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자성 말고도 정청계 자체가 [[한족]] 조직인데다 상하이 출장, [[한국어]]는 전혀 안 하고 [[중국어]]만 구사하는 중국 출신 변호사,[* 다만 (한국어를) 알아듣는 듯 하다.] 중국 해커 집단, 조선족 킬러, 중화요리와 전병 등 중국색이 무척이나 강조된 작품이니만큼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이자성의 운명은 비극적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럼 누가 [[순치제]][* 청나라 3대 황제로 이정재 말고 '''진짜 [[이자성]]''' 을 베이징 에서 몰아낸 다음 중국을 통일한다. [[항목참조]].]냐~~
  • 야마토 민족
         [일본인]엔 야마토 민족 말고도 [아이누족]이나 [류큐|류큐족], [한민족][* [도래인]은 제외하고 2013년 기준으로 생존해있는 귀화자가 32만 수준이다. 대부분은 [재일 한국인]의 귀화.], [한족] 등이 있다.
  • 야율융운
         [[한족]]이다. 본래 이름은 한덕양(韓德讓)이고 계주 옥전 사람으로 1001년에는 이름을 덕창(德昌)으로 바꿨으며, 1004년에는 야율씨 성을 받았다가 1010년에는 융운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태도가 점잖고 마음씨가 너그러우면서 지략이 있었으며, 정치의 요체를 다스리면서 공을 이루면서 일을 세웠다.
  • 양강
         상식적으로 거지꼴로 나타난 친아버지 [[양철심]]이 갑자기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며, 완안열 역시 어떻게 생각하면 [[뻐꾸기]] 같은 처지가 된 셈인데, --물론 자업자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혈연이 아니라는게 드러났음에도 양강을 변함없이 자신의 아들로서 대했다. 결국 양강은 [[한족]]의 혈통으로 태어났으나 여진족의 [[금나라]]를 배신할 수는 없는 인연이 충분히 있었던 셈으로 쉽게 버릴 수 없는 입장이기는 했다. 이 때문에 양강을 동정하는 의견도 많은 편이다.
         다른 김용 작품에서는 한족의 영웅이었으나 거란족의 혈통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천룡팔부]]의 [[소봉]]과 정 반대의 입장인 셈이다.
  • 열하일기
         조선 뿐만 아니라 [[한족]] 여성들의 [[전족]] 같은 불합리한 풍습과, [청나라]에 대한 아부로 점철된 한족 지식인들의 현실 역시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모습은 〈호질〉에서 범(짐승으로서 중국과 조선 지식인 입장에서의 청나라를 은유함)과 그에 아첨하는 선비 북곽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조선의 [[소중화]]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중화주의의 허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것이다. 사실 (고전적인 의미의)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것은 오랑캐이며 되려 중화에 비판적인 내용인 것. 또한 전체적으로 '''[한족]보다 [만주족]에 호의적'''인 시선이 깔려 있다(...). 예를들면 사기나 뒤통수를 치는건 대부분 [[한족]]이라든가... 그 외에 '''[청나라]인들조차도 [[되놈]]이란 단어를 알고 있었다'''는 장면도 있다. 청나라 사람이 스스로를 "'도이노음'이요(擣伊鹵音爾么)"라고 소개하는데, 이건 "되놈이요"이란 문장을 한자로 음차한 것.
  • 오나라의 요절징크스
         과학적인 해석으로는 장강 남쪽의 습기가 많고 더운 풍토에 당시 북방에서 이주해온 [[한족]]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기생충이나 면역이 없는 질병 등에 시달려서 사망률이 높아지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wiki:"사기(역사책)" 사기]] '굴원가생열전'에는, 가의가 장사왕의 태부로 좌천되어 갈 때에 이를 염려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한족이 장강 이남을 장악한 것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 그다지 오래 되지 않는다. 남북조시대 정도 되어야 개발이 시작되며 당나라 시대에도 이 지역은 밀림으로 덮인 지역이었으니...그리고 당시 예상 수명 자체가 30살 전후였으니 오히려 그 시대 기준으로 본다면 '''살 만큼 살고 저 세상 간''' 평균적인 케이스였다. 그보다도 훨씬 후대인 20세기 초반의 중국인의 평균 수명이 35세였으니 말이다. 2000여년 전 상황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전근대 평균수명의 함정이라 할 수 있는 극심한 영아사망률을 고려한다 해도 변변한 의술 및 약품, 항생제가 없었기 때문에 장성해도 지배층이라고 해서 오래 살기는 힘들었다. 평민층은 말할 필요도 없고, 북중국의 지배층(위)들은 좋은 환경 때문에 수명이 상대적으로 길었겠지만, 당시 오나라 지역은 미개발지역이었다.
  • 오호십육국시대
         [[중국]]의 역사시대중 하나로 크게는 [[위진남북조시대]]에 속한다. 오호는 [[흉노]], [[wiki:"선비족" 선비]], 갈, 강, 저 등의 다섯 이상의 오랑캐들을 뜻하고 십육국은 이들이 여러 나라를 세웠음을 뜻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16국 중 전량, 서량, 북연은 한족 왕조에 속하며 나머지 13국이 이들 다섯 민족이 세운 국가이다.
          * 염위 : [[한족]]인 [[염민]]이 [[업]]군에서 세운 나라. 단명 왕조였지만 민족 구성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나 했는데, 염민은 명령으로 후조의 지배 민족이었던 [[갈족]]을 [[제노사이드]]시켰다.
  • 외국인 노동자 문제
         말그대로 단순 노무 위주의 업종에 종사하는 비자로 업종별로 E-9-1, E-9-2, … 등으로 세분된다. 이 비자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대부분 [중국]([한족])인, 몽골인거나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지역, [우즈베키스탄]([고려인]제외),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지역 등등 대한민국과 협약된 몇몇 나라들에서 수입해오는 인력으로 비자 발급과 동시에 근무처가 정해져서 들어오고, 체류기간 역시 계속 취업을 한다는 전재하에 연장이 가능하고 해고나 퇴직 등으로 직장에서 나왔을 때도 일정기간 내에 취직을 하여야 한다. 이 비자는 최대 3년까지 체류가 가능하고 계속 취업한다는 조건하에 재고용으로 1년 10개월이 추가되어 최대 4년 10개월까지 체류가 가능하거나, 3년 만료 후 일단 외국인등록증 반납 후 재입국하여 다시 3년 이렇게 총 6년동안 체류할 수 있다. 이는 현 국적법 상 5년 이상 연속적으로 합법 체류시 국적신청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국적신청은 안되도록 제도적으로 막아 둔 것이다. 비자가 만료되면 본국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하고, 다시 비자만 받는다면 재입국에 제한은 두지 않으나, 본국에는 한국에가서 돈을 벌려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있기 때문에, 다시 비자를 받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기 때문에 일부는 비자 만료 후에도 출국하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머물게 된다. E-10(선원취업)은 기본적으로 E-9과 비슷하나 원양어선 등에 취압한 자들이 받는 비자이다.
  • 외성인
          * 상위항목 : [[중화민국]], [[한족]], [[타이완 섬]]
         [[표준중국어]]를 모어로 한다. 물론 출신 지역에 따라 모어가 따로 있을 수는 있다(그리고 극소수는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이다. 하지만 이 정도 상황이면 거의 동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상해어라든지 광동어라든지[* 하지만 푸젠 출신 외성인들을 제외하고는 외성인들이 표준중국어뿐만 아니라 원래 출신지 방언까지 능통한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현재 살고 있기에 출신지 방언보다는 대만어를 더 잘하지]. 하지만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있기에 중국인으로서 표준중국어를 모어로 인식하는 것이다. 물론 2, 3세대들은 [[대만어]]도 잘한다. 하지만 타이베이 등 북부 지방에서는 수도권이면서 외성인의 비율이 남부 지방보다 높고, 모든 공적인 생활을 표준중국어로 하기 때문에 본성인과 외성인을 가리지 않고 일상어로 거의 표준중국어를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본성인이면서도 대만어는 서툰 젊은 세대도 꽤 있다.
  • 용병
         지금까지 글을 보면 대부분 유럽 위주로 나와있지만 아시아라고 용병이 없을 리 없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명나라]]군에도 용병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흑인]]에서 [[백인]]까지 골고루 있었으며 이들은 돈을 받고 명나라군에서 싸웠다. 류성룡은 이런 인종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이라 신기해했는데 명나라 장수는 놀리듯이 좀 뻥을 쳤고 이걸 고스란히 징비록에 기록했는데 "이들은 보통 [[한족]]과 달리 강인하고 한참 굶어도 힘이 딸리지 않으며 화낼 때 무섭게 싸운다오." 라는 투로 기록되어 있다.
  • 원사
         그러나 이 원사는 문제가 많은 역사책이었다. 아무래도 중국 전역을 지배한 최초의 이민족 정복왕조를 다루는 사서라 [[한족]]의 입장에서 좋게 써줄 리도 없었고, 원나라를 몽골 고원으로 몰아낸 직후에 편찬된 책이라 원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이입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원사 편찬 당시까지만 해도 원나라가 중국에서 밀려나 몽골 고원으로 후퇴한 [북원] 왕조가 버젓이 존속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 위구르
         여기서 정확히 해야하는 것은 신장 위구르자치구는 위구르인이 주로 살았던 타림분지(서부)와 준가르인들이 주로 살고 있던 우무루치를 중심으로 한 지역(동부)을 모두 합한 지역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청나라가 준가리아의 준가르인들을 모조리 학살(제노사이드)한 이후, 청나라는 타림분지에 있던 위구르인과 중원에 있던 한족들, 그리고 칼미크인들을 모두 이 공백지로 불러 사민정책을 실시했다. 즉,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한 신강 동부는 원래 준가르인들의 영역이었고, 준가르인들이 제노사이드를 당한 이후에 청나라가 한족과 위구르족을 이쪽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으므로, 동투르키스탄 전체는 위구르족'''만'''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민족, 사회, 종교적으로 한족과 너무달라 적어도 중국이 이곳을 영토로 삼을 만한 근거가 없다. 거기다 원 주민(준가르인들)이 없기 때문에 '''저런식으로''' 귀속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어쨌든 이슬람교도들은 비이슬람교도들인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했고, 이곳에서는 위구르족 말고도, 회족들(한족계 이슬람교들)은 감숙성에서 자주 봉기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종족성 다양성에서 보듯이 단결이 안되었고, 이런 종족간 증오심 외에도 이슬람교의 교파간 문제때문에 '''서로를 공격하는 팀킬도 자주 벌어졌다.''' 예를 들어 둥간족(회족)과 위구르족은 종교는 같았지만 자주 살육극을 벌였다. 그리하여 이런 반란들은 모두 청나라에 각개격파 당하고 만다. 아팍 호자의 증손자이자 '호자 형제'라는 별명을 가진 부르한 웃딘 호자와 칸 호자 형제는 위구르군을 이끌고 청군에 맞서 싸우지만 패배하여 서쪽의 카슈가르와 옐켄까지 밀린다. 1759년 여름, 마지막 근거지인 카슈가르에서 도주한 호자 형제는 인도로 도망가기 위해 무리 4,000명을 이끌고 파미르 산중으로 도망갔다가 청군에 잡혀 목숨을 잃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조정 자체가 붕괴하면서 위구르는 1930년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임시정부(제1차)를 세우고 다시 독립을 선언했으나, 후에 국민당 소속의 한족 군벌인 성스차이가 이곳을 침략하고 이곳에 진주하였다. 그래서 다시 이곳은 중화민국의 영역이 된다.
         현재 중국의 지배가 흔들릴 경우, 가장 먼저 독립투쟁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민족으로 꼽히고 있으나 2000년 기준으로 신장의 인구 구성비는 위구르인 835만(45%), [[한족]] 749만(41%), [[카자흐]]인 125만(7%), 기타 8%의 비율이었으며[* 1950~60년대에는 위구르족이 절대 다수였으나, [한족]들이 유입되어서 비율이 바뀌었다. 특히 우루무치는 한족이 무려 75%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 정부의 정책으로 [한족]들이 밀려오는 중이다. [[티베트]]와 마찬가지로 머리수에서 밀리는 상황이라 전망은 그리 밝지는 않다. 출산율의 경우도 중국공식 통계에 따르면 2명정도로 많이 높은편은 아니다.
         물론 중국정부로서는 가장 골치 아픈 곳이다. [[2009년]] 7월 5일부터 이곳에서 위구르족의 대규모 폭동이 발생해 진압한다고 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2008년]] [[티베트 사태]]의 재판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사건으로, 중국은 2008년과 마찬가지로 강경진압으로 일관하였고, 위구르족의 대응은 점차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으로 격화되었다. 터키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인]]에 대한 폭행이 벌어지기도 했다. [[알 카에다]]는 중국 정부를 규탄하며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애초에 위구르인들의 주 종교가 이슬람교이므로 이슬람 과격파인 알 카에다의 개입의 여지는 있어 왔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이 고조되는 [[카슈미르]]와 붙어 있는 점도. 결국 7월 19일 중국의 발표로만 사망자 197명, 부상자 1,721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망명 위구르인 조직인 '세계위구르회의'는 중국 당국과 한족의 공격으로 살해당한 위구르인은 최대 3,00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 위안
         || attachment:china407.jpg?width=200 || 10위안 || [[한족]], '''[[몽골]]족''' || 초모룽봉[[br]](히말라야 산맥) ||
  • 윈난 성
         이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을 큰 계통, 어족으로 나눠도 [[중국티베트어족]], 태국어와 같은 어족(타이카다이어족), 먀오-야오어족(Hmong-Mien language family),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등으로 다양하다. 윈난성의 민족들 중 [[한족]]을 제외한 나머지 소수민족들의 인구가 성 전체 인구의 약 1/3을 차지한다고 한다. 비록 지리적으로 수도 베이징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윈난성의 한족은 ~~[[상해]]어나 [[광동어]] 말고~~ [[보통화]], 또는 [[wiki:"중국어#s-4.1" 같은 계열의 북방방언]]에 속하는 [[중국어]]를 쓴다. 이것은 사천성과 비슷한데, 이곳과 사천성의 한족이 중국의 북부지방(관화, 만다린 사용권)을 통해 이주해온 사람들 또는 그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 음식문화
          * [[몽골]]의 우유 : [[원]]나라 때 [[한족]]들이 몽고족을 비하하는 소스로 썼다.
  • 이름
         중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은 [[한국인]]과 비슷하게 기본적으로 한 글자 성 + 두 글자 이름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한자로 쓰면 한국 이름인지 중국 이름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경우도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7441# 한국산 李富榮과 중국산 李富榮의 기연][* 참고로 이 두 사람은 한자 이름, 직업(정치인), 생년월일이 같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고향도 비슷한 위도에 있다.] 물론 발음은 당연히 다르다. [[한국 한자음]]으로 '[[홍 메이링|홍미령]]'으로 읽는다면, 중국에서는 '[[홍 메이링]]'으로 읽는 식이다.~~일본에선 '[[홍 메이링|쿠레나이 미스즈]]'~~ [* 이조차도 같은 경우가 있다. 韓正은 한국 한자음으로 한정인데, 중국 발음도 한정이다.] 이름자로 사용되는 글자들 다소 차이가 있어서 듣고 바로 출신을 구분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예: '[[장길발]]' '[[주윤발]]' 처럼 끝에 '-발'이 나타나거나, '곽방방'처럼 여성적인 글자[* 꽃다울 芳 자.]를 첩어로 쓴 이름이면 중국 사람 이름이겠거니.)
  • 이슬람교
         한자로 회교(回敎)라 표기한다.[* 다만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에서는 '회교'는 잘못된 명칭이니 이슬람교라고 불러줄 것을 요청한다.[http://www.koreaislam.org/%EC%9D%B4%EC%8A%AC%EB%9E%8C/ #] 비신자는 '그게 무슨 차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사자들이 요청하는 만큼, 가급적이면 이슬람교라고 불러주자.] 회흘(回吃; 현재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 행정구역) 지방에서 건너온 종교라는 뜻으로 추정되며. 명나라 때에는 회흘 지방에서 건너와 중국에 정착한 기독교인과 유대인도 회회인(回回人)이라 칭하였다.(이를테면 기독교인 십자회회(十字回回) 유대인은 남모회회(藍帽回回)등등 회회 앞에 특징을 붙여 칭함) 그러나 [[명나라]] 때에 이르자 명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서역 출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한족하고만 혼인하도록 강제 하는 정책으로 이들을 한화시켜버렸고 이에 따라 이슬람 회회인 이외에 기독교와 유대교 회회인은 아예 한족과 동화되어 버리거나 차라리 중국 내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결국에는 '회회'라는 말이 무슬림을 칭하는 말로 굳어지게 된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회회(回回)아비"가 등장하는데 회족 출신이거나, 이슬람(회교) 신자로 고려에 온 장사꾼(그러니까 회족이 아닌 민족일수도 있음)이라는 등 견해가 갈린다. 엔하위키 [[쌍화점]] 항목에서는 [[위구르]]인으로 소개되어 있다. ~~여담이지만 서양인이라면 국적 불문하고 죄다 미국사람이라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 참고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한족]]을 제외한 56개 소수민족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회족(후이족으로도 표기)과 위구르족은 별개의 민족으로 분류한다. 성(省)과 동등한 행정단위인 민족자치구로 닝샤 후이족 자치구와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도 별개로 존재한다.]
         [[불교]]는 불상을 [[우상숭배]]로 보아 불교 유적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뒤따랐다. 인도의 유명한 불교 대학이었던 [[날란다]] 대학이 무슬림들에 의해 함락 파괴된 사건은 불교사 내에서도 인도 불교의 몰락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중앙 아시아와 인도에서는 불자들에 대한 제노포비아가 있었다는 속설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보통 외부인들이 [[힌두교]]나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진 계급 사회에 들어가면 낮은 [[카스트]]를 부여받게 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서 인도에 새로 진출하는 부족들 같은 경우에는 불교로 개종했던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오호십육국 시대 당시 비한족들이 유교 대신 불교를 선호했던 이유와 같다.] 이슬람이 유입되자 인도로 무력을 진출하는 부족들은 평화적인 불교보다 성전을 강조하는 이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늘어났고, 이 덕분에 인도의 불교는 결정적으로 쇠퇴하고 만다. [* 그 대신에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슬람교 국가라 할 수 있는 [[무굴 제국]]은 타 종교에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주기는 했으나, 이것도 아우랑제브 황제 시기가 되어서는 얄짤 없이 탄압받았다. 그 때분에 [[시크교]]도들도 반란을 일으키고 나라는 혼란(...)]
          * [중국]의 [유교] : 근대부터 중국의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해 "있지도 않은 천당과 지옥을 가지고 민중들을 농락한다!"는 말을 자주 입에 담으며, 불교를 혹세무민의 종교라고 비판했었다. 이러한 그들의 종교관은 불교처럼 [[천국]]과 [[지옥]] 관념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명나라] 황조 치하에서는 "무슬림들은 무조건 한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법이 정해졌다. 덕분에 현재 중국에서는 더 이상 이슬람을 믿지는 않지만 무슬림이었던 조상들한테 제사 지내는, 사실상 한족이나 다름없는 [[회족]]들이 많이 존재한다. 현재 중국에 있는 [[회족]]들이 아무리 '''대단위로''' 이주해 왔던 아랍 무슬림들의 후예였다 하더라도 신체의 외양에서 한족과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 이족
         원래는 이족(夷族)이라고 불리었으나 [[청나라]] 때 [[한족]]의 왕조가 아닌 [[만주]]인이 夷([[오랑캐]] 이)라는 호칭을 싫어해, 같은 소리인 彝(떳떳할 이)라는 글자로 교체하여 지금에 이르고있다. 이족 스스로는 '''누오수(Nuosu)'''라고 부르며, 예전엔 자신들이 조상숭배를 위해서 가지고 있던 작은 대나무 조각에서 이름을 따온 "로로족"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 이주영
         그렇지만 그의 사후, 이주영 일족인 [이주조](爾朱兆)ㆍ이주세륭(爾朱世隆)ㆍ이주천광(爾朱天光)ㆍ이주중원(爾朱仲遠) 등이 거병하여 [역관광|이주영의 조카인 이주조가 병주(幷州)에서 출병하여 원공(元恭)을 세우니 이가 절민제(節閔帝)다. 효장제는 낙양이 함락되고 황위에서 폐해지고 진양(晋陽)으로 연행되어 살해된다.][* 현 [산시성|산서성] 태원] 나중에 선비화된 [한족] 고환이 이주영의 군대 20여만 인을 거두어 [기주](冀州)를 점거함으로써 나중에 [망했어요|이주 일문은 멸족되었다.]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북위는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나아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망했어요|분열하게 된다.]
  • 이홍장
         [[안휘성]] [[합비]] 출신이다. [[한족]]의 [향신]층 출신으로 전 세대의 개혁가이자 유학자인 [[증국번]]의 직계 제자다. 동네 시험부터 층층시하로 봐서 과정을 거쳐 , 이후 [[진사]]를 거쳐 진사 출신에서도 최고 등급이 임용되는 한림원의 관리에 임명되었다.
         [홍수전]에 의해 한족이 중심이 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혁신적 주장을 두려워 한 지배 향신층은 이를 기득권의 위험으로 보고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가담했다. 당시 청나라 정규군인 [[팔기군]]과 [[녹영]]은 이미 19세기 말 백련교도의 난때 무력함이 입증된 상태였으며, 태평천국진압에는 향신층이 조직한 [[의병]]들이 주로 나섰다.[* 그러나 주의해야하는게 관군이 아예 논것은 아니었다. 특히 몽골 팔기군은 높은 전투력으로 유일하게 실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가르]부 정벌에서 막강했던 팔기군은 50년도 안되어 완전하 사그라들었다. ] 그중 유학자인 [[증국번]]이 의병을 조직했고 이를 "상군"(호남성군), "회군"(안휘성군)이라고 한다. 이홍장은 이들을 물려받으면서 태평천국을 진압, 군벌이 되고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
  • 이화원
         ||http://scenery.cultural-china.com/chinaWH/upload/upfiles/2010-09/29/details17ece8e6b53ce08fcdd0.jpg?width=200 ||'''4대부주(四大部洲)'''[[br]]만수산 후산의 증축선 위에 자리한 대규모의 [티베트 불교] 건축군이다. [티베트] 삼마야사(三摩耶寺)를 모방한 이 건축군에는 [티베트]풍과 [한족]풍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건축군은 1860년(함풍 10) 영불 연합군의 방화로 불탔고, 현존 건축군은 나중에 재건되었다. 주요 건물인 향암종인지각(香岩宗印之閣)에는 삼세 [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주변에는 [불교] 세계를 상징하는 4대부주인 동승신주(東勝身洲)·남섬부주(南贍部洲)·서우화주(西牛貨洲)·북구노주(北俱盧洲)가 세워져 있으며, 각 부주의 양쪽에는 소주(小洲)가 하나씩 건축되어 8개 소부주라 한다. 전각의 남동·남서·북동·북서 모퉁이에는 백·흑·녹·홍 4색의 라마탑이 있으며 4범탑(四梵塔)이라 부르는데 이는 불교의 4지(四智)를 의미한다. 기타 부속 건물로 일광대(日光臺)와 월광대(月光臺) 등이 있다. ||
  • 일본 열도
         예로부터 화산열도(火山列島)로 불렸으며 인종은 대부분 [[일본인]]이고 [[일본어]]를 사용하는 편이다. 민족은 대부분 [야마토 민족][* 근래엔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소수의 [류큐]인, [아이누], [한민족][* [한국계 일본인]까지 포함해 약 90만.], [한족][* 약 60만 수준.] 등이 있다. 본섬 이외에도 북쪽의 홋카이도, 서쪽의 쓰시마 섬(対馬島), 그리고 부속섬인 [[오키나와]] 섬과 오가사와라 등이 있다.
  • 장건
         그런데 황하의 끈으로부터 동반분(東半分), 즉 호리병의 밑동 부분은 장안의 북쪽을 흐르는 위수(渭洙) 상류 지방으로 [[한족]]의 세력이라고 하면, 그러나 황하의 끈에서 서반분(西半分) 그러니까 양주(凉州), 감숙(甘肅), 숙주(肅州), 돈황(敦煌)과 서쪽으로 길게 뻗어나가 마침내 호리병의 부리에 이르는 지역은 한족의 세력 밖에 놓여 이민족이 그야말로 날뛰는 지대였다.
  •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 [[만한전석]] : [[청]]나라 [[강희제]]가 고안토록 한 만찬. 사흘 동안, 하루 두 끼씩 먹는데 모두 합해서 무려 240가지의 요리가 나온다! 그야말로 [[대륙의 기상]]을 과시하는 세계 최대의 연회. 만든 목적은 청나라 당시, [[만주족]]과 [[한족]]의 심각한 대립을 풍성한 잔치를 통해 해결해보고자 했던 강희제의 고심.
  • 전족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연원은 없다. 전설은 [[하나라]]때부터 다양하게 나타나고 [[wiki:"당나라" 당]]말 [[wiki:"오대십국시대" 오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많이 알고 있지만 실제 발견된 [신발] 유물을 토대로 살펴볼때 [[당나라]] 때까지 전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전족이 나타나는 시기는 [[북송]] 때부터다. [[한족]]이 자체적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서방지역의 이민족들이 보여주던 발끝으로 추는 춤이 중국에 전래되면서 유행하다가 아예 발을 작게 만드는 식으로 변질되었다는 말도 있다.
         [[청]]대의 [[만주족]]은 상류층이더라도 전족을 하지 않도록 엄하게 금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보면 전족을 했는지의 여부로 [한족]과 [만주족] 여성을 구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족 여인들의 경우, 청이 전족을 금하자 남자들은 굴복하여 [[변발]]을 하지만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며 전족을 더 심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막힌 민족투쟁정신--] 그리고 강희제때 잠깐 전족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극심한 반발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다. 어차피 여성들의 일인지라 문자 하나하나까지 트집잡아 한족 문인들을 탄압한 청도 극심한 반발을 감수하고 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건륭제처럼 전족을 아주 좋아한 황제도 있었다. [[청]]대의 전족 바리에이션으로 10세 초중반의 [[만주족]] 여자 아이들이 한 '''도조아'''가 있다. 다만 이 도조아는 여성의 자율에 맞겼고 한족보다 시행 연령이 높고 길이가 길었으며 발을 부러뜨려서 묶는게 아니라 발이 커지지 않도록 꽉 조이는 정도라 염증이나 감염, 기형의 위험이 있으나 최소한 한족 여성들처럼 장애인으로 전락하진 않았다. 도조아 말고도 만주족 귀족 여인들은 [하이힐]처럼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어 전족한 여인의 종종걸음을 모방했다.
  • 전한
         중국을 대표하는 민족인 [[한족]]이 사실상 하나의 민족이라고 보기 어려운 외관과 혈면 그리고 문화적으로 차이가 나는 많은 지역의 수많은 민족을 통합하여 이룩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것을 중국이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있을 수 있게 한 점은 한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중국의 민족을 한나라의 한(漢)자를 따서 한(漢)족이라 부르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자.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중화(中華)가 시작된 뿌리라 봐도 무방하다.
  • 정치적 올바름
          * [[한족]] → 한민족(漢民族)
  • 제7호 태창호 사건
         반면, 10월 1일 태창호가 어업조업을 시작한 시각에 중국 절강성 영포항에서 한국으로 밀입국을 할 [[한족]], [[조선족]] 60명을 태운 20톤급 목선이 출항했다. 그리고 10월 6일에 약속한 장소인 제주도 서남방 110마일 해상에 도착한후 서치라이트를 켜서 태창호와 접선을 완료했고 60명의 사람들이 태창호로 단 10분만에 전원 옮겨타면서 접선은 종료되었다.
  • 조선족
         또 '조선민족이 아닌 조선족은 비하'라는 얘기가 있으나 이 또한 근거없다. 중국어에서는 절대다수인 한민족(漢民族)도 한족(漢族)이라 부르며 만족, 장족 등에서 보듯이 모든 민족이 다 민족명 뒤에 족(族)자만 붙인다. 그러니 중국동포(재중동포)/조선족의 명칭 가지고 열을 내면 그 사람만 열내는 거지 실상 조선족들은 별로 크게 개의치 않는다. 중국의 다른 민족 역시 비하의 의미로 조선족이라 하지않는다. 그냥 이름이 조선족이니까 조선족인거지...
         국적상 중국인이고, 스스로도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다만 이들이 말하는 중국인이란 민족이 아니라 "국적"을 가리킨다.''' 한국계 미국인 3세가 '나는 미국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조선족이 "나는 중국인인데요"라고 말을 하면 민족을 부정하는 말로 오해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중국은 다민족국가임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그저 자신의 국적이 중국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내에서 한족과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고 같은 곳에서 일해도 어색한 경우가 많다.
         소수지만 한국인 못지않은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조선족들도 있으며, 스스로 중국인을 자처하는 조선족이라도 한국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중국 한족들은 "조선족은 한류나 한국을 자랑하니 아니꼽다"고 불평하기도 하니, 모든 조선족이 민족의식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성급한 일반화이다.
         조선족은 자치주인 만큼 조선족끼리 오랜 시간을 생활하였기에 민족전통을 중시하고 민족성을 강조한다. 타민족과의 [[결혼]], 특히 한족과의 통혼은 원래 기본적으로 금물이었다. [[과학소년]] 1997년 3월호에 소개된 조선족에 대한 이야기 중에 이와 관련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툭하면 부부싸움을 밥먹듯이 하는 조선족 부부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럴거면 도대체 왜 결혼한거냐고 묻자 100km 이내에 조선족 남녀가 자신들 둘 밖에 없어서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나마 조선족 남자가 [[한]]족 여자와 결혼하면 그나마 탐탁치는 않지만 그대로 봐주는 반면, 조선족 여자가 한족과 결혼한다면 집안망신이라고 부모님이 속을 썩이고, 주변에서 비웃기도 했다. 이런 혈통의식은 고려인사회도 마찬가지인듯. 하지만 90년대 말을 거쳐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이 취업 등 문제로 뿔뿔이 전국으로 흩어졌기에 마음에 맞는 동족과 결혼하는건 하늘에 별따기. 그래서 이젠 쉬쉬하며 한족과의 결혼도 용인하는 분위기지만, 기성세대에서는 가급적이면 동족 결혼을 바라고 있다.
         이런 이유로만은 아니지만 연변지역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조선족 사이에서 나쁜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다. 중국내 한국인한테도 여러 이유로 그다지 평판이 좋지는 못하다. 이건 일종의 중국조선족 사이의 지역감정일수도 있다. 헤이룽쟝성, 랴오닝성 사람중에 연변사람을 가리켜 '교활하고 돈만 알고 깍쟁이에 정이 없으며 타지역 조선사람을 무시한다'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듯한[* 두메산골 출신이 대도시 서울사람을 정은 없고 계산만 철저한 깍쟁이로 인식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욕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다른 예로는 연변 조선족과 한족이 길거리에서 싸우면 헤이룽장성 조선족들은 차라리 한족편을 든다고 농담 할정도로 사이가 좋지 못하다. 사실 헤이룽장성 조선족들은 학창 시절 한족 학생들과 많이 싸우면서 큰다고 한다.
         헤이룽장성 지역의 조선족이 구사하는 말은 한국어 문법과는 뭔가 많이 달라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문장을 구사한걸 보면 [[나메크어]] 수준. 또한 평상시에도 중국어와 조선말을 마구 섞어서 대화하는데[* 한국의 젊은 화교들도 이런 경우가 있다. 한국어 문장에 단어나 관용구는 중국어를 쓴다거나하는 식.] 같은 지역의 같은 조선족이 아니라면 대체 뭐라고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연변 조선족의 조선말이 중국어와 섞일 경우는 대부분 명사만 악센트를 순화하여 사용하기에 중국어에 대해 다소 소양이 있다면 그나마 순수 연변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헤이룽장성이나 랴오닝성의 조선족은, 특히 젊은 층은 한족들과의 접촉이 연변지구보다 잦아 중간중간에 중국어를 섞어서 말한다. 구어도 그렇지만 문어도 상당히 달라서, 중국에서 출간된 조선말 관련 서적을 보면 어휘는 차라리 북한말에 더 가까워 보이고, 읽을 수는 있는데 뜻을 알 수 없는 경우도 꽤 있다. 조선족도 어휘가 다르고 한자가 많이 포함된 한국서적을 읽을 때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화자수도 적지않지만(200만여명) 조선어를 꾸준히 써온 배경엔 중국조선족 사회가 농촌공동체 위주로 지속되어온 이유도 있다. 물론 연길 등 도시에서도 거주해왔지만 기본적으로 식민지 시대의 조선사람들은 농업이 기본이었고 조선땅에서 하던 벼농사를 마을,친족 단위 그대로 만주땅에 옮겨가는 식이었다. 즉 국가는 이국 중국이되 지역은 여전히 조선사람마을인 이중적인 형태가 수십년간 지속되어왔다. 전통적인 중국조선족 사회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농사를 짓는 수많은 조선족 마을의 연합이라고 봐도 될 정도. 그런데 9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젊은이들이 타민족이 많은 만주쪽 대도시나 중국내륙도시로, 외국으로 일하러 나가게되면서 농촌의 조선족 공동체가 조금씩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그 빈자리를 압도적 다수인 한족, 혹은 소수민족인 만족이 채우는 경우도 흔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조선족 사회 붕괴나 조선족 화자가 줄어드는 것을 중국당국의 한족위주정책이나 소수민족차별정책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중국조선족 사회 내부(조선족 지식인들의 잡지 기고같은..)에서는 앞서 말했듯 개혁개방이후 이촌향도를 주요원인으로 꼽고있다. 조선족사회의 기반인 조선족마을 공동체가 개혁개방으로 줄어든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인데 앞으로 조선족 화자가 줄어들지는 현재로서는 알수없다. 중국당국의 정책이 기본적으론 이른바 중화대가족을 외치는 한족중심인건 분명 사실이지만 문화대혁명같은 특정 시기를 제외하곤 중국조선족의 말과 글을 탄압하려는 정책은 없었다.
         또한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는 일이 많아져서, 조선족의 젊은층 중 조선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한족 학교에서 교육시키는 이유는 부분적으론 기성세대가 [[중국어]]를 잘 할 줄 몰라서 다른 중국인들과 교류할 때 많은 애로사항을 겪은 [[트라우마]]에서부터 출발, 한족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음으로 중국사회에 더 잘 융화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사고방식이나 생활습관 등이 완전 한족이 되어버린 자식을 보며 급후회하기도 한다. 이는 사실 조선족뿐만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재미교포들은 오히려 더했다. 1980년대 미국의 한국인 교회에서 아이들이 한국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혼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니 조선족을 이런걸로 비난하지는 말자. 외국에서 적응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게 되는 문제다. --정작 본인들은 귀화외국인이 김치만 못먹어도 입에 거품물잖아?--
         예를 들어 어릴적 조선족 마을에서 자라 옆 마을 한족 애들과 싸웠던 무용담!을 펼치는 조선족도 있는데 이럴때 '중국 애들과 싸웠다'고도 표현한다. 자신들도 중국공민에 속하지만 사회의 주류인 한족과 구분할때는 한족 중국인 vs 우리 조선족이란 구분의식이 있는것. 한족을 비롯한 타민족과 비교해서 조선족의 우월감을 표현할때 '중국인들은 조선족보다 [wiki:"문명하셨습니다" 문명하지못해] ㅉㅉㅉ'[* 여기서 문명(文明)이란 현대적인 시민의식, 개화정도를 의미.]라고 말할 때도 있다. 중국인이면서 한민족인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대국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백청강]]이 한국에서 출세하자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처럼 조선족에서 한국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왜 자신들이 소속된 국가인 중국의 주석이 아니고 한국 대통령일까? 이건 중국 조선족의 의식속에 역사, 민족, 국가가 뒤섞여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비유가 부적절하다. 조선족에서 한국 대통령이 나오는 것에 맞는 비유는 오바마가 케냐 대통령이 되는 것.][* 중국 헌법에 의하면 중국 국가주석은 만 50세 이상의 중국 국적을 가진 '''한족'''만 가능하다. 조선족들도 이걸 모를리는 없다. 메인 이유는 되지 않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조선족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연평도 사태 직후 중국 입장에서 한국을 무시하는 조선족이 발견되는 반면에 한국식 민족주의로 무장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외치는 젊은 조선족도 발견할 수 있다. 서버가 중국밖에 있는듯한 어느 조선족 커뮤니티에서는 이들끼리 역사,민족,국가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중국한족애들이 우리한테 해준게 뭐 있냐, 아니 그럼 한국인들은 우리한테 잘해주냐?' 등). 특히 거주 지역이 지역이니 만큼 고구려와 발해에 관한 게시물(한국 어디선가 퍼온 듯한)이 종종 올라오는데 한국의 [[환빠]](!)의 영향을 받은 주장을 올리기도 한다.
         즉, 태어날 때부터 민족과 국가가 같아서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한국인]]과, 태어날 때부터 민족과 국가가 다른채로[* 게다가 고국이 2개씩이나 바로 옆에 붙어있다.] 중국의 조선족으로 자라다가 이후 고국의 존재를 체감하게 되는 조선족의 민족,국가의식은 다를수밖에 없다. 위협적인 이민족이 없는 한국인은 민족도 하나, 국가도 하나(남한)이며, 국내에서 타민족으로부터 차별당하거나 구분될 수가 없다.. 하지만 조선족은 자신들과 엮인 국가가 세곳(중국, 남&북한)이며 변경의 소수민족이라 그 정체성에서 당연히 한국인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민족의식이란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주변'국가'에 비교하고 대항하는 사실상의 '''국민의식'''이다. 그러나 조선족에게 민족의식이란 절대다수킹왕짱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경계하는 소수민족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식'''이다. 애초에 '민족의식'이란 단어조차 한국인, 조선족에겐 의미가 다를수밖에 없다.
         == 한족에 동화? ==
         최근에 조선족은 동북3성에서 벗어나 해안지역으로 퍼지면서 조선족 자체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한족에 동화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특히 자치주가 아닌 중국 내지의 도시지역에 사는 조선족 청소년은 조선어(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족 부모들은 중국어를 못해서 자기들이 주류사회에 편입 못하고 한국 회사나 다닌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에게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중국은 장기적인 성장 가능성이 높은 반면, 한국은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저성장체제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많으므로 자식들이 잘 살길 바랄 수밖에 없는 부모입장에선 민족주의적 관점을 떠나서 장래성이 좋은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조선족들은 한국인을 동족을 대우할 줄 모르는 야박하고, 사기 잘 치는 사람이라고 인식한다는 말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캐나다, 미국, 일본 거주 한민족은 자기 나라처럼 한국에서 살며 오히려 외국인이라서 받는 특혜와 재외동포라는 보호를 동시에 누리지만 [* 더군다나 혈통만 한국인이고 미국인이나 다름없는 미국 시민권자가 꾸준히 한국으로부터 지원 받는 일도 있다.] 자신들은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사실상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에 재외동포법이 생겼을 때 일본과 미국에 거주하는 이들만 인정했는데 이 법은 위헌 판결을 받았다. [http://ko.wikipedia.org/wiki/%EC%9E%AC%EC%99%B8%EB%8F%99%ED%8F%AC%EB%B2%95_%EC%9C%84%ED%97%8C%ED%99%95%EC%9D%B8_%EC%82%AC%EA%B1%B4 위키백과의 관련 페이지] 또한 재미교포나 재일교포[* 재일교포의 경우 사실 특혜보다는 차별을 더 받아왔다.]들과 달리 오랜기간 동안 단절되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상이한 체제에서 살아오게 되므로써 생겨난 인식차와 경제적 격차가 고강도 경쟁사회의 대한민국의 인식에 의해 멸시하는 풍토에 맞물려 심화된 측면도 있다. 거기에 한중수교 초기 한국인들의 [[사기]]가 아직도 연변 사회에 영향을 미칠 정도인 것도 있다. 도문시의 도시 재개발 사기사건에 시민의 반 가량이 연루되었다.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해서 상당히 익숙한 지명인 산둥성 칭다오 시의 경우 한국인의 상습적인 임금 체납+부도내고 도망치기 때문에 '''[[한족]]'''이 조선족에게 한국인 조심하라고 일러줄 정도로(…) 분위기가 나쁘다. 또한 [[한족]] 및 조선족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인]] 사장들이 중국에서 [[작업장]]이나 [[보이스피싱]] 사업장을 운영하며 현지인들을 고용해 동포의 신상을 털게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사실 이런 사기는 한국에 대해서 어느정도 잘 알아야 칠 수 있으니, 적어도 간부급에 한국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나중에 [[통일]]할 때 참고할 사례.
  • 종족(지구)
         [wiki:"한족" 한족(네팔)]
         한족(사우디아라비아)
         한족(탄자니아)
         한족(태국)
         한족(터키)
         한족, 꽝뚱(라오스)
         한족, 꽝뚱(인도)
         한족, 꽝뚱(캄보디아)
         한족, 눙(중국)
         한족, 떼오초우(캄보디아)
         한족, 만다린(라오스)
         한족, 만다린(베트남)
         한족, 만다린(북한)
         한족, 만다린(캄보디아)
         한족, 푸조우(태국)
         한족, 하이난(중국)
         한족, 하카(인도)
         한족, 하카(중국)
         한족, 하카(캄보디아)
         한족, 호키엔(캄보디아)
  • 좡어
         [[중국]] 최대의 [[소수민족]]([[한족]]을 뺀 나머지 중)인 좡족의 [언어]]. 지리적으로는 [[광시좡족자치구]]가 주무대이며, 사용인구는 최대 1800만명에 달하나, ~~듣보잡이다~~ 좡족의 존재는 물론, 이 언어의 존재자체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언어적으로는 [[태국어]]가 속한 타이카다이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휘나 음운면에서도 태국어와 친연관계가 있다고 한다. 단음절 중심에 6성을 갖춘 [[성조]]언어다.
  • 중국 텔레비전
         1968년 9월 3일 [[장개석]]의 지시로 창립되었고, 1969년 10월 9일 시험방송을 거쳐 10월 31일 [* 이 날은 장개석 생일이다(...)]에 정식 방송을 시작하였다. 1970년대 초반에 재정이 어려워지자 [[중국 국민당]]이 인수하여 2005년 12월 24일까지 경영하였다.(사실상 국민당의 당영(黨營)방송. --[wiki:"중국 중앙 텔레비전" 대륙에도 이런 방송사가 있는데?] 역시 [한족]--) 이후 대만의 신문사인 [중국시보]가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중국/민족
         중국은 [[한족]]이 주체가 되는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이다. 인구를 92%(정확히는 91.6%)[* 혈통으로 분석한 구성 비율은 그보다 훨씬 낮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637790 #]] [[http://blog.naver.com/sukbongcho/10084872682 #]] ]를 차지하는 한족을 비롯해 총 56개의 민족[* 이 구분으로만 규정하기엔 애매한 민족들도 있다. 하지만 현 중국법은 오직 56개의 민족만을 인정한다.]이 거주하고 있다.'''[* 이는 [한족]만이 주류인 영향이 크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조선족](朝鮮族)이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신기해 한다.[* [중국] 동북쪽 지방에서 [한국어]를 하고 있으면 [조선족]인가? → 아니다 → 조선인([북한])인가? → 아니다. [한국인]이다 → [남한] 사람이군!! 이라는 --김성모 만화스러운--패턴을 쉽게 겪을 수 있다.]
         90%이상을 차지하는 [[한족]]외에도 [[좡족]], [[회족|후이족]][* 조상이 [[당나라]]때 건너온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이다.], [[몽골족]][* 중국의 몽골족들은 몽골본토보다 많이 거주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둥간인]]이라고 불린다.], [[다우르족]], [[에벤키인]], [[허저족]][* 러시아에서는 [[나나이족]]으로 불린다.], [[만주족]], [[시버족]], [[조선족]], [[먀오족]], [[위구르족]], [[티베트인]] 등이 있다. 대개 한족들은 소수 민족들이 사는 지역에도 많이 거주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기도 한다. 소수 민족에 따라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많지만, [[중국어]]를 거의 많이 쓰는 경우도 있고 한족화때문에 고유언어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존재하고 있다.[* [[만주족]]들은 거의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만주어]]보단 중국어를 사용한다.] 다만, 후이족은 의복, 생활, 종교를 제외하고 한족과 구별이 없고 [[중국어]]를 사용한다.
         || 한족 || 汉族 || 91.65% || 1,220,844,520 ||
         == 한족 ==
         [한족]을 참고할 것. [중국인]하면 보통 [한족]이라고 생각한다. 2010년 기준으로 1,220,844,520명으로 넘사벽이다. [계획생육정책]을 적극적으로 적용받은 곳이기도 하다. [소수민족] 중엔 해당 정책을 적용받지 않은 데도 있다. 동아시아 각 나라의 정사를 읽어보면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시좡족자치구][* 광시성이었지만 아예 광시좡족 자치구가 되었다.]과 [윈난성]과 [광동성]에 주로 산다. 16,926,381명으로 한족 다음이지만 규모는 한족의 2%도 안 된다. [네덜란드] 인구랑 비슷하다.
  • 중국계 한국인
         역사상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수는 많지만 오늘날에는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넘어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을 말한다. 대체로 [[결혼이민자]]들이 많으며 귀화자의 70% 가량을 점하고 있다. 특히 [[한국계 중국인]]들의 귀화가 많다. 2013년 8월까지 약 13만명의 결혼이민자가 한국인으로 귀화했는데 이 중 7만이 [[한국계 중국인]]이며 3만은 [[한국계]]가 아닌 [[중국인]][* 보통은 [[한족]].]이다.
  • 중국붕괴론
         경제가 붕괴하면 체제가 붕괴하고, 소수민족이 일제 독립할 것이다는 논리 기본적으로 한족이 중심이 된 중국사회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진시황이래 통일국가를 이뤄왔던 역사적 맥락과도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허점이 드러난다. 또한 소수민족의 일제 독립도 공산당일당 체제하에 임명관료제에서 소수민족 관련 분야 이외의 고급관료의 탄생은 정부단위로 철저히 막고 있다는 반박이 크다.
         중국의 56개 [[소수민족]]들 중에서 이미 대다수의 [[민족]]들은 중국에 [[동화]]되었거나 [[흡수]]되었고 나머지 [[독립]]을 원하는 일부 소수민족들은 단 두개, [[티베트]]족, [[위구르]]족 정도이다. 그리고 설령 동화되지 않은 가정하라 하더라도 어차피 한족에게 머릿수가 대단히 압도적으로 딸린다. 소수민족을 전부 긁어모아도 중국인구의 8.48%밖에 안되고 '''나머지 91.52%가 한족이다.''' 상대가 되겠는가?
         그러나 소련과는 달리 중국에서 [[한족]]의 입지는 절대적이다. 중국은 [[인구]]의 92%가 한족이다. 56개 소수민족들이 중국 영토의 60%를 차지하고 있지만 인구수가 너무 밀리며 결정적으로 중국의 알짜배기 땅 중 상당수를 한족들이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국력을 지탱하는 것이 한족인만큼 몇몇 소수민족 독립 그 자체만으로 중국이 붕괴하리라는 것은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무엇보다 전술했듯이 자국의 영토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나라는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런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사태를 미리 예감한 중국 정부의 정책에 의해 1950년대부터 소수민족 지역의 한족의 대량 이주는 계속되었으며, 현재 소수민족 지역조차 위구르의 [[우루무치]]나 티베트의 라사와 같은 주요도시는 쪽수로 한족과 비슷비슷한 형편이다. 현재 소수민족 지구에서도 주요 도시의 주류는 모두 한족이며, 이렇게 주요도시에서부터 쪽수에서 밀리는 소수민족이 독립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해져가고 있다.
         현재 티벳족이나 위구르족이 아닌이상 대다수의 민족들은 중국에 동화된 상태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장악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파워가 막강해져 가고 있고 그와 동시에 더욱 많은 중국내의 민족들이 중국화 되어가고 있다. 중국이 터키처럼 강제동화책을 쓰고 있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중국 당국은 건국 당시부터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에 대한 보호책을 약속해왔다. 그래서 중국 소수민족 학교를 세우는 것도 사실 매우 자유로우며 자치지역에서는 법적으로 모든 언어가 공용되고 있지만, '''그 소수민족들 스스로가 중국에서 주류로 포함되려고 하기 때문에''' 점점 소수민족들은 중국에 동화되고 있다.[* 한창 이주 및 흡수가 지속되던 미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민자들이 스스로가 미국사회에 동화되려고 하면서 유럽의 여러나라에서 온 미국 백인들은 대부분 균질화되었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독립 이야기가 크게 나오는 곳은 티베트나 위구르 등 일부에 불과하다[* 다만, 중국의 소수민족 동화가 전적으로 소수민족들이 자발적으로 중국의 주류에 동화되기를 원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관점은 극히 위험하다. 티벳인이나 위구르인을 제외하면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동화와 갈등이 현재 진행중인 티벳이나 위구르의 사례야말로 중국의 소수민족 동화 정책이 전적으로 자발적이지는 않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또한 바로 위에서 설명된 것처럼 현재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거주지역에 한족을 이주시킴으로써 동화를 촉진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마키아벨리]]시대부터 전해져오는 유서 깊은 강제 동화 정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수민족의 독립 요구로 인하여 중국이 붕괴할 것이다'라는 주장에 현실성이 없고,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을 통제하면서 동화를 진행시킬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현실적 상황이고, 소수민족들이 자발적으로 중국에 동화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은 도덕적 당위의 문제라는 점이다. 이 둘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임에 주의할 것.] [* 그러나 이에대한 반론으로 위구르족은 특유의 이슬람교 때문에 중국체제에 반발이 심한 것이지, 중국의 동화책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슬람교가 세속국가들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는 동화책과는 무관한 여러 나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프랑스나 영국에서 이슬람교에 대한 강제동화책을 쓰지 않지만 이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위구르족도 상황이 중국에서 어떠한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즉 중까들이 주장하듯이 위구르족에 대한 동화책을 써서 위구르족이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 자체가 세속국가와 잘 안맞는다는 것이다.]..[* 재반론으로 위의 주장은 '중국의 소수민족 동화가 그들 스스로 중국의 주류에 편입되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중국 정부가 강력한 동화정책을 추진중임을 지적한 것인데, 위구르인들의 반발이 이슬람교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반론자는 '중국의 가혹한 동화 정책으로 위구르인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주장을 '''상상'''하고 그에 대해 반론하면서 상대를 중까라고 매도하는 모양이지만, 정작 반박 대상인 주장은 그와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다.(...)]. 물론 이곳이 독립에 성공하면 다른 소수민족의 독립 이야기가 차례로 나올 가능성은 있다는 것은 변수가 될 수 있다.
  • 중국의 전통악기
         아래의 분류는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traditional_Chinese_musical_instruments 영문위키페디아]를 참조하였으며, 악기의 재료를 기준으로 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분류법인 팔음(八音)을 따르면서 [[한족]]의 악기 이외에 소수민족의 악기도 포함한다.
  • 중국인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혐한]]이 많다고 생각되지만, 의외로 본토 중국인은 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편이다. 특히 비슷한 이웃나라인 일본인이나 베트남인에 비교해서 이미지가 휠씬 좋은 편이다.[* 일본인들은 중일전쟁-난징학살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중월전쟁 때문에 불편한 감정이 생길 수밖에 ㅇ없는 면이 있다.] 한국이 역사적으로 중국과 충돌한 적은 적은지라 일반적으로 한국인이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양호하다. 한나라 무제의 고조선 점령, 고수전쟁이나 고당전쟁, 나당전쟁과 같은 ~~호랑이 담배 피던 고릿적 얘기~~ 예외를 제외하고 중국 한족 통일왕조가 한반도 국가와는 그렇게 큰 외교적 갈등관계를 겪지는 않았다. 특히 근현대사에서는 일본제국에 피해를 받은 역사적 동질감도 있고, 한국 전쟁 때 파병을 한 이후로 수십년동안 외교적인 단절이 있었지만 이후 크게 갈등을 겪지는 않아서 더욱 그렇기도 하다.[* 한국 전쟁에 대해선 현재 한국이나 중국이나 러시아나 그때 그 일은 모두 [[김일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주류여서 그렇기도 하다. 실제로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위해 [[마오쩌둥]]이나 [[스탈린]]을 교활하게 꼬드겨 댔었고.][* 사실 최근 중국의 젊은 세대들은 북한 정권을 거의 혐오한다고 보아도 될 정도이다. 김정은을 개그감으로 취급할 뿐 아니라 북한 자체를 민폐 집단으로 취급하고 있는 실정. 이는 중국 지도부 역시 마찬가지로 거의 내다놓은 자식 취급한다. 다만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북한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 뿐.] [[혐한]]이거나, 한국을 무시하는 경우도 존재하나, 큰 수치는 아니며 일반적인 인식은 여전히 좋은 편이다.[* 다만 2008년 [[쓰촨성 대지진]] 당시 적지 않은 수의 한국 네티즌들의 조롱 때문에 잠시동안 한국에 대한 인식이 크게 떨어진 사례는 있다. 당시 일부 조사에 따라서는 가장 싫어하는 국가에서 일본을 제치기도 했을다. 하지만 2015년 기준으론 다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 특히 나라 자체가 거대하고 한국과 문화적, 경제적으로 밀접한 위치에 있는 만큼 한류나 한국 문화가 제일 잘 통하는 곳이 중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에서 한빠를 일컫는 [[합한족]](哈韩) 이라는 말도 생겨날 정도. 반대로 [[중화민국]] 출신 중국인들은 여전히 혐한성향이 깊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한국-대만 관계]]참조.
          * 둥베이인(東北人): 둥베이인은 원래의 [[만주]] 지역, 즉 헤이룽장성, 랴오닝성, 지린성의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다. 민족은 주로 [[한족]], [[만주족]], [[조선족]]이 있다. 이들은 추운 지역에 거주하는 특성상 호쾌하고 직선적이며 가부장적인 [[마초]]들이다. 추운 지역에서 생활하기에 게으르고 낙천적이다. 남녀관계에서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전통을 고수하며 남자가 집안일을 한다하면 대차게 까인다. 스케일과 포부가 큰 [[대인배]]들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허영심이 강하고 현실적인 이익보다는 자존심을 많이 따지며 술을 광적으로 좋아하고 다혈질이며 싸움을 즐긴다. 이상하게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깡패, [[조폭]], 기생을 보면 둥베이인일 경우가 많다. 때문에 타지역 중국인들은 둥베이인들이라 하면 역사 속에 나오는 산적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남자는 깡패, 여자는 기생이라고 편견을 가지기도 한다. [[현피]]를 뜰 경우 --소인배-- 상하이인들은 주로 말다툼으로 승부하는데 둥베이인들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등 상하이인과 둥베이인은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둥베이 지역의 거부들은 거의 조폭 두목이다.
          * '''[[한족]]'''
  • 중국티베트어족
         한장[[어족]]이라고도 한다. [[한족]]의 언어와 [[티베트]]인(장족)[* 장족(藏族) 또는 짱족이라는 말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티베트인을 가리키는 말이다.]의 언어를 묶은 어족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인도유럽어족]] 다음으로 가장 큰 어족~~이게 다 중국어 쓰는사람들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유럽어족이 큰 것도 [wiki:"인도 공화국" 인도] [[인구]] 때문인데?~~ 1823년 독일의 동양학자 율리우스 클라프로트(Julius Klaproth)가 주장한 이래로 연구가 계속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 중세
         중국은 [[삼국시대]] 혹은 [[오호십육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잡고, 서민 문화가 성장한 [[송]]대(보다 현대적인 시각) 혹은 [[한족]]에 의한 통일 왕조가 재건된 [[명]]대까지를 중세의 끝으로 보고 있다.
  • 중인관계
         양국의 역사적 전통을 봐도 중국의 손을 들어주는게 합리적이다. 인도는 지나치게 다양한 인종구성으로 국민통합이 어렵고, 역사적으로도 인도라는 국가로 통일을 이뤄본적이 거의 없다. [[아소카]] 왕이나 [[무굴 제국]]때의 정도의 짧은기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완전한 통일은 아니었고, 차라리 지금 인도 공화국의 영역은 영국의 식민지배로 만들어졌다고 보는게 합리적일 정도이다. 그에 반해 중국은 [[진시황]] 덕에 통일왕조를 2천년전부터 이뤄왔고, 수많은 [[소수민족]]이 있으나, [[한족]]이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할 여지도 적다.
         민족의 복잡한 구성도 인도의 걸림돌이다. 중국의 [[한족]]은 혈통적으로 다양해도 스스로 문화-역사적 공통체임을 자각하고 있지만, 인도인들은 [[혈통]] - [[종교]] - [[문화]] - [[언어]]까지 모조리 각각 따로 놀기 때문에 [[분리주의]] 운동이 항장 신행중이다. 잘 알려진 [[힌두교]] - [[이슬람]] 갈등은 현재 거의 매년 대규모 테러가 일어나는등의 위험수위에 달하고 있으며, 여기에 [[시크교]]도까지도 분리주의 운동에 나서는 등, 바람잘 날이 없다. 사실 사회통합면에서는 이런것 따질거 없이 인도에는 [[wiki: "북한" 한반도 북쪽]]에 존재하는 신분 제도 못지 않기로 악명높은 카스트 제도[* 다만 카스트 제도는 어디까지나 인도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살아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일 뿐이지, 인도 법률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만약 인도에서 법적으로도 카스트 제도가 살아 있었다면,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인정되던 시기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적으로 받은 것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어쨌든 '사실상' 살아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신분 의식이 많이 사라진 중국이 사회 통합 면에서 압승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국으로 따지면 양반 / 중인 / 천민 계급의식이 아직도 남아서 양반계층 직원이 천민계층 사장에게 상놈 운운하며 대드는 식이다. '''통합이 제대로 되겠는가?''']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점 하나만 들어도 중국의 압승이다.
         인도의 민주정치는 그나마 예측가능하기 때문에 그보다는 안정적이라는 설이 많으나 실제로는 '''영 아니다.''' 민주주의의 수준이 낮고 거대한 연방제라서 돌아가는게 신기할 정도. 제도상으로는 그럭저럭 굴러가지만 실질적으로는 유력가문에 의한 세습정치가 이뤄지고 있다. [[네루]] - [[인드라 간디]] - [[라지브 간디]] - [[소냐 간디]] (원래 [[이탈리아인]]) 으로 이어지는 국민회의의 세습정치가 대표적. 뿐만 아니라 인도의 금권정치, 중우정치는 필요한 개혁이나 경제개발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민주주의의 장점인 대화와 타협에 의한 갈등 해결은 고사하고 오히려 더욱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하여 매년 극단적 정치세력에 의한 테러사건은 매년 일어난다. 또한 [[칼리스탄]]과 [[카슈미르]]의 분리주의 문제는 중국의 티벳이나 위구르 못지 않게 시한폭탄이다. 인드라간디 수상 라지브간디 수상 두명이 바로 이 칼리스탄 시크교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었으니, 심각성을 보면 중국보다 한술 더뜬다.[* 적어도 중국은 중앙 지도자가 이렇게 암살되는 경우는 없었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티베트]], [[위구르]]와 같은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운동이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중국이 가진 힘을 기준으로 봤을 때는 그 수준이 극도로 미미한 데다가 결과적으론 '''이들에겐 힘이 없다.''' 결국 중국의 경제, 군사, 정치에 힘을 가지려면 [[중국 공산당]]에 줄을 대야 하기 때문이다. 즉 기득권의 절대 다수가 한족인 상황이다. 반면 인도의 [[시크교]]는 인도 군부내부에서 고위장교로 임관될 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다.(당장 시크교 독립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사령관부터가 '''시크교 출신의''' 쿨딥 싱 브라르 [[중장]]이다.) 중국의 경우 세계의 비난을 무릅쓰고 티벳이나 위구르를 무력으로 때려잡고 많은 한족을 강제이주시키는 초강경책을 둘 수 있지만(실제 그렇게 한다.), 인도는 그게 안된다. 국가 수장인 총리가 암살당할 정도니까.] 힌두교계의 인도인민당이 집권했던 [[2000년대]] 전후와 (지금도 제1야당이다.) 그보다 심한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이 세력을 떨칠 가능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 중화 타이베이
         아이러니하게도 대륙과 대만을 통틀어서 중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한족]]이 아니라 소수민족(대만 원주민) 출신이었다. 물론 당시는 중화민국 국기가 게양되긴 했지만 그 사람 개인적인 느낌이 어땠을지는... 본인 외엔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한편 한족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두 '중국'이 아닌 [[싱가포르]] 선수.
  • 중화권
         [중국인] 특히 그 중에서도 [한족]이 문화, 경제적으로 영향을 발휘하는 곳을 말한다. 당연히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에 자리한 [중화민국]은 들어간다.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소속 특별행정구이지만 1997년과 1999년 이전까지는 영국과 포르투갈 등 유럽의 식민지였던 [홍콩]과 [마카오]도 중화권으로 포함하며 [화교]로 구성된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의 일부 지역도 중화권으로 친다. 여기서 볼 수 있듯 중화권이라고 해서 꼭 중국 정부의 영향력에 놓인 곳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중화민국
         인구의 2%는 중국인이 이 섬에 진출하기 전부터 이 섬에서 살고 있었던 다양한 [[대만 원주민]]들이다. 나머지 98%는 [[한족]]으로, 중국의 [wiki:"푸젠 성(중화인민공화국)"푸젠 성]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70%, [[하카]](客家)인들이 14%를 차지하고 이 84%를 묶어 [[본성인]](本省人)이라고 한다. 나머지 14%는 [wiki:"제2차 세계대전" 1945년] 이후에 중국 대륙 각지에서 대만 섬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며 이들을 일컬어 [[외성인]](外省人)이라고 한다.
         대만 섬에서 국어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쓰여왔던 민난 방언인 [[대만어]]도 아직도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인다. 이 외에도 하카인은 자기들끼리 [[하카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카인은 별개의 민족이 아니고 그냥 [[한족]]의 부분집단이며, 이들의 언어도 일단 [[중국어]]의 [[방언]] 중 하나이다. 대만의 진짜 원주민들(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고산족이라 부름)은 대부분. 국어와 대만어를 사용하지만 원주민 언어를 보존하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이 원주민 언어는 [[말레이시아]]어, [[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필리핀]] 공용어) 등과 같이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에 속한다.
  • 중화민족
         중화민족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는 [량치차오]다.[량치차오]는 변법파 캉유웨이의 영향으로 대일통을 주장하였으나,실체는 손문의 [신해혁명]과 멸만흥한에 가담하였다.말만 중화민족이지,[한족]만을 위한 민족밖에 지니지 않는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중국을 차지한 [중국 공산당] 입장에선 다민족 구성이 문제가 되었다. [위구르]나 [티베트], [만주] 등에 [한족]을 이주시켜 중국색을 강하게 입히는데 몰두하였고 [동북공정] 등의 역사 프로젝트를 통해 중국인들의 일체감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중화민족이란 개념이 등장하였다.
         요약하자면 그동안 중국에서 살았던 [한족], [만주족], [티베트], [위구르] 등 그외 수많은 [중국/민족|중국의 소수민족] 등이 겪었던 역사는 모두 [내전]이었고 이제 하나로 통일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엔 중국인이란 공민(公民)적인 개념으로 접근했지만 민족 간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자 이제 중국인은 아예 하나의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위아더월드-- 이에 따르면 중국의 대표적인 [한간]인 [진회] 같은 인물도 같은 중화민족 내의 내전을 막은 인물로 재평가가 가능해지고 실제로 중국 정부는 이를 시도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중국인의 다수는 [한족]이고 한족의 민족적 정체성이 19세기에 서구열강의 침탈로부터 형성되어 상당히 방어적이고 완고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다른 민족을 한족과 엮어 하나의 민족이라 하기가 쉬울리가 없다.[* 당장 한국인을 구성하는 [한민족]만 해도 중국의 한족과 처지가 비슷해서 귀화한 [외국계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잘 받아들이지 못 한다. 이는 [일본인]을 구성하는 [야마토 민족]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이민으로 형성된 나라인 [미국]의 [미국인]들도 [아시아계 미국인]을 약간 외국인 보듯이 한다.] 당장 진회의 재평가를 노리는 중국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회는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당장 한족조차도 그런 판인데 멀쩡히 존재하고 있는 소수민족이야(...)
  • 중화사상
         다만 사실 이 단어도 단순히 애국기믹을 보인다고 너무 남발은 말자. 어느 나라에나 있는 정도의 자문화애착은 누구라고 특별한 시각으로 보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은 또다른 편견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사실 '중화'라는 단어가 국가명, 민족명에 정확히 귀속되는 개념이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과거 동양의 '중화사상' 이란 특정 민족이 최고이며 우월하다는 것보다는 그냥 '중화'자체가 뛰어난 문명을 가르키는 개념이고 그런 문명국을 추구한다는 사상이었다. 그런 [[문명]][[부심]]으로 비문명권의 나라나 민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하기도 했지만 중국이라는 명칭은 나라이름으로 쓴 국가는 [[태평천국]]운동으로 서구의 민족개념이 유입되고 그 태평천국의 [[한족]] [[민족주의]] 사상을 계승한 [[신해혁명]]으로 세워진 [[중화민국]]이 최초다. 물론 이전부터도 중국이라고 불리기는 했으나 이민족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중국을 자처한 사례들도 많다. 중국이 민족 정체성에 귀속되던 명칭이라면 이것을 자처하는 순간 이민족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버려버렸다고 보는게 옳을까? 한 예로 [[청나라]]는 40년만에 중국을 자처했다. 정복민족이 40년만에 피정복민족에 동화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것이다. 물론 [[만주족]]은 동화가 심해서 상당부분 정체성이 사라진 민족이긴 하지만 이것은 문화 컨텐츠가 부족하며 숫자도 적은 비농경 민족이 컨텐츠가 풍부하며 수도 압도적인 민족을 통치한 대제국이 약 300년이나 지속되고 난 이후에 나타난 불가피한 현상이지 초기에는 한족에게 자신들의 전통을 강요하고 만주어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했다. 거기다 [[조선]]이나 베트남처럼 중원에 위치하지 않은 나라들이 중국을 자처한 사례도 있는데 여기에 현대인의 관점을 적용시켜 이런 [[소중화]]사상을 '속국을 자처함, 자주성이 없음'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커다란 오류이며 [[식민사관]]의 잔재다.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지나친 [[소중화]]사상이 나라를 [[막장]]으로 몰고간 것은 맞지만 그것과 식민지를 자처한다는건 별개다. 명나라 멸망 이후의 사대부들은 조선이 중국이라고 하며 속국의식이 아닌 자부심을 가졌다. 여기에서 나오는 폐쇄성을 포함해서, 과거의 소중화 사상이 현대의 [[민족주의]]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수]], [[당]]은 [[북위]]로부터 이어진 [[선비]]계의 혈통이 작용하는 [[관롱집단]]으로부터 출발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스스로의 문화를 거의 상실하고 [[한족]] 국가에 녹아들었고 오히려 정통 [[한족]] 왕조로 취급받아왔다. [[만주족]]인 [[청]]의 [[옹정제]]도 [[동이]][* [[은]] 왕조 시절 그 지배권 동부에 해당하는 [[산둥 반도]] 부근. 한반도나 일본도 취급 자체는 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지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출신의 순 임금과 [[서융]] 출신의 주문왕을 거론하며 이들도 [[한족]] 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음을 『대의각미록』에서 주장하여 [[청]]의 정당성을 삼는 근거로 내세웠다. [[한족]] 항목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남중국과 북중국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제법 큰 차이가 있음에도 역대 중국의 국가들은 '중화'의 범위로 이들을 묶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한 주장으로, 정작 한족 [[신사층]]이 청 황실을 오랑캐라고 보는 관점은 청 말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들 한족 신사층은 지방에 웅거하면서도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절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표방하며 언젠가 '오랑캐의 지배'를 뒤엎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고, 그것이 대대적으로 폭발한 것이 이른바 [[태평천국의 난]]이다. 이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이념이기도 하다. 청나라가 안정된 뒤에 한족에 대한 강경책과 탄압이 완전히 사그라든 건 아니었다. [[문자의 옥]] 항목 참조. 물론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잘한 점은 덜 인정받고 정통왕조와 똑같은 병크 저질러도 더 까이는 성향은 컸지만(...) 하여튼 청 말기의 혁명가들은 청조의 지배기간을 중국이 식민지배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신해혁명]]은 한족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멸만흥한' 이념이나 [[조선]] 및 [[베트남]] 등에서 내세운 [[소중화]] 사상은 소위 오랑캐로 일컬어지는 외래인 중심의 지배를 부정하는 기조에서 성립된 것으로, 뿌리 깊은 중화사상 하에서 정통 중화인이 아닌 오랑캐를 질서의 정점에 세우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즉 소위 '중화인'들이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중화 문화였지만, 그 기저에는 혈통이나 인적 공동체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고대 이래 황하 인근 집단이 주변의 이민족을 흡수하며 지금의 [[한족]]으로 세를 불려나가는 과정에서 '중화'의 범위는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중심 지역에서 인구가 팽창하는 범위 이상으로 이루어진 문화의 확장을 동반한 것이었고, '중화인'의 혈통적, 인적인 구성도 중화사상의 주장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유동하면서 넓어져 갔다.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의 영토가 계속해서 확장된 것 또한 이렇게 당연하게 자신을 '중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의 한족정권이 한반도를 직접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은 [[한무제]]나 [[수양제]], [[당태종]], [[당고종]] 정도이다. 그 이후 수많은 외침은 북방의 유목민족이나 일본에 의한 것이었던 게 사실이다. 당고종 이후로 한족정권이 한반도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으며, 한반도 국가를 분명히 이민족국가로 인식했고, 중국의 영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맞춰 한반도 정권들은 외교관계의 한 형식인 [[사대]]의 예로 중국을 명목상의 상국으로 인정함으로서 중화질서에 편입함으로서 평화를 얻었다. 당고종 이후로 한족정권이 반도와 직접 국경을 맞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역시 압록강변은 커녕 요동 평야지대를 유지하는데도 힘겨워 했었다.
         일단 중화사상은 소국 혹은 속국이 중국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적인 주종관계를 맺는다면, 중국은 이런 소국에게 문화-정치면에서 원조를 해준다는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중화사상이 팽창주의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은 이런 중화질서 내에서 행해진 조공무역에서 손해를 보면서까지 소국을 자신의 편으로 잡아놓으려고 했다. 중국의 팽창은 대체로 한족정권이 아니라 이민족 정권의 손에서 이뤄졌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방대한 영역의 반이 넘는 영토 (티벳, 위구르, 내몽골, 만주 등등의 변경지역)는 [[만주족]] 정권인 [[청나라]]의 손에서 이뤄진 것이다.
  • 지나
         '지나'가 비하어로 변하게 된 과정은 다소 복잡하다. 일단 전제하자면, 본래 중국 지역을 가리키는 정식 국호는 [[청나라|청(淸)]]이었다. 하지만 반청운동을 하던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청나라가 본질적으로 [[만주족]]의 나라라는 점에서 청이라는 국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정식 호칭이 아니었고, '중화'는 당시까지는 민족주의적이라기보다는 전통주의적인 [[중화사상]]의 느낌이 강한 단어였다. 중화사상은 본래 황제주의적인 사상이기 때문에 '중화'는 곧 '청조'였다. 그렇다고 과거의 왕조명인 명나라라고 하기에는 명 역시 멸망한지 오래된 왕조국가에 불과했기 때문에, 공화주의를 추구했던 당시 한족 민족주의자 지식인들이 정체성으로 삼기에 부적합했다.
         [[중화민국]]을 성립하면서 이러한 생각은 달라졌다. 청조가 소멸하였으므로, 중화의 정통성은 새롭게 성립된 신정부가 가지게 되었다. 다수의 중국인들이 이에 공감하면서 지나 같이 중국인들 스스로 그리 와닿지 않는 명칭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졌다. 중국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중화사상]]을 [[민족주의]]와 결합하였고 이제 '중화'는 한족민족주의와 결합된 새로운 가치관의 표어가 되었다. 그리하여 자국을 일컷는 국호를 '중화','중국'으로 정의하게 된 것이다.
  • 짱꼴라
         유래는 의외로 깊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도 [[중국인]]을 저렇게 부르며 욕했다.[* 다만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선 중국을 짱골라라고 불렀다고 적혀 있다.] 기원에 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인]]이 기고만장해서 [[청나라]] 노예(淸國奴, 챤코로)라 얕잡아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고 [[중국어]]로 중국인을 발음하면 '중궈런'으로 발음되는데 한국에서 '중궈런'의 발음을 변형시켜 짱꼴라 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혹은 오리지날 [[중국인]]이라 할 수 있는 [[한족]]들이 청나라의 [[만주]]족 [[황제]] 앞에서 자신을 '노재(奴才)'라 부른 것을 보고 일본인들이 '청나라의 노예'라는 뜻으로 '청국노(淸國奴)'라 부른 말이 건너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 중국어 발음 '칭궈누'를 '챤코로'라 말했는데 이 말이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짱꼴라'가 되었다는 것.
  • 차마고도
         [[wiki:"여행금지국가" 여행자 출입 엄금 지역]][* 국가 전체가 여행금지인 것은, 아니지만 해당 국가 정부에서 그 국가 내의 특정 지역의 출입을 엄금하는 경우가 있다. [[여행금지국가]] 항목 참고. [티베트]의 경우 반드시 [중국] 비자 외에도 [티베트] 입경허가서가 필요하며, 여행경로도 꺼얼무에서 [라싸]로 들어가는 청장공로나 철도([칭짱철도]), [비행기]만을 이용하게 되어 있다. [라싸]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추가로 여행허가서가 필요하다.]. 이 길을 이용해서 동티베트를 여행하는 것은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도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이 길을 이용했다는 여행자가 있다면, 100% [중국인]인 척 하고 들어간 것. [중국어]가 상당히 유창해야 하고, 전 세계 어딜 가도 눈에 띄게 되어 있는 여행자의 외모가 현지인과 비슷해야 한다는 점에서 꽤나 어려운 일이다. [한국인]이나 [일본인] 등 동아시아인의 경우 [중국인]과 외모가 매우 비슷한 [[황인]]이니까 [중국어]만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보인다. 그래도 일단 그렇게 [[중국어]]([[표준중국어]])를 원어민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부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백인 외모의 서양인의 [한국어]를 토종 [한국인]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발음의 디테일 차이 때문에 외국인이 한국어하는 것을 소리만 듣고 눈치채는 경우가 있는 걸 생각해보자. 그렇기 때문에 100% 순종 [한족]이라고 뻥치는 경우는 너무 티가 나고(...) 대개 [표준중국어]를 잘 못하는 [[조선족]]이나 [[홍콩]]인([[광동어]]를 일상적으로 쓰지만 [표준중국어]로 의사소통하는 건 서툰 편이라고 한다.)인 척 한다 [[카더라]]. 물론 홍콩인인 척 하려면 홍콩영주권이 있어서 그걸 가지고 다니는 게 좋겠지만.] 살결이나 복장같은 미묘한 디테일에서 걸린다. 여행객은 어딘가 반드시 티가 나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 여행객들은 [공안]이 불시에 검사하는 공민증이 없다. 설령 그렇게 잠입한다 하더라도 [공안]과의 숨바꼭질은 꽤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고, 걸리면 무거운 벌금을 물고 추방당한다.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안 잡히면 한 마디로 설명이 가능하다. '''[[한비야]]도 들어가는 걸 포기한 길이다.'''
  • 천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단어가 "천자의 조정", 즉 중국 조정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자주 나온다. 실록에서 중국 사신을 "[천사](天使)--Angel?--로, 중국 군대를 "[천병](天兵), [천군](天軍)"으로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한국의 임금과 신하가 자발적으로 "천조"라 부른 왕조는 [한족]의 황조 뿐이며, 조선이 오랑캐라 멸시했던 청나라에 대해서는 양국간의 공식적인 외교문서에서나 "천조"라는 용어를 쓰고, 조선 내부적으로는 그저 저쪽 나라라는 뜻인 "피국(彼國)" 또는 왕조명 그대로 "청국(淸國)"이라 부른 것이 실록에서 확인된다.
         얼핏 보기에는 친미를 넘어서 숭미주의자들이나 쓸 법한 단어로 보이지만, 하늘의 왕조(…)를 칭하거나, 하늘이 돕는 나라를 뜻하거나, 한족의 황조를 천조국이라 부르며 떠받들던 소중화 조선이 오늘날 그 행위의 대상만 미국으로 바꿔서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혐오감이 있지만 일부에선 그런거 신경 안 쓰고 쓴다.(…)
  • 청나라
         || [민족] |||| [만주족],[한족],[몽골인] 등 ||
         운이 꽤 좋은 나라였는데, [[순치제]](順治帝),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등 유능한 황제들이 몇 명씩이나 연달아, 그것도 엄청나게 오랫동안 통치를 하여[* 건륭제는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 가장 장수(89세)했고, 가장 오래 황제 자리에 있었던(현직 60년+태상황 4년) 사람이다. 현직 황제로서 가장 오래 앉아있던 이는 강희제(61년)였다.] 동아시아는 물론 주변 아시아 세계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동방으로 넘실넘실 넘어오던 [[러시아]]군과 강온정책을 번갈아 구사하며 끝내 국경선을 확정했고, 서방과의 접촉도 점점 더 활발해졌다. 중국이 [[티베트]]와 [[위구르]], 몽골, 만주와 연해주를 확실하게 지배에 넣은 것도 이 때였다.[* 몽골은 연합제국의 측면도 있다. 황후들은 원칙적으로 몽골에서 선발되었다. 일종의 [[한족]] 견제구. [[티베트]]의 달라이라마는 황제의 스승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티베트는 단순한 번국이라기엔 굉장히 격이 높았다.] 전성기의 청은 지금의 중국보다도 더욱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다. 지금 중국이 각종 반발속에서 확보하고 있는 티베트와 위구르만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톡과 몽골 전체, 더불어 타이완까지 전부 청의 영토였다. 이렇게 영토가 넓었던 만큼 단순한 중국이라기엔 보다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다중수도체제가 있어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묵던(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3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1년 중 [[자금성]](紫禁城)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특히 청이 [[러시아 제국]]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한자]]로 씌여진 문건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오직 만주어와 [[러시아어]]만으로 기록을 남겼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1993051&cat=02 관련 기사][* 청조(淸朝)가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의 기록에 만주어를 원본으로 삼은 것에 대해 국내 학자가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의 내용을 분석해 가설을 제시한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이하 청-러 조약)은 '''청과 러시아가 서로 대등한 위치'''를 가지고 조약을 맺은 것인데, 많은 이들이 아편전쟁 후의 '불평등 조약 체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평등 조약'인 것에 주목하지 청-러 조약이 왜 만주어로 기록되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청-러 조약의 기록을 만주어로 남겼냐 하면, '''청-러 조약이 평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중국적 화이(華夷)개념에 따르면 '오랑캐'인 러시아와 맺은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야 한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이 상위, 러시아가 하위인 조약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준가르 몽골 문제의 해결에 쫓기던 청나라는 러시아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할 수 없었고, 결국 청-러 조약은 평등조약이 되었다. 즉, '''중국적 중화 세계 개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조약'''이 돼 버린 것. 이 때문에 청-러 조약의 기록은 중국어, 즉 한문 기록이 전무하고 만주어로만 기록되었으며, 조약의 체결 자체에도 한족 관리는 참여하지 못했다. 청-러 조약이 만주어로 기록되어 전해진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 이는 청조가 청-러 조약에 대한 한문 기록에서는 '대등'이나 '평등'을 연상케하는 구절이나 어휘를 없애거나 모호하게 만든 것에서도 입증된다. 자세한 내용은『청나라, 키메라의 제국』(구범진, 민음사) 4장 청 제국과 러시아 편 참조.]
         비록 언어나 문화면에서는 동화를 면치 못했으나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종족은 청나라 말기에도 명확하게 구분되었을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 청조 말기 한족(漢族)들에 의해 사용된 '멸청흥한(滅淸興漢, 청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킴)'이니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을 돕고 서양인을 멸함)'이니 하는 구호에서도 한족과 청(만주족)은 청 말기까지 엄격히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의 끝없는 굴욕으로 청 황실의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원래부터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으로 분리된 민족 구성이었기 때문에 한족 지식인들은 [[민족주의]] 사상에 따라서 '청나라' 자체마저도 일종의 '외래민족 침략세력'으로 보고 만주족의 청 왕조로부터 한족 민중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이것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한족]우월주의자들은 청나라를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다라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일부 [한족]우월주의자들은 한족들만의 중국을 원하면서 티베트와 위구르 등 소수민족 독립을 지지하기도 한다고.
         만주지역의 대기근으로 인한 그나마 시도할려했던 농업지역에 대한 대타격과, 50-100만에서 최소 200-250만까지 늘어난 청나라의 인구, 명과의 무역중단으로 인한 물자부족으로써의 경제적이유와 몽골족을 굴복시키고 요동지역의 한족등을 흡수하며 신장된 국력과 홍타이지의 누르하치보다 강경적인 대외정책으로 인해 결국 1627년에 1차로 [[정묘호란]], 1636년에 2차로 [[병자호란]]을 일으켜 마침내 [wiki:"삼전도의 굴욕" 조선을 굴복시켰다]. 그 결과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이 청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 초야권
         [wiki: "몽골인" 몽골족]인 [원나라]가 [한족]인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할 때, 한족의 반란이 두려워 가한 제재 중 하나이다.
         그 당시 원나라가 가한 제재로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거나, 야간통금시간을 지정하기도 하고, 신분제를 만들어 한족을 [노예] 등급으로 강등시키는 것 등이 있었다. 또 다른 제재가 바로 초야권이다.
         10가구의 한인(漢人) 당 1명의 몽골 병사의 시중을 들어야 했는데, 여기서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은 시중드는 몽골 병사의 몫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한족의 신분이 [노예]와 다름없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처사였다.
  • 촉한정통론
         이런 정통을 중시하는 사관이 생겨난 건 무엇보다도 북송의 특별한 위치에 기인한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북송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상국[* 군신관계는 아니지만 숙질관계 정도였다고 한다.]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에 민감했다. 말하자면 위나라에 비해 약하지만 한실의 후예였던 촉나라와 정통 한족국가인 송나라의 처지를 투사하면서 "우리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이러한 역사관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결국 촉한 정통론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탄생하게 되었고, 여기에 북방 민족의 대두로 위협을 느낀 [[한족]]의 방어적 중화사상이 더해져 탄생한 것이다. 위정통론을 잘못 이해한 몇몇 사람들이 진나라까지 정통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촉한정통론이 진나라의 무능함 때문에 등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중국사의 정통론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애초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는가의 여부가 정통성을 판별하는 데 절대적인 고려 대상인 것은 아니었다. 정사를 편찬한 중국의 역대 역사가들은 서진과 동진을 엄연히 한나라의 뒤를 잇는 정통성 있는 왕조라고 인식해왔다.
         진나라가 한족의 역사에서 매우 실망스러운 정권이긴 하지만, 촉한의 말기는 그 진나라보다는 낫다고 쳐도 실망스럽기는 똑같기 때문에[* 너무 쉽게 망해서 사마소가 놀랐을 정도다. 원래 위군은 강유가 주전력을 보전하여 검각으로 간 뒤 이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당장 종회가 검각에서 막히자 이럴 줄 알았다고 바로 장기전을 준비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진나라에 대한 실망으로 촉한정통론이 퍼졌다는 말은 말이 안된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진나라 실망론으로 인한 촉한정통론"은 한국의 삼국지 팬덤에만 잘못 알려져 있는 설이며, 정작 중국에서는 송나라시절 삼국지 설화가 만들어질 당시, 전적으로 성리학의 명분론과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본다.
  • 치마
         중국 [[한족]]의 [[한푸]]는 본래 '''남녀 가리지 않고 상의만 입거나 치마를 둘렀지만,''' 북방계 바지가 수입되면서 한복과 비슷한 양상을 띄게 된다.
  • 티베트
         [[중국]] 서남부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티베트자치구 및 거기서 사는 토착 민족을 일컫는 말. 범위를 확장하여 티베트 고원 전체나 티베트인들의 거주지 전체를 일컫기도 한다. '눈(雪) 위의 거주지'라는 뜻의 [[몽골어]] 투베트에서 유래하였다. [중국]에서는 티베트를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 서장자치구)라 칭하고 있다. 이 시짱자치구는 서북쪽으로는 [[위구르#s-1|신장위구르자치구]], 둥북쪽에는 칭하이성, 동쪽에는 [[쓰촨성]], 동남쪽에는 [[윈난성]], [[미얀마]], 남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너머 [[인도 공화국]], [[부탄]], [[네팔]]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티베트 [고원]은 평균 고도가 4,900m에 달해 세계 최고의 [고원] 지대, [[고산]]지대이다. 당장 중심도시 [라싸]만 해도 해발고도가 [[무려]] 3,400m를 넘어 3,650m 가량 된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와 거의 비슷한 해발고도.[* 정확하게는 라파스보다는 약간 낮은 해발고도이다. 볼리비아의 별명 중에 [[별명/지리#s-2.4.2|남아메리카의 티베트라는 별명이 있다.]] ] 14세기 경까지는 과거 이 지역 왕조인 토번(吐蕃)으로 통칭되었다. [[수도]]는 [[라싸]](Lhasa, 拉薩, '하싸'라고도 발음함). 사실 티베트인들은 시짱자치구 외에도 칭하이성, [쓰촨성] 서부 고원지대, [윈난성] 서북부에도 거주한다. [윈난성] 서북부의 [[샹그리라]] 현도 원래 티베트인들의 영역이다. ~~다만 거기까지 어떻게 [[한족]]들이 들어왔다는 게 문제. 아니 어떻게 들어왔지?[* 인구 10만명 이상의 도시 중 해발고도 3,000m를 넘는 도시는 전세계에서 [[http://en.wikipedia.org/wiki/Large_cities_with_high_elevation_in_the_world 20개가 안 되며]], [[산소]]와 [[공기]]가 부족하여 [[고산병]]에 걸릴 수 있는 지역이라 저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진출하기가 쉬운 곳은 아니다. 주권국가의 수도 중에 3,000m 위에 있는 수도는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뿐이다.]~~
         [만주]와 [몽골]은 티베트와 밀접한 관계였으나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 '속국관계'와는 달랐으며, 원과 청은 [한족]의 나라인 [중국]이 아니라는 것이 티베트 측의 주장이기도 하다. 여하튼 1912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이 멸망하면서 티베트의 상황은 변화를 맞이한다.
         다만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티베트 지역에 대한 [한족]의 이주정책, 티베트인에 대한 강제 [피임], 종교 활동 억압이 강해지고 있고, 특히 티베트-칭하이 노선의 '''[[칭짱철도]]'''(靑藏鐵路)가 깔리면서 점점 티베트 고유의 독자성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 다만 이것이 티베트인들 자신의 중국화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은데다, 아직 인구 면에서 만만찮고 중국 자체도 고령화가 꾸준히 진행되는지라 티베트가 중국과 완전히 동화될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티베트인 자체를 중국 [한족]보다 열등한 민족으로 보려는 시각도 존재한다. 한 예로 2008년, [미국]에 유학 중인 [중국인] [여대생]이 "나는 티베트 독립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티베트에는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복지와 인권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라는 지극히 온건한 말을 했다가 수많은 [중국인] 네티즌들로부터 엄청난 인신공격을 당했다. 공포에 질린 [중국인] [여대생]은 이사를 떠나고 말았다.
         [중국]은 이에 대해 자신들은 다민족 국가이다, 즉 개별 민족들의 독립 요구를 다 받아줄 경우 나라가 쪼개어져서 더이상 하나의 중국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허나 당장 티베트도 그렇고 신강 [위구르] 자치구 에서도 독립 요구가 거세다. 중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위해서 이러한 [소수민족]의 독립요구를 억누르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일단 [위구르]와 티베트를 빼고 나머지 소수민족들이 대부분 민족적, 언어적으로 중국에 한족화되었거나 티베트와 달리 거주하는 영토 면적들도 작고 독립하려는 의지가 없다.
  • 판다
         다만 국제정세로 보면 또 미묘한 문제가 있는데, 판다의 서식지가 중국 '''[[쓰촨성]]''' 지방과 '''[[티베트]]''' 지방에 있기 때문에 중국과 감정이 좋지 않은 티베트 망명자들이 '''"판다는 티베트에서 서식하는데 왜 중국이 자기 것인 척하느냐?"''' 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 또 주 서식지인 쓰촨성이 티베트족 거주지와 [[한족]] 거주지가 만나는 지점이라서 더 애매하다든지, 정작 쓰촨성 말고 티베트 자치구에서는 살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는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다.--문제는 판다로 추정되는 동물 기록이 티베트에서 많이 나오니까 문제--
  • 팔기군
         팔기군은 1601년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각부족의 부대를 깃발로 구분하는 군단으로 재편한 것에서 출발한다. 이후 만주족이 몽골고원으로 진출하면서 몽골군도 이 시스템에 편입되었고, 이후 [[한족]]도 이 제도로 편입하였다. 이때 만주인으로 구성된 원조 팔기를 팔기만주라 호칭하며 [[몽골인]]은 팔기몽골, 한족은 팔기한군이라 칭했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기 전까지 팔기군은 상당히 개방적인 조직이었다.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만주인이 아니라도 팔기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켰다. [사르후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 원정군 포로들 또한 팔기의 일부로 편제되기도 했다.[* 베트남 하노이 부근의 응옥 호이(玉回) 마을에는 낌(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청나라 군대를 따라 왔던 조선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혁명 시기에 족보가 다 사라져 확인할 길은 없지만, 18세기 말 레 왕조를 무너뜨린 떠이 썬 출신 삼형제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20만 팔기군에 포함됐던 이른바 '조선 팔기'의 병사 중 일부가 포로로 잡혀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출처: 최병욱 <동남아시아사>)] 입관 이후 남명과의 싸움이나 삼번의 난 당시 한족 군대와의 싸움에서도 투항병이나 베이징 인근 거주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팔기군 안으로 받아들였다.
         삼번의 난까지 종결되고 중국대륙에 대한 청나라의 독점적인 지배권이 확립되자 팔기군은 새로운 인원의 유입이 차단되었으며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하는데 있어 지배집단으로서 기능했다. 여기에는 팔기 안에 포함된 몽골팔기[* 나중에는 군마 부족이 심해질 때 몽골 팔기가 실질적인 청나라의 기병부대가 되었다.], 한족팔기등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같은 한족이라도 팔기 소속 한인팔기와 일반 한족은 전혀 다른 신분이었다. 만주팔기가 팔기군 안에서도 서열은 확고했고 몽고팔기군이 그다음, 한족팔기 순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전체적 인원에 있어 입관 당시 1644년을 기준으로 만주팔기가 40~45%가량을 차지하고 몽고 팔기군이 22%, 나머지가 한인 팔기군이었다.[* 마크 C. 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이후에 팔기군 인구가 늘어나면서 종종 한인팔기군은 한족으로 강등되었는데, 초기 입관 당시 화포나 수군을 담당하며 전투력에 있어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한인팔기군이 몽고나 만주출신에 비해 한족들 생활에 물들었기 때문에 18세기부터 "원래 한족이었으니깐 쟤넨 어쩔수 없다" 식으로 한인으로 강등되었다. 한군팔기 입장에서도 기적에 들면 오로지 군바리고 만주나 몽고팔기에 비해 대우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몰래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는 등 기적에 미련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지배집단으로서의 팔기군이 소멸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중국 대륙에 대한 지배력을 구석구석 침투시키기 위해 청나라는 팔기군을 각지에 파견-주둔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일반 한족 피지배층과는 완전히 분리시켜 생활하도록 하였다. 당시 팔기군은 수도인 [[베이징]]에 거주하는 금려팔기와 각 지역 요충지에 주둔하는 주방팔기로 구분되었다. 청나라는 베이징 내성의 한족을 모두 몰아낸 다음 오직 금려팔기만이 베이징 내성에 거주할 수 있게 했으며 한족과 섞이는 것을 금지했다. 각지의 주방팔기들 역시 지방에 주둔하면서도 주둔지역에서 주방팔기의 거주지를 성벽을 이용해 철저히 격리하였다. 이는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팔기가 인구상으로 훨씬 많은 일반 한족들에게 흡수되지 않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각지에 파견되어있던 주방팔기는 한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인 녹영과 함께 청나라의 주요한 군사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청나라 후기에 들어 팔기군은 차츰 청나라 정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였다.[* 청나라가 안정되면서 팔기군은 원래의 임무를 잊어버리고 향락에 빠져들었다.] 팔기군은 군사조직인 동시에 이민족에 의한 정복 왕조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기반이 되는 지배집단이었기 때문에 결코 해체시킬 수가 없었다. 문제는 팔기군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직업군인이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팔기군에게는 국가가 녹봉을 지급하였는데 팔기군의 전력이 심각하게 떨어져서[* 백련교 반란군이랑 태평천국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해 지역에서 모집한 상승군으로 진압해야 했다.] 실질적으로 군사력의 역할을 전혀 수행할 수 없는 상황[* 팔기군은 기병이어야 되는데 군마 부족이 심각해진 나머지 몽골팔기를 제외한 다른 팔기군은 군마가 없어서 보병으로 싸워야 하는 안습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녹봉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한족과의 동화를 막기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더욱 심각했다.
         이처럼 청나라 군사력의 중핵이었던 팔기가 유명무실해지고 한족 지방군인 녹영마저도 그 질이 형편없이 하락하면서 그 결과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에서 청나라는 고전을 하게 된다.[* 심지어 농민 폭동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고전했다. 농민군이 태평천국군이랑 백련교도보다 무장의 질이 형편없는데도 진압 못한 걸 보면....] 이때 호남성의 선비인 [증국번]과 그 제자 [이홍장]은 의용군을 모집하여 태평천국을 토벌하였고, 이후 이홍장이 실권을 잡자, 이 의용군을 기반으로 후에 청나라의 신군격인 북양군이 만들어진다. 그래도 유명무실하게 8기군은 존재했다고 하지만, 19세기 말의 청나라의 주력은 북양군이었다. 그리고 이 북양군의 지휘관들이 후에 중국 [군벌]의 시조가 된다.
  • 페이(miss A)
         || '''민족''' ||[[한족]]||
  • 편견 및 고정관념/인류
          * [[중국]]에서는 순수 혈통의 [[한족]](漢族)이 주류이며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한족]]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문화적 정체성이라 봐야하지, 혈통적 집단이라 하기 힘들다.
  • 표준중국어
         북방방언인 [[중국어#s-4.1|관화]]([[만다린]])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만다린은 [[청나라]] 시절 왕궁에서 쓰던 변형 중국어로, [[만주어]]로 중국의 여러 사물들을 나타낼 수 없자 대안체계로 중국어를 갖다가 [[만주족]]들이 쓰기 쉽게 변형한 것이다. 즉 표준중국어는 [[베이징]] [[방언]]을 기반으로 만든게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베이징 안의 내성(內城)인들, 즉 만주족이 쓰던 만다린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외성(外城)의 [[한족]]들이 쓰던 베이징 방언과는 전혀 다르다. 베이징 방언과 현재 보통화가 다른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오히려 방언 중 표준중국어와 가장 가까운 방언은 [[하얼빈]] 방언이라고 한다. 중국어 연수를 받은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하얼빈에 가면 시장에서도 아나운서의 발음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하며, 하얼빈의 연수 기관들도 그것을 강조한다. 중국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한 [비정상회담]의 패널 [장위안]도 이 지역 출신이다.
         싱가포르인 중 상당수의 [[한족]]도 화어로 소통 가능하다. 싱가포르의 한족들은 대개 조상이 중국 남방 출신이라 대부분은 표준중국어 또는 관화가 모어는 아니지만 싱가포르 정부는 한족들끼리의 의사 소통과 중국과의 문화적 연결고리 보존을 위해 북방어를 기초로 한 표준중국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였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법정 공용어는 아니지만 한족들이 상당수 살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 통용되는 언어이다. [광동어] 세력이 더 강하긴 하지만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한족들끼리의 공통된 의사 소통 수단으로 이용된다.
  • 푸젠 성(중화인민공화국)
         원래 [[춘추전국시대]]때 [[월]]나라가 있었으며, 전한때까지 민월-동월로 명맥이 이어지다가 [[한무제]]에 의해 멸망했고 그 이후 [[한족]]이 이 지역까지 내려와 정착하게 되고 동시에 대다수의 월족이 한족에 동화되었다. 또한 한때 [[정성공]]의 정씨 왕조의 거점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한족]]이 97.84%로, 그 외에 [[회족]]이나 [[만주족]] 등의 [[소수민족]]이 있다. 토박이들은 민 방언을 쓰며, 같은 민방언인 [[대만어]]와는 대충 뜻이 통한다.
  • 하나라
         [[중국]]의 문헌에서 기록된 최초의 [[왕조]] [[국가]]. 전통적으로 중국 [[한족]]을 화하(華夏)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바로 이곳의 국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다만 아직 관련 유적이 미미하여 실존이 인정받지는 못했다. 국성은 사(姒).[* 이 부분이 엄청난 떡밥 중 하나인데, 최초의 문자로 보여지고 있는 갑골문이나 홍도문들은 상나라 3기인 은허시기 이후를 중심으로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600여년이나 빠른 하나라 초기의 인물인 하나라 우의 후손들의 성씨를 사(姒)라고 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 하이난 성
         [[wiki:"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최남단에 위치한 [[섬]]. 굉장히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동남아시아]]로도 간주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제주도]]에 해당하는 곳이다. 넓이는 33,210km²로 [[경상도]]보다 조금 크며 [[타이완 섬]]보다는 약간 작다. 그래서 대만 독립주의자들과 통일 지향자들의 떡밥(중국에서 가장 큰 섬은 어디?)이 되기도 한다. 인구는 870만 명 정도로 인구밀도는 상당하지만 타이완보단 낮은 편이다. 섬 인구의 80%가 [[한족]]이나 [[wiki:"태국" 타이]]족과 연관있는 [[소수민족]]인 리족이 15% 정도로 상당히 많으며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섬 면적의 반을 넘는다.
  • 하카
         == [[중국]] 남부에 거주하는 [[한족]]의 일파 ==
  • 한 솔로
         [[2005년]]에 터베이(Samuel T. Turvey)가 [[중국]]에서 발견한 삼엽충. 터베이의 논문에 따르면 중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한족]]의 이름을 따서 Han, 그리고 Diplagnostidae과의 삼엽충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홀로 살아남은 종이기 때문에 solo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소문에 따르면 터베이의 친구가 스타워즈 캐릭터로 학명을 지어보라고 해서 저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한국 사극/역대 왕역
         ==== [[한족]] 왕조 ====
  • 한국인
         한편 북방개척과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일본인과 여진족이 유입되었다고는 하나 단일민족 실재론자들은 [[만주족]]이 [[한족]]에 흡수된 것처럼 이들도 한국인의 압도적인 유전자 풀에 동화하여 개성이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즉 항왜는 최대 5000~1만 명에 불과할 뿐이며 [[김충선]]의 우록 김씨 이외에는 정체성을 잇지 못했고 우록 김씨조차 1700년경에 이르면 일본의 문화를 기초단계부터 잊어버렸으니 이들은 한국으로 귀화해 지금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됐다는 것이다.
  • 한나라
         400년이라는 긴 통치기간을 지닌 왕조로서 중국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과 [[월남]]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문화권 전반의 기틀을 이룩한 왕조로 평가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의 토착 [[민족]]은 [[한족]]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의 전통적 글자를 [[한자]]라고 부른다. 한자가 진나라 시대의 동글동글한 전서(篆書)의 형태를 벗어나 지금의 형태를 정립한 것이 한나라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문화권의 핵심인 인의(仁義)를 바탕에 둔 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시행 법령인 [[율령]]이 정비된 시점이 바로 한나라 시대. 그 밖에도 한나라의 대표 상품으로 채륜이 발명하였다고 하여 채후지(蔡侯紙)로도 불리는 [[종이]]를 들 수 있겠다.
  • 한몽관계
         몽골인과 한국인은 외모가 꽤 비슷해서 해외취업 등의 방법으로 한국에 많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한 얘기로 동아시아에서 몽골인만 한국인과 비슷한게 아니다. 일단 몽골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강호동]]이나 [[유퉁]] 같은 '건장하고 통통한 몸'에 붉그스름한 기가 얼굴에 도는 거친 피부인데 이건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 냉정히 말하자면 한국인은 몽골인보다는 [[일본인]], [[만주]]인, (동북부의 [[한족]])[[중국인]]이 혈통적으로 훨씬 더 가깝다. 한족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허름한 양복 상의(속칭 마이) 등으로 뭔가 다르지만 거주기간이 길어지면 스타일도 한국화되고 차이가 사라져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중국인인지 모른다. 특히 젊은 사람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다만 외국인들이 보기에 외모적으로 한국인이 중국인, 일본인에 비해 광대뼈 같은 스테레오 타입에 더 가까운 건 있지만... 어쨋건 몽골인은 혼혈이 아니면 분명히 한국인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 특히 붉거나 오렌지 계통의 엷은 빛깔 머리색을 가진 사람이 몽골쪽에 더 많다. 그리고 한국인처럼 북방계에 가까운 편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북방계 얼굴인 몽골인들도 많은데 그런 경우 제법 이국적으로 느껴진다. 다만 각각 유교문화와 유목민족이라 문화적으로 다른 편. 젓가락 위주의 식사가 아니고 주로 숟가락과 포크를 사용한다고 한다. 국수 같은 음식을 먹을땐 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서툴다고... 그리고 물을 차게 마시며 음식이 자극적인 맛인 등.
  • 한민족
         줄임말로 '한족'(韓族)라고 부를 수도 있고 사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하지만 중국의 민족인 [[한족]](漢族)과 혼동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 한복
          * 중국([한족])의 전통 복식은 [[한푸]]로.
  • 한성화교학교
         하지만 진짜 파벌이 있는데, 이것은 [화교] 전체 학생 vs &[한족] (...). 화교 학교에 가끔 [한족]이 [중국]에서 건너와서 학교 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아무래도 [한국 문화] 영향을 받은 [화교][* 요새 화교 중 절반 정도는 부모 한쪽이 [한국인]이다. 엄마가 한국인이라 외국인 전형 못 들어간다고 서류상으로 이혼하는 케이스도 있어 화교사회에서 문제가 됐는데 최근엔 어떻게 됐는지 추가바람.]와 [중국/문화|중국 문화] 영향을 받은 [화교]와 [한족]이 같은 반에서 같은 수업을 해서 그런지, [문화] 차이가 심해서 가끔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이 쪽이 [레알]일지도(...) ~~[한국]에서 발생하는 [국공내전]~~ 그리고 집에서 중국어를 쓰는 본토 출신 애들과 달리 한국에서 나고 자란 화교들은 중국어로 된 숙제를 집에 들고가도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근처 학원에서 해결하고 가기도 한다. 3세대나 4세대에 이를수록 화교들은 한국학교로 그냥 가버리려고 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화교학교는 본토 출신의 중화인민공화국 사람들 비율이 높아져서 화교사회의 고민거리. 인원이 부족하다보니 화교소학교에선 이제 [한국인]도 받는다...[* 단 아무나 받는 건 아니고 부모 중 한쪽이 화교거나 해외 영주권이 있거나 한 사람들을 받는 거다. 왜 한국인들이 들어가려고 하냐면 보통 분기당 학비가 50만원 정도로 한국 공립학교보다는 비싸지만 중국 유학 보내는 것보단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정작 한국인은 중국어 배우러 들어가는데 한국화교들은 한국어 쓰는 게 함정... 그나마 중국 본토 출신들이 들어오기도 하니까 낫긴 한데 중국 본토인들이 들어오면서 중국 정부가 대만 정부랑 연 끊고 자기들이랑 하자고 압박 들어오는 것도 함정이다..]
  • 한푸
         현재 중국 전통 의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치파오]](旗袍)는 [[청]]조 이후 전래된 [[만주족]]의 전통복장에서 비롯된 복식으로, 이전 [[한족]]의 복식과는 차이가 크다. 한복(漢服)의 경우 본래 남녀를 불문하고 바지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한복(韓服)의 근간이 되기도 하는 북방계 호복을 들여오면서 바지를 도입하게 된다. 중국의 한복은 여러모로 한국의 한복과 깊은 연관을 맺어왔는데, 중국식 관복제와 문물을 수입하면서 한푸도 함께 들어왔기 때문. 특히 [[곤룡포]] 같은 어의나 관복은 전부 중국식이다. 본래 북방계 복식의 특징이던 좁은 소매를 지니고 있던 한복(韓服)은 한복(漢服)의 영향을 받아 소매가 넓어졌다.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민족주의 의식의 고취와 더불어 한족의 한푸를 입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근데 전국 시대부터 이민족들의 옷(호복)이 유입([http://www.tonggam.com/bbs/view.php?id=soh_stor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PHPSESSID=56dd866fce6f86a35e5a0bd5fe75b7e2 참조 링크])되어 중국 역사가 흘러가면 갈수록 이런 경향은 점점 더 심해진다. 이유야 당연히 '''활동이 편해서.''' 실제로 호복 유입 전의 한푸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진심으로 한족의 한푸를 입자고 할 거면 한국의 심의 비슷한 옷을 입어야 한다.
         참고로 남성의 복장이 한국에서도 전통 혼례복으로 사용되는 조선시대 관복과 비슷한 것은 [[단령]] 자체가 중국에서 들어온 옷이기 때문이다.[* 단령 자체도 중국 전통복식은 아니고 당나라 때 들어온 호복의 일종이다. 다만 유목민 계통출신으로 이민족 왕조가 아닌 정통 한족왕조를 자칭한 수나라 당나라의 영향으로 중국화 되어버렸다.] 그래서 청나라 때는 조선 사람들이 사신으로 오거나 중국 유학자들이 조선에 갔을때 조선사람들의 옷과 [[상투]]를 보고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명나라의 옷이다!' 라면서 통곡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심의, 관복인 단령은 모두 한푸가 넘어간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반면, 조선인들은 청나라에 가서 변발 치파오 오랑캐(...)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통곡했다고 한다(...). --[wiki:"가슴 만지게 해주세요" 아아, 중원의 세계에 오랑캐가 가득해]--
  • 항아리
         그릇의 아래위가 좁고 배가 불룩 나온 모습이다. [한족] 사이에 발생한 한문자인 호(壺)도 바로 항아리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입 ·목부분의 특징에 따라 입큰항아리 ·목긴항아리 ·목짧은항아리로 나뉜다. 옛날부터 넓은 지역에 걸쳐 써왔으나, [[토기]] 발명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아래보다 위가 약간 벌어진 주발 모양의 [[옹기]]뿐이었으며, 항아리가 만들어진 것은 그보다 나중이었다.
  • 호한체제
         胡漢體制, Sino-Barbarian Synthesis. 호족(오랑캐)와 [[한족]]이 공존하는 체계를 뜻한다. [[오호십육국시대]]와 [[위진남북조]]의 사회상과 발전상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서진]]이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대충 망하고(…) 중국에는 다수의 이민족이 거주하여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었다. 강남 지방에는 남조가 아직 잔존하며 [[육조시대]]를 열어갔으나, 그 외의 지역에서는 이민족 왕조가 한족을 지배하며 이민족(호족)이 지배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주로 한족의 문화에 호족이 동화된 것을 중심으로 호한체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를 이민족이 한족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뜻에서 [[한화]](漢化)라고 불렀다. 하지만 근래에는 호족 문화 역시 이후의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한족 문화의 영향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한족이 비록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했으나, 호족은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들의 협력이 필요하였고, [[전진]], [[북위]] 등의 왕조가 성립되면서 지배층에서도 한족의 영향력이 강해져 갔으며 호족 고유의 관직은 사라지고 한족식 관료제를 바탕으로 정치가 진행되었다는 점을 제시한다.
         호족 문화의 영향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전진]], [[북위]] 등에서도 호족적인 사고방식이 없어지지는 않았고, 도시 건설이나 의복 양식 등에서 기존의 한족 문화와는 다른 요소가 많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호족 문화의 영향이 강해졌다는 점을 제시한다.
  • 회족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 한족화된 [[무슬림]], 이 개념에는 [[이슬람]]을 믿는 한족(한회漢回)과 중세 이후 중국 본토에 정착하여 한화된 무슬림들의 혈통적 후예라는 개념을 포괄한다. 조상이 무슬림이었지만 후손들은 완전히 한화된 경우나 이슬람을 배교한 회족 같은 경우에는 회족으로 정해야 하는지 아닌지 논란이 많다.
         당나라때부터 원나라 때까지 많은 유럽인들과 중동인들이 회흘(回吃;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 지방을 건너와 정착하였다. 이러한 [[색목인]]들 중에는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많았다. 이를테면 한 때는 중국에 정착한 기독교인과 유대인도 회회인(回回人)이라 칭하였다.(이를테면 기독교인 십자회회(十字回回) 유대인은 남모회회(藍帽回回)등등 회회 앞에 특징을 붙여 칭함) 그러나 명나라 때에 이르자 명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서역 출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한족하고만 혼인하도록 하는 정책으로 이들을 한화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의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은 한족들과 동화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이슬람 회회인 이외에는 그 수가 급감하게 되었다. 나중가서는 회회라는 어휘가 이슬람교도를 칭하는 어휘로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이슬람교는 회교라고 칭해지고 무슬림은 회민,회족, 한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한회 등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일단 회족이란 [[이슬람]]화된 [[한족]]으로, 한족과 섞여 살며 한족과 언어, 문화 면에서 공통되어 있지만 [[이슬람교]]를 신앙하며 이슬람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문화와 풍속을 가지고 있어 별도의 소수민족으로 분류된다.
         첫째, 회족은 한족과 혼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원나라 때 무슬림들은 원나라 황실의 빽을 믿고 한족들을 수탈하였으나, 이슬람권의 의학,천문학,과학 지식과 실무 능력이 우수한 편이었기 때문에, 원나라를 갈아엎었던 명나라를 이들을 다 죽이자니 아깝고 그대로 놔두자니 뭔가 띠꺼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명나라는 상당수의 무슬림 상류층들을 사회에 포용하는 대신에, 한족들과의 결혼을 무조건적으로 강제하는 방식으로 결론을 지었다. 따라서 현대의 회족들은 한족과 겉보기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회족이 당나라 때부터 중국 역사 속에 존재했다면 위구르인은 중국 역사에 등장한 시기가 이보다 훨씬 늦은 청나라 때부터이다. 위구르인들은 한족과 혼혈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어는 (한족계 회족) [[중국어]]를 쓰지만, 일부 아랍어, 페르시아어 어휘가 도입되었다.
         또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서 이슬람화된 민족의 특성 때문인지 남성의 [[할례]] 문화가 있어 회족 남성은 다른 중국의 민족(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과 그외의 소수민족)이랑은 다르게 [[포경수술]]을 많이 받는다.[* 회족 외에도 [[위구르]]족도 회족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민족이라는 점에서 할례 문화가 있어 위구르 남성도 포경수술을 많이 받는다.]
  • 후궁뎐; 꽃들의 전쟁
         [[명나라]]에서 들인 후궁 [[wiki:"타나실리" 타'''나미'''실리]].[* ~~사실, 코너 배경은 [[조선]](명나라)인데 타나실리는 [[원나라]]([[고려]]) 때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명나라 황실은 [[한족]]인데 원나라 황실은 [[몽골]]족이었다는 점은 그냥 그러려니 하자.~~] [[wiki:"기황후(드라마)" 기황후]]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등장인물 이름만 따왔다. [명나라]의 [공주]로 '''명나라 3대 얼짱''' 출신.(...) 본인 말로는 아빠(명나라 [[황제]]) 빽이 아닌 '''[[얼굴]]'''로 당당히 들어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효빈과 경빈이 그녀를 보고 ~~그 외모에 감탄해서~~ 말을 내뱉는데, 3화에서 효빈(장효인)이 '''"명나라가 [[갑]]이다."'''를 날리자 관객들이 다 빵 터졌다.[(...)] [[http://www.youtube.com/watch?v=_-MjZwYkcWs 2분 21초~22초]] 그밖에 4화에선 "온실 속의 화초? [[농약|약]]을 너무 친 거 아니야?" ~~유기농 드립은 덤.~~] ~~효빈(장효인) 曰 : "하긴 누가 봐도 얼굴로 들어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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