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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복

last modified: 2015-04-10 19:55:51 by Contributors

Contents

1. 割腹
1.1. 관련 항목
2. 철권캐릭터 요시미츠의 필살기
3. 영화 하라키리


1. 割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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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죽는 것. ...장기자랑?자살의 일종이다.

일본어로는 切腹(셋푸쿠)나 腹切り(하라키리)라고 하며 사무라이에 한해 사형 집행 방법이기도 하다.[1]
1960년대 이후로 일본의 사무라이/시대극 영화들이 서양권에서도 제법 입소문을 탄 탓에 사무라이, 스시나 스모, 닌자보다는 인지도가 덜하지만 어쨌든 서양인들이 익숙할 일본어 명사중 하나가 되었다. 해러키릐 일부 영어사전에서도 신조어 등으로 등재될 정도.

최초로 행해진 것은 헤이안 시대이며 정확하게 누가 처음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제설이 존재해서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헤이안 시대 귀족이면서 도적으로 유명한 후지와라 야스스케가 붙잡히자 배를 가르며 난동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2] 할복의 원조로는 미나모토 다메토모를 뽑고 있다. 일부 환빠를 비롯한 재야사학자들은 이것이 삼국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큰 근거는 없다.[3]

이것이 일반적으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이며, 무사도의 개념이 발생한 것과 함께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후에 무로마치 시대가 되면서 주군의 죽음에 따라 죽는 순사의 한 방법으로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으나 한 편으로 센고쿠 시대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시골 사무라이들은 정확하게 하는 작법을 몰랐다는 기록을 살펴볼 때 전국적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전국시대까지는 주로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거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행했다. 대표적인 예로 전국시대의 무사인 시미즈 무네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공때문에 성을 함락당하기 직전까지 갔는데 결국 화친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측은 화친의 조건으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했고 무네하루는 굳이 할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4]에서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는 조건으로 배를 갈랐고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 직후인지라 한시라도 빨리 회군해야되는 히데요시도 무네하루의 할복을 진정한 무사의 죽음이라하여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후에 그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일본을 석권한 다음 그 아들인 카게하루에게 다이묘로 삼아줄테니 자신의 직신[5]이 되라고 제안하였으나 카게하루는 모리에 대한 의리로서 그것을 거절하였다고 전해지며 이 일화는 무사도의 본질을 관통하는 일화로서 유명하다.

그 밖에도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어느 무사의 아이가 먹을 걸 훔쳐먹었다는 의혹을 받자 무사는 치욕을 씻기 위해 자식의 배를 갈라 무죄를 증명한 뒤 상대방 역시 쳐죽이고 자기도 자결했다[6]는 흠좀무스런 이야기도 있다. 일반적인 의미의 할복과는 좀 다르지만...

패장이 적에게 붙잡히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 자인했다는 것을 여기저기서 들어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할복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애시당초 자인이라는 것은 글자의 뜻처럼 스스로 날붙이를 써서 자살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이 할복인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경우에는 목을 쳐서 숨김으로서 효수를 피하거나 자신의 죽음을 숨기는 목적[7]도 있었다. 실제로 몇몇 장수의 경우 목이 발견되지 않거나 목이 달라보였다는 이유로 생존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츠히데.

전국시대가 끝나고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되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격이 괴랄맞은 것도 있어서 사형의 한 방식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 경우 할복은 참수형이나 십자가형 같은 다른 사형이 불명예스러운 죽음이라고 여겨진 것과는 다르게 명예있는 죽음으로서 여겨졌다[8]. 정권이 도요토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로 넘어가도 이에야스는 굳이 그것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시행했으며 이 때 비로소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할복의 형태가 완성된다.

기본적인 방법은 상의를 벗고 옷감 따위로 칼날을 감싼 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9]를 가르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무라이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신속하게 목을 치는 것. 이 경우 목을 치는 것을 카이샤쿠라고 부르는데 사람의 목을 단숨에 절단하는 것은 어지간한 검의 달인이 아니면 불가능[10]하기 때문에 할복을 하게 되는 사람의 주변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나 믿을 수 있는 친한 친구등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카이샤쿠를 행하는 사람의 격에 따라서 할복을 하는 사람의 격이 정해진다고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변변치 않은 가문에서는 돈을 주고 카이샤쿠를 해줄 사람을 몰래 구해왔다는 기록도 있고, 그 밖에도 아는 사람이 인맥을 동원하여 불러왔다는 예도 있다.

이 카이샤쿠에도 작법이 있는데 각 지방마다 달랐다고 하지만 보편적으로 으뜸으로 치는 것은 바로 목이 완전히 절단되지 않고 가죽이 한 장 붙어서 들러붙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르면 목이 땅바닥을 구르지 않고 죽은 자의 품 안에 안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듯 하다. 일본에서는 거기에 유래해서 목의 가죽 하나의 차이로 살았다는 관용구가 있는데 이것의 뜻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이나 실제로 그런 상태가 되면 물론 죽는다(...).

할복 시행자가 어려서 힘이 약해 스스로 할복을 할 수 없는 어린 소년이면 부채를 쥐고 배를 긋는 시늉만하고 카이샤쿠 시행자가 목을 벴다. 일설로는 할복 자체는 의식, 행위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배를 가르지 않았으며, 실제로 할복 당사자의 목숨을 끊는 것은 카이샤쿠를 담당한 사람의 몫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배를 가르는 이유는 옛날에는 일본인들이 사람의 영혼이 뱃속에 들어있다고 믿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긍지나 결백함등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도 몇 가지 예법이 있어서 할복을 할 때는 바닥[11]에는 천을 덮어놓는데 타인에게 선물받은 천을 사용하면 그것은 선물한 자에 대한 최대한의 호의의 표현이라고 한다. 사극 등에서는 하얀 옷을 입거나 하얀 천을 깔아놓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했다가 지나치게 주변이 핏빛으로 물들기 때문에(...) 하얀색을 쓰지는 않았고, 피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하얀 색을 쓴 것이 정답.

그러나 모든 사무라이들이 스스로 배를 가를 정도의 기개를 가진 것은 아니었고, 할복을 명령받은 대상 중에는 3,4세에 지나지 않는 코흘리개 아기도 있었다. 그래서 형식만 흉내만 낸 다음 목을 쳐서 끔살시켰다는 이야기(...)도 있고 에도 시대 중기부터는 그러한 번거로운 과정을 간략해서 칼 대신 부채로 흉내만 내면 뒤에 있던 카이샤쿠역의 인물이 알아서 목을 치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에도 후기부터는 진짜 자기가 배를 가르고 죽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지 표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래서 스스로 배를 가른 진짜 할복은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으며, 이런 성향은 제국주의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12]

그 밖에도 도쿠가와 막부가 막부의 권력기반을 잡기 위하여 말기양자[13]를 금지하거나 사소한 것을 구실로 개역[14]을 일삼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켰을 경우 막부가 개역을 선고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쳐서 할복을 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막부에서도 그런 경우는 약간 형을 덜주는 풍조가 있었고 이미 사건을 일으킨 자가 할복을 했다면 깊게 추궁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15] 이 역시 물론 사건이 너무 크면 그런 거 없다. 심지어는 참수+개역콤보를 먹인 것도 있을 정도.

막말시기 사무라이들이 오사카 근처 사카이(堺)[16]에 모르고 상륙한 프랑스 해군을 습격하여 몇명을 죽였는데 이에 열받은 프랑스 공사가 막부를 협박하여 묘고쿠 사(妙國寺) 광장에서 이들을 전원 처형케했다. 문제는 처형 방법이 할복. 이에 프랑스 공사와 해군 사령관 등 프랑스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먹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장을 꺼내놓고 그걸 정렬한다음, 피묻은 손으로 모래바닥에 '나 죽는다'고 쓴 다음, 그 내장을 프랑스인들을 향해 집어던졌단다...[17] 여담으로 영국 공사는 이 이야기를 가지고 일본인을 칭찬하고 프랑스인을 깠다. [18]

일본의 사무라이 그림을 보면 칼을 두 자루 차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큰 쪽을 혼자시라고 부르고 작은 쪽을 와키자시라고 부르며 이 중에서 와키자시를 할복용으로 쓰는 경우가 있었으나 원래부터 그렇게 쓰라는 것은 아니고 부러지기 쉬운 일본도의 특성상 보조무기로서 사용되었다. 때마침 할복용의 단도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나 와키자시를 할복용으로 썼다. 실제 길이도 할복을 하기에는 불편할 정도로 긴 편. 그래서 보통 칼날 부분에 옷감을 말고 그 부분을 잡고 베었다.

할복을 하면 대부분은 다출혈로 죽는다. 그나마도 빠른 시간에 죽음에 이를 정도의 출혈이 일어나려면 등 쪽의 간동맥을 찔러야 하는데, 배 쪽에서 칼을 꽂으면 초인적인 의지와 힘이 아니고서는 기껏해야 복근이나 복막, 아주 대단해도 장을 베는 정도에서 그치고 간동맥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카이샤쿠가 없으면 몇 시간 동안이나 고통에 시달리며 뒹굴다가 흉한 꼴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혼자서 할복을 하면 장시간의 고통을 못이겨 배를 갈랐던 칼로 자기 목이나 가슴을 찔러 끝을 낼 정도로 고통이 심하고 죽기까지 오래 걸렸다.

몇몇 문헌을 살펴보면 이런 비슷한 의식은 중국에서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에 나간 군주[19]가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만 남자 신하가 배를 가르고 자신의 내장을 꺼낸 후 간만 집어넣고 장례를 치르게 한 일화도 있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로마 공화정 말기의 공화주의 정치가인 소 카토는 자신이 수비하던 우티카가 카이사르 군대에게 항복하는 전날 저녁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 배를 갈라서 자살을 했다. 로마인들이 자살을 "의지의 죽음"이라고 불렀다고 하지만[20], 소 카토의 방식은 워낙 충격적이어서 키케로는 카토를 찬양하는 글을 남기고 카이사르는 카토의 행동을 비판하는 글을 쓸 정도였다. 그리코 소 카토가 할복자살로 표명한 공화정 이념은 그 뒤로 150여 년 동안 로마제정을 괴롭혔다.[21]

현대에 들어서도 광기와 강렬한 의지를 표하기 위해 간간히 행해진다. 일본의 극우 지식인이었던 미시마 유키오가 있는데, 미시마의 카이샤쿠역은 칼질이 서툴렀던 탓에 즉사하지 못하고 두 번이나 목을 쳤다.[22] 더구나 그 때 사용한 일본도는 날이 나갔다.

조선을 유린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톨릭신자였던 탓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할복자살을 종용받았으나 하지 않았다.[23] 그 때문에 조리돌림을 당해 갖은 모욕을 당한 후에 참수형으로 죽었다[24].

헤이그 특사로 잘 알려진 이준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서 할복으로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확한 사인은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 입장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지병인 뺨종기가 도져서 돌아가신 것인데, 어니스트 베델대한매일신보에서 오보를 내버린 게 민중들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주며 걷잡을 수 없이 퍼져버린 결과.

'생각한 대로 잘 안되는 경우'도 많았을 것 같다. 위에 나온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 그 예.

오히라 미쓰요씨도 15살 때 이지메를 심하게 겪은 나머지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람.

자신이 사무라이의 후예[25]라고 생각하던 일본군에서도 이런 할복이 잦았는데, 유명한 할복자로는 러일전쟁 당시 뤼순에서 일본군을 지휘했던 기 마레스케메이지 덴노[26]가 사망하자 아내와 함께 할복자살하였다. 그리고 가미가제 특공대를 최초로 만들었던 니시 다키지로는 패전후 카이샤쿠 없이 할복하다가 삑사리가 나 무지막지한 고통 끝에 15시간만에 사망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패하자 참모장 이사무, 사령관 지시마 미쓰루도 할복자살했다. 그러나 모든 일본군 자살자가 할복으로 자살한 것은 아니며, 나구모 주이치 같은 사람은 권총을 쏘아 자살하였다.

1.1. 관련 항목

2. 철권캐릭터 요시미츠의 필살기

커맨드는 66 lp+rk, 2 lp+rk.

칼로 자기 배를 관통(!)시켜서 등뒤에있는 상대에게 대미지를 주는 가불기이지만 자기몸을 관통하는 만큼 자기도 대미지를 입는다. 가불기들 중에서 상당히 빠르고 앞으로 길게 전진하기 때문에 기습으로 넣으면 상대가 맞아주기도 하지만 공격 사거리가 짦아서 그냥 자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요시미츠인 만큼 할복에도 파생이있다. 할복 훼이크라든가 연속 할복이라든가 할복 후 스핀이라든가... 일향포(rk~lk)후에 2 lp+rk로 할복을 공중 콤보를 넣어줄 수도 있다.(...)

이 기술을 사용해서 이기면 엄청난 쾌감을 얻지만, 이 기술로 ko당하면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TTT까지는 할복으로 상대를 KO시켜도 더블 KO처리 되었지만 4편부터는 자신의 피가 몇프레임 늦게 달기 때문에 상대가 KO당하면 요시미츠의 승리가 된다. 6편부터 레이지에서 사용시 상대방이 반피 이상이 날아가기 때문에 간보다가 써주면 생각보다 짭짤한 편. 믿음과 신념의 할복. 주로 뒤돈자세에서 쓰는 경우가 많다.

3. 영화 하라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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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수형을 내리기에는 좀 그렇고 살려두기에는 죄가 너무나 큰 사무라이의 경우 막부에서는 참수형 대신 할복을 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 [2] 다만 이러고 안 죽었다. 결국 감옥에서 사망
  • [3]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화랑들이 할복하는 장면이 나와서 상당수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 [4] 시미즈 가문은 지방의 토착세력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이묘의 권력하에 놓여진 존재는 아니었다. 무네하루를 부하로 삼은 모리측도 이것에는 반대하였으나 무네하루는 쾌히 이것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 [5] 자신을 직접 주군으로 섬기는 신하를 뜻한다
  • [6] 葉隱 혹은 常山紀談이 출처이다.
  • [7] 당시에는 적이 죽으면 반드시 목을 쳐서 그것이 본인의 목이 맞는 지를 확인함으로서 죽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 [8] 일단 죽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불명예를 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형식이므로 그나마 체면은 차릴 수 있었기 때문.
  • [9] 단 전국시대 초기까지는 배가 아니라 가슴을 갈랐던 듯하며, 카이샤쿠역이 없고 할복자가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 [10] 오죽하면 유럽에서는 한 번에 잘죽여달라는 의미로 사형집행자에게 뇌물을 주는 관습이 있을 정도였다. 한 번에 끝나면 운이 많이 좋은 거고 보통 두 번 세 번, 어떤 귀족은 일곱번 목을 쳐야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형집행인들이 정신적 고통을 덜기 위해 을 잔뜩 마시고 해서 난이도가 올라가는 것도 있고.
  • [11] 목이 바닥을 구르는 추태를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는 듯.
  • [12] 남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의지와 힘만으로 배를 가르는 건 통증과 쇼크로 인해 아주 어렵다. 실제로 도검에 의해 발생하는 우발적/계획적 사고에서도 가장 흔한 경우는 도검이 꽂힌 상태이거나 꽂힌 후 다시 빼면서 발생한 2차상이지, 도검을 꽂거나 관통시킨 후 다시 힘을 주어 날을 진행시켜 베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자해로 이 정도의 상처를 발생시키려면 칼날이 아주 예리하고 의지가 초인적으로 강해야만 가능하다. 물론 이것과는 달리, 아예 처음부터 도검을 내리쳐 베어버리는 경우는 가끔씩 있다.
  • [13] 다이묘가 죽기직전, 죽은 후에 양자를 들여서 가문을 잇게 함으로서 가문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
  • [14] 무사의 봉록을 모두 빼앗고 평민으로 강등하는 것.
  • [15] 이 때문인지 몰라도 일본 경제의 버블이 꺼지면서 수 많은 회사가 도산했을 때나, 큰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에, 책임자가 종종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엔 여론이 그 건에 대해선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 [16] 외국인 출입 금지 지역
  • [17] 결국 이 광경을 보고 충격을 먹은 나머지 11명 할복한 시점에서 프랑스 해군 함장이 중단을 요청했다. 결국 원래 할복하기로 되어있던 20명중 9명은 할복을 면하고 그중 8명이 사면받았다.(1명은 사면 직전에 병으로 사망)
  • [18] 출처 : 국방일보
  • [19] 학에게 벼슬까지 주었던 학덕후 위의공
  • [20] 이건 말 많은 <로마인 이야기>가 출처이다. 손목을 긋고 자살한 거라는 견해도 있다.
  • [21] 이것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카이사르 항목을 볼 것
  • [22] 결국 검도 유단자였던 다른 사람이 카이샤쿠를 했고, 그 후 처음 카이샤쿠를 시도한 사람도 미시마와 같이 할복했다(...)
  • [23] 이유는 웬만한 사람은 당연히 알겠지만 기독교계에서는 자살을 금기로 하기 때문.
  • [24] 죽을때 불교식대로 승려가 고니시의 머리위에 불경을 놓고 을 읊었는데 고니시는 "허튼 짓 하지 말아라 나는 기리시탄(크리스천)이다."라며 경을 냅다 팽개치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참수당했다.
  • [25]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많은 고급 사무라이들이 몰락했다. 그러나 애초에 막부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 깊지 않거나 처음부터 막부와 척을 졌던 사무라이들은 후에 메이지 정부에 편입되어 화족이 되었다. 이에 권력에서 배제당한 사무라이들과 그 후예들은 자유주의 운동, 은거 등의 방법으로 메이지 정부를 외면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 정치사에서는 일본 진보주의 계열의 시조를 사무라이 계층 중에서도 박탈감이 심했던 고급 사무라이 계층 중에서 찾기도 한다. 한 편으로 하급 사무라이들은 적극적으로 메이지 정부에 등용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치안유지나 소방업무같은 필수불가결한 업무를 맡고 있는 것도 전부 사무라이였기 때문에 완전히 사무라이를 배제한 정권을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또 군대를 조직하면서도 이들을 사관이나 부사관으로 받아들였다. 일본군이 일본도를 차고 다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 [26] 러일전쟁의 전사자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노기 장군은 승전을 했음에도 할복을 하려고 하였지만, 메이지 천황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안 된다고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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