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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 전투

last modified: 2015-10-07 15:00:21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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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 전투 당시의 소련군과 BT-7 고속전차.

Халхын голын байлдаан(몽골어): 할힌골 전투
Бои на Халхин-Голе(러시아어): 할흐강 사태
ノモンハン事件(일본어): 노몬한 사건
Battles of Khalkhin Gol (영어): 칼킨콜 전투

Contents

1. 개요
2. 1차 전투
3. 2차 전투
3.1. 주코프 등판
3.2. 관동군의 무모한 선공
3.3. 소련군의 8월 공세
4. 공중전에 관한 잡설
5. 결과
6. 양측 사상자 숫자
7. 이모저모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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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5월 11일부터 9월 16일까지 몽골 영토에서 발생한 소련군일본군 사이의 무력충돌. 일본측은 참패로 끝난 이 전투를 축소하기 위해 "노몬한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부르지만 사실상 소련일본 제국의 전면전에 가깝다.

중화민국군이나 군벌군과 같이 도저히 군대라고 볼 수 없는 저열한 무장세력만을 상대하다가 갑자기 질적 우위에 있는 열강의 군대를 상대하면서 일본군의 문제점이 부각된 전투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때 소련군을 상대하며 나타난 일본군의 문제점은 태평양 전쟁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는데, 일본이 정신 못차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

사건의 발단은 1932년, 만주국 성립시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과 몽골 사이의 국경을 할하강[1]으로 정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대해 전통적으로 할하강 동쪽 16km 지점에 있는 노몬한 언덕을 경계선으로 간주하던 몽골이 반발하면서 갈등이 빚어졌다. 일본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정하면 기존의 국경선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출부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몽골에게는 나름의 위협이었다.

그러나 모래와 잡초만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벌판에서 이는 땅따먹기 놀이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몽골과 만주국 모두 쓸모없는 땅덩어리 때문에 무익한 싸움을 일으킬 의미가 없었기에 협상으로 잠정 국경선을 정하려는 움직임도 보였으나 이는 수포로 돌아간다. 사실 만주국(일본)과 몽골(소련)이 주장하는 국경선의 차이는 약 10-20km 정도의 사소한 것이었으니, 쓸모없는 땅을 두고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육군은 소련을 제1의 가상적국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소련도 러일전쟁이나 적백내전 당시 개입했던 일본의 야욕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 부근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 육군은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에서 보듯이 중앙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모험주의적인 충돌을 일삼았으므로, 소련은 이런 망나니같은 일본군을 우려하고 있었다. 일본의 군사적 야욕은 관동군을 확장하면서 점점 노골화되었는데, 그 결과 1937년 만주와 소련 사이의 국경에 있는 건차자도에서 대치 상황 끝에 소련군 함정에 포격을 가하는 차자도 사건이 발생했고, 1938년에 벌어진 산 전투(장고봉 전투)에서는 소련군과 연대급의 충돌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했지만 일본군을 능가하는 인명손실을 보았고, 이 때문에 실리 블류헤르 원수는 졸전(?)의 책임을 물어 숙청될 정도로 소련은 일본의 침략을 우려했다. 그래서 연해주 지역의 우리 동포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것도 바로 이런 조바심의 발로였다고도 한다. 이리하여 이런 쓸모없는 땅을 둘러싼 작은 충돌도 대규모 전투로 비화될 여지가 많았다.

2. 1차 전투

1939년 5월 11일에 70~90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몽골군 소부대가 만주국군 주둔지를 기습한다. 양측의 전투일지에 '적의 월경을 격퇴' 정도로만 기술되어 피해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경에 구멍이 났다는 이유만으로 관동군은 할하강을 건너 보복에 나섰다. 사실 1938년에 있었던 하산 전투의 복수전을 기도하고 있던 관동군은 '만소국경분쟁처리요강(満ソ国境紛争処理要綱, 번역)'이라는 작전 지침을 참모본부의 허가도 없이 만들어 두었던 터라 "야 신난다"하며 전면전에 나선 것이다.[2] 이에 소련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전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벌어진 전투가 1차 노몬한 전투이다.

일본군은 제23사단 예하 제64연대 제3대대와 아즈마 중좌의 수색대와 만주국 기병을 포함해 2천명을 웃도는 병력수였고 소련군은 제11기계화여단 예하 병력 1,500명 정도였지만 장갑차와 야포의 수는 더 많았다. 소련군의 군세를 과소평가한 일본군은 5월 28일 오전에 선공을 걸어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으나 재빠르게 우회포위에 들어간 소련군이 아즈마 지대를 저녁 때까지 섬멸하였다. 이후 소강상태는 이어지다 전투속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관동군 결정에 의해 6월 1일 일본군은 퇴각했다. 하지만 지상전과는 달리 공중전은 일본군이 우세였다. 이 전투는 7월의 2차 노몬한 전투로 이어진다.

3. 2차 전투

3.1. 주코프 등판

(ɔ) Zhukov from

할힌골 전투의 소련군 계획도(Soviet map of battle on Khalkhin Gol)
1차 전투의 의미가 향후 이 지역 국경선 확립에 중요하다고 본 몰로토프 외상의 주장으로 국방장관 wikI:"클리멘트 보로실로프"보로실로프 원수는 일본군에게 패하면 시베리아의 방위가 위험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벨라루스 관할군 부사령관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를 극동 관할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1차 전투를 큰 피해없이 마무리 지은 전임자 페클렌코와 교체했다. 일부 한국 밀덕후들에게는 페클렌코가 해임과 동시에 숙청되었다는 잘못된 설이 알려졌는데, 장고봉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블류헤르 원수와 페를렌코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페클렌코는 제1차 충돌에서 일본군을 잘 막아낸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고, 독소전쟁에도 참전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참 지난 1951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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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에서 소련 극동군 참모장 그리고리 슈테른(왼쪽), 몽골 대통령 허를러깅 처이발상(가운데)과 함께 작전계획을 짜는 주코프(오른쪽).

소련군은 1개 차량화 보병사단, 2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여단, 2개 기갑여단, 2개 기계화여단, 4개 포병연대, 2개 항공여단, 6개 항공연대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을 투입했다. 이는 주코프가 당초 요청한 전력의 2배가 넘는 것이었다. 일본 역시 기존의 제23사단 이외에 군 직할 2개 전차연대에다 정예라 불리우는 제7사단 병력(1개 차량화연대, 1개 공병연대, 1개 보병대대, 1개 포병대대)을 추가, 강화된 야스오카 지대를 전선에 투입하는 등 전력을 증강시켰다.

하지만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이미 관동군은 소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병력, 대포전차, 차량 모두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제23사단 자체가 불과 1년 전에 만들어진 신편 사단이라 병력 대부분은 신참 징집병이었고, 장비는 다른 보병사단보다도 부족할 정도였다. 증강되었다고는 하지만 말뿐이라 차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병력이 230km나 되는 거리를 도보행군하여 전선에 도착할 정도였다. 대포는 76문에 불과한데다 100mm 이상의 대구경포는 불과 10문도 되지 않았고 대전차포는 1문도 없었다. 게다가 일본군의 주력 전차는 대전차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능이 크게 뒤떨어졌다. 그러나 정작 관동군은 소련군의 전력을 1차 전투와 비슷한 수준인 1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여단이라고만 판단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련군은 적을 얕보지 않고 충분한 병력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소련군을 얕보고 보병의 총검돌격이면 소련군의 기갑부대는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동군의 이런 근거없는 자신감은 상급 지휘관들조차 "적을 지나치게 얕보는 것이 아닌가..."라고 우려할 정도였다.

3.2. 관동군의 무모한 선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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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 들판의 일본군 보병. 일본군이 소련제 DT[4]기관총을 들고 있다.

관동군은 소련군을 섬멸하기 위해 신병으로만 구성된 제23사단을 빼고, 정예부대인 제7사단으로 공세를 펼 계획을 세웠으나, 우에다 겐키치 관동군 총사령관은 "내 부대가 이런 굴욕을 겪었는데 다른 부대를 투입하면 나는 굴욕감에 자결하겠다."고 흥분하면서 1차 충돌의 주역인 제23사단에게 그대로 '설욕전'을 벌이라고 명령했다.

일본 본토의 육군성은 공세에 회의적이었으나 관동군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전투를 강행하였다. 관동군이 자신감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소련군의 전력 집결이 일본군보다 늦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일본군 전선과 철도간 거리는 230km이었으나 소련군 전선과 철도 사이 거리는 750km에 달했던 것이다. 또한 1차 전투 이후 간간이 벌어지던 항공전이 일본군의 우세로 흘러가면서 제공권은 우리가 장악했다는 확신이 이 근거없는 자신감을 부추겨 당시 관동군 참모부는 더 이상의 전력 증강은 "닭 잡는데 소잡는 칼을 들고나오는 셈."이라고 하며 처음에는 제7사단 증파를 반려할 정도였다.그러나 현실은 곰에게 맨주먹으로 싸움을 걸었다

일본군 제23사단은 소련군을 선빵으로 박살내겠다며 7월 할하 강을 도하하여 소련군에 기습을 가했으나, 화력덕후 소련군의 포병은 관동군의 예상을 능가하는 화력을 선보이며 도하한 부대는 큰 소실을 입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자 관동군은 "포는 포로 잡아야지."이라고 하면서 장기도 못 둬본 인간들 포병을 전개해서 소련군 포병을 기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 포병은 포의 숫자뿐만 아니라 포 자체도 성능이 시원찮았다. 소련군 포병은 기습을 받았지만 역습을 가해서 일본군을 역관광시켰고, 일본군 포병은 거의 전멸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일본군 포병이 포를 쏘면 소련군은 그 몇배의 포탄을 퍼부었고, 전투가 진행될수록 수리부품이 부족하고 혹사당한 일본군의 야포가 과열되어 주퇴기가 안 닫혀서 수동으로 동작시키거나 심지어 포가 붕괴되는 막장사태가 일어날 정도였으니 포탄이 날아가는 탄도도 개판이라 걸핏하면 아군 진지를 때리는 팀킬까지 발생했다. 때문에 일본군 보병은 포병에게 가능한 포 좀 쏘지마라고 부탁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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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 전투에 참전한 일본 육군 항공대 조종사들. 나카지마 Ki-27이 주력이었다.

이러자 관동군은 '현대식 전력'인 공군과 기갑부대로 소련군을 제압하겠다며 전투기 부대가 치하얼에서 발진하여 몽골에 있는 탐사크불락의 소련 공군기지를 급습하였다.[5] 관동군은 큰 피해를 입혔다고 자평했으나 대본영은 월경폭격을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대본영과 관동군의 사이만 나쁘게 했다. 그러나 관동군은 대본영의 훈령과는 아랑곳 없이 제멋대로 전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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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회의를 하는 일본군 전차병들. 89식 중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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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한 95식 전차를 검사하는 소련군 전차병들.

한편 일본군 기갑부대는 87대의 전차와 장갑차로(89식 중전차, 97식 치하와 95식 하고, 그 외 94식과 97식 장갑차들)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제4연대(경전차로 구성되었다)는 7월 2일 밤에 소련군을 기습하였고, 기습은 성공했지만 전세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식으로 전차의 대규모 기동을 실전에서 쓴 것은 일본군이 세계 최초였다고 한다. 한편 중전차로 구성된 제3연대는 7월 3일, 소련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13대의 중전차와 5대의 장갑차가 파괴되는 피해만 입었다. 거기서 97식 전차에 타고 있던 연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7월4,5일 소련군이 반격을 시작하여 차량 손실이 늘어나자 7월 6일에 일본군은 후퇴하였다. 결국 관동군 사령부는 기갑부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일본군 보병부대는 전혀 기갑부대의 원호를 받지 못하고, 소련군 기갑부대를 상대로 급조한 화염병이나 대전차총검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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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에서 맹활약한 BA-6 장갑차. 장갑차지만 탑재한 45mm 포는 대전차포였으므로 89식의 57mm 곡사포와 달리 대전차전이 가능했다.


노획한 BA-6 장갑차와 ZIS-5 트럭을 5톤 포병용 트랙터로 견인하는 일본군

할하 강 서안은 동안보다 해발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움직임은 소련군이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소련군은 가끔씩 포격을 하여 일본군을 혼비백산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전투가 소강상태였던 7월에도 매일 1-2%의 병력손실을 보고 있었다.

사실 이 때의 소련군은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대규모로 숙청당한 상태였으므로,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보듯이 객관적인 전력에 비해 형편없는 전투력을 보여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노몬한에서도 소련군의 지휘부가 무능했다면 일본군이 승리를 거둘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나, 불행하게도 이 전투에서 참전한 소련군 지휘관은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였다.

하지만 주코프 자신도 이 전투는 처음으로 실전에서 지휘를 하는 것이였기 때문에 빈말로도 세련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의 정치적 압박이 심했고, 병력 또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시간의 가축수송 철도 이동으로 피로가 누적된데다 겨우 역 하나에서 모든 수송을 부담하다 보니 보급 적체와 혼란도 극심했다. 어쨌거나 주코프는 기동전의 개념을 제대로 갖춘 지휘관이었고, 여러 혼란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일본군을 압도하는 전력을 준비할 수 있었다.

3.3. 소련군의 8월 공세

소련군은 일본군의 공세를 분쇄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격을 위해 계속 유럽방면에서 오는 증원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 이것은 주코프의 장기이기도 했는데, 모스크바 전투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에서도 처음에 수비로 적의 공세가 소진되기를 기다렸다가 적이 기진맥진했을 때 파멸적 타격을 가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준비가 끝난 8월 20일에 마침내 소련군은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이 때 소련군은 대규모 지원포격과 함께 기갑여단 3부대와 기계화여단 2부대가 할하강을 건너 일본군에 대한 양익포위에 성공했고, 그 결과 선두에 있던 일본군 제23사단을 비롯한 제6군 전체가 포위망에 걸렸다. 일본군 제23사단은 끝내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멸했다.[6] 따라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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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일본군 병사들

그러나 소련군은 원래의 국경이던 노몬한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전투는 이것으로 끝났다. 관동군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여력이 없었고, 소련도 다가오는 동유럽에서의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할힌골 전투가 끝난 다음날인 9월 1일은 바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날이었고, 9월 17일에는 소련 역시 폴란드를 공격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역시 전투를 계속할 의사가 없었다. 원래 소련은 이 지역에서 영토(그것도 소련이 아닌 몽골의 영토)를 확대할 의도가 없었으므로 일본군을 격파한 시점에서 전투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었다. 그 결과 사소한 국경문제에서 관동군과 소련군 사이의 대규모 결전으로 비화된 이 전투는 다시 사소한 국경문제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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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0월 강화후 포로교환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소련군-일본군 장교들

그러나 관동군은 소련군이 멈춘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설욕하겠다고 분쟁지역에 계속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증원으로 온 제7사단 뿐만 아니라 제2,4사단까지 파견했다. 중앙에는 '전사자 수용을 위한 한정 작전'이라고 거짓보고를 했다. 일본군 대본영은 깜짝 놀라서 나카지마 테츠조 참모차장을 파견하였으나 참모차장도 관동군에 설득되어 이를 추진하게 된다. 대본영은 다시 연락장교를 보내서 중지를 거듭 명했고, 그제서야 관동군은 공세를 포기하였다. 이후 우에다 겐기치 관동군 사령관[7]과 이소가이 렌스케 참모장, 핫도리 타쿠시로 작전참모, 그리고 고마츠바라 제23사단장뿐만 아니라 공세를 중지시키려다가 오히려 설득된 나카지마 참모차장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4. 공중전에 관한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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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의 Ki-27(97식 육군 공격기). 보이듯이 랜딩 기어가 고정식이다.

할힌골 전투 당시 일본의 전투기들은 공중전에서 소련 공군을 상대로 대등한 전과를 올리긴 했고, 우세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물론 양측 모두 자신들이 우세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측은 10:1 에 가까운 우세한 격추비를 보였다고 발표했고, 이를 그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일본측이 우세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이를 근거로 일본의 전투기 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분쟁 초반기의 이야기다. 그리고 초반기의 소련군 전투기의 대부분은 구식 복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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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 초반에 투입된 소련 공군 제70비행연대 도장의 I-153 . I-15도 기체 모양이 거의 같다.

이렇게 복엽기가 일본군에게 고전하자, 이후 투입된 소련군의 전투기는 단엽기 I-16인데, 이 전투기만으로도 소련군은 일본군을 압도했다. 이 전투기조차도 당시에는 시대에 뒤진 전투기였고, 2년 후, 독소전쟁에서 초반에는 독일군의 Bf-109에게 처참한 격추비를 기록했다. 그러므로 일본 육군 항공대의 전과는 일본이 선전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봐도 이 전투 후반기에 이르러서 일본측이 주장하는대로 일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소련군이 아무리 우세한 기갑부대를 동원했었던들 일본군이 거의 탈출을 못하고 전멸했을리가 없다. 즉 소련군이 당시 제공권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작전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소련측의 전투기 손실은 오히려 일본측에서 발표한 일본측의 전투기 손실보다 적었다.

I-16은 당시에도 최신형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기종이었지만, 독-소 전쟁 초반에 각인된 것처럼 아주 나쁜 전투기는 아니었다. 이는 전투기 성능보다는 2년간 실전경험을 쌓은 독일 공군이 그 당시에 소련군을 압도하는 숙련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인입식 랜딩기어를 장착한 기종이기도 하며, 스페인 내전에 투입된 결과 프랑코측의 CR. 42과 He-51이 상당히 고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할힌골 전투 당시 일본군의 전투기는 Ki-27인데 이것은 단엽기이기는 했지만, I-16에 기술적으로 뒤진 기종이었다.[8]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 격추된 소련군 전투기의 대부분은 구형 복엽기인 I-15인데, 일본군에게 고전하자 놀란 소련군이 I-16을 투입하여 일본군을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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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힌골에 출동한 I-16

즉, 일본은 중국 이외에 다른 나라와의 항공전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했던 적이 없다.[9]

여기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연구한 책 "Airwar over Khalkhin Gol" (2010, Vladimir Kotelinikov 저)에 의하면 할힌골 전투 초기에 몽골-시베리아에 배치된 소련 공군(VVS)의 훈련도가 불충분했고, 전투기들도 모두 구식(복엽기 I-15, I-153, 그리고 실험적인 R-6이 주종)이었기 때문에 중일전쟁에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일본군 조종사에 밀렸으나, 소련군은 이후 신형 전투기들와 베테랑 파일럿을 계속 이곳에 투입해서 균형을 유지했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련 공군이 일본 육군 항공대를 압도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초반 전과만 가지고 일본 육군 항공대가 소련 공군을 압도했다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 소련 공군의 비전투 손실율이 너무 많은 것을 의심당해서, 공군 지휘관 몇명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NKVD 부장 베리야에 의해 숙청당했다. 지못미..

한편 일본 육군 항공대는 할힌골 전투 당시 23개 중대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그 중 85%인 20개 중대를 투입했고 그 중 절반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특히 후반부에 피해가 집중되었는데 초반에 일본군을 경시하던 소련에서 후반기에는 유럽방면에 주둔하던 일류 조종사들을 데려온 것이 주원인이었다. 덕택에 일본 육군 항공대는 항공기보다는 조종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제대로 된 교훈을 얻었고 그 덕에 조종사 보호장치가 육군기에는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 바로 도조 히데키.[10] 도조 덕에 수십만명의 육군 장병이 거름이 된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해군은? 그냥 제로센.

5. 결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러시아가 아직도 오합지졸이라 오판하고 있었는데 이 전투 이후 일본군은 소련군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진주만 공습 당시 독일은 일본의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에 반해,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이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던 것은 할힌골에서의 참패 때문에 그러하였다. 그러나 전투의 교훈으로 당연히 서둘렀어야 할 전차의 성능 개선이나 전차 및 포병화력의 확충은 별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해·공군 쪽에 예산이 어느 정도 집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예산을 받은 육군 내에서도 그다지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또한 소련군의 기갑부대에 의해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포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술 면에서 전차의 집단운용에 의한 기동전을 고려하거나 그러한 전차 중심의 기동전에 대비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군은 교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 전투를 잊어버리기에 급급했다. 장병들의 휴가와 서신교환이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본토로 귀환한 장병들에게는 헌병대의 감시가 붙었다.

전투에서 이탈한 장병들은 만주 들판의 마적이 되었다. 할힌골의 대패는 관동군과 군부의 언론플레이로 소련군의 침공 야욕을 격퇴한 분전으로 윤색되어 선전되었다. 참고로 현재도 일본 넷우익들은 당시의 선전을 그대로 인용, 소련군 병력이 일본군 10배나 되었으며 그럼에도 동등한 피해를 입혔으므로 이긴 셈이라는 정신승리를 시전, 양식있는 우익(?)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래놓고 사건이라고 축소하며 이겼다는 건...

이 때 이후 발전이 없다시피 한 일본 전차부대는 태평양 전쟁에서 안습 전설을 만들어내는데, 일본 외무상이던 도고 시게노리[11]는 할힌골 전투를 비난하며 철군을 요청한 바 있는데, 나중에 미군 전차에 뭉개진 걸 듣고 그 때와 달라진 게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2차대전 당시 전차병으로 참전한 시바 료타로도 2차대전 뒤에 할힌골에서 대패당한 걸 알고 자신이 전차병으로 목격한 일이나 할힌골이나 전혀 다를 게 없었다고 한탄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몽골 여행[12] 중 할힌골 전투 승전비를 보고 일본에서는 애써 별 것도 아닌 사건[13]으로 축소하고 외면하지만, 세계적으로는 규모가 큰 전투로 알아준다면서 비아냥거린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쓴 소설 '태엽갑는 새'에서 이것을 과거 이야기로 다루었는데 할힌골 전투를 사건으로 격하하는 걸 패배를 감추는 미련한 짓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몇몇 극우들이 불쾌하게 여겼는지 심지어 살해 협박 전화까지 걸었다. 이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는 끝까지 미련하다면서 더 극우들을 씹었다.

6. 양측 사상자 숫자

  • 소련
    병력: 57,000여 명, 전차 493대
    자체 발표: 9,284명 사상
    실제 추측: 6,831명 전사, 1,143명 실종, 15,251명 부상, 701명 질병

  • 일본
    병력: 38,000-75,000여 명, 전차 135대
    자체 발표: 8,440명 전사, 8,766명 부상, 3,000여 명 실종 또는 포로
    실제 추측: 45,000여 명 사상, 3,000여 명 포로
    소련 추측: 60,000여 명 사상, 3,000여 명 포로
일부는 일본측 전사자만 해도 5만여 명에 달한다고 추측한다.

7. 이모저모

  •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일본군 주력 전차이던 89식 중전차는 대전차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차가 아니었다.[14] 주포인 57mm 곡사포는 대전차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관통력 자체는 보병포답게 극악이었으나, 역시 워낙 종이장갑으로 악명 높은 BT(전차)T-26을 표준 교전거리보다 약간 안쪽인 500m 내외에서 격파하는 데 딱히 문제는 없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표준교전거리에서 제대로 맞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탄의 산포도가 넓은 단포신 포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89식 중전차는 종이장갑 BT 전차를 상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비해 처음부터 대전차전을 염두에 둔 탓에 37mm 대전차포를 주포로 탑재한 95식 경전차 하고는 비교적 수월하게 BT전차를 상대할 수 있었다(일본군의 전차 개발사상에서 경전차는 영국의 순항전차나 소련의 기병전차(예를 들어 BT 전차)와 마찬가지로 적 기갑부대와의 교전 및 신속한 추격전을 염두에 둔 다목적 전차였다). 물론 일본군의 37mm 대전차포는 동급 대전차포 중 최악의 대전차능력을 자랑해서 BT 전차의 45mm 주포보다 사정거리가 짧고 위력도 심하게 부족하긴 했지만, BT 전차도 종이장갑이고 철판의 재질도 안 좋아서 일본군 전차인 89식이나 97식이 이 당시만 해도 BT 전차보다 방어력이 좋았고 방어력이 매우 낮은 95식 경전차조차 BT 전차와 대등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이므로 95식 경전차의 포탄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데다, 당시 소련군 전차병의 숙련도보다 일본군 전차병의 숙련도가 더 높았던지라 95식 경전차는 의외의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물론 95식 경전차도 제대로 된 전과를 올리려면 500m 이내로 급속접근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형세를 뒤집을 결과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관광당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관동군은 전차 손실을 보충해 계속 싸워보자는 생각은 안하고 전차부대를 그냥 전선에서 빼버린지라 결국 제대로 된 대전차포도 없는 일본군 보병들은 소련군에게 갈려 노몬한의 이 되어버렸다.

  • 전차들은 철수했고, 대전차포는 부족한 일본군은 몰려오는 소련군 전차를 알보병으로 막을 수 밖에 없었다. 소련군 전차들의 피해는 일본군 참호들을 돌파하면서 늘어났는데, 참호에 사각지대가 많다보니 그것을 노린 대전차포나 일본군의 화염병 투척에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소련군 전차부대가 보병들과 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차들의 피해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으로는 전차부대의 진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 소련군도 인명피해 만큼은 일본군과 맞먹을 정도로 크게 입었다는 것이 소련 붕괴 이후 드러나기는 했다. 당시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게오르기 주코프는 공명심이 앞선 나머지 전차들만 단독으로 진격시켰다가 일본군의 대전차화망 앞에서 마구 박살나게 만들거나, 전선에 갓 도착한 병력을 축차투입하는 등 상당한 삽질을 하여 피해를 키웠다. 하지만 유럽 방면에 있던 전력을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인 몽골에까지 급속하게 이동하여 적의 공격을 사전격멸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여 관동군의 야코를 완전히 깨뜨리게 된다.

    일본 극우들은 사상자수를 근거로 '대등하게 싸운 것이다'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군의 승리라고 해야 할 판이다. 크게 보면 독소전쟁은 독일의 대승이 된다(...). 또한 일본 우익들 스스로도 사건이라고 축소하고 있으며 전투라고 인정하고 국제적으로 홍보하지도 못한다. 더구나 근래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군의 실제 사상자 수가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자료에 드러난 소련군 사상자보다 많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선 소련측 사상자가 일본측이 발표한 사상자보다 다소 많았다. 하기사 당시 일본 또한 소련과 같은 은폐가 가능한 사회였으니 가능성은 있다. 더군다나 전투의 최종 결과가 사실상 소련의 승리였던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일본의 경우, 야전병원에 실려온 부상병이나 전사자는 일부 통계에서 누락했다. 전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할힌골 전투 사망자는 2만명 이상으로 기록되어 수천명에 불과한 당시 발표와는 몇배의 차이가 있다. 즉 일본군은 소련군에 캐발린 것이다.#

  • 소련군 측 최고 지휘관들은 전투 후 공로로 각종 포상을 받았지만, 이들 중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이는 주코프 정도를 빼면 없었다. 극동군 참모장이었던 그리고리 슈테른은 전투 종료 후 주코프와 함께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고 겨울전쟁 때는 제8야전군 사령관을, 그 이후에는 주코프의 후임으로 극동군 사령관을 역임했지만, 1941년 6월 트로츠키 추종자이자 나치 독일의 스파이라는 날조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파견되어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바 있는 공군 장교였던 야코프 스무슈케비치도 이 전투에서 공군 병력을 지휘해 주코프의 조공을 맡은 공로로 두 번째 소련영웅 칭호를 받고 소련 공군 총사령관과 소련군 총참모부 부참모장을 역임했지만, 역시 1941년 6월에 날조 혐의로 체포된 뒤 총살형에 처해졌다. 베리야는 주코프도 똑같이 없애려고 했지만, 주코프는 슈테른이나 스무슈케비치처럼 당시 스탈린이 경원시했던 유대인이 아니었고 이 전투 이전부터 군부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던 인물이라 결국 숙청 대상자 목록에서 제외했다.

  • 일본군 제23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원인 중에는 일본군 특유의 문화도 있었다. 일본군에서는 후퇴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 치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소련군의 포위망이 조여오는 가운데에도 제23사단의 장교들은 후퇴하자는 말을 못하고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책임 떠넘기기 행태는 임팔 작전에서도 반복된다. 일본군의 멍청함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 스탈린은 승리 후 주코프를 불러들여 일본군이 어떠한가에 대해 물었고 주코프는 "사병과 하사관들은 용감하고, 초급장교들은 완강하지만, 고급장교들은 무능하다."고 평가했다. 마치 롬멜이탈리아군을 "이탈리아 병사는 훌륭하지만 장교는 형편없고 장군은 쓰레기다."라고 평가한 것과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츠지 마사노부는 "소관의 작전계획은 완벽했으나 일선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와 감투정신의 부재로 패전."이라고 대본영에 보고했다(...). 천하의 개쌍놈

  • 진짜 어처구니 없는건 이 전투에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대령[15]이 이 전투에 있었는데 고마츠바라 미치타로와 츠지 마사노부의 대화가 진짜 가관이다.
야스히토 대령: 이 전투말일세. 경들은 이길 수 있다고 보는가?
미치타로 중장: 물론입니다. 전하. 우리 황군이 전쟁에서 진 경우를 봤습니까?어 봤어
마사노부 중령: 전하. 원래 전쟁은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지는 것이옵니다.[16]
그 말을 들은 야스히토가 기가 막힌듯 쳐다보고는 한마디 했다.
야스히토 대령: 그런가? 그러면 한가지만 묻겠네. 만약 경들 빼고 장교와 부사관과 병들 포함해서 전원 전사했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나? 마사노부 중령이 한 말 그대로 전쟁은 졌다고 생각했을 때 진것이니 두사람만 남아도 이긴것인가? 적군은 별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네.

그 말을 들은 츠지 중좌와 미치타로 중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장군과 육군대학 실질적 수석[17]이었던 장교가 명목상 수석[18][19]이었던 황족보다 생각이 짧았다니..... 답이 없다.

  • 일본군 제23사단의 피해는 막심하여 참모장 이하 연대장급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생존한 고급 지휘관과 참모들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살하였다. 제23사단장 고마쓰마라는 예편된지 얼마 안 되어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사망했다. 적지 않은 문헌에서 고마쓰마라가 자살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 전멸을 당한 제23사단을 제외하고 인접 부대와 상급 부대의 지휘관이나 참모 중에서 제대로 책임을 지는 자들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 책임 추궁을 당하기는커녕 2차 대전에 참전하였다. 모든 책임은 제23사단이 뒤집어 쓴 셈이다.

  • 장동건 주연의 마이웨이의 초반은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인 포로가 제23사단 소속으로서 소련군에게 잡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동향인들로 사단 병원을 충원하는 일본 육군 관례에 따라 제23사단은 시마네 현 출신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조선인이 여기에 포함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물론 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할힌골에서도 조선인 출신 일본군 포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다른 소속이었다가 잡혔을 수도 있다. 다만 조선인에 대한 지원병제는 1938년, 징병은 1944년 시작되었으므로, 실제로 조선인이 있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영화처럼 재판받고 강제로 군에 입대해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조선인 지원병도 조금 뽑고 있는 상황에서 사상이 의심스런 범죄자를 굳이 최전방에 보낼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

  • 게다가 일본-소련은 전투 이후 1939년 10월 포로를 교환했고, 소련이 특별히 포로를 더 잡아둘 이유가 없었다. 소련이 2차대전후 독일과 일본의 포로를 억류한 것은 엄청난 인력손실 때문에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지[20], 대숙청 직후의 1939년처럼 굴라그에도 자국 노동력이 넘쳐나던 때, 굳이 포로까지 송환하지 않으면서까지 자국에 억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포로 출신들을 자국병으로 징집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소련군은 패망 직전에도 불온한 민족(체첸이나 소련 내 독일인 자치주)들을 반란을 일으킬까봐 후방으로 강제송환하고,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해도 거부했는데, 성향이 의심스러운 일본군 포로 출신들을 자국군에 징집해서 전선에 투입하는 것이 과연 제정신일까? 하지만 실제 이 영화의 인물은 실제로 조선 출신 관동군-소련군-독일군으로 노르망디에서 미군에 포로가 된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미국 포로심문기록에도 있으며, 다만 영화는 각색을 통했다는 것을 참고하면 된다

  • 마이웨이의 할힌골 전투 씬은 영화내 그나마 볼만한 부분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전투 자체는 실제 역사에 바탕을 두었다기보다는 그냥 영화적 연출로 보는게 좋다. 일단 일본군의 대전차 육탄전 자체가 실제 역사보다 더 효과적으로 묘사되었을 뿐더러[21], 일본군이 대놓고 밝은 아침에 평지를 건너 기습 공격을 하러 간다거나, 광활한 평지에서 소련군 전차가 대놓고 밝은 아침에 대규모로 기동하는데 일본군은 그걸 전혀 모르거나 하는 등 실제 역사의 그 막장 일본군(...)과 비교해봐도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좀 있다. 그냥 태평양 전쟁에 걸쳐서 발생한 일본군의 그 막장 대전차 공격들을 한 장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만 가치가 있다.

  • 강제징병에 논란이 되는 부분은 44년 일본이 망하기 직전에야 공식적인 강제 징병이 이루어졌다는것이다..
    그 전에 학도병이나 기타등드의 방법으로 자원입대형식을 취하였는데 일본인들도 사상범,불온불순분자,범죄및 전과자,제 2국민 으 로 분류되는 국민은 황군의 자격이 없다고 하여 징병대상에서 제외됐다...거기다 식민지에서의 징병도 창씨개명자나 일본국에 충성하는자 또는 추천또는 군사학교이수자(장교등) 징용자중 군속(징용/징병자들 대부분은 전투보다는 건설 노동 경비등 군무원 신분)으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로 마이웨이의 극중 장동건이 강제입대하는 경우는 불가능.

  • 야스히코 요시카즈만화 무지갯빛 트로츠키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좀 과장을 섞자면 앞 분량 3/4는 할힌골 전투 이전의 일본군(특히 관동군, 그 중에서도 이시와라 간지츠지 마사노부)의 음모에 대해, 그리고 결말까지 1/4은 할힌골 전투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일개 흥안군 소위이긴 하지만 전장 상황에 대해서도 적절히 설명해주고, 전투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다루고 있다. 다만 같은 이유로 소련 쪽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이 한계. 그래도 당시 일본군의 안습한 상황이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 동시대를 다룬 개념 시대극에서는 반드시 언급되는 사건, 인간의 조건의 작가의 쟁과 인간에서는 상당히 비중있고 안습하게 사건이 묘사된다.

  • 2차대전 미니어쳐 게임 Flames of War에서 추가된 일본군 시나리오가 이 전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일본 항공대가 러시아 공군을 격파해 승리한다!정신나간훗날 공군 기념일로 선포된다. 그런데 이 세계관에서 공군성은 해군성의 함재기 중심으로 성립되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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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할힌골(Khalkhyn Gol) 강이라고도 부른다.
  • [2] 이 지침을 작성한 인물이 유명한 츠지 마사노부였다.
  • [3] 러시아어 위키페디아 참조, http://ru.wikipedia.org/wiki/Фекленко,_Николай_Владимирович
  • [4] DP-28을 전차 동축기관총용으로 개조한 모델이다.
  • [5] 츠지 마사노부가 이 작전을 입안했는데, 츠지가 아군이 아닌 적에 피해를 입힌 유일한(...) 전투이다. 오오.. 작전의 신 오오...
  • [6] 군사적인 의미에서 전멸은 몰살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해당 부대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대개 일반적인 국가의 군대에서는 전체 병력 중 30%가 사상자(1개 사단 기준으로 전사 500~600명, 부상자 2,500여 명)일 경우 전멸로 분류하여 그 즉시 재편성하도록 조치한다. 대한민국 국군도 40%가 기준이다. 그런데 당시 제23사단은 전체 전력의 70% 가량을 상실했으므로 전멸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 [7] 우에다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의해 상하이에서 한 다리를 잃었다.
  • [8] Ki-27은 랜딩기어가 Ju87처럼 커다랗게 돌출된 채 고정되어 있어서 접지도 못한다.
  • [9] 실상을 따져보면 일본의 내노라하는 에이스들은 거진 중일전쟁에서 양민학살하며 배출된 에이스들이며, 대부분의 격추숫자도 중일전쟁에서 격추한 중국군 기체가 대다수이다. 태평양 전쟁의 공중전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제로센와일드캣을 압도하다 헬켓이 나타나서 밀리기 시작했다'식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와일드캣부터 이미 교환비가 1:1을 넘지 못하거나 오히려 와일드캣이 약간 우세한 양상이었다.
  • [10] 그런데 '도조의 돈주머니'라는 누구는 필리핀에서 조종사를 도매금으로 처분했다.
  • [11] 그에게는 박무덕이란 조선 이름이 있었다. 즉 조선계, 정확하게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사기장-도공은 일본 한자어-의 후손이다.
  • [12] 우습게도 이 여행을 후원하던 게 90년대 초반 존재했던 일본 극우지 마르코 폴로였다. 이 잡지는 종군위안부를 비롯해 죄다 일본의 전범죄를 부정하던 잡지였는데 나중에는 유태인 학살이 완전 조작이라고 설치다가 미국 내 유태인 단체의 분노 어린 경고에 겁먹고 폐간해버렸다.(…) 극우를 무작정 싫어하지 않으나, 무정부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 잡지가 돈대줘서 몽골 여행하고 돌아와서 극우를 까는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다.
  • [13] 웃기게도 새역모에서 낸 교과서에선 이 전투가 일본이 승리한 전투라면서도 여전히 노몬한 사건으로 쓰고 있다. 이겼다면서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며 축소하는 꼴이다.
  • [14] 97식 전차도 마찬가지이나, 당시 97식은 노몬한에 4대 밖에 없었으므로 논외.
  • [15] 히로히토의 동생이었다.
  • [16] 비록 츠지와 야스히토가 사관학교 동기이자 육군대학 동기였지만 야스히토는 다이쇼덴노의 차남이라 존대를 했다. 미치타로 역시 마찬가지.
  • [17] 왜냐면 야스히토가 사관학교,육군대학 수석이었고 차석은 칸인노미야 하루히토였다.
  • [18] 게다가 야스히토는 이 전투가 첫 전투였다.
  • [19] 게다가 더 심각한 건 프레겔처럼 실전도 안 나갔지만 소장까지 달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결정적인건 이름만 군인이었을 뿐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던 그런대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실전에 엄청구른 사람들보다 전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잘났다, 증말
  • [20] 억류된 포로들은 10년동안 강제노역에 종사했으나, 임금 같은 경우는 비슷한 일을 하는 소련 노동자들과 동일하게 받았다. 징병되어 일본 관동군에 있다가 소련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북한으로 넘겨져 인민군 병사를 하다가 포로가 된후 한국을 택한 한 분은 "노역 때문에 힘들기는 했어도 관동군 때보다는 소련 포로 시절이 훨씬 대우가 나았다."고 증언했다. 소련이 포로대우에 그다지 신경써주지 않는 나라였는데도 그랬으니, 포로보다도 못한 생활을 했던 일본군...
  • [21] 작중 일본군도 많이 터져나가지만, 소련군 전차들도 상당수 터졌다. 그러나 엄폐물 하나 없는 평지에, 그것도 밝은 날에 보병이 닥돌해서 저런 피해를 입힌다는 것 자체는 과장이다. 실제 소련군 전차들이 피해를 입은 경우는 일본군 진지를 돌파하다가 대전차포에 맞고 터지거나 진지내 사각지대를 노린 보병의 공격으로 생긴게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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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07 15: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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