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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 진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 1593년 2월 12일 하루 동안 벌어졌다. 조선 육군의 3대첩으로 꼽히는 이치 전투와 마찬가지로 권율 장군이 총지휘했다. 이때 장군의 나이 56세.
행주 대첩
날짜
1593년 2월 12일
장소
행주산성(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조선 왕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 권율
선거이(병사)
김천일(창의사)
조경(조방장)
허욱(충청감사)
정걸/이빈(수군 지휘관)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츠나리
킷카와 히로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가토 기요마사
나카야 센시로†
아카시 요에몬†
도자키 히코에몬노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병력 4,000여명
(관군 및 의병 연합)
30,000여명
피해 규모 불명

우키다 히데이에의 부상과 큰 피해
정확한 피해 규모는 불명

결과
조선군의 승리 16세기말 우주방어
기타
이 전투의 공으로 권율은 도원수로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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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264.14 KB)]


Contents

1. 전투 전야
2. 전투의 진행
3. 조선군의 승리
4. 그 후의 이야기
5. 오해
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1. 전투 전야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를 거두고 군이 내려오면서 일본군은 후방이 불안해져 북방으로 진출한 부대까지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그러나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진격을 멈추었고 도리어 일본군의 사기가 오르게 되었다.

이런 교착상황에서 일본군은 이 기회를 통해 조선군의 한성 탈환을 저지하고자 했고, 그를 위해 시범타로 강공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한성 탈환을 위해 행주산에 진출하여 있던 전라도 순찰사 권율의 조선군은 다수의 일본군(3만)에 의해 공격받게 되는데, 그 결전지가 행주성(성보단 야전 축성물에 가깝지만)이 되었다. 원래 이곳은 백제시대에 토성으로 활용되던 곳으로 그곳에 목책을 2중으로 두르고 화차(변이중 화차)[1]등을 배치하여 적을 대비하고 있었다. 여기 있던 조선군은 고작 약 3천(2880명)이었는데, 김천일[2]승병장 처영의 의병을 포함한 것이다.

반면 일본의 총대장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였으며, 2군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리장을 받아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도 이 전투에 참가했다. 3만의 대군세를 7개 부대로 나눠 차례로 공격해 왔었는데 1군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2군을 이시다 미츠나리, 3군을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지휘하였다. 그야말로 정예 네임드들.이시다는 멍청이고, 구로다는 뭐... 아버지가 워낙 대단하니....근데 왜 네임드의 명칭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빼놓다니!!!

2. 전투의 진행

이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등을 이용하여 총탄과 나무 등을 쏘아날려서 공격했는데, 그럼에도 일본군은 게릴라나 축차투입이 아닌 무조건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1, 2군이 이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고, 특히 1군은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기에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는 누각을 지어 총포를 쏘아가며 공격했는데 이에 조선군은 화포를[3] 쏴 이를 무력화 시켰다. 대군을 활용해 치고 빠지며 적을 괴롭히는 전술을 써야 그나마 승산이 있는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누각을 짓거나 불화살을 쏘는 등 들이 붓는 방법을 고집하여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나 저때나 하는 짓은 다르지 않다 어택땅이다

1, 2, 3군이 모두 공격에 실패하자 총대장이었던 4군의 우키타 히데이에가 직접 진격하였다. 이런 공세에 조선군도 바깥쪽 목책이 뚫리면서 내책까지 후퇴했다. 전열이 붕괴할 수도 있는 절망적인 상황. 조선군은 총사령관이 있는 중군으로 갖고 있는 모든 화력을 집중시켰으며, 이 화포 공격으로 우키타와 2군의 이시다 미츠나리가 부상을 입으면서 왜군 4진도 물러나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이때 우키타 히데이에는 거의 사망 직전까지 치명상을 입었는데 왜병들이 업고 도망쳐서 간신히 살았다. 이후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지휘하는 5군이 내책에 불을 지르려 하였으나 조선군은 미리 준비해둔 물을 부어 침착하게 막아 적의 노력을 수포로 되돌리며 되려 반격을 가해 킷카와 히로이에가 부상을 입으면서 물러나게 된다.

왜군 6군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毛利秀包)가[4] 지휘하는 군세였는데 서쪽의 비교적 완만한 비탈면을 올라와 공격하였다. 하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던 승병들이 석회 주머니를 터뜨리는 화학전술[5]로 적을 일시 무력화시키고 이를 패퇴시켰다.

위기는 조선군이 아침부터의 싸움에 지치기 시작한 이때부터였다. 이후 6군에 이어 들어온 노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6]의 7군이 승병들이 지키던 서(북)쪽을 뚫고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승장 처영과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군세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일본군은 가히 인해전술로 조선군을 몰아붙였고, 왜군이 장기로 삼는 백병전이었지만 조선군도 이 전투에서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이때 권율은 구리 가마솥을 머리에 쓰고 지휘하다가 지친 병사에게 쓰고 있던 솥을 벗어 물을 따라 주었다고 한다.헬멧의 원조... 사실 이지함이 진짜 원조다

이때쯤, 조선군 앞쪽 진에서도 화살이 모두 다 소모되어 투석으로 맞서 싸웠는데 여기에서 민간인들. 특히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며 패색이 짙어질 때쯤 기적같은 구원이 도착했다. 경기수사가[7] 배 2척에 화살 수만발을 실어 한강을 거슬러왔던 것. 게다가 양천으로 가는 수십척의 전라도 조운선이 지나갔는데 이것이 일본군에게는 조선 수군의 원군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이들이 적의 후방쯤에서 내릴 기색을 보이자 드랍쉽에서 마린이라도 내리면 큰일이라 일본군도 당황하여 비로소 물러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여 백여급을 베어내었다.

3. 조선군의 승리

이렇게 길게 이어지던 전투는 유시(저녁 5~7시 경)가 되어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마무리 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왜군은 후방을 안정시키고 다시 북진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큰 사상자를 내고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가 끝난 후 권율장군은 주위에 널려 있는 일본군의 시체들을 모아 찢어버린 후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권율의 적개심이 폭발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4. 그 후의 이야기

행주 대첩의 승리를 듣고서야 평양으로 회군하던 명나라의 군세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나흘 뒤인 2월 16일 권율은 파주산성으로 군세를 옮겨 정세를 관망하게 된다. 일본군은 파주 공격을 계획했으나 출진 중도에 되돌아갔고, 결국 4월 18일 한성에서 철수하며 일년만에 조선군이 수도를 수복했다. 후에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다.

한편 일본군은 이 패전에 대해 크게 뼈아파한것 같은데 우병사 김응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신이 만나서 대화를 했을때 행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실록

병사가 ‘당신들이 경성에 있을 때 대패한 곳이 있는데, 그때 왜인이 죽은 자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왜사가 ‘과연 경성 서쪽 20리 밖에서 접전하여 승리하지 못하였는데, 전사자가 4백여 인이나 되었다.’ 하기에, 병사가 ‘왜 4백 명이라 말하는가? 당신들이 실어가지 못하고 길가에 버려진 자를 주워 벤 것도 오히려 4∼5백이 넘고 불에 탄 뼈도 산처럼 쌓였었는데 어찌 4백여 인일 뿐이겠느냐?’ 하자, 왜사가 웃으며 ‘전사자가 과연 많았고 부상자도 많았다. 그 당시 제장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각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며 서로 맹세하고 기필코 다시 싸워 보복하려고 근처에 있는 왜병 10여만 명을 불러 모아서 날을 택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조선 장수가 파주(坡州)로 진을 옮겨버렸다. 파주 산성은 공략하기가 행주 산성보다 더 어려웠기 때문에 행군하다가 중도에서 되돌아왔다.’ 하니, 병사가 ‘파주에 진치고 있는 군사도 그 수가 많지 않았는데 당신들의 10만 병력으로 무엇 때문에 중도에서 파하고 돌아갔느냐?’ 하니, 왜사가 ‘행주는 진 밖에 암석이 간간히 있어 위에서 돌을 굴리면 바위 사이에 피신하여 혹 죽음을 면한 경우도 있었지만, 파주의 진은 돌을 피할 곳이 조금도 없어서 이것이 염려되어 결국 싸우지 못하였던 것이다. 조선 장수가 높은 봉우리에 진을 치고 돌무더기를 많이 쌓아 놓는다면 우리 군사는가까이 다가갈 리가 만무하다.’ 하였답니다.

이와 같이 일본군 장수들은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며 복수를 맹세할 정도였으나 결국 반격은 어불성설이고[8] 한양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결국 한양을 버리고 퇴각하게 된다. 여러모로 행주대첩이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는 이야기.

경기도 고양시에는 행주대첩 승전에서 따온 승전로, 권율 장군의 시호인 충장공에서 따온 충장로라는 도로명이 있(었)다.[9]

5. 오해

일반적으로 돌로 된 산성에서 백성들까지 끌어모아 돌로 적을 때리는 처참한 전투를 펼쳤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산[10]에 목책을 2겹 정도로 둘러치고 공방전을 벌였다. 행주 치마는 백성들이 돌을 모으기 위해 입은 치마라 행주치마가 되었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행주대첩이 일어나기 두세대 전인 1517년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와 1527년에 지어진 훈몽자회에 이미 행주치마란 단어가 사용된다.

행주산성 주변에는 민가도 없었고 워낙 급작스럽게 진행된 전투라 야사와는 달리 일반민들이 참가할 기회는 없었다. 전투 자체도 농성전이라기 보다는 회전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행주성은 입구가 좁아 대규모 병력이 한번에 다 들어오지도 못하며 뒤가 한강이라 지형 자체가 호리병 모양의 배수진이 된다. 대략 일본군이 북방과 서방에서 돌아서 침공했고 동쪽과 남쪽이 한강으로 막혀있었다.


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이름값에 비해 영화나 드라마로 영상화된 적이 거의 없다. 가장 최근에 행주대첩을 묘사한 드라마가 80년대 작품인 조선왕조 오백년이다.

1985년 방영된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29회 후반부에서 다루었다. 등장인물들의 발언이나 해설에서는 분명 버려진 토성에서의 전투라고 하는데 정작 화면에는 석성으로 묘사하는 오류를 내기도 했다. 더불어 행주치마 속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전투에 나서는걸로 묘사된다. 비격진천뢰와 화차 등 각종 무기들이 등장하며 이런 무기가 나올때마다 자막으로 이름을 표기하였다. 그런데 본래 왜군측 총사령관이었어야 할 우키타 히데이에가 등장하지 않는 바람에 고작 1군 대장에 불과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7군까지 몽땅 지휘하는걸로 나온다. 다만 왜장들이 부상당한 기록 자체는 참조했는지 중간에 권율이 쏜 화살에 이름모를 왜장 하나가 나가떨어지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부상입었어야 할 이시다 미츠나리는 멀쩡한데다 참전조차 안했다

다큐로는 1992년에 방영한 KBS의 4부작 다큐멘터리가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다큐다보니 조선왕조 오백년 보다 정사의 기록을 충실히 반영해 토성에 목책을 치고 방어하는 모습이 정확히 고증되었으며 행주치마를 두른 민간인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권율이 투구에 물을 담아 병사들에게 나눠주는 모습까지 나오고 우키타 히데이에가 승자총통에 맞고 나뒹구는 모습까지 나오는 등 전투 상황을 충실히 고증해 내었다.

  • 뷁하라는 블로거가 놀라운 고증의 만화를 그린바 있다. # (링크만 허용)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더 포가튼에서 추가 시나리오에 Siege of Haengju라는 제목으로 행주 대첩을 다룬 시나리오가 포함되어 있다. 몰려오는 일본 보병을 포격탑과 성 등으로 방어해야 하는 타워 디펜스 시나리오. 다만 이 게임이 본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모드팩이었는데, 모드팩 버전에만 포함되어 있고, 정식 발매된 스팀 HD판에서는 이 시나리오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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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변이중 화차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공식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다만 변이중 문중에서 펴낸 문집의 묘비명과 화차 설계도, 이정구의 문집에 실린 묘비명, 17세기 중반에 쓰여진 재조번방지 등이 있다. 자료가 아주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정할 정도로 신뢰성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변이중 문집에 실린 화차 설계도를 보면 화차 1대에 승자총통 40자루를 실었다.
  • [2]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대장으로 싸우다 죽는다.
  • [3] 이 화포의 출처는 권율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이순신이 자기가 쓰던걸 권율에게 양도해준 것이다.
  • [4] 여담으로 모리 히데모토는 킷카와 모토하루의 아들로 사촌인 모리 테루모토의 양자가 됐으며, 코바야카와 히데카네는 모리 모토나리의 막내아들로 형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다. 개족보네
  • [5] 혹은 주머니라고도 기록되어있다. 여하튼 석회나 재나 둘다 수분과 접촉하면 열을 동반한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는데 조선군이 이것을 터트리며 노린 것은 바로 일본군의 눈이었다.
  • [6] 이치에서 권율과 한번 싸운바 있다.
  • [7] 이때 경기수사가 정걸이라는 기록과 이빈이라는 기록이 혼재한다. 90년대까지는 정걸 설이 우세했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이빈 설이 우세한 상황.
  • [8] 그 와중에 10만명을 모아서 공격할거라는 허세도 떤다. 실제로는 10만은 황당한 과장이고 한양 주둔군의 병력도 태반이 부상병이었다.
  • [9] 승전로는 2011년 도로명 개편에 따라 중앙로에 통합되어 사라졌다.
  • [10] 사실 행주산은 높이가 100미터 정도여서 산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고 구릉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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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5 15: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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