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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

last modified: 2015-03-24 07:33:31 by Contributors


감성 통역. 레이저는 덤이다. 보아라 나의 눈빛을? 흐와앙?

허재가 농구 허재[1]

불낙 덕후 이거 파닭 아냐? 이게 불낙이야?


원주 동부 프로미 영구결번
No.9 허재

이름 허재(許載)
생년월일 1965년 9월 28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강원도 춘천시
출신학교 용산고 - 중앙대학교
포지션 슈팅가드
신체사이즈 186cm, 80kg
실업입단 1988년 기아자동차 농구단 입단
소속팀 기아자동차 (1988~1998)
원주 TG삼보 엑서스 (1998~2004)
지도자 전주 KCC 이지스 (2005~2015)

1991~1992 농구대잔치 MVP
덕화(기아자동차) 허 재(기아자동차)

강주작(기아자동차)
서장훈(연세대학교)


1994~1995 농구대잔치 MVP
서장훈(연세대학교) 허 재(기아자동차) 김유택(기아자동차)

2002~2003 한국프로농구 모범선수상
임재현(서울 SK 나이츠) 허 재(원주 TG삼보 엑서스) 황진원(서울 SK 나이츠)

1997~1998 한국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 MVP

강동희(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프로출범

허재(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조성원(대전 현대 다이넷)


Contents

1. 개요
2. 선수 생활
2.1. 고교에서 대학 시절
2.2. 실업 농구 시대
2.3. KBL 출범 후
2.4. 국제 대회에서의 허재
2.5. 선수로서의 특징
3. 감독 생활
3.1. 감독 경력
3.2. 감독으로서의 특징
4. 기타

1. 개요

한국의 전 농구선수, 전 전주 KCC 이지스 감독.

한국 농구선수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며 선수 시절부터 농구 대통령, 농구 천재, 농구 9단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었다. 코가 커서 '코재'로도 불린다.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은 포인트가드 - 슈팅가드지만, 스몰포워드 - (국가대표 때 간혹)파워포워드 - (대학 4학년 한정으로)센터도 소화했다. 한 마디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

2. 선수 생활

2.1. 고교에서 대학 시절

용산고 시절부터 차세대 특급 가드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의 큰 스카우트 경쟁이 있었으나 중앙대에 입학했다. 이 과정에서 스카우트 비용 같은 거 없이 중앙대 농구부의 대부 정봉섭과 허재의 아버지인 허준 사이에 상당한 교감이 있었고, 아버지의 의사로 허재가 중앙대에 입학했다고 한다.

연세대나 고려대보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팀 분위기 속에서 온갖 테크닉을 익히고 만들어냈고 이렇게 쌓아올린 것들은 농구대잔치에서 터져 나오게 된다.[3] 당시 갓 출범한 농구대잔치에 처음 참가한 허재는 1학년으로서 팀의 포인트가드를 맡아 경기당 39분 30초를 뛰면서 평균 24득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여러모로 놀라운 활약을 했고,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을 모조리 휩쓸었다.

1985년 농구대잔치에선 성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실업팀들을 제치고 김유택, 한기범과 함께 중앙대 농구팀을 농구대잔치 최종 결승전까지 이끌고 현대전자를 상대로 26득점 17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한국선수 최초로 트리플더블을 달성하기까지 했지만[4], 괴물 이충희의 가공할 득점포와 현대 선수들의 폭력수비와 편파 판정이 더해지며 중앙대는 결승에서 현대에게 격파당했다.[5]

1986년부터는 강동희가 입학하면서 슈팅가드 쪽으로 활약, 강동희와 함께 다시 한번 중앙대 농구부를 농구대잔치 최종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또 한 번 이충희와 현대에게 물을 먹으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대학 4학년 때는 김유택도 없고 한기범도 없는 팀 상황에서 센터 역할까지 하며 활약, 대학농구 대회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전반에만 팀 전체 득점인 54점, 최종적으로 75점을 넣는 기록을 올렸다. 한데 4학년 시즌에는 중앙대가 선수들의 부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며 농구대잔치 출장을 거부했기에 농구대잔치에서의 활약은 없다. 그런데 허재가 없는 만큼 농구대잔치 관중이 줄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이미 허재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2.2. 실업 농구 시대

당시 실업팀들은 계약금으로 몇 억씩을 불러대며 허재를 자신들의 팀으로 스카우트하려 했으나, 허재는 정봉섭 감독의 영향 하에 대학 선배인 김유택과 한기범이 있던 기아자동차에 입단했다. 당시 기아는 이미 연세대와 중앙대의 특급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유재학, 덕화, 한기범, 김유택이란 막강한 선수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허재가 합류하면서 화룡점정이 되었고, 그해 농구대잔치에서 기아는 첫 패권을 차지하며 그야말로 무적의 팀으로 군림했다. 허재 역시 그렇지 않아도 높던 인기가 폭발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 된다.

밴드 백두산 항목에 있는 동영상을 보면 하희라와 함께 국어책 읽기로 MC를 보는 모습이 나오고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남자 선수 대표로서 선수 선서를 하는 등의 것들이 그런 인기를 보여주는 예.

1989년, 1990년, 1991년 기아자동차와 허재의 무적시대는 계속되었다. 1990년에 굴지의 가드 유재학이 은퇴로 팀을 떠났으나 강동희가 빈 자리를 더욱 잘 메우면서 이른바 허동택 트리오를 결성, 기아는 더욱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990년 무렵부터 허재는 매너리즘에 빠진 채 안티 팬들의 어그로를 끌기 좋은 모습들을 계속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연세대, 고려대, 현대, 삼성이라는 전통적인 농구 구도에 갑툭튀한 존재라며 허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거기다 허재의 개인기를 이용한 공격에 대해 '저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면서 반감을 표출하는 해설이 있을 정도로 허재의 농구 스타일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1990년 무렵부터 허재는 XX은행 등의 이름들을 가진 금융권에 속한 약팀들을 상대로 전날 먹은 술이 덜 깬 건지 뭔지 흐리멍덩한 모습으로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면서 골수 농구 팬들의 반감을 이끌어냈고, 그러다가 허재가 있는 팀이 지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 텐데 흐리멍덩하게 뛰다가 경기 막판에야 술 깼는지 정신 차려서 경기에서 승리하고 상대팀은 분루를 삼키며 코트에서 물러나는 양상이 벌어지니 보는 사람들은 더욱 열이 오르게 되었다.

거기다 심심할 때마다 음주사고, 특히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켜 경찰 신세를 지며 언론에 실리기도 했고, 1992년에는 태업과 항명 파동으로 당시 기아자동차의 감독이던 방열을 팀에서 떠나게 만들었으며,[6] 1993년에는 훈련에 임하는 자세와 사생활이 불량하다며 국가대표에서 제외되는 일까지 생기며 더더욱 안티 팬들이 증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시기 허재는 그야말로 "저 개잡놈이 우리나라에서 최고인 농구 선수에요."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을 정도.

허재 선수의 이 시절에 대해서 변명을 해보자면,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라이벌이 없었다. 대부분의 국내 선수보다 한두단계 위였고, 게다가 국내 최고의 가드 강동희와 (서장훈 등장 이전까진) 독보적인 국내 최고 센터 김유택마저도 그의 팀 동료였다. 그야말로 밤새 술퍼먹고 와서 대충 해도 웬만한 팀은 이기는 시절이었고, 우승도 밥먹듯이 하면서 목표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냥 놀아버렸다.

유일하게 그를 막을 수 있을 만한 강동희가 팀 동료였던 게 허재에겐 가장 불행이었다고 평가하는 기자도 있다. 강동희가 다른 팀이였다면 한국 농구의 역사가 대단히 달라졌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허재는 공식경기보다도 강동희와 맞붙는 팀내 연습경기에서 대단한 집중력을 보였다고 한다. 자신과 비슷한 선수들이 즐비한 국제대회에선 그야말로 타 올랐다는 걸 보아도 그렇다.

물론 그런 점을 감안한다 쳐도 술 먹고 사고를, 그것도 음주운전을 상습적으로 저질렀다는 점에선 막장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다. 사생활 관리는 실력에 비하면 많이 아쉬웠다. 물론 결혼 후에는 훨씬 나아졌지만.

최전성기였던 시절은 허재에게 슬슬 위기가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기아자동차 팀 내에서 연세대 출신과 중앙대 출신 간에 갈등이 생겨나면서 기아는 제대로 된 선수 수급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기아자동차의 창단 멤버들이 은퇴해 나가자 전력 보충이 안 되어 허재를 비롯한 베스트 멤버 이외엔 믿을 만한 선수가 없어졌고, 결국 주전 멤버들에게 지나친 체력 부담이 가해졌다. 거기다 김유택이나 한기범은 부상 속에 1990년을 기점으로 크게 내리막길을 쳤고, 허재 역시 1991년 무렵 무릎 부상을 당하며 운동능력을 어느 정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거기다 전체적으로 선수 관리가 부실하던 실업 농구 시대만 해도 한국 나이로 30은 은퇴의 갈림길로 인식되었고, 허재는 그때 기준으로 슬슬 노장 축에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은 1993년 농구대잔치 시기에 폭발, 허재와 기아자동차는 팀 동료이던 정수가 감독을 맡은 학교 후배 중앙대 농구부에게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는 굴욕을 겪고 만다.

이렇게 위기 상황이 오자 허재는 정신을 좀 차리기 시작했고, 결혼을 통해 정신적인 안정을 얻은 것도 허재가 자신의 농구를 추스르는 데 한 몫을 했다. 결국 허재는 1994년 농구대잔치에서 당시 사기에 준하는 주전 라인을 꾸린 고려대를 꺾고 농구대잔치 결승에 진출, 서장훈에게 테러를 가한 덕에 결승에 올라와 김현준이 최후의 불꽃을 태우던 삼성을 상대하게 되었다. 김유택, 강동희가 돌아가며 삼성을 두들긴 후 허재의 좌중을 압도하는 개인기로(3분간 홀로 17득점) 결승을 마무리하며 허재는 여전히 자신의 능력이 대단함을 입증했다.

1995년 농구대잔치는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나는가라고 농구팬들이 생각했던 시즌이었다. 고려대는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전희철이라는 올스타 라인업을 만들어 농구대잔치 정규시즌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상무는 이상민을 필두로 대거 입대한 스타 선수들로 역대 최고 수준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영만이 새로이 합류했지만 기아자동차의 멤버들은 부상과 체력저하에 시달리며 몇 번이나 패배를 겪으며 겨우 겨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플레이오프에서 기아가 살아남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위기가 오자 허재는 정신을 좀 제대로 차렸다. 김유택의 주도로 팀 전원이 머리를 짧게 깎으며 정신을 다잡은 상황에서 허재는 플레이오프 8강에서 SBS를 상대로 50점을 몰아넣으며 자신의 위력을 재차 보여주기 시작, 4강에선 정규시즌 전승을 거둔 고려대를 격파, 결승에선 이상민이 이끄는 상무까지 격파하며 다시 한번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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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허재는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상태에서 또 다시 무면허 음주 운전을 저질러 체포 후 포승줄에 묶이는 꼴을 겪었다. 직전에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음주 파동을 일으켜서 6개월 자격정지를 당한 상태에서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허재는 선수자격정지 및 국가대표자격 영구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당했고, KBL 출범 전 자신이 최후로 출전할 수 있었던 농구대잔치에 출전하지 못했다. 영구징계가 몇 년 후 풀리면서 허재는 1999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루기는 하지만.

하지만 선수자격 정지는 아마농구 선수로서의 자격 정지였기에 프로농구 선수로서는 그냥 뛸 수 있었다.

2.3. KBL 출범 후

1997 프로 원년, 허재는 프로 원년에[7] 포인트가드부터 스몰포워드 역할까지 해내고 외국인 선수를 상대로도 개인기로 농락하는 모습까지 보이며 활약했다. 하지만 팀 내에서 허재는 더 이상 예전같은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기아의 감독인 최인선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드로서 패스를 해줄 선수로는 강동희가 있었고, 주요 득점원으로는 김영만이 있었고, 인사이드 득점원으로는 리프 리드를 비롯한 외국인 선수들이 있었다. 즉 실업 시절처럼 허재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허재는 자신의 비중이 줄어드는 데 반발했지만, 최인선은 프로농구 원년 챔피언결정전 최종전에서 허재를 전혀 기용하지 않고도 팀을 승리로 이끌어 내며 허재가 팀 내에서 잉여물임을 증명해냈고, 최종 결정전에서 관중들은 허재를 연호했으나 허재는 단 1초도 코트 위에 서지 못했다.

97-98 시즌, 허재는 기아자동차를 떠나기로 맘먹고 그 이전에 자신의 힘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 명예롭게 떠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챔피언 결정전 상대인 이상민니 맥도웰이 버틴 현대는 사람들이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했고, 기아는 외국인 선수 스틴 피닉스의 태업으로 인해 인사이드에서 절대 열세에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허재는 플레이오프에서 오른손 손등이 부러지는 부상까지 당했다. 기아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허재 스스로가 이 이상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의 결승전에서, 허재는 자신이 왜 농구 대통령이란 소리까지 들었는지를 증명했다. 인사이드에서 절대 우세에 있는 현대가 허재 단 한 사람에게 휘둘리며 패배를 거듭했고,[8] 오른손에 깁스를 하고 눈덩이가 찢어져도 코트에서 달리고 득점하는 허재를 보고 허재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말을 잃을 정도였고, 기아의 팬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9][10] 하지만 7차전에 이르면서 허재가 자신의 모든 걸 짜내는 데도 한계가 왔고, 결국 허재는 팀을 우승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챔피언 결정전 MVP는 우승팀의 선수가 아니라 허재였다. KBL에서 챔피언 결정전 MVP가 준우승팀 선수 중 나온 일은 이 때가 유일하다.

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허재가 올린 스탯은,
  • 1차전 : 29득점 5리바운드 6어시스트 5스틸
  • 2차전 : 30득점 2리바운드 11어시스트 5스틸
  • 3차전 : 21득점 3리바운드 5어시스트
  • 4차전 : 27득점 3리바운드 1어시스트 5스틸
  • 5차전 : 17득점 8리바운드 3어시스트 2스틸
  • 6차전 : 22득점 3리바운드 6어시스트 4스틸
  • 7차전 : 15득점 6리바운드 13어시스트 4스틸

허재는 한국 나이 서른네살, 전성기가 지나 은퇴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던 나이에 이런 기록을 올렸다. 어떤 신문 기사에서는 이런 허재의 모습을 보고선 '마치 상처입은 사자가, 다른 맹수에 포위당한 채 공격을 당하면서도 결연하게 싸워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라고 썼을 정도.

시즌 후 허재는 정인교와 트레이드되어 나래 블루버드로 팀을 옮겼고,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면서 활약을 펼쳤다. 누가 막아도 상대가 어느 팀이라도 허재 단 한 명의 힘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지만, 이미 허재는 시즌 내내 그런 활약을 펼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패배가 쌓여가면서도 허재는 자신의 힘으로 이룬 우승을 맛보겠다며 코트 위에서 버텨 나갔고, 코트 위 최고의 노장이 되어가면서도 자기 관리 속에 활약을 하고 자신이 부족해진 걸 인정하며 팀의 요구에 허재는 자신을 맞추어 갔다.

그러던 끝에 마침내 김주성이 드래프트로 입단하고 이비드 잭슨이 팀에 합류했고, 허재는 공격기술이 부족한 김주성에게 포인트가드로서 최고의 패스를 공급하고 데이비드 잭슨을 어르고 달래며 팀을 승리로 이끌어갔다. 김승현르커스 힉스가 있는 전 시즌의 우승팀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상대로 허재는 코트 위에서 갈비뼈가 부러져가며 투혼을 불살랐고, 결국엔 KBL 우승을 맛보았다.[11]

2003-2004 시즌이 끝난 후 은퇴했다. 프로 이후 15점에 달하던 평균 득점이 8점대로 떨어지는 등 체력적 노쇠는 명백했기에 은퇴는 어느정도 예정된 것이었다. 팀도 은퇴식까지 크게 치뤄주고, 프로에선 세 번째로 허재의 등번호인 9번을 영구결번으로 해주는 등[12] 축복을 받은 명예로운 은퇴였지만, 은퇴는 팀이 허재도 모르게 발표했고 허재는 결국 그것에 따랐다는 말이 있다.

2.4. 국제 대회에서의 허재

대학생 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 강동희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국가대표 포인트가드를 맡았다. 포인트가드를 맡는 한편 상황에 따라 파워 포워드까지 맡아야 하기도 했으며, 장신인 팀을 상대로도 위력적인 돌파를 잘 선보였다. 이충희와 함께 88 올림픽 당시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활약한 건 당시 활약이 동영상으로 돌면서 나름 농구팬들 사이에 알려진 편.

한데 포인트가드를 맡았으면서 다른 팀원의 공격보다 자신의 공격을 우선시해 팀을 패배하게 한 일도 있다고 비판도 받으며, 이충희가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경기 도중 자신에게 공격 기회가 왔는데 허재가 그걸 무시하고 자기 공격을 하다 실패했고 결국 중국에게 졌다며 허재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강동희가 국가대표가 된 이후론 슈팅가드 자리에서 뛰었다.

아시아 대회, 특히 중국을 상대로는 다소 성적이 좋지 못했다. 중국한테는 어떻게 이겼는데 필리핀에게 패배하며 우승을 놓친 일도 있고, 아시아선수권 결승전에서는 중국을 상대로 맹활약하다 중국 선수 후웨이동에게 나가떨어지고 결국 한국팀이 패배한 적도 있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결승에서 그래도 팀을 이끌며 중국을 추격하다 5반칙 퇴장당하고 결국 패배하기도 하였다.

허재는 여러 모로 대한민국 에이스다운 활약을 했다. 중국 대표팀에게 몇 번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아시아선수권이나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쟁취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 이런 점에서 결국 허재는 한계가 있는 선수라며 비판받기도 하였는데... 농구가 혼자 하는 스포츠던가?(…) 허재가 없던 1997년 대표팀이 아시아선수권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지만, 그건 별개의 이야기.

예나 지금이나 아시아 top3 레벨인 중국 대표팀이 에이스킬러 짓을 불사할 정도였다는 건 허재가 어느정도 레벨의 선수였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렇다고 허재만 중국에게 고전한 게 아니라 아시아 최강 중국을 상대로 한국대표팀의 승률 자체가 원래 높지 못했다. 대표선수로서 중국과의 경기에서 2승이상 거둔 선수는 근 30년간 통틀어봐도 몇 되지 않는다.(허재 85ABC 및 88올림픽에서 중국에게 2승을 거둠. 특히 85ABC 준결승전은 역대 중국전 승리 중 전후반 개별스코어 모두 앞선 유일무이한 완벽한 승리였다. 85ABC의 필리핀과의 결승의 경우 당시 필리핀은 미국 흑인용병 둘을 포함시킨 변칙적 팀이었다. 그런 미국 흑인용병둘이 모두 뛰던 필리핀을 상대로 연장접전끝에 아쉽게 분패했던 전력이었다.그리고 허재가 대표팀에서 뛰던 시절 중국과의 승률은 높지 않지만 20점 이상 맥없이 무너지는 경기는 허재가 제대로 뛴 경기에서는 없었다.)

이와 달리 세계 대회에선 괜찮은 모습을 보인 편. 1990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FIBA 농구 월드컵 순위 결정전에서 이집트를 상대로 62점을 올린 건 FIBA 농구 월드컵 역사상 개인 경기 득점 기록 중 1위로 2020-06-07 현재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피바에서는 아직도 54점으로 나와있으나 정확히는62점이었다. 아키이브피바싸이트가 과거의 기록을 재정리했다는 의의는 있지만 그 과거기록중에 오류도 상당히 있긴 하다. 어쨌든 월간 루키 2014년 9월호에서 이 62점을 언급했다.

그리고 1994년 캐나다 농구 월드컵에서도 19점대의 득점을 차지하는 한편 돌파 이후 빼주는 패스로 서장훈의 중거리슛이나 문경은의 3점슛 기회들도 만들어 냈다.

하지만 90년 FIBA 농구 월드컵에서 팀의 주 득점원임에도 미국 상대로 단 9점에 그치며 67-146 대참패의 원흉 증 한 명이 되거나, 76-119 참패를 거둔 그리스 상대로 단 4득점에 그치거나, 순위 결정전에서 86-124로 참패한 캐나다를 상대로 단 2득점을 기록하는 등등 부진했던 경기도 자주 있었다. 그래서 그냥 몇몇 기록만 가지고 허재가 세계구급 선수라고 주장하는 건 지나치게 띄우는 게 될 수도 있다.

다만 허재의 62점 기록 덕분에 그나마도 1990년 대회에서 한국은 이집트를 117-115로 이기며 겨우 1승이라도 거두고 이집트를 제치며 15위를 기록하며 꼴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더불어 허재가 문제이니 뭐니 따지는 게 헛소리라는 반론도 얼마든지 많은데 허재나 한국을 늘 덜미잡던 중국도 90년 월드컵 조예선 및 순위결정전에서 호주와 유럽팀들에게 두들겨 처맞고 순위결정전에서 그다지 강호라 못할 베네수엘라에게 4점차 석패를 당한 걸 빼고 겨우 이집트와 한국을 이기고 한국 다음인 14위를 차지했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이나 중국이나 도저히 북미나 유럽을 이길 수 없고 그렇게 고전했던 게 당연했다는 분석이다.

그렇기에 허재 이후, 국제 대회에서 정영삼의 반짝 활약 외엔 허재만큼 위력적인 돌파로 팀의 숨통을 틔워준 선수가 없다. 1994년 월드컵 대회에서 한국은 이집트와 앙골라를 이겨본 뒤로 1998년,2014년 대회에서 전패를 기록하며 1승을 거두고 있지 못하고 있다. 만만해보이던 앙골라에게도 2014년 참패를 당했을 정도이니 반대로 말하자면, 한국 농구가 갈 길이 아직 멀었다는 거다. 그나마 김선형 정도가 특유의 스텝과 속도로 조커 역할을 해주는 중.

2.5. 선수로서의 특징

역대 한국농구 선수 중 최고의 테크니션.

기본기에 충실한 드리블부터 페이크 동작을 섞은 화려한 드리블까지,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유로스텝이라고도 하는 지그재그 드리블에 순간적인 스핀 무브에 크로스오버까지 온갖 드리블 기술을 능숙하게 썼다.

왼손잡이임에도 오른손잡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오른손을 잘 썼고,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좌우 어디로도 돌파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돌파한 후 양손을 사용해 어느 방향으로든 레이업을 올려 넣었으며, 높은 점프 후 체공 시간을 이용한 더블 클러치는 그만의 특기. 비슷한 수준으로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선수를 한국 내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다.

드리블과 스피드를 살려 볼을 잡자마자 순간 단독 속공으로 치고나가면 두세명의 수비수가 있어도 상대 팀은 파울이 아니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패스의 경우 돌파 능력과 연계해 수비수를 모은 후 밖으로 빼주는 패스부터 해서, 인사이드로 안정적으로 넣어주는 엔트리 패스, 감각적인 노룩패스, 속공 상황에서 빠르게 앞으로 찔러주는 패스까지 각종 패스도 훌륭했다. 특히 운동능력과 농구 센스가 좋은 동료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 거기 딱 맞춰서 빈 공간에 빠르게 넣어주는 패스가 일품.

이런 패스와 드리블 능력 때문에 슈팅가드로서가 아니라 포인트가드로서의 허재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허재가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서 허재의 이러한 패스 능력은 더욱 빛을 발했고, 은퇴 직전까지도 팀 내에서 가장 패스 잘 하는 선수는 허재였다.

한편 운동 능력을 살려 위로 확 솟구치는 듯이 쏘는 점프슛부터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 풀업 점퍼 등 각종 슛에서도 출중했다. 물론 슛 정확도로 치면 이충희같은 괴수보다는 밀리지만.

역대 가드 포지션의 선수들 중 최고의 포스트업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스트업 기술이 웬만한 센터보다도 나을 정도. 은퇴 직전에 이르러서도 포스트업으로 손쉽게 득점을 해내기도 했다. 은퇴 직전 즈음 되면 계속 포스트업을 할 체력이 없는 게 문제였지만 나이를 먹었으니….

거기다 공을 가진 상태에서의 공격만이 아니라 공이 없는 상태에서의 움직임도 탁월했고, 항상 호흡을 맞춰 온 강동희김유택이 찔러 주는 패스를 받아 백도어 플레이를 해내거나 같은 팀의 스크린을 이용해 빠져나온 후 슛을 넣는 전형적인 슈터 플레이에도 능했다.

일대일 수비와 상대 패스의 맥을 읽고 중간에 끊어내는 스틸에도 능했고, 특히 스틸은 역대 최고 수준.

이런 기술들을 떠받친 게 허재의 신체 조건이다. 188이란 키는 2000년대 기준으로도 슈팅가드로서 작다 할 수가 없는데 허재가 대학 다니던 무렵만 해도 180대 후반의 인사이더가 흔했다. 즉 허재의 대학 시절로 치면 센터를 봐도 되는 키였던 셈.

물론 허재 이전에도 신동찬이란 190대 포인트가드가 한국에 있었고 허재 이후에도 일단 은희석이나 기타 몇몇 선수 등 포인트가드에서 슈팅가드에 걸쳐 허재급의 키를 가진 선수가 없었던 건 아니나, 허재는 비슷한 덩치의 선수들을 압도하는 스피드와 점프력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다.[13] 거기다 원래 탄탄했던 몸에 계속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더 붙여서 힘까지 좋았다. 그런데도 유연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운동능력만 치면 허재 이상의 선수들이 있고 키만 치면 허재급의 키를 가진 선수가 여럿 있는데, 키와 운동능력과 힘의 조화로는 허재가 성인 농구계에 등장한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이후 허재급이라 할 만한 선수가 거의 없다. 그런 하드웨어에 최고의 기술이 겸비되었으니 저런 활약을 했던 것.

거기다 위기에 몰릴수록 강해지는 정신력이 몸과 기술을 이끌었다. 권투선수 생활을 한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스파르타식 단련을 받은 탓에 마치 헝그리 복서같은 정신력과 독기가 길러졌고,[14] 패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독기는 허재가 선수 생활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헤쳐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90년대 초의 나태함 이전에는 연습벌레로도 유명했다. 양손 드리블을 제대로 하겠다고 한쪽 손을 묶어놓고 연습을 하는 기행에 가까운 연습도 했고, 스스로 머리를 삭발하고 연습만 하기도 했다. 술먹고 들어오든 놀다 들어오든 그날 분 연습은 꼭 해야 잠이 오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각종 기술들도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 NBA 쪽 비디오 등을 참고하며 자신만의 연습으로 만들어 나갔고, 그외 여러 기술들도 누군가의 가르침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 익혀나간 게 많다. 그야말로 천재란 별명에 걸맞는 모습.

3. 감독 생활

3.1. 감독 경력

은퇴 후 해외 유학을 한다 하더니, 코치도 거치지 않고 2005년부터 전주 KCC 이지스의 감독을 맡았다. 다들 허재가 원주 TG에서 코치를 밟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의외였던 사건. 이렇게 감독을 맡게 된 데는 은퇴 과정에서 TG 측에 안 좋은 감정이 생겼고 KCC 팀의 프론트가 허재의 용산고 선배란 점 때문이 아닌가 하는 말이 있다. KCC 구단주인 정몽익 사장이 용산고 출신이라서 아마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감독을 맡은 첫 시즌인 05-06 시즌에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끄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상민을 비롯한 팀내 고참들의 힘이 더 컸다는 의견이 많고, 다음 시즌에 팀을 정규시즌 꼴지라는 나락으로 빠트리며 역시 초보감독이란 말만 들었다.그리고 허재 감독은 이때의 충격으로 머리를 새하얗게 태웠다(...) 서장훈이 합류한 덕에 07-08 시즌에는 정규시즌 2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0:3으로 탈락, 선수 덕만 보는 모자란 감독이란 말만 더욱 들었다.

나락으로 빠졌던 시즌에 얻은 픽으로 하승진을 뽑는 희대의 운으로 수명 연장을 한 허재였으나, 하승진이 합류한 08-09시즌, 팀은 서장훈의 불만과 하승진의 능력 부족과 부상이 이어지며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들었다. KCC 이지스는 패배를 거듭했고 허재의 감독 생활이 끝났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데 허재는 서장훈을 트레이드해 강병현을 얻어오고 신명호를 적극 기용하면서 앞선 압박과 속공으로 시즌 중에 극적으로 팀 컬러를 변화시키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 성공하더니, 하승진을 구슬리고 관리해 내면서 하승진까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게 하는데 성공, 결국에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야 만다.

그리고 대망의 09-10 시즌 직전...
운빨 종결자.jpgee[15]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09-10 시즌에는 혼혈 선수 드래프트에서 1순위를 잡는데 성공하며 1순위로 전태풍을 뽑아 팀을 강화했다. 하지만 전태풍과 전체적인 팀이 겉돌면서 시즌 초 팀은 침체에 빠졌으나, 성격 더럽고 실력 좋은 외국인 선수 이반 존슨을 어떻게든 활약하게 하고 레더까지 트레이드로 영입해 활용, 거기다 전체적인 팀워크까지 점점 좋아지면서 하승진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상황에서도 팀을 준우승까지 이끌어 냈다.

10-11 시즌, 시즌 초 KCC 이지스는 하위권을 맴돌았으나, 시즌 중반이 되어 가면서 시즌 초의 성적이 거짓말인 것처럼 성적이 반등, 허재는 다시 한번 감독으로서 우승을 맛보는데 성공했다.

KBL 우승팀이 대표팀 감독을 맡는다는 암묵적인 룰에 따라 올릭핌 출전권이 걸린 2011년 아시아선수권 국가대표 농구팀 감독을 맡았다. 중국전에 패배하는 등 여러 모로 아쉬운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일단 아시아선수권 3위를 하면서 올림픽 최종 예선을 통한 본선 진출이라는 별로 가망 없는 희망은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11-12 시즌은 정규리그 4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울산 모비스 피버스에게 6강 플레이오프에서 0:3으로 떡실신.

2012년 7월 27일 또다시 허재의 복코가 빛을 발했다. 1.5%의 확률을 뚫고 외국인선수 드래프트 1순위를 따낸것. 그리고 커트니 심스를 지명했다.

12-13 시즌에는 하승진의 공익 입대와 전태풍고양 오리온스 이적, 추승균의 은퇴 등으로 팀 전력이 심하게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커트니 심스, 김태홍, 장민국 등등이 부상으로 드러누웠다. 심스는 그래도 빨리 복귀했지만, 결국 부상으로 얇아진 팀 뎁스 강화를 위해 서울 SK 나이츠로 트레이드되었다. 사실상 리빌딩 시즌으로, 예상대로결국 꼴찌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래도 커트니 심스를 서울 SK 나이츠에게 내주고 대신 데려온 김효범이 득점원이 되어주고 박경상이 성장하는 등의 성과는 있었다. 강병현도 제대 후 5라운드에서 5승4패를 하면서(4패는 상위3팀과 동부)복귀하여 팀에 청량감을 안겨줬다.

2013년 9월 30일 이루어진 신인드래프트에서는 2순위로 경희대 빅3 중 한 명인 김민구를 지명했다. 복코 노쇠화 내심 원하던 김종규는 1순위 지명권을 쥔 창원 LG 세이커스가 가져갔다. 대신 삼성이 1.5%를 뚫고 KT를 밀어내고 4순위가 되었다.

14-15 시즌 도중인 2015년 2월 9일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자진사퇴 한다"고 밝혔다. 사실 시즌 초반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흰머리와 주름, 힘겨워 보이는 듯한 모습이 많았다. 선수들의 실책이 쏟아져도 레이저를 쏘면서 불호령으로 선수들을 다잡고, 심판과도 맞장을 뜨면서 각을 세우던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선수들을 나긋나긋하게 달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여러모로 허재 감독이 지쳐보인다는 평가가 많았다.

3.2. 감독으로서의 특징

08-09 시즌 중반까지는 고등학교 인맥으로 된 감독이라거나 훌륭한 선수가 훌륭한 감독이 되지 못하는 좋은 예 중 하나라는 등의 말을 들으며 여러모로 욕을 먹었고, 작전타임에도 자신의 선수 시절만 생각하며 성질만 부리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다 시즌 중반의 대변신 후 팀을 우승시키고는 그 뒤 한 번의 준우승과 또 한 번의 우승까지 거두고, 하승진을 관리해내고 하면서 감독으로서의 평가가 많이 올라간 편.

앞선 가드들의 압박과 변칙적이기까지 한 수비 변화를 잘 쓰고 이렇게 잘 짜인 수비로 상당한 재미를 보는 편. 다른 건 몰라도 허재의 수비 작전 하나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는 수비 작전은 허재가 아니라 다 외국인 코치가 짜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공격작전 면에선 딱히 좋은 작전을 보이는 건 아니나 국내 선수라 해도 일대일 공격을 맡기는 등 선수들에게 자신감 있고 적극적인 공격을 주문하는 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부분.

극단적인 단신 라인업을 쓰는 한편 하승진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장신 라인업으로 선수를 기용하는 일도 많은 편. 슈팅가드나 포워드 보는 선수에게 인사이드 수비를 맡기는가 하면 센터 포지션의 선수를 스몰포워드로 돌리기도 했다.

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져있거나 무명이라 하더라도 자신있게 계속 뛰라며 밀어주고, 그렇게 해서 선수들의 활약을 이끌어낸 일이 많다. 허재의 양아들 KCC가 시즌 초반에는 하위권을 맴돌다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는 패턴을 반복해서 보여준 데는 허재가 저런 식으로 선수들을 이끈 덕이 크다. 허재의 드래프트 멍청이짓의 결과라는 말까지 듣던 신명호는 이런 허재의 밀어주기로 성장한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고, 데뷔 초기 키 큰 일반인 소리까지 듣던 하승진이 제몫을 하게 된 데도 이런 선수 기 살리기가 한 몫 했다. 대학교 후배 밀어주기냐는 비아냥을 듣던 이중원을 쏠쏠히 써먹거나 강병현 트레이드의 잉여물 취급을 당하던 정선규도 활용해내는 등 보기보다 선수의 활용폭이 넓은 편.

하지만 일단 눈 밖에 나면 완전히 외면하기도 하고, 공격에서 적극성을 보이는 정도를 넘어서 지나치게 팀을 해치는 플레이를 하면 벤치에 주저앉히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이런 저런 경기 중 돌발 상황에서 작전 타임동안 작전을 짜내 써먹는 데는 아주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감독으로서의 경력이 몇 년 쌓이면서 이런 면에서도 초기에 비하면 준수해졌다.

감독 자리에서 잘릴 뻔한 몇 번의 위기를 넘기고 성장한 건 결국 KCC 구단이 고등학교 학연으로 허재를 밀어준 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감독이 선수에게 이기는 게 아니라 선수에게 맞추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잘났다고 하면 안 된다고 우승 후 인터뷰에서 말을 했다. 참고로 이때 같이 인터뷰한 강동희는 "난 이전부터 다 맞추면서 살았잖아요. 형은 누구를 위해 기분을 맞추고 상대의 감정을 읽으려 한 적이 없었어요. 왜냐고? 농구대통령이었으니까. 난 2인자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맞춰가는 데에 익숙한 편이에요." 라고 했는데 강동희의 이 말이야 말로 현역시절의 허재를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한 마디다. 하지만 지금은...

4. 기타

KBL 출범 이후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우승을 맛본 최초의 인물이다.[16]

소위 '허동택 트리오'를 이루었던 강동희, 김유택과는 은퇴 후로도 자주 교류하였다. 특히 강동희와 농구를 넘어선 인간관계 교류가 짙었다. 10-11시즌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서로 의가 상하지 않게 판정에 대한 항의를 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을 정도. 하지만, 강동희는 이후 친구의 뒷통수를 거하게 때린다. 그럴 애가 아니라는 말이 무안해질 정도로.

1988 서울 올림픽 때 남자 선수 대표로 페어플레이 선서를 했던 사람이 바로 그 였다. 그런데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개회식 방송을 못 본 90년생들부터는 이 사실을 잘 모른다.

프로선수 시절 상대 팀들이 허재를 막기 위해 폭력을 불사하는 거친 수비를 한 일이 많고 그 때문에 코트 위 폭력사건에 휘말린 일이 많다. 한데 때린 일은 거의 없고 맞기만 많이 맞은 편. 다혈질로 정평이 나있지만 정작 남을 때리지 못하는 성격인듯 하다.

허재가 얽힌 폭력 사건으로 유명한 게 1990년 기아와 현대의 농구대잔치 결승전에서 벌어진 허재와 임달식(현 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 감독) 사건. 허재를 마크하던 임달식이 스크린을 걸면서 허재에게 팔꿈치 공격을 가했고, 심판이 그냥 넘어가 버리자 이거에 맞은 허재가 임달식에게 머리를 들이대며 소리를 질렀으며, 그러자 임달식이 냅다 주먹을 허재에게 휘두른 것. 그런데 허재는 일단 맞기만 했는데 심판이 동시 퇴장을 선언했고, 이 때문에 허재가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자 현대의 센터인 김성욱이 냅다 달려와 허재에게 주먹을 휘두르면서 코트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던 게 당시 사건이다. 허재 입장에선 억울하게도 허재는 맞았는데 원인 제공자라며 6개월 선수 자격정지를 당했고, 임달식은 1년 자격 정지를 받아 직후 은퇴를 했다. 에이스 킬러

1991년에는 당시 현대의 선수이던 김광에게 경기 중 얼굴을 얻어맞아 전치 3주의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선 아예 김광을 형사상 고소하기도 했으며, 김광은 구속처리되었다. 한데 이렇게 고소까지 했던 김광을 허재는 코치로 받아들여 2010 - 2011시즌까지 KCC 이지스에서 함께했다. 어?

코트 위 폭력 사건으로는 맞은 일이 많지만 허재의 성격이 좋은 말로 화끈하고 나쁜 말로 욱하는 성격이란 말은 나름 유명한 편. 선배라 해서 가리지 않고 성질을 내며 들이댄 일도 많고,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한 일도 많다. 그래도 결혼 후 아내까지 부끄러워지니 성질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방송에서 말한 일이 있고, 감독이 된 이후로는 성질을 정말 많이 죽였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술 관련해서 사고를 친 일이 꽤나 많다. 선수 생활 부분에서 언급했듯 90년대 초에는 술 관련 사고로 꽤나 언론을 탔고, 역대 한국 운동 선수 중 술 관련 사고로 언론에 오르내린 횟수가 제일 많은 선수가 허재일 거라는 말까지 있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해서도 음주 사고로 선수생활 6개월 정지라는 징계를 당했다. 1996년 일의 경우 언론의 과장이 있었고 과한 음주도 없었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숙소를 빠져나가 술 마셨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으니. 이러한 사고들 때문에 2000년대 이후처럼 인터넷이 많이 발달한 시대였으면 서장훈 이상의 안티팬을 만들었을 거라는 말이 있다. 감독이 된 후인 2009년에도 음주 폭행 시비에 휘말린 일이 있다. 헌데 이때는 폭행이 없었다는 증언들이 나와 무혐의로 풀려나면서 징계나 다른 큰 일 없이 넘어갔다.

실력뿐만 아니라 술 또한 농구계의 전설이지만, 야구에도 실력뿐 아니라 술로서도 전설인 선동열과 친분이 있었다. 당연히 둘이 대작을 했는데, 허재의 패배. 그 술이라면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허재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도망친 것이다. 허재는 이때 일을 회상하며 난생 처음 '술먹고 죽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또 박한 전 고대 감독과도 일본에서 술내기를 했다가 진짜로 죽을 뻔했다고. 주신은 따로 있었다나.

한편, 술 말고도 허재가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생사탕이다. 캔디(砂糖)가 아니다. 비얌~(蛇湯)이다. 허재의 아버지인 허준 옹은 허재를 최고의 농구선수로 키우기 위해 아들 뒷바라지를 열심히 했는데, 스태미너를 키우기 위한 보양식으로 1년에 한 번은 뱀을 고아서 먹였다고 한다.(...)

아내인 이미수 씨와의 인연도 재미있는데, 부산의 상류층 규수였던 이미수 씨는 다른 남자와 맞선을 보려고(...) 어머니와 호텔에 갔다가 우연히 허재와 처음 만났다고 한다. 허재는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반해서 먼저 대시해서 매일같이 연락을 하곤 했는데, 정작 그녀는 스포츠에 관심이 없어서 허재가 그렇게 유명인인줄도 몰랐다고 한다.(...) 게다가 둘이 결혼하기로 했을 때는 이미수 씨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녀의 형부들은 유명인인 허재의 다혈질에 대한 악명(?)을 다 알고 있었던데다가 오빠는 하필이면 허재의 농구 라이벌 학교였던 고려대학교 출신이었던 것도 한몫했던 듯. 하지만 이미수 씨의 어머니는 정작 허재를 직접 만나보고는 남자다워서 마음에 든다며 결혼을 허락했다.

두 아들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두 농구 선수이다. 허웅허훈. 허웅은 슈팅가드로 아버지가 나온 용산고등학교를 거쳐 중앙대로 가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연세대에 진학했고, 두 살 아래인 허훈 또한 형과 똑같이 용산고를 거쳐서 연세대에 진학하게 됐다. 둘 다 가드인데 형인 허웅보다 동생인 허훈이 더 커리어가 뛰어나며, 객관적인 평가에서 허훈이 앞선다는 평을 받고 있다. 허훈은 이미 소년체전 때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니까. 물론 허웅도 허훈만큼은 아니더라도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어서 연세대에서 팀의 득점원으로 활약, 빠른 성장세를 보이면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허웅이 2014년 신인드래프트 대상자가 되면서 과연 KCC에 갈 수 있을지 주목을 모았는데, 이에 대해 허재는 "마침 우리 팀에 웅이 자리가 딱 비어있긴 하다. 한 4순위 정도로 뽑히지 않을까 보고 있다."는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허재는 4픽을 뽑았다(...) 그러나 허웅이 아닌 고려대 김지후를 지명했다. 대신 허웅은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팀에 지명 되며 내년 시즌 부자대결을 기대하게 했다. 부인은 이제 누구를 응원할지...

그리고 배구계에 도플갱어가 있다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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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표적인 언어유희. 2000년 MBC 시트콤 세친구에서 정웅인, 윤다훈 등이 농구관람 때 술 안 먹기로 한 에피소드에서, 술을 물통에 담아온 옆의 관객에게 얻어먹고 취해있을 때 농구공이 다훈이쪽으로 오자 공을 잡고 행패를 부릴 때 한 대사.
  • [2] 중국 기자들의 같잖은 개드립에 분통을 터트리며 한 말이다. 그리고 기자회견장에서 바로 나가버렸다. 곁에 있던 통역관은 거시기했는지... 그냥 No Comment로 통역을 해버렸다. 허재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에피소드. 그런데 그 후 주기적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중국의 기자가 아니라 기레기들이 K리그의 감독들에게 이런 식의 개드립같은 질문공세가 심해지자 이 발언이 다시 재조명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 외적으로도 개소리를 뱉어내는 사람들이 생기면 "허재 감독 데리고 와라!" 라며 유행어처럼 자리잡게 된다.
  • [3] 중앙대 농구부는 허재를 위해, 그가 입학할 무렵 저학년은 팀 연습 끝난 후 개인연습을 하고 고학년이 뒷정리를 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이는 계속해서 중앙대 농구부의 전통이 되었다.
  • [4] 이 허재의 트리플더블 기록은 완전히 잊혀져 있다가 2012년 들어 대한농구협회가 지난 시절의 기록들을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 [5] 한편 이 결승은 이충희의 가공할 득점포가 최고 승리 원인이긴 해도 현대 선수들의 폭력을 동반한 수비와 신경전, 그런 폭력을 묵인한 편파 판정이 상당한 물의를 빚은 경기이기도 하다. 당시 중앙대 측이 너무한 판정에 항의하며 경기 막판에 우두커니 서서 경기를 포기하기까지 했으니.
  • [6] 항명 파동이 벌어진 코리안리그 대회 자체는 당시 허재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고 김유택은 간통 사건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등, 당시 기아자동차 선수들이 일부러 태업했다거나 허재가 태업을 주도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허재가 선배들도 많은데 자신이 항명을 이끌 위치도 아니었다라고 말을 한 일도 있다. 그러나 항명 파동과는 별개로 허재가 방열 감독에 대한 팀내 불만을 주도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있으며, 방열 전 감독도 허재가 자신에게 반항했다는 뉘앙스로 인터뷰를 한 일이 있다. 1988-89 농구대잔치에서 유재학이 MVP를 받은 일로 비롯된 기아자동차 내의 연세대와 중앙대 파벌 싸움의 결과물이라 보는 사람도 있다. 허재는 어쨌든 팀의 에이스였기 때문에 이에 자유로울 수 없었을 수도 있다.
  • [7] 여담인데 기아팀은 프로농구 개막 전 마지막 농구대잔치 리그에서는 7게임을 전패하기도 했다.
  • [8] 물론 허재가 독보적이었다뿐이지 다른 선수들도 자기 역할을 다 해주었다. 예를 들어 김영만은 꾸준히 20점 넘게 득점하여 허재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골밑도 클리프 리드와 김유택이 분전하여 열세이긴 해도 완전히 밀리지는 않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다.
  • [9] 오죽하면 허재가 오른손에 한 깁스가 정말 부상당한 게 아니라 페이크로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허재는 당시 챔피언 결정전이 끝나고 장기간 병원 치료를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거기다 페이크고 아니고를 떠나서 깁스를 하면 당연히 맨손보다 공 다루기가 크게 불편해진다.
  • [10] 이 당시 IMF사태가 터져 기아자동차가 오늘 망하나 내일 망하나 하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농구단이 이렇게 대박을 터뜨려줘서 기아자동차 임직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히 경기장은 연속매진. 언론보도의 비중도 농구가 야구보다 많았던 몇 안되는 사례다.
  • [11] 이 우승은 오리온스 입장에선 계시기 작동 오류로 승리를 도둑맞은 천추의 한이 남는 경기이기도 하다.
  • [12] 허재를 프로농구 현역 선수 중 첫 영구 결번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프로농구에서 현역 생활을 하고 처음으로 영구결번이 된 선수는 김유택이다. 두번째는 故 김현준 코치.
  • [13] 운동능력 덕에 대학 때만 해도 경기중 덩크를 했는데, 운동능력 떨어진 90년대에 와선 대표팀에 소집되어 훈련 중 덩크 시범 보인다고 하다가 부상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참고로 농덕 사이에서는 허재가 덩크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로 말이 많은데, 대학 시절에는 분명히 가능했고 사진도 있다. 단, 그게 중앙대 학보라 도서관까지 가야만 확인 가능하지만...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농구 대통령 소리 듣는 사람이 젊었을 때 덩크가 안 될 정도의 피지컬이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 [14] 이후에도 중앙대시절때 경기에서 질때마다 의기소침해있던 허재를 중앙대선배들이 "진게 문제가 아니라 져서 기죽어있는게 보기가 싫다"라며 마구 갈궈댄게 독기를 제대로 길러냈다.
  • [15] 09-10 시즌 혼혈 선수 드래프트에서 일어난 장면. 뽑는 순서가 제일 마지막이었는데, 앞의 9개 구단이 모두 1순위가 걸리지 않는 희대의 상황이 연출되며, 뽑기 한 번 안 하고 1순위를 차지했다. 눈앞에서 좌절하는 사람은 김상식 당시 오리온스 감독.
  • [16] 97 원년 기아, 02~03 TG, 08~09/10~11 K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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