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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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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隆寺 (ほうりゅうじ) / 법륭사

Contents

1. 개요
2. 역사
3. 가람(伽藍)배치와 건축물
3.1. 유메도노(몽전)
4. 양식 문제
5. 가구법
6. 기타
6.1. 담징의 벽화


1. 개요

일본 나라시에 소재한 불교 사찰. 창건시기는 607년이라 알려져 있으며 서원(西院)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시텐노지(사천왕사)와 함께 백제 목조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건물로 여겨지고 있다. 일본의 아스카 시대를 상징하는 아스카 양식의 대표작이다.

호류지의 건축물은 키지(법기사法起寺)[1] 와 함께 1993년에 "호류지 지역의 불교건축물"로서 일본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 역사

호류지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자 목조건축물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스카데라가 일본 최초의 절이다. 호류지는 쇼토쿠 태자가 만든 오사카시텐노지가 세워진 뒤 역시 쇼토쿠 태자에 의해 20년 후인 607년에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창건 시기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리고 당시의 쇼토쿠 태자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실재로 그가 건설을 명한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단지 금당[2]의 히가시노마(東の間)[3]에 안치된 동조약사여래좌상의 광배명(光背銘)에 "메이 덴노(用明天皇)가 스스로 병 구완을 위해 가람건립을 발원했으나, 그가 얼마 안가 사망했기 때문에 유지를 받든 스이코 덴노와 쇼토쿠 태자이코 덴노 15년 (607년), 다시금 불상과 을 완성했다." 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아무튼 이 때 세워진 호류지는 당시의 지역명에서 따온 이카루가노데라(斑鳩寺)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서기에는 창건 기록이 없으며, 27권에 "치 덴노 9년(670)에 호류사는 한 채도 남김없이 소실되었다."[4]는 기록만 있다. 이 때문에 현재 호류지의 건축물은 670년 이후에 재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현재의 호류지 가람 남동쪽 가까운 곳에서 가람터가 발견되었다. 즉 원래의 호류지가 화재로 소실된 이후에는 그 터를 비우고, 거기서 서북쪽 가까운 곳에 지금의 호류지를 새로 새운 것이다. 참고로 원래의 호류지 가람 배치는 먼저 지어졌던 시텐노지처럼 정문과 탑, 금당이 일렬로 되어 있는 시텐노지식이었었다.

이후 호류지는 많은 보수와 개축을 거치긴 했어도 1300년 동안을 살아남았다. 그러나 1949년에 금당 건물을 해체보수하며 벽화를 수리하던 중 화재가 일어나 금당 내부의 표면이 타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 때 벽화가 극심한 손상을 입었다. 다행인 점은 해체보수를 위해 금당의 2층 부분의 목재들과 불상 등은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놨었다는 것. 이 때문에 1950년부터 1954년동안 복구공사를 해서 복원을 시킨 것이 지금의 금당이다.

3. 가람(伽藍)배치와 건축물

호류지는 금당과 5층 목탑이 있는 서원(西院)과 유메도노(몽전)가 있는 동원(東院)으로 나뉘어 있다. 서원은 1탑 1금당식이며, 이는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와는 좀 다르다. 먼저 지어졌던 백제양식가람(百濟樣伽藍)의 대표적인 예인 시텐노지는 정문과 탑, 금당이 일렬로 되어 있어 일본에서는 시텐노지식이라는 용어로 구별하고 있다. 호류지의 가람배치는 동전서탑(東殿西塔)이며, 현존하는 중국과 한국의 사례가 없어 과거에는 일본 고유의 식이라고 파악되기도 하였다. 그라나 이후 고려~조선시대의 절이었던 보제사(연복사)의 경우 터를 조사한 결과 동전서탑의 배치였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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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배치

호류지의 금당 건물은 정황이나 기록상 백제의 목조 건축 양식을 상당부분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호류사에 쓰인 난간의 人자형 대공, 하앙의 사용과 배치, 卍자형 난간 등의 특징적인 부분들은 백제나 삼국시대 유물과도 일치하는 점이다. 이 외에도 배흘림(엔타시스) 양식의 기둥 등 역시 한국 건축의 특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호류지의 모든 것이 백제 양식이라고 볼 수도 없은데, 우선 금당과 탑의 1층 처마 밑에 한층 낮게 덧댄 차양 부분은 8세기 나라 시대의 것이며, 이층의 용 모양 기둥 역시 17세기 말에 처마를 보강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외에도 한반도에서 [5]을 받치고 있는 운형 공포[6]와 동일한 모습의 부재가 발견된 적이 없고, 내부 가구 구조나 각진 모서까래와 평행한 배치의 사례를 찾을 수가 없다는 점 등은 호류지 금당과 탑의 모든 것이 창건 당시의 것이라거나 백제 양식 그대로라고 단정할 수 없게 만든다.

아무튼 백제의 건축 양식 그대로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에 삼국시대의 건축물을 재현하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연구되는 것이 바로 이 호류사다.

5층 목탑은 길게 빠진 처마의 우아함이 돋보이며, 이후 일본 목탑의 전형이 된다. 이 역시 인(人)자형 대공와 하앙이 사용되었다. 이 목탑의 구조 중심에는 거대한 심주가 있는데, 히메지 성의 심주와는 다르게 탑을 지탱하고 있지는 않는다. 심주는 탑 꼭대기에 있는 금속 장식인 철반을 지지하기 위함이고, 탑은 다른 작은 기둥들과 공포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또, 이 목탑은 사람이 올라갈 수는 없다. 높이는 31.5m이며, 위로 갈 수록 조금씩 작아진다. 체감률이 크기 때문에 5층은 1층의 면적의 절반이다. 1층 처마 밑에 한층 낮게 덧댄 차양 부분은 그 양식을 봤을 때 금당에 있는 것보다 더 뒤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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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의 금당과 목탑 뒤에는 강당이 있지만, 670년 이후에 재건되었던 강당은 또 벼락으로 인해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것은 990년에 재건된 것이다. 앞에 있는 중문은 7세기 건물이다. 중문 안에는 양 쪽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서 있는데, 이는 8세기의 것이다. 중문도 금당과 유사한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구조가 유사한 편이지만 같지는 않다. 대문 중앙에 기둥이 있는 것은 상당히 드문 모습이다.

호류지 금당과 목탑 등이 1300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재료와 가공방법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의 우수한 목재인 노끼를 썼으며, 가공 방법 역시 재료를 낭비하더라도 목재가 최대한 변질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지금은 호류지의 단청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과거에는 불교 건축물 답게 단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둥 등 나무표면은 주홍색을 사용하였으며, 난간에는 녹청색, 부재의 단면은 황토색, 벽은 백색, 개판[7]은 호분색[8]을 사용하였다. 또한 실내는 벽화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3.1. 유메도노(몽전)

호류지 탑과 금당이 있는 서원가람과는 다른 곳인 동원에 있다. 몽전은 당나라 건축의 영향을 받은 건물로 파악되지만, 불상은 백제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파악된다. 자세한 것은 몽전 문서 참고. 참고로 몽전문서는 호류지 문서가 작성되기 한참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뭐지? 뭐긴 다 동방신령묘의 영향이지

4. 양식 문제

당시 백제와 일본의 교류 정황상 이 절은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실제로 백제 유물로 발견된 청동소탑편[9]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호류지 건축물의 부분이 일치하는 점이 있다.

아래로 부재를 내려 지붕을 받치는 하앙 방식을 썼으며, 하앙을 받치는 공포(拱包)의 배치에 있어서도 건물의 모서리에서 대각선 한 방향만 포를 내미는 점에서 청동소탑편과 비슷하다. 앞서 말했던 배흘림 양식의 기둥도 그렇다. 이쪽은 부석사 무량수전 등으로 익숙한 요소다. 참고로 오랜 기간동안 한국에 현존하는 건축물 중에서 하앙을 사용한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은 줄 알았기에 하앙 구조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로 수입되었다고 주장하던 일본 학자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1976년에 암사 극락전이 이 하앙구조를 가지고 있는 건물임이 확인되었고,[10] 이 때문에 일본학자들은 데꿀멍하고 화암사 극락전은 국보로 승격 되었다..효자네

또한 호류지보다 앞서 지어진 스카데라의 기와 유물들은 부여 등에서 출토된 기와와 무늬가 거의 비슷하다. 호류지의 기와는 아스카데라와는 좀 다르지만, 전반적인 형상이 유사해서 아스카데라의 것을 기반으로 발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도 많다. 호류지 금당과 탑에서 사용된 구름모양의 공포[11]는 한국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모습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나 청동소탑편 등에서 어느정도 유사한 부재를 찾아볼 수 있어 영향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같지는 않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까래의 배치도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한국 건축물은 서까래가 모서리로 갈 수록 각도가 변하면서 대각선 형상이 되는 선자연 기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일본의 서까래 배치는 평연과 선자연이 섞여 있다가 고대~중세를 지나던 중 점차 선자연이 사라지고 같은 각도로 평행해서 배치된 평연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12] 그리고 역시 한국에서는 부연 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각진 모서까래를 사용하고 있다.[13]

결과적으로 봤을때, 호류지 금당과 탑의 서까래는 일본에서만 많이 사용된 모서까래를 평행하게 배치한 수법이다. 이 것이 후대에 고쳐진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다마무시노즈시(옥충주자: 玉蟲廚子)라는 호류지의 소장품 때문이다. 이 것은 7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불상궤로, 상당히 정교한 건물 지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옥충주자의 전체적인 모습은 호류지 금당과 유사하며[14] 서까래는 완전한 평연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 따라서 호류지가 중건된 시점부터 평연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백제의 건축 양식이 평연인지, 아니면 호류지에서 평연이 특별하게 사용된 것인지 확실한 답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독특한 내부의 가구 구조 등은 중국과 한국에 삼국시대 즈음의 건물이 현존하지 않아 비교할 대상조차 없다. 건축 재료가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는 노끼라는 점도 일본 현지에 맞춰 건축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일본의 경우 자연 환경상 우수한 목재를 얻기 쉬워 서까래까지 좋은 목재를 쓰기 용이했고, 그에 따라서 지붕 하중을 추녀에 집중되게 받는 서까래 배치인 선자연보다는 좀 더 서까래가 하중을 나눠 받게되는 배치인 평연을 사용하기가 용이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호류지 금당과 탑은 백제의 건축 양식이 강하게 영향을 준 사례로 여겨지지만, 일본식으로 변형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며, 백제 양식 그대로라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5. 가구법

앞서 말했듯이 목탑의 체감률은 큰데, 그렇게 만들기 위해 2층과 3층의 공포 구성에 있어서 첨차와 구름형태인 소로를 1층보다 작은 것을 사용하고, 4층에서는 인접한 첨차를 연결하고 1개 소로를 공용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방식은 후대의 목탑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며, 나쁘게 말하면 고대 건축의 미숙함이지만, 좋게 말하면 건축이 규격화되기 전의 자유분방함이라고도 추측해볼 수 있다.

금당의 경우에도 이러한 점이 있는데, 금당의 기둥 높이가 전부 똑같다. 그리고 들보가 없는 구조다. 이는 대량식 구조를 주로 채용했던 후대의 중국이나, 한국 건축물들과는 전혀 다른 구조다. 심지어 이후의 일본 건축과도 좀 다르다. 얇은 목제로 지붕 등을 구축하는 수법 등은 훗날의 구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이 외에도 포나 기둥과 보의 결합 등이 견고하지 않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답게 기술적으로는 좀 미숙한 면이 좀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나, 670년에 복원된 건물이란 점에서 누군가가 처음과 다르게 내부 구조를 복원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2층에 있어서 기둥의 배치가 자유로워 지기에 나름대로 장점도 있는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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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 금당의 단면. 2층은 일종의 장식으로, 사람이 올라갈 수는 없다. 1층의 외각에 있는 낮은 차양 부분이나 2층 지붕 아래 내부에 있는 십자로 교차되는 종횡 목재는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6. 기타

6.1. 담징의 벽화

고구려담징이 호류지에 그렸다던 금당 벽화가 유명했지만, 이 것은 1949년에 불타버렸다. 다만, 만약 호류지의 건물이 실제로 670년에 재건된거라면 담징의 생몰연대를 넘어가기에 호류지 금당의 벽화는 담징 작품이 아니게 된다.

또한 호류지의 금당벽화를 그린 것이 고구려의 담징이라는 것을 학계에 알린 것은 이병도인데, 이 주장의 근거는 문헌자료가 아닌 일본의 구전이었기 때문에 신빙성에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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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706년에 세워진 높이 약 24m의 삼층탑이 유명하며, 시기나 양식적으로 호류지의 건물과 비슷하다. 다만 금당과 강당은 수백년 뒤에 재건된 것이다. 가람배치는 호류지와 비슷하지만, 탑과 금당의 위치가 반대로 되어 있어 호키지식으로 불린다.
  • [2] 부처상이 안치되어 있는 건물
  • [3] 금당 안에서 동쪽에 있는 부분.
  • [4] "夏四月癸卯朔壬申 夜半之後 災法隆寺 一屋無餘
  • [5] 처마를 받치고 있는 서까래 밑에 비스듬하게 아래를 보고 튀어나와 있는 나무. 포의 부분으로, 지랫대 원리를 이용해서 처마의 하중을 기둥으로 모아주고, 이를 통해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다.
  • [6] 공포는 기둥 윗부분에 나무를 조립하여 처마지붕을 받치는 부분. 여기에 쓰이는 첨차와 소로라는 부품이 있는데, 호류지의 것은 구름모양이기에 운형 첨차와 소로라고 부른다.
  • [7] 천장 등에 쓰이는 목판
  • [8] 흰색이지만, 천연물감이라 일반적인 백색보다 덜 희다
  • [9] 청동으로 만들어진 탑의 일부분
  • [10] 현재 국내 유일의 하앙을 사용한 목조 건축이다
  • [11] 정확히는 운형 첨차, 운형 소로
  • [12] 사실 선자연 기법이 사라진 이후에도 중국의 건축을 모방해서 지은 일부 불교건축의 경우 중국식 선자연 기법이 나타나기는 한다. 하지만 선자연 기법이 없어진 시점과 시간 격차가 크고, 중국의 선자연 기법은 한국에서는 마족연이라 부르는 것으로, 선자연과 유사하나 정교함이 떨어진다.(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다 선자연으로 싸잡아 부르지만)
  • [13] 물론 한국에 이러한 모습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본 외에 중국의 경우에도 드물긴 하지만, 자금성 숭정전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몽골의 겨울 궁전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일반적인 형식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 하지만 중국과 몽골 그리고 일본에 있다고 한국도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 [14] 구름모양의 공포 모양은 같지만, 배치는 부채꼴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점이나 박공지붕의 형태가 다르다는 점 등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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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4 15: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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