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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노 센이치

last modified: 2014-10-29 09:32:46 by Contributors


이름 호시노 센이치(星野仙一)
생년월일 1947년 1월 22일
국적 일본
출신지 오카야마현 구라시키 시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8년 주니치 드래곤즈
드래프트 1순위 지명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1969~1982)
지도자 경력
(감독)
주니치 드래곤즈(1987~1991,1996~2001)
한신 타이거스(2002~200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2011~2014)

1974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다카하시 가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소토고바 요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일본의 前 프로야구선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

Contents

1. 거인 안티가 되다
2. 선수로 콩라인
3. 감독으로 콩라인
4. 한신으로 가서도 콩라인
5. 한신 감독 사퇴 이후
6. 베이징 올림픽 목메달
7. 라쿠텐에서의 콩라인 탈출
7.1. 2013년
7.2. 2014년
8. 기타

1. 거인 안티가 되다

쿠라시키상고 시절 팀의 에이스로서 활약했으나 시엔 대회 지역 결승전에서 좌절 되는 등 고시엔 본선 무대에 출전 한 적은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콩라인 고교 졸업 후 메이지 대학으로 진학 팀의 에이스로서 호세이대학의 다부치 코이치, 야마모토 코지 등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면서 도쿄 6대학 리그의 스타로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대학시절에도 우승은 한번도 하지 못했다.대학을 가도 콩라인 1968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이하 거인)이 자신을 1순위로 지명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으나 자신이 아닌 시마노 오사무(島野修) 투수를 지명하자 이 때부터 거인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드래프트에서는 요미우리가 아닌 주니치 드래곤즈에 지명을 받게 된다. 이후 철저한 '안티 거인' 행보를 하게 된다. 별명은 '열혈남'.

여담으로 호시노 대신 요미우리에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된 시마노는 정말 미미한 활약으로 잊혀지는데...요미우리에서 버림받고, 전전하다 결국 한큐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은퇴를 하게된다. 여기서 구단 마스코트를 뒤집어 쓰고 나름 유명 마스코트의 반열에 오르게된다[1]. 이 분은 팀이 매각되고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될때까지 꾸준하게 마스코트로 연속 출장기록을 세워주시는데...아무리 그래도 146승 투수, 일본대표팀 감독까지 간 사람이 야구선수 입장에서는 더 부러워 보일거다. 이래서 인생은 모르는거다. 모르긴 뭘 몰라. 그 해 드래프트에서 호시노 센이치, 야마모토 코지, 타부치 코이치, 야마다 히사시, 아리토 미치요, 히가시오 오사무 등등 다른 팀에 1순위로 지명받은 선수들은 대부분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했는데 그냥 가능성만 보고 듣보잡 고교생 투수를 1순위로 지명한 요미우리의 눈이 썩었던 거지.

통산 성적은 146승 121패 34세이브, 평균자책점 3.6, 1225탈삼진. 불과 14시즌(1969~1982)밖에 뛰지 못했고, 시즌 당 평균 승수도 10.6승에 불과하였으나 거인전에서만 무려 35승을 챙겼다.당시는 인터리그도 없었고 센트럴리그에는 6개팀밖에 없었던 건 기억하자. 그리고 선수시절 호시노는 1팀에서만 활약했다. 146/5면 팀당 29.2승이 평균임 신인시절에는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으나 부상 이후 변화구 투수로 변모했고, 구원투수와 선발투수를 겸업하며 마구잡이식으로 등판하면서 거둔 성적이라서 드러난 성적에 비해 훨씬 더 팀공헌도는 높았다고 평가된다.

2. 선수로 콩라인

1974년 사와무라상까지 따내면서 거인의 10년 연속 리그 우승을 저지시켰다. 거인의 ON타선을 이뤘던 나가시마 시게오는 그 해를 끝으로 은퇴.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는 롯데 오리온즈(現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2승 4패로 패배. 하지만 주니치 빠들은 이 1974년을 엄청 좋아한다. 그때까지 경쟁자가 없었던 거인의 V10을 저지했으니깐.. 주니치 우승을 결정짓는 1974년 다이요 훼일즈와의 시즌 막판 경기때 이 아저씨가 승리를 거두며 글러브를 환호하는 모습은 유명하다. 팀이 이겨서 그런지.. 거인을 발라서 그런지..사실은 둘다.

그 후 히로시마의 전성기 대두와 요미우리의 부활, 야쿠르트갑툭튀 등등으로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2년에는 시즌 막판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現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와의 한 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는데, 이기면 주니치 드래곤즈가 우승하고, 지면 거인이 우승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코마츠 타츠오가 완봉승으로 활약하여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일본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즈(現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1승4패로 패했고, 그 해를 끝으로 호시노는 은퇴하기에 이른다.

3. 감독으로 콩라인

이후 1987년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으로 부임하여 1988년 7월9일 이후 무려 50승15패3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역전우승을 차지하였으나 또다시 일본시리즈에서 세이부에게 무너졌다. 1991년 감독직을 사임.

그후 4년간 해설자 생활을 하다가 1996년 다시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에 선동렬을 영입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 되기도 했다. 1999년 또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나 일본시리즈에서 다이에 호크스(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무너져 또다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그 후 2001년 성적 부진으로 감독직을 야마다 히사시[2]에게 내주고 이듬해인 2002년에 한신 타이거즈 감독을 맡게 된다. 호시노 센이치가 없는 주니치는 2007년에 우승하게 된다.

4. 한신으로 가서도 콩라인

2002년 당시 456656666이라는 비참한 성적(ㅠ.ㅠ)을 기록하던 한신 타이거즈 감독을 맡았다. 참고로 저 밑의 6666은 한신 타이거즈 팀 최다 연속 꼴찌기록(4년 연속). 2002년 시즌이 끝나고 카네모토 토모아키, 라부 히데키 등을 FA로 영입하고, 이마오카 마코토, 세키모토 켄타로, 후지모토 아츠시 등을 등용하며, 센트럴리그 4위를 기록하며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노무라 카츠야의 유산 덕택이라는 얘기가 있긴 했지만, 결국 2003년에는 한신 타이거즈에 18년 만에 우승을 안기며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였으나 4년 전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시절에 맞붙었던 팀인 다이에 호크스에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하여,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인해 오카다 아키노부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게 된다.

하지만 2003년, 18년만의 우승으로 이쪽 동네가 아주 폭발하게 된다.. 호시노 아재가 나오는 광고가 전국구로 홍수를 이룰 정도니깐.. 하지만 결과는 극적인 콩라인이고.. 오카다에게 감독 자리를 물려준 이후인 2005년에 또 다시 한신은 절치부심 일본시리즈에 올라가지만.. 한신킬러 아시아의 오푼신 이승엽의 폭풍활약으로 또 물을 드신다. 그냥 한신 자체가 안 되는 팀.

5. 한신 감독 사퇴 이후

한신 타이거즈의 시니어디렉터(SD)라는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애매모호한 직함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중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냥 개막장이던 한신 타이거즈를 다시 일으켜 전국구 인기팀으로 탈바꿈시킨 전임 감독의 명함을 내세워 뭔가 수완 좋은 경영자의 롤모델 기믹으로 여기저기 강연회 돌아다니면서 알바용돈 버는 게 일이었던 거 같다. 한신 구단을 위해서 한 일이라면 09년 시즌 종료후 죠지마 켄지를 설득해 낚는 데에 영입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는 했다.

6. 베이징 올림픽 목메달

한신 타이거스의 시니어 디렉터라는 애매한 직책에서 강연회 알바를 뛰는 외에도 간간이 NHK에서 야구해설가알바를 맡다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과의 본선 경기에서 이와세 히토키가 퐈이야~!를 지르며 3대5로 패해 삐꺽대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쿠바와의 경기를 피하기 위해 미국에게 지기 위해 일부러 승부치기[3]까지 끌고 가서 끝끝내 져주기 게임을 실행하여 4강에서 그토록 바라던 대한민국을 만나게 되지만....

베이징에서 내내 부진하던 이승엽의 역전 투런 홈런이 터지고 뒤이어 강민호의 쐐기 안타에, G.G.사토가 플라이 타구를 떨어뜨리는 삽질을 저지르며(허구연 : G.G. 사토 고마워요.) 2:6으로 패해 3, 4위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미국과의 3,4위전에서 4대8로 패배하여 대한민국 네티즌으로부터 목메달이라는 불명예스런 칭호가 걸리고 말았다.

일본시리즈 우승경력이 없는 지도자답게 단기전에서의 직관력과 통찰력, 유연성있는 운영능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는데 그 면모가 베이징 올림픽에서 드러났다는 분석이 많다.

7. 라쿠텐에서의 콩라인 탈출

올림픽에서의 실패 이후 두 번 다시 감독직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2011년부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라쿠텐의 의도는 한신이 노무라-호시노 라인으로 개막장이던 팀을 기적적으로 부활시켜서 초인기 강팀으로 탈바꿈시켰으니 노무라 다음에 마티 브라운이 1년 끼어있기는 했지만 호시노를 감독으로 앉히면 혹시 한신 같은 강팀으로 탈바꿈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였던 것 같다. 하지만 라쿠텐은 한신만큼 돈을 쓰지는 않잖아?[4]

어쨌거나 라쿠텐 부임 첫 해에는 토호쿠 대지진 등의 여파로 정상적인 팀 운영이 힘들었던 상황이라 5위를 기록하게 된다.먹튀 김병현이 있음에도 의외로 선전했다. 놀랍게도 2011년도 꼴찌자리는 전년도 우승 뒤에 시원하게 꼴찌로 수직 낙하한 김태균마저 도망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차지.

그러나 부임 2년차인 2012년 시즌 후반기부터 팀이 서서히 정비되기 시작하더니 승수를 쌓으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을 사정권에 놓기도 했다. 결국은 전반기의 성적이 영향을 미쳐서 4위에 머물렀지만 라쿠텐 구단 창단 이후 두번째로 승률 5할로 이끌었다.

7.1. 2013년

그 여세를 몰아서 초반부터 선전을 거듭하면서 상위권에서 놀더니 7월 이후에는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8월에 들어와서는 2위 그룹과 3~5게임 차이의 선두를 유지하면서 여유 있게 순항한 끝에 9월 26일 팀의 첫 정규리그우승을 개막 22연승이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세운 다나카 마사히로을 위시해 이끌었다.그리고 이어진 2013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라쿠텐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어냈다. 다만 11월 2일 경기 선발인 다나카 마사히로를 9회까지 160개를 던지게 하고 그 다음날 9회말에 또 마무리를 시킨 것으로 해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너무 혹사시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는 어디까지나 상품에 하자가 생기기를 원하지 않는 메이저리그와 메이저리그식의 투수운용이 주가 되어버린 한국의 견해이고 아직도 에이스라면 닥치고 완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은 일본에서는 생각보다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어짜피 다나카 본인도 일본에서의 마지막 투구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경기는 미련 안 남게 내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던지겠다는 자세를 견지했고[5] 정작 일본에서는 국내에서의 마지막 등판에서 팀의 우승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미화되었다. 물론 투구수 과다와 관련된 기사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대"라면서 미국에서의 걱정스러운 반응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 어쨌거나 11월 3일 7차전에서 3:0으로 승리하여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함에 따라 콩라인에서 탈출하였다. 드디어 감독직 시작한지 27년만에 거인 타도라는 필생의 목표를 실현하였다. 참으로 인간 승리가 아닐수 없다.

아무튼 우승이 목표였던 주니치나 한신 시절과는 달리 효율적 경영을 목표로 하는 라쿠텐에서는 콩라인만 해 줘도 영구결번 시켜줄 판에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우승까지 시켜줬으니 영구결번에 레전드 감독 자리는 예약일 듯. 어쨌거나 생소한 상대를 만나는 단기전보다 같은 상대를 여러번 상대해야 하는 장기전에 특화된 감독임은 라쿠텐에서의 선전으로 증명된 듯 하다. 워낙 올림픽의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생각만큼 막장 감독은 아니라는 증거.

그러나 2013 아시아 시리즈 2라운드에서 대만의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에게 4:1로 패하면서 아시아 시리즈 최초로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일본팀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역시 국제전 나가면 안된다

7.2. 2014년

시즌 초반부터 요추추간판탈출증 이라는 일종의 허리디스크를 앓으면서 5월 26일자로 경기에서 빠지고 수술을 받고 요양을 가게 되었다. 당분간은 사토 요시노리 투수코치, 오쿠보 히로모토 2군 감독이 대신 지휘봉을 잡을 예정이다. 사실 디스크는 라쿠텐 감독을 맡기 시작했던 2011년도부터 앓고 있었다고 하며 지난해 요미우리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진통제를 먹고 출장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걷기도 힘든 상태라 올스타전 감독직을 맡는것은 불발됬다.

다나카 마사히로의 부상에 대해 인터뷰를 하였다. 그리고 이 인터뷰 내용에 대해 논란이 상당.

결국 성적부진의 책임으로 시즌 종료후 사임을 발표하였다. 이후 10월 7일 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은퇴식을 거행하며 라쿠텐에서 퇴단을 하게 되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전부터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었고 나이도 일흔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더이상 프로팀 감독을 맡기는 어려워 보인다.

8. 기타

  • 안티 거인의 선봉장 같은 이미지에 비해 나가시마 시게오왕정치 같은 거인 OB들과는 친하게 지낸다. 친목질의 제왕 그리고 이 친목질이 호시노가 일본프로야구에서 생존하는 비법이다.

  • 한신의 감독으로 가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주니치의 얼굴이자 상징같은 존재였으나 2001년 감독직 사퇴시에 구단과 모종의 알력이 있었던 듯 하다. 주니치 감독 자리를 물러날 때 호시노의 반응이 "내가 평생을 선수, OB, 감독으로서 이 팀을 위해 분골쇄신을 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대접하냐?"라는 서운한 반응이었고 한신에게 감독직 제안을 받았을 당시, 그래도 주니치의 상징이라는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으나 결국은 나가시마 시게오의 전화를 받고 수락을 결심한다. 나가시마는 당시 "센짱(호시노의 애칭), 뭘 고민하고 있나? 요새는 거인-한신 전을 '전통의 일전'이라고 부르는 게 옛말이 되고 있다네. 자이언츠를 보라고, 열심히 하고 있잖은가"하며 한신을 라이벌로 부활시켜 야구계를 부흥케 하자며 독려했다. 한편 주니치 측에서도 호시노의 한신 감독 취임에 "팀의 간판으로서 그렇게 섭섭하게 대우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30년 가까이 정든 팀을 뿌리치고 그렇게 간단하게 다른 팀 감독자리에 앉을 수 있냐."라는 식의 반응이었고 지금은 주니치 구단과 호시노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서먹하면서도 껄끄럽다.

  • 선수들에게 강한 정신력을 강조하고 가차없는 폭력까지 행사하는 카리스마형 감독이지만 막강한 기업가, 부자들이 많기로 소문난 자신의 후원회가 마련한 외제차 등을 수훈선수들에게 선물하는 등 채찍과 당근을 잘 배합하는 지도자였다. 참고로 말하면, 선수들을 때리더라도 그 다음날 그 선수의 출장기회를 보장해주고[6], 유부남 선수는 가족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때리지 않는 등 폭력에도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철권 감독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따르는 선수들도 꽤 많다. 하지만 감독으로서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선수들을 상당히 껄끄럽게 생각했던 듯 하다. 아무래도 자신의 과거를 아는 선수들이 섞여 있으면 선수들 사이에서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던 듯. 그래서 호시노가 감독으로 취임하면 기존의 고참급 선수들을 중심으로 방출 내지는 트레이드의 소용돌이가 한번 지나가고는 한다. 그리고 팀의 중심이 될 고참급 선수들은 오치아이 히로미츠카네모토 토모아키 등 자신이 지휘하지 않았던 타 팀에서 영입하는 케이스가 많다. 가장 비근한 예로는 라쿠텐에 감독으로 취임하자 마자 최고참급이자 중심타자인 야마사키 타케시를 방출한 것. 야마사키는 주니치 감독시절의 제자로 개인적으로는 둘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서먹하지는 않지만 호시노 본인이 팀을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라고 판단한 듯 하다. 그리고 팀을 이끌어갈 고참의 자리는 메이저리그에서 방출당한 마츠이 카즈오와무라 아키노리 등의 영입으로 채웠다.
    한신 시절 주전 유격수였던 지모토 아츠시가 유난히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벤치에서 멍하니 있다가 그대로 뒤통수 맞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고. 한 카리스마 한다는 키요하라 카즈히로를 쫄게 만들 정도로 그 성질머리가 대단했다.[7] 하지만 2003년 일본시리즈 3차전에서 후지모토가 결승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팀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데 이 때 인터뷰에서 후지모토에게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감독에게 무슨 지시를 들었냐'라는 질문에 '부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와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등 위에서 기술한대로 때로는 선수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줄 줄도 아는 감독이기도 했다.

  • 초창기 주니치 감독시절 요미우리와 벤치클리어링이 잦았는데 호시노 감독의 성향상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때 오 사다하루 감독 앞에서 주먹을 쥐어보이면서 '너 님 나랑 맞짱깔거삼?'하고 도발하기도 했고 오 사다하루 감독이 그 기세에 위축된 모습을 보여서 요미우리 팬들은 실망 & 요미우리 안티팬들은 호시노 킹왕짱 이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카더라가 있는데...실상은 요미우리의 용병 워렌 크로마티가 빈볼을 맞자 주니치 투수인 미야시타를 주먹으로 가격했고 벤치클리어링 과정에서 호시노가 오 사다하루에게 주먹을 내밀며 "주먹으로 가격하는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어필했다고 한다. 비록 안티 거인으로 유명한 호시노이지만 선배격인 인물들에게는 굉장히 예의바르다고 한다. 그 덕에 일본야구계의 마당발로 통하기도 하고...

  • 선동렬이 은퇴하고 이상훈을 중심으로 불펜진을 구상했을때 이상훈이 메이저 진출하겠다고 말하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라면 큰물에서 놀아야 된다'라고 격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오오 상남자 오오

  • 한국계라는 설이 많은 유명인사 중 한 명이다. 재일한인 야구인들은 호시노=한국계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국내 일본야구팬들도 아예 대놓고 '김선일 씨'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이 자신의 입으로 한국계라 밝힌 적은 없기 때문에 함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렇듯 한국에선 아예 한국계라고 못박아서 취급하는 것 때문인지 베이징 올림픽 당시 혐한들 사이에서 '한국계라서 일부러 한국에 져준거다'라는 중상모략이 돌았다고 한다. 정작 한국에서는 입만 털다가 목메달만 땄다며 조롱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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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구단의 마크까지 마스코트인 닭도 아니고 오리도 아니게생긴 노란 인 '브레이비'역할을 했다.
  • [2] 한큐 브레이브스(現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뛰었던 투수로 프로 통산 284승을 기록, 언더핸드 투수 중에서는 NPB 통산 최다승 투수이다. 원래대로라면 한큐 브레이브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오릭스에서 감독직을 맡아야 했겠지만 오릭스가 한큐 브레이브스 색깔 지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절이라...어쨌든 주니치의 프랜차이즈 스타도 아니었고 호시노와의 인연으로 투수코치를 하고 있어서 감독 후보로는 물망에도 오르지 않았는데 본인도 갑작스럽게 감독을 맡은 듯했다. 즉 호시노의 사임에는 구단과의 알력이 작용했으며 이 때문에 감독교체도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3] 베이징 올림픽 야구부터 도입된 제도. 11회에 처음부터 주자를 1, 2루에 두고 진행하는 방식으로, 일본 아마야구의 규칙에서 유래했다. 자세한 방식은 항목 참조.
  • [4] 어쨌거나 호시노가 감독자리에 앉고나서 그 성질머리를 배겨내지를 못했는지 감독 취임 조건이었는지 과거보단 조금 지름의 폭을 넓히기는 했다. 노무라가 감독할 때 그렇게 좀 하지?
  • [5] 시리즈 후에 나온 기사에 의하면 다나카 본인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 호시노가 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마운드 운용을 했다고 한다. 어째 신시내티의 빵감독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 [6] 이게 베이징 올림픽 목메달의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가 됐다. 준결승에서 결정적 실책을 저지른 G.G.사토더러 명예를 회복하라고 다음날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그대로 선발 좌익수로 출전시켜줬더만 그 경기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 [7] 한신 감독 시절 요미우리와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졌는데 키요하라가 나서려는 찰나에 호시노가 뒷덜미를 잡고 키요하라를 끌어내버렸다. 키요하라조차 호시노 앞에서는 아무말도 못하고 데꿀멍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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