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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익

last modified: 2015-03-09 08:02:50 by Contributors


1943년의 홍사익.


1946년의 홍사익.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홍사익이다.


洪思翊

생몰일 1889년 3월 4일 ~ 1946년 9월 26일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일본육군대학 출신으로 일본군 육군 중장에 올랐으며, 일본 제국 패망 후 포로학대로 인해 전범재판소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당연하게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본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인물이었는데 이는 왕족이 아닌 자로서는 유일한 사례다. 물론 왕족 아닌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군에서 장성이 된 경우는 홍사익을 제외하고 총 일곱 명(이병무, 조동윤, 어담 중장, 이희두, 조성근, 왕유식, 김응선 소장)이 더 있긴 하지만, 이들은 전원 대한제국군에서 참령 이상 계급에 있었던 고위 간부가 1920년 조선군[1]이 일본군에 정식으로 편입되면서 일본군 계급을 받은 것뿐이다. 이런 경우는 모두 "조선군인"이라는 특별 분류로 분류되었으며, 이들을 제외할 경우 한국인으로서 일본군에서 정식 코스를 다 밟아서 장군이 된 사람은 왕족을 제외하면 홍사익이 유일한 것이 맞다.

창씨개명을 안한 것 뿐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자신의 출신을 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조선인 티를 내지 않기도 해서, 집에서는 유카타를 입었으며 일본어를 상용(常用, 사용의 오타가 아니다)했다. 휘하 장병들 중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패전시까지 그가 조선말을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없으며, 패전 후에야 비로소 몇 마디 조선말을 했다고 한다. 가족들과 대화할 때는 사용했을지도 모르지만. 다만 일본어 억양은 한국식이어서 듣기만 하면 저 사람이 한국인이구나 하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고 하며, 홍 중장 본인도 "난 원래 조선인이니까"라면서 발음을 고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2] 그리고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 발음인 "고 시요꾸"로 칭했다. 그런데 당시의 담배인"호우요꾸"와 비슷해서 혼동을 일으킨 것인지 부하들 중에는 "고 시호우"라고 부르는 경우가 뜻밖에 많았다고 한다.


1920년 12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홍사익. 매일신보 3면지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 일본육군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기사 내용이다. 이를 미루어보면 홍사익이 얼마나 우수한 엘리트였는지 짐작케 해주는 대목.

구한말 자작농가의 3남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 손에 컸다. 16세 되던해 단신상경하여 다음해 무관학교에 입학하고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영친왕의 유학동반자로 발탁되어 중앙유년학교(中央幼年學敎;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해당)에 들어갔으며, 이후 일본육군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육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영친왕[3], 이건[4], 이우[5], 홍사익 단 4명 뿐이었는데,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왕족이고 홍사익만이 평민이었다. 셋 중에선 영친왕만이 이후 중장까지 올랐다. 나머지 두 사람은 영관급.

같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지청천 등이 부대를 이탈해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면서 홍사익에게도 자주 가담을 권유했지만 일본군에서 뼈를 묻기로 결심하고, 독립군 가족의 생계를 보살펴 주는 등의 간접적인 지원으로 이를 대신했다. 말 그대로 자기가 탈영할 경우 군대 조직내에서 조선인의 입지가 약해진다는게 이유였다. 자기는 정규전이 게릴라전보다 더 어울린다나

일본군 관동군 참모부, 흥아원 조사관, 교육본부[6], 북지나파견군 여단장 등을 역임하면서 중일전쟁 전선에 배치되어 근무했다. 1941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해 중국 허베이 성에 주둔한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중국 화북일대의 중국 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제18전총)를 상대로 여러번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중국 팔로군 제18전총에는 윤세주(김원봉의 오랜 고향 친구) 등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1941년 12월, 윤세주가 이끄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은 충칭으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합류했다. 그에 따라 화북으로 옮긴 조선의용대 다수는 제2인자 자리에 있던 윤세주의 지휘를 받음)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湖北 省) 태항산맥의 '호가장 전투'와 인근의 '형태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했는데, 여기서 홍사익이 지휘를 했다. 이 전투로 조선의용대 대원인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대장과 김학철 대원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김학철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는데, 여기서 그는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지못미... 그리고 김학철은 일본 나카사키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윤세주는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홍사익이 지휘하는 일본군과 전투하다 전사하고 만다.

1944년 패전이 가까워질 때 필리핀의 남방총군 병참감 겸 포로수용소 총괄 관리책임자로 발령되었다. 영전이지만 거의 그에게 책임전가하기 위한 좌천이나 다름없는 보직이었다는게 고전적인 시각인데 홍사익이 중장으로 승진된 것도 이 때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설이 존재한다. 홍사익 장군을 필리핀으로 부른 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이 3연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홍사익 장군은 그 밑에서 대대장으로 있었으며, 그 때부터 야마시타는 홍사익의 능력을 인정하고 사이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진짜 능력에 따라 발탁한 스카우트였을 수 있다는 이야기.

또한 당시 일본군의 포로관리 및 지원 분야에 군인, 군속을 불문하고 조선인이 많이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보타주를 우려하여 가급적이면 인망이 있는 조선인(홍사익)을 그 관리자의 위치에 올리고자 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직 일본 군부가 패전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1944년의 시점[7]에서 미리 책임전가의 대상부터 선정한다는 논리는 약간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
사실 1944년의 필리핀을 본다면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병참감으로 임명하는게 대단히 신뢰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야마시타의 전술은 루손에서 최대한 농성하면서 본토나 오키나와로의 진격을 늦추고자 하는 것이고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맥아더의 군대에 저항해서 전쟁이 끝날때까지 농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병참감의 업무는 막중한 셈.

그 외에, 홍사익이 만주 지역[8]의 한국인 군 장병 및 민간인의 경애감을 너무 많이 얻고 있어서 혹시나 그를 핵심으로 하여 발생할지 모를 불온한 사태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남쪽으로 보낸 거라는 주장도 있지만 남방의 조선인들도 탈영내지는 사상적 투항이 많았던 걸 보면 그런 위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남방으로 발령받을 당시에도 옛 친구인 지청천 장군이나 동아일보의 모 기사가 다시 그에게 광복군에 가담하기를 권유했지만 자신의 이탈로 인한 폭풍이 일본군에 남아있는 조선인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거부하였다고 한다.

원체 여건이 열악한 루손 산지에서 극심한 식량 부족까지 책임져야 하는 위치를 맡아 고생하던 중 일본이 패전했으며, 필리핀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포로 학대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 판결을 받고도 태연하게 돌아와 "갑종합격이다!"라고 외쳐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이는 일본어로 "갑종합격"과 "교수합격"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같은 데서 나온 일종의 언어유희인 셈인데, 자기 목숨을 가지고 저런 걸 할 수 있다니 어지간히도 대담한 모양.

살아남은 부관이 후에 회고한 바에 의하면 전쟁 종결 직후 아직 미군의 포로가 되기 전, 홍사익 장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중학교 수학 선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만약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전쟁이 터진 후에는 아마 특별초빙이라도 되어 현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국내에서 이무렵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맥아더에게 탄원서를 올려 구명을 요청한 사람들도 있었다 한다.[9] 대표적으로 홍사익 장군의 부인과 아들 부부가 군정장관이던 하지 장군을 찾아가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실 일본군의 포로관리가 막장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연합군 포로가 사망했고, 이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전범으로 처벌받는건 필연적이었다.


일본군 시절 상하에서의 평은 좋은 편이었다. 아니 일반 사병들에게는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 좋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창씨도 하지 않은 조선인이 초급장교도 아닌 장군이 된다는 것이 일본인 하급장교나 사병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 아래는 당시의 예화이다.

신참 : 병참감이 새로 왔습니다.
고참 : 그래, 어떤 인물이야?
신참 : 그게, 조선인이랍니다.
고참 :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선인이 병참감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신참 : 아닙니다. 분명히 조선인이랍니다. 이름이 '고 시요쿠'(홍사익의 일본식 발음)라고 하던데요.
고참 : 허, 그렇다면 아마도 이씨 왕가의 일족인 황족이겠지. 황실의 외가 쪽 사람일 거야.
신참 : 아닙니다. 양주라든가, 조선의 시골 출신 평민이랍니다.
고참 : 허, 그렇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로군. 아니 정말로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어.


홍사익은 대영제국의 예를 들어 조선인이 제국을 위해 충실히 봉사한다면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물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랬으면 망할 일 자체가 없었겠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쿠루루기 스자쿠. 어쨌든 일본에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다.[10]

또한 일본군 출신의 많은 장교들이 국군으로 흡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이하의 대한민국 정부는 홍사익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국군 창군과정의 기틀확립을 위해 이승만대통령이 홍사익중장의 구명에 힘을 쏟았다는 설도 존재한다.(이재전장군 溫故知新) 때문에 한국전쟁 후 친일파의 가족이라는 주변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미망인이 미국으로 떠나려고 했을 때, 여비가 없어서 생각다 못해 일본 수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인의 편지를 받고 당시 일본 수상이던 요시다 시게루는 곰곰히 생각하다 비서를 불러 100만엔을 송금해 주라고 했다. 홍사익 부인은 그 돈으로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일화로 홍사익이 소장이던 시절 조선병사가 탈영하여 홍사익의 집에 머물었는데 소문을 들은 일본헌병이 홍사익의 집인줄 모르고 탐문하러 갔다. 그러자 군복을 입고 나온 홍사익의 계급장을 보고 기겁을 하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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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구 대한제국군을 한국 강제병탄 후 왕실 호위만을 전담하는 조선군이라는 이름으로 개편했고, 1907년 군대해산 이후에도 군에 남은 간부들 역시 한국식 계급명칭을 그대로 유지한 채 동급 일본군 장교로 예우하며 진급도 계속 시켰다.
  • [2] 참고로 영친왕도 평상시 조선어를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에 종전 후 일본 육사 출신의 조선인 장교들이 접견했을때 영친왕이 유창한 조선말을 하는 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 [3] 고종의 7번째 아들이자 마지막 황태자. 일제 당시 호칭은 이왕세자(1910~1926)->이왕(1926~1945)
  • [4] 고종의 셋째 아들 의친왕의 서장자. 광복 후 일본으로 귀화한다. 1909~1991
  • [5] 의친왕의 둘째 아들로, 6살때 5촌 당숙이자 운현궁의 주인이었던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공(公) 작위를 받았다. 광복 직전 히로시마 원폭 투하때 사망. 1912~1945
  • [6] 이 부서에서 중좌와 대좌 복무기간의 상당한 부분을 지냈기 때문에 육군대학교 졸업에도 불구하고 육군 보직의 꽃이라는 연대장 보직을 받지 못했다. B군과 윤민혁을 비롯한 이글루스 밀리터리 고수들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는데...하지만 제32군 사령관이던 우시지마 미츠루의 경우처럼 육군대학 졸업후 중학교 교련장교 등 장기간 교육방면 보직을 받은 사람도 연대장을 거친 예도 있어서 홍사익의 연대장 미경유는 어느 정도는 조선인에 대한 견제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사실, 홍사익을 높게 평가한 나가타 테츠잔이 통제파 보스여서 만약 나가타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홍사익도 연대장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시지마도 육군고관이자 고향선배인 사람 덕으로 교육부대에서 육군대신 부관으로 전출, 2.26사건 수습의 하나로 제1 보병연대장이 되었다.
  • [7] 아직 자기네가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 가엾은 것들.
  • [8] 남방에 가기 직전에는 야마시타와 함께 만주에 있었다.
  • [9] 미군정기 신문사 자료들 면밀히 보면 '홍사익 중장 구명하자!' 이런 기사 제목이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946년 2월~4월 사이가 눈에 띄게 많다.
  • [10] 사실 당시 우익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자유주의 독립운동가들(민족주의나 파시즘 독립운동가들이 아닌) 중에는 이런식의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실력양성론이나 민족개조론에 공감하던 세력. 이들은 자치운동을 주로 벌였는데, 시대적인 맥락으로 볼때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를 집어삼키던 초강대국이었고 "일본이 망하리라고 생각을 못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나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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