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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

last modified: 2015-04-12 20:05:43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마오쩌둥의 퇴진과 복귀
3. 흑역사의 시작
3.1. 광기의 극단주의
3.2. 그들의 행각
3.3. 후폭풍
4. 평가
5. 여담
6. C&C 제너럴

1. 개요

한자 : 紅衛兵(정체자), 红卫兵(간체자)
병음 : Hóng Wèi Bīng
영어 : Red Guards[1]

중국 대륙 최대의 흑역사를 이끈 또라이, 천하의 개쌍놈들. 개초딩류 갑
전세계로 통틀어도 이만큼 미친 놈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집단광기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들 중 하나.

1960년대의 일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일어난 마오쩌둥의 퇴진 이후 마오의 불타는 권력욕과 당대의 사회문제에 반발한 젊은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생겨난 일종의 극단주의 조직이다.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준동했고, 중국의 대화를 최소한 10년어치는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집단. 이들의 만행으로 중국은 불과 10여 년 동안 100년이 지나도 메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지금도 그 후유증이 상당부분 남아있을 정도.

(兵)(病)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중국 공산당의 군대인 중국 인민해방군과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2] 본래는 학생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이었으며 준군사조직 같은 성향이 있기는 했으나 본질은 운동조직으로 군 조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2. 마오쩌둥의 퇴진과 복귀

1960년대에 마오쩌둥소련처럼 공업 생산능력이 강한 중국을 실현한다는 기치 아래 대약진 운동을 밀어붙였다. 최종목표 자체야 그럭저럭 옳았어도, 문제는 중국의 당시 특성과 농업 생산력을 전혀 고려치 않았다는 데에 있다. 농업은 농업대로 망하고 공업은 공업대로 말아먹은 끝장나는 대실패로 결말이 났다.

그나마 만들어진 수백만 톤 쇠붙이는 너무 품질이 낮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찌끄러기밖에는 되지 못했다. 거기다가 벌레를 잡아주는 새라는것도 모르고 참새를 해로운 새로 규정하는 같은 병크까지 터트려서 결과적으로 중국 전역에서 아사자가 수천만 명 단위로(!) 발생하자 덩샤오핑을 위시한 신진세력들이 마오쩌둥의 하야를 요구하고,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한 마오쩌둥도 국가주석을 류사오치에게, 당서기를 덩샤오핑에게 넘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직후로, 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던 마오쩌둥자신을 끌어내린 정적들의 정치적 생명력에 피해를 입히고, 잘 되면 다시 한번 권력을 잡으려고 중국 전체에 내분을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우선 자신이 아직은 상당한 발언력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부르주아자본주의 세력들이 다시 사회로 침투하고 있는데, 이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청년들이 바로잡아야 한다.라는 어조의 연설을 한다. 그 뒤 중국 전토 여기저기서 젊고, 앞뒤 안가리고, 신격화된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으로 불타는 청년들을 주로 모아 홍위병이란 집단으로 묶고 지원하게 하는데…

사실, 마오쩌둥이 이 부분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또 한 번 잘 탔다고 볼 수 있다. 역시 시대가 따라주어야… 당시에는 대약진의 실패로 공산당의 문제점이 드러나던 시기였고, 마오주의의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었지만, 관료주의의 폐해도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관료가 아닌 젊은층에서는 점점 관료주의에 대한 폐해가 지적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관료(일래야 관료)일 수가 없고, 게다가 당시에 마오를 까기에는 아직 사회주의 붕괴 테크트리를 못찍었다고 보면 된다.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기 위해서 까임을 진행할 때는 순차적으로 관료 → 당 → 수뇌부 순이 된다.

홍위병도 원칙적으로는 자발적인 조직이었다. 원래 마오쩌둥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밀리고 나서, 공산당 수뇌부는 마오쩌둥방 늙은이로 만들려 했다. 그 뒷방 늙은이 플랜은 다름이 아니라, 아무 실권없는 상징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 마오쩌둥 신격화라는 과정이 갑툭튀하기에 이른다.

3. 흑역사의 시작

3.1. 광기의 극단주의

자, 중국은 이제 대약진의 실패로 공산당의 집행능력 및 경제발전 능력에 심대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원론적으로 좋은 말만 하는 마오쩌둥의 신격화가 가중되었다. 이렇게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 마치 종교와도 같은 원칙에 대한 숭배가 벌어진다. 쉽게 말해 극단주의 플래그가 뜨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원칙적으로 하는 말은 사실 하나도 틀린 게 없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라.", "함께 고생하고 함께 이겨내자." 문제는 개념은 개념일 뿐 그것이 실생활의 목적이 될때 과정이 병크를 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홍위병이 자발적으로 생성되긴 했지만, 마치 이슬람 극단주의자 같은 무시무시한 과격파가 형성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결국 극단주의로 흐른 젊은이들은, 감히 마오쩌둥을 깔 생각은 못하고, 이게 다 관료주의와 우리 사이에 숨어있는 구 문화의 잔재 때문이다라며 관료를 까기 시작한다. 까는 이유는 다양했다. "경직된 관료", "주자파", "숨어있는 우파", "장제스 똘마니" 등등... 사실 당시 관료주의가 폐해로 지적된건 맞긴 맞으나 그렇다고 나라를 결딴내면 어쩌자는 거여...사실 당초 공격 대상은 부패한 관료와 마오주의를 안따르는 관료 및 구 문화의 잔재들이었으나, 역시나 통제가 안되는 집단들인지라 얼마 가지않아 사회 각 분야로 번지게 된다.[3]

쉽게 말해 무식하고 행동력만 넘치는 학생들이 중국을 온통 개판 5분 전으로 만들고 분열시키면 당연히 지도부 놈들이 짤리겠지. 어디 한번 같이 죽어봐라.라는 마오쩌둥의 이유와 이러한 목적으로 방관한 결과 탄생하게 되었다.

3.2. 그들의 행각

문화 혁명과 홍위병은 한때 중국의 내정을 거의 초토화 레벨로 몰고 갔는데, 청소년들이 교수, 예술가, 학자 등등 지식인정치인 등을 끌고 나와서 길거리에서 공개처벌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핵미사일을 만드는 로켓 과학자들까지 반동 지식인으로 몰려서 두들겨 패고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버렸다.[4] 거기에 정부기관 등을 무력으로 장악(!)하기도 하고, 음악무술, 전통문화 등은 죄다 부르주아 시대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며 금지(음악의 경우는 당에서 허가하는 음악만 가능), 마오쩌둥의 전투적인 지시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길거리의 모든 거리 이름과 간판 등을 죄다 '화약냄새'나 폭탄, , 따위, 그 외 혁명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으로 바꿔버렸다고 하니 이게 얼마나 미친 짓거리였는지 알 수 있다. 한편, 홍위병은 군대경찰조차도 자신들이 어떻게 하고 싶어했으나 차마 그러진 못했고 한편으론 군대와 경찰에도 홍위병이 시키는 건 될 수 있으면 들어주고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5]이들이 벌인 가장 큰 병크신호등의 빨간등이 정지신호란 것은 말이 안되며, 혁명을 상징하는 적신호는 전진신호가 되어야 한다고 이를 바꾼 것.[6] 이것 말고도 자동차의 우측통행조차 '미 제국주의자들의 유산'이라고 바뀔뻔 했으나, 누군가가 '영 제국주의자들은 좌측통행'이라 지적해서 흐지부지됐다고. 잘들 논다 문화유산에 대한 파괴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서 작게는 명나라 도자기, 서예, 고화를 비롯한 개인적 소장품에서부터 크게는 공자 사원, 절, 성, 궁궐같은 거대 유산들을 파괴했다. 애완동물도 반동이란 이유로 닥치는대로 압수했다고 한다.[7]

문화혁명 후반부에 들면 홍위병의 분파끼리 권력투쟁이 벌어졌는데, 말이 좋아 투쟁이지 총기까지 동원한 내전에 가깝다고 한다. 연길의 경우 홍위병끼리 강을 사이에 두고 영역을 확장한다음 시가전을 벌였다는 증언도 있다. 북경에서는 중국 최고 대학들이라는 베이징 대학칭화 대학 소속 홍위병 부대들이 충돌, 각 부대에 소속된 공돌이들이 각자 작업장에서 총기와 장갑차까지 만들어글라놀로지 상대방 캠퍼스로 쳐들어가는 사태도 터졌다고.리얼 연고전

당시의 홍위병은 크게 두파로 나뉜다. 초기의 보수파와 후기의 조반파. 여기서 말하는 보수파는 진짜 보수주의를 뜻하는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에 보수적인 입장과 방법으로 일관한 패거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초기의 무력투쟁 병크나 사원, 유적에 대한 공격은 대부분 이들이 저질렀다고 한다. 게다가 출신성분이 좋았기 때문에 문화혁명 초기에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져도 별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보수파나 조반파들은 마오동지의 어록이 적힌 마오어록을 끼고 살았으며 자기 교과서 암기도 제대로 하지 못한 청소년들이였지만 마오어록은 이미 정복해서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외웠고 너무 자주 읽어서 책겉표지가 시꺼메진 적도 많다고.

반면 조반파들은 순수하긴 했지만 뭔가 병신같고 멋도 없는 아이들이었고, 후기의 파벌 싸움이나 고문은 대부분 이들이 저질렀다. 다행히도 70년대에 들어서는 이런식의 병크는 잦아들고, 하방활동[8]을 하거나 70년대 중반의 중국 대지진 때 다같이 구호활동에 나서는듯 좋아보이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먼저번에 벌여놓은 살육파티는 어쩔건데

홍위병의 준동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회상하는 이들도 중국에 다수 존재한다.[9] 그 당시에는 모두들 대문조차 닫고 살지 않았고, 배가 고프면 옆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비록 마오주의에 한정되어있긴 하지만 자유롭게 집회를 열 수 있었고, 젊은이들은 단체를 만들어서 지역 기관에 "사무실 좀 달라"고 신청하면 얼마든지 사무실을 내어주었고, 신문과 잡지를 발행할수 있었다고 하며 당국의 검열이 손에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어째서 모두들 대문조차 닫고 살지 않을수밖에 없었는지, 어째서 배가 고프면 옆집에 가서 반드시 밥을 먹을수가 있었는지는 문화대혁명 항목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3.3. 후폭풍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을 비롯한 지도층은 권력에서 물러나고, 그 사이에 마오쩌둥이 다시 한번 권력을 잡게 된다. 그냥 물러난 정도가 아니라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는 홍위병에게 잡혀가 처참하게 고문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고, 당서기 덩샤오핑도 죽지 않을만큼 쳐맞고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을 정도. 그의 아들 덩푸팡은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걸로 자살을 시도했다. 살아남기는 했지만 평생 하반신 불구로 살게 되었고, 이걸 계기로 장애인의 인권을 위한 운동가로 활약했다. 물론 부정부패 건으로 구설수에 올랐지만

하지만 마오조차도 홍위병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홍위병 일파들은 파벌분열과 반목을 하여 자기들끼리도 싸움질을 벌이게 되었으며, 심지어 마오쩌둥의 아버지가 부농이라고 공격하는 대자보를 붙이기에 이른다.[10] 결국 마오쩌둥은 1968년 7월 28일 공산당 지도부에서는 홍위병 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운동의 정지를 명했고, 68년에서 69년에 걸쳐서 '상산하향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젊은 학생들은 농민에게 배워야 한다'면서 학생들을 농촌으로 추방해버린 것으로, 처음에는 젊은이들도 좋아서 따랐지만 곧 그들은 낙후된 중국 농촌의 현실에 짓눌리고 말았다. 이 조치는 홍위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있지만, 이 역시 너무 지나치게 한 나머지 젊은 인재들이 모두 도시에서 빠져나가고 '학력붕괴'가 일어나서 무학자 세대가 생겨났다고 할 정도로 중국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아무튼 문화혁명은 1976년에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마오쩌둥 사후 당연히 X됐다. 덩샤오핑이 다시 복귀하고 사회가 다시 건전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게 되면서, 문화대혁명 자체가 중국에서도 까이는 추세라[11] 당시 홍위병이었던 자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조차도 시골지역 등에서 은둔해 살면서 자신이 홍위병이었다는 이야기는 입도 뻥긋 못하며 몸사리며 살고 있다고 한다. 더 무서운건 그들중 대부분이 과거를 뉘우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많다.

현대 중국의 정치/경제 엘리트 가운데 이공계 출신이 많은 것도 홍위병의 파괴적인 행각과 관련이 있다. 공산주의 국가야 원래 체제 통제 + 계획 경제 때문에 제대로 된 인문사회과학이 성장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개중에서도 중국은 유난히 문과 출신 엘리트가 맥을 못 추는 경향이 있었는데[12] 문과 출신 엘리트들이 다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문화대혁명 때문에 인문사회과 학계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나 공학자들도 힘들게 살긴 마찬가지였지만 문과 출신 학자나 엘리트들이 겪은 고충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4. 평가

중국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 문화는 여러차례 위기를 맞아왔다.
내부적으로 수많은 백성들의 반란, 군웅들의 난립, 대외적으로는 이민족들의 침입이 있었고, 비록 왕조가 여러차례 바뀌고 때로는 이민족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중국의 문화와 전통은 꾸준히 계승되었으며 이민족의 문화까지 융합하여 양적, 질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전승되어왔던 문화를 한명의 지배자 또는 타민족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국인들 스스로 철저하게 파괴했다.

한국에서 이 단어가 대중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김대중 정부 초기에 소설가 이문열이 한국의 진보세력을 홍위병으로 지칭하면서 시작되었다. 무조건적인 외세배격, 정치가 개인에 대한 종교적인 지지, 유산계급에 대한 증오, 절차(법)를 무시한 정의실현, 폭력적인 면 등을 홍위병와 한국 진보세력의 유사성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13] 하지만 이문열이야 원래 수구보수적인 입장에서 프로파간다적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이문열의 끼워맞추기식 마녀사냥적 언플기법은 4인방의 비슷하다고 봐도 된다.

6.25 전쟁 중에 벌어진 좌우익간의 살인-보복극이 멈춘 후, 한국에서도 옛 시대를 잊고 새롭게 미국풍, 서구풍으로 시작하자는 사고방식이 주류였다. 1957년 미국에서 한국 문화재 전시가 열리자 놀랍게도 한국인들이 고리타분한걸 잊어야 하는데 부숴버려야할걸 왜 전시하느냐 시위를 벌인 충격적인 실화가 있다. 뭐 당시에는 "전통 = 유교 = 나라 망친 것"이란 편견이 팽배했던 시절이기도 하지만, 숭례문이 불탈때 비슷한 소리를 하던 이가 재미교포 사이트에서 글을 쓰던 걸 보면 지금도 남아있다.[14]

5. 여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는 "청두의 홍위병"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내용에 따르면 마오쩌둥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에 인구가 너무 많이 넘쳐나자 소개(疏開)하기로 하고, 아이들은 홍위병교육대라는 이름만 교육대인 노동 수용소로 공산주의 교육을 시키러 보냈고, 톱밥으로 만든 섬유질 음식을 아이들에게 먹이는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이며 홍위병을 책임지고 있었던 린뱌오가 불명예 퇴진하자, 당 간부들은 홍위병 아이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아이들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자신들의 선생들을 마구 때리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삼게 되었고 정품 어록을 전파한다는 구실로 나라 전역에 흩어졌는데, 사실 이 아이들은 중국을 탈출하고 싶어 했고 그 방법으로 기차역을 선택해 기차를 타고 모두 서쪽으로 떠나게 된다. 당시에 서쪽에는 은밀히 국경을 넘어 인도 땅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걸 아이들이 믿었다고 카더라. 하지만 당시 이 열차들의 종점들은 모두 성도(청두)였고, 13살에서 15살된 아이들 수천 명이 이 성도에 모이게 된다.

처음에 아이들은 홍위병 수용소에서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고, 성도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동정하여 맛있는 것을 제공하고 먹여주었으며 잠잘 처소와 따뜻하게 입을 것을 주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성도로 홍위병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처음에는 1,000명 정도였던 홍위병 아이들이 곧 20만명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결국 시민들의 호의는 아이들을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었고, 좀도둑이 횡행하게 되었으며, 이를 거절한 상인은 강탈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상인들은 시장에게 호소하였으나 아이들이 그를 불러 공개 자아비판대에 넘겨버리고 구타해 시장은 도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은 새 시장 선거단을 구성하고 "자신들"의 후보를 내세웠다. 그 후보는 뺨이 오동통한 13살의 꼬마였는데 실제 나이보다 더 먹어 보였으며 일종의 카리스마가 있어 다른 홍위병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별 어려움 없이 선출되어 시의회 의장이 15살인 아이들의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좀도둑은 더이상 위법행위가 아니었다. 모든 상인들은 새 시장이 만들어 낸 세금을 내어야 했다. 모든 주민들은 홍위병들에게 살 집을 제공해야 했다. 하지만 성두가 워낙 서쪽 변두리 도시라서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다가, 일부 시민이 지역의 도지사에게 이를 알리러 사절을 파견하였다. 사절은 이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베이징에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보내달라고 진정하였다. 그래서 성도로 전차와 중무장한 수천명의 군인을 보냈는데, 이 때 내려진 명령은 "15세 이하는 모두 죽여라"였다. 아이들은 맞서 싸웠지만 시민들은 모두 자기 아이들을 보호하느라 바쁘고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했으며, 이틀간의 공격끝에 모두 살해당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대통령 리챠드 닉슨과 마오쩌둥이 회견하게 되어있으므로 중국을 비판하기에는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실린 내용 그대로 믿으면 골룸 (…)

제프리 디버링컨 라임 시리즈 중 "돌원숭이"라는 작품에서, 범인이 과거에 홍위병들에게 시달린 걸로 나온다. 작품이 작품인지라 홍위병 얘기는 몇 장만 하고 넘어가지만, 그래도 해당 작품이 전반적으로 동양(이라기보다는 중국)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읽어볼 만 하다.

6. C&C 제너럴

왜인지는 모르지만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에서 중국의 기본 보병 이름이 홍위병이다. '위아 더 레드가드스~'
원래는 튼 대령처럼 근접한 보병을 총검으로 찌르는 총검술이란 스킬이 있었는데 밸런스 보정으로 삭제됨. 인해전술을 중시하는 중국답게 한번에 2명씩 생산.

보병장군은 미니건을 들고 있는 업그레이드 버전 니거너 생산이 가능한데(한낱 한 명 인간이 미니건을 손에 들고다닌다), 대공능력이 매우 좋아 비행가 우수수 낙엽떨어진다. 그래선지 탱크 헌터보다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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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단, 'Red Guards'란 말은 러시아핀란드에서 일어난 적백내전적군을 가리키기도 한다. 위키피디아에서도 홍위병을 가리키는 표제어는 (China)라는 괄호 표기가 되어있다.
  • [2] 중국은 국군이 없다. 인민해방군은 당군(黨軍).
  • [3] 여담이지만 당시 서양의 68혁명세대들이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을 지지한 이유는 이러한 관료주의에 대한 반대였다고 한다.
  • [4]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을 보면 이 당시의 미친 사회상황이 잘 드러나있다. 주인공 부부가 임신한 딸을 데리고 대학병원에 갔더니 의사인 교수는 조리돌림 당하러 끌려가고 학생만 있다던가(...) 의사라고 자처하는 애들은 책 본 거 말고는 실습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애들이라던가(...)
  • [5] 나중에 가서는 홍위병도 통제가 안 돼서, 공장 노동자들이 홍위병들에게 제발 투쟁을 그만 두라며 파업을 하기에 이르기도 하고, 마오쩌둥이 부랴부랴 "무투 말고 문투를 하라."고 지시해도 씨알도 안먹히는 상황이 펼쳐진다. 말그대로 망했어요.
  • [6] 영화 마지막 황제 끝부분을 보면 잘 나타나있다.
  • [7] 문혁 당시 홍위병이었던 화가 장안거의 증언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집안은 흑오류, 즉 반동으로 몰려서 갖은 고초를 당했고 반동집안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홍위병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집 옆에 어느 노인이 많은 비둘기를 길렀는데 홍위병들이 비둘기를 압수하려고 몰려들자 노인이 커다란 식칼을 들고 "내 비둘기를 건드리는 놈은 내가 죽여주마."라고 버티고 서서 겁에 질린 홍위병들이 물러났다고 한다. 흠좀무.
  • [8] 마오주의 특유의 "농촌에서 배우라"라든가 "농민과 함께 하라",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라"는 전략에 의거한 활동. 일종의 나로드운동같긴 하지만, 혁명의 역량이 농민이라고 규정하고 농촌을 혁명의 근거지로 삼는 마오쩌둥주의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활동이다. 그러나 이것도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는 그럴사한 농촌 게릴라 활동이겠지만, 이미 이때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이고, 그냥 농촌봉사활동 내지는 귀농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쉽게말해 마오쩌둥이 처치곤란한 홍위병들을 단체로 시골에 짱박은 것
  • [9] 출처 : "문화 대혁명, 또다른 기억"
  • [10] 홍위병은 타국의 공산권 지도자에게도 비판을 멈추지 않았는데, 김일성수정주의라고 깠다! 일단 맞는 말이지만 넘어가자
  • [11] 마오쩌둥의 과 3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 그리고 마오쩌둥 말기엔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발감이 엄청나게 커서 마오는 물러나시오! 같은 시위도 자주 일어났다.
  • [12] 개혁개방 이후에는 이런 현상은 많이 없어졌다.
  • [13] 대한민국의 운동권의 주류가 유산계급에 대한 증오, 외세배격, 절차(법)를 무시한 정의실현이란 성향을 띄긴 했지만, 당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야한다. 군사정권을 상대로 평화적인 대화로 해결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너무나 이상주의적이다. 물론 냉소적으로 이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은 편이 아니며(자기들의 뜻을 같이 하지 않으면 적으로 인식하는 행위 등에 대한 피해를 입는다던가), 이는 68운동과 맥락을 같이 한다. 68운동은 아직 낭만주의적으로 시대에 저항하는 운동이라 묘사하는 편과 정의를 구실로한 무작위적인 폭력이란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 [14] 아이러니한 것은 대한민국의 경우 개신교 예수쟁이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극과 극은 원래 통하는 법이지. 물론 이 경우는 정반대로 '전통=우상숭배적이고 비성경적', '서구문화(1960년대 이전)=성경적이고 근대적'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벌어진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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