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홍현우

last modified: 2015-03-08 21:30:10 by Contributors


이름 홍현우(洪炫佑)
생년월일 1972년 9월 28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광주광역시
출신학교 광주상고
포지션 2루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고졸연고자유계약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1990~2000)
LG 트윈스(2001~2004)
KIA 타이거즈(2005)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5번 (1990~2000)
차영화(1982~1989) 홍현우 (1990~2000) 정성훈(2002)
LG 트윈스 등번호 33번 (2001)
김상호(1999~2000) 홍현우 (2001) 박용택(2002~)
LG 트윈스 등번호 5번 (2002~2004)
안재만(1997~2001)[1] 홍현우 (2002~2004) 안재만(2005~2007)[2]
KIA 타이거즈 등번호 38번 (2005)
소소경(2004) 홍현우 (2005) 박정규(2006~2009)
1995, 1996, 1997년 한국프로야구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한대화(LG 트윈스) 홍현우(해태 타이거즈) 김한수(삼성 라이온즈)

Contents

1. 소개
2. 프로 선수 시절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2.2. LG 트윈스 시절 흑역사
2.3. KIA 타이거즈 시절
3. 은퇴 후
4.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커리어 초기에는 해태 최연소 4번타자, 중기에는 이종범에 가린 비운의 2인자, 중후반기에는 종범이가떠난 해태의 마지막 자존심, 그리고 말기에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게 만드는 먹튀

前 야구선수. 등번호는 5번(해태) - 33번(LG, 2001) - 5번(LG) - 38번(KIA, 2005) 96,97 시즌 해태가 한국시리즈 2연패를 했을때 이종범과 투톱을 이룬 선수였다. 어찌보면 이종범의 그늘에 가린 2인자라고 할 수 있다. 양준혁과 더불어 팀의 중심타자로서 볼넷을 골라내는 능력을 갖춘 '눈야구'의 황제[3] .. 이 친구가 30대 중반까지 활약했다면..

1990년도에 해태 타이거즈에서 데뷔, 10년을 뛰고 LG에서 04년까지 4년간 선수생활을 했다. 마지막엔 다시 KIA로 넘어와 1년을 더 뛰고 2005년 은퇴.

해태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LG 트윈스의 흑역사. 한국 FA시장 최악의 먹튀이자 이후 진필중 - 마해영 - 박명환으로 이어지는 LG 먹튀계보의 시발점.

잔털 하나없는 빡빡 민 머리[4]로 인해 '홍미륵'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LG팬들은 그 별명조차 부르기 싫어해 '그분'이라고 부르며 깐다. 해태 전성기 시절 별명은 "젊은 그대".

종합적으로 평가하자면 이종범의 신인 시절 이전부터 이미 해태의 4번을 차지하던[5] 해태의 최연소 4번타자, 90년 중반 타이거즈의 제 2차 전성기에 이종범과 함께 타이거즈의 타선을 이끌던 이끌던 투톱. 이로 인해 젊은 그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점 보다 FA흑역사 때문에 LG는 물론 타이거즈 팬들에게 마저도 잊혀진 불운의 선수. 금전적으로는 대박을 이루었으나 명예는 잃은 비운의 선수.

페스트 스타터였다. 매년 올스타전 즈음 홈런5걸에 많이 들었다. 물론 수비부담 및 체력부담(그는 거의 매년 전경기출장)으로 인해 후반기 홈런이 줄어들긴 했지만 늘 10걸에 들었다.

2. 프로 선수 시절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한국프로야구에서 제이 데이비스, 박재홍과 더불어 3할-30홈런-30도루-100타점을 이룩한 단 세 선수 중 하나.[6]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주전을 꿰차 역대 최연소 1000경기 출장 (25세 11개월 12일)이라는 기록부터 7년 연속 100안타, 두자릿수 도루와 8년연속 두자릿수 홈런, 3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해태에서 선수생활을 할 당시는 국내 최고의 3루수였다. 홍현우를 믿고 코칭스태프와의 관계가 미묘했던 한대화LG 트윈스로 보내버릴 정도였으니.

한국시리즈에서도 상당히 강했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이종범과 2승을 올린 조계현에 묻혔지만 그야말로 그 둘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쳤다. 3차전에서 광주상고 1년선배인 박충식에게서 6회 솔로홈런을 터뜨리며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박충식의 181구 완투를 유도했으며, 5차전에서는 결승 타점인 희생플라이를 쳤다. 7차전에서는 이종범의 도루에 이어 적시타를 터뜨리기도 했다. 야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일 그의 홈런이 없었다면? 기력을 모두 소모하지 않은 박충식의 존재만으로도 시리즈의 향방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96년 시리즈에서 1차전에서 현대의 선발 위재영을 흔드는 2점 홈런을 터뜨리며 승기를 잡았으며 97년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서 김용수를 상대로 0:2의 불리한 상황에서 추격하는 솔로홈런을 쳐냈다. .

프로 첫 해에는 백업이었지만 91시즌부터 윤재호를 밀어내고 주전을 차지했으며, 92년부터 본격적으로 홍현우라는 이름을 알렸다. 2루수로서 0.333이라는 훌륭한 타율과 17홈런을 기록할만큼 준수한 장타력을 뽐냈고, 타점을 꼬박꼬박 올린 것은 덤이다.[7] 수비에서도 흠잡을 곳이 없었기에 골든 글러브도 기대할 수 있었으나 타율이 비슷했으며 우승 버프를 받은 박정태에게 밀려 골든 글러브를 놓치고 만다. 해태가 우승했다면 홍현우, 해태와 롯데가 아닌 빙그레가 우승했다면 백중세였을 것이라는게 중론. 더구나 92년은 이종범이 데뷔하기전..
93년은 타격성적은 전해에 비해 대폭 하락했지만 그해에 입단한 대졸신인 이종범과 키스톤콤비를 이루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고비떄마다 활약하며 그 해의 우승을 이끌었다. 94년부터는 한대화의 공백을 메우기위해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으나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고, 95년에는 이종범의 방위병 공백을 홀로 메운다. 해태는 그해 4위를 기록하며 팀방어율 1위(3.06)과 팀타율 7위(.242)의 엇박자 행보를 보인다. 그때 타선의 중심을 잡아준 선수가 바로 홍현우. 그가 있었기에 해태는 비록 4위에 머물렀지만[8] 선동열, 이강철, 조계현 등 투수진과 더불어 명가의 자존심은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올스타전 직전에 폭행시비가 나서 팬투표에서 선발되었지만 올스타전에 나가지는 못했다. 그 대신 주전으로 출전한 한화 이글스정경훈이 미스터 올스타를 받았다.

96년의 홍현우는 00년도의 김동주한테는 장타력에서 밀리지만 역대 최고의 3루수라 할 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0.332/0.453/0.533 의 기록적인 슬래시라인으로 0.986의 OPS를 남겼다. 96년은 KBO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투고타저의 시즌이었다. 0.346을 기록한 양준혁이 타격왕이었고 나란히 0.332를 기록한 이종범과 홍현우는 2,3위였다. (147/443의 홍현우와 149/449를 기록한 이종범, 역시 2모차이로 이종범의 승리였다. 굳이 따지면. 이종범은 초반 몇 경기를 방위로 빠졌음에도 저런 성적을 냈다는 점이 대단하다.) 타이거즈 선수의 개별시즌 역대 최고 출루율은 타율 0.393에 0.452라는 출루율을 기록한 94년의 이종범이 아니다. 96년의 홍현우이다. 96년에 97볼넷을 얻어나간 그대야 말로 눈야구의 황제.
96년의 타이거즈의 팀타율은 .245였다. 이종범과 홍현우를 빼면 팀타율 .219였다. 타이거즈의 V8? 그가 없었다면 절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종범이 방위여서 몇경기 못나올동안 96시즌 전경기 출전 선수였다.

97년시즌에 그의 타율은 다소 하락했지만 장타력은 상승하여 처음으로 20-20을 달성하며 팀의 V9를 견인한다. 98년에는 동열이도 가고 종범이도 간 탓인지 리그 중간이상은 했지만 .269 15홈런 69타점으로 방망이가 하락해버렸다.

놀랍게도 93~97시즌 그는 10개 후반~20개 초반의 홈런을 쳤지만 홈런 10걸에는 늘 들었다. 그때야말로 투고타저시즌. 이런 시기를 뛰었기때문에 홍현우의 누적기록 내지 비율기록은 요즘에 보기엔 낮아보일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그렇게 꾸준하면서 2,3루를 동시에 볼수있는 선수의 가치상승은 당연한 것이었다.

99년 시즌은 그야말로 그의 전성기였다. 비록 타고투저의 영향은 있었어도 2루수로만 시즌의 대부분인 123게임을 뛰면서 30-30을 이루었으며 2루수로서 쳐낸 34홈런은 87년 김성래가 홈런왕을 달성하면서 쳐낸 22홈런과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으며 2014시즌의 나바로조차 넘지 못했다. 3할타율까지 기록했다. 말그대로 양준혁과 클린업을 이룬 우산효과와 더불어 종범이형보다 난 더 홈런을 잘칠수있다!! 절규하면서 타이거즈의 마지막의 불꽃을 태우던 영웅 오히려 이러면서 팀성적+인기때문에 박정태에게 골든글러브까지 못 탄건 좀 그렇다 하지만 이 당시 타고투저의 영향으로 홈런이 빵빵 터지던 때였고, 그 때문에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무리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장타력을 보강하여 역대급 성적과 선수 생명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 FA로이드도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트레이시 샌더스와 홍현우, 양준혁의 홈런쇼로 해태는 역대 최초로 잠실구장에서 1점대 이상의 평균 홈런을 기록한다 [9] 정작 FA 전이었던 2000년은 부진했지만 그 이전의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젊은 나이 덕에 그해 FA 최대어로 떠올랐다.

90년대의 해태왕조 하면 우리는 흔히 이종범임창용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종범이 너무 찬란한 성적을 남겼고, 임창용은 76년생으로 한국시리즈에서는 96,97시즌에서만 활약했다. 더군다나 삼성에서 뛴 기간이 더 긴 삼성의 레전드 투수이다. 홍현우가 활동한 90년대를 떠올리자면 현대의 03,04의 박진만, 정성훈 그 이상이라보면 된다. 그보다 잘하면 잘했지 못하진 않았다.

플레이스타일은 삼진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삼진 수를 능가하는 볼넷을 얻어내는데다 장타력까지 갖춘 ops머신이었다. 출루율왕을 차지한 1996시즌엔 이종범과 거의 차이가 없는 WAR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홍병살이라는 별명은 근거가 없는것이 1995시즌에 전경기 출장을 했음에도 병살타는 단 1개에 불과했다.(물론 많이 친 해도 있긴 했다.)

해태시절을 본다면 그는 리그의 최고타자 양준혁, 김기태, 팀선배이지만 해태에서는 고졸로서 더 오랫동안 팀을 지킨 홍미륵이종범 그리고 당시 기준으로는 떠오르는 이승엽과 비교해본다면 조금은 부족했으나 그들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꾸준한 성적을 올리는 이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이종범을 제외하고) 코너 외야수나 1루를 맡았던 이들과 달리 비교적 수비 부담이 큰 2루와 3루에서 멀티 포지션이 가능했다. 게다가 고졸인데다 팀에서 빠르게 자리 잡은 덕분에[10] 29세라는 굉장히 젊은 나이에 FA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2000년 당시 생겨난 FA제도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렸다.[11]

김한수와 비견되기도 한다. 물론 누적스텟이 만만치 않은 김한수도 뛰어난 3루수이긴 하다. 하지만 홍현우보다 작아보이는건 90년대 겪어본 사람만이 알듯.[12]

2.2. LG 트윈스 시절 흑역사


2000시즌 종료후 FA가 되어 4년간 18억의 거액을 받고서 LG 트윈스로 이적한다. 그런데... 그는 먹튀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LG에서 그의 성적은 처참할 정도였는데 통산 2할9푼을 왔다갔다하던 타격은 2003년(.238)을 제외하고 2할을 넘겨본 적이 없으며 4년동안 221게임에만 출장하며 홈런은 14개, 도루는 2개를 기록하는 등 진정한 추락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추락한 원인은 밀레니엄 버그 때문 FA를 앞두고 무리하게 파워를 끌어 올리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미친듯이 했는데 그것이 무릎 부상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13] 참고로 위키백과에 따르면 홍현우가 LG시절에 친 안타를 돈으로 환산하면 안타 1개에 약 1,117만원, 홈런 1개에 1억5,714만원[14], 그리고 도루 1개에 9억원을 투자한 셈이라고 한다. 흠좀무. 거기다 준주전으로 뛴 2003년을 제외하면 거의 매 시즌 부상 및 2군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사실, 박동희의 인터뷰에 따르면 금액은 SK측이 LG보다 더 많이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큰 무대에서 놀고 싶다는 마음에 LG와 계약을 했는데, 자신은 이것을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잠실구장이 워낙 넓다보니 해태시절에는 타격 슬럼프에 빠져도 홈런 한방 치면 금세 회복이 되었는데, 잠실에서는 바로 펜스앞에서 잡혔던 타구가 유독 많아서 힘들었다는 고백. 홍현우의 타격이라면 당시 가장 짧은 구장을 사용하던 SK를 선택하는게 맞았다. 도원구장은 좌우측이 91미터였던, SK가 195피홈런을 기록했던 구장이다.

2.3. KIA 타이거즈 시절

결국 2004 시즌 후 이용규와 함께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이원식소소경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친정 팀에서도 제대로 뛰지 못해서 KIA를 꼴찌로 떨어뜨려 버리고 결국 2005 시즌 후 KIA에서 방출되어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15]

3. 은퇴 후

지금은 순천시에서 스포츠센터(덤으로 찜질방)을 운영하고 있다가, 동성고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동성고 감독이 편찮았었을 때에는 감독 대행을 맡았다고 한다.

2009년 광주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해태 타이거즈 레전드 올스타중의 한 명(2루수)으로 선정되어 그라운드를 밟았다.[16]

2014년 현재는 동강대학교 야구부 타격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야구부 감독은 해태시절 선배인 문희수
어째 현역시절 날리던것에 비하면 지도자인생이 많이 후달린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해태 타이거즈 51 77 .169 13 3 0 1 5 4 0 8 .247 .244
1991 91 226 .292 66 17 2 8 29 36 3 28 .491 .367
1992 126 420 .333
(3위)
140
(3위)
25 3 17 97
(2위)
87 6 89 .529 .447
(2위)
1993 123 446 .262 117 21 1 13 61 56 10 68 .401 .355
1994 126 463 .272 126 20 2 16 72 70
(5위)
14 54 .428 .347
1995 125 465 .305 142
(2위)
24 1 16 65 63 34
(4위)
62 .465 .385
1996 126 443 .332
(3위)
147
(3위)
30
(3위)
4 17 67 83
(3위)
18 101 .533
(4위)
.453
(1위)
1997 126 436 .271 118 29 0 22 79
(4위)
73 20 93 .489 .395
1998 126 442 .269 119 24 1 15 62 80 13 82 .430 .381
1999 129 487 .300 146 26 0 34 111
(4위)
99 31 67 .563 .382
2000 88 291 .234 68 16 2 14 50 42 12 67 .447 .374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LG 트윈스 60 182 .198 36 9 0 2 16 18 1 30 .280 .310
2002 25 68 .118 8 3 0 1 8 3 0 5 .206 .173
2003 97 286 .238 68 12 3 9 27 34 1 41 .395 .332
2004 39 95 .179 17 5 0 2 12 11 0 7 .295 .229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5 KIA 타이거즈 25 59 .220 13 3 0 1 1 6 0 3 .322 .258
통산(16시즌) 1483 4886 .275 1344 267 19 188 762 765 163 805 .453 .375
----
  • [1] 시즌 중 장재중+유현승을 상대로 SK에 트레이드 되었다.
  • [2] 김재현의 FA 보상선수로 돌아왔다. 때마침 홍현우가 이적하는 바람에 다시 등번호 5번을 달게 된 것이다.
  • [3] 이 둘은 1년뿐이긴 하지만 같은 팀에서 뛰었다. 99시즌 해태에서 양준혁이 주로 3번, 홍현우가 4번을 쳤다. 그 일년간 둘이 합작한 기록은 자그마치 .312 66홈런 52도루 216타점. 00년 두산의 우동수가 있고 03년 이마양이 있다지만 도루수를 고려한다면 생각한다면 이쪽도 크게 꿀리지는 않는다. 게다가 99년의 해태에는 전성기에 돌입하던 장성호와 .247/.408/.575 40홈런변태 스텟을 기록한 트레이시 샌더스까지 있었다. 홍현우-양준혁 라인의 연속타자 50-50(홈런-도루)는 최초였으며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12년의 박병호-강정호가 56-41을 기록하긴 했다.
  • [4] 머리숱이 워낙 적었기 때문에 20대 시절부터 가발을 쓰고 다닐 정도였다고. 결국 거추장스러웠던지 95년 2월 전지훈련 때 아예 빡빡 밀어버렸다고 한다.
  • [5] 김성한,한대화가 노쇠화로 서서히 실력이 저하되면서 4번타자를 하게되었다. 물론 홍현우가 잘했던것도 있고....
  • [6] 하지만 기절초풍할 노릇인게 이 기록을 달성한 99년의 홍현우는 박정태에게 네임밸류+팀성적에 밀려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했다(!!) 게다가 동년도에 똑같이 3-30-30-100을 기록한 앞서 언급한 제이 데이비스 또한 스탯이 딸리는 정수근에게 밀렸다. 대단한 기레기
  • [7] 그해의 홍현우는 전설인 빙그레 이글스장종훈에 이어 2위인 97타점을 기록한다. 김기태는 그에게 밀려 3위인 96타점을 기록한다. 참고로 이해에 기록한 97타점은 역대 만 20세 선수의 기록 중 최다이다. 이승엽의 114타점은 21세에 기록한것이다.
  • [8] 당시 3,4위와 3.5게임 이상 차이나면 준플레이오프는 치루지 않는다라는 규정때문에 해태는 4위를 차지하고도 포스트 시즌에 나가지 못했다. 이 규정은 98년까지 존재하다가 양대리그에서 다시 단일리그로 바뀐 2001년 폐지되었다.
  • [9] 이 시기부터 매니 라미레즈를 보며 벌크업을 했다고 한다. 99시즌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후 급격하게 추락한 것은 이 벌크업의 부작용인 무릎 부상일지도 모른다.
  • [10] 2년차인 91년 시즌에 91게임을 뛰며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 [11] 2014년 FA자격을 얻게되는 최정이 홍현우와 비슷한 점이 많은데(3루수, 3할+20-20을 기대할수있는 성적, 30세가 되지 않은 나이) 국내에 남는다면 100억을 노릴 수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걸 생각해보자.
  • [12] 홍현우와 김한수는 동기인데, 홍현우는 1990년에 고졸로 프로에 입단해 90년대 해태에서 4번을 치면서 일찍부터 활약했지만 반면 김한수는 대학을 거쳐서 1994년 이라는 비교적 늦게 입단했다. 거기에 홍현우와는 달리 김태균,김태룡 같은 경쟁자들이 있었기에 주전자리를 늦게 확보했다. 그것 말고도 김한수는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줬지만, 홍현우와는 달리 그의 전성기 때도 장타자가 아니고 주루도 뛰어난 선수가 아니다보니, 홍현우가 홈런 뻥뻥 치고 도루 하는것을 직접 보던 90년대부터 야구팬인 사람이라면 김한수가 홍현우보다 작아보이는건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다만 2000년대 초반부터 야구를 본 팬이라면 2000년대 초반에 김한수가 각성하고, 동 시기에 홍현우가 퇴물로 전락했기에 오히려 김한수를 더 높게 쳐준다.
  • [13] 흔히들 LG 이적 후 부상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부상은 FA 직전시즌인 2000시즌에 당했다. 그리고 그 시즌에 전년도만 못한 성적을 거두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FA 직전시즌에 무릎부상으로 한 시즌의 성적이 거의 떨어졌으면 가치가 하락해야 정상인데 99년에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뛰어났고 고졸데뷔라서 나이도 젊은편이라 회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LG가 저렇게 지른 것. 물론 당시에도 무릎부상을 우려하는 의견은 있었지만 그냥 묻혔다.
  • [14] 웬만한 선수의 연봉 수준이다!
  • [15] 당시에는 홍현우에 대한 부활의 기대감이 있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버려서 KIA가 큰손해를 볼뻔 했다. 하지만 트레이드 과정에서 저울추를 맞추기 위해 타율 .125에 장타력도 없는 발만 빠른 외야 유망주를 LG에서 내줬는데 그게 바로 이용규 모두가 알다시피 이용규는 이후 리그 최고의 1번 타자로 각성하게 된다.
  • [16] 근데 홍현우는 2루수를 경험한 적이 있지만 3루수 포지션도 많이 봤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유격수도 맡은 적이 있다. 2루수로서는 30-30을 달성한 적은 있지만 또 다른 2루수였던 김종국이 존재했었고, 골든글러브도 3루수로서만 받았기 때문에 3루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편. 거기다 잘 할 때마다 박정태에게 밀려 2루수로는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했다. 사실 커리어하이는 2루수 때. 이 때에는 정성훈이 유격수로 활동했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3-08 21:30:10
Processing time 0.2197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