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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last modified: 2015-04-07 23:34:20 by Contributors

한자: 華僑, 海外華人
영어: Overseas Chinese
독일어: Auslandschinesen
러시아어: Хуацяо

화교는 중화민국 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활동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華라는 한자는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화인(華人)이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따 온 것이며 僑는 가주거(假住居)를 의미한다. 이 명칭은 중국인 스스로를 높이는 것으로 중립적인 명칭으론 국외 거주 중국인이지만, 워낙 화교란 말이 널리 쓰여 한국과 일본에서는 편의상 화교라고 부른다. 특이하게도 러시아어 표현에서는 화교의 중국어 발음을 그대로 음차한 단어가 정착되어 있다.

화교 출신이 하는 가게는 화상(華商)이라 부른다. 화상이 운영하는 요리점은 중국 요리 퀄리티가 일반적인 중국집보다 훨씬 높을 가능성이 높다.


간판에 화상(華商)이라는 표현이 있는 일례.


간혹, 화교임에도 간판에 화상이라 쓰지는 않고 가게 안팤에 아래위가 뒤집힌 복(福)자만 거는 곳도 있다. 그리고 화교가 하는 음식적이면 은근히 빨간색 치장이 많다. 한국에선 인천이나 연희동, 연남동 쪽에 화교들이 하는 중식당이 꽤 있다.

Contents

1. 어느나라 사람이 화교인가?
1.1. 화교의 주요 구성원
1.2. 금의환향
2. 전세계 분포도
2.1.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화교
2.2. 동남아시아의 화교
2.3. 일본 화교
2.4. 대한민국의 화교
2.4.1. 한화의 역사
2.4.1.1. 구한말
2.4.1.2. 일제 강점기
2.4.1.3. 해방공간
2.4.1.4. 전쟁과 그 이후
2.4.1.5. 현대에 이르러
2.4.1.6. 한국 화교들의 정체성
2.4.1.7. 맺으며
2.4.2. 화교 현황
2.4.3. 신화교
2.4.4. 대표적인 한국 화교
2.4.4.1. 화교설이 도는 사람
2.4.5. 한국내 화교의 대우
2.4.5.1. 화교 탄압에 대한 비판
2.4.5.2. 화교 탄압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론
2.4.5.3. 재반론
2.4.6. 경제위기 당시, 화교에 대한 루머
2.4.7. 한국내 화교의 거주지역
2.5. 북한의 화교
2.5.1.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을 떠난 화교
2.5.2.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을 못 떠난 화교
2.6. 아프리카의 화교
3. 화교 캐릭터
4. 서브컬쳐에서의 화교

1. 어느나라 사람이 화교인가?

관공서의 서류에는 중국 국적(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모두)이라고 표기하니 중국인이다. 단, 특정 나라의 시민권등을 취득하여 중국 국적을 포기한 경우에는 화교에 포함되지 않으며 현존하는 한국의 성씨에 속하는 한족계 성씨 후손들도 6세대 이상 넘어오면서 한국에 동화할 대로 동화했으니 화교라고 부르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화교와 화인, 화예로 나눌 수 있다.

화교는 중국국적을 유지하며 해외에 체류하는 중국인이며 화인은 현지 국적을 취득했으나 중국계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자, 화예는 현지 국적을 유지하며 자신이 중국계의 후손임은 아나 중국계 커뮤니티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말한다. 한국의 한족계 후손들은 굳이 따지자면 화예의 후손이라 볼 수 있겠다.

1.1. 화교의 주요 구성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즉 청나라중화민국 등 구중국 시대에 이주한 구화교의 경우 주로 광동성복건성 출신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화교의 경우에는 문화대혁명 이후 여행금지가 풀리면서 상하이베이징계 화교가 증가하는 추세다. 홍콩 반환 이후 이주한 홍콩계 화교도 늘었다.

흔히 중원문화, 중화문화 등으로 표기되는 중국식 문화에 대한 집착이 강하여 거주지에서 자국어(중국어)를 사용하는 구역(차이나 타운)을 만들어 생활 한다. 쉽게 말해 화교가 활동하는 시가지=차이나 타운이란 소리다.

1.2. 금의환향

중국을 떠난 화교들은 해외에서 돈을 벌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금의환향 개념이 강했다. 이는 중국 내에서 하층민이었던 그들의 처지와 중화사상이 섞여 빚어낸 마음가짐이라 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현지에서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끼리 커뮤니티를 이뤄 몇 대씩 자기들끼리만 교류하고 현지언어를 아예 배우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화교들의 태도로 인해 동남아 등에서는 화교들을 향한 폭동이 몇 번 일어났다. 특히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반화교 폭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말레이시아는 아예 화교가 많은 싱가포르를 강제 독립시키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인들은 화교 커뮤니티를 유지하되 현지인들과 섞여 사는 쪽을 택했고 되도록 경제권은 장악하되 정치 쪽에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오늘날 동남아의 화교들은 대부분 현지 국적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지인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한다. 특히 태국에서 이런 기질이 두드러진다. 태국에서는 정치 참여도 많은 편이라 총리 중 상당수가 화교 계통이다. 오늘날엔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다시 중국식 이름을 비즈니스 차원에서 내거는 화교들도 많다.

한국에 온 한국 화교들도 금의환향 개념이 강했는데 국공내전으로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쫓긴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귀국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한국에 발이 묶이면서 60년 이상 한국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일부는 화교탄압을 피해 중화민국이 도피한 타이완으로 가거나 북아메리카로 가게 된다. 한국 화교들은 이름으로 한국식 독음을 쓰는데 중국어의 한자 발음이 지역마다 달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정작 한국인들은 현지 발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중국식 발음으로 적지만 중국인들은 한국에 오면 한국식 발음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경우도 많은 편이니까.

2. 전세계 분포도

전세계에 현존하는 화교의 수는 14년 통계를 기준으로 약 4천만명으로 집계되었다. 이 중 동남아에만 3천만이상이 거주중이다. 이들은 특히 동남아시아 경제분야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출신지역에 따라서, 유입시기에 따라서 미묘한 파벌을 이루고 있다. 화교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은 주로 민남어를 사용하는 복건성 출신이다. 단 복건성 출신들은 주로 동남아에 분포하는데 비해 광동성 출신들은 미주나 유럽쪽으로 '많이' 진출했기때문에 흔히 서양사람들은 화교들을 대부분 광동성 출신으로 안다. 그렇다고 광동성 출신들이 동남아에 적은건 아니다. 베트남의 화교집단인 호아 족(Hoa 華族)은 대다수가 광동성 출신이고 싱가포르에서도 중국계중에서 복건계 다음으로 두번째로 많다. 한편 이들은 거의 대부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이주한 구화교들이다. 예외로 대한민국의 화교는 대부분 산둥성 출신이다. 아래 항목 참조.

내셔널지오그래픽이 한 인터뷰에 의하면 파벌끼리 싸움이 터지면 사람 서넛 죽어가는 일은 거의 매일 일어난다 말할 정도로 막장이라고 한다. 하지만 해외진출과 화교사회의 유지까지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이주민 중에서도 굉장히 잘 단합하는 편이다. 또한 자기들만의 사회를 조성해 지내는 걸로도 유명하다. 이민 몇세대까지 그 나라말을 모르는 경우도 있을 정도

2.1.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화교

주로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 자리 잡고 있다.

중국계 미국인들은 미국 개척시기에 철도노동과 광산산업으로 노동자 계급으로 이주한 뒤 점차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주로 여성적인 일이라고 꺼려하던 세탁소를 하거나 이민자를 상대로 한 소상업을 주로 하였고, 화교특유의 교육열로 차별이 없어지는 1960년대 이후에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시애틀이 있는 진보적이긴 하나 2012년 기준으로 백인이81.6%나 되는 미국 워싱턴 주에선 중국인 3세 게리 로크가 주지사로 두번이나 당선된 적도 있을정도. 미국 화교들 가운데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다만 본토 중국인들에게는 전형적인 서구식 마인드의 중국인이라 좋게보지만은 않는다. 그의 할아버지가 워싱턴 주청사와 1마일 떨어진 곳에서 청소부로 일했던 것을 주지사 취임 당시 이야기하며 아시아계의 위상 변화를 얘기한 적이 있다. 워싱턴주는 아시아계가 7% 수준으로 미국 평균인 5%보다 조금 높긴 하다. 아시아계 중에 이 사람에 비견될 만한 사람은 일본계인 에릭 신세키 보훈장관이나 대니얼 이노우에 상원의원 정도. 이 사람은 2차 대전 참전용사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우다 팔을 잃었다. 53년동안 상원의원을 지낸 미국 민주당의 거물이었다. 다만 친일적인 성향이 있어 한국에선 평가가 좋지 않았고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마이클 혼다 하원의원을 높게 치는 한국인이 많다. 둘 다 미국 민주당. 한국계는 아직 대규모 이주의 역사가 짧아 정계에선 관보급을 배출한 정도이다.

화교들은 주로 서부 태평양에 많이들 사는편. 캐나다에서도 역시 빅토리아밴쿠버에 많이 산다. 밴쿠버에 홍콩 출신이 많다고 홍쿠버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비하하는 의미다. 밴쿠버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뉴욕, 토론토 등에 큰 차이나 타운이 있다.

2.2. 동남아시아의 화교

동남아의 화교는 기타 지역과 차원이 다르다. 수백년전서부터 이민을 오고, 교육수준이 현지인들보다 많이 높고, 인구의 5~8%부터 많게는 20%까지 차지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국가 경제 주도권을 잡는 경우도 많이 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말레이시아로, 말레이시아는 인구의 25%가량이 화교이며 20%가 인도계이기도한 나라다. 쿠알라룸푸르같은 도시지역에서는 인도계와 화교계 주인종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이들은 대부분 화교 전용 학교를 다니면서, 화교들끼리 결혼하고 중국어를 사용하는 등 거의 다른 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말레이시아 정부는 '말레이인의 말레이시아' 정책을 견지하며 과도하게 화교차별정책을 쓰기 때문에 화교들이 힘들어 하기도. 또한 화교에 반감이 있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는 인구의 75%가 화교고 말레이시아에서 제일 잘 나갔던 싱가포르주를 1965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쫓아냈다.(말레이시아 항목 참고). 태평양 전쟁시 일본의 학살정책에 맞서 공산게릴라로 전향한 세력도 상당해서 이후 각국에서 반란을 일으켜대며 큰 골치거리이기도 했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나라에 동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와는 대조적으로 독립 이래로 중국어 사용을 제한하는 정책을 펴면서 현재 중국계들은 대부분 중국어를 못 하고 인니어가 모국어이다. 다만 소수의 화교에게 경제적 이권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 부유한 화교와 경제적으로 낙후된 현지인 사이의 갈등으로 유혈사태도 발생한다.

필리핀의 경제권 역시 대부분 화교쪽이 쥐고 있다. 필리핀 내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SM 그룹(한국의 SM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필리핀 현지 그룹이다.)이나 리비 같은 기업들이나 가문들은 십중팔구 화교 내지 화교와의 혼혈 집안의 차지이다. 물론 나라 전체가 혼혈화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온 만큼, 화교 및 화교 혼혈 집안들은 스스로 중국인이라는 자각이 별로 없다. 화교의 영향력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차이나 타운이 거의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태국은 인구의 9% 이상이 화교로 역시 태국의 경제권을 쥐고 있다. 태국 화교 역시 대개 태국에 거의 완전히 동화되어 중국어를 못하고 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그때문인지 타국에 비해 화교가 두드러져 보이진 않는다. 한편으로는 구 일본제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과거 군사정권들이 다민족 국가인 태국을 강제로 동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했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중국식 이름을 비롯해창씨개명 많은 것들을 버려야 했다. 한편으로 오히려 태국사회에 동화된 중국계 태국인들은 비교적 근래에 이주한 화교들을 앞장서서 배척했는데 결과적으로 현재까지도 태국의 화교들은 경제적으로 극과 극의 위치에 있다. 어차피 태국인들도 원래는 중국 남서성(윈난 성, 구이저우 성, 광시좡족자치구 등)에 살던 사람들이라 남중국인들과 인종적/문화적으로 별로 차이가 없는 편. 참고로 2PM의 닉쿤 어머니도 중국계다.

2.3. 일본 화교

일본에도 요코하마 및 고베 등지에서 집단거주하며 제법 강한 존재감 및 영향력을 구사한다. 다만 반중감정이 강한 일본이라서 재일교포와 같이 차별이 많고 정치권 및 공무원 사회에서도 차별이 있다.

근래에 일본에서도 화교는 신화교와 기존의 구화교로 나뉜다. 신화교는 1972년 중일수교 이후 들어온 중화인민공화국 사람들이고 구화교는 중화민국 사람들이다. 신화교 중엔 일본계도 꽤 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중국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일본 제국 시절에 식민지에 체류, 중국인으로 살다가 중일수교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들로서 이들을 '인양자(引揚者,히키아게샤)라고 부른다. 약 27년 동안 중국에 남은 4천명의 일본계 중국인들은 중국인들과 통혼하는 등 많은 중국인 친족을 만들었고 중일수교 이후 일본 국적을 회복하는데 이들은 비자를 이용해 수십명씩 일본에 건너가게 된다. 일본 사회는 이런 일본계들을 이진에 걸맞게 당연히 중국인 취급. 가이진은 외인(外人)의 일본식 독음으로 외국인과 달리 좀 배타적인 뉘앙스가 있는 단어다. 일본계 외국인도 철저히 배척하는 일본인들의 기질이 잘 드러난다. 문젠 한국도 이제 남말할 처지가 아니다.

한국에 남은 일본인들도 소수 있다. 이들은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이거나,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본에 거처가 없어 그냥 남은 경우 등이다. 시기에 분노한 한국인들에게 복수를 당하기도 했지만(...) 특히 북한에서 이런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은 그냥 숨었다. 친일파들이 숨겨준 경우도 있고. 1965년 한일협정 이후로 일본 국적을 회복할 수 있게 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지만, 20년 동안 한국인으로 동화되어 버린 사람들도 있다[1] .

한국의 화교들이 중화민국 사람인 것을 생각하면, 신화교와 구화교로 나뉘는 것은 한국과 일본이 비슷하다. 다른 점은 한국의 구화교들이 대부분 산동 출신인데 비해, 일본의 구화교는 진짜로 대만 출신들이 많다. 대부분 본성인 출신들이다. 이는 1895년부터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탓에 대만인들이 일본으로 많이 왔기 때문. 구화교와 신화교는 민단조총련이 대립하듯이 일본 내에서 2개의 중국계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다. 물론 일본에도 거리상 가까운 산둥 출신들도 꽤 된다.

유명한 일본화교로는 왕전즈(일본명 오 사다하루)가 있다. 아울러 인스탄트 라면을 발명한 안도 모모후쿠 역시 화교출신이다.

재일 중국인은 1980년대까지 5만명 수준으로 그리 크지 않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정책과 일본이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면서 현재는 일본 내 최대 인구 집단이다. 다만 재일화교와 중국 본토에서 최근에 건너 온 재일 중국인들은 따로 노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 내에서 한국 화교와 대륙 중국인들이 교류가 드문 것처럼.

2.4. 대한민국의 화교

대한민국에서는 서양 화교와 비슷한 시기인 19세기말 즈음에 조선인천이 개항하며 노동자 신분으로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사실 역사적인 유래를 따진다면 고조선때부터 중국 한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수두록했으니, 이들도 화교로 칠수 있겠지만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동화되었기에 논외로 친다.

다른 화교들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의 화교는 한반도와 가까운 산동성 지방 출신들이 많다. 산동성은 지리적 특성상 고대부터 중국에서 한반도 국가들과 가장 교류가 많은 지역이었다. 지도를 봐도 산동성이 한국에서 가깝지 광동성은 한국에서 머니까.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화교들은 다른 화교들과 소속감이 다르다고 한다. 일단 언어부터 다르다. 다른 화교들은 대부분 광둥성, 푸젠성 출신이라서 광둥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반해 산둥성은 북방방언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특수했던 관계로 인해서 대부분 국적은 대만이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엔 다시 중국으로 국적을 변경한 사람들도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정부규모로(특히 박정희 정권시절)화교가 경제적인 실권을 쥐는 것을 지속적으로 견제했다. 특히 1961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을 압수하고 소유규모를 제한하였다. 직접적인 재산적 타격도 컸지만, 당시 화교들 중엔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던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격도 컸다. 1962년의 화폐개혁도 실제로는 화교들이 모아온 재산을 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에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돈을 은행에 예치시키는 것보다 현금으로 집에 보관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런 장롱예금들을 은행으로 끌어들여 산업화에 대한 자금으로 충당하고자하는 목적이었다. 지금도 이것이 화교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서였다는 떡밥이 돌고 있다. 화교 노인들 얘기 들어보면 이때 환전량이 정해져 있어서 예금 안 하고 모아둔 현금 상당수를 울며 겨자먹기로 싸게 넘겨야 했다고 한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 중국과 수교하며 완화돼가는 추세지만 여전히 제한이 있다.

하지만 이런 제약에도 틈새시장 돌파로 요식업같은 분야에서 1위를 달리는 화교기업들이 더러 존재한다.

한때 12만까지 됐으나 현재 대한민국의 순수 화교 인구는 5만명 정도. 여기서 화교는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한중수교 이후에 들어온 중국인들은 한국 화교에 포함하지않는 편이다. 결국 한국에 체류하는 중화민국인은 결국 크게 두 부류인데 산둥에서 온 화교들과 요즈음 타이완 지구에서 온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대만에서는 이 두 부류를 노교(老僑,오래된 화교), 대교(臺僑, 대만에서 온 화교)로 구분하는 듯. 현재 국내 체류자의 인구비율로 따지면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조선족 >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기타 민족 > 산둥 출신의 중화민국 국적 > 타이완 출신의 중화민국 국적 순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홍콩마카오를 따로 놓는다면 그들이 가장 수가 적다.

2.4.1. 한화의 역사

한국 화교를 줄여서 한화(韓華)라고 하기도 한다. 일단 화교, 화인, 화예의 용어 설명부터 하자면 화교는 해외에서 중국 국적을 유지하는 중국인, 화인은 해당 국가의 국적을 취득한 중국계로 중국계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자, 화예는 중국인의 후손인 것은 알고 있으나 중국계 네트워크에는 참여하지 않는 자를 가리키는 학술적인 용어다. 이들을 뭉뚱그려 화교라 표현하기도 한다.

한국내의 소수민족 문제이므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수정바람

2.4.1.1. 구한말

한국 화교의 역사는 전란이 있거나 여러 이유로 한반도에 오던 중국인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본격적인 시작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군이 주둔하면서부터이다. 한국 화교의 발생은 다른 화교 집단과는 다르다. 다른 화교들은 농지 문제라든가 경제 문제 등으로 17세기부터 인구 유출이 발생한 복건이나 광동 출신들이 많았고 19세기 이후 신대륙으로 간 화교들도 서양과의 교류가 많았던 이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간 나라에서 3D 업종부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한국 화교들은 인천과 직항이 있던 산동 지방 출신들로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초기의 화교들은 서양이나 일본인 상인과 다를 바가 없는 썩 달갑지 않은 집단이었다. 이들은 주둔 청군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 내에서 유통망을 확충하는데 힘썼다.

그러다가 1894년 발생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승리하면서 조선과 청의 수교는 끊어진다. 5년 후 대한제국이 된 조선은 청에게 유리했던 과거의 수호조약을 수정하여 새롭게 조약을 건다. 이 시기에 화상들은 일상(일본인 상인)에게 점유율 면에서 밀리나 그 전에 잘 확보해둔 유통망을 바탕으로 꾸준히 상업에 종사한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상실되고 청 역시 망해 중화민국이 들어선다.

2.4.1.2. 일제 강점기

중화민국은 일본과 새로운 수교를 맺게 되고 일본은 자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힘을 갖도록 하기 위해 화상을 견제한다. 화상들의 주요 교역 상품은 영국이 만든 포목이나 자국의 비단 등인데 일본은 1920년대 말에 높은 관세를 붙이는 식으로 이를 견제한다. 그러자 화상들은 한약상이나 청 요릿집 등을 차리고 주물공장 등을 운영한다. 이들의 숫자는 1930년에 6만명에 이른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갓 2000만 정도를 넘겼고 일본인이 약 70만을 차지했는데 화상들은 조선 전체의 상인에서 2%를 차지했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이런 화교들에 포함되지 않는 계절 노동자도 꽤 많았다는 것이다.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토목공사에는 산동에서 겨울이나 봄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비공식적인 추계론 1927년에 17만의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 왔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일본인 임금의 절반 수준인 조선인보다 임금이 좀 더 쌌다. 화교 중에는 농업에 종사한 이도 많았다. 화농(華農)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채소를 재배했고 채소를 구매할 구매력을 갖춘 일본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많이 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조선 내에서 반중 감정은 점차 강해진다.

중국 본토에서는 동북지방, 즉 만주에 일본인의 침략이 심해지면서 반한 감정도 나타난다. 지금엔 그게 무슨 개소린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당시 먹고 살기 막막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공식적인 국적은 일본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 가기 위해 중국인 여권을 위조하던 시절이었다. 1931년에 만보산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은 조선인 농민들이 경작하기로 한 땅에 가는 관개수로를 중국인 농민들이 덮어버린 일이었다.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승인이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일본은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했고 이로 인해 중국인들과 그 땅에서 농사를 짓기로 한 조선인들이 대립하게 된다. 일본군경은 자국민인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무장 경찰을 보냈고 중국 정부도 무장 경찰을 보낸다. 조선인과 중국인의 충돌이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발포를 하였는데 싸우다 찰과상을 입은 정도 수준에서 사태는 끝났다.

문제는 이를 보도하던 과정에서 총독부가 루머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총독부는 마치 중국인과 조선인의 싸움에서 조선인이 당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것처럼 소문을 퍼뜨렸고 분노한 조선인들은 서울, 평양(한반도 북부 최대 도시)과 천안(보부상 등 당시의 유통 경로상 중요한 곳), 인천(대표 항구) 등 화교가 많은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들은 1주일 동안 화교들의 가게를 공격하거나 했고 일본 정부는 만주 침략을 위해 조선인과 중국인의 갈등을 일부러 더 조장하려고 일본인을 조선인으로 둔갑시켜 폭동에 참여시키거나 조선인 깡패에게 돈을 줘 화교들을 공격하게 했다. 1주가 지나서야 총독부는 진화에 나서지만 약 100여명의 화교가 폭동으로 사망했다. 수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사망 97/부상 118, 중국측에선 사망 142/부상 546, 국제연맹의 만주사변 조사 보고서에는 사망 127/부상 392. 이 폭동으로 약 4천명의 화교들이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대피했다고 할 정도였고 6만이었던 화교의 숫자는 그 해 겨울에 3만으로 반토막이 난다. 다행히 일본의 이간질이 개입됐다는 것을 안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반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그 해 겨울에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행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감정은 완화된다. 그러나 1931년 만보산 사건 후 일어난 일들은 화교들에게 꽤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화교들은 적성국의 국민으로 조선에서 생활하게 된다. 화교들도 친일파와 반일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게 된다. 특히나 전쟁으로 본토와의 무역이 불가해지면서 화교들은 위축된다.

2.4.1.3. 해방공간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 한국에 진주한 미 군정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인 중화민국인인 화교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기존의 식민지 시절의 네트워크였던 만주, 북한 지방, 일본과의 연결이 끊기면서 한반도 남부의 화교들은 중계무역 등을 독점하게 된다. 1946년엔 전체 무역량의 82%, 1948년에는 52.5%를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화교의 숫자는 북부 지방에 5만, 한국에 2만 정도가 살았다. 이런 화교들의 짧은 전성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와 각종 사회 기능이 회복되면서 점점 줄어든다. 거기에다 본토에서 국공내전이 발생하고 1948년 한국 정부가 외국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1949년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이 자국민의 해외 이주를 금지하면서 중화민국인들은 이산가족이 된다. 특히나 전쟁 직전에 한국 정부는 밀무역을 막는단 이유로 전국에 창고봉쇄령을 내려 중계무역을 하던 화교들은 타격을 입는다. 특히나 한국인들은 공업화를 하는데 대만이나 홍콩 같은 중화계보다는 재일 한국인이 많은 일본을 주요 수입 기지로 삼는다.

2.4.1.4. 전쟁과 그 이후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북부에 살던 화교들 중 약 1만명이 중국으로 가거나 한국으로 월남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 직후인지라 다시 중화민국군을 투입하는 방안을 미국에 제안하지만 확전을 원치 않던 미국은 거절한다. 대신 국군에 화교들이 통역이나 인민해방군을 상대로 한 심리전에 투입된다. 사실 이는 통역병에 해당하는 얘기고 일부는 자원하여 실제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주로 반공화교들로 추정된다. 당시 화교들은 전국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많이 갔는데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화교들이 자주 임시 화교학교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대만으로 가 대만군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화교 중에 대만의 사관학교에 가 대만군이 된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예전에 화교들은 대만에 들어가 몇 개월 이상 있으면 대만군에 입대해야 했다. 현재는 모병제가 도입되어 그럴 필욘 없지만. 국제사회에서 중화민국의 대표성을 세우고 싶었던 장제스는 해외의 화교들에게 이를 얻기 위해 한국 화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화교들은 대만 입시에서 꽤 혜택을 받은 편이었고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만의 중고등학교로 올 수 있게 여러 지원책을 마련한 게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편이었다. 심지어는 군함을 동원해 화교들이 대만에 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도 대만과의 협조를 위해 중공군 중 4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해 대만으로 보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화교들은 사실상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상행위를 포기하게 되고 요식업으로 가게 된다. 1950년 창고봉쇄령과 현금을 주로 쓰는 화교들에게 타격을 입힌 화폐개혁, 그리고 1962년의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등으로 인해 화농이 몰락하고 화상들도 헐값에 땅을 팔게 된다. 화교 요식업자들은 피로연 같은 큰 행사를 많이 했는데 토지 소유 제한으로 대규모 영업장의 운영이 불가능해진다. 운이 좋은 경우엔 한국인 바지사장을 내걸기도 한다. 1970년엔 주거용 200평, 영업용 50평으로 약간 제한이 풀리긴 하지만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이러한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은 외환위기 이후에 풀리게 된다. 1970년엔 단 몇 개월 뿐이긴 하지만 중식당의 쌀밥 판매 금지 조처가 내려진 적도 있는데 화교들에게 상당히 심리적으로 위축될 만한 일이었다. 4천 곳에 달하던 화교 식당은 1천 곳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미국에 한국화교들의 식당이 2천 곳이 생겼다.

다만 당시 한국과 중화민국(대만)은 서로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한국과 대만이 정치적으로 밀월 관계였기 때문에 그런듯. 1964년 프랑스, 1972년에 일본, 1979년에 미국이 차례로 중화민국과 단교한데 비해 한국은 1992년까지 수교를 유지했다. 다만 한국 공무원에 대한 반감은 강한 편이다. 사실 화교들의 층위에 따라 한국에 대한 감정도 많이 다른 편이다. 잘 나갔던 화교들은 차별을 덜 받은 편이라 화교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고 생활이 어려웠던 화교들은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고.

2.4.1.5. 현대에 이르러

1992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중화민국, 즉 대만과는 단교했다. 한중수교 양해각서 및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따라, 명동 자리에 있던 중화민국 대사관은 그대로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이 됐는데 대만 정부가 혹시나 해당 부지를 대만계 단체 등에 팔 것을 우려해 한국 정부는 단교 1주일 전에 비밀리에 통보하고 3일 전에 공식 통보함으로써 물리적인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국 대만 정부는 부지를 그대로 중국에게 넘겨주게 되고 청천백일기가 내려가고 오성홍기가 올라가는 동안 화교들이 몰려들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나마 한국 정부는 신사적인 편이었는데 프랑스일본은 단교 때 수도와 전기를 끊어버리고 경찰을 투입해 저항하는 대사관 직원들을 퇴거시켰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시간을 주어 대만이 대사관으로 쓰던 부지를 대만계 단체에 매각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자리를 그대로 자신들의 대사관으로 쓰려던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자국 내 재산 동결과 같은 보복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어쨌든 1992년은 화교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분기점이었는데 근래에는 화교의 등장에 한국에서 중국 대륙인을 보기가 쉬워졌고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화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화교들도 꽤 있다고 한다. 다만 중장년층 이상 화교에선 여전히 중국 대륙인들을 빨갱이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화교들은 중국 국민당 당원들도 꽤 있는데 최근엔 대만 독립파를 지지하는 화교들도 소수이긴 하나 있다. 다만 이렇게 되어버리면 본인 연고가 산둥이 맞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을 택하지 않는 한은 진짜 대만 독립하면 자신의 국가정체성은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있다.

한국 화교는 1970년대 최대 8만에 이르렀다. 전쟁 이후에는 베이비 붐과 월남자 등으로 인한 자연증가. 근데 수치에 따라 12만까지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차별로 인해 1990년에 2만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이들은 대만으로 돌아가거나 북미로 이주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탓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꽤 있다. 토지 소유 제한 등으로 화교들은 전문직 등으로 진출하게 되고 중화민국이 그래도 꽤 살았던 탓에 한국에서 대학 입학 등에서 괜찮은 편이었다. 화교들은 의대, 한의대등 알짜배기 학과에 입학할때 특별 전형을 통해 들어온다. 이 때문에 해당 직종 종사자들도 화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외국인한테 알아서 만렙 채워주냐고 까는 사람도 있다. 화교들을 보면 의사나 한의사가 꽤 많은 편이다. 그래도 가장 많은 건 식당이지만. 캘리포니아에는 약 1만명에 가까운 한국 화교들이 이주했는데 민남어를 쓰는 복건이나 광동어를 쓰는 광동 출신들과 달리 대부분이 산동 출신이라 소속감이 달라 한국 화교들은 차이나 타운 대신에 코리아 타운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어방언은 웬만한 유럽 언어들보다 크다고보니깐.

1989년 천안문 6.4 항쟁에 참가했다가 중국 정부의 탄압과 체포를 피해 한국으로 온 사람들도 많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국이 아닌 홍콩이나 대만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위장하면서 국내 화교 단체와도 연관을 맺지 않는다. 자국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혹시 있을 지 모를 테러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그 중에는 아예 한국인처럼 융화된 사람도 적지 않다.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화교들은 중국어가 스펙이 되자 중국어를 배우러 교육기간의 일부를 대만이나 중국에서 보내는 일이 생기고 있다. 집에서 중국어 사용이 줄어들고 화교학교 교육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화교 3세대의 경우 는 거의 한국어라 봐도 무방하다.

2.4.1.6. 한국 화교들의 정체성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적이며 민족주의적인 기질이 강한 편이다. 속인주의 국가인 한국과 중국 때문에 대부분 3세대에 이르러서도 중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으며 한국으로 귀화하는 사람은 연 100명을 밑도는 수준이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혈통을 따르는 기질이 강한데 그때문에 일단 화교끼리 결혼하는 것을 장려한다. 통혼에 관해서는 화교들은 한국인 남자와 화교 여자가 결혼하는 것에는 부정적이지만 화교 남자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그나마도 무너지는 편이라 화교 3세대 여자의 경우에는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는 일도 꽤 많다. 특히 통혼은 최근에 잦은 편인데 한성화교학교의 경우에 학생들의 절반 가량이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화교인 화교가 잘 없는 이유는 한국이나 중국이나 부계를 따르는 편이라 화교 여자들이 한국인으로 귀화해버리기 때문.

1992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중국은 화교학교 등에 중국 본토식의 교육을 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는 편이고 화교들도 새롭게 넘어오는 신화교 등의 문제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는 편이다. 중국의 위상이 커지면서 화교들에 대한 차별 조치도 많이 개선된 편이다. 예전에는 3년 또는 5년 마다 장기거주외국인(F2) 사증을 갱신해야 했고 등본을 떼려면 동사무소가 아니라 출입국사무소에 가야 했지만 2002년부터 영주권이 나왔다. 그리고 지방 참정권은 허용됐다. 물론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은 안 된다. 다른 선진국들도 영주권자에겐 지방 참정권만 허용한다. 애초에 자국민이랑 똑같이 대접할 순 없으니까.

화교들의 정체성은 1,2 세대는 아주 중국인스러운 편이고 화교학교 등의 민족 교육을 통해 강화된 것이 있지만 아래로 내려갈 수록 한국에 동화되는 사람도 많다. 특히나 3세대에 이르면 제1언어가 한국어가 되어버리고 중국어는 나중에 따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흔히 보이는 현상. 화교학교에서도 되도록 중국어를 쓰게 시키지만 학생들끼리 있을 땐 한국어로 대화할 때가 많다. 화교학교에 안 다니는 화교들도 한 10% 정도 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화교인 줄도 모르다가 귀화하거나 성인이 돼서 알 때도 있다. 대표적으로 하희라. 뭐 화교들도 사람이다 보니 중화사상에 심취해서 혐한이 된 인간들도 있고 차별 때문에 반한 감정이 있는 이도 있고 동화돼서 자기가 화교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고 다양하다. 상당수가 한국인 혈통이 섞여 버려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은 편. 다만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혐한이나 반한인 화교들이 눈에 잘 띄긴 하지만. 그리고 아무래도 한국인에 동화되다보니 화교들 중엔 기독교 신자들도 꽤 있는 편이다.

한국인 남성들 입장에선 군대에 안 간다는 게 화교 남성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다만 한국군에서 합법 스파이외국인을 입대시키지 않는다는 점과 한국과 중국 다 속인주의 전통과 민족주의 전통이 강한 탓에 국적을 바꾸는 것이 개인에게 상당히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무원 되거나 여러 차별이 싫어서 귀화하는 화교 중엔 군대 가는 사람도 있다. 특이 케이스인데 행정착오로 한국과 대만 국적이 모두 말소되어 무국적자가 된 예비역 육군병장 화교도 있다... 예전엔 재산 5,000만원이라는 귀화의 조건이 있는데 요새는 많이 약화된 편이다 군의관 3년 갔다오니 유급 2번 당했던 화교 동기가 이미 개원해서 자리 잡은거 볼때 참으로 상콤함을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 여진족이나 항왜가 동화되어 소멸된 뒤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소수민족이다. 항왜 같은 경우에는 초기에 자신들의 거류 지역을 만들어 일본의 생활습관을 유지하였으나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긴 조선 정부에 의해 조선에 동화되었고 여진족은 함경도 북부에 상당수가 살았으나 점차 동화됐고 구한말재가승이란 이름으로 4천명 정도가 남았고 일제강점기까지 살아남았으나 순수 혈통에 집착 쩌는 볼드모트김일성이가 박살냈다. 확실히 타민족 간에 통혼을 하게 되면 동화가 금세 이뤄진다.

화교들이 한국을 떠난 이유 중엔 정책적인 차별도 있지만 교육 문제도 있다. 한국이 고도의 학벌사회로 성장하는 가운데 화교학교는 학력을 인정받지 못 하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를 쳐서 한국 수험과정을 밟거나 대만의 대학교를 준비해야 하는데 해외에서 자국 입시를 준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화교학교 자체는 대만 입시를 준비한다. 한국대학에 화교들 특별전형으로 들어가는 거 있지 않냐고 싶겠지만 그걸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화교학교 다니면서 한국 수능을 별도로 준비하는 건 힘들고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기 어려우니 대만이나 미국으로 간 것이다. 정작 미국 가서는 코리아타운에서 살지만...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서 1970년대 초반에 10만에 가깝던 인구가 지금은 1/4로 줄은 것이다.

재일 한국인의 경우엔 조선대학이란 학력은 인정 못 받는 대학이 있긴 하지만 화교들에겐 화교대학이 없다.

한편 화교들과 그 본국 중화민국과의 관계도 복잡한데, 위에 언급했듯이 대체로 한국 화교들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화민국이 '대만'을 강조하면서부터 연계가 더욱 소원해지는 감도 있다. 이들은 '중화민국인'은 맞지만 '대만인'은 아니다. 물론 자기 소개를 할 때 (중국이라고 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을 연상하므로) 편의상 남에게 '대만인'이라고 말하는 경우야 많다. 또한 한국 화교들은 중화민국 본국에는 호적이 없어서 국민 신분증(한국의 주민등록증) 번호도 없다. 현재 중화민국 정부는 여권 발급에서 '무호적 국민'에 대한 차별을 하고 있다. 외관상 타이완 섬 거주민들과 차이가 없는 여권이지만 효력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중화민국 국민에게 비자를 면제하는 나라에 갈 때도 무호적 국민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한다[2]. 본국에서는 '억울하면 와서 호적 만들어라' 하는 식인데 이게 쉽지도 않을 뿐더러 남자의 경우는 군대 문제가 걸리게 된다. 결국 한국 화교들이 본국 정부에 시위를 한 사례도 있었다. 한국 화교들의 주장에 의하면 천수이볜 정권 이후로 호적 만들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https://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1&nNewsNumb=002313100004
http://www.egn.kr/news/articleView.html?idxno=64008

하지만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은 축소된 영토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화교들마저 많이 와버리면 국가 경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에(귀국 화교가 대만 거주민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든지. 안 그대로 외성인들도 꽤 됐는데) 이런 차별 정책을 해 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2.4.1.7. 맺으며

화교들의 등장은 제국주의 시대에서 한국인들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고 화교들의 경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이 반중감정과 차별을 이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100년 이상을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온 점을 감안하고 비판적으로 볼 점은 비판적으로 보고 받아들여야 할 점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민족분단이나 전쟁 등 한국 화교들은 한국인과 비슷한 배경을 지녔고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착해 살아왔기에 이들을 연구하는 것은 앞으로 계속 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2.4.2. 화교 현황

2010년 기준으로 화교 숫자는 21,490명 수준이다. 이중에 13,316명이 영주권비자(F-5)이며 거주비자(F-2)는 6,569명이다.
다만 이들은 자발적인 집계이고 실제 숫자는 화교 3세이상을 합산하면 5만명 가량이다.

서울 8,769명
경기 2,484명
인천 2,839명
부산 1,732명
대구 871명
충남 647명
전북 585명
충북 569명
강원 558명
대전 514명
경북 432명
경남 358명
광주 334명
제주 295명
울산 282명
전남 221명

서대문구의 연희동과 연남동(연희동 남쪽이란 뜻)엔 전통적으로 화교가 많이 살고, 근처에 화교 중.고등학교도 있다. 이 화교 학교가 전국적으로 대표적으로 큰 화교 학교에 속한다. 하지만 교육 현실은... 주차 안내표시에 중국어 번체로 안내도 적혀 있고 근처의 중국집 중에 화교가 운영하는 곳이 많다.

2.4.3. 신화교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 들어온 대륙의 중국인들을 말한다. 2012년 한국의 체류 외국인은 144만명으로 장기체류자 112만명, 단기체류자 32만명 선이다. 여기에 잡히지 않는 불법체류자는 17만명 정도이다. 한국 정부는 중국인과 한국계 중국인, 즉 조선족을 구분하는데 합법 체류자 가운데 중국인은 25만, 불법체류자 중에 중국인은 5만명 정도 수준으로 한국 내에 화교를 제외하고 약 85만의 중국계 인구가 있는 것이다.



2.4.4. 대표적인 한국 화교

화교와 화인(귀화자)의 구분 없이 일단 다 화교로 기재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귀화자는 제외한다.

  • 후인정: 배구 선수로 귀화했다. 역시 배구 선수, 감독 출신인 아버지 후국기나 다른 가족들은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국적 때문에 한국 대표선수가 되지 못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 설영흥: 薛榮興. 1945년생. 오른쪽은 현대자동차 회장인 정몽구이며 왼쪽이 부회장인 설영흥이다. 현대자동차의 중국 판매를 총괄하고 있다. 본래는 아버지가 중국집을 하면서 무역업도 했는데 본인도 가업을 물려받아 무역업을 했다. 정몽구 회장과는 경복고를 다닐 때 정몽구가 근처에 있던 설영흥 아버지의 식당에 자주 들르면서 알게 되었다. 둘은 7살 차이로 정 회장이 연상이다. 당시에 설 부회장은 초등학생이었다. 무역업을 하다가 1999년부터 현대에 합류하였다.
  • 담도굉: 베이징현대차 총경리(부사장). 설영흥의 추천으로 영입되었다.
  • 강래연: 1981년생 배우.
  • 주현미: 1961년생. 광주광역시 화교 출신으로 트로트 가수이다. 한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약사일을 하다가 음반을 취입하였다. 현재는 한국인으로 귀화.
  • 하희라: 1969년생 배우최수종과 결혼하며 귀화하였다.


  • 담철곤: 1955년생으로 오리온의 회장이다. 현재는 횡령, 배임으로 감빵 감. 집행유예 됐음
  • 이기용: 1985년생 모델 겸 배우. 아버지가 한국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 단영: 1978년생 배우.
  • 장채희: 김창렬의 아내.
  • 공상정: 1996년생 쇼트트랙선수, 춘천 화교 출신 의사의 딸로 화교 3세다. 중3이던 2011년 특별귀화 신청을 인정 받아 가족이 함께 귀화. 2014 소치 동계올림픽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서, 화교 귀화자 출신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화교학교 출신이 아닌 일반 한국 학교를 나왔다. 요새는 한국인들이 중국어 배운다고 편법 써서 화교학교 들어가고 화교들은 한국학교 간다.
  • 나광훈: 1962년생 배우.
  • 소소경: 1979년생 前 프로야구 선수. 중화민국 국적이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대구광역시에서 다녀, 규정에 따라 국내 선수로 활동하였다. 1998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2005년에 이원식과 함께 LG 트윈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때 트레이드 상대가 홍현우,이용규 였다. 은퇴후 2014년 현재 대전 유천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지내고 있다.

2.4.4.1. 화교설이 도는 사람

  • 전지현: 본명이 왕지현이고 아버지 성함이 왕정처, 어머니가 묵창애 씨라서 화교설이 제시되나 본인은 한국인이라 못박고 있다. 부모는 모르겠으나 본인은 확실히 한국 국적이다. 부모가 화교라면 화인이라 볼 수 있다. 허나 전지현은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대까지 화교랑 아무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 왕씨나 묵씨나 극히 드물긴 해도 우리나라에 확실히 존재하는 성씨라서. 자세한 사항은 전지현 항목 참고.

  • 진미령: 화교가 아니다. 아버지가 한국광복군 출신. 아버지가 중국인들과 친한 탓에 그냥 화교학교에 넣었다고 한다... 현재 화교학교를 보면 편법으로 다니는 한국인들이 꽤 있다. 부모 어느쪽도 화교가 아닌 그냥 한국인들. 이유는 중국어 배우게 하려고.

2.4.5. 한국내 화교의 대우

차량등록 하나만 해도 중형차 이상은 구비해야할 서류 종류가 한국인의 4배에 가까우며 죄다 인지를 떼야하는데다가 서류미비를 구실로 인지재발행을 요구하는 등등, 화교로 살바엔 한국인으로 귀화하는게 빠르단 말을 할 정도. 주민등록번호도 다르다. 남녀 각각 5, 6으로 시작. 2000년대를 미리 생각해서 그런 거일수도 있다(…). 주민등록번호가 아닌 외국인등록번호라 그렇다.

연예인 하희라도 화교였으나 1995년 최수종과 결혼하면서 귀화하였다.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이 화교인 것 자체를 모르고 살았다고. 물론 중국어도 할 줄 모른다고. 아무래도 가족과 같이 살다 보면 행정규제가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한국인과 결혼하면 조건에 따라 한국국적이 자동으로 나온다. 이때 한국국적을 취득포기 할수도 있다. 이후 귀화시 '국적회복신청'을 통해 간단히 귀화할 수 있다.)

과거엔 정부주도로 화교의 경제진출을 막았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거 이야기. 지금은 경제적으로 잘나가는 화교도 많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사나 한의사 수의사로 진출하는 화교도 많고, 중국이 급성장하면서 중국진출을 모색하는 기업들 사이에 화교의 입지가 넓어지는 바람을 타고 한중수교 20주년 기념 KBS-CCTV 공동제작 프로그램에 화교출신 설영흥 현대자동차 부회장이 출연하기도 했으며, 대기업 오리온의 수장 담철곤 회장 역시 화교출신이다.

한국전쟁 당시엔 화교 청년 중 일부가 한국군에 입대해서 활동한 적이 있다. 한국어중국어에 모두 능숙하다는 점을 이용해 공산군 진영에 침투, 정보를 수집하거나 중공군포로를 심문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참전 용사들이 이에 대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백선엽의 자서전에서 발췌.) 관련기사.

그런데 국내에서 화교들의 중국음식점이 굉장히 인기를 끌기는 해서 문화적으로 끼친 영향은 제법 크다. 친숙한 사업인 동네 중국집이나 중국에 역수출되어 인기를 끄는 한국식 짜장면의 탄생이라든지...참고로 중국에서 한국식 짜장면은 한식이라고 한다. 한식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로 한국에서 대표적인 중국음식이 짜장면인 것과는 정 반대. 유명한 화교 음식점이 여러군데 있었으나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사정이 안 좋아진 틈을 타 한국인들이 상표를 스틸했다.(...) 대표적으로 공화춘.(...) 공화춘 외에도 중국집 이름의 클리셰가 된 것들은 대부분 실존했던 유명한 음식점이라고 한다. 이건 꼭 상표를 뺏었다는게 아니라 그냥 문화 전파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한국의 경우 화교가 득세한(특히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케이스에 주목해 그들이 혼란기의 한국에 끼칠 악영향을 고려하여 건국 초기부터 70년대까지 각종 제한을 걸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2.4.5.1. 화교 탄압에 대한 비판

화교의 경제장악은 몇몇 동남아시아 나라에만 국한된 케이스였다. 이 지역에는 수백년전부터 중국인들이 대거 무역, 교류, 피난 등으로 정착해온 역사가 있어, 나라 인구의 5%에서 20%가 화교였고 원주민들과의 교육수준에서 차이가 많았던 것. 당연히 일본, 유럽, 미국, 캐나다 등 다른 나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없었으며 한국도 19세기말인 임오군란(1882년)때 조선에 40여명의 중국상인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화교역사가 시작된다. 그래서 화교들이 무조건 나라경제를 장악한다는 주장은 화교들에겐 억울할 수도 있다. 70년대까지 대한민국이 못 살았던 것은 사실이나, 동남아시아에서 화교가 득세하게 된 계기는 경제적인 요건 뿐 아니라 명-청 대부터 이어진 지속적인 인구 유입정책에 기반한다. 대한민국과는 출발선부터가 다르다. 차라리 제노포비아를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엄연히 내국인과 동일하게 세금을 내는데도 그에 맞는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은 점이나 한국전쟁에서 국군에 가담해 활약한 공도 인정받지 못하는 점은 문제라는 주장이다. 사실 웬만한 국가에선 외국인이나 이민자 정책에 차별은 존재하더라도 국가에 공이 있다면 이미지 메이킹상에서라도 제대로 보상한다. 무엇보다 국가에게 선택권이 있어서 그에 따른다고 해도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세금도 내지 않고 미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이중국적자에게 꾸준히 지원하는 것과 비교되기 때문에 모순된다.관련기사

왜 한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귀화하려면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고 절차도 까다로웠고 동아시아의 속인주의 전통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겹친 터라 국적을 포기하거나 새로 얻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일본에서 그렇게 차별을 받던 재일교포들도 60만이 넘는 숫자가 아직도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2.4.5.2. 화교 탄압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론

건국당시부터 약 70년대까지, 당시의 한국 정부는 화교가 득세한 다른 나라들의 케이스에 주목해 그들이 혼란기의 한국에 끼칠 악영향을 고려하여 각종 제한을 걸게 된 것이다. 지금의 스탠다드로 보면 그 당시의 차별은 좀 심하긴 했다. 근데 그 독재시절에는 뭐 자국인 인권조차 안 따지던 시절(...)이었고, 사실상 인권을 따지는 지금도 어느 정도 화교에 차별을 두는 건 비슷하다.

또한, 영주권시민권의 차이를 생각하면 화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외국 국적자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영주권자의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는 그냥 싫어도 추방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주권 국가의 고유 권리이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 경우에 따라서는 영주권자들에게 (특히 선거 부분에서) 국가의 주권 자체가 농락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트라우마 때문에 일본계 외국인에 대해서는 훨씬 더 가혹하게 차별했다. 심지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에게 참정권이 생긴 이후인 2006년 지방선거 당시에 재한일본인 가운데 영주권자는 1,622명인데 이중에 선거권을 인정받은 사람은 51명이다. 그 정도로 일본계에게는 제한이 많다. 근데 화교에 비하면 다들 숫자가 거의 얼마 안 됐다. 그나마도 주재원이나 외교관이었고. 사실상 당대의 재한 외국인 정책은 화교들이 주요 대상이 된다. 주한미군이 있긴 하지만 걔넨 군 부대에서 지내고.본격 소수민족 주한미군

한국국적자와 동등한 권리를 받기 위해서는 귀화를 하는 것이 정답이다. 근데 화교들이 한국인과 똑같은 권리를 달라고 차별당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화교 차별이 심했으니 배려해달라는 얘기지 화교와 한국인을 동등하게 대해달라고 주장할 정도로 화교들이 국가체계를 이해 못 하지는 않는다. 물론 화교 중에 어그로꾼도 많긴 하나 그건 어디나 다 그러니까 그리고 귀화하라고 종용하는 건 일본인들이 재일한국인들의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주 하는 말이다. 다만 재일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특수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 돈벌러 온) 화교와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무리수이다. 허나 독립 이후 전쟁을 피해서나 돈 벌러 건너간 재일한국인들도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화교와 한국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달라는 어그로꾼들은 당사자인 화교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어그로를 끄는 한국인들이 더 많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보면 화교들에게 지방선거 투표권을 준 기사를 쓰면서 대선·총선은 아직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외국인은 아직 '주민'일 뿐 '국민'이 아닌 것이다.라는 황당한 개드립을 쓴 사례도 있다. 실제로 화교에서 귀화한 사람들도 있고. 한국사회의 경우 예전에는 화교 출신 귀화인을 순수 자국인과 구별하는 일이 많았으나 지금은 외모 문제가 아닌 이상 거의 없어졌다고 보면 된다. 외모로 봐서도 남방계열이 아니면 한국인과 크게 차이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웬만하면 화교들은 단기 노동자로 가는 게 아니면 현지국적을 취득하는데 한국일본에서만 좀 특수하다. 20세기에 하도 서로 얽힌 게 많아서 개인 단위의 생활에 민족적인 의식이 씌워진 일이 많아서 그렇다. 부계중심의 속인주의도 한 몫 했고.거기다 화교 남자는 군대 때문에 기피하는 경우도 있고

게다가 한국의 경우 2002년까지 제대로 된 영주권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므로 화교들의 지위는 영주권자도 아니고 그냥 장기거주 외국인이었다. 이는 보기에 따라서는 한국 사회가 그만큼 여러 제반 기반이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재한 외국인이 겪는 문제에 무관심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미국을 포함한 상당수 국가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영주권자는 투표권 자체가 없는데[3], 한국은 지방선거에서 영주권이 있는 화교들에게 투표권을 준다. 지방자치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귀화도 아닌 영주권자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한국인의 참정권이 침해받는 상황이라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사실 이런 해프닝은 참정권과 귀화 문제에 대해 유독 동아시아 3국이 서로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이웃나라 출신의) 영주권자에게 서로 쿨하게 참정권을 주거나, 아니면 주변 국가와의 문제를 고려해서 아예 참정권을 주지 않는데, 예를 들어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지방참정권 받는 문제랑 일본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지방참정권 받는 문제를 연계해서 다뤘어야 하는데 이점에서 한국 정부가 미숙했다고 볼수도 있지만 애시당초 중국과 일본은 외국인참정권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국가이니 협상 테이블을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정부가 호구 인증한 꼴. 외국인참정권을 참고할 것.

또한 이 정책을 가지고 과거의 독재 정권의 문제라고 비판하는 것도 상당히 논점에서 어긋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민주화 이후에도 화교 탄압 정책이 즉시 완화되지는 않았으므로 화교 입장에서는 더더욱 고통을 받았던건 사실이다. 차라리 역사적으로 외세에게 침략을 받았던 배경과 식민통치의 트라우마로 인해서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비판이 더 논점과 일치한다. 물론 민주적인 정권이 있었어도 그랬을 테니 독재 정권이 탄압을 한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 한국의 제노포비아가 상당히 한국인들의 트라우마에 바탕하여 심리 기저에 자리하고 있고 방어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2.4.5.3. 재반론

화교에 대한 규제가 대대적으로 풀린건 민주화가 되고도 한참 뒤인 21세기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그 기간을 생각해 보면 심히 가혹한 게 맞고, 게다가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은 오늘날에 상당수가 풀렸다.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을 통한 막대한 부의 축적이 일어난 점을 감안할 때 당시 부동산 소유 제한은 화교들을 차별하는 정책이었다. 위의 비판에 대한 반론에서는 영주권자와 시민권자의 차이를 얘기하며 이러한 차별 정책을 정당화하는데 당시 화교들을 향한 경제적인 차별 정책은 영주권자와 시민권자의 권리 차이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2002년 전에 화교들은 영주권이 나오지 않아 장기거주 외국인 신분이었지만 현재 한국의 많은 부동산은 해외 부동산 기업들의 투자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영주권자도 아니고 장기 체류 외국인도 아니다. 물론 직원을 한국에 파견하긴 하지만 실제 법인은 해외에 두고 활동하고 있다.

차라리 한국 정부가 과거에는 화교들의 경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차별 정책을 취했으며 현재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이를 개선해나간다란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비판의 논지가 상당히 화교중심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찌됐든 한국인의 강도 높은 제노포비아엔 역사적인 배경이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화교 탄압을 한 나라들은 많지만 화교가 사는데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는 드물다. 한국과 이스라엘 정도. 근래에는 정부 차원에서 차이나타운을 조성은 하는데 한국 화교들은 이에 좀 냉소적인 편이다. 현재 대륙 출신의 신화교들이 자연스레 특정 지역에 집결하면서 장기적으로 자생적인 차이나타운을 만들 가능성은 있다. 참고로 아예 차이나타운이 없던 건 아니다. 인천에 청 시절의 조계지를 근거로 한 중국인 거리 등이 있긴 했으나 규제 등으로 부동산 소유나 사업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상당수가 북미나 대만으로 떠났다. 특히나 식민통치의 기억이 강하게 작용했다. 다만 그랬으니 차별할 만 했다란 논지는 여러 제도적 개선이 이뤄지고 시민 의식의 향상을 기대하는 오늘날에는 부적절할 것이다.

2.4.6. 경제위기 당시, 화교에 대한 루머

경제위기(통칭, IMF)당시에 해외의 화교들이 한국정부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대신 화교들의 권익신장과 조계지역 형태의 거주구를 요구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가 필요했던 건 부채 탕감이 아니라 국가신용도와 국가 단위 유동성 확보로, 일개 이익단체인 화교 레벨에서 어찌할 수가 없다.

이런 헛소문의 자매품으론 통일교가 한국 부채를 탕감해 줄 테니 통일교를 국교로 지정해 달라는 요구를 해왔다는 루머가 있다.

이는 1997년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외환위기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화교자본이 강하게 영향을 주던 인도네시아는 화교자본을 추방하려고 애썼는데 그 반작용으로 외환위기를 겪었고 이 때문에 화교자본들의 복귀를 수상이 요청한 바 있다. 이런 경제적인 반감으로 인해 이듬해인 1998년에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이 일어났다.

2.4.7. 한국내 화교의 거주지역

한국 정부가 인정한 차이나 타운인천광역시, 부산광역시에 있다. 각각 인천역, 부산역 앞에 위치한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1905년 당시부터 인천에 일부 화교가 정착하였으며 한국 내 차이나 타운 중 가장 유명하다. 대표서민음식인 짜장면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서울의 경우엔 종로와 명동(특히 중앙우체국과 주한 중국대사관 근처)에 주로 몰려 있다.

부산 차이나 타운은 규모로는 인천 차이나 타운에 비할바가 못 된다. 또한 명색이 차이나 타운인데 오히려 러시아 사람과 러시아어 간판이 더 많아 보여서 차이나타운이라기보다는 작은 이태원 같은 분위기이다. 중국집이 많은데, 짜장면이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유래한 음식이기 때문인지 이 곳에는 짜장면보다는 만두를 주력으로 삼는 곳이 많다. KTX를 탈 수 있는 부산역 바로 앞에 있어서 접근성은 좋은 편. 이전까지는 아무나 가볍게 발을 들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2013년 대대적으로 타일을 갈아엎고 정비되어 관광지처럼 깔끔해졌고 관광객이 길을 거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다만 화교들은 정부 주도의 차이나 타운에 부정적인 편이다.

대구에도 종로(대구에도 종로가 있다.)쪽에 화교들이 상당히 모여살고 있는데 중국인 학교가 있지만 차이나 타운이라고 부르기엔 미비한 수준이며 사실상 일반 유흥가, 혹은 외국인 거주구역이나 다를바가 없다.

광주광역시에는 계림동에 화교 소학교가 있고 충장로5가 지역에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다만 광주 지역은 화교들을 결집시킬만한 커뮤니티가 강한 편이 아니고 화교 교육기관이 소학교(=초등학교)까지밖에 없다는 점이 다른 지역의 화교 공동체에 비하면 약한 편.

2.5. 북한의 화교

북한의 경우 김일성 집권 당시 산파를 제외한 모든 파벌을 제거하였으며, 그 와중에 화교를 도울 수 있는 중국계 세력인 안파도 쓸려나갔다. 대장정 참가자이며 중공군 장성 출신이던 무정마저 6.25 전쟁의 책임을 구실 삼아 실각하였다. 대장정 생존자들은 중국에서도 영웅 취급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그래서 김일성이 무정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고도 한다.) 김일성의 의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후에는 주체사상의 확립 등으로 인하여 실제 중국인이나 중국 세력이 힘을 뻗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 북한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북한군화교와 재북 일본인도 입대시킨다. 다만 근무하는 부대에 제한이 있다.

2.5.1.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을 떠난 화교

고위간부와 친분을 맺은 일부 화교는 김일성의 사망 직후 압록강을 넘어 중국과 북한의 무역에 끼어들면서 중국 내 조선족 자본을 몰락시키고, 만주 일대에 머물면서 북한에 남은 친척을 통해 대북 거래를 하는 등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신의주와 나진 선봉 경제특구에도 화교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고, 지금도 만주 일대에서 대북 무역을 주도한다고 한다.

2.5.2.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을 못 떠난 화교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북한의 화교인구는 한국보다 많은 5만명 수준이었으나 전쟁통에 자본주의자들은 월남하고 일부는 중국이나 대만으로 갔다. 전쟁 직후엔 1만까지 줄었으나 중국에서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는 등 사고가 터지자 중국에 있던 화교의 친족 등이 입국하면서 2만 5천명까지 늘어났다. 지금이야 거지인 북한이지만 소련의 지원 등으로 당시엔 생활 수준이 괜찮았고 중국은 대약진 운동에다가 문화대혁명 등 악재가 겹친 터였다. 70년대 후에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중국이 경제적으로 부상하면서 많은 화교들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고 현재는 약 6000명 정도가 남아 있다. 1999년 기준이라 더 줄었는지 아니면 보따리 장수 등으로 더 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요식업에 종사한 한국 화교와 달리 북한화교들은 70% 이상이 농가다. 이는 주로 화농들이 북한의 토지개혁 당시에 농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중국은 서로 혈맹 관계이다.

다만 이런 재북 화교들은 당연히 북한 내에서 몇가지 차별을 받고 있다. 일례로 북한의 공민증에는 '민족' 란이 있는데 이는 주로 화교를 가려내기 위한 것. 또한 북한은 순혈주의를 강조하면서 화교는 물론이고 엄연한 조선민족인 조선족 연고자들조차 민족간부(김일성고급당학교를 졸업한 리당비서 이상의 간부들)가 될 수 없게 못박아놓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조선족 연고자와 결혼한 북한지역 토박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안그래도 정치 중심 사회인 북한에서 당간부로 진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생활에서 많은 차별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경제상황이 좋지 않은데....

이 때문에 몇몇 화교는 순 북한 주민처럼 탈북을 시도했다가 남한 정부에 걸려 중국 국적을 가진 이들을 강제출국시키기도 하는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탈북화교 공무원 간첩의혹의 당사자인 유우성도 이런 케이스다. 몇몇 화교들은 북한에서 보내는 편지를 외지로 몰래 전해주다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죽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중국이고 뭐고 생까는 북한의 담대함=만용 한편, 최근에는 탈북 여성이 데리고 오는 중국 국적의 자녀가 여러모로 문제가 되고 있다. 많은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조선족 혹은 한족 남성 사이에 낳은 자녀를 어떻게든 학교에 보내고자 중국 호구를 돈으로 구입하는데, 어쨌거나 중국 공민 자격으로 중국 정부의 사회보장제도 하에서 살아온 이들 자녀를 탈북민으로 보아 혜택을 줄 것인지, 중국인으로 보아 혜택에서 제외할 것인지가 아직 합의되지 않고 있기 때문.

다만 북한에서도 잘나가는 화교들은 잘먹고 잘 산다. 특히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경제가 사실상 와해되고 소비생활을 거의 전적으로 중국산 수입품에 의존하게 되면서 이런 경향이 심각해졌다. 당장 북한 시장화의 서막을 연 자금 조달처는 여지없이 중국이다. 주로 화교자금과 조선족자금으로 나눌 수 있다. 사실 건수로 따지면 후자가 우세하긴 하다. 또 중국과의 보따리 무역의 상당수는 북한화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일례로 국경 연선에 있는 모 군의 경우 단 한 가정의 화교가 있는데 이 화교 부부가 군 전체에 들여오는 농자재의 절반 정도를 충당한다고 한다. 물론 지역 관청과 결탁해 합법적으로 강을 넘는 조선족 연고자나 돈 많은 장사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부의 경우 두 사람 모두 화교다 보니 번갈아가며 강을 넘어다닐 수 있는 것이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밀수품도 많이 들여오는 듯하다. 청진 등지에 아직 화교학교도 남아있다고 한다. 청진화교학교는 저우언라이가 설립했다. 대만 교재를 쓰는 한국의 화교학교들과는 달리 북한 교재를 쓴다고 한다. 주로 신의주 등지에 화교 보따리 장수가 많다고 한다.

2.6. 아프리카의 화교

인도계가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는것과 비슷하게
화교 또한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점차 진출중이다. 중국-아프리카 관계 참조.

(ɔ) U.S. Air Force photo by Tech. Sgt. Jeremy Lock from

가봉의 정치인으로 아프리카 연합 위원장을 지낸 장 핑처: http://en.wikipedia.org/wiki/Jean_Ping 화교 아버지와 아프리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키백과 영어판을 보면 아프리카계 아시아인에 대한 설명이 꽤 나와 있다.

3. 화교 캐릭터

4. 서브컬쳐에서의 화교

일본 서브컬쳐(특히 만화)를 보면, 외국 화교들은 약방을 운영하지만 실제로는 지하세계의 정보통이나 혹은 엄청난 배후로 나오는데 이건 세 세이슈(주성치를 좋아해서 그의 이름을 거꾸로 한 뒤 일본어로 발음)의 불야성의 영향이 크다. 이 소설에서는 대만이나 중국 출신의 화교는 뒷세계의 악마들로 묘사했다. 그덕인지 건 스미스 캣츠 시리즈에서도 그런 영향이 짙게 배어나온다.

한국에서 화교를 다룬 영화.

  • 천하장사 마돈나 - 동구의 친구인 종만이 화교로 나온다. 나중에 수술하면 클리토리스 보여 달라고 하는 애...
  • 신세계(영화) - 신세계는 주요 인물인 이자성정청이 여수화교로 나온다. 전남의 화교인구는 끽해야 200명 남짓이지만... 각본과 연출을 맡은 박훈정은 화교와 전라도라는 마이너리티 속성을 갖고도 조폭계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강한 캐릭터를 보이고 싶어서 이렇게 했다고 한다.
  • 도둑들 - 김수현이 맡았던 잠파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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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선을 떠나며>를 읽어보면 문화통치이후 본토에서 건너와 한국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거나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인들 중 더러가 한국에 남아있으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2] 이 무호적 국민이란 개념은 리덩후이 정권 때인 1991년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http://zooey0723.pixnet.net/blog/post/19503436-有國籍無戶籍--華僑淪人球
  • [3] 그래서 미국의 유권자 등록카드 기입사항을 보면 시민권자 여부를 묻는 사항과 '영주권자는 이 카드를 기입하지 마십시오'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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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7 23:3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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