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화신

last modified: 2015-03-10 11:12:26 by Contributors

(ɔ) from


생몰 연도는 (1750~1799). 자는 치제(致齊). 본명은 선보(善保), 성은 유호록씨(鈕祜祿氏)이며, 만주 정홍기 이갑라 사람으로 대대로 관료를 지낸 집안이다. 흔히 역사상 탐관오리이자 간신으로만 알려졌지만 능력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10여 세에 함안궁관학에서 공부했지만 계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소년 시절의 여건이 좋지 않았고 1767년에 영렴의 손녀와 결혼했다. 절세의 미남으로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1769년 3등경기도위에 올랐다가 1771년에 3등시위가 된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1776년에는 군기대신을 거쳐 호부상서, 의정대신의 자리까지 올랐다.

화신은 무관 직으로 상남기 만주도통, 정백기 만주도통, 상황기 만주도통, 보군통령, 문관 직으로 내무부대신, 어전대신, 의정대신, 정백기 영시위내대신, 정황기 영시위내대신, 군기대신, 영반군기대신, 협판대학사, 문화전대학사, 호부상서, 이부상서, 이번원상서, 학직으로 전시독권관, 일강기기주관, 사고전서관 정총재, 석경관 정총재, 국사관 정총재, 한림원장원학사, 재정직으로 숭문문세무감독, 궁중 내직으로 태의원, 어약방 사무 등 수많은 관직을 맡았고 작위는 태자태보, 백작, 공작에 이르렀다.

숭문문세무감독 등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뇌물을 모으는 등의 엄청난 횡포를 부리다가 건륭제 퇴위 후 그 뒤를 이은 가경제가 대죄 20조를 들어 체포한 후 자살하게 했으며, 재산은 모두 압수되었고 그 재산은 청나라의 15년간 재정수입의 총액과 맞먹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1][2] 이 때문에 민간에서 화신이 넘어지니 가경이 배부른다는 말까지 나왔다. 현대에서는 화신이 황제의 금고관리인이라고 추정한다.

1780년, 31살의 나이로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화신을 박지원이 열하에서 우연히 목격했다고 열하일기에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잘 생겼지만 싸가지가 없게맑고 날카로우나 경망스럽고 덕이 없게 생겼다고.

오늘날엔 화신과 건륭제와의 관계를 동성애로 보고 있는듯 하다. 엄밀히 말하면 양성애지만.. 중국 역사에서 제왕의 남색 대상으로 권력에 오른 이는 비단 화신뿐만이 아니다. 자고라던가 여도지죄의 고사를 낳은 미자하라던가..
----
  • [1] 감이 갈 안온다면 그당시 청의 경제력은 세계최강이었다. 즉, 오늘날로 비유하면 1인의 재력이 미국의 15년 예산에 맞먹는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약 6경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단 의미. 빌게이츠를 줄을 세워놔도 못할 일이다.
  • [2] 다만 당시 청은 독보적인 국가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청나라의 일 년 세입은 은 2600톤에서 2900톤 사이인데, 동시대 프랑스의 세입이 은 2800톤 영국의 세입은 은 3100톤으로 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우위에 있는 상태였다. 엄청난 덩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넘사벽인 일인당 소득과 간접세 수입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은 프랑스 혁명때문에 증가한 전쟁비용으로 국가 재정이 팽창한 상태이기에 직접적인 비교는 무리가 있다. 비상시가 아니라 평상시라면 청나라의 세입이 높을 가능성이 많다.(당시 청나라 GDP가 영국 GDP의 6~7배를 넘음. 덤으로 당시 청나라의 세금은 GDP의 2~3%였고, 영국의 세금은 GDP의 18%였음.) 그러나 당시 청나라도 백련교의 난으로 피를 보는 중인 건 마찬기지였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3-10 11:12:26
Processing time 0.0648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