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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티 포드

last modified: 2014-11-05 18:57:46 by Contributors

(ɔ) Bowman Gum from
이름 화이티 포드(Edward Charles Ford)
생년월일 1928년 10월 21일
국적 미국
출신지 뉴욕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47년, 뉴욕 양키스(자유 계약)
소속 팀 뉴욕 양키스(1950~1967)[1]

1961년 메이저리그 사이 영 상
번 로
(피츠버그 파이리츠)
화이티 포드
(뉴욕 양키스)
돈 드라이스데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1년 월드 시리즈 MVP
바비 리차드슨
(뉴욕 양키스)
화이티 포드
(뉴욕 양키스)
랄프 테리
(뉴욕 양키스)

뉴욕 양키스 영구결번
No.16[2]

Contents

1. 개요
2. 초기 선수 생활
3. 전성기, 그리고 은퇴
4. 투구 스타일
5. 평가


1. 개요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조 디마지오, 요기 베라, 미키 맨틀, 데릭 지터등 타자 쪽에서는 쟁쟁한 프랜차이즈 스타들이 많지만[3] 상대적으로 투수 쪽에서는 내세울 만한 프랜차이즈 스타가 적은 뉴욕 양키스의 간판 프랜차이즈 투수이다. 양키스에서만 뛰며 236승을 기록하여 양키스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한 투수로 남아 있으며, 월드 시리즈에서 기록한 10승은 메이저리그 최다 기록이다. 통산 승률도 0.690으로 상당히 높다.

통산 기록은 평균 자책점 2.75, 236승 106패, 156완투, 45완봉.

포드의 애칭인 "화이티"는 백발에 가까웠던 포드의 머리색에서 유래했다.

2. 초기 선수 생활

1947년 양키스와 자유계약을 맺고 1950년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여 평균 자책점 2.81, 9승 1패, 7완투, 2완봉을 기록하며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포드는 입대하여 2년간 전쟁에 참여한다.

1953년, 복귀한 포드는 평균 자책점 3.00, 18승 6패, 11완투, 3완봉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복귀를 알리고 이후에도 꾸준히 2점대 평균 자책점과 200이닝 - 두 자릿수 완투(1957년 제외)를 기록하며 양키스의 주축 투수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포드는 이 당시 양키스의 감독이었던 케이시 스텡겔 때문에 커리어에서 약간의 손해를 봐야 했는데, 스텡겔은 포드를 특정 팀과의 경기에 주로 활용하고 상대의 에이스하고 많이 대결을 붙였기 때문이다.

3. 전성기, 그리고 은퇴


그러던 중 1960년을 끝으로 케이시 스텡겔이 양키스의 감독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감독으로 랠프 후크가 부임하고 후크는 스텡겔과 달리 포드를 정상적인 로테이션에 포함시킨다.

정상적인 로테이션에 가담한 첫 해, 포드는 대폭발하여 개인 최다 이닝인 283이닝을 던지며 평균 자책점 3.00, 그리고 개인 최다 승인 25승을 기록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이 영 상을 차지한다.[4]

이후에도 포드는 팀의 에이스로서 대활약했고 1963년에는 다시 24승을 기록하였으나 나이가 30대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결국 1967년을 끝으로 양키스에서 은퇴한다.



은퇴 후, 포드는 1974년 명예의 전당에 77.8%의 득표율로 절친한 술친구인 미키 맨틀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5] 한편, 포드는 은퇴 후 맨틀이 그랬던 것처럼 사업에 뛰어들어, 2002년 뉴욕에 양키스를 테마로 한 식당을 차리기도 했는데, 종업원들이 모두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흠좀무... 하지만 지금은 문을 닫은 듯하다.

4. 투구 스타일


투구 스타일은 뺀질이[6]라는 별명에 걸맞게 상대 타자들을 요리하는 스타일이었다. 부정 투구는 일상 생활이었으며[7] 항상 공에 묻힐 만한 이물질을 시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대 타자들의 스타일을 읽어냈고 좌완이라는 이점을 활용하여 상대 타자를 베이스에 효과적으로 묶어 놓았다.

은퇴 후, 자서전에서 부정 투구를 고백했다. 그는 나이 때문에 쇠퇴하는 기량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다음은 내용의 일부.

"나는 내 선수 생활 후반기까지 속임수를 쓰지 않다가 나이가 들면서 선수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1961년에 25승을 거둘 때는 속임수를 쓰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내 사이 영 상을 박탈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24승을 거둔 1963년에도 마찬가지다. 부정 투구는 그 후 조금이었을 뿐이다."

5. 평가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조 디마지오, 요기 베라, 미키 맨틀 그리고 2000년대의 데릭 지터 등 프랜차이즈 타자만으로는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겨룰 수 있는 양키스지만 투수 쪽에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팀에 내세울 만한 투수가 빈약한데 포드는 양키스가 타 팀에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프랜차이즈 투수로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또한, 선수 생활의 많은 기간은 정상적인 로테이션에 속하지 않고 상대 팀의 에이스와 경기하느라 커리어에서 손해를 봤음에도 0.690이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기록했고 월드 시리즈에서 10승을 기록하는 등 양키스가 원하는 투수로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애시당초 이 시기의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에 밥 먹듯이 진출하는 팀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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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951년과 1952년엔 6.25 전쟁 참전으로 인해 빠져야 했다.
  • [2] 데뷔 당시에는 19번이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바꾸었다고 한다.
  • [3] 루스의 경우에는 라이벌 팀에서 건너왔지만 루스의 영입을 기점으로 양키스가 최강팀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루스도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애초에 양키스가 홈 구장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가 루스를 보러 관중들이 2배나 찾아와주었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양키 스타디움의 별명이 '루스가 지은 집'이었다.
  • [4] 이 시기에는 사이 영 상을 리그에서 1명씩 주는 것이 아니라 리그를 통합해서 1명을 주었다.
  • [5] 미키 맨틀은 한 번에 들어갔으나, 포드는 두 번 만에 입성했다.
  • [6] 스텡겔 감독이 포드에게 붙여준 별명. 애초에 미키 맨틀, 빌리 마틴 등과 함께 경기 끝나면 함께 술 마시는 게 일상이었으니...
  • [7] 전담 포수 중 한 명이었던 엘스턴 하워드는 이를 거들어 포드에게 공을 건네기 직전 일부러 공을 문지르고 건네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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