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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last modified: 2015-03-22 15:07:10 by Contributors

한국의 역사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
고려 / 후기 신라(통일신라 말기) / 후백제

Contents

1. 개요
2. 발생 배경
3.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
4. 후대에 미친 영향
5. 신라의 위치
6. 대중성
7. 주요 사건
8. 리그베다 위키에 등재된 후삼국시대 주요 인물
9. 관련 창작물

1. 개요


한국사에서 나말여초(羅末麗初)의 분열기를 지칭함.

892년은 견훤이 무진주(광주)를 점령하고 을 칭한 때이고,[1][2] 936년은 후백제가 멸망한 때이다. 고로 후백제의 존속기간과 같다.

중국당나라 말, 오대십국시대의 초반기와 대략적으로 시기가 겹친다. 당시 중원과 형주, 주장강 유역은 혼란한 반면 사천과 양쯔강 하류 지역의 정권들은 대체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는데, 특히 오월은 북쪽 정권들에게는 복종하면서 자기들 동네에서는 깡패질하는 전형적인 지방 왕초 세력이었다. 견훤이 이들과 손잡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고려의 연이은 방해로 인해 오월, 과만 드문드문 교류했다.

2. 발생 배경

통일신라 말기에 신라의 지배력이 쇠퇴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국가 체계를 갖추면서 옛 삼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통성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옛 백제 땅에 견훤이 건국한 후백제, 옛 고구려 땅에 궁예가 건국한 후고구려, 그리고 대야성(합천), 그나마도 나중엔 백제에게 빼앗기고 금성(경주) 등의 경상도 일부 지역만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신라로 나누어지게 된다.

삼국시대의 구도가 다시 재현되었다고 해서 후삼국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 삼국이 각 지역을 중앙집권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아니었고 호족들이 전국에서 판을 치고 있었다. 경남 일대에는 특히 군소 호족들이 세력을 모아 백제와 고려 사이를 왔다갔다했고신라는 무시, 고려와 백제, 신라의 경계선에도 독립적인 호족 세력이 널려있었다. 결국 고려, 백제라고 해봤자 수도 인근에서 비교적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정도였고, 사실상 다른 지역은 이들에게 신종하는 호족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후삼국시대는 주로 고려와 후백제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지도상의 영토는 작지만 전라도 곡창지대의 생산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주도권은 백제가 가지고 있었고, 군사력도 대등했.. 아니, 백제가 더 강했으며, "생산력은 두배인데 왜 우리가 지는거냐"라는 투의 표현도 있다. 그러니까 힘자랑하기 전에 호족들을 잘 달랬어야죠

신라는 변변한 군사적 움직임도 보여주지 못한 채 무력하게 상황을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경애왕처럼 고려와 손을 잡고 백제를 물리치려는 재주를 부린 경우도 있었으나 결국 그 시도는 후백제의 경주 습격으로 허사로 끝나고 말았고, 이후에는 그저 후백제와 고려의 괴뢰국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라 김씨 왕조는 헌강왕 때만 해도 안정기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아우 정강왕이 왕위에 오르고 1년 만에 죽자 이번에는 여동생 진성여왕이 올랐다. 진성여왕 때부터 사실상 지방반란을 통제하지 못해 후삼국시대가 시작된다.

문제는 신라 정계 내부가 혼란스러웠다는 것. 후계자가 없었던 진성여왕은 출생도 미묘한 헌강왕의 서자 효공왕을 왕위에 올렸다. 효공왕도 후사가 없어 5년 만에 사망하여 박씨 왕조로 교체되고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아달라 이사금 이후 대신 733년만에 박씨가 왕위를 계승(신덕왕)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신덕왕도 단 5년만 재위하고 아들 경명왕이 오른다. 경명왕 2년에 김씨의 반격이 있었지만 진압당했다. 하지만 경명왕도 7년 만에 죽어 경애왕이 올랐는데, 후백제의 침공 이후 경애왕이 살해되고 김씨가 왕위를 되찾은 것도 김씨의 암묵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힘을 모아도 부족할 판에 정치조차 엉망이니 신라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일 수 없었다.

나라 이름이 삼국시대와 같은 이유는 백제나 고구려가 멸망한지 이미 백년 이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각지에는 삼국의 유민 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견훤이 건국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의자왕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3] 궁예는 비슷한 이유로 고려[4]라고 국명을 정했다.

궁예의 고려(후고구려)는 초기에는 기세가 좋아 견훤이 손을 뻗히기 전에 충청도의 대부분을 장악하였으며, 신라를 멸도라 부르며 경북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북쪽으로는 대동강 유역까지 나아가 평양을 수복하였다.[5] 왕건을 시켜 나주를 탈취하고 견훤을 수전에서 박살낸 것은 후백제에게 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궁예는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바꾸고, 자신을 미륵이라고 자칭하는 등 지나친 중앙집권화를 진행하면서 패서(황해도) 호족들의 인심을 잃었다. 결국 궁예는 쿠데타로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면서 국명은 다시 고려로 돌아갔다(918).

3.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

본격 한국판 초한지

왕건이 고려를 세운 직후만 해도 후백제는 고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냈고, 서로 볼모를 교환하는 등 평화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견훤이 패전을 거듭했던 대야성 전역에서 마침내 승리하자 왕건은 견훤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구원군을 보내었고 견훤은 일단 군대를 물렸지만 이후 고려와 후백제는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조물성 전투에서 양군이 맞서다가 역병이 돌고 고려군이 계속 증강되자 견훤은 일시 고려와 화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의 경애왕이 계속 친고려적 태도를 취하고 후백제가 보낸 인질(견훤의 외조카 진호)이 돌연히 죽으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2차 전쟁 초기에는 후백제가 유리하였다. 공주성을 함락시켜 밀리는 감이 있던 충청도 전역에서 우세를 점하고, 928년에는 견훤이 친정하여 금성을 점령해 경애왕을 죽이고 왕건의 군대를 산전투(팔공산)에서 격파하는 등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이 싸움에서 왕건은 신숭겸 등의 개국공신들이 죽음으로 방어하는 동안 간신히 몸만 빼서 도망쳤다. 그 뒤에는 왕건이 궁예 휘하에 있을 때 빼앗겼던 나주를 다시 되찾는 성과를 이루기도 한다.

그럼에도 백제는 점차 호족들의 지지를 잃으면서 밀리게 된다. 고려 건국 직후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던 상주에 세력을 잡고 있던 아자개가 고려에 항복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견훤의 아버지였다.[6] 그 밖에 대표적인 케이스가 공직의 항복이었는데, 일벌백계라고 자식과 부인의 다리 힘줄을 지져버렸지만 도리어 역효과만 낳았다...결국 고창(안동)에서의 패배(930)로 쇠퇴하기 시작하고, 운주(홍성)의 패배(934)로 결정타를 입게 된다.

이렇게 대세는 고려로 확실히 기울게 되고, 경주 부근의 약간의 영토만 유지하고 있었던 신라는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항복하면서 천년에 달하는 역사를 마감했다. 한편 후백제는 후계 갈등이 일어나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총애받던 서자 금강을 죽이고 왕이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에 견훤이 적국인 고려에 망명하고 주요 호족들도 대거 이탈하면서 후백제는 급격하게 붕괴. 결국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10만명을 동원한 고려의 물량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배하며 멸망하고 만다. 결국 고려의 통일로 이 시대는 막을 내린다.

4. 후대에 미친 영향

전쟁은 끝났지만 호족들은 왕건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혼인 정책으로 유대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혜종, 정종 때에도 외척의 세력은 무척이나 강했다. 광종 때 적극적인 견제로 세력을 많이 잃지만 일부는 신라의 경주 김씨 세력 등과 함께 문벌 귀족을 이룬다.

불교적으로는 신라 왕실 중심의 교종 대신 호족들이 믿기 편한 선종이 융성했으며,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수지리설, 참설 등도 발달했다.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도 정치적 명분 쌓기를 풍수도참설을 내세우곤 했다. 육두품 세력들이 지배층 주류에 편입된 시기, 즉 골품제가 무너진 시기이기도 하다.

한편 이 중간에 발해가 멸망해, 일부 잔존 세력이 고려로 망명하기도 했다. 발해는 요동에서 10여년간 잘 싸우다가 부여성이 함락된 직후 상경용천부로 쳐들어온 거란군에게 왕 대인선이 항복하면서 급작스레 멸망했으므로 고려는 이들을 도울 시간적, 군사적 여유가 없었다. 대신 왕건은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유민들을 후대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를 적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발해의 멸망은 한창 후백제와 대립하던 고려 측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었다. 고려로 남하한 발해의 잔존 세력으로 인해 고려의 군사력 및 행정력에 필요한 인적 자원들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한반도 유일의 난세였다고 하는 시기로 반 농담삼아 '한국사의 유일한 전국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5. 신라의 위치

다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견훤이나 왕건이 칭왕을 하긴 했지만 완전한 독립국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나마 신라에게 머리를 숙이고, 신라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견훤전에 실려 있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간에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견훤과 왕건은 '존왕의 의(義)' '왕실을 높인다'는 식으로 신라 왕실을 형식적이나마 주군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7][8] 단 궁예는 이 범주에서 제외된다. 궁예는 신라에 극도로 적대적이었고, 적어도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대외 교섭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일 때도 신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으나 고려군이 몰려오는 판에 서라벌(경주)에서 놀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고, 한편으로는 정통성의 확보라는 명분이 있는지라 결국 '선양'을 목적으로 경순왕을 즉위 시켰다. 아마도 실제로 고려가 그랬듯이 삼한을 통일한 후 선양을 받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되려 임금에게 칼을 겨눈 역적질이라는 인식을 받아 역으로 고려에게 명분이 돌아가는 결과를 낳았다.(적어도 호족들이 고려에 붙을 명분은 충분했다.)

이러한 묘한 관계가 무너진 것은 고창전투에서 견훤이 돌이킬수 없는 타격을 입고 난 후 무게추가 기울어 버린 후인데 930년 고창전투에서 승리한지 1년만이 931년 왕건은 전격적으로 경주를 방문한다.
그 전까지 신라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방문이 아니라 입조의 형태를 취했어야 했겠지만 어디까지나 방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신라 왕실의 보물을 선물이라 쓰고 강탈이라 읽는 형태로서 챙기는 등 그 이전까지 신라 왕실에 대한 존중의 태도에서 대등한 위치, 혹은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왕건의 행동에 대해 신라귀족들이 반기를 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단연 견훤 때문이다.

6. 대중성

태조 왕건의 성공에서 볼 수 있듯 소설 등으로 꾸미면 충분히 각광받을 만한 소재였다. 중국의 삼국지[9], 일본의 센고쿠 시대[10]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영웅들이 일어나고 끝났다는 것, 그 중에서 특출난 소수, 특히 세 명의 영웅이 나오고 그 셋을 위주로 역사가 흘러간다는 것, 기존 정치세력 - 후한, 신라, 무로마치 막부 - 이 유명무실화 되었지만 겉으로는 존중하고 이용해 먹는다는 것 등에서 공통점이 있다. 삼국시대가 너무 길다는 걸 생각하면 이 때만큼 화려하면서도 완결성 있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시기가 한국사에는 없다시피하다. 그만큼 평화로웠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하지만 태조 왕건 이전까지 후삼국시대에 대한 인기는 안습 수준. 어쩔 수 없는 게 한국은 외국과의 전쟁이 너무 많았고 여기에 큰 비중을 둬 왔다. 수, 당과의 전쟁, 거란, 여진, 몽골과의 항쟁, 임란과 호란 등이 그것인데 오히려 이들과 비교하면 50년 정도인 후삼국시대는 부정적으로 볼 경우 내전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 중국의 삼국시대와 일본의 전국시대가 이후 역사서로든 민간 전승으로든 극이나 소설의 형태로든 끊임 없이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반대로 한국은 왜란, 호란 등에 대한 창작이 활발했으니...한국의 특성으로밖에 볼 수 없는 부분이다.

7. 주요 사건

  • 원종, 애노의 난
    889년(진성여왕 3) 사벌주(지금의 상주)에서 일어난 난. 그 결과를 보면 황건적의 난이나 일본 전국시대의 오닌의 난과 비교할 만 하다. 당시 신라 정부는 나마(奈麻) 영기(令奇)를 파견하였지만 토벌에 실패했고, 그 뒤에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우리가 잘 아는 견훤, 양길, 기훤 등의 호족 세력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 비뇌성 전투(899)
  • 나주 공방전
  • 공산 전투
  • 고창 전투
  • 일리천 전투

9. 관련 창작물

창작물는 소외되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궁예라는 인물의 매력 때문인지 일제강점기 때 마의태자[12], 목대왕의 철퇴 등 후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나왔는데, 또한 김동인의 장편소설인 견훤도 있었다. 현대에도 삼국기, 궁예, 왕건 등으로 몇 차례 소설이 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인기 자체는 사극 태조 왕건을 기점으로 폭발했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정도. 조선 중기 쯤에 후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이 나왔어야 했다

  • 드라마
  • 만화

  • 소설
    • 고려태조 왕건
    • 궁예(강병석 저)
    • 견훤(김동인 저)
    • 마의태자(이광수 저)
    • 왕건(김정한 저)
    • 왕건(신봉승 저)
    • 일목대왕의 철퇴(신채호 저)[13]
    • 후삼국기

  • 연극
    • 마의태자(이희진 각본)

  • 영화
    • 왕자 미륵
    • 풍운 삼국지(1967)
    • 태조 왕건(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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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왕을 칭하면서도 한편으로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이라는 최충헌에 맞먹을 기나긴 관직명을 혼용했다. 아직 완전히 독립할 자신감이 없었던 듯.
  • [2] 이후 900년엔 완산주(전주)를 점령하고 본격적으로 국호를 백제(이전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서 후백제라고 부른다)라 정한다.
  • [3] 그런데 정작 견훤은 상주 가은현 즉 현재의 경북 문경 출신.
  • [4] 사서에 나타나는 후고구려는 구별을 위한 표기이며, 고구려장수왕 이후 국호가 고려로 바뀌었다.
  • [5] 통일신라 시대 신라의 통치력은 예성강 유역까지였다. 물론 김춘추의 담판으로 대동강 이남은 신라의 영토라는 것이 신라의 기본 입장이었고, 이후 ?성덕왕 때에 발해를 치는 대가로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은 신라땅이라는 증명서도 떼왔으나 직접 통치는 힘에 부쳤던 모양. 덕분에 옛 고구려 경기 지역에 해당하는 패서지역 호족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지낼수 있었다.
  • [6]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왕건이 직접 마중나가 맞이했다는 구절 등을 보면..
  • [7] 삼국지의 후한과 같은 형태. 칭왕하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도 대왕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적인 면모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왕의 장인 등 가까운 친족에게 '갈문왕'의 칭호를 내렸던 것도 외왕내제적 체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8] 그래서 후삼국시대의 전문 연구자 중 하나인 신호철 교수는 후백제의 견훤이 반신라적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개설서나 교과서의 내용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 [9] 수많은 전국시대가 있었지만 한중일 삼국에서 가장 유명한 전국시대는 이 시기다.
  • [10] 일본의 역사가 짧은 것도 아닌데 이 시기를 죽어라 우려먹는다.
  • [11] 견훤에게 종속한 해적이었다는 설도 있고 견훤과는 다른 독자세력을 구축했다는 설도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전자의 설을 채택.
  • [12] 마의태자는 페이크주인공이고 진주인공은 궁예
  • [13] 그 단재 신채호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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