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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페론

last modified: 2015-04-13 12:48:59 by Contributors

아르헨티나의 역대 대통령
35대 36대 37대
드미로 파레이 후안 페론 두아르도 로나디
46대 47대 48대
울 알베르토 라스티리 후안 페론 사벨 데 페론

Contents

1. 인물 소개
2. 페론주의에 대한 논란
3. 기타
4. 관련항목

(ɔ) Pinélides A. Fusco from

후안 도밍고 페론 Juan Domingo Perón.
1895~1974
아르헨티나의 29대,41대 대통령. 한국에선 단순히 표퓰리즘을 시행해서 경제를 말아먹은 독재자 정도로 알려져있는 수준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영향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든 부정적으로 작용했든간에 아르헨티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1983년 민주화 이후 1989년부터 99년까지 대통령직을 역임한 카를로스 메넴이 페론당 출신이고, 2001년 이후의 모든 대통령이 페론당 출신이기도 하다.

1. 인물 소개

아내인 에바 페론이 상당히 유명하며 대중영합정책으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1]

참고로 어머니가 원주민인 메스티소였지만 그 당시엔 아르헨티나에선 원주민을 인간이하의 존재로 취급했기에 친가에선 그가 메스티소라는 사실을 숨겼다. 1911년에 군사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군인으로써의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에 승진속도는 느렸긴 했지만 착실하게 군인으로써의 길을 걷던 중에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발령이 나면서 파시스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귀국 후에는 1943년 군사쿠데타에 참여해서 13년간 통치했던 군부독재정권을 뒤엎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군사 쿠테타에 참여한 공로로 노동사회복지장관직을 역임했고 페론은 공산당 계열의 노조는 탄압하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노동정책에 있어서 그 동안 사민주의 세력(급진시민연합, 사회당)도 못내었던 공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성과를 내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1945년 부통령직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호헌을 지지하는 쿠데타로 모든 직책을 잃고 야인이 될 위기에 처해졌으나 그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와 에비타의 노력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이때 시위로 풀려난 페론은 194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장관 재임시의 업적을 내세워 52.8%의 득표율로 30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좌파 민주연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대통령 취임에 성공한 페론 노동자의 권리를 더욱 증진시키는 정책을 펼치면서도 동시에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반대파에 대해 탄압을 하였다. 하지만 산업화와 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인한 전후복구로 인한 수요상승, 임금상승, 중산층 확충, 복지확충으로 인한 내수증진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에바 페론의 헌신적인 내조와 여성참정권 부여, 외자기업의 국영화 정책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49년에 헌법을 개정했고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63.5%의 득표율을 얻어 급진시민연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50년대 들어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 등 주요국들이 전후복구를 거쳐 공업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아르헨티나산 제품의 수요가 크게 줄어 아르헨티나의 경제도 덩달아 침체를 겪기시작했고 그와 성향과 별개로 나치인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나치에게 피해입은 국가들과 마찰을 빚어 이러한 경기침체를 더욱 심해지게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에비타가 죽은 이후에 이혼과 매춘을 합법화 하면서 가톨릭 교회와 척을 지면서 독실한 신도들의 지지도 잃어버렸으며 군부내에서도 반 페론파의 세가 강해지면서 1955년 9월 후안 페론은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20년 가까운기간동안 아르헨티나는 잦은 정권교체, 인플레이션 등의 혼란을 겪게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후안 페론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한편 후안 페론은 파라과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스폐인으로 거처를 옮겼고[2]자서전을 집필하면서 1기 집권시에는 적대적인 관계를 지녔던 좌파와도 관계를 맺으며 재기를 노렸다.

이후 1973년 이미 장기화된 성장침체와 정치혼란에 지친 정부에선 페론파의 출마도 허용했고ㅡ 이어서 치러진 총선에서 페론파가 압승을 거두었다. 친 페론파가 집권한 아르헨티나 정부에선 페론의 귀국을 허용했고, 오랜 망명생활에서 벗어난 페론은 노동자 권리 증진과 정치혼란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그 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61.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아미 고령이었던 페론의 건강상태는 이미 악화 된채여서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대행하는 경우가 많은 반쪽짜리 대통령 신세였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지 1년도 채 되지않는 1974년 7월 1일 향년 79세라는 나이에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2. 페론주의에 대한 논란

대중영합정책으로 인기를 끌었을뿐 오히려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 그가 주창했던 페론주의[3][4] 때문에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사회보장정책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파탄시켰다는 것.

이에 대한 반박으로는, 그 뒤의 군부 독재 정권[5], 그 후 라울 알폰신 정권[6], 카를로스 메넴 정권 등이 오히려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었다는 것도 있다. 이런 (카를로스 메넴 정권[7]에서 도입, 실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

그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쪽에선 1949년부터 1976년까지 그가 통치하던 시대[8]에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0%의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아르헨티나의 공업이 농업에 비해 그다지 발전하지 못한 측면이 있고 20세기 초 발전된 국가였던 아르헨티나가 그의 시대를 거친후 몰락했다는 측면도 있어서 그의 평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듯하다.

3. 기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수 나치 인사들이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오자 그들한테 보호비(?) 명목으로 돈받고 그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과 커넥션이 있는 거 아니냐는 음모론도 존재하지만 위에서도 보듯 가톨릭과도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니면 카톨릭 종교계의 부탁을 받아서 숨겨주고 그로 인해 외교적인 부분이나 대외적 이미지에 손해를 감수했는데 종교계에서 그에 대한 보상은 커녕 간섭이 끊이지 않아서 카톨릭계와 마찰이 생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페론주의를 단순한 좌파 포퓰리즘이 아니라 오히려 극우 파시즘적 요소와 더 관련이 깊다는 주장도 많고 실제로 위키피디아에서는 페론주의 항목을 '제3의 위치(Third Position)'카테고리에 넣고 있다. 사실 후안 페론의 1기 집권당시 제1야당(급진시민연합)이 좌파 성향이었고, 페론당이 우파 기믹이었다. 후안 페론이 1960년대에 좌파와도 관계를 가지면서 색체가 흐려진감이 없지않긴 하지만, 어쨌든 그 덕택에 2000년대 초반까지의 (통합)페론당의 성향을 보면 성향이 몹시 다양해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우파에서부터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좌파에 이르기까지 성향이 다양했다. 다만 2000년대 초 이후에 좌파블록과 중도파 블록, 우파 블록이 성향차이나 권력배분등의 문제로 인해 완전히 분리되었고, 현재 아르헨티나 야당가운데서도 페론주의 성향의 정당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트로피코의 플레이 가능한 실존 아바타 중 하나인데, 방구쟁이저능아라는 엄청난 단점을 가지고 있다(...)

4.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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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당시만해도 아르헨티나는 대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국가로 상류층들이 영어식 발음으로 스페인어 하기를 자랑으로 여겼을 정도.
  • [2] 참고로 당시 파라과이는 반공군사독재체제였고, 스페인은 그 악명높은 프랑코가 집권해 있었다. 이것만 봐도 후안 페론의 정치적인 스탠스가 어느쪽에 있는지 알수있다. 비록 좌파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건 사실이긴 하면서도... 21세기의 대통령 중에 이 인물, 정당으로 치면 (아르헨티나 기준으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어느 나라의 어떤 정당과 정치적인 스탠스가 비슷하다고도 볼 수도 있다.
  • [3] 2000 ~ 2010년대에 집권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페론주의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다만 네스토로 키르치네르 대통령 시기에는 어느정도 성과를 본 반면에 페르난데스 시기에는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수완부족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형편.
  • [4] 사실 페론이 표퓰리즘으로 나라 말아먹었다고 욕 먹는것에 비해 의외로 80년대까지는 페론주의 정당은 그리 세를 얻지는 못했고(일단 5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1973년부터 1976년까지의 공백기를 빼면) 급진시민연합과 반 페론파 성향의 군부가 집권했고, 그 뒤를 급진시민연합(라디칼당) 소속의 라울 알폰신이 집권했다.) 90년대 집권한 카를루스 메넴도 페론주의 계열 정당(정의당)에서 활동하던 정치인이었긴 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다.
  • [5] 티에리(아르헨티나의 독재자) 정권. 포클랜드 전쟁이 바로 이 정권 당시에 일어난 일이다.
  • [6] 급진시민연합(라디칼당) 소속
  • [7] 여담이지만 카를로스 메넴은 현재 집권당(그리고 페론주의 성향의 정당)인 정의당 소속의 정치인이었다.(...) 물론 애시당초 정의당내에서도 좌파블록과 우파블록이 나누어져 있어 2010년대 들어 거진 좌파블록과 우파블록이 따로 후보를 내는 형편이기는 하지만...
  • [8] 정확하게는 후안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통치했고, 그 사이에는 정권을 잃고 망명을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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