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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last modified: 2015-11-07 14:02:09 by Contributors

Contents

1. 조선 세종 때 제작된 책 및 그에 실린 문자 체계
1.1. 서문
1.2. 관련 서적
1.2.1. 언해본
1.2.2. 실록본
1.2.3. 해례본
1.2.3.1. 어떤 책인가?
1.2.3.2. 해례본의 구성
1.2.3.3. 간송본
1.2.3.3.1. 간송본에 얽힌 흑역사
1.2.3.3.2. 그 이후
1.2.3.4. 상주본
1.2.3.4.1. 오리무중인 행방
1.2.3.4.2. 국외 유출과 훈민정음 기원에 대한 조작 우려?
1.2.3.4.3. 학술적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
1.2.3.5. 제3의 판본 일부 발견
1.3. 조선시대 훈민정음 취급에 관하여
1.3.1.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
1.3.2. 왕실 입장에서의 훈민정음
1.3.3. 연산군의 훈민정음 탄압
1.3.4. 숙종
1.3.5. 훈민정음에 대한 비하 표현 논란 - 언문과 암글(암클)
1.3.5.1. 언문
1.3.5.2. 암글(암클)
1.4. 여담
1.5. 관련 항목
1.6. 대중매체 속 훈민정음
2. 삼성전자워드프로세서


1. 조선 세종 때 제작된 책 및 그에 실린 문자 체계

《訓民正音》.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창제일은 1443년 12월. 다만 책이 발간된 1446년 9월을 기준으로 하여 오늘날의 한글날이 만들어졌다.

  • 이 책을 통해 공포된 문자 체계에 대해서는 한글 문서를 참고할 것. 이 문서에서는 《훈민정음》이라는 책과 문자 체계가 아직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조선 시대에서의 취급에 대해서만 다룬다.

1.1. 서문

여기에서 충남대학교 김차균 교수의 발음으로 전기 중세 국어음에 해당하는 재구음을 들을 수 있다.

  • 나눔바른고딕 옛한글, 나눔명조 옛한글(이 둘은 여기서 다운 가능), 함초롬체 LVT(아래아 한글 항목 참고), 본고딕(또는 Noto Sans CJK KR, 여기서 다운 가능) 중 하나가 설치되어 있으면 제대로 보인다.
  • 원문 표기와 발음, 현대어역을 실었으며, 발음의 경우 전기 중세 국어의 발음을 재구하여 국제음성기호로 표기하였다.
    • 'ㅈ, ㅊ, ㅉ'은 치경음([t͡s~d͡z, t͡sʰ, t͡s’])으로 표기하였으며, 치경음 뒤에 'ㅣ'계열 모음이 붙어도 구개음화하지 않은 것으로 표기하였다. (예: 샤=[sja]), 쟈=[t͡sja])
    • 어두자음군은 자음의 연속체로 표기하였다. (예: ㅳ=[pt])
    • ㆆ과 ㅸ은 각각 [ʔ], [β]으로 표기하였다.
    • 모음 ㆍ, ㅓ, ㅡ는 각각 [ʌ], [ə], [ɨ]로 표기하였으며, 이중모음 및 삼중모음은 본모음에 [j] 혹은 [w]를 붙여서 표기하였다. (예: ㅐ=[aj], ㅖ=[jəj], ㅢ=[ɨj])
    • 받침 ㅅ은 [s]으로 표기하였으며, 파열음 계열 받침은 불파음화를 반영하지 않았다. (예: 랏=[ɾas]
    • 성조 표기는 거성(글자 왼쪽에 점 하나)의 경우 [˥], 상성(점 둘)의 경우 [˨˦], 평성(점 없음)의 경우[˩])을 붙여 표기하였다. (예: 나·랏:말=[na˩.ɾas˥.mal˨˦])
    •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 된소리는 전탁(유성파열음)음을 나타내서 성질이 전혀 다르나, 일단은 전탁음을 된소리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고 된소리로 표기하였다.
  • 한자 為(할 위)는 약자로, 爲쪽이 정체자이나, 원문 표기가 為에 가까워 그대로 표기하였다.
  • 전공자 분들의 수정바람.

hunminjeongeu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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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솅조ᇰ·ᅌᅥᆼ·졩·훈·져ᇰᅙᅳᆷ [sjəj˥.d͡zoŋ˩ ŋə˥.d͡zjəj˥ hun˥.min˩ t͡sjəŋ˥.ʔɨm˩] 세 종 어 제 훈 민 정 음 나·랏:말ᄊᆞ·미 [na˩.ɾas˥.mal˨˦.s’ʌ˩.mi˥] (우리)나라의 말이 듀ᇰ·귁·에달·아 [tjuŋ˩.ɡuj˥.ɡəj˥ taɾ˩.ɦa˥] 중국과 달라 ·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mun˩.t͡s’ʌ˥.wa˥.ɾo˥ sə˩.ɾɨ˩ sʌ˩.mʌs˩.ti˥ a˩.ni˥.hʌl˩.s’ʌj˥] 문자(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셔ᇰ·이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i˥.ɾən˩ t͡sjən˩.t͡sʰʌ˥.ɾo˥ ə˩.ɾin˥ pʌjk˥.sjəŋ˥.i˥ ni˩.ɾɨ˩.ɡo˥.d͡zjə˥ holʔ˥ p’aj˥ i˩.sjə˥.do˥]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 [mʌ˩.t͡sʰʌm˥.naj˨˦ t͡səj˩ ptɨ˥.dɨl˥ si˩.ɾə˥ pʰjə˩.di˥ mot˨˦.hʌlʔ˩ no˥.mi˥ ha˩.ni˥.ɾa˥]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이·ᄅᆞᆯ為·윙·ᄒᆞ·야:어엿·비너·겨 [naj˥ i˥.ɾʌl˥ uj˥.hʌ˥.ja˥ ə˨˦.jəs˩.pi˥ nə˩.ɡjə˥] 내가 이를 위해 불쌍히 여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saj˥.ɾo˥ sɨ˥.mɨl˥ jə˩.dɨlp˥.t͡s’ʌ˥.ɾʌl˥ mʌjŋ˩.ɡʌ˥.no˩.ni˥]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ᄅᆞᆷ: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 便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sa˨˦.ɾʌm˩.ma˨˦.da˥ hʌj˨˦.jə˥ su˨˦.βi˥ ni˩.ɡjə˥ nal˥.lo˥ psu˥.məj˥ p’jən˩.ʔan˩.kʰɨj˥ hʌ˩.ɡo˥.d͡zjə˥ hʌlʔ˩.stʌ˩.ɾʌ˩.mi˥.ni˩.ɾa˥]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

  • 언해본의 나머지 원문과 그 현대어 해석은 여기서 볼 수 있다.

  • 억양을 들어보면 서울 사투리와 비슷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 홍윤표 전 연세대 교수는 원문의 文字가 뜻하는 것이 글자 또는 한자가 아니라 '한자로 된 숙어나 성구(成句) 또는 문장'이라고 한다. '문자 쓰고 앉아 있네' 같은 표현의 '문자'와 같다고 한다. 즉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문 구(句)·문장과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으로 (한문 구·문장을 쓸 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능히 말할 수가 없다'라고 한다. 또한 왜 '문자'를 새로 만들었는데 훈민정문(文)이나 훈민정자(字)가 아니라 훈민정음(音)인지에 대해서도 이 점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주장은 이 글의 4쪽부터 13쪽을 참고.

  • '능히'라고 된 부분의 언해 부분은 '시러'인데, 직역하면 '얻어'('실어'가 아니다)이다.[1] 중세 한국어의 '싣다'는 현대 한국어의 '싣다'와 '얻다'라는 뜻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이 단어에서 파생부사 '시러곰'(능히)이 생겼다.

  • '사람이'라고 된 부분의 언해 부분을 직역하면 '놈이'이다.(위의 원문에 보면 '노미'라는 표기가 보일 것이다.) 당대의 '놈'은 비칭(卑稱)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평칭이었다.

  • 당시에 중국의 국호는 '명'이었고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던 표현이며, 문제의 '듕귁에 달아'는 '나라 가운데에서 달라(=국내에서 차이가 있어)'로 해석해야 한다는 사이비 역사 측의 트롤링 엉터리 주장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중국은 중국이었다.[2] 애초에 '중국'이란 단어 자체가 중국 역대 왕조 및 국가를 통틀어 이르는 일련의 국가 체계를 의미하는 말이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3] '중국'이 중국(China)인 증거는 이 문서의 이미지. 훈민정음 언해본 이미지를 보면 '중국' 밑에 "황제가 계신 나라, 우리나라에서 흔히 하는 말로 강남을 말한다"라고 작은 글씨로 분명히 부연되어 있다. 강남은 장강(양쯔강) 이남을 말하며, 중국의 이칭 중 하나다. ‘강남 가는 제비’'강남 천자'와 같은 말에서도 나오는 표현. 명 초기에는 남경(난징)이 도읍이었기 때문.

1.2. 관련 서적

1.2.1. 언해본


세조 때 발간된 《월인석보》[4]의 권두에 세종의 서문, 본문(예의)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한문(+현토)+언해'의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이것이 '언해본'이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나랏말싸미…'도 여기서 나왔다. 이를 《훈민정음》 언해본이라고 부른다. 현재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은 1459년 간행된 《월인석보》에 붙어있는 것이며, 이외의 언해본으로 2종(박승빈본, 일본 궁내청 소장본)이 더 현전하지만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 사실 위 두 그림 중 아래 그림이 실제 《월인석보》에 실린 내용에 해당하며, 위의 그림은 창제 당시의 것으로 예상되는 모습을 국어사학회에서 디지털 기술로 재구한 것이다. 관련 기사. 서울대 김주원 교수의 저서 《훈민정음》(2013)에도 관련 서술이 나온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일단 제목이 《훈민정음》과 《세종어제 훈민정음》으로 각각 다르다. 또한 아래의 《월인석보》에 실린 언해 부분(한 줄에 우리말 작은 글자로 두 행을 써 넣은 부분)의 첫 네 줄은 같은 책 다른 대목의 언해 부분과 글자체나 글자 간격 등이 상당히 다르다. 전자가 뭔가 더 각진 글씨인 데다, 글자를 우겨넣은 듯한 모습. 여타 대목에서는 한 줄에 작은 글자 16자가 들어가지만 첫 네 행에서만은 20자까지 들어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세조 시대에 《월인석보》가 발간되었으므로, 선대 왕의 시호인 '세종'을 추가하는 과정에서 글자 수가 늘어났기에 목판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즉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그냥 《훈민정음》이라는 타이틀을 단 채로 위 그림과 같이 가지런한 언해가 붙었을 것이지만, 세종이 승하한 이후 세조 시대에 발간된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에는 '세종어제'라는 말을 추가하면서 언해 부분에도 글자를 추가로 우겨넣었던 것. 사실 '세종' 등의 시호는 해당 임금의 사후에야 붙여졌으므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쓰인 책에 '세종어제'라는 말이 쓰였을 리 만무하다.

2012년 10월 9일 한글날에 네이버에서 디지타이징 버전으로 무료 공개한 버전은 국어사학회에서 재구한 위 버전이 아닌, 《월인석보》에 실린 모습인 아래 버전이다. 보러 가기

1.2.2. 실록본

《훈민정음》은 《세종실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해례본에는 실려 있는 '해례'와 '정인지 서문'을 제외한 '세종 서문', '본문(예의)'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실록본이라고 따로 칭하기도 한다.

1.2.3. 해례본

unesco-memoryoftheworld.gif
[GIF image (6.44 KB)]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이름 《훈민정음》 해례본
Hunminjeongum Manuscript /
Hunminjeongum
국가·소장 대한민국 서울 간송미술관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1997년
제작시기 1443년
한글, 즉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의 사용 방법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책의 제목. 국보 제70호이며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참고로 해례본 책이 등재된 것이지, 훈민정음 원본이 유네스코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1.2.3.1. 어떤 책인가?

1940년에 와서야 비로소 다시 발견된,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책. 말하자면 한글의 설계도가 실려있는 책이다. 한글의 제작 원리에 대해서 밝혀져 있는 책은 이것이 유일하다. 현재 지구상에서 쓰이고 있는 모든 문자 가운데 창제 원리가 기록된 문서(물론 현존하는 것들 가운데)가 있는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바로 이 때문.

언해본에는 제작원리 내용이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의 창제에 대한 여러 가지 구구한 억측이 존재했다. 심지어는 창문살을 보고 본따 만들었을 거라는 추측까지 있었다.[5] 한글이 이런 얼토당토 않은 폄하를 겪던 와중에, 해례본이 발견되었기에 엄청나게 독창적이고, 매우 높은 수준의 언어학, 음성학적 지식과 철학적인 이론이 한글에 적용되어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확인된 것이다.

해례본의 발견으로 인해 한글 창제의 원리에 대해 많은 것들이 확인되고 알려지긴 했는데, 사실 그 내용이 꽤 어려워서 아직도 대해 학자들 사이에 한글 원리에 대한 해석에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특히 모음자와 관련된 부분.

2014년 현재 알려져 있는 판본은 간송본과 상주본 단 둘뿐이다. 그나마도 소재가 알려져 있는 것은 간송본뿐이다. 다행히 간송본을 토대로 영인본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열람이나 유실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2014년에 제3의 판본의 파편(...)이 궁중에서 쓰였던 모자 속에서 발견되었다. 아래 항목 참고.

1.2.3.2. 해례본의 구성

  • 임금의 글
    • 어제 서문
    • 본문(예의): 세종이 간략히 해설한, 글자의 운용 방법
  • 신하의 글
    • 해례(다섯 '해설'과 한 '예시'가 실렸기에 '해례'이다)
      • 제자해: 글자 창제에 관한 해설
      • 초성해: 초성 글자에 관한 해설
      • 중성해: 중성 글자에 관한 해설
      • 종성해: 종성 글자에 관한 해설
      • 합자해: 초중종 글자를 합한 글자에 관한 해설
      • 용자례: 글자를 활용한 예시
    • 정인지 서문 - 정인지 서문의 위치를 따지면 '서문'이 아닌 '발문'[6]이 되겠으나, 세종이 서문을 쓰기 전에 정인지가 이미 썼던, 굳이 말하자면 원조 서문이 정인지 서문이며, 세종의 서문이 추가되면서 이것이 뒤로 밀려났을 뿐이기에 편집상의 위치와 무관하게 '서문'으로 불린다. '정인지 후서'라는 표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후서는 보통 책이 쓰이고 나서 한참 훗날에 추가적으로 쓰인 글을 의미하는바, 정인지는 창제와 거의 동시에 이 글을 썼으므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다. 《훈민정음》의 후서에 해당하는 것은 이하에서 설명할 숙종의 글.

그리고 한문으로 쓰여 있다. 흔히 말하는 '나랏말싸미…'는 언해본의 서문이고, 《훈민정음》의 서문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한다. 당대의 문자 언어는 한문이었고, 새로 만든 문자를 설명하는 문자언어가 한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초로 발견된 《훈민정음》은 맨 앞 부분 두 장이 고의적으로 찢긴 상태였다. 이 낙장 두 장은 실록본을 베낀 가짜 페이지로 메꿔져 있었다[7]. 찢긴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연산군의 한글 탄압 때 책을 감추기 위해서 표지를 뜯어 내고 다른 표지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의 한글 탄압 때문에 표지를 뜯은 게 아니라는 정황적 근거가 있다. 최초 발견된 《훈민정음》의 종이 뒷면에는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 기존의 책을 재활용했을 한 선비가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십구사략언해》가 있었는데[8], 이 내용 역시 초반부가 등장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책을 필사할 때 처음부터 쓴다는 점을 감안하면, 표지를 뜯어낼 때 이 필사 내용 역시 같이 뜯겨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십구사략언해》는 내용상 약 18세기 후기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니, 결국 책 표지를 뜯어낸 것은 18세기 이후라는 얘기가 된다. 16세기의 연산군 한글 탄압과 연관지을 수 없다.

1.2.3.3. 간송본

초간본, 즉 원본이자 최초로 발견된 해례본은 1940년대에 발견되어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보관 중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일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이름보단 '《훈민정음》 원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상주에서 두번째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는 구별을 위해 소유자의 호를 따서 간송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은 이 판본 역시 세종대왕 생전에 나온 것으로 보긴 좀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세종'이라는 묘호는 세종 사후에 붙여진 것이기 때문[9] 그래도 현재 남아 있는 판본 중에서 간행시기가 가장 이른 판본이고 내용상 원본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어학계에서는 이를 원본이라 하지 않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정확하게 부른다.

1.2.3.3.1. 간송본에 얽힌 흑역사

김태준(金台俊, 1905년 ~ 1949년)

간송본은 일제강점기의 국문학자 김태준의 제자였던 이용준(李容準)에 의해 그 존재가 처음 밝혀졌다. 원래 광산 김씨 문중의 가보로, 이용준의 처가인 광산 김씨 종택인 긍구당 서고에 이 해례본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 이것은 가문의 선조가 여진 토벌의 공로로 세종이 직접 하사한 것 이었고(이용준의 왜곡이라는 설도 있다.). 이용준은 이걸 발견하고 김태준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당연히 김태준은 깜짝 놀라 이용준과 함께 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가 해례본을 직접 확인했다. 이용준은 잘 보관할 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고 말했고, 김태준은 당시 문화재 수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간송 전형필을 떠올렸다. 김태준은 전형필을 만나 해례본 이야기를 했고, 전형필은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 1천원을 찾아와 1천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뤘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값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사례비가 3억원? 당시 전형필 선생이 해례본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 그런데….

앞서 해례본의 앞쪽 두 장이 찢겨나갔다고 언급했는데, 2000년대의 연구[10]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공개되었을 때 그에 관련되어 있던 인물들이 소유주 몰래 팔아먹기 위해(!) 일부러 찢어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은 이용준이 긍구당의 서고를 열람하다 해례본을 훔쳐갔던 것. 이용준이 해례본과 《매월당집》을 여기서 훔쳤는데 표지에 광산 김씨 가보를 뜻하는 도장이 찍혀있어 이를 찢어내어 팔았던 것이 표지 실종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뭐 이런 현재 일본에 있는 《매월당집》 역시 해례본과 마찬가지로 앞 두 장이 인위적으로 찢겨져 있다. 나중에 이를 들키고 장인에게 혼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과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도 있다.

그 이후 김태준과 이용준은 이걸 판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써 경성 콤그룹의 거물이 되었다고 한다. 김태준은 지리산 빨치산으로 붙잡혀 죽었으며, 이용준은 월북했다고. 마무리가 영...

1.2.3.3.2. 그 이후
전형필은 이것을 사들이고 나서 광복이 될 때까지 이 해례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고 한다. 한국 문화를 철저히 말살하던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글 창제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이 책이 들켰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피난갈 때 이 책을 먼저 챙길 정도로 보존을 철저히 했다.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은 그런 간송 선생의 노력 덕. 그리고 1956년 이 소장본을 바탕으로 사진을 촬영하여 만든 영인본이 제작되었다. 전형필은 영인본 제작을 위해 이 소장본을 흔쾌히 내놓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상남자이자 대인배.

그 이후 원본은 간송미술관에서 보관되고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하는 날이 적어 직접 보기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원본 사진을 찍어서 만든 영인본이 따로 있다. 보존을 위해서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도 있다.

참고로 2014년 3월 말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 전시회에 드디어 원본이 출동한다고 한다.

1.2.3.4. 상주본

오랜 세월 해례본은 단 한 권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왔지만, 2008년 7월에 경북 상주에서 간송미술관의 간본과 동일한 판본이 발견되었다. 경북 상주시에 사는 고서 수집가 배 모씨가 집 수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발견하였다며 이를 일부 언론에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지를 따서 이를 상주본이라 부른다.

상주본은 《훈민정음》 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 상태는 간송본보다 좋고 간송본에는 없는 당시 연구자의 주석이 있다[11] 때문에 이 상주본은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여겨졌다. 굳이 가격으로 따진다면 1조원 이상의 가치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2.3.4.1. 오리무중인 행방
그러나 이 상주본은 인간의 추악한 욕심만 드러낸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상주의 골동품상 조 모씨가 '상주본은 원래 자신의 가게에 있던 물건인데, 어느새 상주의 골동품 수집가 배모 씨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며 '배씨가 이를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유권 분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고, 2012년 대법원은 배씨가 이를 절도한 것을 인정하여 소유권이 조씨에게 있다고 최종 판결했다. 이에 조씨는 해례본을 문화재청에 기부하기로 하였고, 2012년 5월 7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증식까지 가졌다. 물론 실물은 배씨가 내놓지 않고 있어 영인본만으로 기증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조씨는 얼마 안 가 사망하였다.

그런데 검찰 수사 결과 화끈한 반전이 나왔다. 상주본의 정체가 원래는 안동의 광흥사 나한상 안에 있던 불복장(불상이나 나한상 안에 넣어놓는 물건) 유물이었던 것. 1999년경 문화재 전문 절도범 서모 씨가 털어가서 골동품상 조씨에게 팔아치운, 결국 장물이었던 것이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다만, 문화재청 측은 신라때 창건된 광흥사 불상에서 불경이 아닌 상주본이 나오기 어려운 점, 서씨는 과거 주요 문화재 사건 때마다 자신이 취득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점 등을 들어 장물 혐의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배씨는 상주본을 낱장으로 뜯어서 몰래 숨기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배째라 버티다 문화재보호법 위반(낱장으로 뜯었으니 일단 문화재 훼손에 해당된다)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문제는 그 난리통에 상주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이다. 배 씨가 법정 다툼을 벌이는 사이 검경이 배씨의 집을 압수수색까지 했지만 행방을 찾지 못한 것. 소유자인 조씨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배씨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어 실물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일각에선 배씨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낱장으로 보관하고 있거나 이미 외국으로 반출했다는 등의 소문까지 일기도 했다.

한편 검찰은 배모 씨에게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구형하였고, 2012년 2월 9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는 소유권이 없다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를 내놓지 않는 등 죄질이 불량하다며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같은 해 9월 7일 대구고등법원은 항소심에서 배씨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배씨도 이전에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면 물건을 내놓겠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면 배씨가 영영 물건을 내놓지 않을까 우려의 시각도 있었다. 이에 검찰도 상고하였으나 2014년 5월 29일 대법원에서도 최종 무죄 판결이 난 바, 배씨가 약속대로 이를 세상에 내놓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요컨대 정리하자면, 상주본의 소유권은 이미 국가로 넘어갔지만 실물은 배모 씨가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지고 있다 해도 약속대로 내놓을지 역시 확실하지 않은 상황.

그것이 알고싶다 2012년 5월 26일자 방송에서 위 내용을 다룬 바가 있다.

2015년 3월 26일 상주시 낙동면에 있는 배모씨의 자택에서 불이 났는데, 그의 집안에 있던 골동품, 고서적, 내부집기 등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훈민정음 상주본이 함께 소실됬는지는 알수 없다.

1.2.3.4.2. 국외 유출과 훈민정음 기원에 대한 조작 우려?
이는 우리나라의 중요 문화재라는 이유 이전에, 최악의 경우 이 상주본이 한글이 일본에서 발전됐다거나, 한글의 기원이 신대문자라고 주장하는 일부 일본 유사역사학자들의 손에 들어가 조작되면 한글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증거로 이용되는 등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의 창제 원리와 독창성이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에서 상주본을 손에 넣은 뒤 오래된 먹물을 구해다가 비슷한 글씨로 일본에서 문자를 보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라고 써갈겨 넣으면 매우 곤란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때문인지 일본의 어느 누군가는 액수에 상관없이 구매하려 들 것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단순히 돈 때문에, 혹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전세계 역사적으로 한 국가가 자신들의 문자를 만든 이유가 확실한 정말 극소수의 자료를 통째로 날려버리려는 행동은 나라를 팔아버린 것 이상의 죄를 짓는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배모씨가 상주본을 제3자에게 매각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지, 확실하게 매각했다는 증거는 없어서 덮어놓고 일본인에게 팔았거나 팔려 한다고 단정짓는 건 과도하다. 어쨌건, 상주본의 국외 반출을 막고 국가로 귀속시키기 위해 적절한 감시와 회유가 시급히 필요한 상황이다.

1.2.3.4.3. 학술적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러나 순수한 학술적인 측면에서 위와 같은 우려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간송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훈민정음해례본의 내용은 이미 다 알려져 있다. 훈민정음의 신대문자 기원설은 일본에서도 학술적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학술적으로 너무 조잡하고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누가 조작해서 기존의 내용을 뒤집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간송본과 상주본의 내용이 다르다면 제일 먼저 조작을 의심할텐데 대놓고 하겠는가? 게다가 처음에 공개되었을 때 이미 '내용 같음'으로 검토가 끝났다. 후대 인물의 개인적인 주석이 필사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그 필사가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학술적으로 중요한 내용은 옛날에도 별도의 문집으로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상주본이 알려진 후 훈민정음과 관련해 유명한 모 대학교수는 사석에서 무심한 듯 시크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뭐 호사가 손에 들어가겠지...' 간단히 말하면 학술적으로는 상주본이 있든 없든 달라질 것은 없다. 처음 앞 장이 있었다면 그나마 학술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졌을 텐데 상주본도 첫 장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국어학자들은 사실 학술자료로서의 상주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묘하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1.2.3.5. 제3의 판본 일부 발견

세종의 익선관으로 추정되었던 모자. 마감재로 사용된 훈민정음 활자본이 보인다.

2013년 2월, 일본에 있던 조선왕실 유물인 비단 모자를 한 수집가가 구입했는데 이 모자가 이슈가 되었다.

이 모자가 먼저 1444년 이전에 세종이 사용하던 익선관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근거가 크게 2가지 있었는데, 첫번째로 모자안에 마감재같은 용도로 종이가 들어있는데 그 종이엔 세종이전에는 절대 존재 할 수 없는 훈민정음 제자해 활자본이었기 때문이다. 이 것만이라면 세종이후시기의 모자라는 증명에 불과했지만, 이 모자에 새겨진 용의 발톱이 4개라는 것 때문에 세종의 익선관이라고 콕 찝어 추정하게 됐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이전까지 용의 발톱이 4개인 사조룡복을 입었다가 1444년에 명에서 용의 발톱이 5개인 오조룡복을 하사하여 이후 그것을 입었다고 나와있다. 즉, 세종 이후의 것이라면 용의 발톱은 4개가 아니라 5개여야 한다는 논리가 된 것이다.

만일 세종이 쓰던 익선관이 맞다면 현재 남아있는 간송본과 상주본의 1446년을 앞서는 버전일 가능성이 높았기에, 저 모두가 사실일 경우 진짜 국보급 보물이 되는것이기에 당시 기대가 엄청나게 치솟았다.

그러나 감정 결과, 모자가 임진왜란 이후의 것임이 밝혀지면서 논란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모자 안에 훈민정음의 판본 일부가 있는 것자체는 사실이고, 세종대왕의 익선관이 아니었다 한들, 이 모자 자체가 조선 복식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희귀 유물인 것도 여전히 사실이다.설레발이 너무 과했을 뿐이니 실망할 필요는 없다

1.3. 조선시대 훈민정음 취급에 관하여

1.3.1.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국문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문제이다. 한 예로 한글 창제 이후로는 양반들이 한문을 공부할 때, 우리말과는 체계가 애초에 다른 한문글의 구절마다 한글로 된 토를 달아서() 훨씬 배우기 쉽게 하는 등 양반들에게도 무척 유용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양반은 한문을 모르는 부녀자(예를 들어 집안의 여자 어른) 및 평민들(드물지만 토지매매 계약서같은 것)과 글로 소통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기본 소양으로 한글을 모두 알고는 있었다. 물론 연암 박지원처럼 끝내 한글을 배우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실제 조선시대에 쓰인 한글은, 글 읽기보다 생계에 바빴던 평민층에 비해 오히려 양반 부녀자층이나 중인층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며, 특히 실질적인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중인층에게 유용했다는 점에서 통치 체제 강화에 적지 않게 일조하였음이 눈에 띈다. 세종이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지었다면, 정작 그의 치세에 한글로 번역되거나 반포된 책들이 《월인천강지곡》 같은 불교언해나, 아니면 이성계의 역성혁명(실패했으면 역모다!)을 정당화하는 《용비어천가》 등의 책들 말고는 왜 그다지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해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훈민정음》의 주된 창제 이유를 지배 체제 강화에서만 찾는 것은 성급한 오류이다. 애초에 양반들을 비롯한 지배층의 편의성이 주된 이유였다면 만들 때 반포 이유로도 그것을 내세우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고 반대에 부딪힐 이유도 훨씬 줄어든다. 더욱이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후 양반 지배층 이외의 계층들 사이에서도 문화를 꽃피우는 근본이 되었다는 점에서, 단지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세종의 근본적인 의도가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는 저서 《한글의 탄생》에서, 당대 조선에서 사용되던 기록은 모두 붓을 사용하여 한자로 쓰여진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붓으로 글씨를 쓸 때에 생기는 획의 삐침이나 획 사이의 여백, 그리고 글씨를 이어서 쓰는 연서 등은 필연적인 것이자, 동시에 글씨의 형태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자는 연필 등의 다른 필기구로 쓰여지지만 이러한 삐침은 사라지지 않고 획 자체에 포함되어 유지되고 있다. 만일 사대부들의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 글씨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필기구인 붓을 사용할 것을 전제로 자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훈민정음》 책 자체는 붓으로 쓰여졌지만) 훈민정음의 자모만큼은 그러한 삐침 등이 완전히 생략된, 다시 말해 나뭇가지와 같은 원시적 도구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간결함의 극치를 보인다.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붓을 쓰던 시대에, 훈민정음은 자형을 만드는 단계에서 이미 을 쓰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졌다. 노마 히데키는 훈민정음의 극도로 단순한 모양은 붓과 먹, 종이 같은 필기 도구를 살 형편이 안되는 백성들까지도 문자를 쓰게 될 것을 배려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자의 말을 덧붙이면...

'훈민정음은 어리석은 백성이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낙서하듯 그리기에 어려움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훈민정음에 연서와 삐침이 등장한 것은 창제 후 수 세기가 지나고 궁체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이와 비슷하게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많은 문자들이 대개 복잡하면서 장식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실용성만을 고려하여 장식성을 완전히 배제한 초창기 훈민정음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당대의 서체 미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전위적인 형태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거의 근대 모더니즘을 연상케 한다.

즉, 세종이 한글을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도 잘 나와 있듯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펼칠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해서였다.[12] 다른 이유가 섞여 있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목적을 덮을 수는 없다. 세종대왕이 공들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덕분에 당대의 많은 백성들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우리들까지도 한글을 잘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세종대왕이 뭔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한글을 만들었다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1.3.2. 왕실 입장에서의 훈민정음

'언문'이나 '암클'은 구한말에 살았던 한글 학자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하어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조선시대 내내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글 비하와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조선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하늘이 내린 위대한 성인(聖人)이신 세종대왕범인(凡人)을 초월한 성지(聖知)로서 지어낸 글자이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게 함정 거의 최상급의 극찬을 바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이 극찬은 '하늘→성인=세종대왕→지혜→훈민정음'이라는 도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연히 세종대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드높이려는 의도가 있다. 바로 지금 이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널리 쓰고 있는 문자보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알기 쉽게 드러내는 업적은 없다. 심지어 현대에 선왕조를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에서도 세종대왕과 한글을 부정하는 사례는 거의 없으며, 조선왕조에 대해서 과도하게 비하, 부정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너 조선 깔려면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 쓰지 마라."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올 정도. 민주화된 현대에도 이 같은 상황이니 왕조 시대의 프로파간다 효과는 짐작할만하다.

한글로 쓰인 문장은 속된 것이며 낮은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문자 자체는 왕조의 위업으로 여겨져 조선시대 내내 극한 칭송의 대상이었다는 점은은 분명하다. 왕족들도 훈민정음을 서슴없이 사용했음은 아래 사진들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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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정조가 원손이던 시절에 쓴 편지. 언문으로 되어 있다. "상풍(가을 바람)에 건강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외숙모를) 뵌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립습니다. 어제 (보내주신) 편지보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니 기쁩니다. -원손(元孫)" 악필이다. 여덟 살 어린애가 써봤자 얼마나 잘 쓰겠어 그래도 여덟 살 치고는 잘 쓴 편 아닌가?

이외에 다른 왕이나 왕족도 한글로 편지를 보낸 것이 많다. 더 보려면 여기 클릭. 네이버에서 언해본과 같이 공개했다.

1.3.3. 연산군의 훈민정음 탄압

연산군은 자신을 비방하는 언문(한글) 투서를 보게 되면서, 한글이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대상이라고 규정하여 훈민정음 사용을 전면 금지시키고 한글을 쓰는 자는 무조건 체포하도록 지시하였으며 관련 서적은 소각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이미 세종대왕의 확고한 업적으로 민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를 억압하였으니 연산군의 행동은 곧 조상이자 선대왕인 세종대왕의 업적을 모독하는 사례가 되었으며, 폭군 기질을 가진 연산군의 포악성이 만대에 드러났음을 알리는 사례이기도 하였다.

비슷한 사례로 연산군은 환관 김처선이 자신에게 훈계를 했다는 이유로 김처선을 처형한 후 처서조서로 바꾸게 하는 등 가 들어가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시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 시기 탄압은 말에서 그쳤는데 그가 놀기위해 만든 흥청의 음악교본이 언문으로 제작되었다.

1.3.4. 숙종

숙종이 뜬금없이 《훈민정음》 후서를 썼다. 왕이 후서를 썼다는 것은 숙종대에 새로이 훈민정음의 중간본을 냈다거나 내지는 이와 관련된 책을 낸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게 하지만 실록에 아무 기록이 없어 그냥 숙종이 책과 무관하게 쓴 것으로 보인다.

1.3.5. 훈민정음에 대한 비하 표현 논란 - 언문과 암글(암클)

1.3.5.1. 언문

'언문'이라는 표현이 정말로 한글/훈민정음을 낮추어 보는 표현인가, 양반들이 한글을 과연 어떻게 생각했는가, 한글 창제 당시에 반대가 있었던 것의 진의가 과연 무엇이었는가 등의 문제들도 학계에서조차 분명히 결론이 나지 않았으므로 쉽게 단정짓기 어렵다.

원래 언(諺)은 한문(고문, 문어)과 대비되는 '구어'를 말한다. 중국에서의 '한문'은 원래 전국시대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쓰인 '고어'에 해당하고 이후에는 거의 텍스트의 형태로만 쓰였으며, 그 이후에 통용되는 구어 중국어는 이 한문과는 전혀 달랐는데, 바로 그 구어체 문장을 "언" 이라고 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서도 아마 한글 문장을 이런 구어체 정도로 본 것 같다. 그러니까 꼭 낮춰서 불렀다기보다는 그냥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구어)이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꼭 낮춰서 봤다고 보기도 어렵다.

국조보감에도 '언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일본의 가나 문자를 '언문'의 일종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리고 한글 창제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할 것.

1.3.5.2. 암글(암클)

언문에 이어서 한문화에 익숙한 양반들이 한글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붙인 이름인데 이름의 뜻은 여자들이나 쓰는 천한 글이라는 뜻이었다. 원래는 암클이라고 불렀다[13] 현재는 암글로 바뀌었다[14].

'암글'이라는 호칭은 한글은 천한 여인네들이나 쓰는 천한 글이라며 한문을 중시했던 양반들이 비하하여 부른 것으로, '언문'에 비해서 매우 천박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지만, 정작 한글이 여성들에 의해서만 쓰였다는 근거는 없다. 물론 처음에는 주로 사대부의 아내들과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들만 사용했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며, 사대부의 처와 일반 백성들이 주로 사용하다가 점차 사대부들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애초에 창제자인 세종 역시 성별과 신분을 막론하고 '사람마다 쉽고 널리 쓸 수 있도록' 창제한 글이라고 반포하였기 때문.

일본에서 한자를 '마나[真名](=진짜 글자)'라고 하였고, 고유의 표음 문자에 대해서는 '가나[仮名](=가짜 문자)'라 하였듯이, 한자에 대해서는 '형음의(形音義)가 일체인 참된 글자, 진짜 글자'로 보아, 남성 우월주의적 가치를 투영하여 남성적 글자라고 본 한편, 한글에 대해서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으며 소리만을 옮길 뿐인 보조적 문자, 진짜가 아닌 문자'로 보아 여성적 글자라고 보았기에 '암글'이라고 불렀으리라고도 짐작된다. 물론 이와 같은 성차별적 사상과 문자관이 오늘날에도 온당한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必要韓紙?

1.4. 여담

조금 엉뚱한 물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국어학자들 가운데에서는 왜 '훈민정문(文)'이 아니라 '훈민정음(音)'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즉 문자를 창제해 놓고서는, 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문자’라 하지 않고 ‘바른 소리’라 했을까 하는 것.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난립할 뿐 아직까지 이렇다 할 정설은 없는 실정인데, 이 의견들 가운데에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감안하여 '새로 문자를 만든 게 아니다' 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국어학이나 사학이 아니라 언론학 교수의 글임은 감안하자. 또 성음의 원리를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아울러 이전까지 여러 가지 한자음이 쓰인 것을 통일하기 위해 표준 기호를 제정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그 기호가 훈민정음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은 한국에 사투리가 있는 것처럼 중국에서 사투리가 있었고, 그런 사투리들이 한국에까지 들어와 영향을 미쳤다는 것. 다만 이것을 엉터리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데, 실제로 똑같은 개념을 서로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꽃이름인 모란을 '목단(牧丹)' 이라고도 했고 '모란(牡丹)' 이라고도 했다는 것이 좋은 예.

세종 당시 승정원일기가 남아 있었다면 훈민정음 관련 연구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대놓고 훈민정음에 대해 드러나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세종의 태도 등은 알 수 있었겠지) 안타깝게도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인조 원년 이전의 승정원일기는 모두 소실이 되었다.

1.6. 대중매체 속 훈민정음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이 새 글자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하다가 "民音訓正(백성의 소리를 새김이 마땅하다)"을 쓴 후 아나그램을 시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개그콘서트 위대한 유산 코너의 황현희가 등장할 때마다 훈민정음을 읊는데 "니르고져"를 건너뛰어버리고 "홇배이셔도"를 많이 반복한다.

2. 삼성전자워드프로세서


어원은 1.

1992년 처음 나왔으며 처음부터 윈도우용으로 개발되었다.

유년층을 대상으로 제작한 린이 훈민정음도 있으며 MS 워드아래아 한글에 밀려서인지 훈민정음 워드프로세서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아직도 쓰고 있으며, 내부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삼성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워드 프로세서다. 삼성의 삼성에 의한 삼성을 위한 워드프로세서 간혹 가다가 삼성과 거래하는 신규 업체들이 사용을 못해 헤매는 워드프로세서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삼성 PC를 구입하면 번들로 제공하기도 했으나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래서인지 이후에는 쿠폰 형태로 제공해서 쿠폰을 등록하면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끔 했으나, 역시나 다운로드 받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쿠폰은 그냥 버려지는 신세

훈민정음 개발 사업부가 분사되어 넥스소프트에서 개발되었지만 이후 넥스소프트가 한글과컴퓨터에 인수되어 다시 삼성전자에서 나오는 듯하다.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는 훈민정음XP까지만 나왔고, 그 뒤로는 정음Global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오류투성이에, 심심하면 뻗어버리는 프로그램으로 MS word와 한글에 익숙한 신입사원에겐 충격과 공포를 주지만 회사에선 다른 워드프로세서를 쓸 일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쓰게 되는 안습한 상황.

문제는 삼성보다 을인 업체에겐 갑의 횡포를 발휘(…)하여 문서를 정음글로벌 파일로 던져주면 되지만 삼성보다도 갑의 위치에 있는 국가기관에선 삼성에게 한글 파일로 던져 준다는 점. 그리고 외국 기업에 대해서는, 그 기업이 갑이고 을이고를 떠나 MS워드파일이 필요하다는 별 그지 같은 경우도 생긴다.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실기 시험 때, 원한다면 정음글로벌로 시험을 볼 수도 있다. 아무도 안 고르지만

결국 삼성에서도 2015년부터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사용자 지원은 계속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용도폐기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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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얻어'도 한문 부분의 '할 수 있다'라 뜻을 가진 得(얻을 득)을 직역한 것이다.
  • [2] 다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중국(중화민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고, 흔히 말하는 '중원(中原)'의 다른 표현이 바로 '중국'이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또는 '중화(中華)의 나라[]', '세상의 중심(中心)이 되는 나라[]'라는 의미로 '중국'이라 부른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
  • [3] '중국사'라고 해서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만 배우는 것이 아니듯.
  • [4] 월인석보는 석가모니의 생애를 다룬 일종의 불교 경전으로, 세종조의 《월인천강지곡》과 세조조의 《석보상절》을 합친 책, 《석보상절》에 해당되는 부분은 《월인석보》를 만들며 다시 썼기에 《석보상절》과 내용상 다소 차이가 있다.
  • [5] 이 이야기 자체는 당시부터 있어왔으며, 이를 일종의 소개한 것은 독일인인데, 일본인들도 한글이 한국 고유의 창살 문양에서 유래되어 창제되었다는 설을 가르쳤다. 해례본 발견 후에도 일제강점기에 공부한 사람 중에서는 이것이 맞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70년대 발간된 어린이용 교양서적에도 이런 주장이 실렸다.
  • [6] 책의 본문 끝에 그 내용의 대강이나 그에 관련된 일을 간략하게 적은 글
  • [7] 내용은 같았지만 쓰이는 규칙이 차이가 있어서 금방 들통났다.
  • [8] 당시의 책은 긴 종이 한 장 한 장씩을 반으로 접어서 철을 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한 페이지 뒷면에 다른 글을 써 넣을 수 있었다.
  • [9] 본 항목 첫 부분에서도 훈민정음 그림 두 개를 비교하며 이를 짚었었다.
  • [10] 박종덕(2006)-훈민정음해례본의 유출에 대한 연구 《한국어학》 31호, 김주원(2005)-훈민정음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 《국어학》 45호
  • [11] 이를테면《훈민정음》에는
    순음(입술소리)를 오행 '토(土)'-오음 '궁(宮)'에,
    후음(목구멍소리)를 오행 '수(水)'-오음 '우(羽)'에 배치시켰으나,
    다른 중국 운서에는
    순음(입술소리)이 오행 '수(水)'-오음 '우(羽)'에,
    후음(목구멍소리)이 오행 '토(土)'-오음 '궁(宮)'에 해당한다고 되어 있다는 주석이 있다. 다른 책과 비교해 가면서 능동적으로 읽었다는 얘기
  • [12] 사실 그 이전에도 이두라는 문자 체계가 있었지만 이두 역시 한자의 음과 석(훈)을 기본적으로 알아야 했기에 사용 방법이 복잡했다.
  • [13] 성별을 의미하는 '암-, 수-' 등의 접두사는 뒤에 이어지는 일부 단어의 평음을 격음화하므로(e.g. 암컷/수컷, 암탉/수탉), 말음 'ㅎ'를 달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표기에 드러나지 않을 뿐 사실상 '아ᇡ-, 숳-'인 셈.
  • [14] 한글 맞춤법 제31항에서 '암-, 수-'가 붙었을 때의 격음화된다고 규정한 단어는 '암캐/수캐, 암컷/수컷, 암탉/수탉'이 있으며, 이외에도 '암캉아지/수캉아지, 암키와/수키와, 암탕나귀/수탕나귀, 암톨쩌귀/수톨쩌귀, 암퇘지/수퇘지, 암평아리/수평아리' 등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확인된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ᇡ-, 숳-'로 적용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암-, 수-'만을 붙인다.
  • [15] 자신과 친오빠 둘의 이름은 본 항목에서 따온 것이라고 방송에서 밝혔다. 해당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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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1-07 1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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