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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

禧嬪張氏, 생몰년 1659-1701

장희빈으로 유명하지만 이름이 장희빈이 아니다! 희빈은 후궁의 지위 중 하나.

Contents

1. 소개
2. 생애
2.1. 집안 배경
2.2. 입궁
2.3. 출궁에서 재입궁까지
2.4. 후궁에서 왕후로
2.5. 왕후에서 후궁으로
2.6. 최후
3. 평가
4. 장희빈을 연기한 배우들

1. 소개

숙종의 후궁이자 한 때는 정비였다. 그리고 경종의 생모. 조선 역사상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되었던 유일한 여성이다.[1]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하지만 정사엔 그녀의 이름이 없고 그나마 이 장옥정이란 이름도 인현왕후전이 출처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공적인 역사기록인 실록에서까지도 그녀의 미모가 빼어나다라고 기술하고 있을 정도다.[2]

위에서도 말했지만 희빈(禧嬪)은 후궁의 지위 중 하나로, 정1품 후궁 '빈'(嬪)으로서 받은 작호가 '희빈'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장희빈'보다는 '희빈 장씨'로 불러야 옳다. 그녀의 오빠의 이름이 장희재라서 '희'자 돌림인줄 알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아들인 경종이 그녀를 추존했기에 그녀의 정식 칭호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다. 그녀를 기리는 사당의 이름도 대빈궁(大嬪宮)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묘소(대빈묘)는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원'(園)이 아니라 '묘'(墓)다.

2. 생애

2.1. 집안 배경

역관 장형[3]의 막내딸. 그녀의 아버지 장형은 역관 출신으로 사역원 정9품 봉사로 재직하였지만 일찍 은퇴하였다가 그녀가 막 11세가 된 1669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이후 당숙 장현의 슬하에서 자랐다. 형제는 이복오빠인 장희식과 동복오빠인 장희재가 있었고 아홉살 이상의 동복언니가 한명 있었다.

할아버지 장응인은 통문관지에 행적이 기록된 뛰어난 역관으로써 생전 최고 관직이 정3품 첨지중추부사(무관직)에 이르렀고, 전쟁 중에 무관으로 참전한 바 있으며 시재(詩才)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외할머니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으로 유명했던 변승업의 당고모로 소설 허생전에도 모델로 등장한 변부자 가문의 딸이었다. 외삼촌 윤정석도 시전의 거부였고, 당숙인 장현은 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은 거물 역관으로 무역에도 종사해 국중거부라 불릴 정도로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거기에 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대부분 무관 및 역관, 혹은 의관으로 고위직에 있었다.

그녀의 일족이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양반 사대부가 명문의 여식은 아니었더래도 잘나가는 외교관-재벌가 가문 따님은 되었단 소리.[4]

흔히 '장씨의 어머니 윤씨[5]가 조사석 처갓집 집안의 노비였고 그 당시 조사석과 사통했다더라'는 설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숙종실록 13년 6월 16일 3번째 기사에 적혀있는 기록으로 노론 측의 사관이 '그랬다카더라'라고 적어놓은 것에서 기인하고 후일 소론에 의해 수정된 숙종실록보궐정오 같은 날짜 기사에 '그거 허황된 소리임'이라고 정정했던 기사다.숙종실록보궐정오 기사[6][7] 외삼촌이 시전의 상인이고 장옥정이 사가로 내쳐졌을떄 옥정의 집 바로 옆에 외삼촌의 집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신빙성이 떨어지는 얘기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얘기가 왜 나왔는지 의문이 생길수도 있을텐데 다시 말하지만 숙종실록 편찬 당시 실록청 총재관인 민진원이 인현왕후의 둘째 오빠다(...).
물론 그렇다고 실록의 내용이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애시당초 실록에서 주의깊게 봐야하는게 '주관적인' 사관의 평이며 이런 평가가 들어가긴해도 역사적 사실을 없애버릴수는 없는 일이다. 또 사관의 평 정도는 이 보궐정오 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잘못되었다고 정정될수 있다. 거기에 이 보궐정오에 나오는 사신의 평가도 경종과 장희빈의 우호세력인 소론에 의해 수정되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듯. 무엇보다 민진원이 무조건 자신의 누이에게 유리한 기록만 남길수 있었다면 숙종이 인현왕후 폐위 당시 그녀를 비하했던 기록을 지워버렸어야 정상일것이다물론 사관평으로 구구절절하게 뒷말이 나오긴 하지만, 실록에서 주의해야 봐야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무조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운운하면 다가 아니다.[8] 일단 실록에는 당시 국가적으로 욕을 먹던 인간이라도 소설을 지어내서 욕하진 않는다 최소한 당대에도 말이 안된다고 까여도 실제로 존재하던 풍문을 집어넣는다. 예컨대 연산이 월산대군 부인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나 황희가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하고 불법적으로 노비들을 불렸다는 소문 등이 그것이다. 황희는 연산이나 장희빈과는 다른 위인이지만 그건 넘어가자

2.2. 입궁

그녀의 입궁시기는 사실 설이 분분하다. 흔히 사극에서는 서인에 맞선 남인의 책략으로 그녀가 입궁했다고 나오는 경우도 있으나[9] 사실 그녀가 10세의 어린 나이에 아비 장형을 잃고 생계가 어려웠던 탓에 궁녀가 되었다는 주장과 장형이 사망하기 전에 역시 궁녀였던 딸이 있는 장형의 사촌형 장현의 권고를 받아 막내 딸인 장씨를 입궁시켰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생부 장형의 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에 따르면 희빈 장씨가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입궁해 성장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숙종실록에도 머리를 따올릴 때 부터 입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수발을 드는 궁녀로서 생활하였다[10].

일부에선 희빈이 의탁하고 있던 당백부 장현이 경신환국에 휘말린 후 가세가 기울자 서인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였다고 주장하지만 경신환국 당시 그녀의 나이가 이미 22세였기에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주장의 근원은 희빈 장씨가 경신환국 당시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궐하였다는 인현왕후의 주장으로 불거진 것, 물론 이때의 입궁은 재입궁때를 뜻한다. 어쨌거나 그 미모로 인해 숙종의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승하하고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니 이때가 1680년 경이다.

2.3. 출궁에서 재입궁까지

그러나 1680년, 남인의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이 꾸민 역모가 적발되면서 발생한 경신환국으로[11] 서인이 남인을 밀어내고 집권하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가 장옥정을 궁에서 내치게 된다. 그녀가 왕실의 최고 어른인 자의대비의 총애를 받고 있었음에도 궁 밖으로 나가게 된 건 자의대비에게 친자식이 없었기에 손주며느리인 명성왕후 김씨보다 궁궐 내에서의 파워가 약간 밀렸기 때문이다. 근데 생각해보면 궁녀 하나 때문에 손주며느리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로 명성왕후가 드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신환국 당시 장현 일가가 복평군 형제와 절친한 사이이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해 몰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오라비 김석주였던 것으로 비추어 왕의 총애를 받는 그녀의 보복을 견제한 탓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출궁된 직후인 1681년 1월 3일에 계비 간택령이 내려졌고, 3월에 대비 김씨와 송시열의 추천으로 민씨(인현왕후)가 간택되어 1681년 5월 14일 숙종과 민씨가 가례를 올렸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때 새 왕비에게 갈 총애를 장옥정이 앗아갈까 염려하여 그녀를 내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보통 재입궁하기까지 기간에 옥정이 궁핍한 삶을 살았다고 묘사하는 매체가 많지만 옥정이 궁에서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 그녀의 당백부인 장현이 유배에서 풀려나와 예전처럼 재물을 모으기 시작했고 일반적으로 이 당시에 한량으로 놀기만 했다고 알려진 그녀의 오빠 장희재는 이미 무과에 급제하여 종 6품 포도부장을 맡고 있었다. 또 그녀의 외삼촌 윤정석은 면포를 팔던 시전상인이었다. 그녀가 이 시기 출궁 궁녀의 법도에 따라 사가에 머무르기만 했겠지만 이런 정황상 오히려 부족함이 없이 유복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이 기간에 그녀가 남인과 접촉하고 그것이 재입궁의 기회가 되었을 공산이 크다.

2.4. 후궁에서 왕후로

실록에 따르면 장옥정은 계속 재입궁을 하려고 했으나 워낙 오래도록 소식이 없자 나중에는 궁에 들어가기를 아예 반쯤 체념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숙종은 장옥정을 잊지 못했고 1683년,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되고 명성왕후 김씨가 승하하여 3년상을 치룬 이후인 1686년 초에 옥정을 총애했던 자의대비의 청에 의해 다시 장옥정을 궁으로 복귀시켰다. 이 시기 숙종의 장옥정에 대한 애정은 상당히 깊어서 그녀를 소의로 봉했다가 1689년 10월 27일, 그녀가 당시에도 꽤 늦은 나이에 속하는 30살에 고대하던 왕자를 낳았다. 그리고 여기서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가마 사건이다.

"신이 듣건대 '장 소의 모친이 8인이 메는 옥교(屋轎)를 타고 궐중(闕中)에 왕래한다.'고 합니다. 장 소의의 어미는 한 천인일 뿐인데, 어찌 감히 옥교를 타고 대궐에 드나들기를 이와 같이 무엄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옛날 선조 초년에 유모가 옥교를 타고 입궐하니, 선조께서 매우 준엄하게 꾸짖으시며 즉시 명하여 내쳐 물리치고는 걸어서 돌아가게 하였으니, 화란의 조짐을 막는 뜻이 이 또한 지극했던 것입니다. 대저 명분이 혹 문란하게 되면 법도에 지나친 습관이 불어나고, 궁위가 엄중하지 않으면 외인의 출입을 막는 법도가 해이해질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숙종 19권, 1688년 11월 12일

장옥정의 어머니가 산후조리를 위해서 궁궐로 들어올 때, 8명이 끄는 옥교(가마)를 타고 왔다. 이에 헌부 관리가 가마를 압수하고 가마를 끌고 들어온 종을 처벌하여 문제가 된 사건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장옥정의 어머니가 경차를 타는 것도 분수에 넘치는데 중형 세단을 탄 셈. 사실 원칙적으로 따지면 이런 가마를 타면 안된다. 왜냐하면 옥교는 덮개가 있는 가마를 말하는데 3품 이상 관리의 어머니나 부인이나 타라고 법전에 나와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숙종은 후궁이 해산할 때에 가족이 들어와서 살펴보도록 하는 건 옛날부터 있어온 전례이고 가마를 타고 들어오는 것도 전례에 있었던 데다가 왕이 허락의 의미로 출입패를 주었는데 이런 일을 벌였다면서 노발대발했다. 그러면서 궁중의 궁녀들도 비록 천인이지만 상궁이 되면 가마를 타고 다니는 것, 같은 후궁인 귀인 김씨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들어올 때는 제지하지 않은 것을 예시로 들었다. 그러나 사석은 벌을 준 사헌부의 관리들은 풀어주고 옥교는 불에 태워버리라고 했다. 이어 문관, 간원까지 나서서 상소했다. 결국 숙종이 뜻을 꺾고 신하들의 말을 순순히 들어줬다. 이미 죽은 사헌부 관리들의 장례까지 후하게 치뤄주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 사건은 드라마에서는 압축되어 장옥정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하다가 가마를 빼앗기고 부서지면서 불에 타고 모욕을 당하는 것 정도로만 나온다. 실록을 보면 시작과 끝 사이에 길고 긴 과정이 있었지만 드라마화를 시키다보니 어쩔 수 없는 듯. 사실 상세과정까지 드라마화시키면 겨우 가마 하나가지고 왜 저래 소리가 나올지도?

이 가마 사건에서 숙종이 엄청난 설전을 벌여놓고 끝에 가서는 순순히 물러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숙종에게는 이 가마 사건이 종료된 다음부터가 진짜였다. 끝난 줄 알았지? 숙종 15년 1689년 1월 10일, 숙종은 신하들 앞에서 왕자의 명호를 정하려고 한다고 밝힌다. 원자정호 사건이다. 이 말은 곧 숙종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엄청난 반발을 불러온다. 당시에 인현왕후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여서 앞으로 임신을 할지 안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비슷한 일을 찾아보자면 서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다음에 선조에게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을 떠올려보자. 실제로 신하들도 이 일을 언급한다.

"선묘조(宣廟朝)=(선조)에 인 왕후께서 세자가 없으시어 광해가 어질다고 하여서 아들을 삼았으나, 명호(名號)에 이르러서는 임진년에 비로소 정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영의정 김수흥의 말

남인조차 숙종이 지나치게 서두른다면서 신중히 하라고 충고한다. 당시에 숙종도 30대에 인현왕후도 20대 초반이니 서두른다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또한 왕자가 아직 말도 할 줄 모르고 무릎을 꿇고 절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는 나이니까 기다렸다가 하라고까지 했지만, 앞서 숱한 사례들을 보면 숙종조선의 답정너은 대계는 이미 정해졌다고 못을 박아버렸다. 1689년 1월 14일에 이런 숙종의 뜻답정너 취향에 알맞는 상소가 올라왔다. 유생 유위한이 올린 상소로 명나라의 영종은 낳은 지 4일 만에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고, 무종은 낳은 지 7개월 만에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는데 서두르는 일도 아니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1689년 1월 15일에 숙종은 원자의 정호를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생모인 옥정을 희빈으로 삼았다. 서인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은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들어 상소를 올렸다.

"송나라 철종은 열 살에도, 번왕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철종의 아버지)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습니다. 당시에는 가왕(嘉王)·기왕(岐王) 두 왕의 혐핍(嫌逼)6436) 이 있었는데도 이와 같이 천천히 한 것은, 제왕의 큰 거조(擧措)는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혐핍의 염려가 있지도 않음이겠습니까? 제신들이 '정궁께서 생남했을 때에는' 하는 말이 있는 것은 대개 사전에 염려하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 송시열의 상소문

숙종은 또 화가 났다. 앵그리숙종 이미 원자정호 다했는데 송시열이 뒷북친다, 명나라 황제는 넉 달만에 정호한 일도 있는데 송시열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을 한다. 즉 원자정호 하기 전에는 시기상조라고 말해도 이해를 하겠는데, 이미 다 끝났는데 태클거는 이유는 왕권에 도전 아니냐면서 송시열은 귀양 크리. 귀양지에 도착하기 전에 사약을 내려서 죽인다. 이후 서인들은 남인에게 밀리고 인현왕후는 폐서인되어 궁 밖으로 내쳐진 후,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기사환국)[12]

2.5. 왕후에서 후궁으로

이후, 김만중의 손자 김춘택등을 중심으로 인현왕후 복위운동이 일어나고 인현왕후의 폐서인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은 장희빈의 거친 성격에 실망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는 것이 대중 사이의 기존 인식이었으나 실제로는 권력다툼에서 기인한다.즉,숙종은 권세를 잡은 남인의 권력이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1694년,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의 지지를 받던장희빈을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권력은 남인에서 온건 서인인 소론에게로 넘어가게 된다.(갑술환국) 하지만 대중 사이의 기존 인식이 그러했던 것은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일단 희빈 장씨의 아들이 인현왕후를 더 어머니로 생각했으며, 평군 이항조차도 여러번 손을 떼려는 마음을 먹었으며 후궁으로 격하시킨 직후부터 희빈 장씨의 세력은 급속도로 떨어져 나갔던 점이다.

2.6. 최후

지위가 강등된 뒤, 장희빈은 울분의 나날을 보내며 숙종과 인현왕후에게 문안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시 중전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게다가 인현왕후를 중궁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민씨'라고 부르면서 요사스러운 여자라고 욕했다. 인현왕후가 시름시름 앓자,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으면 자신이 다시 왕비가 될것이라 믿고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 뒷쪽 별채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건 전부 1701년 9월 23일에 숙종이 제주에 유배가있는 장희재를 처형하라고 비망기를 내리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남인의 재집권을 두려워한 노론의 사주로 숙의 최씨가 취선당의 신당과 인현왕후 저주를 고변하여 결국 같은 해 10월, 사약을 받았다. 실록을 보면 숙종은 한무제가 구익부인을 죽인 이야기를 예시로 들면서 신하들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자는 처음부터 죽일 계획이었다면서 숙종을 무서운 왕으로 본다. 말로는 비참했지만, 숙종은 희빈을 왕후의 예에 준하는 장례를 치르게 했고 장례에 세자 부부 내외도 참가케 했으며 나중에 희빈의 묘가 터가 안 좋다는 말에 길지를 고심한 끝에 가장 평가가 우수한 광주 진해촌으로 와병 중인 숙종이 직접 택하기도 하였다.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이 희빈에게 자진(자살)하라고 명을 내려 희빈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녀를 자진하게 할 때 숙종이 사약을 내릴지 신하들과 의논하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진했다고 해도 일단 사약을 마신 건 맞는 듯하다. 숙종실록 27년 10월 8일 11번째 기사 재미있는 것은 신하들이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낳아서 기른 사람이니 유사(攸司:관청)의 형벌을 쓸 수 없음을 말하고 주례를 예시로 들면서 은근히 숙종을 만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임금의 후궁이지만 궁궐에서 죽을 수 없으니 사약을 받더라도 사가로 나가서 받아야 하는데, 그럴려면 관원이 사약을 들고 사가로 가야한다. 이렇게 된다면 이 또한 유사의 형벌이 되는 거라면서 판중추부사 서문중이 나름대로 숙종을 말려보지만 정해진 뜻이 완고해서 실패. 숙종은 유사의 형벌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승정원이 전교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형벌을 내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냐면서 말하는 걸 보면 모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하는데 어쩔 수 없이 죽이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이때 희빈이 사약을 마시지 않겠다면서 패악을 부려서 힘으로 찍어누르고 강제로 먹였다는 야사가 널리 퍼져있으나 이와 관련된 기록은 서인과 관련되어서 발견되는 데다 정사에서는 그녀가 세자를 위해서 순순히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송시열, 김수항, 김익훈 등의 죽음으로 장희빈에 대한 포한이 깊었던 서인계열의 악의적인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왜곡이 가해질 정도로 그녀에게 정적이 많았다는 소리도 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자정호 사건부터 송시열이라는 거목이 쓰러졌고, 웬만한 서인 가문이 줄줄이 귀양에 숙청당하고, 공주들도 피하지 못해서 숙안공주는 아들을 잃고 숙종과 남매지간인 명안공주는 시아버지가 휘말려서 죽는다. 이런 과정에서 생긴 원한이 왕에게 갈 수는 없으니 자연히 장희빈에게 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숙종은 자신의 후궁들에게 궁궐 밖에 집을 마련해주고 재산을 만들어주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고 여기에는 그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이런 원한 하나 하나가 모여서 부메랑처럼 돌아온 셈일지도(...)근데 그건 숙종잘못이잖아

한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취선당 신당은 사실 인현왕후가 승하하기 2년 전에, 장씨가 세자(후일의 경종)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었는데, 숙빈 최씨가 이는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뒤, 장씨 휘하 나인들에게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지만, 나인들은 세자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라고만 말했다고 하며, 나중에서야 고문을 못 이긴 나인들이 추가 증언으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빌었다고 자백하여 희빈의 처벌이 결정되었다고.

물론 당시 법도로 보아서는 어디까지나 병환 중에 있는 인현왕후가 우선이기 때문에, 희빈 장씨가 아픈 세자를 위해 사사로이 궁 밖으로 나가 절에서 불공을 드렸다던가 치성을 드렸다고 해도 허물이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13] 궁궐 내에 허락도 없이(애초에 허락을 받을 수 있을 일도 아니었지만) 신당을 차려 세자만을 위하여 치성을 드렸다면 예법을 중요시하고 무속신앙을 천대하였던 당시 사회에서 큰 허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인현왕후의 죽음 여부와 무관하게 상전인 인현왕후를 능멸하는 일이라며 트집 잡히기에는 딱 좋은 정도의 일인 것이다. 이미 조선에서는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 하는 일로 조정대신들이 싹 갈려나가고 몇 십 년이나 당파 싸움으로 이어진 예송논쟁도 있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법도를 어긴 것과 일국의 왕비를 주살한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으며 무리해서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였다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것은, 서인의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다고 볼 수 있게 한다.

야사에는 그녀가 경종의 고환을 상하게 하며 이씨를 망하게 하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거나, 사약을 마실때 발악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록에는 그같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 아닌듯 하다. 사실 경종은 즉위 1년 후 희빈을 옥산 부대빈으로 추숭했고 높히려 했으나 영조 즉위 이후 집권 노론이 희빈을 대역죄인 취급하였고, 후세에 인현왕후전 같은 야사가 널리 알려지며 악녀의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 탓에 저런 야사가 널리 알려지게 된 듯하다.

그녀 사후 숙종은 내명부의 궁녀(정확히는 후궁)가 왕비로 책봉되는 일을 금지시켰고, 스스로도 후궁 중 한 명을 왕비로 삼지 않고 새로 장가를 들었다. 그 때문에 장희빈 이후로는 후궁 출신의 왕비가 나오는 게 불가능해졌다.

장희빈의 묘는 본래 경기도 광주시에 있었지만 1969년에 고양시 서오릉 구역으로 이장되었다. 이를 대빈묘(大嬪墓)라고 부른다.

3. 평가

대단히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여인으로 영국의 헨리 8세의 총애를 받다 몰락하여 죽은 앤 불린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많다. 그녀는 사극에서 단골소재로 등장하는 인물로 아마 연산군, 정조와 더불어 막상막하일 듯하다.

앤 불린이나 장희빈이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현대에 들어선 당대의 평가만큼이나 악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4] 둘 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남편, 왕에 의해 희생되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희빈도 앤 불린도, 알고보면 평가가 상당히 갈린다.

그녀의 일생을 다룬 사극만 해도 여러 편이며 대부분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출연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MBCKBS는 같은 시간대에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을 방송해 경쟁을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4. 장희빈을 연기한 배우들

사극에서 장희빈의 배역은 그만큼 미모를 인정받는 배역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사극에서 장희빈 역할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미모를 가진 여배우로 인정받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여배우들 사이에서는 서로 장희빈 역할을 하려 하는 추세이다. 실제로 김혜수의 경우 장희빈의 배역을 얻기 위해 영화 바람난 가족의 캐스팅을 포기한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최초로 장희빈이 영상에 등장한 작품. 당대 최고의 여배우 김지미가 장희빈 역을 맡아 표독스러운 장희빈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 김지미 # 포스터 장희빈의 사약신이 나오지 않은 유일한 작품으로 자진하라는 명을 받고 쓸쓸하게 궁궐의 뒤안길을 걷는 장면이 끝이다.

  • 제2대 정임: 1968년 영화 "요화 장희빈"
-임권택 감독, 신성일, 태현실 등의 초호화 캐스팅으로 김지미의 "장희빈"의 위세를 완벽하게 눌러버렸다. 남정임의 장희빈은 김지미의 장희빈보다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남정임# 포스터

-"요화 장희빈"의 개봉 3년후 MBC에서 방송된 최초의 드라마 장희빈. MBC드라마의 역사를 다시 썼다는 찬사를 받는 걸작으로 꼽힌다. 윤여정의 장희빈은 역대 최강의 표독스러운 장희빈이란 평가를 받는다. # 윤여정

  • 제4대 이미숙: 1982년 MBC 드라마《여인열전》중 제1화 "장희빈"
-윤여정의 장희빈이 잊혀질 무렵 다시 MBC에서 제작된 드라마. 이미숙의 장희빈은 그간 표독스럽기만 했던 장희빈에 섹시와 당당한 카리스마를 결합하여 역대 전무후무할 장희빈이란 찬사를 받았다. 숙종은 유인촌#[15]# 이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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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조한 시청률 때문에 위기를 맞고 있던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의 흥행을 위해 선택된 카드로 전인화를 캐스팅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 전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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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대 정선경: 1995년 SBS 드라마 "장희빈"
-이전의 장희빈과는 달리 파격적으로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아닌 거의 신인급이었던 선경, 김원희, 임호 등이 캐스팅되었던 드라마.(심지어 명성왕후미리였다.) 그러나 대중적으론 정선경의 장희빈이 가장 훌륭하게 기억에 남게 되었으며 그 때까지 영화 데뷔작에서의 노출 이미지가 따라다니던 정선경을 배우로 인정받도록 만들었다. 아마 20대들은 정선경의 장희빈을 생방으로 보았을 듯하다. # 장희빈 사진 # 사약신 #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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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이미지가 맞지 않는 배우들을 캐스팅했다는 평가[16]가 지배적이었고 에로 사극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초반에는 좀 노출문제도 있긴 했었다.[17] 그리고 장희빈을 나름대로의 아픔과 정당성을 지닌 인물로 그리려는 초반부의 의도와 달리 점점 기존의 표독스러운 장희빈의 이미지로 회귀하는 문제점을 보였다. 역대 장희빈과 비교했을 때 시청률도 그런저런 시청률에 경실련에서 시청자가 뽑은 프로그램에서 최악의 프로그램 하나로 선정되었다. 김혜수는 방송 초반 ‘최악의 장희빈’이라는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김혜수 자신도 “드라마하면서 이렇게 욕을 많이 먹은 적은 없다”라고 밝힐 정도. 공동연출을 맡은 이영국 PD는 22일 가진 종영 기자간담회에서 “장희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10년 가까이 왕의 사랑을 독차지한 카리스마와 매력이 무엇이냐를 담아내 새 인물을 만들고 싶은 의욕은 컸지만 작가 교체 등으로 인해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장희빈의 라이벌인 인현왕후도 단순히 천사표 캐릭터가 아닌,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또 당시만 해도 신인 수준이었던 박예진숙빈 최씨역으로, 송일국이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의 조카 김춘택 역[18]으로, 송시열 역으로 그 유명한 이순재가 등장하는 등 연기파 배우 다수가 출연한 작품이다.
여기서도 사약신에서 발악하는 장면이 등장했는데, 사약을 먹이는 배우들이 김혜수의 힘을 당해내지 못해 촬영이 버거웠다는 뒷얘기가 있다. 김혜수가 여성치고는 체구가 큰데다 운동을 많이 해서 체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었다고.

-여기서는 김만중의 소설 '씨 남정기'가 자신과 인현왕후의 관계를 빗댄 소설임을 알고 그것을 차지하려고 한다.[19]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타인의 생명을 가볍게 여길 정도로 대담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설로 외로움을 다스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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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아닌, 주역으로서 드라마의 주인공인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와 대립하는 라이벌이다. 이제까지 장희빈은 대개 주인공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례적. 배우는 이소연으로 드라마 "천사의 유혹"에서 보여준 악역 이미지가 부각되어 캐스팅 된 듯. 하지만 이제까지의 장희빈들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희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시절에는 숙종에게 정치적 조언을 해줄 만큼 총명하고, 천비인 동이를 인간적으로 대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사려깊은 인물이었다. 또 신분상승을 위한 욕망은 강했지만 늘 정당성과 명분을 가지고 행동하려 했다. 그러나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중전이 되기 위해 점점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중전이 되지만 숙종의 마음이 동이에게 옮겨가자, 동이에게 열폭해 무리수를 쓰다 점점 몰락하게 된다.[20] 결국 동이와 동이 소생 왕자인 연잉군을 해치려다 들켜 사사되게 된다.

악역이지만 정적인 인현왕후와 숙빈에게 패악을 부리기보다는 교묘한 심리전을 펼치며 고고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또 마지막까지 숙종에 대한 사랑과 아들 경종에 대한 모성애에 흔들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인현왕후와 숙빈, 숙종에게 온갖 패악을 부렸던 이전의 표독한 장희빈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사사되는 장면에서도 온갖 발악을 하다 억지로 사약을 마셨던 다른 장희빈들과 달리 "다른 건 후회하진 않으나 숙종을 사랑한 것이 잘못이었으니 그 때문에 사약을 받겠다"면서 스스로 사약을 청하며 품위를 잃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맞았다.[21]

어찌 보면 동화책 속 주인공처럼 올곧고 바르기만 하고 늘 승리하는 동이보다 훨씬 인간적인 인물. 이소연의 호연이 인간적인 장희빈의 모습을 잘 살렸고, 특히 죽기 직전 울며불며 숙빈에게 매달려 나는 죽어도 세자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과 전하를 연모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유언은 시청자들이 장희빈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장희빈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게 묘사된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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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악의 장희빈

-장희빈을 나인으로 설정, 조선시대의 디자이너로 만든다고 한다. 김태희의 연기력 논란을 마무리짓게 될 수도 있을지는 의문. 숙빈 최씨 역의 한승연과 함께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장희빈하면 연기력을 인정받는다는 배역인데 아직도 연기력으로 폭풍으로 까이는 김태희가 주연이라는 사실에 경악스럽다는 반응이 더 많았다. 특히 숙종의 정비라인이 인경왕후 김하은에 인현왕후 홍수현이라 더 그런면이 있는듯.

제작사는 "9대 장희빈"이라고 홍보하고 있는데 위의 리스트에서 누구를 빼고 계산한 건지는 미상. 넷상의 여러 계산법을 보면 이재은의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남자에서 역할을 맡은 최우리가 빠진 듯 하다. 아무래도 단막극 자체의 존재감이 희미하고 인현왕후의 남자에서 존재감이 희미해 발생한 문제인 듯.

그리고 예상대로(?) 1화부터 발연기로 신나게 까이고 있는 중이다. 중천에서 했던 그 똑같은 얼굴 표정이 그대로 나온다는 평, 해품달 한가인이 안 부럽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연기력이 늘었다고 나왔던 기사를 안드로메다로 쳐박아버렸다. 현대극에서야 나름대로 열심히 구르면서 경험을 쌓았지만, 사극은 현대극하고 발성부터 달라야 하니...극중후반에 들어서 연기가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현재까지 장희빈 배역 가운데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배우.

이외에 2007년 작 영화 "궁녀"에서도 장희빈으로 추정되는 역할이 등장하지만 실은 가상의 인물이라고 설정했고 시대도 정조시대로 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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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처음에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다가 이후에 왕비가 된 경우는 가끔 있다. 예를 들어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도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후 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사망한 후 왕비가 되었다. 얄궂게도 두 여성의 운명은 비슷하였다.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 윤씨도 간택후궁 출신. 성종이 유독 후궁들을 왕비로 올리는데 적극적이긴 했다.
  • [2] '나인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얼굴이 자못 아름다웠다.' -숙종12년,1686년 12월 10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람의 외모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 자체가 거의 없다. 임진왜란 때 포르투갈 상인이 중국에 판 흑인 노예 출신의 용병같이 아주 특별난 경우에만 구체적인 묘사를 했다. 혹여 외모에 대한 언급을 한다해도 사관들은 어지간하면 아주 짠 평을 내렸다. 연산군의 애첩인 장녹수는 외모가 중간에도 못 미친다는 평을 들었다. 이런 사관들이 미모를 인정했다면 장희빈은 진짜 미인이라는 뜻이다
  • [3] 장희빈이 왕비가 되자 옥산부원군에 추봉되었다가, 희빈으로 강등되자 봉작이 추탈되었다
  • [4] 재미있게도, 자주 비교되는 앤 불린과 출신 배경이 비슷하다.
  • [5] 장희빈이 왕비가 되자 파평부부인에 봉작되었다가, 희빈으로 강등되자 봉작이 추탈되었다.
  • [6] 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엄연히 장형의 정실로서 옥산부원군 신도비에 따르면 사역원 첨정 윤성립(일본어 역관)의 딸이며 그는 1653년까지 승정원일기에 기록이 있었다.(참고로 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1651년생.)
  • [7] 더 보완하자면, 당시 노비가 양반의 정실이 쉽게 될 수 있을까? 좀더 보완하면, 윤씨의 어머니 역시 노비라 보기 힘들고...
  • [8] 당장 보궐정오에선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이 자신이 외척이라 겸직을 사임할때도 '당연히 사임해야지 인재라고 봐주기냐? 그리고 민유중은 자신을 단속하고 제재하는 데 있어서 본래 결단성 있게 엄격하게 하지 못해 조정한테 국구의 집 수리하라고 금 주는거 사양 안하고 겸직했음'이라고 깐다. 참고로 민유중은 자신의 여식이 중전에 간택되자 그날 바로 사퇴하려다가 못하고 저기서 트집잡은 선혜청 겸직도 숙종이 '너님 너무 지나치게 사양하는거 아님?(...)'라고 했을정도 였다.
  • [9] 대표적인 예가 2003년판 KBS 장희빈.
  • [10] 자의대비는 인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어린시절부터 그녀를 모셨던 궁녀 시절의 희빈을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그녀가 출궁했을때 그녀를 가엾게 여겨 외질녀인 숭선군의 아내에게게 그녀를 돌보게 했고 그녀가 재입궁했을때도 인현왕후와 차별을 두어 그녀만 총애하다시피 했다고.
  • [11] 유악을 멋대로 빌려썼다는 야사가 유명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소리다.
  • [12] 이 과정이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양반 가문 출신인 간택후궁이 중전이 되는 사례는 몇번 있었으나(세자빈의 사례도 있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궁녀출신의 후궁이 중전이 된 사례는 전무후무한 일이였기 때문이다.
  • [13] 앞에서도 말했듯 인현왕후가 더 어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자라 하여도 그 어머니인 왕비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었으며, 내명부 후궁인 희빈 장씨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오늘날에도 자식이 아파도 그 부모가 병환 중에 있다면 알리거나 티내지 않으며, 수발을 드는 것도 조심스럽게 하는 점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 [14] 전통 사회에서는 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금기였던 만큼 왕의 정치가 불만이라도 왕을 직접 비판하진 못하고 측근인 간신이나 요녀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정말로 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진정한 권신도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 왕이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면 충분히 억제할 수 있는 경우도 숱하게 많다.
  • [15] 유인촌은 후에 2003년 장희빈에서 장희빈을 돕는 왕족 동평군으로 나온다.
  • [16] 대표적인 경우가 주인공 배역을 맡은 김혜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희빈=요녀'란 이미지가 주류였는데 글래머인 외모에다 연기의 선이 굵은 김혜수는 장희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강했다.
  • [17] 노출문제와는 별개이지만 사극 최초로 키스도 있었다.
  • [18] 장희빈 반대파 인물이다. 흥미로운 건 같은 드라마에 등장한 송일국의 모친인 김을동 씨는 장희빈의 측근 상궁으로 출연하였다는 점이다.
  • [19] 이건 전작인 김혜수 장희빈에서도 나타났으나 이때는 없에려고 차지하려는 거고...
  • [20] 사실 이런 무리수들은 그녀가 주도했다기 보단, 주로 그녀의 오빠인 장희재(김유석 분)나 어머니가 일으키고 그녀가 뒷 수습을 하다가 같이 끌려 들어가는 패턴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중전을 밀어내기 위해 장희재가 모략을 꾸민 것을 알고도 중전이 되고 싶은 야망에 그것을 묵인한 후에는 점차 장희빈이 뒷술수를 주도하게 된다.
  • [21] 하지만, 죽기전에 속으로 숙종을 사랑한것이 잘못이라고 했던건 거짓말이었다고 말한다. 사랑했기에 숙종의 사랑이나 모든걸 가지고 싶어했던것. 그리고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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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9 15: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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