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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last modified: 2015-07-31 02:27:22 by Contributors

국가의 권위는 절대 스스로 종결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폭정이라 하더라도 불가침화되고 신성화된다. 만약 국가의 권력수단이 민중을 폐허로 인도한다면, 저항은 모든 개개인 시민의 권리일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중.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아돌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외에도 몇건의 계획이 더 있었다.

Contents

1. 발단 및 암살 계획
2. 암살 실행과 실패
3. 발키리 작전의 발동, 뒤이은 쿠데타
4. 실패로 돌아간 쿠데타
4.1. 만약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다면?
5. 사건 이후
6. 평가
7. 미디어

1. 발단 및 암살 계획

국방군(Wehrmacht), 특히 육군(Heer)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싸웠던 군대라는 자부심이 강했고, 정치적 영향력도 큰 데다가 나치스의 영향을 거부하는 보수적인 노장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전체 구도에서 보면 나치스나 육군이나 사상적으로는 똑같이 보수적인 성향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육군의 정신적 지주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등의 지향점은 바로 독일 제2제국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육군 상층부의 목표는 사민당 등이 설치는 민주공화정을 타도하고 전제군주제(황제 제도, 귀족제도 등)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퇴역 군인이 중심이 된 철모단 등의 사상도 이와 유사하다.

믿기 어렵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치즘의 일부 사상들은 육군 상층부의 성향보다는 진보적이기는 했다. 쉽게 말해서, 당시 군부는 시대에 뒤떨어진 귀족주의, 군국주의 사상을 가진 진짜로 꽉막힌 인간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나치스는 대중주의 같은 것을 내세워 민중을 선동하고, 머릿수만 끌어모았지 (귀족 혈통이나 신분, 과거의 지위라는 측면에서) 국가 지도자로서 정통성 있는 자격이 없는 별 같잖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인 수준 낮은 집단이었다. '어르신들'이 보기에는 영 탐탁치 않은 집단이었던 것. 독일 군부 계통 정치 세력과 나치스가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어디까지나 반공주의라는 이념과 나치스의 세력이 워낙 급격히 커졌기 때문이었고,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나치즘 사이에는 의외로 갈등의 소지가 깊이 잠재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이러한 국방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 노장들을 죽이거나 쫓아냈고, 이에 분노한 국방군내 장교들은 반히틀러 세력을 규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계획은 차후로 미뤄졌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국방군내 반히틀러 비밀조직인 '검은 오케스트라(Schwarze Kapelle)'는 히틀러를 암살한 뒤, 1942년에 세워진 비상계획 발키리 작전을 이용하여 독일 국내를 장악한 후 미국 및 영국과 종전협상을 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가장 중요한 히틀러를 암살하는 임무는 독일 보충군(Ersatzheer)[1] 참모장교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맡기로 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아프리카 전선에서 큰 부상을 입어 왼쪽 눈과 오른팔, 그리고 왼손 손가락 두 개를 잃었기 때문에 몸수색도 그리 까다롭게 하지 않는 편이어서 히틀러에게 접근하기에 용이한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슈타우펜베르크는 폭탄이 든 서류가방을 들고 히틀러가 머물고 있는 동부전선 사령부인 늑대 소굴(Wolfsschanze)에 가서 히틀러의 회의실에 서류가방을 놓고 나오기로 계획을 세우고, 조금이라도 의심을 덜 받도록 거사 몇 달 전부터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는 용의주도함까지 보인다.

계획의 대략적인 내용은 슈타우펜베르크가 폭탄을 놓고 와서 히틀러가 사망하면, 독일 보충군 총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프롬(Friedrich Fromm) 상급대장이 발키리 작전을 발동하여 독일 국내를 장악한 후 독일 국방군의 노장인 루트비히 베크(Ludwig August Theodor Beck) 상급대장이 임시 대통령[2], 유명 정치인 카를 괴르델러(Carl Friedrich Goerdeler)가 수상, 에르빈 폰 비츨레벤(Job-Wilhelm Georg Erdmann Erwin von Witzleben) 원수가 국방군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Friedrich Olbricht) 대장이 국방장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국방차관으로 임명되어 미국 및 영국과 종전협상을 벌이면서 소련을 막는다는 복안이었다.

2. 암살 실행과 실패

당초 거사는 1944년 7월 11일에 이뤄질 예정이었지만 히틀러의 회의에 참석하면서 폭탄을 놓고 오려고 했던 계획이 그날 하인리히 힘러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지막 순간에 취소[3]된다. 7월 15일에는 히틀러, 히믈러, 괴링 셋 모두가 회의에 참석했고 슈타우펜베르크도 폭탄을 들고 갔으나, 시한폭탄이 작동하려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 히틀러가 방 밖으로 불려 나가는 바람에 역시 취소되었다.

이러던 와중에 7월 17일 괴르델러가 체포되고, 설상가상으로 7월 18일에는 게슈타포에서 음모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가 곧 체포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있었다.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으나, 검은 오케스트라는 이 소문 때문에 게슈타포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고 있다고 판단,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기회를 영영 놓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침 7월 19일, 늑대 소굴[4]의 총통 본영에서 보충군에 다음 날 1시에 열릴 작전회의에 병력동원 현황을 보고하기 위해 보충군 참모장교를 보내라는 통보를 보낸 까닭에, 검은 오케스트라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보냈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전속부관 베르너 폰 헤프텐(Werner von Haeften) 육군 보병중위가 늑대 소굴의 총통 본영에 도착하고, 검은 오케스트라 멤버들과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한 각 장성 및 장교들은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에 모여 상황을 주시하며 암살기도와 동시에 그 날 오후 1시를 기해 발키리 작전을 발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3시로 예정되어 있었던 작전회의는 히틀러가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30분 앞당겨진 12시 30분으로 변경되었다. 그렇게 작전회의는 시작되었고, 회의에 살짝 늦은 슈타우펜베르크는 회의실로 가던 도중 모자와 벨트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둘러대며 대기실로 들어가 가방 속의 폭탄 신관을 작동시켰다.[5] 그리고 12시 36분, 회의실로 들어간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와 가장 가까운 곳에 폭탄이 든 자신의 서류가방을 두고서 베를린에서 급하게 올 전화가 있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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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사건현장.

12시 42분, 육군 참모총장인 육군대장 아돌프 호이징어(Adolf Bruno Heinrich Ernst Heusinger) 장군이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 대한 브리핑을 하던 중 "소련군은 막강한 병력으로 주나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선봉은 이미 주나부르크 남서 지구에 도달했으며 페이푸스호 주위의 아군을 즉각 후퇴시키지 않으면, 파국이..."라는 말과 동시에 폭탄이 폭발했다.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죽거나 다쳤으며, 히틀러 본인도 팔에 나무조각이 박히고 고막 파열과 약간의 다리 화상을 입고 기절해 있었다. 물론 그대로 있었다면 히틀러는 불에 타 죽었겠지만, 매우 아깝게도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장군이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히틀러를 구해낸 탓에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 Memnon335bc (cc-by-sa-3.0) from

사건 당시의 현장을 담은 자료. 당연히, 빨간색 1번이 히틀러.

암살이 실패한 이유로는 당시 더운 날씨와 재공사 때문에 지하 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던 작전회의가 지상의 목조건물 회의장에서 열린 탓에 지하 벙커보다 좀 더 개방된 장소였던 그 곳에서는 폭탄의 위력이 반감되었다는 점, 여기에 더해 슈타우펜베르크가 폭탄이 든 가방을 놓고 간 뒤 호이징어 장군의 부관인 하인츠 브란트(Heinz Brandt) 대령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방에 걸려 넘어질 것을 우려해 히틀러 가까이에 놓인 폭탄 가방의 위치를 테이블 다리 너머로 바꾸면서 결국 두꺼운 목재로 된 회의장의 테이블 다리가 히틀러의 방패가 된 탓이었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을 다룬 한 독일 다큐멘터리에서 똑같은 구조의 세트장에서 실험한 결과, 저 두 조건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충족되지 않았을 경우 히틀러 자리에 있던 마네킹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대로만 되었다면 히틀러는 완전히 사망했을 것이다.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이 폭탄이 터짐과 동시에 암살의 성공을 확신하며 늑대 소굴을 떠난 사이,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에 모여있던 장성들은 오후 1시 15분, 총통 본영의 통신부대 사령관이었던 육군 기병대장 에리히 펠기벨(Fritz Erich Fellgiebel) 장군의 연락으로 히틀러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도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소련이 저공비행으로 폭탄을 투하했거나 이미 오래 전에 연합군 스파이가 폭탄을 미리 설치해두고 나중에 터뜨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부하 장교들에 의해 슈타우펜베르크의 여러 수상한 행동들이 보고되자 히틀러는 슈타우펜베르크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체포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펠기벨이 13시경에 늑대 소굴의 통신선을 몰래 절단했기 때문에 이 곳은 연락두절로 고립되었다.

3. 발키리 작전의 발동, 뒤이은 쿠데타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는 발키리 작전을 발동할지 여부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슈타우펜베르크와 연락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히틀러가 살아 있다고 연락한 펠기벨이 전한 소식도 단편적인 것이라서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은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암살시도와 쿠데타를 실패로 이끈 결정적인 순간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오후 3시 45분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에 도착하여 폭발 성공을 보고했다. 곧이어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켜 총통을 암살했다'라는 위조된 군령에 의해 발키리 작전이 발동했고, 친위대 사령부가 봉쇄되었다. 올브리히트 장군은 프롬 장군에게 보충군의 동원을 요구했지만, 쿠데타 가담 여부를 그 때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프롬 장군은 올브리히트 장군에게 총통이 죽었다는 증거를 대라고 말했다. 그런데 마침 늑대 소굴의 통신선이 복구되어 카이텔 원수로부터 히틀러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프롬 장군은 쿠데타 모의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하고 상황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올브리히트 장군은 일단 도망쳤다.

오후 5시, 늑대 소굴에서는 통신선이 복구되고 올브리히트 장군이 각 군에 발신한 발키리 작전 발동의 통신이 접수되었다. 그와 함께 각처의 반란 소식들이 히틀러에게 보고되자 히틀러는 이 암살사건이 슈타우펜베르크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그 뒤에 거대한 배후가 있음을 직감하고 장검의 밤 사건(Nacht der langen Messer)[6]보다 더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작전명 발키리의 한장면.

오후 4시 30분, 베를린에 도착한 베크 장군, 올브리히트 장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행동을 개시하고 프롬 장군에게 다시 찾아가 쿠데타에 가담할 것을 촉구했다가 발키리 작전의 발동을 알고 분개해 자신들을 체포하려는 프롬 장군을 그대로 체포했다.

오후 5시,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러 온 친위대 장교와 병사들이 오히려 역으로 체포되고, 반나치 병력이 행동을 개시해 베를린에 있던 나치 당 고급 관료들을 체포했다. 오후 6시에는 쿠데타 병력이 친위대와 보안국 사령부를 점령하기 위해 부대를 이동시켰다.

4. 실패로 돌아간 쿠데타


그러나 6시 28분, 히틀러가 자신의 생존을 알리며 음모자들에게 처절하게 복수하겠다는 라디오 연설을 발표하자 쿠데타 세력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발키리 작전의 발동과 히틀러의 생존이라는 정보와 지령들이 쏟아지면서 병력들의 혼란이 심했던 판에 상황이 더 악화된 것이다.

물론 베를린의 보충군 사령부에서는 라디오 연설이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전군에 발키리 작전의 발동을 알렸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수의 장교들이 이탈하여 결국 암살기도와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특히 쿠데타 세력의 유일한 정예부대이던 육군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수도경비대대 지휘관 오토 에른스트 레머(Otto-Ernst Remer) 소령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잡으러 갔다가 히틀러와 직접 통화한 후 히틀러 편으로 돌아선 것이 결정타였다.

오후 10시경에는 쿠데타에 가담했던 장교 10여명이 배신을 했고, 총격전 끝에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쿠데타측의 장교들이 체포되었다. 감금되어 있던 프롬 상급대장도 풀려났고, 곧이어 프롬은 자신이 쿠데타 세력과 접촉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2시간 뒤인 자정에 긴급 군법회의를 소집하여 베크 장군에게는 자살을 요구하고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 등에게 사형을 언도하여 예비군 사령부 뜰 내에서 그들을 총살시켰다. 그러나 에리히 회프너(Erich Hoepner) 상급대장만은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2시 30분, 오토 슈코르체니 중령이 현장에 들이닥쳐 아직 살아 있었던 회프너, 비츨레벤, 프롬 등을 체포했다.

한편 프랑스 파리에서도 검은 오케스트라 그룹의 일원인 카를 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Carl-Heinrich von Stülpnagel) 육군대장이 파리의 SS와 게슈타포들을 체포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파리에 있던 서부전선 해군 사령관 테오도르 크란케 제독이 이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예하의 해군 병력 1천여명을 동원하겠다며 대치하고야 이이 반란군노무 새끼야 내가 지금 당장 수병들을 몰고 가서, 보다못한 주 파리 대사의 중재로 슈튈프나겔 장군은 반란을 포기했다. 슈틸프나겔 장군은 "오해였다."며 상황을 무마한 뒤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해군과 SS 지휘관들과 건배를 하며 훈훈한 분위기로 헤어졌다(...). 그 뒤 슈틸프나겔 장군은 베를린에서의 거사 실패 소식을 접하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했고, 이후 체포되어 8월 30일에 처형되었다.

4.1. 만약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다면?

쿠데타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히틀러를 암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암살을 성공했지만 쿠데타가 실패하더라도 히틀러가 이리저리 꼬여놓아 막장이 된 독일군 지휘체계만큼은 일시적으로 마비, 혼란상태일지언정 정상적으로 운영될 가능성은 있었고 히틀러가 그렇게 꺼리던 협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더라도 쿠데타가 성공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발키리 작전이 실행될 때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인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소속 수도경비대대의 특성에 있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군사반란 발발시 즉시 진압에 투입할 정예 수도 방위 부대를 모체로 한 베를린 경비연대를 기반으로 창설된 정예 부대이다. 그러므로 반란 모의에 적극 동참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게다가 그로스도이칠란트는 국방군 최정예 부대로 막대한 전과를 올리면서 사단의 주력은 동부전선 곳곳에서 맹활약 중이었고, 쿠데타 측이 동원할 수 있었던 베를린 내 주둔군은 고작 4개 중대 뿐이었다. 그렇다면 부대를 직접 통솔하게 될, 그 4개 중대 내의 중간급 간부들을 포섭해야 했는데 그 많은 수의 간부들을 포섭하는 것은 쿠데타 사전 발각의 위험이 너무 컸다.

결국 쿠데타측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간부급 장교들을 쿠데타에 포섭하지 않고 단지 발키리 작전에 의해 부여되는 지휘권만으로 부대를 통솔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이는 역시 너무나 허술한 방안이었고, 쿠데타 측의 지지기반이 더욱 약화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에 따르면[7] 나치당내의 주요인사들을 체포하거나, 정보교환을 차단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살해하는 등 이러한 행동으로 쿠데타 성공 확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들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고 한다.[8] 또한, 방송국을 점령해서 독일 전역에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이들은 위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쿠데타 계획을 세웠으면서도 자신들의 집권 방법은 도덕적이어야 하고 나치에 대한 단죄는 합법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 아래 나치 고관을 암살하지 않고 그냥 체포해서 후에 법정에 세운다는 아마추어적인 생각 때문에 이렇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특히 이 계획에서 군부를 대표한 루트비히 베크에 대해서, 구데리안은 자기 회고록에서 쿠데타에 가담하라고 권유가 있었으나 주모자가 루드비히 베크인 것을 알고 그렇게 결단력 없는 인물이 성공할리 없다고 생각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쿠데타는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특성상 '완벽한 계획'을 만드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다. 실제로 역사상 성공한 쿠데타들도 계획 자체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진압을 해야 하는 정권 측의 실수가 겹치거나 뜻하지 않은 행운을 통해 성공한 사례가 많다. 무엇보다 쿠데타 계획이 허술했다 하더라도 쿠데타 측의 반히틀러 저항 정신을 폄하해서는 안된다.

5. 사건 이후

이후 히틀러는 자신이 공언한 대로 처절한 복수를 단행했다. 무려 7,0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어 롤란트 프라이슬러가 주관한 인민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암살계획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암살계획과 무관한데도 한꺼번에 몰아서 숙청된 사람들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했고 프롬 장군은 불고지죄[9]로 1945년 3월 15일 총살형을 당했다. 프롬은 죽기 전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배신하지 않는 거였는데"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 육군 원수의 경우는 암살계획에 어느 정도 관련은 되어 있었으나[10] 정작 본인은 거사 며칠 전(7월 17일) 공습으로 부상을 입는 바람에 사건에서는 한 발짝 멀어져 있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계획에 연루된 것이 발각되었으나, 롬멜이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던 까닭에 히틀러도 롬멜을 멋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때문에 히틀러는 롬멜에게 사후에 국장을 치러 주고 가족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자살하든지, 반역죄로 재판을 받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두 선택지 중 전자를 선택한 롬멜은 10월 14일에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

카를 루돌프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육군 원수의 후임이자 롬멜의 상관으로서 서부전선 사령관을 맡았던 귄터 폰 클루게(Günther "Hans" von Kluge) 육군 원수도 패전 책임이 두려운데다 역시 암살계획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발각될까 우려하여 롬멜에 앞서 8월 19일에 자결하였다. 암살계획에 가담했던 국방군 정보국(Sicherheitsdienst)장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 해군 대장, 베를린 경찰청장 볼프 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Wolf-Heinrich Graf von Helldorf) 경찰 대장[11]과 제국사법경찰 사령관 아르투르 네베(Arthur Nebe) 경찰 중장도 처형되었다.[12] 대표적인 민간인 반나치 인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13]도 체포되어 수용소에 투옥되고 2차 대전 종전 직전에 총살당했다. 그밖에 슈타우펜베르크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모조리 체포되어 학살당하는 사태까지 있었다.[14]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레머 소령은 사건 종결 후 대령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육군 소장이 되어 베를린 방어를 맡았다. 레머는 전후에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시 자신의 역할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건 이후 히틀러의 육군에 대한 불신감은 당연히 극도로 강해졌고 이는 육군과 무장 친위대의 대립에서 친위대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립이 끝나기는커녕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히틀러의 불신감에 불안감을 느낀 육군 인사 중 일부는 무장 친위대로 전군 신청을 하기도 하였다.

7월 20일 사건 이후 독일 육군 장교들은 '용의자'로 하룻밤새 게슈타포에 연행되어 사라지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였고 누구든지 가족이 소환되어 조사받으면 이에 연루되어 끌려가는 상황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숙청의 파도가 몰아치는 가운데 히틀러는 암살자들을 처형되는 장면을 녹화한 필름을 자신의 벙커에서 상영하였는데 대부분은 친위대 하급장교들과 민간인들이었을뿐 육군 장교는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6. 평가

독일군 병사들은 노르망디에서 공군의 지원 없이 연합군 군대와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그들에게는 고위 지휘 체계가 무질서해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또 7월 20일에는 여러 장군들이 히틀러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함으로써 독일군이 위기를 맞았다. 내가 보기에 그 장군들은 옳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을 '축출'하는 것은 장군들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정치인들 스스로 해내는 것이 최선이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회고록 <전쟁의 역사> 1968년

종전 직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한스 슈파이델을 위시한 암살자 그룹 멤버들의 회고록이 먼저 발간되었다. 이들은 히틀러에 의해 목숨을 잃은 옛 동료들을 추모하며 자신들의 높은 이상에 동참하지 않았던 독일군 장교들을 있는 사실, 없는 사실을 모조리 동원하며 매도했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마무리되고 국방군의 유명 지휘관들이 석방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프로이센 장교들은 "군인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비단 독일군 뿐 아니라 위의 몽고메리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무려 암살 미수 사건 24년 후에 출판된 회고록임에도) 제1차 세계대전부터 참전한 연합군, 독일군 고위 장성들의 보편적인 사상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1950년대에 발표된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위의 몽고메리의 글과 비슷한 내용으로 암살자들에 대한 평가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암살자들의 높은 이상에는 동의하지만 나치 친위대와의 유혈 투쟁으로 내전이 발생했을 것이고 외교적으로도 아무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연합군은 '무조건 항복' 이외에 어떤 협상도 불가한 입장이었기 때문."[15]. 아울러 다른 장성들에 대한 암살자 그룹들의 비난에 대하여 비방에 가까운 사실 왜곡이라며 이를 반박했다.

독일군의 명장 구데리안만슈타인, 파울 하우서 등은 '그놈들은 그냥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니까 어떻게든 자기 살길 찾으려고 일을 벌인 기회주의자들임에 불과하며 오늘날 가담자들이 받는 대우는 놈들이 아닌 전선에서 싸운 병사들이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암살미수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도 이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으며 패튼은 '멍청한 놈들'이라며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그렇다면 젊은 장교들과 일선의 장병들은 어떠했을까- 나치당 관헌들은 전투 부대원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고 이들에 대한 불만이 치솟으며 종전 후에 이러한 현실을 바꾸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음에도, 히틀러 암살 미수 소식이 전해졌을 때 장병들은 매우 분개했으며 암살자 그룹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칠 때까지 그들의 임무를 다했다. 국내에도 발간된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에는 '1945년 이후, 저항 조직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들은 진정한 이상주의자들의 특징인 겸손함을 잃어버렸다. 유감스럽게도 1944년 7월 20일 사건으로 인해 처형당했던 사람들은 독일 국민에게 어떤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저항 조직원들의 죽음이 일선의 장병들의 죽음보다 덜 존귀하지도, 더 존귀하지도 않다.'라고 평가한 내용이 있다.

게다가 가담자들이라고 자신들의 저서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언론에서 이를 보도했던 것처럼 인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주모자인 루트비히 베크 또한 1930년대에 이미 "군비 확장이 단순히 독일의 군사적 균형을 가져오는데 그치지 말고 독일의 우위를 달성하기를 바란다." "국가들 간의 관계에서 궁극적인 수단은 군사력일 것이다. 모든 나라는 원칙적으로 칼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이었다.[16] 이렇듯 정작 독일군은 물론 적국에서조차 평가가 분분했다가 갑자기 이들이 추앙받게 된 것은 사실 독일에도 히틀러의 압제에 저항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란 비판을 무시할 수 없다. 독일 내 좌파 언론에서 국방군의 인종학살 연루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면 반대쪽에서 '암살자 그룹 영웅화'로 무마하려는 모습이 많았기 때문이다.

암살자들이 요즘처럼 확실하게 애국자로 대우받게 된 것은 68혁명 이후의 일이다. 사실 독일 사법부는 1980년대 말까지도 나치 청산-정확히는 극우보수세력-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듣고 있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반나치운동의 대표적 인물로서 존경받게 되었고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하여 암살계획에 참여한 중요 5인의 기념비가 베를린의 국방성 자리에 세워졌고, 예비군 사령부가 있던 거리는 슈타우펜베르크 거리로 개명되어 애국자들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히틀러가 승리한 게 오히려 독일의 과거 청산을 철저하게 이루는 데 기여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한 발키리 작전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구 프로이센 귀족 출신들로 그들이 재건하고자 한 체제는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독일 제2제국과 같은 군국주의적 왕정 체제였다. 즉 쿠데타가 성공했을 경우 나치는 때려잡을 수 있으나 이들 프로이센 귀족 장교단이 주도권을 잡고 독일을 전제 국가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17]

또한 이러한 쿠데타는 내부로부터의 중상과 비슷한 또 다른 음모론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다. 즉, 이 사건만큼은 나치가 승리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독일의 과거 청산과 민주주의 정착. 그리고 유럽 중심국으로써의 부상이 순조롭게 이뤄진 셈이다.

7. 미디어

브라이언 싱어가 감독하고 톰 크루즈[18]가 슈타우펜베르크 역을 맡은 영화 '작전명 발키리'는 이 사건을 다룬 영화다. 장르 영화적 퀄리티는 이쪽이 더 높이 평가받지만 사건에 대한 통찰은 제바스티안 코흐 주연의 2004년작 '슈타우펜베르크'가 더 낫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슈타우펜베르크의 한국어 자막은 엉망이다. 대령이 장군에게 반말까고 장군이 대령에게 존댓말을 한다. 장군이 대령보다 기수 딸리나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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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보충군이란 예비군과 비슷한 개념인데, 독일 국내의 13개 군관구 전체를 통제하는 행정사령부로서, 각 군관구는 각 사단과 직결되어 신병 모집 및 동원병력 보충, 국내에서의 군사훈련 등 군정 업무를 맡았다.
  • [2] 국내에는 흔히 제국 대통령 내지 임시 대통령의 직위에 취임할 계획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독일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베크는 바이마르 헌법상의 제국 대통령(Reichspräsident)이 아니라 제국섭정(Reichsverweser)으로 취임할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7월 20일의 암살을 모의했던 일련의 육군장교들은 바이마르 헌법의 부활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가 다시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제위를 잇는 의회주의적 군주제 국가를 수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계획에 참여한 사민당(SPD)계열의 정치가들과 장교들 간에 의견충돌이 있었다.
  • [3] 검은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은 계획을 제대로 발동시키려면 히틀러와 힘러, 그리고 헤르만 괴링을 한꺼번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말할 것도 없지만. 육군은 발키리 작전으로 장악한다고 치고, 그럼 나머지 무력집단을 신속하게 제압해야 하는데 괴링은 공군 루프트바페를, 힘러는 친위대 슈츠슈타펠을 지휘하고 있어 유사시에 독자적으로 무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해군은 규모 자체가 적으니 문제가 안 되고.
  • [4] Wolfsschanze라고 불렸다. 직역하면 늑대 소굴. 독일 육군의 작전지휘본부.
  • [5] 슈타우펜베르크는 장애가 있어 경계를 덜 받았지만, 손가락이 세 개 밖에 없는 한 손만으로 급히 폭탄을 기폭시키느라 두 개의 폭탄 중 하나만 작동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시한 장치도 로 캡슐을 짓눌러서 약품을 혼합시키는 화학식이라 매우 번거로웠기 때문에(…) 고생이 심했다.
  • [6] 1934년 6월 30일 히틀러가 나치 돌격대(SA;Sturmabteilung) 참모장 에른스트 룀 및 돌격대 내 반히틀러 조직을 반역죄로 몰아 숙청한 사건. 자세한 사항은 에른스트 룀 항목 참조.
  • [7] 정확히는 괴벨스가 한 말을 자서전에 작성한 것이다.
  • [8] 예를 들어 쿠데타 당시 괴벨스는 슈페어와 같이 있었고, 이들의 무장은 그들이 각자 소유하던 권총뿐이었다. 1개 소대도 아니고 1개 분대만이라도 이들을 해하려 시도했다면 이들은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 [9] 계획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았다는 죄.
  • [10] 롬멜의 참모장을 지낸 한스 슈파이델(Hans Speidel) 육군 중장이 파리의 검은 오케스트라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롬멜 본인에게도 검은 오케스트라 소속인 호파커 공군 중령 등이 접촉한 바 있었다. 슈파이델 장군은 나치스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나 발터 모델, 하인츠 구데리안, 알베르트 슈페어 등의 도움으로 군사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지 않았고, 종전 후 서독 연방군 육군 대장 및 NATO 중부 유럽 연합지상군 사령관을 지내면서 롬멜 신화의 정립에 앞장섰다. 슈파이델의 저서를 읽어보면 과도한 롬멜 추켜세우기로 다른 육군 장성들을 열심히 깎아 내린 것이 눈에 띄는데, 이 배경으로 슈파이델이 살기 위해 롬멜의 음모 사실을 밀고했던 죄책감 때문이라는 연구가 있다. 슈파이델 본인은 이미 그들이 먼저 롬멜의 가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수긍한 것 정도라고 술회했지만, 실제로는 초기 심문 단계에서 롬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롬멜 부인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히틀러 암살 계획 연루 자체를 부정하였고 슈파이델을 '배신자'라 칭하며 평생 만나지 않았다.
  • [11] 나치당 창립 멤버 중 하나였다.
  • [12] 당시 독일 경찰은 친위대의 편제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경찰 계급과 아울러 친위대 계급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친위대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 [13] 본회퍼는 카나리스 제독 밑에서 민간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는데, 이는 은밀히 반나치 운동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잘못된 기차에 올라탔다면 복도의 반대 방향으로 뛰어봐야 소용없다"고 말한 사람이기도 하다.
  • [14] 그러나 다행히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아내와 아이들은 전쟁 말기의 혼란, 그리고 아이들을 다른 집안에 양자로 보내려던 계획 덕분에 모두 살아남았다.
  • [15]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Panzer Battles>
  • [16] <독일 국방군> 볼프람 베테
  • [17] 현실적으로 쿠데타에 성공한다 한들 쿠데타 장교들은 한 줌에 불과하고, 이미 1차 대전 때 몰락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체계임이 드러난 프로이센 군국주의 국가를 재건될 것이라 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이상은 그런 것이었다 쳐도 현실적으로는.
  • [18] 사실 톰 크루즈는 사이언톨로지 신봉자이고,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서 이 캐스팅에 좀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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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7-31 02: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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