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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태

last modified: 2015-04-06 16:27:20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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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21사태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서울침입 무장공비 김신조의 모습.
무장공비 31명이 서울에 침입했으나 그중 김신조 단 한사람만이 생포돼 살아남았을뿐 도주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28명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1968년 1월21일자 동아일보)
출처: 뉴스뱅크이미지

내래 청와대를 까부수고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소.[1][2]

Contents

1. 개요
2. 김신조 루트
3. 자하문 초소 전투
4. 결말
5.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
6. 생존자

1. 개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무장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

총 침투한 31명중 사살 29명,[3] 미확인 1명,[4] 투항 1명(김신조 소위)의 전과를 올렸다.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이 사건을 일명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김신조는 이튿날의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묻는 기자에게 "박정희 목을 따고, 수하 간부들을 총살하는 것."[5]이라고 밝혀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원래의 계획은 31명 중 본대는 청와대를 기습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미 대사관 공격 및 요인 암살, 국방부 공격 및 요인암살, 교도소 공격후 죄수 석방, 체포된 간첩 석방후 동반 월북을 하고 삐라를 뿌려서 남한내 반정부 세력의 의거로 꾸밀 예정이었으나[6] 청와대 기습으로 간추린 것이다. 대사관국방부, 교도소 등의 국가 중요시설이 일거에 공격 받는다면 뚜렷한 성과가 없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혼란을 야기할수 있다. 다만, 어느 것 하나 쉬운 작전이 없는데,한마디로 한국판 테트 대공세를 야기하자는 이야기.

2. 김신조 루트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에게서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124 부대원 31명은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 6기지를 차량으로 출발한다. 18일 휴전선을 돌파했다. 19일 꽁꽁 얼어붙어 있던 임진강을 걸어서 횡단, 경기도 고양시 봉산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 후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21일 밤에는 세검정출소 관할 자하문초소까지 이른다.

이때 북한의 암호지령이 내려왔으나 해독하지 못하였다.[7][8] 당시 침투한 병력중 암호를 전담하는 인원이 없었다고 한다.그야말로 병맛의 진수

이 사건으로 인해 약 41년간 이른바 김신조 루트로 불리던 경기도 양주시와 서울 우이동까지 북한산 자락을 잇는 우이령길 6.8Km가 2010년 2월 27일까지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당시 미 2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던 서부 철책선 근무는 허점이 너무나 많았고 게다가 미군과 한국군의 담당지역의 경계선을 따라 침투하여 더욱 손쉽게 돌파 가능했다고 한다.

이 당시 124 부대원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초리골의 야산에서 우연히 나무꾼 우씨 삼형제와 마주쳤는데, 눈 덮인 산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번거롭다[9][10]는 것과 무산계급인데 설마 신고 하겠느냐는 이유로 투표를 통해 그들을 살려주기로 하고 "신고하면 가족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라 덧붙이며 풀어주었다. 그리고 나무꾼 형제는 곧바로 인근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11] 이런 치명적인 실책을 범해서 나무꾼들이 경찰에 신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하문 초소에 도달하기 전까지 아무 검문도 받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김신조 일당은 우씨 삼형제를 "동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걸 들은 나무꾼 형제들은 저것들 공비구만 하면서 기겁했다고.

이 사건에 관해, 행정법학계에서는 행정개입권과 관련한 중요한 판례가 생기게 되는데,

당시 체신공무원(당시 체신부의 공무원)이던 이용선씨의 집에 들어온 이들을 이용선씨가 대적하는 동안 가족이 60~70미터 떨어진 군경진지로 가서 출동을 요청했으나, 군경이 출동하고 안하고는 자신들 재량에 달려있다며, 개입을 거부하고 무려 15분이나 지난뒤에야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용감하게 격투를 벌이던 이씨는 결국 사망하고, 가족들은 당연히 국가손해배상 재판을 걸었는데, 많은이들이 군경의 늦장대응에 의문을 표하는 과정을 거치며 결국 이용선씨의 유족들이 재판에 승리하게되었고, 또한 당시 판결과 함께, '아무리 경찰이 출동하고 마는 일이 재량에 달려 있을지라도, 위급, 긴급한 상황이 발생함에 따라 재량이 0으로 수축되면, 즉시 개입해야한다'라는 원칙이 확정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서울 악산에 소재하고 있는 김신조 루트가 트레킹 코스로 개발되어 북악하늘길의 제2산책로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또한 북한산 우이령길은 북한산둘레길의 한 코스로 개방되어 있는데 완전 개방은 아니다. 이곳을 가려면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탐방 하루 전에 예약을 해야 하며, 탐방할 때 본인 확인이 가능한 신분증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예약해 놓고 본인확인이 안 돼서 퇴짜 맞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또한 하루 입장 가능 인원도 송추 방향에서 5백 명, 우이동에서 5백 명으로 하루 1천 명의 인원 제한을 두고 있다. 관련 사이트. 이곳에서 예약도 가능하다.

3. 자하문 초소 전투


자하문초소에 당도한 124 부대원 31명은 드디어 이곳에서 검문을 받게 된다.[12] 부대원들은 "우리는 CIC 소속 대원이다.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 고 다그쳤지만, 대량의 병력 이동을 보고받지 못했던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지휘하는 경찰 병력이 그들의 진군을 막아섰다. 하지만 때마침 버스 2대가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자 지원 병력으로 오인한 124 부대원들은 경찰 병력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김신조의 회고에 의하면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었다고 오인한 것. 사실은 그냥 시내버스였다.

최규식 총경[13]이 현장에서 전사하고 기타 많은 경찰이 부상 당했으며[14], 버스에 던진 수류탄 때문에 민간인 사상자까지 발생한다.

그 뒤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29명 사살, 1명 투항(김신조 소위), 미확인 1명이 생포되었다. 우리측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최규식 서장을 비롯하여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15]이 교전 중 피격당해 전사했고, 특히 도주과정에서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여러건 발생하기도 했다.(결혼 예정이던 아가씨나 중학교의 수위 등 일반인...) 심지어는 참관겸 작전 지도차 온 주한미군 병사도 사망할 정도였으니.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에 52명이 부상을 당했다.

4. 결말

  • 부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는 북에 두고온 가족이 몰살당한 일 때문에 방황하다가 이후 남한에서 개신교 목사로 살고 있다.[16][17]
  • 마찬가지로 경계의 허점을 노리기 위해 두 개 부대의 담당구역이 겹쳐지는 부분이 서로서로에게 떠넘기는 심리에서 허술할 것이라 판단하고 침투지점으로 선택되었다. 이것 역시 이 사건 이후로 개선된 사항.
  • 4년 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심야 만찬을 베풀며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이 때 김일성이 남긴 말은 이렇다. "청와대 습격은 우리 공화국 내부의 극좌 분자들이 임의로 일으킨 사건이오. 박 대통령을 죽인다고 남조선이 없어지겠소? 나를 죽인다고 우리 공화국이 없어지겠소?없어질거 같은데.(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같은 논리란 말이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뒤 관련자들을 모두 철직(해임)시켰소. 남조선으로 돌아가거든 박 대통령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었다고 꼭 전해주시오."못 믿겠다 가능성은 있는게 당시에는 김정일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북한의 대외 특성이 하나 생겼는데, 자기들이 자랑하고 싶은 테러행위는 자랑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부인하고 사과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꿀꿀이가 하는 짓을 보면 저때만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 처음 이 사건 수사를 맡은 쪽이 육군 방첩대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신조에 대한 공작을 철저히 해서 그가 북한을 비난하는 쪽으로 기자회견을 하도록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 과정 생략하고 기자회견에 내보내서 위에 나온 박정희 죽이러 왔다는 말이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고. 그런 이유로 육영수까지 뭐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이로 인해 육군 방첩대장 윤필용 준장은 20사단장으로 좌천되고 후임 육군 방첩대장에 김재규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육군 방첩대는 후신인 국군보안사령부가 1979년 12.12 사태를 일으키기 전까지 완전 죽어지내야 했고, 상대적으로 중앙정보부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 이 침투사건을 진압한 부대가 당시는 보병사단인 제30기계화보병사단이었는데 이 일로 제1땅굴을 발견한 제25보병사단과 함께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물론 유명한 부대인 이유는 특유의 사단마크가 약 70%를 차지하지만
  • 경찰병력과 전투가 있었던 자하문 초소에는 현재 최규식 총경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한 총격이 벌어졌던 주변 지역에는 '총알소나무'라는, 당시 총격전 사이에서 15개의 탄흔이 남아 그 당시 흔적을 남긴 나무가 남아 있으며 1박 2일에서 소개되기도 하였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꾸 그 탄흔에 손가락을 넣자 수지로 그 구멍을 메워 버렸다(...)
  • 김형욱의 경우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적이 청와대의 세부구조를 알았던 것은 남한내의 간첩의 도움이었다고 술회한다. 정확하게는 청와대 근무하는 직원의 부인이 간첩이었는데 그녀가 에다가 청와대 배치도를 넣어두었다는 것(…). 이것을 자신이 손수 적발하긴 했는데 응? 어떻게? 높으신 분들이 뭐라고 해서 풀어주었고 그래서 김신조 일행이 청와대 구조를 알 수 있었다는 건데, 이 사람 회고록의 신빙성은 말이 많으므로 그냥 이런 의견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자.
  • 당시 김신조 일당이 사용했던 장비들(PPS-43 기관단총, 토카레프 권총, F-1 세열수류탄, RPG-43 대전차수류탄, 절단기, 단검 등)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5.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

위의 결말부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이야기는 나왔지만, 그밖에 이 사건이 후세에 크게 남긴 영향이 몇가지 있다.

  • 주민등록번호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13자리만 알고있어도 어느정도 그사람 행세가 가능한 매우 중요한 개인정보이지만, 간단한 회원가입시에도 심심찮게 요구하고, 이미 전국민이 한번 이상은 털릴 정도로 유출이 되어 말도많고 탈도많은 제도가 탄생한 만악의 근원이다.유용한 점도 있긴하다만 이미 털릴때로 털려서.. 참고로 박정희의 주민등록 뒷번호는 100001 이며 아내인 육영수는 200002이다.(...)
  • 군대를 가는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에게 남긴 것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예비군5분대기조, 그리고 육군3사관학교가 이 사건 때문에 창설되었다는 것. 그리고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도 이에 대비하기 위해 그 후 매년 실시하고 있다. 게다가 당시 복무기간이 축소되던 중에 있었는데 이 일로 현역병들은 육군/해병대는 6개월 해군/공군은 3개월씩 복무기간이 연장되었다.듣기만 해도 치가 떨린다 만악의 근원 그 당시 제대할 날짜만 세고 있던 말년병장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 복무기간뿐 아니라 이 사건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훈련 강도가 세졌고 군기가 대대적으로 확립되었다. 당시 말년병장이었던 분의 회고를 들어보면 제대 날짜 세면서 매일 개울가서 천렵하고 낚시하는데 갑자기 간첩이 넘어왔다고 하더니 삼킬로 짜리 모래주머니를 발에 채우고 매일 뛰게 시켜서 지옥 같았다고 한다. 이 사건 이전에는 지금 군대로는 상상할 수 없는 당나라 군대였다고.
  •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경찰 차원에서 유사시 대간첩작전등에 동원할 병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경찰청이 전투경찰순경을 창설한다. 이 제도를 이용해 육군해군(→해경 전경)의 전력을 대용하는 환복무를 실시하게 되는데…. 지금 현실은 다들 아시다시피 하루하루 시위 진압하는 로봇 기계 부대.
  • 당시 침투할 때 철책의 기둥 바깥면에 있는 쇠망에서 기둥에 가려진 부분을 끊어놓고 들어와 안에서 얼핏 보면 끊어진 구간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철책경비시 계속 망을 흔들어 보면서 진행하는 절차는 이러한 것을 감지하기 위한 것.
  • 이들이 이렇게 깊숙히 침투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마법의 말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국군에서 장교와 부사관이 원리원칙을 어기더라도 병사들이 거기에 거역하지 못하는 문화가 있는 것을 연구하여 국군과 접촉할 때마다 배짱 좋게 "나 간부다."라고 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사실 일반 사병에게는 간부다라고 했고 고위 장교가 물어볼때는 우리는 방첩대 내지는 북파 특수부대라고 했었다. 최규식 총경이 씹는 바람에 막혔던 것이지만[18] 그나마 이런 사건사례들이 많이 전파되면서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비슷한 사례들은 8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된다. 요즘에도 이런게 통한다는게 함정[19]
  • 이 사건의 보복을 위해 창설된 부대가 바로 실미도 부대. 영화 실미도 초반부에 나오는 북한 공비들과의 교전이 이 1.21 사건이다.
  • 박정희 시대를 고발한 이병주의 해 오월에서 이 사건을 아주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한번쯤 읽어봐도 될 작품이고 당시 나올 수 있는 자료를 모두 조사해서 쓴 역작.
  • 80년대 나온 어린이 반공동화에서는 고 최규식 총경이 죽으면서 한국전쟁때 공산당에게 살해된 아버지를 그리는 장면이 나왔는데, 일설에 의하면 최규식 총경의 아버지는 유명한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20]이었다고 한다.
  • 육군소령으로 복무 중이었던 동원 전 국정원장은, 사건이 일어나기 석 달전 집필한 <혁명전쟁과 대남전략>이, 사건 발생 후 이북의 대남전략을 연구하는 육사, 군, 경찰, 중앙정보부 교육기관의 교재로 채택되어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후 율곡사업의 실무진[21]으로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
  • 이 사건 때문에 북대문(숙정문)이 쭉 폐쇄되었다가 2006년 4월 민간에 개방하였다.
  • 우이령 도로가 폐쇄되어 빙 돌아가야한다.[22]

6. 생존자

추정 인원이나 생사 불명 인원에 대해서는 말이 상당히 많았다. 일단 시체의 신원 확인도 김신조의 입회하에서 했지만 머리가 으스러지거나 화염방사기에 구워진 시체가 많아서 식별은 본인도 어려웠다고 한다.

80년대 자료에는 생사불명 1인은 북한에 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실은 32명이었는데 하나는 살고 하나는 북에 올라가서 부상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귀환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개성 CIQ에서 박재경(좌측) 인민무력부 부부장에게 송이버섯 선물을 받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송이버섯 선물을 전달했던 박재경이 1.21 사건 당시 생존해 도주한 공비라는 설이 있다.


내래 덕분에 출세했소 vs 내래 살아서 다시왔소.[23]
2000년 9월 11일, 신라호텔 에메랄드 룸에서 열린 칠보산 송이버섯 선물 전달행사. 가장 좌측은 임동원 당시 대통령 특보, 우측 끝은 박재경 당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박재경은 그 외에도 2000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송이버섯을 전달하러 방문한 김용순 특사의 수행단으로 방문해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가 맞다면 공비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른 박재경의 사실상 자기 과시라는게 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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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말은 기자회견에서 나온건데 이 때의 모습과 체포 당시의 얼굴이 약간 다르다. 기자회견 때 모습이 좀 살이 붙었는데 방첩대원에게 두들겨 맞아서(...) 얼굴이 부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혹은 며칠간 코렁탕을 허겁지겁 먹었거나
  • [2] MBN의 프로그램인 황금알에서의 증언에 따르면 기자회견에 대한 언질조차 주지 않은채 수갑채우고 의자에 앉혀 기자회견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발언이 전국으로 생중계되면서 전국이 기절초풍했고 웬만해선 정치 개입안하던 육영수가 방첩대에 한마디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개망신당한 방첩대는 몰락하고 중앙정보부가 방첩대를 완전히 억누르게 된다.
  • [3] 김춘식이라는 공비 1명도 생포되었으나 치안국으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무장해제 도중 숨겨둔 수류탄으로 자폭하여 사망함. 이 과정에서 우리측 피해는 없었고 사살로 포함함.
  • [4] 2004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신조 목사는 이 한명은 북으로 도주하였으며, 이후 2000년에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땅을 밟았다고 말했다.
  • [5] 그나마 순화, 축약한 거고, 심문에 처음 한 대답이 "내래 박정희 멱 따러 왔소."였다.
  • [6] 김신조는 원래 교도소 공격조였다.
  • [7] TV조선의 방송과 2014년 11월 30일 자 팟캐스트 방송 이이제이 실미도 특집에서 소개된 자료에 의하면 당시 중정 정보당국에 의해 해독된 암호지령의 내용은 '원대 복귀'였다고 한다.괜히 침투했잖아
  • [8] 참고로 김신조의 자서전에도 이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9] 후일 김신조의 인터뷰에 의하면 작전도중 만나는 민간인은 모두 죽이라고 지침을 받았는데 시체를 숨기기 위해 한겨울에 꽁꽁 언 땅을 파기 귀찮아서 그냥 살려줬다고 한다.
  • [10] 훗날 모 종편방송 인터뷰에선 4형제 중 2명은 돌아가시고 나머지 분들과는 아직도 연락하고, 만나기도 한다고 했다. 인터뷰에선 위키와 달리 4형제라고 언급했다.
  • [11] 북한 상부에서는 민간인 만나거든 그냥 쓸어버리라고 지침을 내렸기 때문에 좀 많이 다른 이야기지만, 미국 영화 론 서바이버마이클 샌델의 저서 의란 무엇인가에도 나오는 소재로 이런 상황이 닥쳤을때 적에게 아군의 존재를 누설할게 뻔한 이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가, 냅둬야 하는가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한다는 전제 하에(북한은 제대로 된 생각을 안하는 놈들이니까...) 복잡한 딜레마가 된다. 아군의 입장에서 이들을 살려보내면 더 많은 아군이 희생될테지만 군인도 아닌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절대 옳은 일이 아니며 아군의 대외 이미지 관리 면에서도 이득이 될게 없기 때문.
  • [12] 북한의 암호 지령을 풀지 못한 상태에서 임의로 원래의 계획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 [13] 당시 계급은 총경이고 경무관으로 추서, 창의문 남쪽에 사진과 같이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서 있다.
  • [14] 부상 경찰관 중 정종수 경사는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 창의문 최규식 경무관 동상 왼편에 순직비가 있다. 그런데 정작, 최규식 경무관이 순직하신 곳은 그 곳이 아니다... 당시 소속이었던 종로경찰서 현관에는 흉상 건립.
  • [15] 사후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 [16] 교과서에도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밖에 다니기 어려워서 개명신청을 하여 김재현으로 살고있다.
  • [17] 그리고 술집에서 오줌누던 중 웬 청년한테 뒤통수를 맞았다. 얼굴을 알아본 청년이 "너 때문에 군대에서 개피봤다."라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수도 서울이 털리는 희대의 사건때문에 육해공군의 복무기간이 최대 6개월 이상 연장돼서 당시 청년들의 증오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 맞아도 싸다 김신조는 그냥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한다. 또 민간인까지 살상한 살인마가 버젓이 방송에 나온다며 김현희와 함께 욕하는 사람들도 아직까지 많다.
  • [18] 비슷한 시기를 소재로 한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라는 작품에 보면 북파공작 특수부대를 자처하는 인간들이 재대병들 돈을 뜯고 구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 [19] 농담이 아니라 수하에 불응할 경우 총맞아도 할말없는 gop같은 최전방 지역이 아닌이상 씹는 경우가 있다. 경계병이 수하를 계속 시도할 경우 응하기야 하지만 이후 못알아봤다고 폭갈하는 그런 괴팍한 간부가 지금도 진짜로 있다.
  • [20] 적어도 친척관계인 건 맞는 것 같다.
  • [21] 실무진의 책임자격이었던 고 이재전 장군이 쓴 회고록이 국방일보에 연재되었으니 참고바람
  • [22] 현재는 환경단체의 반발 때문에 도로 통행이 안된다.
  • [23] 위의 사건여파 항목 참조.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평안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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