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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last modified: 2015-04-15 01:42:35 by Contributors

バブル景気 / Japanese asset price bubble

버블을 통하여 "공짜 점심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경제의 대원칙이 재확인되었다. 버블 안에 있을 때는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블이 한번 발생하면 경제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 1993년 일본 경제백서 中[1]

Contents

1. 개요
2. 1980년대 세계 경제를 장악한 일본
3. 원인 및 배경
3.1. 배경
3.2. 주식거품
3.3. 부동산거품
4. 돈지랄
4.1. 국내에서의 돈지랄
4.2. 해외에서의 돈지랄
5. 거품붕괴
6. 각종 부정부패 사건
6.1. 오노우에 누이 사건
6.2. 리쿠르트 코스모스 사건
6.3. 허영중(이토만) 사건
7. 이후
8. 관련 항목

1. 개요

Nippon BBC documentary 1980s Risen Sun 리센 슌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코카콜라 광고[2]


거품경제 말기인 1990년 도쿄시내를 촬영한 영상


1980년대의 일본 대중가요 동영상 모음. 시간 없는 위키러는 28분부터 감상해보자. 여자 김흥국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일본의 비정상적인 자산가치 상승 현상을 통칭하는 말. 거품경제 붐에 의해 주식, 부동산 등의 자산 가치가 실질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부풀어 올랐다. 잃어버린 10년을 넘어서 잃어버린 20년이 확정됐고,[3] 도호쿠 대지진고령화로 인해 잃어버린 30년으로 치닫고 있다. 몇십년을 잃어버리고도 세계경제규모 3위[4]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 학계의 중론이 도출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론이나 일부 구경제학계에서는 이제 일본의 정체를 버블의 영향을 넘어 더욱 구조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바로 노동가능 인구비율이 최고일때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가치가 폭등했다가 노동가능 인구가 줄어들면서 급격하게 꺼지고, 덩달아 일하는 사람도 적어지니 저성장 크리까지 와서 나라 경제가 장기적으로 침체에 빠지는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 다만 일본이 한국, 미국 등에 비해 훨씬 철저하게 박살난 것은, 고령화가 본격화하기도 전에[5] 정체된 것은 버블 탓이 맞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나 일어난 특이한 현상으로 경제학자들이 유연하지 못한 일본관료들의 병크를 비웃었지만,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많은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일본만 비웃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인구, 경제 구조상으로 일본을 닮아있는 한국에게도 많은 시사점를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만 한국의 경우 거주용 부동산 등 일부, 그것도 수도권을 제외하면 일본처럼 국가 전체에 버블이 형성되지는 않았다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좁디좁은 수도권에 한국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살고 있다는 것과 부동산 한파와 그로 인해 전세값에 거품이 무진장 끼고 있는 상황, 가계부채 문제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긴 하다.

2. 1980년대 세계 경제를 장악한 일본

일본경제.JPG
[JPG image (100.52 KB)]


이 당시(1988년) 주식 시가 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순위. 무려 2/3(33개)가 일본인데 그 중에서도 상당수가 은행인것에 주목 할것. 20위까지 일본 기업이 아닌 기업이 4개 밖에 없다(...) 7위가 도쿄전력인건 신경쓰지 말자

이 당시 농담반진담반 유명했던 말이 "도쿄땅을 전부 팔면, 미국땅을 전부 살 수 있다."

3. 원인 및 배경

3.1. 배경

1960~1970년대 고속 성장을 계속하던 일본은 오일쇼크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5%대의 성장률을 기록해 소련을 경제적으로 바짝 따라잡았고, 미국도 조만간 추월할 것이라는 예상이 튀어나오던 시절이었다.[6] 미국도 전후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율을 기록했지만 당시 일본의 경제성장은 무서운 속도였기 때문. 거기다 일본은 경제성장을 유지하기위해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며 엔 저평가로 무역흑자를 이어나갔는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유지했고, 결국 당시 -미국달러 환율은 '250엔 = 1달러' 수준으로 폭락해버렸다.

상황이 이 모양이 돼버리니 미국 수출품은 터무니없이 비싸지고, 수출로 먹고사는 미국기업들은 뿌리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국의 중장비, 하이테크, 농업 관련 기업들이 들고 일어나서 독일이나 일본처럼 수입 물량의 제재를 의회에 요구하고, 실제로 의회에서 법안이 만들어지고 통과 직전까지 간다.

그러자 의회가 나서서 반 자유무역 법안을 통과시키면 무역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진 백악관은 이를 핑계로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휘두르며 일본 서독 등 동맹국들을 상대로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냈고 그 결과 달러가 저평가되었다.

하지만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수출은 큰 타격을 입고 이후의 일련의 일본 재정과 통화 정책들이 최악의 버블을 만드는 퍼펙트 스톰이 된다. 정확히는 플라자 합의 자체로 일본 수출이 어마어마하게 큰 타격을 입은 건 아니다. 당시 미국 상품의 경쟁력이 워낙 불리한 상황이라 플라자 합의 이후에도 일본 수출은 계속 잘 되었지만, 플라자 합의로 엔화가치가 상승하면서 일본의 달러표시 GDP가 급증하고 그에 따라 구매력도 급격히 좋아졌다는 게 문제. 엔화 구매력이 높아지니 일본인들은 외국 여행도 엄청 다니고, 외국 나가서 외국 부동산도 싹쓸이하다시피 해서 하와이를 다 사들였네, 브라질에서 땅을 엄청나게 사들이네 하는 등 세계 부동산 가격상승(?)을 주도하였고, 외국에서만 그 짓을 한 게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부동산을 사들이기 시작해 부동산 거품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부동산 대출 채권이 일종의 악성 채권이 되고, 돈 빌려준 은행들이 망할 상황이 되니 기업들에게 빌려준 돈 회수 들어가고,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 돈줄이 마르는 형국이 되면서 연쇄적으로 불황으로 빠져든 것.

3.2. 주식거품

사실 이 플라자 합의로 타격을 받은 건 일본만이 아니라 서독 등 유럽 국가들도 해당됐다. 즉 수출 좋아하던 국가는 한국 등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던 개도국을 빼면 거의 다 해당되었던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들과 달리 일본만 유난히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문제로 인해 발생한 수출 시장의 약화를 내부 거품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재테크를 벌이고 있었는데, 1984년에 일본 대장성은 "투금계정"이라는 불법계정을 합법화함으로써 일본 기업들이 주식이나 채권 등에 돈을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일본 기업들은 자본이득세를 한 푼도 안 내고 일본 증권사들의 투금계정에 돈을 넣어두고 재테크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인해 엔-달러 환율이 149엔/1달러로 폭락(엔화 강세)하면서 일본 경제성장률이 -0.5%로 떨어지자, 기업들은 정부에 아우성쳤고, 이로 인해 정부에선 본은행을 윽박질러 기준금리를 5.00%에서 2.50%까지 떨어뜨리게 된다. 이는 은행들의 대출폭풍을 가져와서 엄청난 양의 돈들이 각종 자산들에 쏟아지기 시작했다.[7] 이는 일본 기업들의 재테크 수익을 높여주었고, 다시 기업들의 주가가 오르면서 더 큰 재테크 수익을 갖다주는 순환구조가 형성되었다. 엄청난 악순환이었던 셈. 1985년 투금계정의 잔액은 9조엔이었으며, 1989년에는 40조 엔까지 팽창했다.

당시 일본사람들은 기업들의 현금흐름은 신경쓰지 않고, 재테크로 불어나는 자산만 보고 달려들었다. 이것도 일본 기업들의 수준을 부실하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언제든지 흑자도산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주식의 밸류에이션 평가지표인 PER가 60을 넘었다.

일본 증시가 이렇게 폭등하자, 일본 정부에서는 NTT에 대한 민영화작업을 시작했는데, 공모가와 공모주식 수를 발표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공모청약에 몰려들었으며, 상장 시초가가 120만엔이었다. 그럼에도 단 이틀만에 25%가 추가상승했고, 2주만에 정확히 두배인 240만엔까지 치솟았으며, 1989년 연말에는 400만엔 부근까지 치솟았다. 이쯤 되면 정말 개똥 막장이다

당시엔 수백만엔대를 호가하는 NTT보다 주가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주식이 폭등하기도 했었고, 언젠가는 뜰 것이라는 예상에 주가가 폭등하기도 하는 등 막장 증시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3.3. 부동산거품

본 항목은 위에서 언급한 KBS스페셜 '욕망과 혼돈의 도쿄, 1991년'의 나레이션을 많이 차용했다.

성층권을 넘어 중간권을 돌파해 우주 한복판을 날고 있었던 주식거품은 부동산버블로 합리화되었다. 일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토지가격이 50배 정도 뛰어오르는 동안 소비자물가지수가 단 두배 오르는 기현상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일본 국민들에게 토지불패신화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오르기는 해도 절대 떨어지지는 않는다. 당시 일본 부동산버블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어딘가에서 들은 말 같다면 기분 탓이다.

기준금리가 2.5%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은행들은 대출경쟁을 벌였다. A은행에서 8% 금리를 제시하면 옆 B은행에 가서 7.5% 대출을 제안받고, 다시 그 옆 C은행에서 7% 대출을 받아가며 토지 투기가 벌어졌다. 당시 토지가격의 200%까지 담보가 인정되었으며, 지속적으로 지가는 올라가기만 했다. 부동산 버블이라고 뉴스가 연일 나오는 현재 한국의 수도권 LTV는 50% 수준인 걸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어이 없는 담보율인지 계산이 나온다.

처음에 도쿄 중심가(미나토 구)에서부터 시작했던 부동산 광풍은 도쿄 전역을 넘어서 요코하마, 오사카, 나고야, 교토 등 일본 주요도시들로 확산되었다.[8] 1988년에 도쿄 지가는 1987년대비 3배가 폭등하기도 하는 등 이쪽도 엄청난 거품이 끼어 있었다. 역시 주식거품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니 더 많은 대출이 가능해져 계속 올라가는 악순환이었다. 당시엔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고[9] 이 당시 도쿄 황거 지가가 캘리포니아주 전체 지가와 맞먹었다. 물론 당시 미국은 1987년 검은 월요일 하루동안만 주가 22% 폭락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아무튼 이는 당시 내집 마련을 꿈꾸던(물론 그 전에 대도시 지역에 집을 마련한 사람들은 꿀을 연신 빨아댔었다.) 일본 월급쟁이들에게 상당히 재앙이라서 100년 만기대출같은 황당한 상품이 등장하기도 했고, 좀 더 싼곳에다가 집을 사기위한 직장인들로 인해서 지바현이나 사이타마현의 인구가 급증하기도 했다.[10] 당연히 이들 난개발 지역들도 땅값이 폭등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더 심각한 것은 버블이 꺼진 후에도 사이타마나 지바의 땅값은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미 도쿄에서 한번 유출되기 시작한 인구가 도쿄로 복귀하지 않으면서 사이타마나 지바의 수요층으로 편입되어버린 것이다!!!(...) 1981년 대비 1991년(버블 붕괴 시작할 때)의 사이타마나 지바 땅값은 3배~4배 정도 상승했는데, 2015년 현재까지도 그 수준에서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버블시기 도쿄 지가는 1981년 대비 정점(1990년)에서 전체적으로 5배 이상 폭등했지만 그 이상 폭등한 지역을 보면 도쿄 메트로 긴자선 연선을 타고 땅값이 폭등했다!!! 특히 아오야마나 신바시, 아사쿠사같은 동네는 무려 10배 이상 폭등, 아오야마는 15배나 폭등해서 신기록을 갈아치웠던 곳이다!

또한 이 시기에 민영화된 국철은 부채 청산을 위해 시오도메 화물역 부지(현재의 시오도메 시오사이트 부지)를 매각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지나치게 높은 토지가격으로 인해 과열 경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매각 보류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화물역 기능이 철거된지 10여년이 지난 97년에 들어서야 겨우 개발될 수 있었다.

2000년대 도쿄, 오사카 등 일본 대도시들의 주요 거점 스카이라인은 거의 이때 결정되었다.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 롯폰기, 에노, 오다이바(이상 도쿄), 우메다, 난바, 텐노지, 바시(이상 오사카), 카교(교토), 나토미라이(요코하마) 등 1990년대 이후에 완성을 본 일본 주요 대도시 상업지구들은 신주쿠, 시부야, 우메다, 난바 정도 빼면 원래 1981년까지만 해도 한숨 나오는 빈민가내지는 놀고 있는 공지였다. 지가 폭등으로 이 동네에 주거지구를 남겨두는 것보다 상업지구로 철저하게 재개발하는 것이 몇 배나 남는 장사가 되면서 부동산 개발 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했고, 이 부동산 회사들이 자체적인 도시계획을 짜고 부지들을 지방자치단체나 소유주로부터 싸그리 사들인 뒤 1986년부터 전부 오피스지구로 재개발하게 된 것. 이에 따라 한국의 건설사들이 자체적인 도시개발 능력이 딸리는 것에 비해 버블 붕괴로부터 살아남은 일본 건설사들은 자체적인 도시개발 및 건축기술을 축적하여 1990년대 이후에도 전 세계적으로 신도시 개발 수주를 따내고 있다. 파산해버린 부동산 업계들과 건설사들의 분양 물량마저 살아남은 회사들이 인수하여 완공하게 된 것이 2000년대 이후의 일본의 스카이라인.

4.1. 국내에서의 돈지랄

돈지랄이 풍년인 시대였다. 외제차 수입이 급증해 벤츠 주력모델이던 W201[11]은 너무 많이 보급돼 고(故)벤츠로 불리웠으며 BMW 3시리즈는 롯본기 코롤라[12]란 별명이 붙었다. 우리로 치면 압구정 아반떼 정도의 뉘앙스. 호기로 술집 단골 아가씨에게 그 자리에서 가게 하나를 내준다든가 등등.

프리터도 이 때 유행하고 있었다. 언제든 취업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새로운 낭만적인 라이프스타일 쯤으로 취급받았다. 애초에 면접만 받으러 가도, 교통비로 쓰라며 3만엔에서 5만엔까지 꽂아주는 시대였으니 면접만 보러다니는 사람들까지 있었을 정도.

주가와 부동산이 연일 뛰어오르자 국민들도 풍족하여 만화애니메이션도 뛰어난 작품이 꽤 많이 나왔다. 그래서 80년대 애니메이션 중엔 이상하게 작화 퀄리티는 90년대 것보다 쓸데없이 돈지랄스럽게 좋은게 좀 많다. 특히 대표적으로 은하영웅전설 애니메이션판은 전곡 OST를 오케스트라로 때려박는 흠좀무한 물건을 만들어냈다.(...)

단, 이것은 버블 경제 시기에 도쿠마 쇼텐이 동독 레코드 회사 판권을 싸그리 사놨었는데 이걸 공짜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건 애니메이션 제작자 측에서 보면 돈지랄이라기보단 오히려 제작비 절감. 관련 칼럼 날조된 신화 – 버블경제의 아니메 제작 사정 [13]

코미케오테 여고생이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기도 했다고.

거품경제 시절에 대한 2ch의 회상.근데 사이트가 사이트인지라 신뢰성은 보장할 수 없다

4.2. 해외에서의 돈지랄

일본의 부동산 광풍은 해외로 뻗어나가 미국의 록펠러 센터(미쓰비시가 매입),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일본인과 다른 미국인 투자자가 서로 파트너쉽을 체결해 매입)이나 콜럼비아 영화사(소니가 매입) 등을 싹쓸이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되려 미국에서 이거 우리 수출 살리려다 역관광당하는거 아니야?라는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머 결과적으로 역관광은 끝이 났지만.
조금 이르긴 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약진에 대한 미국의 공포를 반영한 영화가 바로 블레이드 러너(1982년)다. 거리 음식으로 일본음식(...)이 팔리며 가게 주인도 일본인이고, 전광판 광고로 기모노 입은 일본인이 나온다. 또한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도 미래에 기업은 일본 기업 외에는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시기 헐리우드 영화판은 은근히 반일 요소가 들어가고 일본인을 탐욕스러운 자본가로 묘사하는 영화 대사 및 캐릭터 등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게 로보캅3나 다이하드1. 심지어는 이 당시 일본 자본의 해외 진출을 두고 '일본이 제 2의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는 표현까지 나왔을 지경. 공습 이후 일본이 작살난 것 또한 같긴 하다 악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전부터 꾸준히 행해져 왔던 일본의 문화 홍보가 이와 맞물려서 영화 외에도 일본인과 일본 문화가 크든 작든 등장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가와 부동산이 뛰어오르면서 이를 담보로 한 대출이 급속도로 많아지면서 시중에 풀리는 돈이 급증하자, 넘쳐나는 돈을 써보기 위해 일본인들은 세계 명화(名畵)들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고흐해바라기를 3629만 달러에 낙찰해가는 등, 피카소르누아르를 비롯하여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오는 거의 모든 미술품들을 일본인들이 싹쓸이해갔다.

예술품은 경매가가 정해지면 그 경매가가 다음 경매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계속 거래가가 치솟을 수 있으며[14]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1988년 초강대국소련을 제치고 미국 다음으로 가는 세계 2위 경제대국 타이틀을 달성하였다.[15]

다만 이 해외투자가 완전히 헛짓은 아니었는데, 막대한 해외투자 덕분에 일본은 지속적으로 상당한 투자 수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국내의 버블에 미쳐 돌아가는 어리석은 짓 대신 해외 투자에만 전념했더라면 현재 같은 꼴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문에 상당한 타격을 입긴 했으나, 버블 붕괴 때와 같은 피해를 입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5. 거품붕괴


그러나 1990년대 새해 첫날부터 주식에서 거품경제 붕괴의 전형적인 케이스를 탄다. 연말에는 연초 최고치의 절반수준으로 급감, 그리고 90년대 후반에 IT버블로 잠깐동안 주가가 상승하나 싶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IT거품이 꺼지면서 그 절반으로 급하락. 국민들은 졸지에 알거지가 되고 물가 역시 계속해서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다. 정상적인 경제에서는 이러한 디플레이션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물론 저출산 고령화를 언급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일본이 본격적으로 고령화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즉 심각한 디플레이션은 빼도박도 못하는 일본 거품 붕괴의 여파 때문인 것이 맞다.

이 시기 일본에 대해서는 '버블로 고! 타임머신은 드럼 방식'이라는 바바 야스오 감독의 2007년 영화로 엿볼 수 있다.

6. 각종 부정부패 사건

6.1. 오노우에 누이 사건


오노우에 누이(尾上縫)[16]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를 시작으로 레스토랑 여사장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산업은행으로부터 10억엔 어치의 채권을 구매한 것을 계기로 증권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이후,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레스토랑 가치의 1,500배에 달하는 3조 에 가까운 돈을 빌려 주식을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금융계의 큰손이 되었고, 그녀의 레스토랑에는 수 많은 금융계인사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저택 앞에는 오후마다 금융계인사들이 서류가방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 다음날 새벽 2시~3시가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17] 사실, 이 사람들이 그녀의 저택에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두꺼비에게 매주 지내는 의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이 두꺼비 의식이 왜 중요한고 하니, 이 두꺼비 의식을 통해서 어떤 주식을 사고 팔지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당한 액수가 말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누이는 두꺼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원에 세워진 부처상 앞에서 불경을 왼다. 누이 부인이 두꺼비 앞에 앉아서 신내림을 받게 되면, 그 순간 어떤 주식을 사고 팔지 신탁을 알려주는 의식이 진행된다. 이런 방식으로 사고 팔린 주식이 전성기인 1990년에는 무려 100억 달러에 달했다. 거품붕괴 이후, 오노우에 누이는 파산했으며, 가짜 예금증서로 첫 대출을 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1991년 8월에 경찰에 체포됐으며, 그녀는 은행의 후원자들과 더불어 여러 해의 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녀의 파산으로 대출자들은 2700억 엔의 돈을 잃었고, 일본산업은행장은 사퇴했으며, 은행 2곳이 도산했다.

6.2. 리쿠르트 코스모스 사건

1988년 6월 가와사키의 하급 공무원 한 명이 내부정보를 활용해 리쿠르트 코스모스 주식을 매입하여 이익을 챙겼다고 시인하고 사임하였다. 당시 리쿠르트 회장이었던 에조에 히로마사가 자사 관련 입법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정치인, 공무원, 관료,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자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선물했던 것.[18] 이 사건으로 당시 법무부 장관은 임명된 지 나흘 만에 사임했으며, 대장성 장관도 물러났다. 거기다 타케시타 노보루 당시 일본총리도 리쿠르트 주식으로 1억 5000만엔의 부당이익을 챙긴 것이 몇달 뒤 드러났다.[19] 이 사건으로 타케시다 노보루 총리는 사퇴했고, 후임 우노 소스케도 불륜 혐의가 드러나며 자민당의 지지율이 급감, 소비세 신설문제와 함께 엮여 1989년 7월 23일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처참한 성적을 받게 된다.[20] 오죽하면 다음 해 치러질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중심의 야당연합이 압승하여 55년 체제가 끝장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면서 55년 체제 붕괴는 몇년 더 늦춰졌지만...

6.3. 허영중(이토만) 사건

허영중 참조.

7.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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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2008년)실질 GDP 성장률

(1985년~2013년)일본 부부채 증가율

아직도 거품경제 침체의 늪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1990년부터 2000년까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를 통해 한국 경제는 일본 경제와의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1990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일본이 3만 달러가 넘던 시절 한국은 5000달러 중반 대 정도 수준이었다. 2014년 한국의 1인당 GDP가 약 28,700달러로 추산되는데 일본은 37500달러 수준이며, 물가를 고려해보면 사실상 제자리 걸음이다. 거기에 PPP로 평가하면 양국 소득격차는 더 줄어든다.(ppp기준만 따지자면 소국을 제외하면 미국,독일,영국,프랑스,일본,이탈리아,한국 순이다 특히 이탈리아와 비교해보자면 200달러 정도밖에 차이안난다 아직 일본이나 영국,프랑스와는 3000달러 정도 차이가 난다 연봉 400만원 차이정도다 다만 최저임금은 아직도 두배차이긴 하다)

취업시장 역시 버블 붕괴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그래도 베이비붐(1971~1974년생) 세대가 취업을 준비할 때라 더 많은 일자리를 필요로 했는데 일자리가 왕창 줄었으니 스펙이 아무리 좋아봤자 취업문은 바늘구멍이었다.[21] 이 시기가 취업빙하기라 불렸으니 더 이상 설명이 必要韓紙? 이것이 일본 사회의 출산율 급감의 한 원인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다만 일본의 대졸자 취업구조는 우리와 많이 달라서, 취업난의 개념도 좀 다르다. 일본은 대학 4학년 1학기가 시작하는 4월부터 공식적인 리크루팅이 시작되어(대기업의 경우는 설명회 등의 비공식적인 리크루팅을 그해 1월부터 시작한다.), 이르면 골든위크 전, 늦어도 졸업 전에 입사가 확정되는 시스템이다.물론 취활(就活-취직활동)은 3학년 1학기부터 시작한다. 3학년 2학기가 되면 취직 세미나 등에 참석하고, 빠른 경우 11월쯤부터 입사면접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정년이 보장되며, 기업도 30년은 쓸 의도로 뽑기때문에, 일단 입사하면 이직이나 경력자 전직 등의 형태로 회사를 옮기는 것이 쉽지않다. 간단히 말해 졸업식 전까지 결정된 회사가 이후 인생행로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졸업식까지 취직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이런 경우 정상적인 취업은 사실상 불가능.

한국처럼 휴학을 반복한다거나, 졸업을 미룬다거나, 졸업하고도 계속 도서관 다니며 취업준비하는 경우는 없다...기보다 불가능하다. 아주 작은 중소기업도 졸업 =신입사원이라는 공식이 박혀있다.[22] 따라서 졸업예정인 4학년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단 몇개월에 불과한 리쿠르트 시즌에 전인생이 걸린거나 마찬가지. 여기서 밀리거나 탈락하면 패자부활의 기회따위는 없다.[23]

그러다보니 누구나 채용오퍼를 서너개씩 받아서 느긋하게 골라가며 졸업준비하던 거품경제 시기와 비교해서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객관적인 수치로는 일본의 고용시장은 다른 OECD국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안정적이다. 특히 청년실업율은 일부 유럽국가들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환상적으로 낮은 수준. 결국 눈높이 때문인 거 맞다.[24]

실제로 2011년 기준 일본의 대학 졸업예정자의 취업확정율은 90%를 넘고, 잃어버린 20년 기간 중에도 90% 선이 깨진 것은 미국 금융위기가 폭발한 직후인 2009년 정도였다.

일본으로 넘어갈 듯 하던 세계경제의 패권이 다시 미국에 돌아오게 되자 미국에서도 엄청난 거품경제가 발생했는데, 빌 클린턴 시대의 IT버블이 그것. 다만 일본 거품경제 처럼 장기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IT버블 붕괴 이후 투기자본들이 대거 부동산으로 몰려들어가면서 부동산 거품이 발생했고, 정부에서 이를 방관하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며 일본 못지 않은 헬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이 사건으로 미국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아 국방비까지 크게 축소해야 했으며[25] 유럽도 남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거품경제 붕괴의 후유증을 톡톡히 겪으며[26] 아예 이웃마을이 헬게이트가 되는데도 불구경만 할 정도의 수준으로 박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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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KBS스페셜 '욕망과 혼돈의 도쿄, 1991년'의 마지막 나레이션. 일본 거품경제에 대해 아주 잘 그린 다큐이다.
  • [2] 참고로 CF속 미소짓는 여주인공은 마츠모토 다카미(松本 孝美, 1965년 생). 연인으로 나온 남자는 일본계 미국인인 켄 브레니스(ケン・ブレニス).
  • [3] 2000년대 중반부에 잠깐 활황세가 있었으나 모두 단기간에 그쳤고 장기적으로 볼때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 통로에 접어들었다는 건 대부분 동의한다.
  • [4] 위상이 추락한 게 이 정도라 어이없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품경제 당시의 일본은 미국도 따라잡겠다고 큰소리치던 시절이었다. 최근의 마이너스 성장률이나 빚쟁이라며 까이는 일본 경제의 모습은 30여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며, 현재 일본 경제의 위상은 많이 추락한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이 빚더미에 취해서 그거 들고 몇십년 허송세월하는 동안 다른 나라들이 열심히 따라잡고있는 형국.
  • [5] 일본의 고령화가 현재 25%나 되기 때문에 이전에도 높았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원래 낮았다가 저출산 및 평균 수명 상승이 겹쳐 고령화의 정도가 엄청나게 높아진 국가다. 1990년대 초. 버블이 무너질 때만 해도 현재의 한국과 비슷한 12%대에 불과했다. 다만 거품경제 붕괴 직전 당시에도 일본의 출산율이 1.5명대로 상당히 낮은 편이기는 했었다. 물론 버블붕괴 수습이 재빠르게 되지 않으면서 2000년대 중반까지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추세였고 그 여파로 고령화가 더욱 빠르게 가속화된 건 사실이다. 지금은 2~30년 이내로 일본의 인구 1억명 선이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 [6] 최고로 따라잡을 당시 미국 GDP대비 한 70% 정도 따라잡았다. 그래도 꽤 차이가 나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구차이를 생각해보자. 미국의 50%가 채안될때 중국이 G2대접 받기 시작했던 걸 생각하면..
  • [7] 한편 은행의 고위간부와 기업가, 그리고 이를 감시해야할 관료들이 서로 인맥으로 묶여있는 일본의 특성 때문에 당시 일본의 은행들은 무분별하게 대출을 해주곤 했다.
  • [8] 단, 농촌지역 제외. 솔직히 후쿠오카까지만 가도 당시 소득 대비해 큰 거품이 끼었다고 보기 어렵게 된다.
  • [9] 당시 토지 가격을 보자면, 미나토 구는 평당 1900만엔, 스기나미 구는 350만엔을 기록했다. 오사카는 평당 200만엔, 나고야는 85만엔, 후쿠오카는 45만엔까지 치솟았다. 긴자는 평당 1억엔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사실 2015년에 와서는 별로 비싸다는 생각이 안 들게 된다. 런던의 벨그라비아, 나이츠브리지만 해도 평당 최소 2500만엔은 하기 때문에... 단 물가상승률을 무시하지 말자. 우리는 25~30년 전 가격을 논하고 있다.
  • [10] 하지만 버블 붕괴후엔 상황이 반전되어서 상속을 받았다가 거액의 세금을 무는 바람에(이 경우에는 버블 시기에 재산신고해서 서류상 재산은 빠방했는데 막상 상속받을 시기가 되자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애물단지가 되어버리고, 설사 부동산이 팔리더라도 엄청나게 손해를 보기 때문에 세금감당도 못할 지경이 되면서 결국 파산하게 되는 것) 파산하는 일이 잦아서서 상속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웃지못할 일도 많았다고 한다.
  • [11] 현재 팔리는 메르세데스 벤츠 C클래스의 전신이다! 당시 상대는 BMW의 3시리즈.
  • [12] 토요타의 준중형 세단
  • [13] 본 문서의 내용에서 보듯이 버블 머니의 쏠림은 어디까지나 주식과 부동산 같은 투기성 자산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 혜택은 가진 자에게 쏠렸기에 역설적으로 빈부격차가 어느 때보다 큰 시기였기도.
  • [14] 물론 거품 꺼진 뒤에는 예술품 가격도 폭락했다.
  • [15] 물론 당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유가하락, 체르노빌 사건 등의 영향으로 경제가 침체되었을 때긴 했다.
  • [16] 이명으로는 오사카의 흑녀, 거품 부인(Bubble lady)
  • [17] 그녀의 저택에 들어간 인물들 중에는 일본산업은행 총재와 같은 거물도 있었으며, 이외에도 JP모건 일본 지사, 야마이치 증권 등과 같이 내로라하는 증권사에서도 직원을 파견했다.
  • [18] 당시 주식을 받았던 사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총리, NTT 회장,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회장 등 약 50명이었다.
  • [19] 당시 총리를 대신해서 현금을 받은 비서는 자살했다.
  • [20] 그 이전에는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자민당 참패! 타이틀이 뜨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차에 개선의석의 1/3(126석/ 총의석 252석)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총의석에서도 과반에 18석씩 미달하는 상황이 되니 자민당 입장에선 이보다 처참할 수 없는 선거결과였던 것.
  • [21] 그 시기에 한 명문대생이 취직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서 전철역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나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린 적도 있다.
  • [22] 이를 일본에서는 신졸新卒이라 부른다
  • [23] 물론 그 대신에 일본은 사회 전반적으로 다른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에 한국보다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긴 하다. 졸업 이후 뭔가 예술을 하고 싶다거나 사회운동을 하고 싶어서 취직을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나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식으로 취업한 회사는 일반적인 이미지의 회사보다는 조금 크리에이티브한 일자리, 혹은 그만큼 이직이 잦은 일자리들이다. 소위 말하는 '리크루트 수트' 입고 돌아다니는 회사원의 인생과는 많이 다른 것.
  • [24] 고용시장을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들만 보더라도 고용률이 70%를 넘으며(평균 65% 수준. 그 이하도 수두룩하다) 비정규직 비중도 평균 수준(근데 이건 비정규직의 정의가 기관마다 학자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청년 고용률도 정확히 평균.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낫다. 다만 가계 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는데 이는 가구구조의 변화, 고령화가 제일 큰 원인이지 노동시장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OECD/중위 가처분 소득 참고. 물론 국가 경제의 문제라고 본다면 맞지만.
  • [25] 이 때문에 투자 대비 수익이 안 나오는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손 떼고, 중국 견제에 전념하고 있다. 아니, 그 이상 할 여력 자체가 없다.
  • [26] 물론 아이슬란드처럼 재빨리 극복한 나라도 있긴하지만 규모가 규모인지라...
  • [27] 이 때를 컨셉으로 잡은(...) 시리즈
  • [28] 이 때가 배경인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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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5 01: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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