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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서울 올림픽

last modified: 2015-03-27 14:09:27 by Contributors

역대 하계올림픽
23회 24회 25회
1984 LA 올림픽 1988 서울 올림픽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삼태극이라고 불리는 휘장이며 이 엠블럼은 KBS 신관 정면에도 붙어있다.#올림픽 당시 국제 방송 센터로 사용되었기 때문. 휘장 도안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前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인 양승춘이 맡았다.

세계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올림픽 구호(캐치프레이즈)로 많이 쓰였다. 실제 개회식 당시 IOC 위원장이었던 사마란치가 축사 말미에 저 말을 한국어 그대로 외치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
Seoul Olympic Games

목차

1. 개요
2.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부터 개최까지
2.1. 유치과정
2.2. 정치적 혼란과 올림픽 개최
2.3. 공산주의권 참가 문제
3. 개막식
4. 자원봉사
5. 경기
5.1. 정식 종목 및 경기장
5.2. 시범 종목 및 경기장
5.3. 특징 및 메달리스트들에 대한 일화
6. 의의
6.1. 동서화합의 차원 및 동구권 붕괴
6.2. 독재정권 종식
6.3. 한국 경제발전 신화의 정점
6.4. 국가적 차원의 올림픽 유치 운동의 시작
6.5. 한국 스포츠 시설 건설
7. 가려진 문제점
7.1. 강제 이주 및 보여주기
7.2. 편파 판정
7.3. 약물 복용
7.4. 거품경제
8. 이모저모
9. 참가국 및 입장 순서


1. 개요



전 세계에 대한민국이 일으킨 불굴의 신화를 입증하고 이후 냉전 종식의 밑거름이 된 역사적인 올림픽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대한민국서울특별시 일원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 정식 명칭은 제24회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 마스코트는 호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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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105.48 KB)]

당시 서울특별시청 앞 광장(정확히는 프라자 호텔쪽)에 있던 화단 맨 위와 전광판에 나온 녀석이 호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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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93.03 KB)]

당시 서울특별시청은 이렇게 앞부분에 올림픽 기념 장식패널이 붙었었다. 전광판 날짜로 봐서 개최 10일 째인 9월 26일 찍은 사진인 걸로 추정된다.

대회 마스코트인 호돌이. 로마자로 Hodori로 표기된다. 모티브는 당연히 호랑이. 디자이너 김현의 작품이다.

2.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부터 개최까지

2.1. 유치과정

1979년 4월,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관람하러 온 박정희는 당일 박종규 대한체육회장, 김택수 IOC 의원, 정상천 서울시장과의 저녁식사에서 올림픽 개최를 천명하게 된다. 최초 구상은 박종규 당시 대한체육회장이었다고 한다. 박종규는 전직 대통령 경호실장으로서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였고, 대한체육회장 겸 사격연맹회장으로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는 듯 체육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 대회는 우리나라가 최초로 유치한 세계구급 스포츠대회이다. 변변한 경기장도 없던 한국 체육계에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박종규가 이런 활동의 일환으로 박정희를 설득해서 올림픽 유치를 준비하게 된다. 실제로 1970년대 말 추진되었던 충청남도 지역에 신행정수도를 건설하려는 도시계획에 1996년 올림픽 주경기장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미루어 추정해보면 새로 지어질 행정수도로 1988, 1992년 유치전에 참여해서 인지도를 높힌 다음에 1996년 유치에 승부수를 띄우려는 계획이었던거 같다.

그러다 1979년 9월 1일, 정상천 당시 서울시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올림픽 유치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정치적 혼란 속에 올림픽 유치 계획은 완전히 잊혀졌다. 박종규 자신도 정치 규제로 인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올림픽 유치 계획은 표류하게 된다.

정통성이 없었던 제5공화국은 어떻게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스포츠를 장려하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 속에서 올림픽 유치 계획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이 배경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본인 세지마 류조가 있었다. 경쟁도시가 자기 나라 나고야인데, 정작 자신은 서울 유치를 돕겠다고 전두환에게 올림픽 유치를 권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개최 도시가 될 서울특별시가 2조원이 넘는 예산 부담을 이유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이는 1980년 1차 실사단 조사에서 서울시가 전혀 협조를 안 하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거기에 국무총리 남덕우가 재정상의 문제를 들어 반대하고 나서자 "일본은 온 내각이 일치단결하여 나고야를 유치하려한다는데 우린 국무총리부터에 유치 도시가 반대를 하고 있으니 상대가 되겠는가?"라는 반대론도 대두되었다. 정주영이 대선에 나오면서 자신의 홍보 책자에서 회고한 말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당시 유치 후보 도시가 나고야를 빼면 전무했다. 1972 뮌헨 올림픽검은 9월 사건으로 보안비용이 폭증하고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적 경기침체 여파로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이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올림픽 유치에 대한 회의론이 퍼지던 시점이었다. 중앙정부의 지원없이 올림픽을 유치했던 몬트리올 시는 결국 파산하고 만다. 그래서 원래 계획중이던 오스트레일리아시드니, 알제리알제, 그리스아테네가 모두 발을 뺐다. 이런 사정때문에 단독 개최지 선정이라는 모양새 안 나는 결과를 원하지 않던 IOC는 그냥 서울의 계획안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무조건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결심한 정부가 정권의 2인자격인 노태우 정무제2장관을 전면에 내세우고,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뛰어들면서 정부와 현대그룹의 인력을 총동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유치전에 뛰어든다. 사실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 결심을 국내에 보여주기 위한 얼굴마담이고, 실질적인 유치는 정주영과 박종규의 공이다. 하지만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를 전적으로 자신의 공으로 내세우고 정주영을 무시했다. 이게 훗날 정주영이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노태우가 저렇게 나올만 한게 일단 박종규는 1985년에 죽었고, 게다가 죽기 전까지도 공직생활을 못했던 고로......

나고야의 경우 이미 1977년부터 올림픽 유치를 준비했기 때문에 서울로서는 승산이 없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오죽했으면 유치 도시가 어디인가보다는 나고야가 몇 표까지 얻느냐에 관심이 집중될 정도였고, 서울의 경우에는 달랑 3표...만 나올거라는 얘기까지 있었다. 그 3표의 정체는 바로 대한민국, 미국, 대만. 대한민국이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필요없고 미국은 당시 일본의 급성장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서울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대만은 수교국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 대한민국이 가장 큰 수교국이었기에 당연히 서울을 절대적으로 밀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은 당시 아시안 게임 개최 경험마저 없었기 때문에, 먼저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후, 2000년 올림픽을 노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이는 아시안 게임 유치전의 상대국이 하필이면, 북한평양이라 더 신경써야 하는 대목이었다. 이라크바그다드도 함께 참여했는데, 둘다 중도 포기.

하지만 노신영 외무부 장관 등은 대륙간 안배원칙을 고려할 때 12년 만에 아시아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리는걸 탐탁치 않아 할 것이며, 20세기가 지나면 중국 등이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당시 그의 견해는 지금와서 보면 상당한 혜안이라 할 수 있는데,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중국의 베이징은 마지막 4차 투표를 제외하고는 계속 선두를 유지했으니, 만약 1981년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지레 겁먹고 올림픽 유치를 포기했다면 사실상 한국에서의 올림픽 유치는 요원했을 것이다.

한국은 일본과 아시안 게임 빅딜을 제안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시안 게임 빅딜은 86년 아시안 게임 서울 개최를 일본이 보장하고 대신 한국은 88년 올림픽 신청을 포기하는 건데, 일본이 이를 거절한다. 너무 유치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이 때문에 뒷날 일본이 한국의 연막 전술에 당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1986 서울 아시안 게임도 유치하고 88년 올림픽도 유치하게 된 거 보면 일본 안습..

서울은 그러한 초기의 불리함을 적극적인 유치 노력을 통해 극복하여. 방심하고 느긋하게 유치를 준비한 일본 측에 비해 온갖 노력과 성의를 다한 한국 측의 유치 준비에 나고야의 절대우세 분위기는 개최지 결정 당일에는 백중세로 예측될 정도로 상황이 돌변했다. 특히 컨벤션과 프리젠테이션에서 잇따라 우세를 점하면서 상황을 호전시켰다. 일본 측 프리젠테이션 연사는 영어를 못했고, 반대로 한국 측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아울러 양자 대결 구도에서 처음 개최하는 쪽에게 기회를 달라는 호소가 먹혔다.

그 결과 1981년 9월 30일 서독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4차 총회에서 일본나고야를 52 대 27로 꺾고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쎄울!. 당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발음. 참고로 총회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는데, 다만 상세한 득표수를 발표할 때는 프랑스어-영어순이었다.

절대로 서울을 지지하지 않을 나라들, 즉 심사위원 비율은 전체 위원 가운데 약 2할인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중압감과 북한의 각종 음해와 방해공작 속에서 52 대 27이라는 결과는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당시 급성장하는 일본을 경계한 서방 국가들을 비롯해, 일본보다는 한국과 사정이 비슷한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 속에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분석이 있다.

이 때문인지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서울 올림픽 유치 성공 후에도 선진국 및 강대국들 못지 않게 남아아프리카 등의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국내 정세 및 현안이 너무 복잡했던 까닭에 전두환이 일정에 잡힌 제3세계 순방외교를 취소하려고 했으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이 이들 제3세계 국가 덕분에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한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절대 무시할 수 없다고 전두환을 설득해 결국 순방외교를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그 이후 얼마 안있다가 전두환은 예정에도 없던 친북 성향의 국가인 버마로의 순방외교를 청와대 참모진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추진하는 바람에, 북한의 타겟에 잡히게 되어 결국 버마 순방 중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라는 국가 초유의 사태를 겪게 되고, 김재익 등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정부 핵심 관료들을 대거 잃게 된다.

물론 이 보다 전두환이 국내를 비롯해 미국 등의 강대국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잘 다지지 못 해, 안 좋은 국내 여론을 잠식시키고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이를 만회해 보려는 속셈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향상과 더불어 외교노선 다변화에도 도움이 되는 등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한국 대통령이 현지 국가에 공식 방문한 사례는 전두환이 최초였고, 전두환 이후 한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과의 만남은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아프리카 3개국 순방(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이전까지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이 종종 방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뿐, 현지 방문은 없었다. 그리고 올림픽 유치 당시 참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저가로 전세기를 띄워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은 서울 올림픽 당시에 지켜졌다.

무엇보다 일본의 표밭으로 알려졌던 유럽 지역 표심 공략에는 스포츠 용품의 절대 강자인 아디다스의 지원을 받는데 성공했다. 독자적인 스포츠 브랜드가 많지 않다는 점 때문에 일본보다 한국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당시로도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인 미즈노아식스가 있던 일본에 비해 한국은 오로지 국내에서나 유명한 프로스펙스 정도가 있을 뿐이여서 만일 일본으로 올림픽이 넘어가면 휘장사업 등에서 일본업체가 독차지할 것이 분명한 데 비해 한국으로 올림픽이 넘어가면 아디다스가 사업권을 따 내던가, 적어도 경쟁하는 일본업체의 승승장구를 막을 수 있다고 봐서 한국을 밀었다. 이것과 똑 같은 이유로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권 추첨시 유럽세가 카타르를 지지하여 결국 카타르가 유치했다. 국제 대회 개최 노우하우가 거의 없는 나라이면서 오일머니만 많은 나라이다 보니 경기장 건설사업이나 방송 중계 및 IT 관련 사업들을 유럽업체가 수주할 수 있는 나라라고 본 것이다. 당시 경쟁국인 한국,일본,미국 같은 나라에서 유치했다면 거의 대부분 자국업체들이 사업수주를 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나라 올림픽 유치단은 아디다스의 회장으로서 국제 스포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당시에는 나이키의 사세가 미약했다.) 홀스트 다슬러에게 스포츠마케팅 관련 이권을 보장해주고 그가 영향력을 유지하던 많은 IOC 위원들을 한국을 지지하도록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슬러는 1982년 스포츠마케팅 회사인 ISL을 설립한다. 당시 정부의 특사격이던 박종규가 다슬러와 여러차례 만나면서 협상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중동지역의 경우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중동 건설붐으로 80년대 초에는 이미 우리나라 유수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여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현지인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었던데다, 결정적으로 일본이 올림픽 유치 준비를 앞두고서 쿠웨이트의 IOC 진출을 반대하는 삽질을 하는 바람에 쿠웨이트가 한국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면서 같은 문화권으로서 유대감이 강한 나머지 중동 국가들의 표도 한국으로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나고야 시민들 사이에선 경기장 건설을 위한 환경파괴 등을 우려해서 올림픽 반대 움직임도 많았다. 일부 시민단체는 적극적인 유치반대 활동을 벌여 나고야의 올림픽 유치 명분이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더구나 당시 아시아에서는 일본 외에는 올림픽 개최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1964년에 하계올림픽과 1972년에 동계올림픽을 이미 치른 일본이 얼마 안돼서 연달아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에 대한 형평성 문제도 있었고...

참고로, 2005년에 개최된 등록박람회인 2005 아이치 엑스포가, 바로 1988년 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나고야가 그 한을 풀기 위해서 20여년간 노력한 끝에 유치한 엑스포이다(...)

2.2. 정치적 혼란과 올림픽 개최

분단 상황에 대한 우려를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올림픽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극복했지만, 북한의 방해는 여전히 심했다. 이미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일본을 지지했던 북한은 1987년까지 뜬금없는 공동 개최론을 주장하며 대회 명칭을 평양-서울올림픽으로 해야한다는 등의 헛소리를 쏟아냈다. 결국 단념한 북한은 대신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여 올림픽보다 더 규모가 컸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나 그 결과는... 이 일로 인해 원한을 가졌는지, 북한은 아시안게임 방해를 위해 아랍계 테러리스트에게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사주했다. 이 테러로 5명이 죽고 32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 올림픽때 공항 경찰이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북한은 급기야 올림픽 보이콧 운동까지 시도했다. 물론 이정도는 둘째 치고, 가장 유명한 사건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이런 북한과의 관계와 테러 위협을 이유로 소련과 인도에서 불거진 올림픽의 아테네 영구 개최설 등으로 잠시 올림픽 개최가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6월 항쟁의 와중에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이유 삼아 LA베를린 등에서 유치권을 가져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6.29 선언으로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면서 예정대로 1988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민주화 시위대가 들어가 있었는데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공권력 투입을 직접 맞서서 막았다. 만약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더라면 3번 연속으로 반쪽 올림픽이 될 뻔했을지도 모른다. 무력 진압한다면 교황청에서 친히 가톨릭 국가끼리 뭉쳐서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는 협박까지 했을 정도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뻔했다. 더군다나 이 올림픽은 그나마 좌우합작으로 덜 까이는 전두환 대통령의 최대 역작이라 할 수 있는 행사인데 이 시위를 무력진압함으로써 자기가 불러온 복을 자기가 걷어차 버릴 뻔했다고도 볼 수 있다.

2.3. 공산주의권 참가 문제

1980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 LA 올림픽에서 각각 서방 국가와 공산 국가가 보이콧을 한지라, 서울 올림픽에서도 공산 국가의 참가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다. 중국이 1984년 7월에 가장 먼저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천명해왔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원래 소련과 썩 사이가 좋지 않은 독자적 공산 국가였던데다 1990년 아시안게임의 베이징 유치를 의식해서 참가한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2000년 올림픽 유치를 노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아시안 게임부터 유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괜히 서울 올림픽에 불참해서 일을 그르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중국의 참가가 다른 공산 국가의 참가에 별 영향이 없었다. 실제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은 참가했으나 그 외의 아시아 공산국가들이 죄다 불참했던 전례가 있었는데, 아시아 스포츠계에서 중국 한 나라의 위상이 워낙 크다 보니 묻혔던 것. 아무튼 중국만 갖고는 공산권의 서울 올림픽 참가 여부가 상당히 불투명했다. 그러다가 1985년 3월 동유럽의 대표적인 소련 위성국가인 동독이 참가 신청을 했는데, 동독의 경우 스포츠가 곧 국력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1984년 올림픽에 보이콧한 데 대한 자국 내 반발이 워낙 컸던지라 서울 올림픽에 참가신청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소련. 만약 이번에도 보이콧을 하게 될 경우 베트남이나 폴란드 등의 다른 공산 국가마저 전부 보이콧할 우려가 컸기 때문에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었던 김운용(박종규가 죽은 후 위원이 된것으로 보임) 등이 러시아어까지 배워가며 소련 IOC 위원을 만나 집중적으로 설득하였다. 소련 IOC 위원들은 김운용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영어로 대화할 생각이었는데, 김운용이 예상 밖으로 러시아어로 대화를 시작하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고. 때마침 소련에서도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상황이었던지라 마침내 1988년 초 소련의 참가가 확정되었고 여러 공산 국가들이 이에 동참하면서 서울 올림픽은 총 160개 국가가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임과 동시에 8년만에 서방 진영과 공산 진영이 함께 참가한 대회로 기록되었다.

단, 완벽하게 모든 IOC 국가가 참가한 것은 아니라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 일부 국가들은 참가를 거부하거나 포기했다. 에티오피아(1974~1991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와 쿠바를 비롯해 알바니아·마다가스카르(75~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세이셸(79~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니카라과(쿠바의 지원으로 79~90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등 총 7개국이 참가를 포기했다. 이들 외에 불참국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있는데... 얘들은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IOC에 가입 조차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전 IOC 국가의 참가가 실현된 것은 다음 올림픽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였다. 그래서 동서화합의 올림픽이자, 동시에 마지막 보이콧이 벌어진 대회라는 기묘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소련 및 여러 공산권의 참가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계속 보이콧 의사를 굽히지 않자, 급기야 대한민국 정부는 인공기 게양과 북한 국가 연주 허용을 대가로 내세우며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종용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용인해준다쳐도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권의 반공 성향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에서 인공기를 게양하고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다만 시각을 조금 바꾸면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논리가 적용될 수 있는 문제기도 하다. 그 당시(민주정의당 정권 시기)에 북한이 참가해서 국기가 드러났다면 누구더러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북이 참가하기 시작한 건 김대중 정권 시기이고 이때나 노무현 정권 시기에 북한 국기와 국가가 경기장에 드러난 것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낸 사람들이 일부지만 있었다. 또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 즈음하여 고양시에 참가국 국기가 게양되자 고양시장이 광주출신이니 종북으로 몰아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는 남한에서 북한이 불참한다고 깠는데, 지금은 참가한다고 깐다. 거지 같은 것들이 왜 오냐고.

이런 종용에도 북한은 결국 참가하지않았고, 남한 땅에서 북한 국기가 나타나고 국가가 연주된 것은 14년 뒤인 2002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때에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30년 뒤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북한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3. 개막식

KBS 올림픽 개막식 중계 풀버젼. 3시간 40분에 달하는 크고 아름다운 방송 분량과 아나운서들의 깨알같은 설명들이 일품. 더불어 그 당시 TV 광고들도 볼 수 있는 것이 매력이라 하겠다. KBS 1TV에서 방영했다.

개막식은 한국 시간으로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되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올림픽 개막식이 보통 오후 3시 경에 시작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개막식 시간 조정에는 미국내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근데 덕분에 개막식 당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으니 더 좋았을지도. 당시는 주5일 근무제 이전이므로 토요일은 오전 근무를 했어야 했다. 따라서 개막식이 늦은 오후나 저녁이었으면 일을 조금이라도 더 시키려는 재계의 욕심때문에 임시공휴일 지정에 대해 논란이 발생했을 수 있다. 하지만 얄짤없이 법정근무시간에 걸렸던 오전에 개막식이 열리게 되었으므로 국가적 대사를 일때문에 못보는건 너무하다는 압도적인 여론때문에 아무 무리없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개막식 입장은 한글 ㄱㄴㄷ순대로 진행되었으며, 그에 따라 가나가 2번째, 홍콩이 159번째로 입장했다. 다만, 국가간의 관계 및 사정에 따라 순서가 뒤죽박죽 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란의 경우 원래 입장순서가 이라크 다음으로 배정되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의 앙금 때문에 몇 나라 뒤로 순서를 미루기도 했다.


개막식에서 가장 인상깊던 장면은 행사 도중 윤태웅[1]이라는 어린 소년이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주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퍼포먼스였다. 약 2분 동안 경기장에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경기장 한 가운데로 굴렁쇠를 굴리면서 등장한 소년이 관중에게 손을 흔든 이 퍼포먼스는 강한 인상을 남기며, 오늘날까지도 서울 올림픽의 상징으로 남았다. 전쟁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평화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동서 진영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것이라고 한다. 기획한 사람은 당시 올림픽 개회식 준비에 참여하던 어령.

올림픽 최종 성화 점화주자가 마지막에 바뀌기도 했다. 원래 누구가 다 예상하는 것처럼 손기정이 점화할 것으로 보였지만, 너무 뻔하고 드러났기 때문에 정부에서 막판 방침을 바꾸게 된다. 손기정은 최종 성화 봉송주자가 되었다. 정확히는 끝에서 두 번째다. 손기정이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으로 들어온 후 198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였던 중거리 육상선수 임춘애에게 넘겼다. 그리고 임춘애가 트랙을 잠시 돌다가 점화자에게 넘긴 것. 그리고 성화 점화자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표어였던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맞춰 평범한 시민들이 점화하게 되었다. 바로 건국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마라토너 김원탁(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금메달 출신이다. 황영조 바로 이전 짧게나마 한국 마라톤계를 빛냈던 선수), 섬마을 학교(흑산중학교 소흑산분교(현 가거도분교)) 체육 선생님이던 정선만과 서울예고 여고생 무용수이던 손미정 등이다. 올림픽의 관례였던 성화 최종주자가 성화를 점화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뜨린 대회다. 이때 최종 성화 봉송주자였던 손기정 옹이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대목.


점화식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사상 최초로 계단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화대를 점화한 올림픽이다. 이전까지는 성화대 옆에 계단이 놓여져 있었고 이를 올라가 불을 붙이는 방식이었으나, 서울 올림픽 때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도입한 후 새로운 점화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되는 전통이 생겼다.

이 당시 평화의 상징으로 풀어놓은 비둘기들이 닭둘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개회식 때 풀어놓은 비둘기들이 성화대에 옹기종기 모여있다가 성화가 점화되는 순간……. 해외언론 만평에서도 이 비둘기들이 성화대의 이슬로 사라진 사건을 가지고 '불고기 왕국이라 성화 점화 때에도 불고기를 구웠다'고 꼬집기도 했으나 국내에서는 올림픽의 이미지가 실추될 것을 우려해서 이에 대한 공식적인 보도는 금지되고 그냥 떠도는 소문으로만 알려졌다. 이 비둘기가 타죽은 것 때문에 최근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최악의 개막식 중 하나로 꼽았다.[2] 이 때를 교훈삼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는 비둘기를 폐회식때 풀어놓기로 했다.

맨 마지막 순서였던 한마당에서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손에 손잡고코리아나가 열창했는데,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자국의 의상을 입고 한데 어우러진 것은 물론이고 역대 올림픽 마스코트까지 총집합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특히 보이콧으로 얼룩졌던 직전 3개 대회의 마스코트인 아미크, 미샤, 그리고 호돌이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은 말 그대로 전세계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가히 최고의 퍼포먼스라는 말 외에는 다른 수식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

다른 고화질 개,폐회식 영상이나 대회경기, 86 아시안게임의 영상을 올림픽 자료실에서 볼수 있다. 단 WMP 기반이므로 일부 브라우저에서는 재생되지 않을 수 있다.
http://library.kspo.or.kr/movie/movie02_list.do

5. 경기

5.1. 정식 종목 및 경기장

5.2. 시범 종목 및 경기장

5.3. 특징 및 메달리스트들에 대한 일화

  • 태권도가 처음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는 이를 발판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에 합류한다.
  • 탁구테니스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탁구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이고, 테니스는 1988년 당시 기준으로 64년만의 합류였다.
  • 배드민턴이 전시종목으로 채택되었고, 4년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정식 종목이 되었다. 야구 역시 이 대회 시범종목이었다. 당시 한국은 야구에서 4위를 달성했다.
  • 한국은 금메달 12개를 포함해 사상 최초로 종합 순위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1위 소련, 2위 동독, 3위 미국).
  • 미국의 맷 비욘디는 남자 수영에서 5관왕을 차지했다. 다만 이 중에서 세계신기록이 없다는게 흠.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는 여자 수영에서 6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며, 한 대회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한 여자 선수가 되었다.
  • 비욘디의 6관왕을 저지한 남자 접영 100M 금메달리스트는 남미의 소국 수리남의 안소니 네스티다. 그의 조국에는 당시 수영장이 단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올림픽 역사상 첫 흑인 수영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 헝가리의 수영 선수 타마스 다르니는 한쪽 눈이 실명인데도 남자 개인 혼영 200m와 400m에서 2관왕을 차지하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 여자 중장거리의 절대 강자로 등극하는 미국의 재닛 에번스가 처음 금메달을 딴 대회이기도 하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6.
  • 역도의 나임 술레이마놀루는 자기 몸무게의 3배가 넘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당시 체급이 -55Kg이었던 그는 자기보다 더 위 체급의 선수의 1위 기록을 능가하는 기록으로 우승하며,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 전까지는 3배 넘는 무게는 들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인데, 이 선수는 용상에서 자기 몸무게의 3.18인 190kg을 들어올려 당시의 과학적 통념을 깼다. 이 선수의 키는 겨우 147cm(...)였기 때문에 '포켓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 여자 테니스 단식 금메달 리스트인 테피 그라프는 슈퍼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우승 + 올림픽 금메달. 이 때까지 이를 모두 이룬 선수는 그라프만이 유일하다. 2013년 현재까지도 한 해에 슈퍼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는 그라프가 유일하다.
  •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팀은 한국의 구기 종목 중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 남자팀은 은메달.
  • 레슬링에서는 그레코로만형에서 김영남이, 프리스타일에서는 한명우가 금메달을 차지했는데 김영남은 이 대회 후로 은퇴 예정이었고, 한명우는 국대 선발전에 탈락했다가 대회 직전에 최종 선발된 것이었기 때문에 두 선수 개인에게도 매우 뜻깊은 메달이었다.
  • 양궁에서는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가 된 김수녕이 여자 개인, 여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여 2관왕에 올랐고 혼자 세계 신기록 3개를 갈아치운다.
  • 소련동독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이 해당 국호를 사용한 마지막 대회로 기록되었다. 소련의 경우 다음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독립국가연합으로 참가하였다가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때 각각 러시아와 후신 독립국들로 분할하여 참가하였고 동독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은 1990년 각각 동서 및 남북 통일화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통일 국가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 여자 4x400미터 계주에서 소련의 세계신기록이 나왔는데 그 기록이 3분 15초 17이었다. 이 기록이 놀라운 이유는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다는것이다. 참고로 2012 런던 올림픽 해당 종목 1위 기록은 3분 16초 87(미국)이다. 스포츠 과학도 엄청나게 성장했을텐데 그때 그 기록이 어떻게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 당시 여자 펜싱은 플뢰레만 시행했다. 에페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사브르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 도입되었다. 또 사브르는 2004년에는 개인전만 진행했고, 단체전은 2008 베이징 올림픽때 처음 시행되었다. 펜싱 여자 플뢰레는 개인전에서 서독 선수 3명이 모든 메달을 휩쓴데 이어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 부문에서 2관왕을 한 선수는 아냐 피히텔 (Anja Fichtel) 인데, 그녀는 당시 불과 20세였다. 여자 플뢰레 석권에 힘입은 서독은, 아언트 슈미트 (Arnd Schmitt) 의 남자 에페 금메달까지 합쳐 펜싱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동독 또한 남자 플뢰레의 우도 바그너 (Udo Wagner) 가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독일은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펜싱에서 종합 1위를 달성하였다.
  • 복싱 미들급 금메달리스트였던 한국 박시헌의 결승전은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상대였던 미국선수가 누가봐도 긴 리치와 빠른 스피드로 경기 내내 박시헌 선수를 압도 하였으나 결과는 박시헌 선수의 승리였다. 모로코와 우루과이의 부심은 박시헌 승리, 소련과 헝가리의 부심은 존스의 승리, 우간다의 부심이 동점이지만 박시헌의 우세로 판정하였다.당시 기록. 이 판정은 올림픽 복싱 역사상 최악의 편파 판정 중에 하나로 꼽힌다. 박시헌 선수도 다소 당황해했으며 마음놓고 기뻐하지도 못했다고. 당시 그 미국 선수는 프로로 전향해서도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 했으나 메달이 바뀌지는 않았고, 후에 그는 90년대 초특급 스타가 된다. 그 선수가 바로 로이 존스 주니어.
  • 승마의 경우 당시 우리나라에는 방역 규정이 없어 승마만 다른 나라에서 개최할 뻔했다. 어떻게 보면 멜버른 대회(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닌 유럽인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별도 개최) 이후 희대의 굴욕, 즉 흑역사가 될 뻔했다. 그러나 과천 경마공원을 짓고 또 방역 규정을 새로 만들어서 우리나라에서 승마 대회까지 개최하는 데 성공하였다.

6. 의의

6.1. 동서화합의 차원 및 동구권 붕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냉전으로 인해 반쪽 대회가 된 것과 비교하여 서울 올림픽은 사상 최다의 참가국(160개국), 최대 참가인원(8,465명)을 자랑했다. 6.25 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진영/자본주의 진영간의 첨예한 대립, 냉전시대가 녹아가고 화해의 무드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겠다. (북한은 반대했지만) 남한에서의 개최, 88올림픽 주제곡 "손에 손잡고(핸드 인 핸드)"도 그러한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은 '손에 손잡고'대신 NBC 주도로 휘트니 휴스턴의 'One Moment in Time'을 대회 주제곡으로 사용했다. 이를 딴지일보가 오해하여 "'손에 손잡고'는 올림픽 주제곡이 아니다!"는 잘못을 저지른 바 있다.

서울 올림픽이 동유럽 공산 국가의 와해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북한의 악선전으로 인해 대한민국을 헐벗고 굶주린 나라로 알고 있던 동유럽 공산 국가들이 서울 올림픽을 통해 자국보다 더 풍요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을 알게 된 것. 수치상으로는 1987년 당시 소련과 동독의 1인당 GNP가 한국의 2배를 훌쩍 넘는 수준이었고 이를 근거로 공산권이 한국보다 그렇게 가난한건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공산권 국가의 GNP 수치는 정부가 멋대로 정한 고정환율을 토대로 계산된 것이었다. 즉 실제 가치(구매력)를 반영할 경우에는 그보다 못했고, 당시 동구권이 경제적으로 저성장세를 보였다는 것까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일례로 1989년 당시 동독의 1인당 GNP는 무려 13,000달러로 대한민국의 2배를 넘었으나 이는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를 1:1로 환산한 결과였으며 실제 가치에 따라 교환되는 비율을 감안하면 잘 쳐봐야 약 4500달러 수준이었다. 이는 대한민국보다 약간 못한 수준이었는데 공산 국가중에서 소련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가 동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주요 공산권 국가를 따라잡았다는걸 알수있다. 동독을 다녀온 서독 국민들은 1인당 GNP 13,000달러의 나라가 왜 이리 못 사는가라고 의아해 했다고. 때문에 88올림픽은 공산 정권에 대한 회의감을 주었고, 이것이 공산 국가 와해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이 동구권 국가 및 공산주의 국가들과 대대적으로 수교가 이뤄진 것이 1989년부터이니, 올림픽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올림픽으로 인해 분명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확 달라졌고, 이것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외교력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6.2. 독재정권 종식

화합과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이 이제 막 박종철 치사사건6월 항쟁으로 전두환을 퇴임시킨 땅에서 열렸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전두환은 끝까지 올림픽을 핑계로 직선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음을 생각하면 더욱 아이러니.

올림픽 유치노력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유신정권 말기인 1979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유신체제 말기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 뒤 10.26 사태가 터지면서 나라가 혼란에 빠져 거의 무산되는 듯 싶었지만, 땡전뉴스의 주인공이자 29만원의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나자 3S정책의 일환으로 유치시도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제5공화국의 명줄을 끊은 6월 항쟁의 발생과 6.29 선언이 발표된 이유 중 하나가 '민주화 없이 올림픽을 치를 수 없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서울 올림픽을 치를 수 없다'이니 정권에 도움 되라고 유치한 올림픽이 되레 정권의 명줄을 끊어놓은 셈이 되었다. 만일 6.29 선언 없이 1980년 5월 광주처럼 유혈진압으로 6월 항쟁이 끝났다면, 교황청에서 보이콧을 호소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랬다면, 올림픽은 1976년부터 계속 집단 보이콧으로 점철되었을 것이고, 서울 올림픽 역시 실패한 올림픽으로 남았을 것이다. 아울러 국가 이미지는 완전히 막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고, 올림픽 자체도 존립이 위태로웠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어찌되었든 전두환 정권때에 올림픽이 유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가 '관중들이 전두환을 보고 야유를 하는걸 외국인들이 보면 국제망신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올림픽 개최식에 참석못하게 하는 아이러니한 일도 있었다. 결국 전두환은 자기 집에서 TV로 노태우가 올림픽 개회선언을 하는 걸 봐야했다.이 때부터 전두환과 노태우의 관계는 험악일로를 걷게된다. 결국 화합의 대제전인 올림픽이 두 사람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은 것. 이것이 결국 백담사행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불완전하지만, 5공 청산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올림픽이 한국 사회의 문제를 가린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올림픽이 민주화 과정에서 안전판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어찌보면, 역대 올림픽 가운데 가장 역사를 많이 바꾼 올림픽일지도.

6.3. 한국 경제발전 신화의 정점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은 국내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훨씬 더 비교적 성공적으로 올림픽이 끝나면서, 한국의 경제 발전 신화의 큰 이정표가 되었다. 반대로 이 올림픽의 성공과 1989년 동구권 붕괴, 1991년 소련의 붕괴로 한국의 운동권은 크게 쇠퇴하게 된다. 올림픽에 대한 반대 운동도 전개하고, 남북공동개최까지 주장했었던지라 그 충격이 더 컸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혁신적인 정책보다 보수 안정을 추구하는 중산층이 늘어난 것도 올림픽의 여파라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완벽하게 승리했다는 자신감을 남겼다.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남한의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사실을 듣고 자신들이 체제 경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한다. 북한 사람들도 올림픽의 위상은 알고 있었기 때문. 성공한 대한민국의 이미지에 반드시 올림픽(그리고 월드컵)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그 여파를 짐작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와 삼저호황도 함께 몰아닥쳤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 내수가 급 신장했다. 기본적으로 3저 호황의 영향이지만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과 1988년 최저임금법 제정으로 임금이 크게 높아진 영향도 있다. 이 삼저호황으로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열렸고 이에 따라 레저산업이 급신장하는 등 이전과는 생활환경이 많이 변화했다.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는 국내의 일부 강경했던 좌파 그룹들의 속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후 사회주의보다는 사민주의를, 사민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속성이 늘어났으며, 그 가운데 가장 격렬한 변화는 민중당 계열에서 일어났다. 다만 민중당 계열 그룹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진보정당 운동에 매진하였다.(애초에 민중당이 창당된것이 1990년도고...) 이들이 보수로 돌아서게 된건 김영삼이 이들 인사를 영입하면서 부터.

6.4. 국가적 차원의 올림픽 유치 운동의 시작

서울 올림픽 유치 전까지는 올림픽 유치는 원래 올림픽의 취지 그대로 도시가 유치하는 것이었다. 경쟁 상대였던 나고야 역시 일본 정부가 나서서 유치전을 지휘했다기 보다는 체육계 인사와 나고야 시 차원에서 유치위를 꾸리고 활동했다. 물론 실제 개최에서는 정부가 많은 신경을 쓰기는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나, 1964년 도쿄 올림픽처럼 정부 차원에서 대회를 주관하는 사례는 있었다. 그러나 유치부터 정부에서 대규모 계획을 짜고, 범 국가적인 역량을 동원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즉, 올림픽은 유치하면 좋지만, 실패하면 크게 문제가 되는 사업이었다. 실제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 사상 최악의 적자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각 국가들은 더더욱 이런 생각을 굳혔다.

그런데 빈곤에서 막 빠져나온 한국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것을 보고, 상황이 반대로 변했다. 이제 올림픽 개최는 나름대로 해 볼만한 시도로 여겨진 것이다. 특히,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이것이 유치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던 국가들이 올림픽 유치를 위해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2000년 올림픽을 노리고 시작한 그들의 유치 노력은 2008 베이징 올림픽으로 그 결실을 맺는다.

이런 추세는 급기야 2012년 올림픽에서 총리인 블레어가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2014 동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는 유력 도시였던 소치, 평창의 국가원수인 푸틴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급기야 IOC에서 국가원수의 프리젠테이션 금지를 명문화......하자는 얘기가 나왔으나 실제로는 그런거 없다. 결국 올림픽 유치 열기가 과열된 것이다.

여하간 서울의 성공적 올림픽 개최로, 올림픽이 국가적 위신을 높일 수 있다는데 착안한 다른 개발도상국들, 심지어 소위 선진국까지도 국가적인 역량을 집결시키기에 이른다. 즉, 흔들리던 올림픽 개최 운동의 일대 전기가 된 것이다.

6.5. 한국 스포츠 시설 건설

지금이야 세월도 지나고 나라가 발전해서 국가적으로 스포츠 시설 건설을 지원하지만 올림픽이 열리기 전만하더라도 한국은 그야말로 스포츠 시설들이 부족한 국가였다. 현재 기준으로 이 때 당시 지어진 시설들은 현재 낙후되었겠지만 서울 올림픽 개최 전만 하더라도 여러 비인기 종목들의 시설들이 부족은 커녕 없는 것도 많았었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로 모든 올림픽 종목시설들이 건설되면서 현재도 이 때 당시 지어진 시설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봤을때 서울 올림픽은 스포츠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고 볼수있다.

7. 가려진 문제점

7.1. 강제 이주 및 보여주기


(<상계동 올림픽>의 화면)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는데, 경기장 건설 및 환경정비라는 명목으로 수십만 주민이 길거리로 내몰렸고 심지어는 성화봉송 중에 불량주택이 보이면 곤란하다며 전국의 성화봉송 루트의 판자집을 전부 무단으로 철거해버렸다. 랑자, 거지,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보이면 잡혀가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올림픽 개최 이후 장애인 올림픽이 열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올림픽 선수들이 입국하는 관문 공항인 김포국제공항과 주 간선도로가 되는 경인고속도로 주변의 판자촌 및 빈민가는 이 때 철거된다. 아울러 사격 경기가 열리는 태릉 국제사격장 인근의 빈민가 및 황량한 부지도 있어 보이기 위해 개발된다. 이는 오늘날 각각 목동과 상계동의 아파트 단지가 되는 곳인데, 이 과정을 통해 허허벌판이던 양천구노원구는 급격하게 풍경이 달라져 대규모 주거 단지이자,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곳으로 탈바꿈한다. 아울러 부천의 원미, 오정 일대도 역시 개발 바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빈민가에 있던 사람들은 밀려나서 난곡이나 시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를 다룬 다큐 영화가 송환을 만든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이다. 이 때 상계동 천막촌의 철거 이유는 성화 봉송이 이쪽으로 지나갈 수도 있으니까 보기 좋으라고.

이 때 철거민들을 쫓아내면서 겉보기에는 도시 미관이 좋아졌지만, 이미 광주대단지사건 등을 통해 끓어오르던 하층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말았다. 철거민 문제가 비로소 본격화된 것이 된 계기가 바로 88올림픽 준비 과정이었다. 결국 그 분노는 그대로 폭발하여 93년 전국철거민연합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키고 말았다.

서양의 이목을 의식해(도시에서) 개고기가 금지된 때도 이 때. 수많은 보신탕 집들이 문을 닫았고 보신탕이라는 이름 대신 사철탕으로 이름을 바꾸어 음지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또 외국인 관광객이 우리나라 음식을 모르기 때문에 서울시의 음식점에서는 필수적으로 점포 내에 플라스틱 음식 모형을 비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점주들이 이를 갖추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7.2. 편파 판정


편파 판정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특히 당시에 주관적인 요소가 컸던 복싱에서 이 문제가 불거졌고, 복싱 역사상 가장 큰 이슈 중 두가지가 88 올림픽 때 발생했다.

먼저 한국 복싱선수 변정일이 편파 판정으로 탈락했는데 당시 32강 2회전에서 변정일은 2회 경고만으로 2점 감점됐으나 상대방 불가리아 선수는 8회 경고를 받았으나 일체 감점되지 않았다. 변정일의 탈락으로 관중들의 분노가 폭발해버렸다. 당시 경기 영상 그러나 이 때 한국 코치진이 링에 난입하여 심판진에 폭력을 행사하며 아수라장을 만드는 촌극을 벌였고, 변정일은 67분 동안이나 링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면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한 번 내려진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무식하게 주먹부터 쓰는 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수있다. 결국 변정일은 경기 진행을 방해한 이유로 국제복싱연맹으로부터 5년간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고, 한국은 국제적 비난과 망신을 당하여 한국 복싱 연맹 회장과 한국 올림픽 협회장이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변정일의 경우는 90년대에 프로로 전향하여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유지했으나 그러나 얼마 안가 그보다 더욱 논란이 되는 사건이 나오고 마는데...




시상대에 올라서 금메달을 받고도 멋적게 존스 선수의 손을 들어주는 박시헌 선수...차라리 그냥 은메달이었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중 불거진 논쟁 등과 같은 경우에 "한국은 스포츠계에서 비열하게 장난친 전례가 있으므로 편파판정 당해도 싸다" 라고 주장하는 측이 흔히 드는 두가지 예가 바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과 바로 밑에 서술할 88 올림픽 복싱 결승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88 서울 올림픽 복싱 라이트미들급 결승전에서, 9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권투 선수인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 선수가 한국의 박시헌 선수를 상대로 터무니없이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는데도 불구하고 심판진은 박시헌의 손을 들어줘 존스가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받게 된다. 당시 경기 영상 1부 2부 이것이 흔히 "88 서울 올림픽 복싱 강탈(robbery) 사건" 이라 불리고, AFP가 역대 올림픽 최악의 판정 2위에 선정된 바가 있다(5위가 신아람 선수의 2012 런던 올림픽 1초의 기적, 4위가 2008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여자 67kg 급 8강전, 3위가 2000 시드니 올림픽 남자 유도 100kg 이상급 결승전, 1위가 1972 뮌헨 올림픽 남자 농구 결승전). 당시에 한국이 종합순위 4위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냈음에도 타국들이 흔히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이 사건 때문이다.


당시에 한국의 박시헌 선수는 안 그래도 16강전에서 석연찮은 판정으로 이탈리아 선수를 꺾고 올라왔는데, 결승전에서도 전설적인 복싱 선수였던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고 말았다. 장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스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심판진이 역대 최악의 판정을 내리고 만다. 심판진 5명의 판정 결과 2:3으로 박시헌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패배를 하게된 존스 선수나 승리를 하게된 박시헌 선수나 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과적으로 이 경기는 미국의 항의로 아마추어 복싱의 룰을 더욱 객관적이게 개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존스 선수는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이에 대해 IOC에 항의하고 제소했으나 1997년 5월에 IOC 조사위원회가 기각하여 종결되었다. 그래도 당시에 19살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로이 존스 주니어는 이 논란의 은메달을 계기로 미국 전체의 관심과 격려를 받고 절치부심하여 이듬해 89년에 프로 데뷔를 하고 90년대~2000년대 복싱계를 평정한 대스타로 발돋움 하게 된다. 미들급에서 시작해 헤비급까지 정복했으며 당대를 넘어 역대급 복서로 평가받는 선수. 나이 들어서도 은퇴하지 않고 꾸준히 경기를 뛰면서 전적에 흠이 많이 가긴 했다. 그리고 2001년에 랩가수로 데뷔했다(...) 현재도 현역. 박시헌 선수 본인 잘못이 아니라 심판 잘못이었고 박시헌 본인도 "조국이 나의 은메달을 뺏어갔다"며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으나, 그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으며 그는 한참이나 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우리나라 여론은 미국에 공식 사과를 해야 한다는 둥 모금으로 금메달을 만들어서 보내주자는 둥 박시헌의 편은 아무도 없었고, 그는 그 이후로 복싱 인생이 꼬여 국내외로 비난에 시달리다 조기은퇴하고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다 자살 고민까지 했다고 한다. 근황...지못미. 다행히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복싱팀 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 하다.


아무튼 IOC에서는 1997년 로이 존스의 제소를 기각했다. 한국 측의 사례가 판정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지 않았고, 또 비디오 분석에서도 로이 존스에 딱히 손을 들어줄만한 결과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 유효타가 2배 더 많았다고 하지만, 로이 존스가 박시헌에게 확실한 우위에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스텐딩 다운 판정은 박시헌이 바로 항의하고 나섰을 정도로 석연치 않았고, 그 전에는 박시헌이 밀어붙이고 있었다. 거기다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특히 종료 1분을 남겨두고는 박시헌이 경기를 주도하며 상당수 유효타를 성공시켰다. 그러다 보니 홈 어드벤티지까지 더해서 가만하면 박시헌이 이기는 판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후에도 미국쪽 언론들은 이 경기를 갖고 불만스럽게 구시렁 거리다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양태영 사건이 터지면서 꽤 조용해졌다. 피장파장 우리가 잘못한 건 모른척 합니다.

7.3. 약물 복용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건이 적발된 대회가 바로 서울 올림픽이다. 100M 결승 우승자였던 벤 존슨은 우승 직후 약물 검사에서 약물 복용 사실이 적발되면서 금메달을 박탈당한다. 다만, 그만 약물을 복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여자 100M 우승자인 그리피스 조이너에 대한 약물 복용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그녀의 100M 올림픽 미국대표선발전 기록인 10초49는 여자의 기록이라고는 믿기 힘든 엄청난 기록이었으며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조이너 선수가 98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 진실을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칼 루이스도 약물을 복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 외에도 역도 선수들의 약물 복용 적발이 많았던 것도 바로 이 대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특히 남자 100m 경기는 올림픽에서 마라톤, 축구와 함께 가장 많은 세계적 관심이 쏠리는 핫 이슈 종목[3]이라는 점을 감안하자. 만약 남자 육상 100m가 아닌 다른 일반 종목이었으면 상대적으로 잠잠히 넘어갔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그만큼 남자 육상 100m가 올림픽의 핫 아이콘이란 의미다.

조선일보 2012년 6월 1일 기사에 의하면 당시 메달을 박탈당한 벤 존슨이 루이스의 음모로 인해 박탈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서서 논란이 되고 있다. 관련기사

다만 벤 존슨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던 것이 80년대까지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국가대표 체육인들의 약물 복용이 만연했으며 한때 동독에서는 이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했다. 이 대회 수영 6관왕을 차지했던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와 단거리 육상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미국의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역시 약물 복용 논란이 지금까지 끊이질 않고 있다. 물론 약물의 힘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려고 한 시도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지만 벤 존슨의 경우는 서울 올림픽 당시 국내외 언론에서 지나치게 집중포화를 시키다보니 그 이후에도 약물 스프린터라는 오명이 붙어서 이후 출전한 대회에서도 요주의 대상이 되었으며 90년대에는 선수 자격까지 박탈당하여 다시는 트랙 위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우여곡절이 많은 육상 커리어에 대해 반성을 많이 했는지 벤 존슨은 반(反) 도핑 전도사로 활약하며 자신이 금메달을 박탈당했던 곳인 잠실주경기장을 찾아오기도 했다.

역으로,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건을 밝혀내어 우리의 도핑테스트 기술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덕분에 2002 월드컵, 2011 대구 육상선수권 대회 등에서도 도핑테스트를 우리 손으로 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벤 존슨의 유죄를 밝혀낸 당시 수장인 박종세 박사는 그러나 다른 사건에서 뇌물수수로 인해 집행유예를 받아 흑역사가 되었다.

7.4. 거품경제

성공에는 한계도 있었다.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많은 돈을 풀면서 물가 폭등이 일어나고, 주택 문제가 심화되면서 1980년대 말부터 한국은 극심한 주택난과 이로인한 물가 폭등으로 서민 경제의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다만, 주택난은 인구구조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당시 베이비붐 세대들(1955~1963년생)이 한창 집을 살 시기가 되고 사회적으로 핵가족화 현상이 지속되면서 집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많아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해 당시 주택 보급율은 62%에 불과했을정도로 주택이 부족했으며 당연히 수요에 비해 공급이 후달리게 되어 집은 부르는게 값이 되었다. 이 때문에 대도시 지역의 집값이 무지막지 하게 폭등하여 소득대비 아파트값이 12배가 넘을 정도로 집값이 뛰게되었고(서울 기준), 물가상승에 따라 전세가도 뛰는 바람에 전세난도 가중되어 자살하는 가장들의 이야기가 기사화될 정도로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현상은 91년 상반기까지 지속되었다가 이후 신도시 아파트의 분양이 시작되면서 집값이 정체 및 소폭 하락세를 보이게 되면서 잠잠해지게 되었다.

올림픽으로 인한 거품 경기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주가지수도 1000까지 갔지만 바로 무너지는 등, 자산에서 버블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 문제는 대규모 신도시 건설 등으로 일단 모면하지만, 이 때의 거품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면서 9년 뒤인 1997년 외환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8. 이모저모

  • 다이빙 종목 우승자인 그레그 루가니스는 당시 AIDS 보균자였다. 그는 다이빙 시합 도중 머리를 보드에 부딪혀서 다쳐서 피를 흘렸는데, 이 당시 응급처치를 위해 의사가 별 보호장치 없이 그대로 그를 치료했다. 훗날 그가 AIDS 보균을 고백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AIDS 약도 당시 가지고 다녔는데, 한국을 떠나 출국할 때, 검역장에서 걸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하니 공항에서 검역을 면제해 줬다고.

  • 미국 방송사인 NBC의 요구로 올림픽 개막식이 오전 11시에 펼쳐졌다. 원래 대부분 개막식은 밤에 하는 것이 관례인데, 한국의 오전 11시가 미국의 프라임 시간인 저녁 시간대라서 시간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수정 전 위키에 이렇게 작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다. 서울올림픽까지는 모든 올림픽의 개막식이 낮에 열리는 것이 관례였다. 예를 들어 이보다 4년 전에 열렸던 LA 올림픽 개막식도 현지시간 정오에 시작하였다. 이 관례는 2년 뒤에 열린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때 개막식을 저녁에 열면서 깨지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계속 개막식이 밤에 열리고 있다. 사실 밤에 개최하면 다양한 조명 효과를 연출할 수 있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다. 중간에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낮에 열렸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은 개막식이 낮에 열린 마지막 하계 대회이다.
    하지만 NBC의 요구로 주요 결승전이 한국의 프라임시간보다 약간 뒤인 오후 9시에 치러지진 것은 사실이며, 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몇몇 종목은 자정이 지난 후 결승전이 끝나기도 하였다.

  • 부대행사처럼 여겨지던 장애인 올림픽이 비로소 기틀을 잡은 것이 바로 서울 대회였다. 이 때부터 장애인 올림픽이 비로소 올림픽의 곁가지가 아니라 장애인들의 체육 행사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에, 서울 장애인 올림픽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 서울 장애인 올림픽의 심볼 마크가 그대로 국제 장애인 올림픽 기구의 심볼로 1994년까지 쓰였으며, 그 이후 모양은 바뀌었으나 태극 무늬는 2004년까지 심볼 모양에 남아있었다. 반면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장애인 월드컵에 소홀했던 대표적 사례다. 한국의 불참으로 일본에서만 열린 것 두고두고 까였고, 또 까일 일이다.

  • 서울 올림픽도 흑자를 봤는데, 순수 입장 수입으로 인한 흑자보다는 올림픽 복권 수입 및 선수촌 아파트 분양을 통해 적자를 메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올림픽 개최로 인한 경제적 이득은 약 4300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파견된 공무원, 기업체 직원들은 막상 올림픽이 끝난 후에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이미 그들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일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그들을 실업자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정부에서 나서서 새로운 공기관을 설립한다. 바로 민체육진흥공단이다.

  • 당시 소련 대표팀은 놀랍게도 엄청난 응원을 받았는데 특히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았다. 당시에는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은데다 KAL기 격추사건이 일어난지 5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가시키기 위해 국제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고 국내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우호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노력했고, 결국 소련이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국민들도 소련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소련의 불참 이유가 '선수들의 안전'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여하라고 설득하기로 결정한 이후 언론은 KAL기 격추사건을 보도하지 못했다. 올림픽이 코앞이던 1988년 9월 1일은 KAL기 격추사건 5주년이었지만 언론은 KAL기 격추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소련이 북한을 버리고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남북한의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운동권 학생들도 많았다. 특히 정통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PD계열이 그러했는데, 사실상 이 때와 이후 진행된 동구권 몰락괴 더불어 PD계열이 악화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소련을 응원하는 관중 모습은 사회적으로 미국의 의미와 소련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들었다. 소련 올림픽 농구 대표팀은 당시 아마추어인데도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던 미국 농구 올림픽 대표팀을 준결승에서 꺾고 결승에서도 승리해 금메달을 획득한다. 패배에 충격받은 미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프로농구(NBA) 스타 선수들을 총출동시켜 우승을 차지한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소련 농구팀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해 소련 농구팀에게 설욕은 하지 못했지만 이 때부터 미국 농구 대표팀은 '드림팀'으로 불리게 된다. 이 때문에 1992년과 1988년 남자농구는 1-3위가 뒤바뀌었다. 1988년에는 소련, 유고슬라비아, 미국 순서였는데, 1992년엔 미국, 유고슬라비아의 후신 중 하나인 크로아티아, 소련의 후신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가 나란히 1, 2, 3위를 차지했다.

  • 당시 소련 대표팀의 기수는 그 유명한 알렉산더 카렐린이었다.#

  • 올림픽 기간을 전후해서 소련 외무부의 영사급 인사들이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 머물면서 소련 선수단과 관광객을 위한 영사관 업무를 진행했었다. 당시에는 미수교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참고로 소련 영사단 일행은 일본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왔다고.

  • 이 당시 미국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감정은 상당히 안 좋았다. 일단 개막식 입장에서 미국 선수들의 무질서한 분위기(카메라에 대고 술취한 눈빛으로 욕설을 한다던지, 트랙을 벗어나 이상한 곳으로 걸어간다던지 등등)에서부터 찍혔(?)었는데, 변정일 사건에 대한 미국 방송사 NBC의 편파보도, 미국 선수 일부의 태극기 모욕, 그리고 절도사건까지 겹쳤던 것이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한국인들이 소련을 응원하는 사태가 터지자, 미국은 급히 한국인 달래기에 나서게 된다.

  •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념하고, 서울 올림픽의 평화와 동서 화합의 정신을 살린다는 취지 아래 서울평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초기 수상자들은 완전 엉망이었다. 오늘날에는 좀 잠잠했지만, 수상 초기에는 정말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수상 재단도 내분에 시달렸다. IOC 위원장 마란치가 있질 않나...

  • 서울 올림픽에 관련된 지명들이 서울 시내에 여럿 남아 있다. 올림픽대로, 올림픽대교, 올림픽공원, 송파구 오륜동,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88올림픽고속도로 등. 88 고속도로는 대구와 광주를 잇는 고속도로로, 물론 서울시에 위치하지는 않지만 이 고속도로 명칭 역시 서울올림픽을 기념한다는 취지로 명명되었다.

  • 1988년도 BBC Olympic Grandstand는 서방세계 제도권 방송사 타이틀에 한글이 등장한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 붉은색 한글로 '한국'이라고 써놓았는데 이 로고는 대회 내내 전 영연방에 방송되었다!(관련 영상)
  • 미국 타임지에서 역대 최악의 올림픽 개회식으로 선정되었다. 이유는 그 유명한 비둘기 화형사건 때문(…).

  • 미국 프로그램 젠장뉴스에서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강대교 보수공사를 하던 도중에 군인들을 동원했는데 군용 헬리콥터가 장비를 운반하다가 추락하면서 폭발하여 군인 4명이 사망했다는 내레이션과 같이 동영상(33초부터)을 방영한 바 있다. 그런데 이건 올림픽 이전이 아니라 2001년 5월 29일에 올림픽대교 위에 성화모양 상징물을 올려달라는 서울시의 협조 요청에 군이 응하여 치누크 헬리콥터로 장식을 올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다리 위에서 하강 기류가 발생하여 뜨지 못하고 계속 하강하다가 결국 다리 구조물과 장식에 충돌하여 추락 및 폭발한 사건이다. 이 프로그램이 잘못된 정보를 보여준 경우.

  • 개막식이 열린 1988년 9월 17일 MBC 뉴스데스크의 강성구 앵커는 1988년 9월 17일을 강조하는 멘트로 뉴스를 시작했다. 보통은 x월 x일 x요일로만 얘기하지만 올림픽 개막식이 대한민국 역사의 한획을 긋는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막강한 존재감을 자랑하다보니.....

  • KBS 뉴스 9의 경우 올림픽 기간동안 아예 올림픽 경기/행사 장면을 배경으로 오프닝을 내보냈다. 특히 이 때 쓰인 오프닝 음악은 오히려 1990년대보다도 더 낫다는 평을 받는지라 올림픽 기간에는 더욱 그 간지를 자랑한다.

  •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대회 기간에는 방송 3사가 뉴스와 한두개 정도의 드라마, 교양프로를 제외하고 하루 종일 올림픽 경기를 보여줬다. 심지어 올림픽 기간 중에는 교육방송인 KBS 3TV(현재 EBS의 전신)조차도 매일 정규방송 말미에 외국인을 위한 올림픽 안내프로그램을 영어와 불어로 송출하고, 정규방송이 없던 아침~낮시간대에 사이클 도로경기, 승마 종합장애물 같이 경기시간 한참 걸리는 비인기 종목을 중계해 줄 정도였다. 케이블 조차 없던 시절이다 보니 이런 방송에 드라마 광인 아줌마들도 짜증냈고, 개구리 왕눈이 같이 당대에 방영하던 만화를 못 봤던 국딩들도 짜증을 냈다.(...) 하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는 이에 내색할 수 없는 분위기였던 터라... 근데 거꾸로 평소에는 안하던 낮 방송을 계속 해주니 낮에 AFKN 말고 우리말 방송을 볼 수 있다고 좋아하던 사람들도 있긴 했다. 당시에는 아침 6~10시, 저녁 5:30~새벽 1시에만 방송을 하였다. (KBS 3TV는 오전방송 없음).

9. 참가국 및 입장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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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1981년 9월 30일에 태어나서 굴렁쇠 소년으로 뽑혔다고 한다.2008년부터 모 결혼정보업체 광고 모델로도 고정 출연하고 있는 등 연기자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 [2] 다만 미국 쪽에서 이것으로 꼬투리 잡기엔 서울올림픽 입장에선 좀 억울한 감이 있는 것이 개막식에서 이 사건을 제외하면 다른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굳이 비둘기가 타 죽게 된 이유를 꼽자면 서울올림픽의 성화대가 이전 대회와는 달리 크고 화려해서 새들이 앉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미처 경기장을 벗어나지 못 한 비둘기들이 큰 성화대에 앉아 쉬고 있었고, 최종 점화자들이 본인들 신장보다 큰 성화대에 앉아있는 비둘기를 일일이 쫓아낼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에 새들은 그대로 타 죽고 말았다(...) 사실 올림픽 비둘기의 이런 참사는 비단 서울 올림픽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둘기 퍼포먼스는 서울올림픽 이전부터 동물학대 논란이 많았던 퍼포먼스였다.
  • [3] 육상 인기가 태생부터 좋지 못한 우리나라에서조차 2011년 대구 육상선수권의 남자 100m 결승전은 가장 빨리 매진되었으며 암표가 가장 많이 들끓었던 종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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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7 14: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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