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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last modified: 2015-03-30 22:17:00 by Contributors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터리,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 촬영. 고명진 기자는 훗날 '흔들리는 나의 조국' 을 보았다고 술회했으며 이 사진은 1999년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되었다. 당시 그곳에서 개최되었던 "평화대행진" 행사 도중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최루탄을 쏘지 마라!" 고 외치며 뛰어가는 장면이다. 참고로 사진에서 뛰어가는 시민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언론사들과 기자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Contents

1. 개요
2. 진행
3. 의 분열과 군부 정권의 잔재
4. 과거사 청산과 민주화의 재조명
5. 기타


1. 개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 중 하나.
불합리한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국민들.
국민의 주권을 스스로 쟁취해낸 정의로운 민주화 운동.

1987년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故 이한열 군의 장례식 행렬. 무려 100만여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였고 발인 행렬이 출발한 연세대학교신촌거리부터 종로 일대까지 행렬로 가득 채워졌다.

1987년 6월에 전두환 정권이 헌법 중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의사에 저항하여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27년 간의 '제도적인' 군부독재를 종결시키고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제도적인이라는 말이 붙는 이유는, 민주화 선언 이후 직선제로 노태우가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역시 하나회의 실세였으며, 노태우 정권 내내 여전히 정(政)·관(官)·군(軍)에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실세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1991년 대한민국 민주화 시위(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의 유혈 진압, 방송관계법 날치기 통과 등의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행동도 했다. 그래서 실질적인 군부독재의 끝과 민주주의의 시작은 노태우가 퇴임하고, 하나회를 쓸어버린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 본다.

6월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으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지금까지도 1987년 체제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국 정치,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2. 진행


그 시작은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었다. 당시 운동권 선배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통배권이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면서 책상을 내려쳤는데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명언이다. 저 제목을 사용한 신문이 바로 동아일보. [1] [2]

그런데 박종철군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군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묵살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3] 국민들의 민심을 격앙시켰다.

이때는 1980년에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던 신민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5년만인 1985년에 다시 대거 사면되고 이들이 다시 신한민주당을 구성해 총선에서 제 1 야당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의 시점이었다. 1985년부터 야당은 대통령 간선제 안에 대해 "헌법 개정 1000만 人 서명 운동"을 추진하는 등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여당에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민정당과 신민당. 이 두 당이 제시한 개헌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는 매우 달랐다. 여당인 민정당은 의원 내각제를 주요한 내용으로 삼은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했다. 어째 여야 입장이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야권의 기세가 올라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가 벌어질 경우 대통령 중심제에 의해 가해질 충격이 더욱 크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여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비교적 약한 의원 내각제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신민당 바지사장총재 이민우가 호응하는 이민우 구상이 나오면서 신민당은 대분열 결국 김영삼, 김대중 세력이 일거에 탈당하여 새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대통령 취임 때부터 7년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약속해온 전두환은 퇴임 이후에도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각제 개헌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집권당 총재로상왕? 후계자 노태우를 허수아비 국무총리로 세워서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다. 푸틴처럼 다시 나갈 수도 있고

어쨌거나 큰 틀에서는 개헌을 위한 위원회가 여야의 만장일치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호헌 조치로 이 논의 자체를 뒤집어 버리자 직선제 개헌으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한 번에 받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김승훈 신부5.18 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상승했다.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약칭 국본)" 이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 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월 10일 민정당(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국본의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집회가 무산되자 서울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5월 이전부터 진행중이었던 시위를 특별히 6.10 항쟁,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명동성당에는 당시 故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날 것이다.

추기경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성당에, 그것도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에 함부로 경찰을 투입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은 세계 가톨릭계 전체에 도전하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손을 뻗을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전두환이 벌인 최대의 쇼인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자칫 유럽이나 남미의 가톨릭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을 할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교황청은 명동 성당 내로 공권력이 투입되거나 시위 진압에 군이 동원될 경우 서울올림픽에 대한 전면적 보이콧을 검토했었다고 한다. 이게 현실이 되었다면? 88올림픽은 그대로... 결국 명동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1995년 6월 6일, 김영삼 정권은 명동성당 관내에서 농성중이던 한국통신- 現 KT - 노조 간부들을 연행하는 삽질을 저질렀고 이는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둔 김영삼 정권에게 고스란히 크나큰 치명타가 되었다.

국민들은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에게 호응하면서 헌금의 형식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는 등 지지를 표시했다. 이 당시의 소소한 에피소드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명동성당 농성 당시 조영래, 박원순인권변호사들이 시위대와 합류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처음엔 경찰들이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변호사들은 양복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경찰 측에서는 이들이 시위대가 아니라 정부의 높으신 분들 정도로 오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일행의 정체를 파악하고 경찰들이 접근을 저지해서 변호사들의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당시의 변호사들이 남긴 회고록 등에도 나오는 이야기.

한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이한열은 결국 6.29 선언이 발표된 지 6일 뒤인 7월 5일 요절했다. 게다가 이게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다. 이한열군의 중상으로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6월 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로 다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군의 투입을 거의 결정한 단계였다고 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경찰총수였던 권복경 전 前 치안본부장은 동아일보와 단독으로 한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다.

각하(전두환 전 대통령)는 1987년 6월 시위대가 부산 거리를 가득 메우자 군대를 투입해 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국가가 뒤집힐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다행히 권본경 치안본부장은 "좀 심각하지만 경찰력으로 책임지고 막겠다" 면서 전두환을 설득한 덕에 큰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론 6월 19일 군부대 투입을 통한 무력진압을 실시하기로 결정이 되었고 수도권 외곽에 주둔중이던 충정부대[4]들을 서울 외곽지역에 집결시켰다. 여기 전차병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치고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며 수방사 소속 병사들 역시 출동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즉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투입할수 있게 한 것. 그리고 정부는 청와대출입기자들에게 19일 밤 10시 대국민담화를 발표할것이며 이와 동시에 군부대를 투입하여 무력진압으로 소요사태를 종결할것이라고 통보하였고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본사에 정보보고를 하였다.

무력진압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시위 지도부에게도 전달 되었으며 시위지도부는 유혈사태에 대비하여 비상연락망을 가동하고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틈에 섞여서 연행당하는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한편 주한미군 정보부대에서는 19일 오전에 한국군이 무력진압에 대비하여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였다. 청와대에서 19일에 주한미군에게도 무력진압을 위한 군부대 이동을 통보하라고 지시는 내려갔지만 한미연합사령부에 통보되지 않았다.

CIA 한국 지부에서는 6월 20일 새벽 4시에 강제진압을 할것이라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하였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강한 반미 감정과 군부대 투입의 악영향을 경험한 미국은 한국군의 무력진압을 저지하기 위하여 CIA가 주한미군의 협조를 받아 전차5대를 차출하여 수도방위사령부육군 특수전사령부한미연합사령부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한국이 단독으로 움직일수 있는 부대들의 정문에 전차를 보내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한국군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행동은 효과를 발휘하여 진압부대의 출동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진압군으로 참가했던 일부 예비역 장병들의 증언에 나오는 주한미군 전차와 한국군 진압부대가 부대 정문에서 대치하였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6월 20일 오후에 주한미국대사가 전두환과 면담일정이 있다는걸 알고 전두환과 만나러 가기전에 접촉하여 한국군의 무력진압 계획을 알려주고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다시 한번 무력진압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극이 다시 벌어질뻔한 위기를 막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상원에서 한국 민주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민주화에 힘을 보탰다. 12.12 묵인으로 병주고 6월 항쟁으로 약 주는 미국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더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6월 29일, 노태우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6.29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6월 항쟁의 마지막은 서울에서 이한열의 장례식으로 치뤄졌는데 무려 100만명(울산시 인구)의 서울 시민들이 장례식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시위로 번지게 된데에는 대학을 졸업한 도시 봉급자(이트 칼라)를 중심으로 한 신흥 중산층들의 참여.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때마침 낮이 가장 긴 6월인데다 서머타임 시행으로 날은 9시까지 쨍쨍하고 시위가 진행되는 서울 도심 한복판 (특히 서울 지하철 2호선)은 지하철 운행을 중단 혹은 무정차 통과해 시위 참여의 좋은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강남아파트 촌까지 소등 형식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음식점 주인들과 아줌마들이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을 위해 김밥을 싸주며 시위에 박차를 가하였고, 넥타이 부대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시위를 막고 있는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꽂아주었다. [5] 그야말로 남녀노소와 지역과 빈부 격차를 떠나 거국적인 여론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이 6월 항쟁의 결과물로 대한민국 역사상 아홉 번째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직선제를 담고 있는 이 헌법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6월 항쟁은 사실상 수십년에 걸친 군부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청산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독재를 연장하려고 했던 전두환 정권을 사실상 굴복시켰으며 민주화를 달성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대한민국은 87년이 새로운 터닝포인트였다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1987년 체제라고 부를 정도. 사실 이후의 헌법 개정이 없었으므로 정치적, 헌법적으로는 분명히 현재 대한민국은 87년 체제에 의해 굴러가고 있는 것이 맞다. 박근혜 대통령 정권에서 개헌 논의가 다시 나오면서도 각 언론사 등에서도 이 때 개정된 헌법을 기반으로 한 정치체계를 87년 체제라고 표현한다.관련자료

뿐만 아니라 87년 민주화는 경제적인 여건에 관계 없이 완전히 정치적인 의미에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의의가 있다. 앞선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의 경우 4.19 혁명의 배경으로 50년대 말 원조 감소로 인한 경제의 혼란이, 박정희 - 전두환 정권 교체기 부마민주항쟁서울의 봄,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배경으로 제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의 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은 이미 다각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경제적인 변화가 정치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한국 정치사에서도 실증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의 경우 3저 호황을 비롯한 한국 경제의 성행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위신과 외교적 요소. 서울올림픽의 영향이나 미국의 동의 여부 등 앞서 다룬 요소들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3. 의 분열과 군부 정권의 잔재

개헌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16년만에 부활하여 직선제 선거가 치러진다.


이랬던 그들이[6]

이렇게 돌아섰습니다.

역대 선거정보 시스템에 의하면 1987년 대선 결과

노태우(8,282,738표, 민주정의당) - 36.6%
김영삼(6,337,581표, 통일민주당) - 28.0%
김대중(6,113,375표, 평화민주당) - 27.0%
김종필(1,823,067표, 신민주공화당) - 8.1%
신정일(46,650표, 한주의통일한국당) - 0.2%
홍숙자(사회민주당), 김선적(일체민주당), 백기완(무소속) - 중도 사퇴

야당후보였던 통일민주당 김영삼과 평화민주당 김대중의 단일화가 좌절되고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인한 북풍으로 인해 야권이 축소되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하나회 인사에 의한 정치는 5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 다만 이러한 배경으로 당선된 노태우의 득표율은 대통령으로서 사상 최저였으며 당선 이후에도 13대 총선에서 과반확보 실패로 여소야대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노태우는 김영삼, 김종필을 끌어들여 3당 합당을 감행함으로써 여소야대 국면을 극복하게 되고 이로 인해 기존 정권의 색채는 계속 유지된다. 이때문에 6월 항쟁을 가리켜 '절반의 성공' 으로 지칭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미 크게 치솟은 개혁의 물결을 묵살할 수는 없었으므로 민주화와 자유화, 그리고 냉전 붕괴에 의한 공산권과의 수교 등(이른바 북방외교)은 활발히 진행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1988 서울 올림픽에 전두환이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백담사에 칩거한다든가, 5공 청문회가 열린다든가 하는 기존 정권에 대한 매우 공격적인 상황도 계속해서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한편 1987년 선거는 지역대결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첫번째 선거이기도 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 경북, 강원, 인천, 경기에서, 김영삼 후보는 경남과 부산에서, 김대중 후보는 전남과 전북, 광주, 서울에서 김종필 후보는 충남[7]에서 각각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물론 지역감정을 이용한 선거의 기원은 어디까지 잡겠다고 말하는 데도 다양한 논의가 있을 정도로 60년대 후반 혹은 70년대 초반부터 조짐이 나타나지만 각 후보자들의 연고지와 그 인근에 다득표지가 집중된 것이 1987년 선거에서부터 유독 눈에 띄었으며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 정치에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87년에 있었던 6월 항쟁과 개헌, 대선 등을 통해 확립된 각 정당과 정파의 합종연횡, 정치 체제, 선거에서 드러난 지역구도, 대중에게 각인된 정치 의식과 사회 의식, 세대 의식 등의 다양한 개념등을 통틀어 흔히들 '87년 체제' 라 칭한다. 이 '87년 체제' 는 비단 정치 구도를 칭하는 범주를 벗어나 한국 사회 전반의 구조와 형태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4. 과거사 청산과 민주화의 재조명

6월 항쟁을 계기로 과거사 청산운동, 과거사 진상규명을 비롯해 오랜 세월 동안 금기시 당한 사건과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과 헌법 정신으로 권력을 견제하는 헌법재판소의 탄생 등이 이뤄졌지만 이는 정치적 민주화에 한정된 것이었고 경제적[8], 사회적 민주화에까진 이르지 못했다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그런 시각하에서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논하는 여러 논의들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 하나의 항쟁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착각인 것이고 당시 한국에서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치적 민주화였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여하간 6월 항쟁이 민주화를 이룩한 결정적 사건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른바 386세대의 사고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 사건이기도 하다.

5. 기타

항쟁 당시 이때 친정부 어용, 왜곡언론이라는 이유로 경향신문 뭉치가 서울역 앞에서 화형당하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당시의 기준이다. 이후 신문사의 주주가 바뀌면서 성향이 바뀐 사례.

이걸 다룬 만화로는 최규석의 100℃가 있다. 물이 99℃까지는 온도가 올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100℃가 되면 기체가 되는 것처럼 6월 항쟁을 그때까지의 민주화운동이 계속 벌어지다가 임계점에 이른 것을 100℃에 비유한 제목(만화 내용에 나온다. 링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만화를 볼 수 있다).

6월 10일에 있었던 민정당 전당대회는 호헌조치가 내려진 상황에서는 사실상 다음 대통령을 지명하는 자리였고, 이때 노태우가 지명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막간 공연을 하였던 곳이 MBC였다. 당시 MBC 소속 코메디언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끌던 이가 원고에 쓰여있던 '민정당은 국민에게 을 주는 정당이고, 통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정당'이란 글을 그대로 읽었다. 이 표현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은 하늘을 찔러서 이 코메디언은 이후 사실상 연예인 생명이 끊어지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배추 김병조이다.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 6월 항쟁을 바탕으로 한 대체역사 캠페인이 등장한다. 초기는 역사와 동일하지만 6월항쟁 중반부터 이때를 적화통일의 기회로 본 김일성이 간첩을 투입, 대규모 혼란을 유발시킨다. 전두환은 이를 진압하기위해 군대를 동원하지만 결국 1980년 광주때 처럼 군대가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고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생기게 된다. 이를 틈타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다. 사회적 혼란 때문에 북한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국군과 주한미군은 부산 근방까지 밀리게 되고 부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 미군의 증원을 기다린다.

대체역사소설 <10월의 폭풍>은 6월 항쟁의 끝무렵 김영삼을 모델로 한 야당 지도자가 암살당하면서 다시 시위가 불이 붙어 정국이 혼란해지고 정부의 진압도 과격해지는 가운데, 군 일각에서 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제5공화국을 종식시키면서 전두환은 스위스로 망명하고, 쿠데타 세력이 새로운 군사정권을 수립한다는 가정으로 전개된다. 이 군사정권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쿠데타에 반대해 서울올림픽을 보이콧 하려던 움직임도 달래고, 오히려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한 후 1990년대 초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와 김대중이 모델인 야당 지도자를 둘러싼 암살 음모가 소설의 본격적인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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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중동 중 하나인 그 동아일보 맞다. 물론 (따지고 들어가면 이래저래 복잡하겠지만) 가장 의구심이 강했던 사망 원인에 대한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이것만으로 정치적인 어떠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당시의 동아일보는 親 김대중 신문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야당색이 강했다.
  • [2]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신문, 중앙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의 6대 중앙일간지 중에서 비교적 야당 쪽에도 지면을 할애해서 유연하게 써주는 정도였지 지금의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이 확실한 진보언론은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 [3] 쉽게 말하자면 개헌 논의는 곧 있으면 (1년 後) 서울 올림픽이 있으니 모두 입 닥치고 1988년 2월 25일에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이며 개헌 논의는 올림픽 이후로 미루겠다는 것이었다.
  • [4] 제17보병사단,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30기계화보병사단 등 서울 주변에 있는 부대로 유사시 시위진압에 투입될 수 있는 부대. 유사시라는 말에서 알 수 있지만 계엄과 쿠데타 등과 관련된 일에 동원되기 때문에 충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5] 맨 위의 동영상 10분 20초 부근에서 경찰관도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 [6] 주변 보좌관들은 둘의 성 정체성을 의심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해당 사진처럼 손을 맞잡는 경우는 늘상 있는 일이었고 기쁜 일에는 서로 얼싸안기를 수 번, 길을 가다가 서로 멀리서 상대를 발견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상대의 앞으로 달려가서 반갑게 인사했다고 한다. 이런 절친 오브 절친이었으나...결국 갈라져버렸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가 되어서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입원실로 찾아와 화해의 제스처를 남겼다. 기사.
  • [7] 충북에서는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득표율 3위를 기록했다.
  • [8] 다만 1987년 7~9월 경에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다수의 노조가 결성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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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30 22: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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