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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last modified: 2015-10-31 21:17:28 by Contributors

이 문서는 한국전쟁, 6.25로도 들어올 수 있다.

영어 : Korean War
중국어 : 朝鲜战争, 抗美援朝战争

korea_war.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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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날짜
1950년 ~ 휴전(1953년)
장소
한반도 전역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UN[1] 북한, 중국, 소련
지휘관 이승만
트루먼
백선엽
맥아더
리지웨이
워커
밴플리트
기타 등등
김일성
마오쩌둥
박헌영
김책
김무정
펑더화이
스탈린
기타 등등
결과
휴전 협정후 현재까지 진행중 .
영향
미국과 한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혈맹관계가 됨
북한 또한 중국과 혈맹관계가 됨


Contents

1. 개요
2. 전쟁 발발과 전개
2.1. 주동자는 누구?
2.1.1. 북한의 남침 증거들
2.1.1.1. 스탈린 배후 조종설의 진실
2.1.1.2. 스탈린의 미국개입유도설
2.1.2. 남침유도설
2.2. 전쟁 전야
2.3. 전쟁의 전개
2.3.1. 북한의 기습 남침
2.3.2. 낙동강 전선
2.3.3. 인천상륙작전
2.3.4. 중국군(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
2.3.5. 휴전
3. 미군의 참전과 역할
3.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군사력 감축 배경
3.2. 미국 극동지역의 군사력 규모
3.3.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평가
3.4. 미국의 참전 논의
3.5. 선전포고 논란
3.6. 미군 투입 결정
3.7. 미 해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3.8. 미 공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3.9. 미 육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3.10. 미 군수지원부대의 전개와 활동
3.11. 미 동원령 선포와 예비군 투입
4. 전쟁의 영향
4.1. 부정적 결과
4.1.1. 국군에 의한 학살
4.1.2. 북한군에 의한 인민재판과 학살
4.1.3. 공업기반 파괴
4.2. 긍정적 결과
4.2.1. 사회적 차원
4.2.2. 국가적 차원
4.2.3. 대외적 차원
4.3. 전쟁특수
5. 전쟁에 대한 인식
5.1. 명칭에 관하여
5.1.1. 미국의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5.2. 외국군의 참전과 국제적 인식
5.3. 유엔과 국제 세계의 시각 및 활동
5.4. 북침이냐 남침이냐
5.5. 중국과 6.25 전쟁
5.6.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
6. 관련 기록
6.1. 6.25 전쟁 참전국 및 지원국
6.1.1. 전투 및 병력 파병국
6.1.2. 의료 파견 지원국
6.1.3. 물자 지원국
6.1.4. 물자지원 의사 표명 국가
6.1.4.1. 그 외 지원의사 표명 국가
6.1.5. 공산측 참전국 및 지원국
6.2. 주요 전투
6.3. 주요 작전
6.4. 주요 사건/사고
6.5. 휴전 이후의 사건/사고/전투
6.6. 관련 인물
6.7. 사용 장비
6.7.1. 지상장비
6.7.1.1. 국군 및 UN
6.7.1.2. 공산군
6.7.2. 해상장비
6.7.2.1. 국군 및 UN
6.7.2.2. 공산군
6.7.3. 항공병기
6.7.3.1. 국군 및 UN
6.7.3.2. 공산군
7. 다룬 책
7.1. 역사학계에서
7.2. 군사적
7.3. 다큐멘터리
8. 관련 작품
8.1. 문학
8.2. 영화
8.3. 드라마
8.4. 뮤지컬
8.5. 만화
8.6. PC게임
8.7. 노래
9. 참고 항목


1. 개요

개전 : 1950년 6월 25일 04시
휴전 : 1953년 7월 27일 2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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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데스포,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들>.

흔히들 한강 철교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진. 실제로는 대동강 철교이다. 1950년 12월 4일 촬영했다. 이 사진으로 맥스 데스포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 컬러로 보는 한국 전쟁 1편 - 잔인한 장면이 있으니 시청에 주의할 것.



  • 컬러로 보는 한국 전쟁 2편 - 잔인한 장면이 있으니 시청에 주의할 것.



KBS 특별기획 10부작 유투브 링크 단, 1편은 빠져 있다.

다시 일어나서도, 절대 잊어서도 안 되는 동족상잔의 비극.

임진왜란과 더불어 한반도를 피로 물들게 한 한국사 최악의 전쟁.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서 1950년 6월 25일북한(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부로 정전된 전쟁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전(휴전)협정에 의해 정전(휴전)된 것이라서 만약 남한과 북한 사이에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그건 2차 한국 전쟁이 아니라 한국 전쟁이 재발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대한민국은 정전(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바야흐로 2013년에 남북은 정전(휴전) 60년째를 맞이했고, 그 기념으로 북한은 정전협정의 종료를 선언했다(…). 아아... 좋은 세레머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주로 영미권에서 이 전쟁을 가리키는 명칭인 Korean War를 번역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73년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6·25 사변일(六二五事變日)을 공식 명칭으로 써왔으나, 2014년 3월 24일 개정으로 6·25 전쟁일이라고 규정한다. 대한민국의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6·25 전쟁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른 것이며,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보다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반면 학술용어로는 "한국전쟁(Korean War)"이 굳어져 있다. 6.25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과정, 그 결과 및 여파를 아우르기 어려운 단어이기 때문이다.

한편 6.25 전쟁이란 명칭은 사람들의 인식이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에 그치고 그 3년간의 나머지 역사는 잘 인식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 때문인지 한때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의 개전년도를 몰라서 기사까지 나오는 경우가 흔했지만 2014년 현재에는 개전년도를 모르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휴전연도는 성인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참고로 휴전은 정확히 3년 1개월 2일 후인 1953년 7월 27일 이다.

같은 민족이었던 남북한이 60년 넘도록 둘로 나뉘어져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고 서로 미워하게 된 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흔히들 한국사 최대의 비극이자 한민족 최대의 동족상잔이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론 일제 강점기도 충분히 근대 한국사의 흑역사이고 비극이지만 그건 최소한 국제 정세가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한다'는 정서가 당연했던 시대였고, 무엇보다 한국 전쟁은 미친 놈 하나가 한반도 전체를 전쟁으로 빠뜨린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비극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 전쟁후에 남북한에 독재정치가 대대적으로 벌어져서 남북한의 민중들 둘다 자유가 빼앗긴 점에서 더욱 더 비극이다.[2]

사실 이 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이 될 뻔 했다. 실제로 만약 미국이 맥아더의 요구대로 만주 지역에 원자탄을 떨어뜨렸거나, 중국 대신 소련이 직접 참여 했을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되었을 것이란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 5년밖에 안 지났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들의 극렬 반대로 결국 1951년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말 그대로 한반도 전체를 휩쓸었던, 한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전쟁으라 할수 있다. 물론 이에 수반한 충격 또한 남북 모두 한동안 이 전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컸으며, 앞에서 말했듯 대대로 남북한의 이념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왔고 냉전이 끝난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전혀 안 좋은 쪽으로.

1980년대까지 제1, 제4, 제5공화국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독재정권이 집권할 때 내세웠던 명분이 반공, 북한에서 김일성이 전후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정적을 제거하는 명분 역시 "반동분자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에서 국가운영과 국민여론 및 의식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남북한 지도층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오용됐다.

세계사적으로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하게 된 거의 최초의 사례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아군이었던 미국소련, 중국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을 벌인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6.25 전쟁은 지금까지도 해외에서 '한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가 될 정도로 현대 한국에 대한 인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일본이 부흥하고, 대만에 유배된 중화민국이 살아나는 어부지리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전쟁에 참전한 나라가 세계적으로 워낙 많아서 이를 두고 제3차 세계대전으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세계대전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여담이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이미 완성된 인적 자원과 사회 구조를 가진 국가였고, 한국전쟁 이전부터 경제 재건에 착수한 상태였기에 한국전쟁이 없었어도 결국 부활하기는 했을 것이지만, 한국전쟁이 이를 크게 앞당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전쟁 발발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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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싸는 무시하자
출처 : 태극기 펄럭이며(김성모작)

굳이 끼워 맞추자면 저 상황은 애치슨 라인이 설정된 직후라고 보면 된다. 다만 스탈린은 저 그림 상의 상황과는 달리 김일성이 전쟁 일으키자는 땡깡을 48번이나 기각시켰다. 그러나 애치슨 라인을 알게 된 스탈린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결국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는 상황으로 끼워맞출 수도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혹부리 돼지가 아니라 각진 얼굴에 늠름해진 데다가 목 뒤에 붙은 혹도 없어졌고 스탈린은 간신배화 되었으며 모택동은 국공내전때 엄청나게 고생을 한 탓인지 살이 쪽 빠졌다. 고증오류?

그러나 이미 과거 소련의 비밀공문서가 공개된 현재,기존의 가설들은 모두 유보되고있는 실정이다.

2.1. 주동자는 누구?

들어가기에 앞서, 남침북한으로 략했다는 뜻이고, 북침남한으로 략했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남침은 남한이 침략 한것이 아니라 침략 당한 것이다. 아니 왜이렇게 큰글씨가 웃기지?? 혹시 뜻을 반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문서 아래에 있는 항목을 참고하라. 헷갈리지 말자.

정 모르겠으면 X침을 했을때 손가락이 아플까, 거기가 아플까? 라는 식으로 억지로 외워도 좋다
"선생님 손이 니 똥꼬를 침략했어. 그럼 그건 똥침이야, 손침이야?"
" 북한에서는 똥꼬가 손을 찌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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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신문에서 만든 만평. 사실 남북을 뒤집으면 북침이 맞다.
헷갈리게 한번 더 꼬아주기

2.1.1. 북한의 남침 증거들

2010년대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정권 확립과 당시의 우세를 활용해 조기에 남한을 제압하려던 김일성과 공산 파르티잔 세력을 비롯한 남조선로동당 인맥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던 박헌영의 주도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이나 남한의 극소수 세력은 북침이나 소련의 배후 조종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소련 기밀문서의 공개 등으로 대부분 설득력을 잃었다. 그렇다고 소련과 중국이 전쟁의 원흉이 아니라는 뜻도 아니다. 애초에 소련, 중국이 개전 허가를 안 하고 지원을 안 해줬다면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수 있다.

북한의 주장을 제외하면 정말로 남한이 북한을 선공했다는 북침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문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북침설을 주장한다."고 지목되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가려진 부분을 지적하는 것을 의도했던 것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지목되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도 6월 25일날 먼저 총공세를 펼친 것은 북한이 맞다고 서술하고 있다. 다만 그 이전에 38선 부근에서 서로 2 ~ 10㎞씩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국지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국내 학계에선 최초로 도마 위에 올렸고, 한국전쟁은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참고로 브루스 커밍스는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로, 미국 외교 기밀 문서가 공개되면서 그에 기반해서 냉전사를 해석하였다. 미국의 외교 기밀 문서들은 25년을 시한으로 공개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

그러나 국지전은 매우 소규모의 무력시위에 불과했다. 일단 규모 자체도 어떤 경우엔 분대급에 불과했고 보통 중대급, 커봐야 대대급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런 국지전이 6.25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는 것이 2013년 현재 학계의 결론. 굳이 6.25 전쟁과 국지전이 관련이 있다면 당시 교전 규모를 봤을 때, 38선 부근의 국지전은 신생 북한군의 전투 경험 습득과 교리 시험을 위해 북한이 지속적으로 남한지역을 내습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전면전 발발 이전부터 북한은 부단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실제로 1949년 쯤 가면 개성시에서 북한군 부대가 박격포로 하도 공격를 해대는 지경에 주민들이 항의하는 수준까지 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커밍스가 틀렸다.

사실 북한군이 미리 전쟁을 준비했다는 가장 큰 증거는 남침 직후 수십~수백 킬로미터 수준의 작전기동을 했다는 것 자체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미리 계획을 세우고 충분한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면 부대는 자기 주둔지를 함부로 떠날 수 없다.

그러나 커밍스의 연구는 해당 분야에 대한 극초기의 연구이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전쟁 직전의 대한민국 국군은 물자와 장비가 부족하고 군사훈련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 전면전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결론이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그저 물자와 장비, 병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UN 한국위원회와 미국의 극심한 통제 속에서 전쟁 준비 같은 걸 생각할 수 있는 상황조차 되지 못했다. 이 당시 UN 한국위원회의 한국군 통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 하다 못해 소총 한 발도 한국위원회의 승인 없이 불출할 수 없었다. 특히 1990년대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소련 측 외교문서가 공개되자, 신전통주의적 해석이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의 배후 조종설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주장의 핵심은 북한 지도부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고, 소련 정부가 표면상 내세우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6.25 전쟁사와 관련된 연구 초기부터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북한에 대한 소련의 막대한 물자 공여와 장교 파견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냉전 종결 이후 소련의 기밀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이것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나 이것이 과연 소련이 주도한 것인지는 의문점이 남는다. 김일성이 이전부터 마오쩌둥, 스탈린과 접촉한 징후가 보이기 때문. 즉 김일성이 공산권 거대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공산권 국가들이 이를 들어준 모습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안달하는데도 그걸 48번씩이나 거절했는데 김일성이 그치지 않고 애치슨 라인까지 들먹이며 요구를 하자 끝끝내 승인했다고 한다. 다만 스탈린이 무슨 평화주의자라서 이 전쟁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전면전을 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일이 크게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스탈린 개인은 소련의 현(당시 기준) 전투력이 미국에게 많이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면전을 반대한 것이었지만 김일성은 철딱서니 없게도 이러한 국제정세 따윈 나몰라라 하고 그냥 자기 사리사욕만 채우려고 스탈린에게 땡깡을 부린 것이다.

참고로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개된 기밀 자료 중에 한국전쟁 당시 북한 주재 소련 대사이자 북한군 배속 소련군사고문단장인 라주바예프(당시 중장) 장군이 당시 상황을 보고한 라주바예프 보고서(1-4권, 국내 번역됨)에는 라주바예프 장군이 한국전쟁 중인 북한에 착임하게 된 과정과 그 이후 전쟁 전개 과정에 대한 분석이 실려 있다.

매우 생생한 묘사와 서술로 사료가치가 높고, 더군다나 소련의 개입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라주바예프 중장이 착임하게 되는 1950년 10월 경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는 소련의 한국전 개입을 확실하게 설명한다. 개전 당시인 6월 25일의 북한 주재 소련 대사는 스티코프 중장, 군사고문단장은 바실리예프 중장이었다.

스탈린은 3차 대전을 우려해 소련인 군사고문은 38선을 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군사고문의 작전지도에 애로사항으로 작용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스탈린은 현지에 파견된 소련 대사와 군사고문단장의 무능에 격노하여 이 둘을 교체하고 라주바예프 중장을 파견해 위의 두 직위를 겸직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 소련은 한때 2차 대전의 영웅 말리노프스키 원수를 파견해 조선인민군을 지휘하게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 전쟁 초기에 한국군에 투항한 북한군 장교출신자는 2010년 경 방영된 KBS의 '한국전쟁(다큐)'에서 "6월 25일 개전을 앞두고, 소련군 고문이 '훈련담당 고문'에서 '작전담당 고문'으로 싹 교체되는 걸 보고 전쟁을 직감했다" 라고 증언한 바도 있다. 참고로 이 분은 인민군 6사단 출신으로, 당시 6사단은 개전을 앞두고 중국 팔로군의 조선인 부대에서 조선인민군으로 일괄 이관된 인원으로 구성된 조선인민군의 정예부대였다.

전쟁 당시 신의주에서 교사를 지냈던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송성문은 한국전쟁이 북한 지도부에 의해 1947년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남침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

결론은 정말로 북한은 가만히 있는데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거나, 북한은 그럴 의지가 없는데 소련이 시켜서 한 짓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퇴출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다만 소련이 시켜서 한 짓이라는 주장은 북한이 자주성이 없는 정권이라고 까기 위해 이 주장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이래도 까고 저래도 까는 것.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한국군의 북침설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60년대 중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으로 교과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남침 자체는 빼도박도 못하는 진실이기 때문. 대신 전쟁 주체 및 과정을 중국에 유리하게 해석하여 중국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북한 지도부는 북침설을 주장하며 "미국의 조종을 받는 한국군미군이 북침했다"는 주장으로 일관하지만, 앞에서 봤듯이 실제로는 중국 및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이 남침을 한 것이다. 실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 남한의 미국의 군사 고문단은 철수 중이었지만 소련은 북한에 영관급 장교를 군사고문단으로 파견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기밀 해제된 문서들은 아예 정확한 날짜와 과정을 열거하며 남침 준비를 위한 준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1.1.1. 스탈린 배후 조종설의 진실

실제 김일성의 '조국해방전쟁'에 대하여 소련이 그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과 그 중심에 스탈린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개입에 있어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대해서 수차례 거부의사를 표명했으며, 국제적 정세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계획을 반대했다. 그리고 49년부터 50년 초까지 이어진 38선 부근의 국지적인 충돌에 대해서도 북한 측에게 절대 먼저 도발하지 말 것을 권고하기도 했으며, 전쟁을 승인하고 전쟁이 발발하여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순간에도 소련은 전장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이러한 소련의 모습은 유엔 안보리 불참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은폐하여 국제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북한에 대하여 군사적 지원과 원조를 통한 전쟁 개입으로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며, 김일성의 공군지원 요청에 대해서도 군사적 개입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작전범위를 한정하여 지원한 것으로 대변 가능할 것이다. 즉 위의 모습 모두 북한에 대한 확실한 지원도 그렇다고 부족한 지원을 제공한 것도 아닌 것으로, 모른 체하지는 않지만 결정적 지원은 하지 않으면서 한반도내로 전쟁을 제한하고 또 교착상태로 전쟁을 이끌어나가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련과 스탈린의 입장은 한국전쟁 관련 구소련 군사외교문서에서 일부나마 확인되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6.25 전쟁은 김일성이 주도해서 시작한 전쟁임을 알 수 있고 박헌영의 남조선 인민봉기는 전쟁 개전의 정당성으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2.1.1.2. 스탈린의 미국개입유도설

2000년 이후 스탈린과 고트발트의 편지내용이 담겨있는데 이 편지내용에 따라 미국개입유도설이 제기됐다. 자세한건 해당항목 참고바람.

2.1.2. 남침유도설

단, 북한이 쳐들어올 걸 뻔히 알면서도 미국에서 수수방관했다는 음모론은 존재한다. 남한이 북한을 공격했던 몽금포 전투가 있던걸 보면 아마 이것 때문으로 보인다. 일명 '남침유도설'로, 2차대전 중 돈을 신나게 빨았던 미국의 군수산업이 종전이 되자 만든 물건 어디 써먹을 데 없나 걱정이었는데 김일성이가 뻘짓하는 게 빤히 보이니 낚싯줄을 드리웠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군비 군수 확장 요청에도 미군은 거절로 일관했고 이에 대해서는 북진을 공공연히 주장한 이승만의 탓이 있다고 하나 제주도, 여수, 그리고 빨치산까지 판치며 공산당이 국내를 혼란시키는데[3] 이승만 입장에서 평화롭게 있자고 하는 것도 웃기다. 남한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통일을 시도하면 소련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할 것이라 판단한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호전적인 태도에 응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한국은 미국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었고 미국 정부와 이승만은 사이가 안 좋았다. 또한 애치슨 라인에서도 한반도를 제외함으로써 확인사살까지 했다.

이걸 밀고 들어가서 "북한은 미국의 음모에 휘말린 또 하나의 희생자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 주장이 강간범이 자신의 범죄 동기에 대해서 '여자가 야하게 입고 다녀서 유혹하는 줄 알았다'라고 진술하는 것과 다를 게 뭘까? 잘 이해가 안 간다면 비슷하게는 제2차 세계대전도 나치 독일의 책임이 아니라 영국프랑스의 음모에 히틀러가 휘말렸을 뿐이라는 주장을 떠올리면 쉽다. 말이야 뭔들 못하겠느냐만은...

더군다나 만약에 남침유도설이 맞다면 한국군이 박살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남침을 유도해놓고 요격에 나선 미군 역시 투입하는 족족 박살이 난데다 이후에도 삽질을 거듭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찰스 스미스 부대, 미 24사단 참고.

특히 전선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쟁 초기에는 미군 병사들도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하고 한국에 보내지는 족족 총알받이로 내몰려 무더기로 죽어나갔으며, 개전 초 미군이 북한군의 공격에 연이어 패한 데는 이러한 병력의 자질 문제도 있다. 게다가 군수산업을 돌릴 큰 시장을 미국이 원했다면 차라리 중국의 국공내전을 장기화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게다가 요격에 나섰다는게 겨우 1개 대대, 그것도 2개 중대로 이루어진, 대대원 540명에 장교숫자는 겨우 15명 안팎 정도밖에 안되는 찰스 스미스 대대 요거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게 쳐발리고 나서야 윌리엄 딘 장군의 미 24사단이 나섰다. 남침을 유도해 놓고서 남침한 북한군을 때려잡는다는 게 꼴랑 1개 대대밖에 안된다면 남침유도 자체가 말이 안된다.

더불어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유도설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최근에도 남침유도설을 정설로 주장하는 서적이 나오곤 하지만 순전히 책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일례로 남침유도설을 정론으로 내세운 <한국전쟁의 수수께끼>의 경우 한국전쟁 50주년을 노리고 출판했다가 반응이 시들하자 10년 후에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 <6.25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내용을 살짝만 바꾸어 신간으로 속여 출판했다. 저자 자체가 이글루스에 스스로 만점 먹이면서 완벽한 책이라고 홍보하다가 왕창 까이고도 계속 남침유도설이 만고의 진리임을 전파하는 걸 보면 정말 책 팔고 싶은가 보다. 님들 책좀 사주세염 돈을 못벌어염

2.2. 전쟁 전야

전쟁 이전에, 남북한 모두 남북 분단이 가시화된 시점부터 상대 지역을 '미수복 영토'로 보고 북한에서는 '북한을 먼저 사회주의화시켜 민주 기지로 삼은 뒤 남한을 점령해 사회주의화시킨다'는 민주 기지론을,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주장했던 북진 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남한의 북진 통일론은 진정성이 있었는지, 그저 반공 이데올로기 조성을 위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를 근거로 무기와 군사적 보조를 요구하는 이승만의 요구는 미국에게 그대로 묵살당했고, 당시 남한은 사올 무기도 제대로 못 사오는 형편없는 경제력을 보여줬다.

전차만 해도 한국군은 이미 소련에서 북한에 전차를 지원한 사실을 파악하고 전차의 도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미국 측은 한국군이 전차를 보유할 경우 이를 이용해 북진을 추진할 가능성을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보다 훨씬 높게 보았다.(...) 물론 한반도의 지형적 요건상 전차의 활용도가 높지 않고 한국군에게 지원한 바주카나 대전차지뢰 정도로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도 크게 작용하긴 했다. 태평양에선 셔먼으로 그렇게 썰고 다녔으면서?

당시 남한에는 전차가 0대, 전투기도 0대로 연습기만 10여 대가 있었던 반면 북한은 둘 다 수백 대를 보유한 상태. 당연히 김일성으로서는 적화통일의 구미가 당기는 상황이었다.

북한 내부에서는 서서히 김일성에게 정치적인 힘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연안파 세력은 국공내전에 실제로 참전 중인데다가 소수 조선의용군이나마 입성하다가 소련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등 북한 내에서 입지를 넓히기에 힘이 달렸고, 소련파 또한 행정가로서는 뛰어났지만 소련에서 태어난 한인 2, 3세로 구성되어 북한 내에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결과 두 세력은 김일성파에게 협력하는 식으로 정권에 참여해야 했다. 남조선노동당 세력은 활동의 연혁이 오래되어 지지 폭은 넓었으나 말 그대로 남한에서 쫓겨온 식이라 실질적으로 정치적 입지는 좁았다.'

김일성은 서서히 이들을 압박해 나갔고, 그 결과 박헌영은 "우리가 남침을 행한다면 남한 해방을 원하는 빨치산 10만 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지만, 1994년 공개된 북한-소련 외교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남로당 봉기설은 접었다. 출처는 kbs역사스페셜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 북한군,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

김일성의 계획안은 대략 이러했다.

  • 한반도를 적화통일시킬 경우
    • 한국이 소련에 편입될 경우 김일성은 소비에트 연방의 '까레야 공화국' 서기장이 된다.
    • 독립을 유지한 상태로 공산국가가 된다면 김일성은 적화통일된 한국의 수령이 된다.

  •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했는데 땅을 잃지 않을 경우
    • 패배를 핑계로 패전의 책임을 박헌영을 비롯한 정적(政敵)들에게 죄다 뒤집어 씌워서 싹 숙청하고 비록 반쪽짜리일지언정 북한의 수령이 된다.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었다. 실제로 1953년에 휴전이 되자 김일성은 이걸 핑계로 1955년에 자신의 정적인 박헌영 등을 포함해 연안파, 소련파를 숙청했다. 다만 최용건은 바지사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숙청하지 않았다.

  • 이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하고 땅마저 잃었을 경우(멸공통일)
    • 김일성은 소련으로 망명해서 그곳의 군 수뇌부 중의 한 명이 된다. 언젠가는 다시 공산국가로 만들게 될 한국의 임시통치자의 직함도 겸하게 된다. 다만 이 정도라도 김일성의 안위를 매우 위태롭게 할 수는 있었겠지만, 위의 군사력 관련 내용을 보라. 정규전 이후라면 모를까, 정면 승부 자체로는 도저히 북한이 질 것 같지가 않았을 것이다.

즉 김일성에게 불리한 카드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 김일성은 전쟁 계획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었다. 결국 김일성이 나름대로 생각한 6.25 전쟁은 전혀 밑질 것이 없는 장사인 셈이었다. 이기면 적화통일되는 거고 패배함으로 인해서 잃는 것은 자신의 정적들이다.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해도 보신할 수 있는 보험이 있었다. 김일성의 이러한 정치적인 목적 역시 6.25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스탈린한테 50번씩이나 떼를 쓴 거였구나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김일성 혼자만의 착각이자 망상일 뿐이며 실제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생각 중에서 비교해본다면 스탈린이 옳은 것이다. 만약 남한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미국과 전쟁에 말려들고 이게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면 김일성 본인 정도가 아니라 한반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씨가 마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전세계 인구의 과반수 이상이 죽어나갈 수도 있는 엄청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제3차 세계대전을 걱정했던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인지라 추후 1.4 후퇴당시 소련은 공군을 북한에 지원했고 이를 미군이 눈치챘으나 미군은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여 이 공군이 소련군인 것을 알면서도 중공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눈치를 엄청나게 봤다. 결국 김일성 혼자만의 쓰레기같은 야욕 하나때문에 인류사에 크게 악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계속해서 지원을 요청했으나, 1949년 이전까지 중국과 소련은 북한을 돕기에 곤란한 요소가 많았다.

중국은 비록 마무리 단계이기는 했으나 국공내전을 진행하고 있었고, 소련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이래 미국에 대한 군사적 열세 의식을 지니고 있어 참전을 꺼렸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국공내전에서 우세를 굳히면서 1949년 10월 1일 정식으로 건국을 선언했고, 1950년 5월에는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때 중국 내 한국인들로 편성해 총괄하였던 조선의용군 2~3만 명이 북한 내로 유입되어 조선인민군을 증강했다.

소련도 생각보다 미국에게 밀리지 않고 냉전이 굳혀지는 상황을 확인했고, 1949년 6월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군사적인 자신감을 회복했으며, 결정적으로 애치슨 라인을 보면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한편 이에 대해서는 최근의 반론도 존재.

반면 1949년 후반부터 1950년 초반까지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에 대해 다소 혼란스럽게 생각했던 듯하나, 앞서 언급했듯 대체적인 골자는 '남한 침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였던 듯하다. 1949년 12월 작성된 미국의 NSC-48/2에서는 한국을 방위 지역에 넣지 않았으며,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에서도 한국과 대만을 방위 지역에서 제외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북한의 공격 준비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38선 지역의 교량 건설 작업이나 북한군의 배치 상황 등이 수많은 루트를 통해 맥아더 사령부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알면서도 무시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안중에 없었던 것에 가깝다.

애초에 한국은 형식만 맥아더의 관리지 미국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곳이라서 맥아더는 일본의 통치에만 골몰했으며,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고위관료들의 인식 속에 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 이미지로 남아 있었기에 미국은 소련이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북한을 이용해서 남한을 밀고 들어오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즉 "남침할 것 같은데 일단 지켜본다"가 아니라 "그래봐야 남침 가능성 거의 없다" 정도의 태도였던 것이다.

문제는 아래에도 서술되는 바와 같이 영 꺼림칙해하는 스탈린을 김일성과 박헌영이 설득해서 원조 협정을 받아낸 데 있다. 미국의 인식과는 달리 북한 정부는 훨씬 더 독립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으로 남침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만 1950년 4월, NSC-68에서는 이러한 눈치를 집약해 좀 더 적극적인 방위안을 계획했으나, 여전히 한국에는 특별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1948년 12월, 소련이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철수시키면서 간접적인 압박을 받아 군사 고문단만을 남겨둔 채 1949년 6월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한 바 있었고, 이를 원하지 않았던 이승만과의 갈등도 커졌다. 앞서 말했듯, 이승만과의 갈등은 도리어 가득이나 대대적인 군축중인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더욱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남북간의 충돌은 소규모로나마 제법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1948년 남북한에 독립 정부가 구성된 이후부터 남북한 양측은 각자 내부에서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육군의 육탄 십용사도 이 당시 이야기다.

주로 개성, 옹진, 의정부 등에서 이러한 국지전이 벌어졌는데, 대개 38선에 걸친 산과 봉우리를 두고 분란이 벌어졌다. 개성과 옹진은 도시를 남한이 영유하고 그 뒷산을 북한이 영유한 상태였으며 북한은 여기에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비교적 뒤늦게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국군은 이를 완화하기 위해 38선에서 걸친 고지의 점유에 보다 적극적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단, 이러한 국지전은 1949년 6월부터 8월 경까지 활발해지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한미군의 철수로 인해 불안해진 이승만이 국제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서 보다 공방전에 적극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한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기도 했다. 1949년 12월 17일 정보국이 상부에 올린 '연말종합적정판단서'인데, 놀라울 정도로 북한의 초기 작전을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 정부는 이 보고서를 무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은 1949년 말까지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 적의 병력은 전차 150대, 항공기 200여 대, 각종 포 2000여 문으로 장비된 10개 보병사단 약 19만여명으로 판단된다. 적은 주공을 동두천-의정부-서울로, 조공을 개성-문산-서울, 춘천-원주, 속초-강릉으로 하여 선제공격할 것이다. 적의 기습 시기는 50년 3월경으로 예측되나 동북 지방의 중공군 출신 의용군 편입이 늦어질 경우 6~8월로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 적의 전차는 아군에 대한 결정적 위협이 될 것이며 공중 지원과 해상 게릴라의 상륙 침투를 병행할 것이다. 남침을 전후해서 무장 공비에 의한 남한 후방 교란 활동을 격화시킬 것이다. 적은 위장된 평화 정치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이 보고서는 우파에서 간혹 이야기하는, 박정희가 작성했다는 문서다.출처는 정재경이 쓴 한국전쟁사 115~116p. 참고.

그리고 6월 중순, 하순은 남한 지역의 농번기였고 당시에는 농업이 국가의 주력산업이었다. 실제로 인구의 60~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국군에서는 농번기에 장병들에게 모내기 휴가를 대대적으로 보내어 6.25 전쟁 개전 당시 한국 육군 전 병력의 3분의 1 가량이 휴가 상태였다. 물론 한국 정부나 군이 바보라서 이렇게 휴가를 내보낸 건 아니었다.

1950년 2월에 총선거 일정이 그 해 5월로 결정되면서 한국군은 비상대기태세에 돌입했다. 당시만 해도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무장빨치산이 준동하던 때였다. 1950년 초반의 신문들을 찾아보면 이 때까지도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정신없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선거 일정이 대통령의 꼬장으로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자연히 비상대기태세도 엿가락처럼 늘어나고, 심지어 선거가 끝나고도 비상대기태세가 해제되지 않으면서 전군의 피로도는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는 것.

여기에 6월 중순 한국에 방문한 UN 한국위원회에서도 한국군이 불필요하게 비상대기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문제삼으면서 한국군은 별 수 없이 6월 23일을 기해 비상대기태세를 전면 해제하고 전 군에 대대적인 휴가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비상대기태세를 해제하자마자 대대적인 휴가를 실시했는지가 의문일 수 있는데, 3개월이 넘게 휴가 외출 외박 없는 비상대기태세를 유지하다 보니 군량미가 바닥난 것이었다(...). 당시에는 휴가 장병들에게 건빵을 지급했는데, 상황이 이러니 반대로 건빵은 창고에 가득 남아 있었다. 이러니 울며 겨자먹기로 병사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3. 전쟁의 전개


양측의 전선 변화를 동영상으로 요약한 것. 상세한 내용은 후술.

2.3.1. 북한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시 양측 병력배치현황. 기호에 대한 의미는 단대호 항목을 참고하면 된다.

사단을 표시한 위에 x자 2개가 있는 상자의 크기가 국군이 더 크기 때문에 국군이 병력상 우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상자의 크기와 부대의 규모는 별개다. 상자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사단이 담당하는 구역이 넓다는 것. 북한의 사단을 표현한 상자의 크기가 작으면서 여러 개라는 점을 주목하자. 즉, 북한은 동일 전역에 더 많은 사단을 투입하여 국군보다 수적으로도 우세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폭풍" 이라는 작전명 하에 북한은 전면적인 남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그 때 브라질에서는 월드컵 시작 휘슬이 울렸다 물론 북한에서는 열심히 '남한이 먼저 쳤다'고 하나, 그런 식의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며, 있었다 한들 이전에 빈발했던 국지전 수준의 전투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설이 절대 다수이다. 쉽게 말해서 책상 위에 금 긋고 '헐 님 손가락 넘어왔으니까 팔 자름ㅋ'하는 상황 이해가 너무나 잘 된다

이러한 와중에 군 수뇌부는 미 군사고문단과 함께 이렇게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모여서 놀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전방 사단의 경우 전력의 대부분이 외박, 아니면 휴가였다. 북한에게 오라고 광고를 한 셈. 다만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이, 38선상에서의 연이은 무력충돌과 전쟁 발발설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 당시 군은 직전까지 장기간동안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참이었다. 상술한 대규모 출타도 이로 인한 병력들의 피로도를 고려한 전투력 회복 차원에서 조치되었던 것. 한편 이 건에 대해서는 역으로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 항목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시각도 있다.

본격적 개전 이전부터 연속되던 국지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6월 24일의 국지전이 있었느냐, 있었다면 어느 쪽 책임이냐 하는 문제를 떠나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것은 북한이 전쟁 준비를 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현실적으로 미리 준비하지 않고 대부대가 전투를 수행하며 수십 킬로미터를 전진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요컨대 설령 한국전쟁의 개전이 남한의 선공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이 남한에 대한 공격의사가 명백했음이 결과론적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주먹으로 싸우다가 갑자기 저놈들이 돌 들고 오네 ㄷㄷ

1950년 6월 25일. 장마철과 겹쳐서 군대의 진군에는 적절치 않은 시기인 초여름에 개전한 이유가 가관인데, 김일성 자신이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통일 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단다. 본격 히틀러 빙의 38선에서 최종목표 부산까지 500km라 가정하고 소련군 고문관이 계산한 하루 10km씩 진격할 것을 가정하면 50일이 소요되는데, 8월 15일에서 50일을 역산하면 6월 25일이니까 이 날을 개전일로 택일하여 북한군이 선제 공격에 나서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뭐 이런 주먹구구식…

그래도 국군 전방지휘관들이 모두 바보는 아니었기에 북쪽의 동향이 수상하다는 첩보에 따라 24일 저녁에 전방 사단에서 몇 개 팀의 정찰조들이 38선을 넘어 정찰을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조가 대규모의 전차들이 남진하는 것을 목격했으나, 재수가 없으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보고하려고 하니 당시로는 최첨단 통신장비였던 미제 SCR-300 무전기가 맛탱이가 가버렸단다. 정찰대원들은 결국 적 후방에 남겨졌고 일부는 실종, 일부는 인민군을 털어서 변복을 하여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뭐, 무전기가 고장나지 않아서 전차가 떼로 몰려온다는 보고가 들어갔다고 해도 변변한 대전차 무기도 없었지만. 다만 이 이야기는 공식 전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니 알아서 걸러 들을 것.

개전 시각이나 첫 교전이 일어난 시간이 언제였는지에 대해서는 참전 용사들의 증언이 매우 엇갈리고, 당시 육본의 상황은 그야말로 개판 5분전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육군본부에서 동시다발적인 교전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한 새벽 4시로 개전 시각을 서술하고 있다. 이 때 육군본부에서 당직근무를 서고 있던 당직장교는 당시 육본 정보국 연락장교였던 김종필 중위였다. 이 김종필은 훗날 거물급 정치인으로 이름을 떨친 그 김종필이 맞다.

김종필은 육본 국장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깨웠고, 당직사령에게 전군에 비상을 걸 것을 건의했으나 육본 당직사령은 자신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며 거절했다. 채병덕 총참모장에게도 바로 연락이 갔으나, 클럽에서 놀다가 새벽 2시에 들어간 채병덕 총장은 급보를 들었음에도 잠깐 깨서 통상적인 국지전일 거라고 한마디 하고 도로 잤다. 아 시발 없다고 하라고

결국 전군에 비상이 걸린 것은 급보가 들어오기 시작한 지 4시간이 지난 오전 7시였다. 이때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전쟁도 주말에는 쉬는 줄 알았는지 "신사는 주말에 근무하지 않습니다."라며 전화코드 뽑아놓은채 자고 있었고,과연 윗놈들도 신사인지는 넘어가...야 하나? 이승만 대통령은 9시가 넘어서야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미군에 대해 기술한 부분에도 나오지만 미국 역시 트루먼 대통령이 휴가 떠나있는 것을 필두로 장관, 참모총장 등 모든 지휘라인이 부재중이었다. 뭐야 이거 무서워

한국에는 산이 많고 그나마 조금 있는 평지들은 죄다 질펀한 논바닥이라서 전차가 기동하기 힘들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서와 같은 대규모 전차전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군은 대전차무기를 달라는 국군에 2.36인치 M9 바주카와 57mm 대전차포만 있으면 모든 황군 전차들을 다 까부술 수 있다며 이것들을 주고 갔으나, 그건 미군의 청바지가 잘어울리는 여자희망사항이었고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미군이 준 바주카와 대전차포는 구일본군의 97식 전차같은 깡통은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지만, 북한이 보유한 소련제 T-34/85 전차들을 막는 데는 택도 없었다.

국군 대전차반들은 미군들의 호언장담을 철저히 믿고 있었기에 굴러오는 전차들을 사정거리 내로 끌어들여 정확히 사격을 했으나 전차가 끄떡도 하지 않자 멘붕에 빠져버렸다. 포병대가 나서서 M3 105mm 견인곡사포로 적 전차에 직접조준사격까지 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당시 국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인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까지 동원되었지만 이 역시 T-34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떼삼사 스펙도 모르고 있던 미군?

전차가 없는 전선에서도 열세는 명백했다. 당시 백선엽 장군의 동생 인엽 대령이 연대장으로 있던 육군본부 직할 17연대는 황해도 옹진반도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공격해온 북한군은 전차가 없긴 했으나 3배에 달하는 병력과 포병, 장갑차 등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17연대는 전력을 다해 항전했으나 끝내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게되자 해군이 급히 파견한 LST를 타고 해상을 이용해 하루만에 남은 병력이 무사히 철수했다. 원래 옹진반도는 애초에 38선 이남 지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퇴로가 바다 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 전체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비교적 성공적인 탈출 케이스였다. 이후 17연대는 낙동강으로 물러서기까지 말 그대로 용전분투하면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상으로 해병대가 아닌 육군 부대임에도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례는 전체 전선의 절망적인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장 숫적으로도, 장비로도 열세인 상황에서 농번기로 인한 대규모의 외박, 외출로 38선에 실제 배치된 병력은 편제보다도 더 적었고, 여기에 채병덕의 뻘짓까지 가해지자 제6보병사단춘천에서 북한군 2군단을 3일간 저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 전선에서 신나게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다만 문산과 봉일천 방면에서는 백선엽 대령의 제1보병사단이 그나마 건투하고 있었다. 사실 전방 4개 사단중 1사단(문산), 6사단(춘천), 8사단(강릉)은 각자 제자리를 지키고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1사단은 오히려 역공으로 나가 일부 시가지를 탈환하기까지 했고, 6사단은 포병으로 북한군 1개 군단을 초토화 시키고 있었으며, 8사단은 지형 자체가 험난해 적이 올만한 길이 정해져 있어 비교적 쉽게 막고 있었다. 문제는 북한군 주공인 포천/동두천-의정부 축선. 이 축선은 계곡을 따라 개활지가 펼쳐진데다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침공회랑으로 딱 알맞은 곳이었다. 이 취약한 방면을 지키고 있던 건 예하에 2개 연대밖에 없던 7사단이었고, 사단 정면에는 북한군 3, 4, 15사단과 105전차여단 예하 전차연대 둘이 투입됐다. 7사단은 그야말로 박살이 나서 돌파당한다. 전 전선에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어작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7사단이 초장에 무너지자 북한군은 개전 첫날 그대로 서울로 난입할 뻔 했는데 일제시대때 일본이 대체 뭐했는지 도로가 너무 좁아서 북한군 전차가 통과가 불가능(...)해 거꾸로 돌아가다가 후속하는 부대와 섞이는 대 혼란으로 2일을 낭비한다.

이 기회를 틈타서 군 원로들의 건의에 따라 한강을 축선으로 방어작전에 들어가 미군의 지원을 기다리고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전시내각을 구성하여 전 서울시민을 동원, 사즉생 생즉사의 각오로 결사의 방어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딴 거 없었다. 육군본부가 혼란에 빠진데다가 정치권에서 무리한 반격 요구를 내미는 바람에 의정부 방면에서 무리한 반격이 수행되었으며, 그 결과 방어선이 무너져내리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병력은 오는대로 축차투입되어 허무하게 사라졌다.

한편 채병덕 장군은 군 원로들에게 상황브리핑을 하는 자리에서 또 '명령만 내리면 즉각 반격작전에 들어가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타령을 하다가 원로들에게 구박받았다. 히틀러가 죽고 나서 가라는 저승에는 안가고 한국에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북한군 전차 2대가 서울 시내에 진입하자 너무 서둘러서 한강대교한강철교를 폭파하는 바람에 그나마 남았던 병력마저 총붕괴되고 말았다. 결국 이소식을 듣고 1, 6, 8사단은 성공적으로 방어작전을 하다가 후방 차단의 위협 때문에 후퇴해야 했다. 특히 경기도 방면의 1사단은 후퇴하라는 명령도 못듣고 그냥 장비 전부 버린 상태에서 개개인별로 한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덕분에 전쟁 3일만에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함락되면서 국군의 병력은 개전 전 10만여 명에서 이후 3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얼마 안 되는 장비와 물자도 한강다리가 끊기면서 한강 이북에 놓고 온 탓에 대부분 잃어버려 전쟁이 조기에 북한군의 승리로 종결될 가능성이 보였으나, 미국이 개전 이틀 만에 UN군 파병을 결정하면서 전쟁은 국제전 양상을 띄게 된다.

물론 7만의 병력이 다 전멸하거나 포로로 잡힌 것은 아니고, 상당수는 전선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숨어 지내다가 국군이 반격에 나선 뒤에 하나 둘 합류했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한국전쟁 내내 반복된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참전을 반대했으나, 소련이 우연히 불참해서 파병안 가결을 한 것이라는 게 근 40~50년간 정설이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기밀 해제된 스탈린 정권 시절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북한을 도와 참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겨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지속하고 중국 또한 한반도에 끌려들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지 생각해보자"며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고 우리에게 국제 세력균형에서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치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당시 소련은 유럽에서 불원간 미-서유럽 동맹과 공산권의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 전력 면에서 소련이 열세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단 이는 전쟁이 이미 시작된 뒤에 보낸 편지라는 점에 주의하자. 스탈린의 주장은 '변명'일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그 우연이라는 것도 시각의 차이일 뿐 우연이 아니다. 당시에는 UN이 대만에 있는 국민당중화민국 정부(화이트 차이나)만을 공식적인 중국 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레드 차이나)이 UN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줄 때까지 UN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고 유엔의 모든 회의에 대해서 계속 보이콧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이 만약에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며 UN군 결성을 반대하였더라도 미국은 어떻게든 UN의 이름을 따낼 작정이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소련이 변덕을 부려 다시 출석할까봐 안보리가 아닌 총회의 이름으로 참전을 결정하게 한 것이다. 총회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독점권이 의미가 없는데다가 당시 유엔 회원국의 대다수가 미국 편인 서방 진영의 국가들이었으므로 소련의 반대 따위는 표로 눌러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밑의 내용을 더 보면 알겠지만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면 소련이 북한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소련 영토까지 전쟁터가 되기 때문에 이를 기피해서 반대를 안 한 거다. 어찌되었건 결론은 소련에게 있어서 유럽 + 중국 >> 넘사벽 >> 북한이었던 것 뿐이다. 북한쩌리였을 뿐인데 김일성그걸 몰라요.

이승만은 '정부는 서울을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요지의 방송을 하고서 한강대교한강철교를 폭파하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이런 ㅆ... 폭파는 채병덕 당시 총참모장의 지시였으나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는지, 그리고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는지는 현재로써는 확인할 길이 없다.

결론적으로 서울시민들은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이미 도주한 뒤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승만 도망친 것.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이승만은 결사항전하려고 하였으나 무초 대사와 영부인 등이 극구 설득해서 몽진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무초 주한 미국 대사가 수도 방위를 외치고 이승만이 몽진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경무대 내부 상황은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지만 신생 국가임을 감안해도 국민을 기만하게 된 점(의도적이었든 아니든), 그리고 행정부만 몽진하는 등 몽진 과정에서의 혼란상은 비판받을만 하다. 사흘 만에 수도가 적의 손에 떨어지게 생긴 점을 감안하긴 해야 하지만.

하여튼 이 몽진의 혼란상을 살펴보면 실로 가관인 것이 입법부와 사법부와 부통령도 행정부의 몽진 사실을 몰랐다. 국무회의의 각료들마저도 6월 27일 아침에 알았다(...). 국회는 전선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6월 26일에 서울 사수 결의안을 제출하고 이승만의 의지를 확인한 다음날 오전 찾아갔더니... 없네? 신익희조봉암 등은 부랴부랴 피난에 나서며 이승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겠다고 결심했으나 결국 지인의 설득으로 수원으로 뒤늦게 피난가게 되는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즉각 납북되었을 기세였다. 만약 그가 납북 되었으면 당시 부통령도 나름대로의 헌법 기관이었던 만큼 악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실제 월북하거나 납북당한 제헌의원 등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김규식, 안재홍. 김일성 역시 서울을 점령하고 대한민국 국회의 이름으로 실질적인 공산정부를 위한 임시적 정부인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했기 때문에 국회의원 등 유력자들을 모으는데 힘썼다. 바로 그 작전 때문에 북한군은 사흘간 남진하지 않았고, 남한은 사망 플래그에서 구해졌다. 야~ 씐난다~!

방송을 믿고 피난을 떠나지 않은 서울시민들은 다음날 한강대교 A, B, C선이 모두 폭파되어 피난을 갈 수도 없게 되었고, 발이 묶인 상태에서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는 모습을 보아야했다. 한편 한강 인도교 폭파로 민간인 600~700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한강대교 폭파에 대한 비난과 원성이 높아지자 무책임한 군 당국은 거부할 수 없는 상관의 명령을 받아 폭파를 시행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를 적전비행죄로 몰아 총살시켰다.대본영 리턴즈 후일 명령을 집행했을 뿐 책임이 없는 것이 인정되어 1964년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긴 했으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현재 기준으로 보자면 비난받아 마땅한 재판.

자세한 것은 한강 인도교 폭파 항목 참조.

어쨌든 전쟁 3일만에 서울은 함락되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처음에 계획한, 대한민국 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국군 제6보병사단춘천-홍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북한군의 제2군단의 진격을 3일이나 저지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군의 한강 도하가 늦어진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이 전투의 패배를 책임지고 북한군 제2군단장은 해임당했다. 6사단은 그 후 동락리 전투에서도 북한군 연대 하나를 전멸시키고 소련제 무기를 대량으로 노획하여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지상전의 중요성과 급박한 전개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이 당시 남한의 해군, 공군의 전황 역시 좋지 않았다. 전쟁 직전 대한민국 공군의 작전기는 제대로 된 전술기가 전혀 없었고 연락 및 정찰 임무에 사용하는 L-4/5 연락기 12기, 훈련기인 T-6 텍산 10기 뿐이었다. 그 중 L-4/5는 육군 항공대 소속이어서 공군이 직접 운용하지 못했다. 비행기 성능도 열악하여 T-6는 정비병들이 급조한 폭탄가에 소량의 폭탄을 장착해 지상 공격을 해야 했고, L-4/5는 이마저도 불가능해서 후방석의 관측사가 직접 수류탄이나 박격포탄 등을 손으로 던져 투하해야 했다. 도대체 뭘 믿고 이승만북진통일개드립?

하지만 북한 공군의 경우 객관적인 전력은 우수했지만 조종사의 수준이나 작전 수행 능력 등 실제 운용 능력은 빈약해서 양측 공군의 정면 대결은 일어나지 않았고 김포, 수원 등의 기지 공습 정도의 제한적인 공격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후 미군 등 UN 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제공권은 UN군 측이 가지게 되었다.

해군의 경우 남북한 해군 모두 질, 양적 수준이 빈약해서 함대 간의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에야 전사 연구를 하자 해군도 활약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6월 26일의 신문에서 뛰어오른 해주시 장악과 부산 앞바다 무장 상선 격침으로 전해졌다는 오보를 사실화하기 위해 당시의 승무원을 찾아내 훈장을 주곤 했다.

2.3.2. 낙동강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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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한은 제대로 된 전쟁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데다가 국가차원의 전쟁 계획도 없었고, 육군차원의 방어계획이 있긴 했는데 그나마도 1950년 3월에서야 나왔다. 각 사단들이 이를 수령해서 작전계획을 짠 건 그해 5월이 되어서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있던 병력과 물자를 너무 이른 한강교 폭파로 제대로 날려먹은 남한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남한 정부는 서울을 대신하는 임시수도대전-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겨 자리잡았다. 더글러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임시수도 부산에 미8군사령부를, 일본에 UN군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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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경 북한군과 UN군의 첫 교전이 일어났으며, 이때 미군 찰스 스미스 특수임무대대가 배치되었다. 참고로 찰스 스미스 중령은 1916년 생으로 이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34살의 청년이었다. 이 전투에서 찰스 스미스는 자신의 대대가 궤멸되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참전했으며 2004년에 88살을 일기로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작고했다. 이 찰스 스미스 대대는 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 이하 총원 540명에 2개 중대로 이루어진 대대였다.

어쨌거나 찰스 스미스 대대는 인원이 완편대대와 비슷해도 편제가 이렇다보니 이 대대의 장교 총원이 15명 안팎에 불과했다. 원래 정상적인 대대는 3개의 보병중대와 1개의 화력지원중대에 1개의 비전투요원중대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중대장이 5명이어야 하지만 찰스 스미스 대대는 중대장부터 이미 2명밖에 안된다. 게다가 그나마 영관장교도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본인밖에 없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대위 이하의 초급 군인들뿐이었다. 이들은 이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항공편으로 한반도에 파견 투입되었다.

미군이 왜 이런 쪼가리부대로 북한군을 상대했냐 하면 세계최강의 미군이 참전했다는 소문을 들으면 알아서 종전하겠지 라는 생각에 북한군이 알아서 전쟁을 멈추길 바랬던 것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에게는 오직 적화통일의 야욕만 있었을 뿐 미국의 거대함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북한군은 찰스 스미스 대대가 미군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쳐발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찰스 스미스 대대는 150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그 전사자 중에는 충공깽스럽게도 부대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찰스 스미스 대대의 정확한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 대대 본부- 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Lcl. Charles B. Smith), 부대대장 대위
    • 대대 직할 화기소대 - 소대장 소위
  • B 중대 - 중대장 찰스 토마스 중위(Lt. Charles Thomas)
  • C 중대 - 중대장 리차드 W. 다쉬머 대위(Cpt. Richard W. Thasimmer)

찰스 스미스 특수임무대대가 패퇴하고 나서야 모부대인 미 제24보병사단이 후속 투입되었으나 오산-죽미령 전투를 시작으로 24사단 직할 52포병대대장인 밀러 O. 페리 중령(Lcl. Miller O. Perry)이 전사하는 등 무참한 피해를 입어가면서 전투마다 패배를 거듭하다가 결국 대전 전투에서 사단장인 윌리엄 딘 장군이 실종됐다가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밀러 O. 페리 중령의 전사는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대대장급 이상 고급지휘관 중 최초로 전사한 사례이다.

최초로 파견된 쪼매 멀리 소풍을 온 미군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대대는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 전차나 따던 것을 상상하며 "너님들 말은 믿을 수가 없으셔다. 우리는 킹왕짱인 75mm 무반동총도 있으니 문제 없으셔다."[4]라며 초여름 햇볕에 얼굴 탈까봐 양산을 받치고 배식을 받아 축음기로 음악감상까지 하시며 식사들 드시고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주접을 떨더니, 오산에서 인민군 전차대에 쳐발렸다. 일본군을 깔보며 조선 조정에 코웃음 치다가 개발살난 조승훈명나라군이 생각난다면 기분 탓이 아니다 일본군이 미군 얕잡아보다 호되게 당한걸 알텐데도 이런 모습을 보인게 참 아이러니. 당시의 일본군과 북한군 수뇌부 둘 다 병신집단이고 명나라와 미국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역사는 반복된다고 볼 만하다.

그때까지 T-34/85 전차[5]는 구경도 해본 적이 없기에 그 위력을 알지 못하고 일본군 전차처럼 쉽사리 뚜껑을 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듯하다. 어느 미군은 북한군의 T-34/85가 돌파하는 것을 보고 재들 우리가 한국군인줄 아나봐ㅋㅋ라고 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보유한 대전차화기의 공격을 모조리 씹어버리는 북한군의 전차에 그대로 밀려버렸다. 미군이 대전차화기를 직접 쐈는데도 북한군 전차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버린 경우도 있었다. T-34/85 전차는 경사장갑을 채용하여 방어력이 중량에 비해 우수한 전차였고, 게다가 스탈린이 북한에 전차를 보낼 때 전차의 장갑을 조금 더 두껍게 해서 보냈다고 한다. 이형근 장군의 증언 결국에는 야포와 같은 중장비를 거의 다 잃어버린채 남쪽으로 후퇴하다가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인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깜짝 놀란 미국은 일본에서 M24 채피 경전차대를 부랴부랴 보냈지만 또 발렸다. 미군이 머리를 짜내보니 T-34/85 전차를 바를 수 있는 미군 전차포는 M4 셔먼 전차의 76mm 포와 M26 퍼싱 전차의 90mm 포였는데, M26 전차는 일본에 없었고 M4 전차도 일본의 미군 공창에 조립하다 만 상태로 있는 것까지 탈탈 털어서 7대가 전부였다. 헤집어 찾다보니 먼지가 쌓여있는 소수의 퍼싱을 발견했지만 도저히 가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전차화기로는 개발은 해놨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바람에 필요가 없어 양산을 하지 않은 M20 3.5인치 RKT 슈퍼 바주카나 되어야 T-34/85를 바를 수 있었다. 이 무기들을 부랴부랴 미국 본토에서 실어오는 동안 미군 24사단은 겨우 공수한 슈퍼 바주카 하나 들고 버티다가 대전에서 하루만에 인민군 3개사단에 포위당해 박살나버렸다.

여기서 얼마나 상황이 안 좋았냐면, 사단 예하 직할부대장이 미국 딘 사단장 바로 옆에서 전사하고 사단 휘하의 1개 대대가 전 대대원이 모조리 다 전사한 데다가 딘 사단장이 슈퍼 바주카로 직접 T-34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단장은 낙오되어 도피 중에 인민군에 잡혀버렸다. 그렇게 모두들 소련이 김일성에게 넘겨준 잉여 T-34/85 전차들 앞에서 "탱크!!"를 외치다 개발살나버렸다.

이 전투는 후퇴과정에서 6.25 전쟁 최초의 명예훈장 수상자가 나왔을 정도로 처절했다. 전투 공병대대 소속의 조지 D. 리비(Sgt. George D. Libby) 중사가 그 주인공. 부상병을 싣고 철수하던 공병대대는 북한군의 사격을 받았고, 리비 중사는 도로 옆 도랑에 엎드려 총탄을 피했다. 그리고 철수하는 포병 트랙터(M-5 Artillery Tractor)를 세워 부상병들을 실은 다음, 유일한 그 운전병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 피탄면적을 줄이고 철수시켰다.그 와중에 리비 중사는 몸과 팔에 많은 총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

여기서 잠깐 딘 장군이 포로가 된 사연을 보자면 여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있다.

하나는 해당 사건 당시, 월리엄 딘 장군이 약간의 호위병력과 함께 피신하다가 전북 부안 산골 민가에서 휴식하던 중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 이때 방에 들어가 쉬기 위해 군화를 벗었다가 북한군이 들이닥치자 군화 끈 묶을 시간이 없어서 맨발로 도망치다 잡힌 것인데, 뭐 군화 신었다고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전시와 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군화 함부로 벗는 것 아니라는 점, 즉 불과 수분이라도 전쟁 중에는 목숨을 좌우할 만한 심각한 시간 소모가 될 수 있으니 유사시에 대한 대비를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산 증거 되시겠다. 아닌 거 같으면 맨발 또는 두꺼운 양말만 신은채 산길 한 시간만 뛰어 보시고

다만 이것은 북한의 자료가 딘의 포로됨을 비난하고자 하는 글에서 나오는 이야기로서 이상하게 국군 정신교육시간에도 퍼져있는 이야기이다. 일명 복장 단정하자는 것(...). 60년대 제작된 북한 영화에서는 그런거 없이 그냥 북한군이 몰려오자 철도변에서 찌질대다가 비겁하게 손을 들어주신다. 이 영화에서는 채병덕도 대전에서 사살되는 장면이 나오니 고증은 엿바꿔 먹은 작품.

하지만 딘의 회고록인 딘 장군의 이야기나 기타 일반적인 기록은 이와는 다르다. 딘 장군은 후퇴 중 운전병의 실수로 대구로 가는 길이 아닌 전북 부안쪽 길로 접어들어 부대와 분리되어 소수의 병력과 함께 산길로 이동하는 도중 식수를 찾다가 능선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때 머리에 자상, 어깨에 골절 등 부상을 입고 기절했고, 같이 있던 병력은 수색을 하다가 포기하고 떠나 대구에 있는 부대와 합류했다. 딘 장군은 중간중간 한국 민간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한 달 간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전라북도 진안에서 민간인에게 밀고를 받은 북한군에게 결국 포로로 잡혔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딘 장군의 결혼기념일이었다 한다.

여담으로 미국의 역사학자 존 톨랜드가 유족을 찾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딘 장군이 중간에 얻어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마늘 장아찌였는데 딘 장군은 마늘 장아찌의 맛에 매우 감탄하여(...) 일부러 하산해서 더 얻어오기까지 했다. 오오 한국의 손맛 오오

밀고한 사람은 북한군의 치하를 받고 딘이 가지고 있던 달러와 인민위원회가 보관한 쌀을 받았으나, 이후에 부역자로 끌려가서 결국엔 총살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사람이 총살당했다고 하는 건 딘 장군 이야기를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2차 매체로 다룬 70년대말 어린이용 전쟁 실록 이라고 하지만 검열삭제가 꽤 나오는 계림문고판 한국전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는 #와 같이 딘 소장을 밀고한 자는 '한두규' 라는 사람이며, 지역 수복 후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딘 소장의 감형 탄원으로 출소하였다. 한두규에 대해서는 꽤 논란이 많은데 이 사람은 전쟁전에 반공청년단류의 조직에서 몸담은 관계로 북한군에게 체포되면 처형될 위기에서 딘을 넘김으로서 살아났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 말로는 딘을 구하고 같이 가던 중에 인민군을 만나서 딘이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북한군이 후퇴할 때 미국의 장군을 넘긴 죄를 지은 이 사람은 같이 월북하거나 도망가지도 않고 집에서 잡혔고, 이후 죽을때까지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다. 어찌 됐든 딘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장성급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참고로 딘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는데 그때 그의 사고방식은 전사하는 것보다도 더 굴욕적인 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었으며, 그가 지휘했던 사단은 적에게 잡힌 포로 수가 가장 적은 사단이었다. 그랬던 그가 전쟁 초반에 포로로 잡힌데다가 제24보병사단은 가장 포로로 잡힌 숫자가 많은 사단이 되어버렸다.

딘 장군은 1953년 9월에 조선인민군 2사단 참모장인 리학구 총좌와 포로교환되어 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포로로 북한에 억류되었다. 딘 장군과 포로교환되어 북한으로 송환된 리학구 총좌는 긴 기간동안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 이때 북한군은 초고속으로 남진하기도 바쁜데 포로가 있으면 귀찮다고 다수의 포로들을 FM 소련식으로 두 손을 뒤로 모아 노끈이나 철사줄로 묶었다. 임진강 전투를 다른 파란 눈의 아리랑이란 자서전을 보면 군용 전화줄도 썼다. 여기에 필요하다면 무릎까지 꿇린 후 총살해 죽여버렸다. 이 주검들은 그대로 길가나 산 속에 방치됐다가 나중에 유엔군이 북진할 때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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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나서 총살당한 24사단 소속 병사(출처 위키백과).

그에 반해 항복한 한국군의 경우 북한군이 초고속 남진하며 "동무! 이제 곧 조국 통일되는데 왜 도망가시오?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라고 하면 "데헷! 맞다. 이제 곧 통일되지?"하고 집에 돌아가는 척 하다가 남쪽으로 다시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2차대전 극초기 프랑스 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이 프랑스 군을 마구 헤집고 파리까지 달려가자, 프랑스군은 한참 독일군 지나가는거 구경하다가 자신들을 포로로 잡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때닫고 그냥 집으로 갔다. 롬멜도 항복하기 위해 두팔 들고 몰려오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보고 "비켜!"하고 그냥 제치고 지나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국전쟁 초기도 대략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고 보면 될 듯 하다.

하지만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에서도 보듯이 북한군은 한국군을 개전초기에도 포로로 안 잡은게 아니라 잡히면 미군처럼 처형했다는 증거도 있다.

한편 전세가 낙동강에서 고착되자 개전초기 한강철교 폭파로 대량으로 생포한 한국군들을 해방동무라고 하면서 상당한 인원을 북한군에 편입시켰다. 거의 1개 분대당 2명 비율이었다고 한다. 북한군 기록에 보면 절대 감시하지 않고 알아서 싸우게 했다고 하는데 유사한 맥락으로 봐 줄수 있다.

각설하고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전개했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대구, 칠곡, 영천 등지를 두고 벌어진 다부동 전투관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2.3.3. 인천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이후 경상도 지역에서 북진이 시작되었고,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했다. 10월 1일 국군은 38도선을 넘어 진격하였다. 이것이 국군의 날의 기원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 상륙작전 항목을 참고.

이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영감을 얻었을지 몰라도, 연관성은 낮은 편이다. 인천 상륙 작전은 모루가 있는 상태에서 망치의 전형적인 우회기동이었던 반면, 노르망디의 경우는 모루가 없는 상태에서의 직접적인 적진 상륙이었기 때문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 참고.

어쨌거나 인천 상륙 작전에는 육군 17연대와 해병대 1연대가 참여하였다. 인천 지역에서 작전한 한국 군인은 Eugene Clark와 함께 팔미도의 버려진 등대를 점거한 해군 장교 연정, 육군 장교 계인주 등 뿐이다.

UN군의 본래 참전 목적이 방어였던 만큼 38도선을 넘는 데는 UN의 결의가 필요했으며, 이 즈음 북한과 중국이 접촉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UN측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국군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UN군 또한 38도선을 넘었다. 이때당시 김일성은 10월 11일 밤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는 방송을 내고 바로 몇시간뒤 김일성은 몰래 도주했다.그래놓고 니가 이승만 욕할 처지냐?유엔군은 며칠뒤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한국군 최초입성)하였으며, 11월 후순에는 압록강두만강 유역에 이르렀다.

2.3.4. 중국군(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

그러나 10월 중순 이후부터 이미 국인민지원군이 한반도에 진입해 있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렀을 때 이른바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국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인해전술이라는 말 때문에 사람들이 당시 참전한 중국군을 저평가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때 한국전쟁에 참여한 중국군의 지휘부는 중일전쟁에 참여했던 전쟁을 겪어본 지휘관들이었고 , 병사들도 당시 끝난지 얼마 안된 국공내전 참여한 병사들이 다수인 베테랑병사들이었다.

때문에 중국군은 무식하게 총알받이를 앞세워 돌격만 하는게 아니라 많은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이미 승기를 잡았거나 당장 급하지 않은 전선에서 병사를 빼다가 고착된 전선에 순간적으로 다수의 병사를 쏟아부어 밀어버리고 나서 이 병사들을 아까 병사들을 빼와서 밀리고 있는 지역에 다시 쏟아 붓는 방식의 대단히 뛰어난 전략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군은 안그래도 많은 머릿수를 더 많아보이게 할 수 있었다. 반쯤은 농담이지만 이때 중국군이 참여한 전선의 UN군 지휘관들의 보고를 종합하면 중국 본토의 중국인이 몽땅 참전한것 같았다는 말도 있다.

중국군의 본격적인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 후퇴하기 시작하자 더글라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중국에 대한 핵폭격을 실행하고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중국 남부에 상륙시키는 등 거의 3차 대전을 고려한 반격을 계획했으나, 이 핵폭격 문제로 트루먼 대통령과의 정치적 갈등을 빚어 나중에는 아예 해임당하게 된다. 처음엔 핵공격을 원하는 장병들이 많았고 트루먼도 핵폭격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세계를 기겁하게 했다. 영국 총리 애틀리는 트루먼에게 핵무기만은 안 된다고 거의 애걸복걸했다 한다. 결국 트루먼은 핵폭격 반대론자가 된다.

중국군의 대대적 참전으로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재점령당했다(1.4 후퇴). 미군을 비롯한 모든 군인들은 이 시기에 최악의 혹한 속에서의 전투를 경험하였으며, 직접 총에 맞아죽는 이들보다 동장군에게 죽는 이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전선은 평택, 오산까지 내려왔으나 이후에는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3월경 다시 서울을 재탈환하였다.

2.3.5. 휴전

중국군의 춘계 대공세 이후, 양측 모두 힘으로는 상대방을 박살낼 수 없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유엔의 서울 재수복 후 더 이상 남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꺼렸다. 김일성이 길길이 뛰었지만 중국이 원하는 것은 김일성이 원하는 것과는 달랐다. 한편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역시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고 말했다. 맥아더도 길길이 뛰었지만 이미 트루먼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맥아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곧 미국의 각종 신문 1면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맥아더의 해임 기사가 실렸다.

1951년 6월 경, 소련의 제의로 휴전협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년간 협상을 지지부지 끄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국지전은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연일 UN 공군으로부터 맹폭격을 당하느라 죽을 맛이어서 소련에 휴전을 간청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북한의 피해가 극심했는데, 북한의 경우 전쟁 초기부터 주요 도시의 비행장과 공장 등이 한국 및 UN 공군의 직접 공격대상으로 선정되어 시작부터 말 그대로 빵빵 터졌다. 특히 원산은 공군의 공격에 더해서 해군의 포격까지 받아 말 그대로 쑥밭이 되었다.

이후에는 휴전까지 북한군이 보일 만한 곳이라면 무조건 공격 대상이 되어 무차별 폭격을 받는 등 북한 전역이 공군의 폭격 대상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미군 폭격기 조종사가 "북한은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묘사한 바도 있고, 평양 시내를 폭격하기 위해 출격한 비행기가 적절한 목표를 못 찾아서 폭탄을 쓰지 않고 귀환한 사례도 있다. 당시 미군이 설정한 폭격 목표는 2층 이상의 모든 건물이었다. 요컨대 평양의 비행구역 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하나도 안 남아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를 받아주지 않고 협상을 끌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협상이 지연된 이유는 21세기에 비밀 해제된 구소련의 문서에서 밝혀졌다. 이유는 스탈린의 고의적인 지시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을 미국보다 약하다고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이 서유럽에 힘을 집중하지 못 하도록 교착 상태의 한반도에 묶어놓고 싶어하였다. 게다가 전쟁이 길어짐으로 해서 피를 흘리는 것은 중국과 북한이지 소련이 아니었다. 결국 스탈린이 1953년에 갑작스레 사망하고서야 협상이 급물살을 타 비로소 휴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만일 스탈린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협상기간은 그만큼 더 길어졌을 것이다. 너때문에 젊은이들 다 죽어나간다 이놈들아...!

협상 자체만 놓고 보면 협상과정 중 가장 문젯거리였던 것이 포로 처우의 문제였다.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할 때, "일괄송환" 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송환" 할 것인가? 즉 전자는 포로 본인의 의사는 묻지 않고 포로의 출신국으로 일괄적으로 보내는 것이고, 후자는 포로 본인이 새롭게 살고 싶은 국가를 자유롭게 골라서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소설 최인훈의 『광장』에서 주인공이 반복하는 "중립국" 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중공측은 일괄송환에, 유엔측은 자유송환에 지지를 표명했다는 것. 소련과 중공과 북한은 자유송환을 할 때 행여나 "자유진영을 선택하는 자국민" 이 나타날까 근심했던 것이다. 반면 일괄송환을 하게 되면 당사자의 의견이 드러나지 않고, 그들은 이 전쟁을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포장하여 선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포로 송환문제의 이면에는 이처럼 6.25 전쟁의 이념성이 드러난다. 양쪽이 정말 이를 악물고 두 주먹쥐고 덤벼들었던 마지막 춘계 대공세 이후, 더 이상 물리적 힘으로 부딪쳐서 상대방을 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똑같이 절감했던 것.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명분과 정당성, 이념으로 상대방을 꺾는 것일 뿐이었다. 젊은이들은 죽어나가는데 쓸데없는 정신승리배틀질.. 당시 세계의 거대한 두 축은 이와 같이 6.25 전쟁을 자신들의 이념 전쟁으로 변모시켰고 그만큼 휴전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의 결과로 제시될 최종적 휴전선이 정해지기 전, 최대한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형지물을 손에 넣기 위한 고지전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몇 번 후방에 침투한 북한군 게릴라에게 쓴맛을 본 UN군이 신중하게 전진했고, 북한군과 중공군은 산악지대에 많은 수의 진지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때부터 산악에서 엄청난 국지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목적은 휴전협정에서 보다 더 유리한 입장을 점유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덕분에 병사들만 죽어나갔다. 대표적인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 장의 능선 전투, 의 능선 전투 등이 있다. 이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는 영화 고지전을 보면 알 수 있다.

1953년 6월 이승만 정권이 단독으로 거제도 등 각지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하였던 공산군 포로들을 석방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휴전 협상 당사자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는데, 소외된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미 미국의 눈 밖에 난 상황이었다.똘끼는 대체.. 당장 1952년 8월 2일, 부산에서 이승만이 암살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범인은 CIA로, 이유는 협상에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에버레디 작전으로 여러번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했다고 한다.

에버레디 작전의 밝혀진 골자는 다음과 같다. 출처는 이곳.

1. 한국 육군 참모총장을 불러 유엔군 명령의 실천을 보장하라고 요구
2. 반항하는 지휘관은 미 8군 사령관에 충성하는 사령관으로 교체
3.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한국군에게 연료와 탄약 지원 중단
4. 한국 대통령에게 유엔군 사령관 명령을 준수할 것을 요구
5. 반항하는 군사 및 민간 지도자를 구금
6. 유엔군 이름으로 군사정부를 공포


하여튼 이승만의 이 행위에 대해 미국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처칠이 면도를 하다 턱을 베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고, 6월 18일이면 전쟁이 휴전할 것이라 철석같이 믿던 미국 정부는 바로 그 다음날 국무부 합참 합동회의를 개회, 이승만을 암살하는 것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매카시를 비롯하여 미국의 여러 의원들은 반공 논리에 입각하여 이승만 암살에 반대했고, 또 이승만이 실제로 한국 내 통제력도 확고하고, 이승만이 정말로 극단적으로 미국과 대립하려는 의지도 없었고 하여, 결론적으로 이 작전은 실제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대신 미국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이 긴급히 방한, 이승만 대통령과 160시간의 언쟁 끝에 결국 소위 "소휴전 회담" (Little Truce Talks) 이라고 불리곤 하는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 어떻게 보면 한국과 미국 간의 혈맹이 시작되게 된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소휴전 회담의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한국과 미국은 상호 안전보장 조약을 체결한다.
2. 미국은 한국에게 최초 2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해 줄 것과, 차후의 장기 원조에 대해서 보증한다.
3. 한미 양국 정부는 휴전 이후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 실질적 성과가 없을 경우 회담을 중단한다.
4. 미국은 한국의 육군 20여 개 사단 및 그에 상응하는 해군과 공군의 증편에 대하여 승한다.
5. 한미 양국 정부는 정치회담에 앞서 한미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당시 이승만의 행동은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포로들에 대한 일괄송환의 가능성을 본다면 인도주의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같은 행위는 국제법 위반이었다. 참고로 이 사건이 표현상으로는 '포로 석방 '이라서 단순히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곱게 풀어준 정도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 석방이지 대탈주에 가까웠다(...). 당시 포로 수용소의 경비 및 관리는 한국군 뿐만 아니라 미군을 비롯한 UN군 측에서 맡고 있었다. 따라서 '포로 석방'을 위해 한국군 및 한국 경찰 당국과 반공 포로들이 사전에 계획하여 일시에 수용소에서 포로들이 탈출하고 이를 군과 경찰, 기타 민간인들이 적극적으로 탈출을 도와준 것. UN군이 탈출을 진압하기 위해 가한 사격으로 인해 사망한 포로도 존재했다.

이 일로 처칠은 남한이 망하든 말든 냅둬야 한다고 거의 길길이 날뛰었고 북한과 중공도 국제법 위반이라고 입에 게거품을 물었지만 일은 이루어졌으며 스탈린의 죽음으로 인해 또 한번 국면이 전환되면서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

앞서 소개된 소휴전 회담에서 1번 항목의 상호 안전보장 조약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승만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이승만의 업적 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현재 주한미군의 역할을 보면, 당시 상황에서 미래에 북한이 재침략할것을 염려한 이승만의 선견지명이라고 볼 수 있다.

3. 미군의 참전과 역할

3.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군사력 감축 배경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 당시 해외 주둔군 750만 명을 포함하여 1,200만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242개의 항공단과 100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자 하였다. 동원해제가 마무리될 무렵인 1947년 6월말에는 육군 684,000명, 육군항공대 306,000명, 해군 498,000명, 해병대 93,000명 등 158여 만명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을 집으로 보내라(Bring Boys Home)"는 사회 각계 계층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군은 146만 명까지 급속히 줄었다. 그 당시 소련은 175개 사단에 430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였고 전쟁 잠재력 면에서도 1952년까지 475개 사단을 동원 할 수 있었다. 1950년 기준으로 소련과 세부적으로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체계미군소련군
병력146만명430만명
핵무기295개5개
항공모함15척0척
전략폭격기114기0기
국민총생산2,500억 달러650억 달러
철강생산8천만톤21만톤
알루미늄생산61.7만톤13만톤
경유생산27.6만톤3.3만톤

전략폭격기 중에서 미국의 B-36 전략폭격기는 핵무기 투발수단이다.

다만 미국에서는 단 몇 만 명 정도 죽는다면 여론이 악화되고 염전사상이 번져 전쟁 지속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소련은 성인 남자가 싹 날아가더라도 감당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다. 2차 대전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안 되었지만 한국전쟁부터 시작되어 이후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아프간전까지 미국의 사망자 증가 -> 염전사상으로 이러지는 악성 도미노 현상은 미국으로서는 감당이 안 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인 6월 30일 기준으로 미군 병력은 다음과 같다.
군종인가병력실병력실병력비율
육군837,000593,16770.8%
해군/해병대666,882456,90868.5%
공군502,000411,22782%
전병력2,005,8821,461,35272.8%

육군은 59만 명(10개 사단)중 36만 명은 본토에 있었고 나머지 23만 명은 해외에서 점령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병력을 감축하여 운용하기 위해 핵/해/공군에 의존하는 전쟁 계획과 전략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해외주둔 병력을 보자면 독일에 80,000명, 오스트리아에 9,500명, 베네치아 옆이자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에 접한 도시로 중부유럽을 배후에 둔 중요한 항구 도시인 리에스테에 4,800명, 태평양 지역에 7,000명, 카리브 지역에 12,200명이 있다. 일본에 가장 많은 병력이 있었는데 108,500명이었다.

사단별로 보자면 본토에는 2기갑사단, 2보병사단, 3보병사단, 2공수사단, 11공수사단 등 5개 사단과 3기갑연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유럽에 1개 사단, 1개 연대전투단, 3개 기갑연대, 1개 독립보병연대, 카리브 지역에 2개 독립보병연대가 있었고, 알레스카에 1개 보병연대, 하와이에 5연대전투단, 일본에는 4개 보병사단과 1개 연대 전투단이 주둔 중이었다. 해군은 총병력 337,000명에 함정 670척과 항공기 4,300대 보유, 공군은 411,000명에 48개 전투 비행단, 해병대는 74,000명이었다.

3.2. 미국 극동지역의 군사력 규모


미국 극동군으로는 미 제8군을 비롯하여 미 극동해군과 미 극동 공군이 각각 일본 및 인근 도서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지중 요코하마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미 제8군은 2차 대전 중인 1944년 9월에 뉴기니와 레이테 전투에서 육군 전투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하여 창설된 부대이다. 예하 부대로 1군단과 9군단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인 50년 3월 28일 국방부 감축으로 군단이 해체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사단으로 넘어가는데 북쪽부터 보자면 홋카이도에 7보병사단, 혼슈 중부에 1기병사단, 혼슈 남부에 25보병사단, 큐슈에 24 보병사단, 오키나와에 29연대+제9방공 포병단이 있었다. 6월 25일 기준으로 인가병력중 93% 편성이라는 제법 준수한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2차대전 종전후 군에 들어와 전승국 병력으로 떠 받들림 당하며 호의호식 하느라 육체와 정신이 썩어가서 그렇지 병력은 충분 하였다. 이때 미군들은 일본에서 한반도에 나쁜 조센징이 산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얼마나 정신이 썩었냐면 감히 미군이 일본에 있는데 북한군 따위가 쳐들어 올 리가 없다며 작전 계획 자체를 수립 안했을 정도이다.나의 맥아더 장군은 그렇지 않아

육군의 각 사단은 병력이 7천명이나 부족 했고, 편제상으로는 3개 소총대대, 6개 중전차중대, 3개 105밀리 포대, 3개 대공포대가 부족하였다. 병력 부족과 빈번한 병력 교체로 전투 훈련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였다. ...고 하지만 그게 말이 되나? 사단장과 예하 연대가 수시로 바뀌던 한국군도 나름 연대급 훈련까지 했는데. 국방부 장관이 인민영웅 신성모장관이고 7사단장이 한국판 하후무 유재흥이라서 그렇지. 그래도 딘 소장이 이끄는 미 24사단과 김종오 사단장이 이끄는 국군 6사단을 비교하자면 국군이 더 강해보인다면 기분 탓입니다.

극동공군 전력은 18개 전투 및 전투폭격비행단, B-26 경폭격기로 편성된 1개 경폭격기 비행단, B-29 중폭격기로 편성된 1개 중폭격기 비행단, 그리고 몇 개의 병력 수송부대로 편성되었다. 극동공군의 주요부대로는 일본 나고야에 주둔한 제5공군,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주둔한 13 공군,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 기지에 주둔한 제20공군이 있었다.

극동해군은 해군 중장 찰스 조이 제독이 지휘하고 있었다. 미 극동해군에는 상륙부대의 핵심인 제90기동부대와 소수의 전투함정을 보유하고 있는 제96기동함대가 있었다. 이들 극동해군의 전력으로는 1척의 경순양함, 4척의 구축함, 6척의 어뢰정, 보조함 및 상륙용 주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위와는 별도로 필리핀 해역에 해군 중장 아더 스트러블 제독이 지휘하는 미 제7함대가 있었다. 보유 함정은 1척의 함공모함, 1척의 중순양함, 8척의 구축함, 3척의 잠수함이 있었다.

이상의 미 극동군 전력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수행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을지 몰라도, 북한을 상대로 한 한국전과 같은 국지전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군사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3.3.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평가


미 합동전략분석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미국의 국가안보에 중요한 지역을 주변지역(Peripheral)과 핵심지역(Vital)로 분류하고, 그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한 후 여기에 맞춰 대외 원조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은 주변지역으로 분류 되었고 미국의 우선 지원 순위에서는 18개국 중 5위, 안보 우선순위에서는 16개국 중 15위였으며 이상 두 가지를 종합한 우선순위에서는 16개국 중 13위를 차지하였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47년 9월 15일 한국의 군사 전략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해 달라는 국무부의 요청에 대한 9월 26일 답신에서 "한국은 군사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낮다"라고 통고했다. 즉 합동참모본부는 "군사적 관점에서 한국에 군대나 기지를 유지할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국무부, 육군부, 공군부, 해군부등 4부(Department)로 구성된 4부정책조정위원회에서도 "만약 극동지역에서 적대행위가 발생할 경우 현재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오히려 군사적 부담이 될 것이며, 적대행위가 발생하기 이전에도 주한미군의 전력을 실질적으로 보강하지 않고는 유사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 "장차 미국이 아시아 대륙에서 수행하게 될 어떠한 지상 작전도 한반도를 우회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머리 아프니 국방성인지 국방부인지, 육군부인지 육군청인지 논쟁은 잠시 잊읍시다 참고로 4부정책조정위원회는 2차대전 때는 3부정책조정위원회였지만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하면서 4부가 되고 이후 1949년 6월에 NSC가 창설되며 폐지된다.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 박사도 한국은 군사적인 견지에서 미국에 불필요한 국가라고 단정하면서, 한국의 공군기지는 소련지역과 가깝지도 않고 오키나와 기지처럼 안전하거나 편리하지도 않다고 하였다.

결국 1947년 9월 26일 합동참모본부의 판단은 "미군의 현 병력 수준이 명백히 부족함을 감안할 때 현재 한국에 주둔 중인 미군 2개 사단 총 4만 5천명의 군단 병력은 다른 지역으로 전용될 수 있다. 한국에서 이만큼의 병력을 철수시켜도 그 결과는 소련이 남한과 일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병력을 집결시키지 않는 한 미 극동군의 군사태세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할 수 없다"였다.

종합하여 보자면 이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느라 북한 등에 의한 국지전은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과 전면전을 위해서는 차라리 주한미군 2개 사단을 후방으로 돌리는게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즉, 남침유도설은 개소리라는 것이다

한편 이때 미군 극동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였다. 맥아더는 4부정책조정위원회의 육군참모총장 아이젠하워 원수마저 부관으로 9년간 굴렸을 정도로 탄탄한 경력을 자랑하는 장성이었다. 이 상황에서 맥아더가 한반도가 심상치 않다고 언급했으면 위의 기류를 변화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순사건 + 이승만 대통령 주특기인 미국에 징징 + 이범석 국방장관의 요청으로 한국 국회에서 미군주둔결의안 채택 크리 3단 콤보라는 한국 상황을 고려하여, 미국 국무부가 1949년 1월 25일 주한미군의 철수 완료 시한을 견기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자 합참에서는 맥아더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이에 맥아더는 "한국군이 공산주의자들이 도발하는 국내 소요와 전면적인 침략에 대처할 정도의 수준까지 장비 및 훈련 면에서는 아직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한 후 "한국에 있는 잔류 미군을 1949년 5월 10일까지 완전히 철수할 것"을 합참에 건의 하였다.

이에 최종결정타인 애치슨 국무장관의 1950년 1월 12일 전국 기자클럽 연설이 있었다.애치슨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이라고 쓰고 "웰컴 투 중공군"이라고 읽는다 대충 "알루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까지는 미국 꺼임, 대만/한국/인도차이나는 제외한다"라는 뜻인데 한국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선언이며, 김일성의 징징거림에 대한 스탈린의 한국전쟁 승인의 결정적인 계기라 고등학교 국사책에도 상세히 나와 있다. 덕분에 당시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 이름이 병직 이라는 건 기억 못해도 미국 국무부 장관이 딘 에치슨이라는 건 외우게 되었다 이 서술은 애치슨 선언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애치슨 라인 항목에서 확인.

3.4. 미국의 참전 논의

운명의 1950년 6월 25일. 한국 정부요인과 장성들만 휴일이라고 술먹고 처자고 있는게 아니라 미국의 주요 인사들 역시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다. 미국 쪽에 더 우호적인 표현이 들어간 것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이다. 사실 몇천km 떨어진 딴나라 사람이 휴일에 자든지 말든지 상관없잖아 애초에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쳐들어 온다는 정보부 및 전방 부대의 보고를 받고도 국방부 장관이 "신사는 일요일에 근무하지 않습니다."라면서 전화코드 뽑고 자는 행태는 도저히 곱게 봐줄 수가 없으니...

공식적으로 미국에 보고가 들어간 것은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가 전쟁난지 7시간 26분 만에 미국무부에 전문을 보낸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UP통신의 서울주재특파원 잭 제임스 기자의 1보 → 워싱턴 본사 도널드 곤잘레스의 전쟁사실 여부 확인 요청 → 국무부 극동과 공보관 브래들리 커너스 → 그날 워싱턴에 남아있던 국무부 최고 책임자 러스크 차관보 루트로 최초 첩보를 받았다.

러스크 차관보는 당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고 페이스 육군 장관도 함께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주말을 맞이하여 메릴랜드의 개인농장에서 휴식중, 존슨 국방장관+합참의장은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열린 민간 행사 참석중,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주의 개인 저택에서 휴식중. 즉 주요 지휘라인이 죄다 부재중이었다. 이것은 미국은 북한의 침입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응은 매우 신속하였다. UP통신의 확인 요청을 받고 국무부로 복귀한 러스크 차관보와 페이스 육군 장관은 6월 24일 22시 30분(한국시간 25일 12시 30분)에 무초 대사의 "북한이 지금까지 취한 공격의 성격과 수법으로 볼 때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행위"라는 전문을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전화상으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상정하겠다고 말했다. 보고를 받은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의 개인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대통령 각하! 중대한 뉴스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북한의 공격을 "제2차 세계대전을 유발했던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침략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다. 알다시피 미영프소는 독일이 라인란트 점령 → 오스트리아 병합 → 체코 병합하는 동안 손가락 빨고 보고만 있었다. 또한 일본이 한국침략 → 만주침략 → 중국본토(상하이)침략하는 동안 역시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

결국 트루먼은 공산주의의 침공을 지금 차단하지 않으면 결국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세계대전이라는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지금 바로 지원군을 투입하여 북한의 야욕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과 UN이 참전하는 주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가렛 히긴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종군기자가 1951년(서문은 이미 1950년에 썼다. 덜덜…)에 쓴 <War In Korea>라는 책에서 이러한 사상이 잘 나와 있다. "독일유럽을 집어 삼키는 동안 가만히 있다가 미국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공산주의가 우리 안방까지 쳐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한반도에서 막아내자." 감사합니다. 히긴스 아줌마

또한 트루먼이 비행기 타고 있을 때 이미 소련을 제외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고 있었다. 미국의 그로스 대리대사가 "북한군은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결의안을 내고 장면 대사의 도움 요청이 들어오자 이사회는 미국의 결의안을 찬성 9대 기권 1표로 가결하였다. 기권은 누구게?소.!련.! 이 결의의 중요성은 미국이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트루먼이 워싱턴으로 복귀하고, 6월 25일 19시 40분에 미리 모여 있는 13명의 외교 국방 수뇌부와 회동하여 비공개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조낸 신속하다. 당사자인 대한민국은 27일 새벽 4시에 국무회의 열었는데. 히히 미국과의 시차가 얼마인지 알려고 하지 마라. 그딴거 알면 더 비참해진다.

1.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도록 한다.
2.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이 제안한 군수물자를 보내도록 한다.
3.이미 지시된 제7함대를 일본으로 파견한다.
4.미 공군은 극동지역에 있는 소련 공군기지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한다.
5.소련의 다음 행동 지역이 어느 곳인가를 신중하게 판단하되, 이는 국무부와 국방부가 철저히 조사하여 판단한다.


3.5. 선전포고 논란

네이버 지식IN에서 자주 나오는 글이 "제가 듣기로 선전포고를 안하고 공격하면 전 세계 단합해서 그 나라를 공격한다는데 맞나요?"인데 정답은 "미국은 선전포고 같은거 모른다"이다. 사실 북한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먼저 미국을 공격해서 그렇지 미국도 선전포고 할땐(?)한다. 아니, 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전 세계에서 선전포고를 제일 까다롭게 하는 나라였다.[6] 지금은 시간에 쪼달리는 현대전 특성상 편법적으로 전쟁을 진행하고 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26일 아침에 그의 집무실에 있는 대형 지구본에 있는 한국을 가리키면서 "이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만일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다음 단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백악관을 방문한 상원외교위원회 위원장 톰 코널리 의원에게 "의회의 사전 승인 없이 한국에 미군을 투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코널리 의원은 "만약 강도가 각하 집에 침입했다면 각하는 경찰서에 가서 허락을 받지 않고도 강도를 쏠 수 있습니다. 각하는 의회에서의 오랜 토의로 인해 두 손을 완전히 잡힐 수도 있습니다. 각하는 군 통수권을 가진 분으로서, 또 유엔 헌장 아래에서 그러한 행동을 위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3.6. 미군 투입 결정

서울이 함락 후인 50년 6월 28일(한국은 29일) 17시 국가안보회의 직전 있었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유엔의 경찰행위라고 부를 수 있느냐?"라고 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국가안보회의에서 가능한 지상군을 배재하고, 될 수 있으면 소만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범위 내에서 해공군 위주의 소극적인 지원을 맥아더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방금 취한 결정이 한국 사태에 대처하는데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맥아더가 다음날 새벽인 6월 30일에 보낸 전문은 "자신이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였다. 그러면서 세부적으로 연대 단위의 미국 전투 부대를 긴급 투입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2개 사단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전문을 받은 콜린 육참총장은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상의 후 페이스 육군장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개 연대 전투단만 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가안보회의와 이어진 의회지도자들에게 브리핑에서 맥아더 장군에게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유엔 역시 잠자고 있지만 않아서 59개 회원국 중 33개국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유엔의 깃발 아래 모였고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 6개 국가가 군대 파견을 약속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전방사령관인 맥아더의 판단에 의해 2개 사단+1개 연대면 상황 끝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아시발꿈이었다

3.7. 미 해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 극동해군은 극동군 사령부의 일부였다. 당시 극동해군에는 상륙부대인 90기동부대와 소수의 전투함정을 보유하고 있는 96 기동부대가 있었다. 미 해군의 주력은 하와이의 태평양 함대사령부 예하 필리핀 주둔하고 있는 미 7함대 였다. 그러나 6월 27일부터 한국전쟁을 위해 극동해군 산하로 재 배속 되었다.

초대 극동해군 사령관은 찰스 터너 조이 해군중장으로 이후 휴전회담 개최시 유엔군 대표로 활동한다. 그리고 휴전회담 즈음인 52년 6월 4일에는 로버트 브리스코우 해군중장으로 교체되어 1954년 4월 2일까지 그 직책을 수행하게 된다.

한국전쟁 중 미 극동해군은 4개 작전 사령부를 통제하는데 다음과 같다.

  • 제77기동부대(제7공격함대)는 빠른 항공모함을 이용하여 한국의 동해안에서 주로 작전 활동을 하였다.
  • 제95기동부대(봉쇄 및 호위함대)는 주로 한국 서해안에서 활동하였다. 경항모, 호위항모, 해병항공대, 일부 동해안에서 활동하는 부대, 소해함대와 함께 유엔군과 한국해군도 모두 이쪽으로 배속 되었다.
  • 제90기동부대(극동상륙군)는 포항 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흥남 철수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 제96기동부대(주일 미 해군)는 대잠수함 활동과 일본 내 미 해군 기지에 대한 방호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미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항모는 총 15척이었다. 여기에는 7척의 공격용 항공모함(CV), 4척의 경함공모함(CVL), 4척의 호위항공모함(CVE)이 있었다. 2차대전때 항모만 백척 이상 있지 않았나?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남아있는게 어디야 전쟁이 종결될 무렵에는 CV 17척, CVL 5척, CVE 12척등 총 34척으로 늘었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에서는 정규 항공모함만 11척이 77기동함대에 배속되어 주로 한국 동해안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11척의 항모는 모두 에식스급으로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USS 에식스 (CV-9), USS 복서 (CV-21), USS 본 홈 리처드 (CV-31), USS 레이테 (CV-32), USS 키어사지 (CV-33), USS 오리스카니 (CV-34), USS 앤티텀 (CV-36), USS 프린스턴 (CV-37), USS 레이크 챔플레인 (CV-39), USS 밸리 포지 (CV-45), USS 필리핀 시 (CV-47).

경항모 1척과 호위항모 5척은 제95기동부대 소속으로 해병항공편대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쪽은 서해안이 주 활동구역이었다. 구성은 인디펜던스급 경항모 USS 바탄(CVL-29)과 카사블랑카급 호위항모 USS 코레이도르 (CVE-58), USS 싯코 베이 (CVE-86), 커멘스먼트베이급 호위항모 USS 렌도버 (CVE-114), USS 시실리 (CVE-118), USS 포인트 크루즈 (CVE-119).

여기에 제95기동함대에 배속된 유엔군 항모가 호주의 시드니호, 영국의 유니콘호, 워리어호, 글로리호, 오션호, 테세우스호, 트라이엄프호 등 총 7척이 있었다. 물론 북한+중공+소련 3형제에게는 항모는커녕 비슷하게 생긴 것도 없었으니 결국에는 지상폭격용 함재기 셔틀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기존에 있던 해군수송근무단과 육군수송단을 합쳐서 1949년 10월에 창설된 해상수송근무부대(MSTS) 화물 52,111,209톤, 유로 21,828,879톤, 인원 4,918,919명을 수송하여 천조국의 위상을 뿜어대며 한국전에 기여하였다.

항모를 제외한 전함들도 대활약 하였는데 16인치 함포가 포함된 4백만발의 포탄을 발사 하여 지상군에 대한 화력 지원을 하였다. 한국측 수기에는 주로 미해군의 16인치 함포의 위력에 대한 기록이 많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 진지를 달세계처럼 만들어서 놀랐다던지 하는 식으로 기술되었다.

그에 반해 공산측 수기에는 신기하게 터널 뚫어놓고 그 안에 촛불만 켜놓고 있어도 불빛을 보고 정확하게 구멍 안으로 쏘아대는 항공기들 때문에 밤이고 낮이고 박살나는 얘기만 쓰여 있다. 추측하자면 함포 한방에 실내수영장이 제조되는 관계로 당시 공산 측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서 수기로 작성되기 힘든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당시 한국군측 기록에서는 항공기보다는 주로 함포 사격의 위력과 고마움에 대해 자주 언급된다.

이러한 지구방위대급 미 해군의 활약에 비해 미 해군이 받은 피해는 4척의 소해함정과 1척의 원양 예인선이 적 기뢰에 의해 침몰한 것이 전부일 정도로 거의 일방적인 게임이었다. 그 외 미 해군 함정 73척이 해안포대에서 발사된 화력과 기뢰에 의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함정에 기스난 것까지 다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전사자가 진주만 공습의 1/10도 안될 정도이니...

미 해군 항공대 소속인 제24항모항공단(CAG)은 정규함공모함 함재되어 해군 예비항공편대 22개를 포함하여 총 100개의 편대가 한국전에서 활약 하였다. 이들과 지상기지 해병항공대는 미 공군 출격횟수인 392,139회의 70%에 달하는 275,912회 출격하여 북한-중공군을 항공기 공포증에 걸리게 만들었다. 피해는 적 대공화기에 의해 599대, 사고 등으로 인해 85대등 총 684대가 손실을 입었으며,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전투기 400대, 공격기 140대, 관측기 12대, 헬기 8대, 초계기 2대, 순찰기 1대, 수송기 1대이다. 사망자가 거의 없는 걸로 보아 역시 기스난 것 까지 포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 해군의 전체 피해는 전사 364명, 사고사등 128명이다.

3.8. 미 공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가장 빠르게 한국전에 개입한 것은 미 공군이었다. 6월 26일에 북한군 야크기가 민간인 철수에 분주한 미수송기를 공격하자 F-82 트윈 머스탱이 출격하여 북한군 전투기 3대를 격추시켜 버렸다. 그럼 백선엽 장군이 6월 25일에 들었다는 괴방송 "미공군이 참전하고 있으며 전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국민 여러분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라"가 완전히 날조는 아니라는 것인가? 물론 미공군의 참전은 사실이겠으나 전선은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고 안심하라며 국민들을 내팽개치고 정부가 도주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극동공군은 44개 편대, 항공기 657대, 33,625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69개 편대, 항공기 1,536대, 112,188명의 병력으로 확대된다. 초대 사령관은 조지 스트레이트 메이어 장군이며, 그가 1951년 5월에 심장마비로 물러나자 오토 웨이랜드 장군이 한국전쟁을 끝마칠 때까지 재임하였다.

미 극동공군은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있는 15개 공군기지를 이용하고 한국 내에서는 55개의 비행장을 보수하거나 새로 건설하여 이용하였다. 다만 이중에서 평양에 설치된 K-24 공군기지는 포기하였다. 언제 다시 찾아오나... 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당시 극동공군에는 일본 나고야에 제5공군,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 제13공군, 오키나와 나하의 카데나 공군기지에 제20공군이 있었지만 고유의 방위 임무 때문에 13공군과 20공군은 현 주둔지에 위치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제5공군만 한국전선으로 이동시켜 작전 활동을 하였다. 이후 폭격사령부, 전투화물사령부, 일본항공단을 창설하여 한국전에 참전한 부대는 다음과 같은 4개 부대였다.

  • 제5공군은 가장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주로 지상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과 적 보급 및 병참선 차단 작전을 지원하였다.
  • 전략폭격사령부는 미 본토의 전략공군사령부로부터 B-29 장거리 중폭격기를 배속 받아 편성한 부대였다. 정확히는 본토의 전략공군 사령부인 제15공군 산하 19전략폭격비행대를 제20공군을 위임받았다가 너무 원거리여서 통제 불능이라 극동 공군 산하 전략폭격사령부를 창설시켜 재배속 하였다. 전략폭격 사령관은 어메트 오도넬 소장으로 훌륭한 석기시대 매니아 였다. 각 31대의 B-29 중폭격기로 구성된 98, 307 폭격비행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의 대활약은 "더 이상 폭격할만한 건물이 없다."라는 보고로 유명해진다.
  • 전투화물사령부(후에 제315항공사단으로 개칭)는 환자공중수송과 공중보급작전을 담당하였다.
  • 일본 공중방위군(후에 제314항공사단으로 개칭)은 일본 본토의 방공을 담당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위에서 언급한 미 해군의 해상수송근무부대(MSTS)처럼 공군 역시 항공수송근무부대(MATS)가 이들을 백업하였다. MSTS는 병력과 장비, 그리고 군수물자를 전장으로 수송하였다.

제5공군이 적기 950대를 격추하는데 66,977회 출격, 제5공군+전략폭격사령부가 수행한 공중차단 작전에 192,581회 출격, 근접항공지원에 57,665회 출격, 전투화물 수송부의 화물 수송에 181,650회 출격, 기타 항공정찰 및 훈련에 222,078회 출격하여 총 720,980회 출격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다만 피해도 커서 1,466대의 비행기를 잃었다. 유엔공군 152대 피해, 미 해병항공대 368대의 피해를 포함하면 945대는 사고 등으로 피해를 입고, 1,041대의 항공기는 적과의 전투에서 피해를 입었다. 이중 공중전에서 147대, 방공화기에 의해 816대, 기타 교전에서 78대를 피해입어 전사자 198명을 포함하여 1,198명의 사상을 입었다.

미 해군과 육군과 달리 미 공군의 주적은 소련 공군이었다. 소련군은 비밀리에 공군과 방공군으로 참전하여 미공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6.25를 다룬 서적을 봐도 북한 공군에 대한 이야기는 소련군에 비교하면 거의 나오지 않는 수준이다.

3.9. 미 육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맥아더 장군은 "불이 났을 경우 화재진화 우선순위가 1~4번까지 있는 상황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4번 지역에서 불이 났다고 해서 1번 지역에 사용될 화재진압장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말하였다. 미국의 전략사상은 그동안 최우선 순위를 서유럽으로 하였다. 미국에서는 서유럽을 '사활적 이익지대'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2위가 중동, 3위가 극동이었다. 맥아더는 극동군 투입 외에 1번 지역인 서유럽 등의 병력의 전용을 말한 것이다.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은 "미국이 어느 지역에서든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행위에 어떤 명백한 선을 그어야 하는데, 바로 그 지역이 한국"이라 하면서 "소련이 미국과 싸우려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미국의 결의를 시험해 보는 행위로 본다."라고 말하였다.

참고로 브래들리 장군은 1950년 9월에 원수로 진급했다. 6.25 전쟁은 시기상으로 미군 역사상 최후의 원수가 배출된 전쟁이기도 하다. 물론 브래들리 장군이 2차대전의 영웅이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을테지만 적어도 시기상으로는 6.25 전쟁이 최후의 원수를 배출한 전쟁이다.

어찌되었거나 지원 병력 규모가 문제였는데 맥아더는 극동지역의 최고 책임자이면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데 위치한 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침공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한국 측의 끊임없는 6월 24일 또는 25일 남침 정보보고를 무시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하지만 이건 미정부에서도 예상 못했다고 쉴드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넘어가는 편이며, 미국 군사전문가들이나 장성들이 맥아더를 까는 논지는 주로 북한군을 과소평가하여 병력을 축차투입했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축차투입과 지상군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 최초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이후에는 "현재의 전선을 고수하고 차후에 빼앗긴 땅을 다시 찾을 능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지상군의 규모는) 미 1개 전투단 및 2개 사단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불과 며칠후인 7월 5일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가 오산에서 개발살나자 깜놀하여 "북한군은 전차로 증강된 잘 훈련된 병사로 구성되었으며, 북한군의 장비 중에는 미군의 것보다 우수한 것이 있으며, 적 지휘관의 지휘능력도 뛰어나다. 북한군을 저지하고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완전 편성의 4개 사단 내지는 4.5개 사단, 1개 공수연대전투단, 1개 기갑부대가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 꼴랑 3일후인 7월 8일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에게 보고받은 후에는 "한국의 사태는 매우 심각하며 그곳에는 이미 대규모 작전이 전개되고 있다. 나는 전에 요청한 병력에 부가해서 모든 지원부대를 갖춘 4개 사단의 병력이 지체없이 모든 가용한 수송수단을 이용하여 투입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1개 야전군 사령부와 8개 보병사단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 8야전군, 1군단, 1기병사단, 2·24·25사단, 5·29연대전투단, 6개 기갑대대로 구성된 세계최강의 미 육군 4개 사단과 유엔군+한국군으로도 도저히 북한군을 이길 수가 없어서 당시 북한군이 꼴랑 5만명+현지에서 소집한 타칭의용군 5만명으로 UN군의 절반밖에 안되던건 비밀♡ 허리를 끊기 위한 인천상륙작전 기간인 50년 9월 15일부터 10월 17일까지 32일동안 미 2개사단과 1개 독립연대전투단을 전개하였다. 구성은 미 9·10군단, 1해병사단, 7사단, 187 공수연대전투단.

  • 중공군 개입한 50년 12월에는 미 3보병사단 전개

  • 1951년 12월에는 40 주방위보병사단, 1952년 1월에는 45 주방위보병사단을 전개하였다. 물론 맥아더가 원하는건 만주에 핵폭탄 쏘고, 대만군으로 중국을 남쪽에서 진격하는 등 제3차 세계대전 지휘권이었지만 다행히 트루먼 대통령과 전쟁지휘부는 맥아더의 폭주를 제지하였다.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은 제8야전군, 1·9·10군단, 1기병사단, 2·3·7·24·25·40·45 보병사단, 1해병사단, 5·29보병연대전투단, 187공수연대전투단, 80개 보병대대, 54개 포병대대, 8개 기갑대대라는 미군의 총 지상 전력의 절반 이상을 한반도에 전개하였다.

미 지상군의 최고지휘관은 미 8야전군 사령관으로 총 4명이 재임하였고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0. 1944년 9월 2차 세계대전시 뉴기니와 레이테 전투에서 미 육군 전투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하여 미 8군 창설. 초대 사령관은 로버트 아이첼버거 중장.
1. 2대 사령관은 워커 중장으로 1948년부터 재임 중 한국전쟁 발발. 50년 12월 23일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당시 전쟁 중 한국의 도로 같지 않은 도로를 지프로 과속으로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한미 장성들의 숫자만 해도 상당하다.
2.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이 잠시 하다가, 세계3차 대전을 벌이자며 폭주하던 맥아더가 결국 잘리는 바람에, 대장으로 승진후 맥아더의 뒤를 이어 연합군 최고 사령관겸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NATO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역임.
3. 그 바람에 공석이 된 미 8군 사령관은 제임스 밴 플리트 중장이 53년 2월 11일까지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하였다. 그리고 그해 대장으로 승진하며 전역한다. 전쟁중 공군장교인 아들이 북한폭격갔다가 실종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영향인지 이후 한미재단을 만들고 한국육군사관학교를 지어주는등 한국에 대한 무한 애정을 쏟아부었다.
4. 그 후임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 당시 101 공수사단 사단장으로 유명한 맥스웰 테일러 중장이나 한국전만 보자면 대부분의 회고록이나 한국전 책에서 아예 다루지 않은 시기에 재임하여 본의아니게 듣보잡. 미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장군이기도 하다.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합동참모의장까지 지냈다.


3.10. 미 군수지원부대의 전개와 활동

미 군수지원부대는 미군뿐만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 전체에 대한 군수지원을 책임졌다. 최초에는 1950년 7월 4일 미 8군이 부산기지사령부를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어, 7월 13일 제8군 예하인 편제표상 1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인 B형 군수부대로서 부산군수사령부로 개편되었다. 당시는 일선부대의 요청->부산군수사령부->미8군 후방사령부->후방사령부(본토) 체계였다. 미 제8군은 부산군수사령부를 통하여 예하 부대 및 한국군에 대한 군수지원, 보급품 조달, 수송, 항구운영, 보관, 분배임무 이외에도 후방사령부를 통해 일본 점령임무도 책임지고 있었다.

미8군 후방사령부의 경우 한국에서 전장이 확대 될 것을 예상하고 50년 8월 25일 제8군 후방사령부를 기간으로 하여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주일군수사령부를 일본에 창설하였다.

그러나 50년 9월 19일 부산군수사령부는 전투부대가 늘어나 군수지원의 요소도 늘어나게 되어 C형 군수부대(4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인 제2군수사령부로 확대 개편 되었다.

같은 시기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편성된 제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3군수사령부를 인천에 설치하였다. 그러다 이게 꼬여서 원산상륙작전때는 3군수사령부는 미 8군을 지원하고 오히려 2군수사령부가 원산으로 상륙하는 미 10군단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맥아더의 직속 부대인 미 10군단이 미 8군과 별도로 노는 괴랄한 사태가 벌어져 중공군 개입당시 패전의 중요한 원인이 되어 결국 그 책임을 지고, 결국 미 10군단이 맥아더 직속에서 미 8군 예하로 들어오고, 3군수 사령부 역시 2군수 사령부 예하로 들어가 흡수 통합된다.

1952년 7월 10일에는 미 8군이 전방작전에만 전념하기 위해 한국병참지구사령부(KCOMZ)를 설치하여 북위 37도 이남의 후방지역에 대한 책임과 미 8군의 군수지원을 맡게 되었다. 예하로는 실질적인 군수지원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군수기지국(KBS)을 설치하였다. 한국병참지구사령부는 동년 10월 1일부터 미 육군 극동군 사령부가 일본 점령임무를 맡게되자 미 8군 소속에서 미육군극동군 사령부 산하로 예속변경 되었다. 주일군수사령부 역시 같은 시기에 미육군극동군 사령부에 흡수되었다.

3.11. 미 동원령 선포와 예비군 투입

문제는 미국의 ‘사활적 이익지대’인 서유럽과 그 다음 순위인 중동에 주둔한 미군 병력들을 건드리지 않고 극동과 본토 병력만으로는 이러한 어마어마한 대군이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미 의회는 투르먼 대통령에게 1951년 6월 30일 선별징집확대법안을 통가 시켜 예비군과 주방위군을 개별 또는 부대단위로 21개월 동안 현역 연방군으로 소집할 권한을 부여하였고, 7월 9일 이전 전역하는 병사들을 1년간 더 복무하도록 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흑흑. 대체 김일성이 누군데 나보고 군생활을 더하라는 거야 또한 선별 징병제에 따라 5만 명의 장정들을 소집하여 보충해 나갔다. 또한 주방위군과 예비군을 소집하여 병력을 충원하였다.

한국전 발발 당시에는 미 육군 예비군 266,726명, 주방위(National Guard)군 324,761명, 현역예비군 184,015명, 비현역지원예비군(Inactive Volunteer Reserve) 324,602명, 비현역예비군 91,800명이 있었다. 현역예비군과 비현역예비군의 차이점은 추가바람.

원래 전쟁이 6월 25일에 일어난 이유가 북한이 8월 15일까지 남한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필요기간인 50일을 역산하여 나온 날짜이다. 8.15까지 통일은 물 건너갔으니 이때 북괴군은 8.15까지 대구를 점령하겠다며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은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해야 한다며 배에 태웠다가, 낙동강이 무너지게 생겨서 배에 내려 긴급 땜빵하고 다시 배에 타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시기가 바로 8월 14일이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참이던 그 8월 14일, 육군 주방위군 27개 사단중 8개 사단과 20개 연대전투단중 3개 연대전투단을 포함하여 1,457개의 주방위군 부대가 동원되었다. 이들 부대로는 28·31·37·40·43·44·45·47 보병사단과 3개 연대전투단, 그리고 43개 대공포 대대로 총 138,600명이 현역으로 소집되었다. 이중 40·45사단은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1951년 중공군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 전선교대 부대가 되었다. 28·43사단은 유럽의 나토 방위를 위해 파견되었다.

주방위군과 마찬가지로 동원령에 따라 육군 예비군은 6,687개 부대중 934개 부대가 현역으로 소집되었고 이에 따라 장교 46,920명, 사병 150,807명 등 총 197,727명이 동원되었다. 전쟁 기간 중 초기 현역으로 전환된 43,000명의 예비역 장교를 포함하여 244,300명의 장병이 소집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단이나 연대 단위로 소집되어 현역으로 전환되어 투입된 주방위군과 달리 예비군은 원래 개인적으로 소집되어 현역부대를 보충하는 용도이다.

병력들을 소집하여 투입한 육군과 달리 미 해군은 퇴역한 군함 등 장비에 대한 보충에 중점을 두었다. 전쟁이 일어난 해 8월 28일에는 수많은 예비군과 함께 예비항공모함 프린스턴함(USS Princeton, CV-37)을 재취역하여 한국전에 투입하였고, 이어 1951년에는 순양함 본 홈 리차드, 에식스, 앤티텀함이 재취역하였으며, 약 22개 해군 예비 전투기편대가 제7함대기동군(Striking Force)에 현역으로 편입되어 한국 상공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미 공군의 경우 공군 주방위군 소속의 F-51전투기 145대를 소집하여 한국전선에 보낸다. 당시 한국전선에서 보여준 F-51 무스탕의 성능이 워낙 넘사벽이여서 미군의 최신예 전투기로 오인될 수 있으나, 당시 주방위군에서도 최신예 전천후 기종인 F-80 슈팅스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사실 극동공군에서도 F-80을 요청했지만 어른들의 사정으로 주방위군은 F-51 무스탕을 보냈다.

또한 437 예비병력수송항공단, 452 예비항공폭격단, 403 예비병력수송한공단을 현역으로 소집하고 51년에는 주방위군의 116·136 전투폭격비행단을 현역으로 동원하여 극동군 사령부로 보내어 52년 7월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기간중 공군 주방위군 22개 비행단과 공군예비군 10개 비행단, 그리고 10만 명의 공군예비군이 현역으로 소집되었다.

미 해병대의 경우 전쟁발발시 현역은 74,279명이었다. 팬들턴 캠프에 주둔하고 있던 제1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만 보유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도서를 보면 미 해병 1사단이 이름만 존재하지 실병력이 없어 미전역+예비군을 소집해서 채워넣어 작전에 투입했다는 기술이 나온다. 대체 태평양 전쟁 때 날고 기던 수많은 미해병사단이 어디 갔냐 싶어 어안이 벙벙하지만, 알고 보면 다른 군종처럼 전후 예산 감축의 철퇴를 맞아 병력이 대폭 쪼그라들었던 것이다.

1950년 7월 그나마 남아있던 제5해병연대는 제1임시해병여단의 모체가 되어 한국으로 출발하고, 전 세계에 있는 해병부대들은 1사단의 깃발아래 모이기 위해 해체되었다. 또한 해병편성예비군 33,528명을 현역으로 소집하였고 해병지원예비군 90,944명 중 51,942명이 현역으로 복무하였다. 이들 예비역 중 장교 79%, 사병 77.5%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이었다.

4. 전쟁의 영향

4.1. 부정적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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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간 동안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군 사망자도 45,000명에 이르는 등 기간에 비해 사망자가 많다. 이후 베트남전에서도 그러했듯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1950년의 남은 6개월 동안 발생했다. 그 이후 전투는 고지쟁탈전 위주라 사망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SBS에서 한국전을 배경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는 확인된 사망자만 600만이라고 방송하기도 했다.

다만. 인명피해는 남한보다는 북한이 압도적으로 많다. 우선 남한의 경우 전쟁 초기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본 뒤에는 인명 피해의 대부분이 군병력으로 국한됐고 그나마도 고지쟁탈전 위주라 장기간 지속되면서 병사들의 피를 말리기는 하지만 사상자는 정작 많지 않았다. 더욱이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인구도 많아서 전후 인구는 오히려 소폭 증가했다. 전쟁 전 남한의 인구는 2,050만 명인데 1955년에는 100만 명이 더 늘어났다.

반면, 북한은 기존 사망자도 남한에 비해 많았던 데다 월남민이 워낙 많아서 실제 감소의 규모는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심각한 편이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전쟁 중반부터 휴전에 목을 맨 반면, 정작 침략당한 이승만은 오히려 강경하게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이 된 것도 실상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휴전 이후 김일성과 이승만이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 탄압하는 대의명분을 얻으면서 양측의 권력이 공고화되는데 엄청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파, 남로당파, 연안파 등 조선노동당 내부의 다른 파벌들을 거의 숙청하여 북한 지도부를 종전의 연립정권 형태에서 김일성의 직계인 만주파가 정권을 독식하는 구조로 바꿔버린다.

한국에서는 종전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을 이용하여 야당 인사들을 탄압하였다. 특히, 남한에서는 휴전 이전부터 발췌 개헌이 전쟁시의 혼란상을 이용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북한에서 현재까지 독재가 진행되고 남한에서도 1987년 6.29 선언 이전까지 독재정치가 이루어졌다.

6.25 전쟁의 실질적인 최대 수혜자는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중공군 참전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모택동은 중일전쟁 때 적극적인 반일,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중공군의 참전이 일본을 국제사회에 복귀시키게 만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는 배경이 되었으니... 안습.

국제적으로는 태평양 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전후복구에 전념하던 일본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미국에서 대량의 보급물자 생산 및 수송을 발주받은 덕에 불황을 조기에 벗어나 경제 성장의 발판을 다졌다. 소독약만 팔아서 떼부자된 사람들도 존재했을 정도다. 의리없는 전쟁 초반에도 야쿠자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났는데 뭐 껀수 없나?'하고 잡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일본은 베트남 전쟁 때 비슷한 방식으로 또 한 번 떼돈을 벌어먹었다.

또 일본에서 차출된 미군 병력의 공백을 막기 위해 1954년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 예비대(警察豫備隊)가 신설되었다. 처음부터 군대가 아니였고 이를 계승한 자위대는 지금도 형식상 군대가 아니다.

다만 당시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가 한국에서 전쟁이 나자 "일본은 살았다!"라고 외쳤다는 소문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전쟁이 터지자 지지율이 큰폭으로 상승한 건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그런 소문이 날 정도로 일본에게는 호재였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일본이라는 국가는 당시를 기준으로 해도 메이지 유신 이래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 완성된 근대 국가였기에 한국전쟁이 없었다 해도 재건 자체는 시간문제로 경제대국으로 복귀하기는 했겠지만 그 정도를 크게 앞당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은 사실 종전후 일본이 다시금 잠정적 적대국으로 부활하는 것을 막기위해 일본의 공업력을 상당히 제한시켰고 상업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계약을 가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 군정령으로 발표된 '집단기업군 해체'였다.

한편,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년 내에 대만을 쩝쩝쓱싹하기로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래서 1950년 10월에 타이완 침공을 계획했었지만, 공격 개시 넉 달을 남겨두고 김일성이 남한으로 쳐들어가는 바람에 미국이 달려와서 대만 해협에 캐리어 항공모함을 박아버렸다 일부는 시즈모드. 정확히는 미국이 남한을 지원하려고 제7함대를 배치시켰는데, 대만까지 작전 가능 범위가 닿은 것이다.

게다가 타이완 침공에 사용하려던 병력과 장비도 북한군이 잘 나가던 초반부가 지나면서 영 안 좋게 돌아가자 증원을 위해 전용되었고 이들은 한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차츰 소모되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모택동에게 빅엿을 먹이고 장제스를 살려준 셈.역시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민폐다. 중국에게나 한국에게나 결국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끝난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대만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국전쟁 당시 UN군에 대해 겉으로 보기엔 대등 혹은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에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오른 면이 있었으며, 이는 후에 중국이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대만에서 빼앗아 오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다만 장제스 정권에 학을 뗀 친중파 미국관료들이 중공을 승인해서 중국을 유고슬라비아처럼 만들려던 계획이 틀어졌다는 도 있다. 즉 1950년도에 될 상임이사국 지위를 1970년 넘어서야 획득하고 미,소 사이에서 3세계의 대장으로 캐스팅보더의 역할을 잡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이렇게 포기할게 많아져서야... 중공이 베이징이 아닌 난징에다 수도를 정했다면 아마 북한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또한 국공내전 당시 생포한 국민당 포로 출신들을 전장에 투입하여 정리했고 UN군에게 잡힌 중공군 포로의 대다수였던 국민당군은 거의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1당 독재를 공고히 하는 데 요긴하게 써먹기도 했다. 게다가 원래 북한을 밀어주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이 간도의 지배권을 북한에게 넘겨주려다 북한이 전쟁에서 지자 중국에 줘버렸다는 설도 있다.

덤으로 당시 남로당 활동으로 잡혀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가 프락치 고발과 만주군 인맥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지만 결국 파면당해 일반 문관 신분으로 살아가던 박정희도 이 때 군으로 정식 복귀한다. 체포되지 아니었으면 박정희의 삶도 한국 정치사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남한 껴안고 자폭해서 대만일본을 살려준 셈이다. 소련 : 우리들 가운데 스파이가 있는 것 같아

한반도의 국민적 차원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말 그대로 전쟁을 겪었던 장년층들은 물론 그 이후에 중년층, 그리고 현재의 한국 청년들에게도 크나큰 시련을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6.25 직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대한민국의 징병제로 한국의 현 징병제는 6.25 전쟁이 가장 큰 계기로 작용하였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초기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 때문에 한국군의 규모를 약 10만명 선에서 제한을 두었는데, 전쟁이 터지고 전황이 UN군과 국군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대한민국 국회는 1951년 5월에 징병제를 부활시켰다. 그 이전에는 모병제였다. 하지만 법을 다시 고치기 전까지 거리에서 청년들을 징집시키거나 가택수색까지 해서 청년을 군대에 넣었다고 하니 국회는 이러한 조치를 그나마 좀 그럴듯하게 돌아가도록 제도상으로 공식화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남북대립이 징병제 도입의 직접적 원인이기는 하나, 남북분단이 없었더라도 징병제 자체는 도입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무엇보다 한국의 위쪽에 중국과 소련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에 비해 병력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징병제도 현재에 비해서는 좀 더 여유롭게 운영되었을 것이다. 또한 징병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인 분위기 또한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이 든 세대들이 빨갱이란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 육군이 공군, 해군, 주한미군에 비해 휴가, 외박에 좀 더 보수적인 스탠스인 이유도 당시에 출타자가 지나치게 많아(농번기 휴가) 초기 대응에 실패한 데서 나온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국내 경제에 끼친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남한의 경제적 중심지였던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고 한국군에게 재수복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나마 일제강점기 동안 구축해놓고 해방 이후에 개수하여 사용되던 건물이라거나 유물, 그리고 절대 다수 국민의 생활 터전 등 물질적 재산 요소가 다수 파괴되어 전쟁 이후 3~4년에 걸쳐 전부 다시 지어야 했다. 당시 남한의 국민소득은 이후 아프리카 최빈국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잿더미 위의 맨땅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후에도 지속된 경제난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물자는 전후 복구를 신속하게 완료하는 데 도움을 줬지만 대신 농촌경제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동시에 기초경제를 미국에 크게 의존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다만 실제 경제적인 GDP 감소 수치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1950년 한 해 동안에만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이후 3년간은 플러스로 일관했다는 것. 즉 원래부터 가난한 나라였고 전쟁이 미친 여파는 심리적인 측면이라면 몰라도 경제적인 평가의 측면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전통 문화재가 파괴, 소실, 행방불명되었으며, 전국 산간 지역의 수많은 사찰들이 미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 중에 파괴된 바 있다. 특히 108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였던 금강산 지역에서는 2개 빼놓고 모든 절이 소장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자료와 유물들과 함께 소실되었다.

북한군 게릴라 토벌에만 신경 쓴 나머지 해인사 폭격 명령까지 내려왔으나 이 때 공군 조종사였던 故 김영환 장군이 이를 거부하고 설득 작업에 들어가 폭격을 막았다. 이 때 이승만은 도리어 김 장군을 사임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장군은 이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또 빨치산 토벌로 유명한 차일혁 총경도 문화재 보호에 공이 있는데,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에 차일혁 총경은 고민하다가 화엄사의 문짝을 떼어내 태워서 불지르는 시늉만 했다고 한다. 전후에 조계종에서 차일혁 총경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차 총경은 화엄사 소각 명령에 불복종한 것과 1953년 9월 사살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여 화장한 유골을 수목장시켜준 것이 화근이 되어, 휴전 후 지방 경찰서장 등 한직만 전전하는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 결국 공주 경찰서장으로 재직 중이던 1958년 8월 9일, 가족들과 함께 금강으로 피서를 갔다가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차 총경은 2011년에야 6.25 때의 공적이 인정되어 뒤늦게 경무관으로 추서되었다.

게다가 태조부터 순종까지 역대 조선 임금들의 어진과 왕실 인사들의 초상화가 공산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부산으로 옮겨졌는데 공산군의 공격이 아닌 전후(1954년) 관리부재로 인한 화재전주, 함흥 등에 다른 어진이 남아 있었던 태조 이성계, 유일하게 온전히 살려냈고 세자 시절을 그린 것 또한 겨우 살려낸 영조, 반만 탄 철종, 어진이 많고 사진 자료도 남아 있는 고종, 사진 자료가 남아 있는 순종 등 극소수 인물을 제외하고 전부, 그야말로 완전히 타버려 어떤 방법으로도 얼굴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왕실 족보인 원보감에 어진이 남아 있는 왕들이 있긴 하나, 질은 당연히 소실된 어진에 비해 조악하다.

이 밖에도 이성계의 활 등 수 많은 국보급 유물이 전쟁통에 파손되거나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당시에 남았던 어진은 태조, 세조와 숙종 이후의 임금들의 어진만이 있었다. 사실 어진 소실에는 임진왜란이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쟁은 문화재의 적

한편 전쟁 중의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남북 양 측은 서로 상대편의 학살을 비난하며 이를 이데올로기 대립에 이용한 바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시기의 충격으로 이에 관련한 문학 작품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반공 문학. 때문에 남한에서는 민주화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으로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이 비판 대상에 올라 정부와 사회각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서고 있고 피해보상도 해주고는 있지만 북한은 아직도 독재 체제라서 그런 거 없다.

주체가 누구냐를 떠나서 이러한 학살 문제는 결국 당시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 상태로 몰아넣었다. 때문에 전후 문학에는 단순히 반공 문학뿐만 아니라 국군과 북한군의 사이에서 휘둘려야 했던 민중의 고통을 논하는 작품 또한 많다. 전란의 혼란상으로 인한 사회의 황폐화는 몽실 언니 등의 작품, 국군과 인민군의 학살로 인한 민중의 공포와 트라우마는 소문의 벽 등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4.1.1. 국군에 의한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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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주축인 UN군폭격으로 인한 38도선 이남 지역의 궤멸적인 피해는 격의 역사 같은 외국 서적을 통해서나 겨우 알 수 있는 지경이다. 물론 전 국토가 전장이었던 만큼 오폭 등에 의한 피해는 불가항력이었으며 적 전력을 압도하기 위한 폭격 및 초토화 작전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로 B-29네이팜탄을 몇백 톤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북한군에게 직접적으로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한 왜관-다부동 전투 융단폭격.

사실 이 당시에 미국의 폭격기사령부는 폭격기 수를 2차대전 이후로 크게 줄이지 않는 등 막강한 공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기간은 길었고 땅은 좁았으며 이런저런 난항을 겪었던 2차대전 때와는 달리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때에는 폭격 교리와 장비도 완성 이후 테스트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보다 훨씬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난 일본에서의 공습피해를 생각해 보면, 전쟁기간 중 상대적으로 북한에 훨씬 심한 폭격을 가했을 것이다.

전쟁 중의 보고 중에 전쟁 후 평양에 멀쩡한 건물이 2채 밖에 없었고 원산에는 함포사격까지 겹쳐서 남은 건물이 없었다는 말이 있다. 자료에 따르면 미공군은 전쟁이 시작된 그 주에 제공권을 확실히 장악했고, 부산으로 몰렸을 때에 이미 전략폭격 목표를 찾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공군은 계속 하늘을 날았으며, 전선고착 이후에는 철도와 저수지에 대한 폭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료들의 근거들은 격의 역사가 쓰여진 이후에 발견된 미군의 작전 보고서와 그 사진들이다.

이러한 폭격 때문에 북한 정부는 굴을 파고 지하에 공장, 시장 등등 모든 생활 기반들을 마련하여 버텼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월맹군과 비슷하게 산 듯. 이는 KBS에서 방영한 10부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중 7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 황해도 신천군에서 미군이 1950년 10월~12월 사이에 3~4만 명의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데, 이를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설립하고 반미주의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신천군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된 사건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학살의 주체는 미군이 절대 아니다.

당시 미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었기 때문에 황해도 신천군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또한, 북한 측에서 주장하는 '미군&유엔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자세한 설명은 신천군 사건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참고로 이쪽처럼 남측도 북한으로부터 수복한 북한 및 남한 지역에서 상당수 주민을 학살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알려진 사건이 바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다. 이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CIC 특무대장 김창룡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빨치산 토벌작전 시에도 의도하지 않은, 혹은 의도한 학살사건들이 여럿 있으며, 특히 의도적인 학살로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유명하다.

그나마 공식적으로 확인된 미군에 의한 학살로는 노근리 학살사건이 있다.

또한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박남식의 회고록 '실낙원의 비극'에는, 장군들이 시찰을 오면 사단장이 근처 피난민촌에서 민간인을 납치한 다음 처녀성 검사를 하고 성상납을 했다는 언급이 있다.

또한 한국군에서도 위안부를 운영했다. #

나비 연구로 유명한 주명 박사#도 이 때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평양 출신인 박사는 사투리가 있었고, 수복된 서울에서 50년 10월 6일에 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박사의 죽음에 대해 설이 몇가지 있는데, 술에 취한 군인이나 청년단원(서북청년회란 설이 있다.)가 다짜고짜 말투로 시비를 걸고 빨갱이라며 쏴 죽였다는 것이다. 서북청년회 설이 사실이라면, 주축이 월남한 사람들이므로 북한 말씨 쓰는 사람들이 북한 말씨 쓰는 사람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여 쏴 죽인 어처구니 없는 살인 사건이 된다.


4.1.2. 북한군에 의한 인민재판과 학살

사실 최근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이 주장되고 있으나 이는 오랜세월 군사독재 정권으로 인해 언급 자체가 금기시 되었었기 때문에, 근20년에 걸쳐 이제서야 겨우 진상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40년 넘게 묻혀있던 사건이 한꺼번에 발굴되면서 갑자기 많이 언급되는 것 처럼 보이는 것. 개전 3일만에 벌어진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이 대표적이다. 북한군 후퇴 와중에 벌어진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은 대전 형무소 단 한 곳에서만 약 7,000여구의 시신이 수습될 정도였다.[7]

또한 북한군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이광수,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정지용 등 수많은 정치, 문화, 경제계 인사들을 납북하였으며 당시 유력한 중도파 국회의원으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조봉암이 있었는데 조봉암 빼고 납북당하여 중도파로서 이승만을 견제할 인물은 조봉암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는 남한 정치의 커다란 손실로 평가된다. 물론 북한은 이것까지 전부 염두해두고 있었고, "모시겠다"는 명분으로 이 사람들을 데려갔다.

납북된 중도파 정치인들(특히,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은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철저히 금기시당해 왔었다. 제1공화국 정부 시기 동안 조소앙은 아예 '북한의 간첩'이라고 규정되었을 정도였다. 또한, 그의 가족들은 대한민국에서 오랜 기간 동안 소위 연좌제의 굴레를 받으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다행히도 나중에 훗날 1987년 6월 항쟁 이후 1989년에 복권되었지만……

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5.30 총선거(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중도파 세력들이 다수 점유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중도파 의원들 상당수가 납북당해 이승만과 친일파 세력들에게 정계의 커다란 입지를 주는 빌미를 마련했다'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같이 극단적 반공국가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현대사의 비극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이름이 알려진 저명인사 외에도 북한군은 반공 인사, 경찰관, 공무원 및 그 가족을 대량 학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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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처형할 때 대중을 동원한 공개 재판의 형태를 취할 때가 많았는데 이를 '인민재판'이라고 하였다. 이 '인민재판'이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에서 '마녀사냥'과 비슷한 의미로 현재까지도 흔히 쓰이고 있다.

북한군이 낙동강 일대까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을 때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빈농계층의 젊은이들은 계급 해방되는 사회주의 세상이 오는 줄로 알고 북한군 밑에서 한자리 꿰차고 그 동안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친일파, 지주, 경찰, 공무원, 서북청년단 등의 동네의 세력가들을 반동으로 몰아 인민재판에 회부해 처형하는 데에 적극 앞장섰는데, 이는 서울 지역에서 인민재판이 행해진 여파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문제는 세력가들 중의 상당수가 주변 민심을 얻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소에 민심을 얻어놓은 세력가는 인민재판을 받았어도 죽음은 면했지만 그래도 간신히 살아남는 정도였다고 한다.

북한군 낙오병이나 북한군에 협조했던 동조자들은 자신이 처형했던 사람들의 주변인들에게 그대로 보복당하거나 아니면 동네에서 도망쳐 빨치산이 되어 게릴라 전투를 수행하다가 죽거나 감옥에 가게 되었다. 결국 같은 동네나 이웃 동네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씻을 수 없는 불신과 증오의 상처를 남기게 된 것이다.

이같은 가혹한 인민재판과 학살, 그에 따른 반목으로 인한 한 마을의 비극은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도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여담이지만 스탈린은 한국전쟁 중 인민재판에 대한 정보를 전파받자마자 "김일성 동무는 이 미친 짓을 규제하지 않고 무얼 하는 건가?"라며 격분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군이라는 집단은 인민의 협조를 얻는 것을 미덕으로 하는데 그 인민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짓을 하는 건 정신 나간 행태이기 때문이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중국 공산군이 국공내전때 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당시 마오쩌둥은 인민을 위한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점령지역 주민에 민폐를 끼치지 말것, 주민들의 고충을 상세히 듣고 해결할 수 있으면 해결할 것, 주민들의 소유물에는 손을 대지말것. 대신 부득이하게 쓰게 될 경우에는 그 댓가를 반드시 지불할 것 등을 지침으로 삼아 휘하 공산군인들에게 훈육시켰다. 그 결과 대다수의 주민들이 공산군들을 환영했고 국민당의 부패와 부정등에 염증이 난 일부 국민당 인사들까지 공산당으로 전향할 정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쟁 초 북한군이 남진하고 있을 때는 북한군 지휘부의 승인으로, 지역 동조자 또는 내무서(북한에서 경찰서를 부르는 말), 정치보위부 등 치안기구가 담당하여 인민재판을 행했다. 대체로 북한'군'이 직접 손을 대지는 않은 것. 단, 당시 북한군과 내무서원은 계급장만 다른 동일한 제복을 착용했으므로 내무서원에 의한 학살이 북한군에 의한 것으로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은 있다.

예외로 국군과 미군 포로 상당수는 북한군에 의해 직접 학살되고 시체도 마구 훼손된 경우가 흔했다. 국군의 경우 간부나 이북 출신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고문당한 뒤 처형당했다고 한다. 부상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군이 북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북한군이 군기가 엄정해서 점령지 주민들에게 신사적으로 대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유대인을 살려준 친위대나 위안부를 사랑한 일본군처럼 개별적인 특수사례로 국한된다. 전쟁 전 기간으로 이를 넓혀 적용하면 말 그대로 코미디가 된다. 특히 전면패주 중에 공황상태로 자행한 학살은 한국군이 개전 초에 저지른 학살보다 더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한국군이든 북한군이든 입이 열 자라도 할 말이 없다.

사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공군이 제일 매너가 좋았다고 한다. 중공군은 모택동대장정 시절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민가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다"라는 비유로 유명한 인민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철칙이 있었기 때문에, 절대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장개석을 이긴 큰 요인이다.

장개석 군대인 국부군은 기강도 해이했을 뿐만 아니라 민가에 온갖 민폐를 끼치는 등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민중들은 알아서 모택동을 도왔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중공군은 잠을 자도 꼭 헛간이나 마당에서 잤고 음식을 얻어먹으면 돈은 못 줘도 하다 못해 일이라도 해주면서 꼭 보답을 했다고 한다. 이중 문식이 있는 중공군이 있으면 한자로 소통을 하거나 조선족 통역을 통해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며 민심 확보에 매우 주력했는데 이는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요소다.

또한 중공군은 포로들에게도 제법 신사적이라 겨울날 포로들에게 뜨거운 물을 주기 위해 폭격의 위협을 무릅쓰고 물을 끓여주기도 했는데 이 물은 마시라고 준 물이었다. 헌데 미군들은 이 물을 씻으라고 준 물인줄 알고 열심히 씻었고 중공군들이 격노하는 사태가 있었다고도 한다.

물론 사람이 모이다 보니 중공군 중에도 간혹 상태가 안 좋은 인간은 있었고 장진호 전투 당시에 포로들을 죽인 중공군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분명한 건 이는 언제까지나 일부의 일탈 행위일 뿐 군 상층부의 방침은 분명했다는 것이다.

미군은 어느 동네를 가건 초콜렛이나 과자, 스팸 등 먹을 것을 마구마구 뿌려댔기에 매너에 관계없이 인기가 좋았고 국군과 인민군은 전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직접 학살은 아니지만 결국 관련된 사람들을 죽게 만든 명백한 잔학행위로는 점령한 남한지역에서 군인을 충원하기 위해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징병해서 끌고 간 것도 있다. 물론 제1차 모집 때는 순수 지원자만 받았지만, 지원자가 원하는 숫자만큼 나오지 않아서 곧바로 강제동원으로 전환했다.

서울 함락 직후에 실시한 1차 의용군 참가 궐기대회의 지원자 수가 단 406명이었던 것이다. 북한군이 소백산맥을 넘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한 제2차 모집부터는 강제징집에 가택수색까지 합쳐진 것이라서 이미 말만 의용군이지 자기 의사로 북한군이 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북한의 낙동강 전선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속하게 붕괴된 것은 바로 이런 병사들이 후퇴를 시작하자마자 남한으로 줄줄이 투항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국군에 편입되거나 반공 포로가 되어 그대로 남한에 남게 된다. 서울대병원 학살사건

미군의 화력에 의한 북한군의 병력 소모가 엄청나다 보니 이를 보충하기 위한 남한에서의 의용군 징병은 엄청난 수에 달했고, 그러다 보니 낙동강 전투시에 북한군의 1/3이 남한 출신 의용군일 정도로 많았다. 북한군이 허겁지겁 패주하고 병력을 상실하면서 점령지에서 많은 숫자의 젊은이들을 징집해갔으며, 1.4 후퇴 당시 서울이 재함락되었을 때가 가장 심했다고 한다. 이런 식이었으니 필사적으로 북한군과 싸워 물리친 후에 전장을 청소하다가 북한군 옷을 입고 신음하는 동생을 발견하는 일이 낙동강부터 백마고지까지 다반사였다는 것. 이렇게 된 것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월남민도 대거 나오면서 인력이 부족해진 북한이 남한 청년들을 강제 징집해서라도 수를 채우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2011년 출간된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박경철 저, 리더스북)에는 남자들이 떠나고 여자들만 남은 마을에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자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윤간하여 그 결과로 태어난 한 아이의 기구한 운명에 관한 실화가 등장한다.

2010년에 출간된 '마을로 간 한국전쟁'(박찬승 저, 돌베개)은 농촌 공동체 내에 잠재해 있던 갈등이 전쟁 상황에서 폭력적이고 무제한적으로 표출되었을 때 어떤 참극이 일어나는지를 다루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례는 모두 촌락 내 혹은 촌락간 상호 학살이다. 저자는 진도 현풍 곽씨 동족마을, 영암 영보리, 부여의 두 동족마을, 당진 합덕면, 금산 부리면 해평 길씨 동족마을을 선정하여 일가친척, 혹은 이웃들이 서로를 죽고 죽인 비극이 어떻게 벌어졌는가를 살피고 있다.

4.1.3. 공업기반 파괴

사실 한반도에는 이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여러곳에 공장들이 널려 있었고 특히 일제가 만주진출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공장들이 북한에 널려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넘사벽으로 잘 살았다. 하지만 김일성이 일으킨 이 무리한 전쟁 때문에 공업시설들이 거의 대부분 파괴되어 GDP가 전쟁 전에 비해 매우 큰 폭으로 감소했다.

특히 평양폭격이나 원산폭격이 북한으로서는 굉장히 치명적이었는데 원산의 경우 공군력 뿐만 아니라 해군력으로도 같이 폭격을 실시하는 바람에 원산은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그 순간까지 말 그대로 불지옥이었다. 이러는 통에 평양과 원산 등에 있는 대규모 공업단지들이 모두 파괴됨은 물론 평양과 원산은 아예 허허벌판이 되었다.

오히려 남한은 이 전쟁 중에 GDP가 늘어났다. 1950년에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이후 3년 내내 플러스 성장을 이어간 것이 그 원인이다. 다만 워낙 밑바닥이었던지라 1953년 기준 소득이 67달러에 불과했다.

만약 이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이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공업시설들을 그대로 갖고 있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북한은 이렇게까지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김일성이 자기 무덤을 판 것이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전쟁 직후 소련은 공산권 위성국가들과 함께 북한에 대규모의 지원을 펼쳤다. 이 규모는 대단히 방대한 양이었으며, 이 지원으로 인해 북한의 파괴된 산업 시설들은 1950년대 후반까지 완전히 복구되었다.

북한과 남한의 경제 격차가 역전된 시기는 1980년대부터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피해로 인한 경제적 타격보다는 체제와 관련된 외적 요소가 더욱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70년대는 북한 경제의 황금기로 남한에 비해 상당히 잘 살았다. 70년대에 비데를 호텔에 설치하고 컬러TV를 보급했다. 하지만 훗날 고난의 행군의 단초가 되는 병크중 상 병크인 주체농법은 70년초부터 시작했다.

4.2. 긍정적 결과

일어나지 말아야 했을 전쟁이긴 해도 한국전쟁이 상흔만을 남긴 것은 아니고, 가져온 긍정적 효과가 없지는 않다. 따지고 보면 정치적으로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도 사실.

4.2.1. 사회적 차원

  • 호전론자들의 소멸

해방 전후의 호전적인 양측 대결론자들이 이 전쟁을 통해 대거 전사, 숙청 등으로 사라지면서 잠시 동안 전면전을 생각하지 않게 된 것도 있다. 그 때의 북한은 핀치에 몰리더라도 킹왕짱 소련 동무들이 도와줄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지만, 정작 뚜껑이 열리자 소련은 매우 소극적으로 일관하여 이후 소련에 대한 의존성 역시 크게 줄었다. 무엇보다 군사대결에서 경제대결로 패러다임을 선회한 것은 전후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남한 내 각지에서 기승을 부리던 빨치산도 전쟁을 통해 인민군과 같이 북으로 쫓겨가거나 지리산으로 집중되어 쉽게 토벌됐으며, 애초에 북한 측도 빨치산을 도울 생각이 별로 없었으니 이것도 그나마 다행일지 모른다. 즉 남한 내부에 존재하면서 남한 체제에 반감을 가짐과 동시에 무장을 한 집단이 한번의 커다란 단기간 전쟁으로 싸그리 갈려나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 남베트남의 예를 들더라도 이러한 무장세력이 잔존했다면 두고 두고 골치거리였을 것이다. 21세기 현재도 남한 내부에 존재하면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무장을 한 세력은 아니다.

북한이 빨치산을 도울 생각이 없었긴 하나 만일 이러한 세력이 장기간 남한 내에서 존재한다면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물론 남베트남처럼 적극적으로 써먹지는 못했겠지만 소규모 조직 중심의 도시 게릴라 활동 등의 행동까지 불가능한 건 아니라 국민의 피로도는 더 증가했을 수도 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이었지만 그래도 일어났다면 짧게 끝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짧게 끝난게 아니라서 문제였지. 지리하게 끌었던 휴전협정과 고지쟁탈전... 이때 허망히 죽어간 엄청난 수의 젊은 피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 계급의식의 타파

한국인의 의식 속에 남아있던 전통적인 계급 의식이 완전히 타파되었다. 북한은 깨졌다가 이상하게 붙었지만.

해방 이후까지 남아 있던 '이웃집 김서방은 조상이 백정, 뒷집 이서방은 조상이 양반' 같은 식으로 남았던 계급 의식은 극심한 인구 이동이 이루어지고 전통적인 마을의 구조가 크게 변화했기 때문에 완전히 깨졌다.

일단 계급 의식 자체가 정착 생활, 즉 농업 사회에서 강한데 전쟁으로 인해 정착하는 것이 불가능해 진데다 모두가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바람에 먹고 사는데 급급하여 가문이니 계급이니 챙길 여유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계급 의식도 해체된다. 자연스럽게 돈을 많이 벌든 명예를 얻든 개고생 노력해서 성공하면 대접받을 수 있는, 아시아에서 몇 안되는 실력주의 사회(meritocratic society)가 되었다. 다만 그 반대급부로 그 실력주의가 너무 심하고 제한되어 있어 문제가 되고 있기는 하다.

현대에 계급이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되겠냐 하지만, 아시아에는 법률상으로는 평등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계급 차별이 있는 나라가 아주 많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현재진행형이며 선진국이라는 일본도 부라쿠민 출신에 대한 차별대우가 극심하다.

가장 사정이 안 좋은 곳은 북한. 실질적인 계급제도가 있는 일본과 인도 역시 그래도 실력의 정도에 따라 대우가 좀 나아질 가망이 있지만 북한은 한번 적대계층은 영원히 적대계층으로 살아야 하는 구조다. 양반이니 뭐니 하는 전통적인 계급은 깨졌지만 새 신분제도가 들어선 격.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시 계급 사회로 살다가 민주주의로 변경한 유럽과 북미의 경우는 유혈사태를 거쳐 철저하게 계급 구조가 갈아엎어졌으나, 그 외 지역은 그렇지 않고 비교적 평화롭게 계급 구조에 변화가 가해졌기 때문이다. 유럽과 북미의 경우 프랑스혁명, 러시아의 혁명, 적백내전, 미국독립전쟁, 그리고 전 유럽을 강타한 두차례의 세계대전 등 많은 전쟁 속에 '높으신 분들'이 많이 죽어나가고 고만고만한(?) 서민들이 많이 남아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되었기 때문에 계급 의식이 타파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동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들은 대부분 이런 '선진국'들의 압박으로 민주주의로 전환한 케이스인지라, 어느 누가 무슨 계급 출신인지 동네 사람들이 명명백백하게 기억하고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동등하지만 아직도 뇌리에 누가 귀족이고 누가 평민인지 남아있으니 계급 평등이 잘 안되는 것이다.

한국 또한 마찬가지로 개화기와 근대화 초기엔 말로만 평등일뿐 큰 차이가 전무했으나, 전란을 겪으면서 전국민의 토지의 소유관계가 불분명해지고 대다수의 지주들이 땅을 잃고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으면서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 오랫동안 굳건하게 자리잡던 지주 계급이 말 그대로 소멸되었다. 물론 지주계급이라고 할 수 없는 시민이나 농민 역시 비슷하게 큰 타격을 입었지만...

지주계급이 소멸된 덕분에 60년대 정부가 농업보다 공업화를 우선시한 경제개발정책을 시행했음에도 지주의 반발로 무산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보수기득권세력인 농장지주들이 공업화에 반대하여 국가차원의 경제개발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무수히 많은 국가 발전의 기회를 놓친 남미 국가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물론 산업화 이후인 현재 대한민국은 지주 대신 갑의 대명사로 꼽히는 재벌이 등장했지만 최소한 구 질서는 확실히 청산됐고, 이에 따라 공식적인 계급 제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북한도 마찬가지로 전쟁이란 과정을 통해 남한과 같이 지주 계급을 청산하는덴 성공하였으나, 결국 '출신성분'이라는 새로운 계급 제도를 창설했다. 무엇보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인 계급의식 타파라는 찬스를 자신의 발로 차버린 꼴이 되었다. 결국 현 북한은 봉건시대의 왕정 국가만도 못한 수준의 계급의식 시절로 회귀해버렸다. 그나마 최근에는 좀 나아졌다지만, 그것도 북한 정권의 통제가 고난의 행군 이후 크게 약화된 덕분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계급의식 타파가 전쟁 그 자체의 원인 뿐만 아니라, 전후의 노력도 있었다는 반증이다.

  • 일제강점기 잔재의 소멸

남한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그나마 있었던 근대적 시설물들이 완벽하게 파괴되면서 일제와는 상관없이 한민족의 근성노력으로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어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도 다행이라면 다행. 근데 그걸 감안해도 잃은 게 너무 많잖아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일본에서 만들었든 어디서 만들었든 "없는 것 보단 낫지"라는 생각을 하기 딱 좋은 시절이었다. 사실 사변 이전 한반도의 공장들은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합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니 꼭 "일제의 잔재"라고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주장도 있다. 거기다가 이 논지는 해방 이전 시설들은 모두 일제 주도하에서 이루어졌으니... 식의 또다른 관점에서의 일빠성 주장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어 위험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유럽에서 준 자산 날리고 나서는 몇몇 특권층들 빼면 사실상 수세기 전의 삶을 사는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산미증식계획으로 늘어난 쌀이 어디로 날아갔는지를 생각하면...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는 누구들은 한국전쟁을 꽁(...)으로 승리한 것으로 치부하고 해방 이후 일제가 세웠던 시설들이 다 보존되어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으로 일제 덕에 대한민국이 발전했다는 주장을 하는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다. 일단 그게 죄다 멀쩡했다는 건 개소리라는 사실은 둘째치고, 이 말은 전쟁을 단순히 시설 파괴 없이 재산, 인명 피해만 일어나는 것으로 치부하는 주장이다.[8]

4.2.2. 국가적 차원

이 전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전면전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 전쟁이 아니었다면 국군은 아직까지도 실전 경험의 부족으로 전술 교리 체계를 미국에 의존해야 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주변국에게 '현대 들어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었던 나라' 라는 취급을 받으며 전투 역량이 저평가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전의 경험을 통해 국군은 적지 않은 전훈과 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국내에서 실전 경험을 보유한 지휘관들이 국군 창립 멤버로 자리잡아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으며 최소한 전면전 관련 부분에서는 전세계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을 이뤄냈다.

물론 현재 서방 군대가 중시하는 제3세계 시가전이나 대외 전쟁 상황에서의 대게릴라전 등에는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는 있다. 사실 한국군은 미군이 아니므로 제3세계 전쟁상황에 시가전이나 게릴라전을 벌이러 파병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게릴라전의 특성 상, 경험 많은 미군도 많이 헤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다만 한국군 입장에서도 통일 이후 또는 제2한국전 시 북한군 게릴라와 특수전 및 게릴라전이 분명히 벌어질 것이 예상되므로 이에 대한 대비는 꼭 해야 하고, 실제로도 대비하고 있다. 특히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손원일 제독이 대표적으로, 손 제독과 한국전쟁 덕에 해군은 그 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급성장을 이루어 전쟁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북한에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애들은 그렇케 싸우면서 크는거야..(응?...)

  • 실효지배하는 영토의 득실

영토 면에서 대한민국은 경기도 북부 및 황해도 남단 일부를 상실했지만 대신 강원도 북단을 차지했다. 현재의 고성, 인제, 양구, 화천, 철원 등이 그것으로, 전쟁 당시도 이곳의 고지에서 가장 격렬한 공방이 있었고 하나같이 전술적 가치도 높은 땅이여서 지금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 지역을 지켜내고 있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북한의 치하에 있었을 것이다.

대신 개성, 옹진 반도를 상실하면서 서해에서 북한의 입김이 강해졌다. 물론 휴전 시점에 북한의 해군력은 괴멸상태였기 때문에 남한 본토보다 북한에 훨씬 가까운 서해 5도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졌다.

물론 산업 시설의 상당 부분이 경남 임해 공업 지대 등 후방으로 옮겨가는 등의 조치는 있었고 게다가 서울에 대한 북한의 타격수단이 매우 한정적이긴 하지만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사회 중심지로서의 서울의 가치 자체는 그대로였고, 그 결과 북한의 도발과 관련해서 사소한 것으로도 코리안 리스크가 거론되게 되었다.

사족으로 서울에 포격으로 밀어 붙인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애시당초 고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숲을 포격으로 민다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는 발상이다. 현대 시가전이 괜히 봉쇄 위주 전략으로 바뀐 게 아니다.

북한의 위협 때문에 한미동맹이 더욱 강화되고 군사력의 첨단화도 갈수록 더 강화되는 추세이지만, 어쨌든 전쟁 전후의 남한이 실효지배하는 영토 크기를 비교해보면 38선이 그어졌던 때보다는 약간이지만 더 넓어졌다. 그리고 38선보다 휴전선 길이가 훨씬 짧기 때문에 철책의 범위도 줄어들었다.

다만 개성은 그냥 도시가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광역시에 해당되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도시규모상으로는 이 전쟁으로 인하여 남한쪽이 손해를 봤다. 개성은 고려시대 시절 한민족의 수도였던 곳이며, 대전광역시보다도 더 큰 도시였다.

4.2.3. 대외적 차원

  • 외국과의 혈맹

이 전투에서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지원병을 파병보냈는데 미국 이외에도 영국, 터키, 프랑스, 에티오피아 등 여러 나라들이 정말 열심히 싸워줬다.

특히 터키타흐신 야즈즈 소장이 이끄는 1개 사단 + 1개 여단의 부대를 파병하여 미국과 영국 이외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으며 전사자도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았다. 참고로 타흐신 야즈즈 소장은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제대했으며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쿠데타 때문에 쫓겨났다. 그리고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1971년 작고.

프랑스의 경우는 몽클라르 장군이 자신의 계급까지 스스로 강등시켜가면서 기어이 이 전투의 참전을 고집했으며 그 휘하 부하들도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총검돌격을 불사하면서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한반도를 방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티오피아의 경우 셀라시에 황제가 자신의 친위대를 보내면서까지 대한민국을 지원했다.

그 외에도 뉴질랜드마오리족이나 여러 나라 또는 부족 사람들이 남한을 돕겠다고 서로 발벗고 나섰다. 전쟁범죄로 인하여 군대를 사용할 수 없는 서독이나 이탈리아, 일본은 기뢰제거 중 자위대원이 순직하거나 의료 또는 물자를 지원해서라도 대한민국을 도와줬다.

이러한 세계 각국의 도움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에게는 수많은 우방국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 한미 동맹과 코리아 모델

특히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이 전쟁 이후, 단순한 혈맹국 이상으로 엄청나게 가까워졌다.

미국애치슨 라인을 지정했을 당시 하마터면 거의 버릴 뻔했던 한반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어 막대한 투자를 들여 쭉 보조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한반도를 그저 전후 일본의 처리 과정에서 떠맡은 부산물을 잠시 관리하는 정도로 인식했지만, 전쟁을 통해 자국민이 투입되어 를 흘린데다 냉전의 최전선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면서 양국은 진정한 혈맹(血盟)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방에 위협이 닥치면 미국이 즉각적으로 '당연히' 도와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근거도 이것 때문이다. 이런 양국간의 믿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문서화되어 있다.

이 전쟁으로 미국은 36,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상당히 많은 전비를 써야 했지만 그래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 수호나 경찰국가라는 명분하에 치렀던 많은 전쟁 중 자신들이 옳았다고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아니 아예 유일하다. 유일하지만 동시에 가장 명확하다 못해 확고한 명분으로 평생을 자리매김할수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비슷한 경제부흥을 이룬 독일, 일본은 경우가 다르다. 더구나 이 두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당사국인 전범국가였다. 여기에 독일은 피해국들이던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등이 아예 독일을 재기불능하게 만들려고까지 했다. 일본 역시 주변국인 중국이나 한국이 두 나라 각자의 사정과 위치 때문에 참여를 못한 것 뿐이지 기회가 주어졌다면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나라 모두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한 미국의 우려 때문에 강제적으로 일으켜진 국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거기다가 한국은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그럭저럭 잘 실현한 거의 유일한 국가다. 냉전 붕괴와 함께 많이 퇴색되긴 했으나 자유화와 1970~80년대의 급속한 경제발전의 선진화, 그리고 1987년 6.29 선언으로 대통령 투표권이 국민에게 돌아옴으로서 달성한 민주화까지 차근차근 달성시켜 나갔기 때문에 명분적으로 한국은 더더욱 미국에게 있어 중요한 국가가 되었다. 민주화의 경우 의미가 깊은데, 현재 대한민국아시아에서 일본과 함께 둘 뿐인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된 상태이다. 물론, 그 이전의 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부르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독재 정치에 군사 정변, 부정 선거 등이 있었기 때문.

이미 미국은 8.18 도끼만행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사건과 1993년 1차 북핵 위기 같은 남북간 전쟁 위협이 고조될 때마다 한국과 협력을 강화, 안전보장을 약속하고 실제 군사적 행동으로도 보여주면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냉전 말기인 1980년대 후반 세계 정세가 다원적인 구조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미국도 한국의 중요도를 낮추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인 것이고 한국의 대미 무역에 대한 각종 규제도 이 때 많이 나왔다. 특히 김일성 사망 직후 이런 시도가 많았으며, 이 당시에는 김일성이 없는 북한이 몇 년 못 가고 붕괴된다는 전문가들의 시각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이후 북한 체제가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을 중심으로 다시 공고화되고, 중국이 급격히 성장하여 제2의 미국이 될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러시아도 최소한 강대국의 지위는 유지하는 게 확실시됨에 따라 동아시아 주변 정세가 미국에게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름에 따라, 2000년대 들어 이런 시도는 거의 없어졌고, 오히려 중국을 새로운 과제로 잡고 부족한 군사력을 동아시아에 집중해 나가는 추세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이 통일된다 해도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하다. 아니, 오히려 통일 한국이 가지게 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국이 더 공을 들일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 물론 이건 중국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므로 중국은 세계 각국의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북한을 유지시켜 미국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돼먹지 못한 집안이 노상 말썽만 피워대니...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제7함대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제7함대는 육군지원용의 호위항공모함이나 가진 최약체 함대였는데 동아시아, 태평양의 전략적 가치가 폭등하면서 지금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함대가 되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의 결정적 사례. 더구나 제7함대가 작전을 담당하는 구역은 그야말로 지역구급 괴수들이 우글거리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와 군사 지역강국들이다! 여기에 동아시아 3국은 세계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경제대국들이다. 다른 미 해군 함대들이 맡고 있는 작전지역과는 급이 다른 셈이다.

다른 걸 다 떠나더라도 냉전 종식 이후 세계 각지에서 민주화 운동이 불 때마다 미국이 사회적으로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에 경제도 성장하고 대체적으로 미국에 우호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해당 국가의 제2의 한국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잊혀진 전쟁등 미국 내 일반인들의 인식이 안습하든 말든, 미국 사회 지도층들에게는 다른 전쟁들 못지 않게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우뚝 선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괜히 외국인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방문해 놀라면서 "역시 청춘을 바쳐가며 지켜낸 보람이 있는 나라다."라며 자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2010~2011년 아랍 민주화 운동에서 미국 정계에서는 아랍 국가들이 한국 모델을 따르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물론 아랍권의 경우는 한국 모델을 따르기 전에 일단 세속화부터 해야 한다. 그나마 세속화된 터키조차 결국 종교적 이유로 이런저런 한계가 많다는걸 생각해보면...

5. 전쟁에 대한 인식

5.1. 명칭에 관하여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부르는 'Korean War'의 번역된 명칭인 한국 전쟁. 위키백과에서는 이 명칭을 쓰고 있다. 한국 전쟁이란 명칭이 외국에서도 쓰는 말이니 한국에서도 그렇게 하자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반대편에서는 외국에서 쓴다고 해서 자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외국식대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한다.6.25전쟁은 한국 전쟁 발발일을 강조하여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남침이다,북침으로 아는 사람이 종종 있기에 말하는것이다.

한편 6.25 사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변'은 선전포고 없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육이오 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올라와 있다. 옛날에는 남북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단어 자체가 1860년대 미국의 내전을 지칭하는 단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서인지 요즘은 잘 안 쓰이는 추세.

북녘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지만 물론 현실은 조국적화전쟁이자 조국훼방전쟁 국내에서는 당연히 이 표현이 통용되지 않는다. 혹시 이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이 보인다면 일단 회사에 연락을 취하자. 득템할지도 모른다. 이 명칭이 북침설을 반박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는데, 북한이 먼저 공격받았다면 "조국방어전쟁" 혹은 "조국수호전쟁"이라 불렀을테지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한국의 극우단체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서는 아예 북한의 정통성이 없음을 보다 강조하는 표현으로 김일성의 난이라는 표현을 쓴다 카더라. 1950년이 경인(庚寅)년임에 착안하여 경인년에 공산당이 일으킨 난이라는 뜻으로 경인공란(庚寅共亂) 이라고 하기도 한다 카더라. . 적절하다.

중국측에서는 중립적으로는 조선전쟁(朝鲜战争)이라고 부르나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라는 뜻. 이런 6.25 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한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문제가 되자 중국에서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하여 중공군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조선전쟁', 중공군이 개입하기 시작한 1950년 10월 말부터 종전까지를 '항미원조전쟁'으로 구별해서 불러야 한다는 학설이 주장되기 시작했다. 즉 6.25 전쟁의 개전 당시인 조선전쟁은 남북한 간의 내전에 불과하나, 미군을 주축으로 한 UN군의 진격으로 한만 국경에까지 도달하는 등 중국이 위협받기 시작하자 중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참전한 전쟁인 항미원조전쟁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항미원조전쟁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면 당시 중공군은 침략군이 되어버리며, 그렇다고 계속해서 밀고 나가자니 한국과의 외교 마찰이 발생하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금은 억지스러운 개념. 하지만 중국을 중심으로 보자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는 하다. 물론 대한민국 사람에게는 말도 안 되는 개념이란 건 똑같지만.

일본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이라고 부르는데, 딱히 비하 명칭은 아니다. 일본에서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르기 때문에 만들어진, 그냥 고유명사 같은 것이다. 애초에 남한을 제외한 한자문화권에서는 남북한을 어우르는 명칭이 조선(朝鮮)이다. 일본과 중국에서 '한(韓)'은 오직 남한이라는 나라에 한정되는 개념에만 사용한다.

5.1.1. 미국의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Korean War' 외에도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이라고 흔히 부르며, 한국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은 대체로 이런 제목들이 붙는다. 단어가 문학적이기 때문에 형식을 갖춘 문서의 경우가 아니면 오히려 이 쪽이 더 흔하게 보인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베트남 전쟁 사이에 끼었는데다가,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세월이 오래 흘렀기 때문이다. 잊혀진 전쟁 항목 참조.

동 제목의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도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이름을 따 'Truman's War(트루먼의 전쟁)'라고도 부른다.

5.2. 외국군의 참전과 국제적 인식

당사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에 더해, 전투병을 파병한 참전국의 숫자로 보면 미국 이외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필리핀, 태국,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구성된 UN군 16개국과 중국의 총 17개국.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한 국가는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6개국이다. 여기서 이탈리아는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십자 소속의 의료지원팀을 꾸려 파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북한측으로 파병했었다.

그 외에 물자 지원을 포함, 대한민국을 지원한 국가는 총 67개국이다.

6.25 전쟁은 한편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한 나라(대한민국)를 돕고자 지원한 것으로 기록된 전쟁[9] 이며 이에 따라 기네스북에 오른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대한민국에 병력, 물자, 전후복구를 지원한 나라는 자그마치 67개국으로, 당시 세계 국가들 중 73%에 달한다. 이 중에는 아이티, 인도네시아처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었거나 경제력이 낙후된 국가들조차 포함될 정도이다.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이전에 2차 세계대전까지 타국의 침공을 당했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은 그 때의 참상을 기억하면서 참전하였다고 한다.

이는 개전 당시 북한이 저지른 명분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 무력 침공이 전세계적으로도 천하의 개쌍놈들이나 하는 짓으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10] 관련 기사 이렇게 북한이 천하의 개쌍놈들 취급을 받은 이유는 역시 이 무렵이 2차대전이 막 끝난 무렵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2차대전의 악몽이 가시지 않은 통에 비인도적, 비신사적인 침략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세계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 여기에 당시 세계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5년이 넘은 상황에서 또 전쟁 당시의 후속처리와 후유증을 처리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인간이기를 포기한 어떤 쌍놈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자기의 야심만 체우려고 하는통에 더 골치아프게 만든 것이었다. 상술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의 세계정세는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위해 서로 몸사리던 시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설쳐댄 김일성이 악질이었던 것. 당장 수에즈 운하 사건이 일어났었을때 미국소련영국, 프랑스, 이집트, 이스라엘을 윽박질러 전쟁까지 가는 걸 막으려했던 사실을 상기하자.

이외에 소련과 일본도 비밀리에 참전하여 각각 항공 지원과 소해 임무를 담당했다. 참전한 소련 조종사들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슬라브계 백인이 아닌 몽골계 혈통의 소련인들로 선발하였고 중국어조선어 학습을 받았지만 치열한 교전 중에 낯선 외국어를 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간절하게 부탁해서 승낙을 받아 실제 작전 중에는 그냥 러시아어로 교신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도 긴급상황시 러시아어로 된 무선통신이 들리는 경우를 UN군이 밥 먹듯이 캐치하고 보고했으나,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에 해당 보고를 받은 상부 및 지도자층을 포함해서 다 모르는 척했다고 한다. 사실 소련도 공군력 딸리는 북한과 중공을 지원하긴 해야겠는데 대놓고 지원하면 자기들이 귀찮아지니까 비밀스럽게 진행했다. 한마디로 말해 양쪽이 서로 알고도 모른 척 한 셈. 아무리 위장을 한다 해도 조종사는 소련인이고 격추되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당시에도 자유 진영이 이 계획을 알게 된다. 이른바 북한 전투기를 격추시켰더니 조종사가 소련군 코쟁이.[11]

이 사실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특히 소련 모두 전쟁에 개입하면서도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해 최대한 한반도의 영토와 사람 내에서 모든것들이 다 해결되도록 꾹꾹 눌러담아 은폐했으며 더불어 이 전쟁이 한반도 외부로 퍼지지 않도록 힘을 썼다. 그래서 소련은 소련 붕괴전까지 자신들의 전쟁 개입을 부인했으며 실제로 휴전협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참전국의 숫자만 따지면 위에서도 밝혔듯이 세계 73%의 국가가 대한민국을 지원했으며 북한측에도 막대한 소련의 병기와 중국의 전투병이 지원되었으므로, 6.25전쟁은 거의 세계대전에 준하는 규모의 대규모 전쟁이었던 것이다. UN군의 절대 다수(90% 정도)가 미군이었으나 67개국의 지원국 가운데에는 꼭 병력 지원만 한 나라만 있었던 게 아니라 물자와 의료진, 기술자를 지원한 나라도 역시 매우 많았기 때문에 단순히 병력만으로 지원국을 규정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일부 국가의 경우, 이들 나라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을 지원했다던가, 2차대전 직후 미국 눈치를 안 볼 국가가 없다면서 이들 국가가 유엔군으로 참전한 이유를 단순히 미국 눈치를 보고 미국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하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넌센스다. 유럽 참전 국가들은 나토 창설 멤버이기 때문에 참전했다고 치더라도 태국, 에티오피아,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터키, 남아공은 미국의 뜻과는 별개로 참전한 것이다. 또 15개국 군대가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한 게 아니라 미군에 배속되어 전투를 했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넌센스다. 미군을 포함한 모든 병력은 유엔군 소속이었고 그 수장이 미군 출신인 더글러스 맥아더였을 뿐이다. 다국적 연합군에서 지휘관이 한국군 출신이라고 다국적군이 한국군은 아니듯이 말이다.

사실 UN군의 지휘권이 미군 장성에게 돌아간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군이 1950년 7월 초 북한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동안 유엔의 '한국 군사원조 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 해, 공군이 참전했고, 이어 영국의 해군과 호주의 해, 공군, 뉴질랜드 해군도 전선에 투입됐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유엔 회원국이 참전을 준비하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지휘 통제 문제가 대두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은 7월 3일 6.25전쟁의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미국이 유엔군을 지휘하도록 제의했다. 결국 대한민국 방위를 위한 회원국들의 군사행동에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 미국이 작성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의결함으로써 유엔군을 지휘하는 통합군사령부가 발족하게 됐다.

이 결의안의 주요 골자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신해 한국에서 침략자 북한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의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유엔 회원국들이 파견한 군대를 미국의 통일된 지휘하에 둔다'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임명하고, 그에게 "미국의 작전 임무는 국제 정치상 어디까지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원하에 이루어진다"는 지침을 전달했다. 유엔 회원국 중 대부분의 국가가 지지하는 가운데 결성된 유엔군은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으며, 파견 병력 규모와 지원능력 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이외의 국가의 참전은 주로 미국의 국무부와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의 협의하에 이루어졌다. (출처: <6.25전쟁 프랑스군 참전사> - 국가보훈처 편저, 2004년)

이와 같이 UN군의 혼란스러운 지휘체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UN 안보리와 회원국들이 미군 장성에게 UN군 지휘권을 양도한 것일 뿐, UN군이 단순히 미군의 시다바리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전쟁을 보는 시각에는,

  •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진영을 각각 남북이 대리자의 역할로 전쟁했다는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
  • 남북의 국내전으로 보는 시각. 단, 이 시각의 경우 남쪽이든 북쪽이든 각각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왔다. 당장 북한이 초기공세 때 쓴 T-34 전차를 과연 어디서 구했을까? 미국과 중국은 자신들의 '정규군'을 보냈었던 만큼, 서로 UN군이니 의용군이니 하는 그럴싸한 대외적 명분을 내거는 수를 쓰긴 했지만 이렇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 마지막으로 대리전이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자체가 맞부딪힌 세계전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당장 1951년 UN군이 북쪽으로 북상할 때쯤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마찰이 생겼는데, 맥아더가 중국(정확히는 만주 지역)에 핵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트루먼은 전쟁의 확대를 우려해서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시킨 바 있다. 이러한 전쟁의 성격으로 인해 한국전쟁은 냉전 시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대리전의 시초로 평가된다.

    일단 전쟁의 당사자는 성격이야 어쨌건 남한과 북한일 뿐이고, 중국은 엄연히 제3자이다. 그래서 중공군이 이 전쟁에 개입한 것을 '불법개입'이라고 한다. 그런 중국에 무력 개입을 넣는 순간 당연히 중국이 가만히 있을리 만무하고 중국쯤 되는 큰 국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른 공산국가들도 체면상 안 나설수가 없게 되며 당연히 세계적인 규모의 트러블이 된다.

5.3. 유엔과 국제 세계의 시각 및 활동

6.25전쟁은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유엔군이 전쟁의 한 쪽 당사자로 참전한 전쟁이다.

유엔이 성립한 후 개입한 전쟁이나 국제분쟁에서 유엔은 거의 예외 없이 평화유지군, 즉 양측의 성격이 어쨌건 간에 서로를 중재시키고 양측을 대신해 치안을 수호하는 '중재자' 역으로 참여한 반면, 6.25 전쟁에서만큼은 유엔군이 UN 깃발을 달고 북한 및 중공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것은 본 전쟁이 최초이자 거의 마지막이며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유엔군이 한 쪽 일방을 위해서만 유엔 명의로 참전한 적은 없다.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걸프 전쟁'이나 '리비아 내전'처럼 '안전보장이사회 승인'을 얻은 전쟁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한 각 나라 군대들은 각자의 명의로 참전하였다.

물론 어느 한 쪽이 평화유지군을 먼저 공격한다면 그에 대한 방어전이야 수행하지만 본 전쟁처럼 유엔군이 선공을 당한것이 아님에도 한쪽만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전한것은 분명 의의가 있다. 그래도 시리아 내전을 계기로 자국민에게 잔혹한 정권을 국제 사회의 힘으로 응징하기 위해 다시 결성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본 전쟁과 내전은 그 성격이 서로 극명히 다른 데다 무엇보다 양쪽이 다 악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오랜 기간 유엔군이 한쪽을 위해 싸워줄 일은 없어 보인다.

5.4. 북침이냐 남침이냐

2013년 6월에 뜬금없이 고교생들의 6.25 전쟁 인식이 논란이 되었다. 서울신문이 한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서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교생의 69%가 6.25 전쟁을 북침이라고 생각한다고 응답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이 기사는 보수성향의 국민들에게 심한 충공깽을 일으켰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까지도 이 기사를 인용하면서 역사왜곡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발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실제 이 기사와 여론조사 설문을 분석해보니 오해하기 쉽게 만든 설문이었다고 한다. 애당초 이 기사의 의도 자체는 고교생의 6.25 전쟁 인식문제를 다룬게 아니라 한국사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고교생 69%가 북침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에 보수성향의 국민들과 박 대통령은 이 대목에만 폭발했다는 것. 게다가 설문의 내용도 문제였는데 "한국전쟁을 남침이라 생각하는가 북침이라 생각하는가"라고 단순하게 물어본 것이 화근이라는 지적이 많다.

실제 한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북침의 뜻을 한이 한 것으로 아는 학생들이 많았다는 것. 간단히 말해 역사인식 문제가 아니라 국어능력 부족이다.

2004년 보훈처의 여론조사에서도 학생들의 겨우 0.7% ~~한해 수능보는 학생이 60만명에 12개의 학년이다. 0.7% 약 5천명만이 남한이 북침했다로 응답했고 거의 대다수는 북한의 남침이라고 올바로 파악하고 있었으며, 전교조에서 보훈처가 진행한 여론조사와 같은 질문으로 서울지역 중고생 1499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89.4%가 6.25 전쟁은 북한이 일으킨거라고(남침) 응답했다. 이러한 점에서 실소를 금할수 없는 사건.

사실 '북침'은 '북쪽으로 침범함'의 뜻이다. 한자어가 줄임말로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동진(東進)'은 말 그대로 '동(東)'으로 '진(進)'한다는 뜻이다.

'동(東)', '서(西)', '남(南)', '북(北)' 등의 한자는 추상적인 방위를 나타내며, 이에 방향성 있는 동사와 결합할 경우 부사로서, 그 동사가 말하는 동작의 방향을 나타낸다. '동진(東進)', '서천(西遷)', '남하(南下)', '북상(北上)' 등의 한자어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풍(風)은?

문제는 특히 '북(北)'이라는 한자가 남북한이 갈라진 이후 북한을 뜻하는 고유명사로서도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이 고유명사 '북'을 포함하는 다른 한자어들이 무수히 만들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방북(訪北)' '종북(從北)' 등이다.

'북한 침범하다'의 뜻으로 생각하려는 경우에는 어순 문제도 있다. 만일 '북'과 '남'이 목적어였다면 '북침'과 '남침'이 아니고, 앞서의 '방북' 등과 같이 앞뒤가 바뀌어 '침북'과 '침남'이 되어야 한다. 이를 두고 주로 한문에서 서술어 + 목적어 순으로 결합해 있다는 뜻인 술목(述目)관계 또는 주로 중국어 문법에서 동사 + 빈어 순으로 결합해 있다는 뜻의 동빈(動賓)구조라 한다. 중국어는 대표적인 고립어이며, 고립어에서는 어순이 중요한데, 이 지식은 이처럼 국어의 한자어 형태론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예를 들어 '금딸(禁-)'이라 하고 '딸금'이라 하지 않는 것도 (동사 '금(禁)'에 관한) 이러한 한자어 형태론에 관한 지식이 언중의 의식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납치를 당하다'도 '납피'라 안 하고 '피랍(被拉)'이라 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왜침(倭侵), 적침(敵侵)이라는 표현이 버젓히 사용되는 상황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그렇게 쓰이는게 잘못된 표현이다. 특히 왜침은 당장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그런 거 없다. 반면 북침과 남침은 버젓히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다. 한편 적침의 경우 "적의 침입"이라는 의미로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한자어의 구조에 맞아서 그렇다기 보다는 줄임말이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너그럽게 해석해 주면 북침도 똑같이 줄임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현대 한어(漢語)에서도 환경보호(環境保護)를 환보(環保)라고 줄여표현한다. 명백히 어순이 뒤바뀐 셈

이와 같이 북침, 남침은 그간 단어의 문법적 구조가 명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런 저런 이유로 헷갈리는 사람이 많은 상황이다. 결국 국방부는 이 소식을 들은 후에 한자어에 미숙한 학생들이 헷갈리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교육용 용어를 '남침' 에서 북한의 남침 으로 좀 더 명확하게 들리도록 수정했다.

개그 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 방영분에서는 선생님의 입을 빌어 "야, 내 손가락이 너를 똥침을 했어, 그게 손침이여~ 똥침이여?"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물론 그 침은 바늘이라는 의미의 針이지 침략하다는 의미의 侵이 아니라는 것은 함정. 한자교육이 매우 시급합니다 반대로 북풍은 북쪽에서 부는 바람이고 상대의 몹에 맞든 발에 맞든 손으로 쏘면 장풍이다. 그냥 생각하지 말고 외워라. 우리말은 이런게 매우 흔하다.

5.5. 중국과 6.25 전쟁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당시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혹시라도 마오안잉에게 위해가 끼칠까봐 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역관으로 근무하도록 했는데 사령부가 네이팜탄 폭격을 맞아 전사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이 전사하자 며느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중국으로 운구하지 않고 전사한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마오안잉의 영구는 아직까지 북한에 묻혀 있다. 이 묘는 중국과 북한의 혈맹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6. 관련 기록

6.1. 6.25 전쟁 참전국 및 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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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도와준 국가들이다. 잊지말고 감사히 여기자.

2012년 5월 당시 6.25 전쟁 참전국 명단이 새로이 공개되었는데 정확히는 63개국으로 밝혀졌으며 기존 참전국과 의료지원국을 제외하고 물자지원 및 물자지원 의사 및 표명 등을 밝혔던 국가가 추가로 공개되었다.

6.1.1. 전투 및 병력 파병국

파병 국가 파병 인원 전사자 실종자 부상자 포로
미국 480,000명 36,516명[12] 8,716명 92,134명 7,245명
프랑스 3,763명 287명 7명 1,350명 12명
영국 63,000명 1,109명 1,060명[13] 2,674명 -
캐나다 26,791명 516명 - 1,042명 -
콜롬비아 1080명 163명 2명 448명 28명
그리스 5,540명[14] 192명 - 543명 3명
에티오피아 6,000명 122명 - 536명 -
남아프리카공화국 826명 20명 8명
네덜란드 5,322명 124명 - 463명
뉴질랜드 1,389명 33명 -
오스트레일리아 17,000여명[15] 339명 - 1,200여명 -
룩셈부르크 78명 2명
벨기에 3171명 - 5명 478명 -
터키 15,000여명 721명 168명 2,111명 216명
태국 1,294명[16] 129명 5명 1,139명 -
필리핀 1,273명 112명 - 229명 -

터키타흐신 야즈즈 소장의 지휘하에 미국과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에도 터키는 한국에게서 혈맹국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프랑스군 중에서 랄프 몽클라르 중장은 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참전했다. 하지만 미군으로부터 그대로 중장 대우를 받았다.

네덜란드는 과거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 수리남(1975년 독립) 등 속령지역 용사들도 동원하여 참전했다. 룩셈부르크벨기에는 벨기에 - 룩셈부르크 연합으로 파병되었다.

뉴질랜드마오리족까지 탈탈 털어서 참전했다.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 및 스페인어 사용 국가 중 유일하게 지상군을 파병하였다.

에티오피아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가 특별히 자신의 친위대를 내줘서 파병했다. 단 그 당시 에티오피아에 제대로 된 상비군이 친위대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의 잊혀져버린 6.25 참전국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국내 매체들도 에티오피아만을 아프리카 유일의 6.25 전쟁 참전국으로 기억한다. 남아공이 에티오피아와 달리 6.25 참전국에서 빨리 잊혀진 것은 1950년대 당시 영연방 국가였고, 다른 아프리카의 국가들과 다르게 소수의 네덜란드, 영국계 백인 이주민들이 국민 대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배제, 억압하며 20세기 말까지 백인 통치를 자행하는 등 사실상 백인 국가 마냥 취급받던 나라였던 점이 크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나라와 대다수의 국가들이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남아공과의 관계를 아예 없었던 일로 해버려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 스페인과 함께 공식 국제 왕따가 되어버려 교류가 끊겨버린 탓도 있고.. 또한 전쟁 당시 군대 파병수도 적었고 공군 병력만 파견한 것도 주요 이유다.

6.1.2. 의료 파견 지원국

  • 노르웨이
  • 덴마크
  • 스웨덴
  • 이탈리아 - 당시 UN 소속이 아니었음에도 지원했다! 다만 이는 전범국이어서 UN에 가입하지 못한 이탈리아의 이미지를 돌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 인도 - 공산측에도 의료 지원을 파견했다.

6.1.3. 물자 지원국

6.1.4. 물자지원 의사 표명 국가

6.1.4.1. 그 외 지원의사 표명 국가

  • 스페인 - 당시 UN 소속 국가는 아니었지만, 집권자이던 프랑코가 스페인 의용병을 한국에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실질적인 파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물론 이건 파시즘 국가로 단단히 낙인찍혀 국제적으로 왕따 신세였던 스페인의 외교적 상황을 타개해보려는 의도였다.

6.1.5. 공산측 참전국 및 지원국

북한 내에서는 6.25전쟁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북한을 도와준 것을 은폐해 버리는 한편 UN군의 참전으로 북한군이 크게 박살난 상태에서 다른 공산국가가 북한 대신 주체가 되어 수행한 모든 전투를 김일성의 업적으로 날조하고 있다.

6.2. 주요 전투

6.6. 관련 인물

6.7. 사용 장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서 당대 강대국들이 직간접적으로 얽혀서 벌어진 분쟁인 탓인지, 세계대전 당시에 쓰고 남겨진 잉여장비들과 세계대전 직후에 신기술로 개발된 병기들이 혼재된 양상을 보인다.

6.7.1. 지상장비

6.7.1.1. 국군 및 UN

6.7.1.2. 공산군

6.7.2. 해상장비

6.7.2.1. 국군 및 UN

  • 미국
    • 아이오와급 전함 4척 - USS 아이오와 (BB-61), USS 뉴 저지 (BB-62), USS 미주리 (BB-63), USS 위스콘신 (BB-64)
    • 에식스급 항공모함 11척 - USS 에식스 (CV-9), USS 복서 (CV-21), USS 본 홈 리처드 (CV-31), USS 레이테 (CV-32), USS 키어사지 (CV-33), USS 오리스카니 (CV-34), USS 앤티텀 (CV-36), USS 프린스턴 (CV-37), USS 레이크 챔플레인 (CV-39), USS 밸리 포지 (CV-45), USS 필리핀 시 (CV-47)
    • 카사블랑카급 호위항모 2척 - USS 코레히도르 (CVE-58), USS 싯코 베이 (CVE-86)
    • 커멘스먼트 베이급 호위항모 3척 - USS 렌도버 (CVE-114), USS 시실리 (CVE-118), USS 포인트 크루즈 (CVE-119)
    • 인디펜던스급 경항모 1척 - USS 바탄 (CVL-29)
    •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 오리건 시티급 중순양함
    • 쥬노급 경순양함
    •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 워체스터급 경순양함
    • 기어링급 구축함
    •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 플레처급 구축함
    • 글리브스급 구축함
    • 버클리급 호위구축함
    •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
    • 타코마급 프리깃
    • 텐치급 잠수함
    • 발라오급 잠수함
    • 바렛급 수송함
    • 크로슬리급 고속수송함
    • 안드로메다급 공격수송함
    • 하스켈급 공격수송함
    • 카사 그란데급 도크상륙함
    • LSM(R)-401급 중형상륙함
    • LSM(R)-501급 중형상륙함
    • LST-491급 전차상륙함
    • LST-542급 전차상륙함
    • LCI(L)-351급 보병상륙정
    • 마운트 매킨리급 상륙지휘함
    • YMS-1급 소해정 (YMS-135아급)
    • YMS-1급 소해정 (YMS-446아급)
    • 오크급 소해정
    • 애드미러블급 소해정
    • 볼스터급 구난함
    • 소토요모급 예인함
    • 마리코파급 예인함
    • YO-65급 연료운반정

  • 영국
    • 유니콘급 경항모 1척 - HMS 유니콘 (I72)
    • 콜로서스급 경항모 5척 - HMS 트라이엄프 (R16), HMS 워리어 (R31), HMS 글로리 (R62), HMS 테세우스 (R64), HMS 오션 (R68)
    • 타운급 경순양함
    • 크라운 콜로니급 경순양함
    • 셀리온급 경순양함
    • C급 구축함
    • 베이급 대공프리깃
    • 블랙 스완급 슬루프
    • 헤클라급 보급함
    • 그 외 병원선(Maine 호), HQ함(Ladybird 호) 등 지원함정

  • 캐나다
    • C급 구축함
    • V급 구축함
    • 트라이벌급 구축함

  • 오스트레일리아
    • 마제스틱급 경항모 1척 - HMAS 시드니 (R17)
    • 배틀급 구축함
    • 트라이벌급 구축함
    • 리버급 프리깃
    • 베이급 대공프리깃

  • 뉴질랜드
    • 로크급 프리깃

  • 네덜란드
    • S급 구축함
    • N급 구축함
    • 리버급 프리깃
    • 수송함 (Zuiderkruis 호)

  • 프랑스
    • 부건빌급 아비소[18] - 함명 FMS La Grandiere (F731)

  • 태국
    • 플라워급 콜벳
    • 타코마급 프리깃 - 1951년 10월 29일 미 해군으로부터 인수
    • 씨창급 수송함

  • 콜롬비아
    • 타코마급 프리깃 - 2차대전 종전후 미 해군으로부터 구입

  • 대한민국
    • Type-3(충무공)급 경비정 - 구일본군이 건조하다가 도중에 버리고 간 것을 개수
      • ROKS 충무공 (PG-313) - 대한민국 해군이 최초로 자력 건조한 함정
    • PC-461(백두산)급 초계정(구잠함)
    • PCS-1376(수성)급 구잠정 - 전쟁기간 중 미 해군에게서 인수
    • 엘코 80'(갈매기)급 어뢰정 - 전쟁기간 중 미 해군에게서 인수
    • 타코마(두만)급 프리깃 - 전쟁기간 중 미 해군에게서 인수
    • LST-542(천안)급 전차상륙함
    • LCI(L)-351(서울)급 보병상륙정
    • LSSL-1(영흥만)급 상륙지원함 - 전쟁기간 중 미 해군에게서 인수
    • JMS Type-1(대전)급 소해정 - 구일본군 유기 함정
    • YMS-1(강진)급 소해정
    • 카마노(부산)급 경량수송함
    • 소토요모(인왕)급 예인함 - 전쟁기간 중 미 해군에게서 인수
    • YO-65(구룡)급 연료운반정
    • 천지급 보급함 - 노르웨이 건조 선박 Hassel 호를 1953년 6월 30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인수하고 보급함으로 개수 자료출처
    • GB(흑조환)급 항만정
    • 기타 보조용 소형정 - 폭뢰 21호를 비롯한 소형 보조경비정 및 항만보조선 포함

그 외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소해부대가 원산만 일대의 소해작업에 참가했으나 정황상 '해군'의 지원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으므로 여기서 따로 분류는 하지 않는다. 일본의 소해정은 대부분 구일본군의 JMS형 목조 소해정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덴마크에서도 병원선 Jutlandia 호를 의료 지원 목적으로 파견하였다.

6.7.2.2. 공산군

  • 북한
    • OD-200급 초계정 (소련 원조)
    • G-5급 어뢰정 (소련 원조)
    • P-4급 어뢰정 (소련 원조)
    • 250-280톤급 경비정/상륙정 - 자료마다 편제나 척수가 들쭉날쭉하고 정확한 모델명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단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전쟁사 자료에는 250-280톤급 어뢰정 14척이 4개의 어뢰정대로 편성배치되었다고 언급.
    • 800-1000톤급 수송함 - 옛 미국제 상선(남포호의 경우처럼 주로 남한에서 월북 또는 납북하여 입수한 선박)을 수송용으로 개수하고 무장을 장착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다만 원산이나 진남포 일대에서 자체건조한 무장수송선이 있다는 언급도 간혹 보이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 1780톤급 수송함
      • 남포호 - 월북화물선 킴블 스미스 호를 병력수송용으로 개조하고 해군에 편입한 것으로 당시 북한해군의 최대 무장수송함
    • JMS Type-1급 소해정 - 구일본군 유기 함정, 전쟁전 납북
    • YMS-1급 소해정 - 전쟁전 월북 및 납북
    • 기타 보조용 소형정 - 어업용 발동선 및 목선을 개수한 것이며 대부분 35-45톤급 선박으로 구성
    • 기뢰 매설용 바지선 - 목조 바지선에 목제나 철제 선로를 설치하고 기뢰 매설작업에 활용

6.7.3. 항공병기

6.7.3.1. 국군 및 UN

6.7.3.2. 공산군

7. 다룬 책

7.1. 역사학계에서

현재까지는 다음 학자들이 역사학계에서 최고의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한국전쟁의 기원 1은 한국전쟁 발발전까지 남한의 내부상황을 다뤘는데 최고의 실증연구를 보여줬고 실제 많은 한국역사가들이 넘사벽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한국전쟁과 그 이후를 다룬 2권은 추측과 근거없는 음모론으로 가득해서 가루처럼 까였다. 1권은 현재까지 가치가 높은 학술서라 평가받는다. 그러나 2권은 영 좋지 못하다.

당시 기준에선 최고의 실증업적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술적인 연구를 할 때 꼭 봐야하는 책이다.

대한민국, 북한, 미국, 소련의 문서들을 전부 본격으로 교차검증한 최초의 학술도서다. 실제 정병준 교수는 미군 문서와 북한군 노획 문서를 미국까지 가서 1년이 넘게 직접 확인하고 복사해서 가져왔다. 또한 당시 소련문서는 미국에서 완벽히 번역된 상태였다. 브루스 커밍스와 박명림을 능가하는 실증연구 부분에선 최고의 성과를 이뤄냈다.

7.2. 군사적

아마존에서 'Korean War'로 검색하면 5263종의 책이 검색된다. 절반 이상이 참전용사들의 수기.

퓰리쳐상을 수상한 저명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저《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The Coldest Winter)는 꼭 읽어보도록 하자. 한국전을 둘러싼 열강들의 정치싸움과 맥아더의 삽질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단, 미국인이 지은 책인 만큼 한국의 시각과 한국군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시피 하니 이 점은 참고하도록 하자.

군 복무 중인 밀덕이라면 한국군이 편찬한 <한국전사>#를 열람해볼 수도 있다.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21세기 들어서 아주 크고 아름다운 파란색 표지 버전이 새로 출간되고 있으며, 2010년 1월 기준 6권까지 나와 있다. 이 <한국전사>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웹으로도 공개돼 있는데 PDF로 다 공개돼 있으니 관심 있으신 위키러들은 언제든지 참고 가능. 세금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다. 물론 책으로 소장하려면 구입도 가능하다.

그 이전인 1970~1980년대 출간된 서적들은 대체로 한문의 압박이 좀 크다. 특히 전투사는 아직 재간이 되고 있지 않다. 한문이 후달리는 밀덕에겐 약간 아쉬운 부분. 하긴 영어, 한문은 기본에 일본어/러시아어/독일어 해독능력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코어 밀덕에게는 문제가 아닐지도.

7.3. 다큐멘터리

밀덕질/역덕질은 아니고 개론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꼼꼼히 설명된 자료를 찾는다면, KBS에서 제작, 방영한 10부작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추천할 만하다. 원작은 1990년 4부작으로 제작, 방영하였고 상까지 받았던 작품. 이후 2005년에 10부작으로 리메이크되는데 이 때 구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영상자료와 중국측의 협조를 받은 자료 등을 대폭 보강하였다. 이 다큐에는 전쟁의 배경, 당시 한반도와 관련된 국제적 역학, 관련 인물들의 증언 등이 잘 소개되어 있다.

특히 1990년판 당시 생존해 있던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을 많이 실어놓았는데 DVD에서 갑자기 화면비가 4:3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다면 90년판 내용을 활용한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으로는 비참한 전쟁의 충격에 대한 당시 '휘말린' 사람들(참전 당시 끔찍한 기억을 증언하는 군인이나 학살이 일어난 지역의 주민 등)에 대한 인터뷰도 많이 담겨 있다. 다만 DVD 판매 때문에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 보기는 할 수 없으며, DVD로 구입해야 하는데 선례들이 그렇듯이 좀 비싼 편.

한편 국내에 소개된 국외 제작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로는 19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된 영국 BBC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4부작)'과 1994년 SBS에서 방영된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의 실상(2부작)'이 있다.

'한국전쟁의 실상(2부작)'은 SBS에서 먼저 방영되고 다음날 KBS에서 방영되었다. 당초 방송 3사가 공동 구매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SBS 측이 이를 깨고 프리미엄을 얹어서 독점 방영권을 따냈고, 이에 KBS 측이 시청자의 보편적 접근권을 내세워 항의하자, SBS는 해당 프로그램을 KBS에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고, KBS는 정규 편성을 변경하여 긴급 편성 방영했다. 당시 SBS 가시청권은 서울 및 수도권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BBC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은 고품격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한 BBC의 명성에 비해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당시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의 실상'은 한국전쟁 당시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의 동향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기밀 해제된 구 소련 문서를 통해 당시 소련이 한국전쟁에 비공식적으로 참전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8. 관련 작품

8.1. 문학

8.2. 영화

한국 영화가 아닌 것은 괄호 안에 제작국가를 명시하였다.

8.3. 드라마

8.4. 뮤지컬

8.6. PC게임

  • Steel Panthers: World At War - 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를 다룬 Chosin Few라는 캠페인과, 몽클라르 장군이 중공군의 Human Wave(실제 유닛명)을 맞아 고지를 방어하는 시나리오가 있다.

  • Theatre Of War 3: Korea

8.7.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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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작전통제권이 1950년 7월 14일 미군에 이양됨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과 함께 유엔군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여하였기에 대한민국이나 미국은 별도로 표기하지 않고 단순하게 유엔으로만 표기한다.
  • [2] 다만 북한은 8월 종파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남한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었다.
  • [3] 추가로 가뜩이나 국내 정치,경제 상황은 개국 초기라 개판인 상황이었다. 세금만으로 국가 운영조차 힘들어 대부분이 지원으로 연명하는 나라였다.
  • [4] 물론 이렇게 형편없는 대전차무기지원 사실을 안 맥아더는 미 국방부에 "한국군이 대포쏘는법 몰라서 이렇게 밀린건줄 아냐"며 당장 90mm와 125mm 포 공수를 요청했지만 미 국방부는 쿨하게 씹었다.
  • [5] T-34을 봐도 알겠지만 당시 T-34는 독일군을 경악시킬정도로 뛰어난 전차다.
  • [6] 선전포고문이 제일 정형화 되어있고, 선전포고를 미국법상 합법적으로 하기 위한 조건은 상원-하원 동시 결의, 즉 Joint Resolution이다. 당연하지만 전쟁 승인을 받는데 시간이 정말 더럽게 오래걸린다. (...) 거기다가 전쟁을 위해 대통령에게 어떤 권한을 주느냐도 결정해야하고, 대통령이 받은 권한을 선전포고문에 작성한다. 미국이란 나라가 서류를 정말 중요하게 취급하는 전통이 뿌리박혀있기 때문에 미국의 역대 선전포고문들은 연설(...)등으로 왕정국가답게 포고하는 영국과 비교해보면 정말 까다롭기 짝이 없다. 이것은 현재 미국이 제대로 선전포고문을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진짜 천인공노할 사태로 인해 미국 시민권자가 모조리 전쟁을 외치는 상황이라면야 금방 결의되갰지만, 그것도 하루는 걸린다.
  • [7] 대전 형무소 (대전 산내) 학살은 인민군이 들이닥치기 이전 국군에 의해 3차례씩이나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또 대전형무소(대전 산내) 같은 장소에서 학살을 자행한것.
  • [8] 전쟁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찍어 눌러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전장터일지라도 나중에 자신이 먹고 살아야 하는 땅이니만큼 전후 복구도 굉장히 중요한데, 시설은 파괴되어도 다시 찍어내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함부로 다시 찍어낼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아주 미친 작자가 운영하는 군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군세들은 시설만 파괴하고 인명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려고 노력하지 그 반대로 시설만 남기고 인명피해만 남기려고 하진 않는다.
  • [9] 또한 가장 오랫동안 평화협정 없이 휴전이 지속된 전쟁으로도 기록되어있다. 굳이 따질려면 평화협정을 맺은 바가 없는 포에니 전쟁(...)이 있갰으나, 어쨌든 이건 실질적으론 종전된 전쟁이라... 한국전쟁은 명목상(De Jure)으로든 실질적(De Facto)으로든 언제든지 휴전이 파기될 수 있는 전쟁으로,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언제 다시 이어저도 이상할 것이 없다.
  • [10] 단, 상술했듯 선전포고는 없어도 전쟁 수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뾰족한 명분 없이 북한이 침공했다는건 충분히 문제시될만하다. (일부 친북 세력들이 '사실 남한 or 미국이 먼저 건드려서 반응한 것일 뿐임!'이라고 우기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북한은 명분을 갖고 싸운거다'라는 주장을 내세워 북한이 천하의 개쌍놈이 아니라고 우기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서 그 명분으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우긴 것을 생각해보자. 러시아도 남오세티야 전쟁을 벌일때 사실 그 전부터 조지아를 조지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먼저 조지아를 치지 않고 조지아가 남오세티야를 침공할 때 까지 기다렸다가 침공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동맹을 공격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면서 바로 기다렸던대로 조지자를 조져버렸다. 명분 없는 전쟁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 [11]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중국군으로 처리되어 포로 대우를 받았으며, 송환거부포로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군은 그대로 송환되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전쟁 이후 중국을 거쳐 소련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 [12] 이중 2,830명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비전투 사망인원.
  • [13] 포로인원과 합친 수
  • [14] 8명의 여성간호장교 포함
  • [15] 지상군 5,038명 / 해군 경항모 1척, 구축함 및 프리깃 각 4척, 3,320명 / 공군 1개 전투비행대대
  • [16] 1개 사단, 1대의 C-47, 2대의 콜벳함, 2대의 프리깃함, 1대의 수송선
  • [17] 당시 헝가리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 반소 감정이 격화된 상태였다. 이후 소련, 폴란드를 위시한 바르샤바 동맹군이 진주하여 개박살을 내 놓지만...
  • [18] 프랑스 해군의 호위함 분류로 슬루프나 콜벳에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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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31 21: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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