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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

Contents

1. 유럽의 7년 전쟁
1.1. 배경
1.2. 중부 유럽 전역 (1756~1761)
1.3. 유럽 외 전장
1.4. 다시 중부 유럽 전역(1762)
1.5. 결과
1.6. 여담
1.6.1. 히틀러의 망상
1.7. 참고
2. 임진왜란의 또 다른 명칭

1. 유럽의 7년 전쟁

© Gabagool (cc-by-3.0) from


장대하게 시작해서 병맛으로 끝난 전쟁(...)

1756~1763년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등 당시 유럽의 열강국가 전부와, 기타 포르투갈이나 독일이탈리아의 크고 작은 제후국가들까지 참전했다. 아시아 쪽에서는 무굴 제국까지 끼어들었다. 게다가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가 있는 신대륙에서는 이 식민지들이 모국을 따라 서로 싸우고, 이 싸움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속칭 인디언)들을 끌어들여 부족들끼리 또 서로 싸우는 등(…)[1] 정말 각양각색의 세력들이 뛰어든 전쟁이다.

독일(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중부유럽 대부분 지역과 서지중해, 이베리아 반도, 북해 및 북프랑스 지역에 북미 대륙 대부분과 서인도 제도, 동부 및 남부 인도필리핀, 그리고 남미의 우루과이 지역 등에서 벌어져 단순히 전장의 규모로 보자면 제1차 세계대전과 비슷할 정도가 아니라 더 크다!

그래서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총력전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세계대전으로 보지는 않으며, 다만 세계대전급에 준한 전쟁이었다고 칭해서 해당 전쟁의 거대함을 설명한다.

1.1. 배경

단순하게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상실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를 되찾고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만 볼 경우 이 전쟁이 유럽 전역 및 세계 각지로 확산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대륙과 인도에서의 식민지를 두고 충돌을 계속하고 있어서, 7년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양 식민지에서는 무력충돌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예 혁명 이후 하노버 공국을 동맹국으로 삼은 영국과[2],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스페인에 부르봉 왕가를 옹립시킨 프랑스의 유럽 패권경쟁은 치열했다.

이처럼 당시 유럽에는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 영국 vs 프랑스의 양대 대립축이 격렬하게 충돌하려 하고 있었으며,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동맹의 역전을 통해 단숨에 프로이센을 3면에서 포위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마요르카 섬[3]을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1.2. 중부 유럽 전역 (1756~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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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대왕

개전 첫 해인 1756년,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제공격을 통해 먼저 오스트리아를 전열에서 이탈시킨 후,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전략으로 전력을 다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이후 군제를 개편하고 군비를 강화한 상태였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의 조기종결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러시아군이 내부사정으로 후퇴하여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그 직후 프리드리히 2세는 로스바흐,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군을 대파하며 천재적인 전술역량을 보여주었다. 이 전투는 세계 전사에서 손을 꼽는 천재적인 전투로 아직까지도 회자되며 각국의 사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1758년까지 이어진 프리드리히 2세의 대 오스트리아 공세는 보급부대의 붕괴 등으로 인하여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갔고, 같은 해 8월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전황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니, 네르스도르프 회전에서 최악의 패배를 당하며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렸다.[4] 프리드리히 2세가 독약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전투 직후이다.

이후 프로이센은 공세를 포기하고 방어전으로 일관했으며, 러시아-오스트리아-스웨덴 연합군은 콜베로크 요새 및 베를린 등을 함락하며 승리 직전까지 나아갔다. 이때까지 프로이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군을 영국-하노버 연합군이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하노버군 역시 방어전 중심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공세는 여전히 동맹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1.3. 유럽 외 전장

중부 유럽 전선과 달리, 식민지에서는 영국군이 압승하고 있었다. 북미 전역에서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루이조제프드 몽캄이라는 유능한 지휘관과 프랑스군의 선전으로 참패를 거듭하던 상황이었다. 일례로 1758년 뉴욕주의 카이용 요새(타이테론데가 요새) 전투에서 1만 6000명의 영국군이 불과 몽캄 장군이 이끄는 3600명의 프랑스군에 대패를 당한다. 그러나 영국군이 본국에서의 대대적 증원과 임스 울프라는 뛰어난 지휘관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했다. 특히 프랑스의 캐나다령의 중심부인 에 대한 공성전중 벌어진 에이브라함 들판 전투에서 제임스 울프 장군이 4,800명의 병력으로 4,4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몽캄 소장을 전사시키지만 그 자신도 역시 전투 막바지에 전사한다. 동귀어진 피해 자체는 영국이 좀 더 컸지만 영국 해군때문에 병력충원과 보급이 막힌 프랑스군은 더이상 싸울수 없었다. 울프의 죽음은 리엄 피트(대 피트)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우상화될 정도로 컸는데, 그 결과만 따져봐도 루이지애나를 제외한 북미 전역의 프랑스 세력을 소멸시켰다. 정확히 말하면, 루이지애나도 먹으려고 했는데 열병 때문에 침공을 못한 것이었다. 거꾸로 나폴레옹이 북미 전역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것도 이 모기로 인한 황열병 때문이다.

프랑스도 한때 승리의 기회가 있었고, 영국의 북미주둔군을 절대적인 위기로 몰아넣은 적이 있었으나 영국 함대가 신속하게 병력증원을 해주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프랑스 주력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격파당해 대서양 제해권을 영국에 빼앗겨 본국으로부터의 추가증원에 실패한 것이 북미 전역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북미 전역을 별도로 프렌치-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영국군과 프랑스군 모두 병력과 보급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각기 다른 원주민 부족과 연합했기 때문. 흔히 프랑스 + 아메리카 원주민 vs 영국군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 된 것이다.

인도에서도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회사군이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친영국적인 벵골 태수를 앉히고, 남인도에서 프랑스의 핵심거점인 디셰리를 함락시켰다. 1760년, 프랑스의 동맹으로 참전한 스페인도 영국군에게 쿠바필리핀을 빼앗기며 패배를 거듭했다.

영국군은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를 모조리 휩쓸었고, 필리핀과 쿠바라는 스페인 식민제국의 두 핵심지역을 장악했으며, 쿠바에서 막대한 부를 전리품으로 확보해 전시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군은 남미 우루과이 지역에서 포르투갈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브라질로 약간 진격했으나 큰 의미는 없는 승리였다. 이로서 영국과 거의 판도가 맞먹던 프랑스의 식민제국은 몰락했다.

그러나 영국의 이와 같은 승리는 모두 비유럽 지역에서의 것으로, 대륙의 동맹국 프로이센이 패전 직전에 내몰리면서 이와 같은 승리는 빛이 바래지고 있었…는데?

1.4. 다시 중부 유럽 전역(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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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타 여제 표트르 3세

1762년 초, 대프로이센 동맹의 한 축이던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그 뒤를 표트르 3세가 이었는데, 문제는 이 인간이 지독한 독빠였다. 표트르 3세는 즉위하자마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영토를 포함,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귀를 조건으로 네토리 화친을 제안했고, 품 안의 독약을 언제 먹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냉큼 화친을 받아들였다. 그걸로 부족해서, 대프로이센 전쟁의 동맹국이던 스웨덴까지 설득시켜 스웨덴도 전쟁에서 이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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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드 퐁파두르 마리아 테레지아

이런 대반전으로 인해 프랑스의 루이 15세마담 드 퐁파두르, 그리고 무엇보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받은 NTR충격은 엄청났다. 원래 대프로이센 동맹은 마담 드 퐁파두르, 마리아 테레지아, 엘리자베타 여제 때문에 3부인 동맹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대결의 붕괴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도 정식지위는 황후인지라… 그래서 엘리자베타 여제의 죽음이 전황을 변화시킬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뒤엎을 정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 일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은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더 이상 국력이 남아나질 않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전쟁의 패배로 전쟁을 지속할 동기가 사라진 상태였는데, 유일하게 건재한 동맹국 러시아가 이탈하니 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의 마지막 국력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며 최후의 공세를 시도했고,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1.5. 결과

오스트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고, 또 불구대천의 원수 프랑스와 혼인동맹까지 맺었음에도 또 패하며 결국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명목상으로까지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슐레지엔 자체는 이미 전쟁 전부터 프로이센이 실효지배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잃은 것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어이없게 패하기는 했지만 프로이센과 수도 베를린을 여러 번 밟아버리는데 성공한 덕에 오랫동안 유럽패자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금전적으로 보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전 영토에서의 세입 20%가 걷히는 지역을 찾겠다고 11년치 예산을 퍼부었는데 실패한 것이었다.

프로이센은 명목상으로는 승리하기는 했지만 전쟁과정에서 국토가 점령당하고 유린당했고, 엄청난 전비를 지출하여 국력이 고갈되었다. 프로이센은 얼마동안 수그러들었다. 유럽에서 란드 분할 등 나름 큰소리 치게 되는 건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승전 대가로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이미 예전 전쟁 이후에도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이 실효지배하고 있던 터라 실제로 구체적으로 승전대가로 뜯어낸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5]

러시아는 표트르 3세의 지나친 친독정책으로 전쟁승리를 날려먹은 거에 대한 반감에 즉위 몇 달만에 부인 예카테리나 2세의 궁정 쿠데타로 실각하였으나, 궁정 쿠데타의 뒷수습으로 이후 나폴레옹 전쟁까지는 유럽과 별개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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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4배로 팽창한 영 북미 식민지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도와 북미의 식민지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었으나, 북미에서는 초기 패전의 와중에 북미 식민지의 커다란 도움을 받고, 이들의 힘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다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힘이 커진 북미 식민지에 세금 좀 내시지? 했다가 발생한 것이...

동맹국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만 제외 하면 잃은 것도 없이 패전은 했지만 그럭 저럭 본전은 챙긴 것과 달리, 프랑스는 캐나다, 프랑스, 아프리카 일대의 식민지를 전부 상실해버리는 등 고스톱으로 치면 피박, 오광, 광박, , 쓰리고를 맞아서 개털이 돼버린 것과 같은 꼴이 됐다.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한 데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재정난에 빠지는 등 막장테크를 제대로 탔음에도 프랑스는 이를 무시한 채 영국아 엿 좀 먹어라!! 하고 다시 어느 전쟁에 참전해서 이기긴 했는데 역시 그 결과가...

1.6. 여담

1.6.1. 히틀러의 망상

약 180여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중에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는 히틀러가 이때의 일을 상기하며 대역전이 일어날 거라고 망상하고 있었다.(…) 7년 전쟁때 엘리자베타 여제가 죽어서 러시아가 전열에서 이탈했듯, 루즈벨트가 죽어서 미국과 영국이 전열에서 이탈할 것이고 독일의 남은 힘으로 소련만 물리치면 된다는 망상 of 망상.

그러나, 트루먼은 전쟁에서 이탈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설사 1945년 4월 시점에서 미국이 이탈한들, 독일의 남은 전력으로는 도저히 소련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사실 7년 전쟁 당시에는 국가 간의 전쟁이라고 해봤자, 본질적으로는 왕실 간의 감정싸움&땅따먹기에 불과했으며 '국가'라는 의식은 아직 초창기였다. 그럼에도 당시 '짜르'였던 표트르 3세가 독빠라는 이유만으로 말도 안되는 강화조약을 맺고 분노한 국내 러시아 인들에게 폐위당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거대한 규모의 전쟁에서 나라 간의 전쟁이라는 집단적 국가 감정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세계대전은 7년 전쟁 보다 훨씬 더 규모가 거대해졌고, 국민들의 적국에 대한 적개심도 그 만큼 맹렬했다. 정치인들도 이전의 국왕, 황제와는 달리 자신이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서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일이 이렇게 커진 이상 독단적으로 적국과 협상하여 이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포위당했을 때처럼 전황이 매우 유리한 상황이라면 지금까지 흘려온 국민의 피를 모두 허사로 돌리겠다는 말이 되버린다.

자기 정치생명을 끝장내고 평생동안 '역사의 역적'으로 남을 각오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나 영국 수상이 이런 판단을 내린다면 당장 의회에서 탄핵을 받거나, 정신병으로 정상적인 국무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지도 모를 일.

1.7. 참고

아래 이글루스의 포스트들도 7년 전쟁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 Ladenijoa라는 블로거의 연재

아래는 7년 전쟁 중에서도 북미 전역만을 다루고 있는 블로거 월광토끼의 연재다.
# For the Glory of Britania - 7년 전쟁 북미전역

7년 전쟁을 다룬 유명한 영화로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배리 린든이 있다.
북미 전역의 경우 마이클 만 감독의 라스트 모히칸이 있다.

어쌔신 크리드: 로그가 이 7년 전쟁을 다루고 있다.

2. 임진왜란의 또 다른 명칭

임진왜란에 대한 호칭이 당시 참전한 한중일 3국에서 다 제각각인데가 각자의 입장에서 부르는 명칭이라 중립적인 입장, 특히 북미-유럽의 동양 사학계에서는 7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다만 서양에서 7년 전쟁 하면 주로 1번 항목이나, 18세기 러시아 표트르 대제와 스웨덴간의 북방전쟁을 지칭하기에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정확히 구분해주어야 한다.

임진왜란을 다룬 소설 중에 故 김성한의 <7년전쟁>이라는 작품은, 당초 <7년전쟁>이 원 제목이었으나 90년대 초반 <임진왜란>으로 바꾸고 최근 다시 <7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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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로쿼이족과 체로키족은 영국과 프로이센 편에 가담했고, 족과 오타와족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했다.
  • [2] 정확히 말하면 노버 왕가는 하노버 공국의 선제후이기도 했다. 거기에 칭호상으로는 스코틀랜드와의 연합왕국을 계기로 여왕 때부터 프랑스의 왕을 자칭하기도 했다. 무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1801년까지! 물론 무슨 제위 계승권 따위를 요구한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폼이었다.
  • [3]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당시 영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양도받은 발레아레스 제도의 섬. 7년 전쟁 직후 스페인에게 반환되었다.
  • [4] 어찌나 심하게 털렸는지 프리드리히 2세도 포로로 잡힐 뻔했고, 이를 피한 직후 몰려오는 적군의 전열을 바라보며 당장 자결할지 싸우다 죽을지 고민하다 기병 사령관 폰 프리트비츠의 설득을 받고 퇴각했다.
  • [5] 이와 관련해 7년전쟁과 마리아 테레지아가 없어 프로이센의 힘을 빼놓지 못했다면 오스트리아는 얼마 안 가 독일에서의 패권을 상실하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이 1세기 가량 앞당겨졌을 거라는 예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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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8-12 18: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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