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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7

last modified: 2015-10-10 11:52:07 by Contributors



B-17G 플라잉 포트리스


B-17G 플라잉 포트리스 칵핏

명실공히 유럽을 구함과 동시에 독일을 초토화시킨 4발 중폭격기.
광역 쑥재배기

Contents

1. 개요
2. 개발사
3. 'B-17'의 각 형식
3.1. B-17B
3.2. B-17C
3.3. B-17D
3.4. B-17E
3.5. B-17F
3.6. B-17G
3.7. Boeing 307 스트라토라이너
4. 실전투입
5. 제원
6. 기타
7. 관련 항목

1. 개요

Boeing B-17 Flying Fortress
보잉 B-17 플라잉 포트리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운용되었던 가장 유명한 폭격기이자, 가장 큰 공적을 남긴 폭격기. 연합군 승리에 가장 크게 공헌한 폭격기이며, 가장 성공적인 폭격기라는 평판을 받았다. B-17은 유럽에서도, 태평양에서도 육군 항공대에서 봉사하며 훌륭한 전과들을 낳았다.

'비행 요새'(플라잉 포트리스)라는 별칭에 걸맞게 튼튼하고, 멀리 날아가며,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해서 추축국의 혈압을 올리는데 일조했다. B-17은 나치 독일이 노획하여 별 개수 없이 운용하였으며 일본 제국 또한 노획하여 제한적 카피 시도가 있었을 만큼 추축국에도 깊은 인상을 남긴 기체였다.

2. 개발사


보잉 모델 200 모노메일

1930년대는 보잉에게 있어서 몇 가지 항공역사상 중요한 기술들을 발하는 시대였다. 이 시절, 보잉이 생산한 실험기나 우편기 등에 적용된 기술들은 후에 보잉의 기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30년 5월 1일 초도비행을 한 모델 200/221 모노메일(Model 200/221 Monomail) 7인승 우편수송기는 종래의 복엽기의 디자인을 탈피해 항공역학적인 설계를 거친 유선형의 동체와 저익의 전금속제 캔틸레버(cantilever)식[1] 날개, 혁신적인 수납식 랜딩 기어를 갖추고 있었다. (모델 221은 모델 200의 두 번째 생산)

1931년 4월 13일, 두개의 575마력 프랫&휘트니 호넷(Pratt&Whitney R-1860-13 Hornet) 성형 엔진을 탑재한 모델 215가 날아올랐다. 이것은 곧 1931년 4월 29일, 미 육군에 의해 XB-901이란 이름으로 실험되었고,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어 YB-9이란 이름을 얻어 본격적으로 미 육군에 의해 실험되었다. 이 YB-9은 262km/h의 속도로 날아올랐다.

두 번째 실험은 YB-9의 두 번째 모델, Y1B-9이었다.[2] 600마력 수랭식 커티스 컨쿼러(Curtiss V-1570-29 Conqueror) 엔진을 탑재했고, 1931년 11월 5일 첫 비행을 가졌다. 커티스 컨쿼러 엔진의 탑재로 인해 출력이 향상되었고 엔진 나셀(측면)의 디자인에 좀 더 스트림라인[3]이 향상되었다. YB-9는 278km/h의 속도를 지녔다.

모델 246, 그러니깐 YB-9은 다시 한 번의 개수를 거치는데, 그것은 바로 엔진과 관련된 문제였다. 당시 미 육군에서는 좀 더 안정성 있고 신뢰성 있는 공랭식 엔진에 대단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적에 공격에 견디는데에도 수랭식 엔진보다 공랭식 엔진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B-2 Condor 폭격기를 제외하곤, 미 육군에선 수랭식 폭격기가 없었다. 그 때문에 보잉은 긴급하게 엔진을 갈아 끼었다. 기존의 컨쿼러 엔진은 슈퍼차저 기능이 있는 프랫&휘트니 호넷(Pratt&Whitney R-1860-11 Hornet) 엔진으로 교체되었고, 수직 보조바퀴에 대한 재설계도 이루어졌다.

미 육군은 이것을 Y1B-1A으로 칭했다. Y1B-1A는 1932년 7월 14일 초도비행을 하였다.
이 Y1B-1 시리즈는 기술적으로 여러 가지 면으로 대단했는데, 먼저 미 육군 현존하는 모든 전투기의 속도와 대등했다. 게다가 미 육군 최초로 밀페식 캐노피를 장착함으로써 매우 선진화된 폭격기였다. Y1B-1은 경합의 그날을 위해 외부, 내부 모두 개량을 거듭했다. 경합 전에 미군은 1931년 12월, 8대의 Y1B-1을 주문하기도 했다.

(ɔ) from

마틴 모델 123

그러나 경합에서 승리한건 마틴의 모델 123(Martin Model 123, 이후 B-10이 됨)이었다. (뭥미?)

보잉의 관계자들은 낙담했다. 이겼다 싶은 경합을 마틴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하지만 승자는 마틴으로 돌아갔지만 이 B-9 시리즈는 후에 보잉의 폭격기 디자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비록 군용기에서의 경합에서는 마틴에게 패배했지만 보잉은 굴하지 않았다. 보잉은 민간 항공기 시장에서 보잉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할 정도로 혁신적인 항공기를 내놓았는데, B-17의 직계라 할 수 있는 모델 247이었다.

© Charles M. Daniels (cc0) from

모델 247

모델 247은 최초의 근대적 민간 항공기라 할 수 있었다. 전금속제의 동체에 캔틸레버식 저익, 완전수납식 랜딩기어, 550마력 쌍발 프랫&휘트니 S1D1 와스프(Pratt&Whitney S1D1 Wasp) 엔진, 3날 고정피치 프로펠러를 갖추고 있었고, 날개의 리딩엣지(leading edge:프로펠러, 날개의 앞쪽 언저리)에 압축공기를 사용하는 제빙부츠(de-icer boots)[4]가 장착되어 있었다.

1933년 2월 8일에 초도비행을 한 이 혁신적인 민간 항공기는, 10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었고 75대가 생산되었으며 그중 59대는 유나이티드 항공에 취역하였고 2대는 나치 독일의 루프트한자에 취역하였다. 모델 249는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개량되어 사용될 만큼 뛰어난 항공기였다. 이 모델이 모델 299, 그러니깐 B-17의 직계 어머니라 할 수 있을 정도로 B-17은 이 항공기에 결정적인 빚을 지고 있었다.

이 밖에 미국의 장거리 폭격기 계획(XBLR-1)으로 탄생한 XB-15에도 빚을 지고 있었고, 이 계획은 B-29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는 계획이었다.

1934년, 미 육군항공대(USAAC)는 B-10 폭격기를 대체할 차기 다발 폭격기 선정을 발표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 성능을 발표하였다.

첫째, 항속거리는 1,020마일(1,641km)을 충족할 것. ※ 되도록이면 2,200마일(3,540KM)을 충족했으면 함.
둘째. 최고속도는 1만 피트 상공에서 200mph(322km/h)를 충족할 것. 또한 10시간 이상 체공해야함. ※ 되도록이면 250mph(412km/h)를 충족했으면 함.
셋째. 폭장량은 2,000파운드(907kg)이상의 성능을 지닐 것.
넷째. 실용 상승한도는 25,000피트를 충족할 것.
다섯째. 1935년 8월까지는 시제기를 생산할 것.


정확한 엔진수량은 명기되지 않았지만, 미 육군은 다발 폭격기를 원했고, 이 경합에 보잉, 마틴, 더글라스 세 회사가 참여했다.

(ɔ) U.S. Air Force from

시애틀에서 공개된 모델 299

시애틀 타임즈의 기자 리처드 윌리엄스(Richard Williams)은 여러 기관총을 탑재한 채 대기하고 있던 모델 299를 보고 "비행 요새(Flying Fortress)"라며 감탄했다. 이것은 곧 B-17의 별명의 유래가 되었다.[5]

보잉사는 1934년 6월 18일부터 항공기 설계에 돌입해 1935년 7월 18일, 4기의 750마력 호넷(Pratt&Whitney R-1690-E Hornet) 성형엔진을 가진 시제기 모델 299를 선보인다. 이 모델 299는 보잉의 자신들이 생산, 개발했던 미 육군 최초의 단엽폭격기 모델 247(B-9)과 장거리 폭격기 계획(XBLR-1)에 참가해 시제 생산한 XB-15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보잉은 이미 4발 폭격기에 대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보잉의 모델 299는 미육군항공대의 요구충족 조항들을 모두 충족했다.

모델 299의 초도비행은 1935년 7월 28일, 보잉의 선행 조종사 레스타워(Less Tower)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도비행은 성공적이었다.
1935년 8월 20일, 모델299는 타 경쟁사의 시제기와의 경쟁을 위해 오하이오 데이튼(Dayton)의 라이트필드(Wright Field) 비행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모델 299는 시애틀에서 오하이오의 라이트필드 비행장까지 2,000마일에 이르는 거리를 9시간 동안 235mph(378km/h)의 속도로 날아왔다. 이 뛰어난 성능은 많은 관계자들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특히 공군 총사령부(GHQ Air Force)의 프랭크 멕스웰 앤드루스(Frank Maxwell Andrews) 장군은 이 모델 299가 미 육군의 차기 폭격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찍이 4발 폭격기의 중요성을 인식해왔고, 그의 주장이 반영되어 육군 항공대는 경합 전에 모델 299를 65대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경합도 하기 전에 성능을 입증해 보인 것이다.

모델 299를 살펴보면, 전금속체의 단엽기로 중익을 가지고 있었고, 9개의 실린더에 일렬 방사형(single row radial)식의 프랫&휘트니 R-1690 호넷 엔진 4기를 탑재하고 있었다. 엔진들은 스탠다드 헤밀턴사의 지름 3.5m짜리 프로펠러를 달고 7,000피트 상공에서 750마력의 힘을 낼 수 있었다. 항공기의 (nose)는 유리로 덮여있으며 이는 폭격수에게 좋은 시야를 제공해주었다. 폭탄창에는 2개의 수직 선반이 있었고, 총 4,800파운드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다. 4개의 엔진에 대한 제어는 폭격기 조종간에 보기 좋게 정렬되어 4개의 손가락으로 엔진을 제어할 수 있었다. 폭탄창 뒤에 배치된 무전수는 여차하면 폭격기 보수공으로도 활용될 수 있었다. 무전수의 좌석 바로위에 기총좌가 탑재되었으며 항공기의 코 아래에도 전방기관총이 설치되었다. 동체의 양옆으로 1정의 기총을 탑재하기 적합한 기총좌가 설치되었으며, 시애틀 타임즈의 기자가 놀란 모델 299의 기총 수는 총 5정였다.

라이트필드에서의 경합에 참가한 기체는 다음과 같았다.

Boeing Model 299
Martin Model 146 (B-10의 개량형)
Douglas DB-1(후에 파생형 DC-2 수송기가 B-18 Bolo가 된다.)

모델 299만 제외하고 모두 전형적인 쌍발기였다.


추락한 모델 299

보잉의 모델 299는 타 시제기에 비해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했으나 길은 순탄치 못했다. 먼저 많은 육군의 관계자들은 4발 폭격기는 쌍발에 비해 둔중할 수밖에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B-17의 2만 달러에 달하는 높은 입찰가격은 육군 관계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프로토타입의 가격은 다른 두회사들보다 월등이 비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35년 10월 30일, 최종평가 시험에서 추락사고 일어 육군 조종사 힐툭(Hill took)과 보잉사 시험조종사 2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기술진과 탑승객은 부상을 당한다. 이는 지상 정비사가 모델 299만의 조종 잠금장치(gust lock)를 해제하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이었다. 기술진 중에 도날드 푸트 중위는 후에 B-29의 설계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Gust lock'은 폭격기가 지상에 계류 중일 때 승강타와 방향타 등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륙하기 전에 반드시 그것을 해제시켜야만 했다. 잠금장치를 해제하지 않은 이 불운한 시제기는 이륙하자마자 실속해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불운한 보잉사는 이 사건들로 인해 다된 밥에 재를 뿌려야만 했다. 경합에서 성능으로 사실상 타 경쟁자들을 눌려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미 육군은 더글라스의 DB-1을 선택했다. 보잉에 선 주문된 65대의 모델 299는 취소되었다. 맬린 크레이그(Malin Craig) 장군의 지도하에 DB-1 133대의 도입이 결정되었다. 다된 밥에 제대로 죽을 쓴 보잉은 사실상 도박이었던 4발폭격기 도전에 참담한 실패를 맛보는 듯했다.

하지만 헨리 아놀드(Henry "Hap" Arnold) 장군을 필두로한 몇몇 장교들은 모델 299의 잠재력을 묵과하지 않았고, 시험 비행이라는 이름하에 보잉에 YB-17이란 이름을 붙이고 13대를 주문했다. 1936년 1월 17일 미 육군에 13대의 YB-17의 납품할 것을 계약한 보잉은 모델 299를 부분 개수해 개량했다. 엔진은 기존의 750마력 호넷 엔진에서 950마력 사이클론(Pratt&Whitney Wright R-1820-39 Cyclone) 엔진으로 변경되었다. 모델 299의 메인휠은 양면의 스트럿 어셈블리(strut assembly)가 장착 되어 있었고, 이것은 스트럿(완충장치)으로 하여금 충격흡수를 어렵게 만들었다. YB-17은 한 면의 스트럿을 가지도록 교체되었고 이것은 또한 타이어의 교체를 더 용이하게 만들었다. 그밖에 과거의 참사를 예방하기위해 기체점검목록이 만들어지는 등 소소한 개량을 거쳐 1937년 1월부터 육군항공대에 인도가 시작되어 3월 1일, 주문된 13대중 12대가 미국 버지니아의 랭글리 비행장으로 수송되었다. 기체들은 제2 폭격단(2nd Bombardment Group)에 소속, 미 육군항공대의 폭격전술 시험에 사용되었다. (기체 점검목록은 후에 다른 모든 항공기에서도 사용된다.)

그러나 모델 299, 그러니깐 YB-17의 길은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1936년 12월, YB-17은 앞서 언급한 YB-9과 같은 이유로 Y1B-17로 이름이 변경된 후 12월 2일 초도비행을 실시하고 시험비행을 하고 있었다.

Y1B-17의 심장, 사이클론 엔진은 좀 더 나은 출력을 제공했지만 너무나도 쉽게 과열되었다. 1936년 12월 7일, 3번째 비행도중 엔진과열로 인해 이륙했던 Y1B-17의 사이클론 엔진 2기가 과열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조종사는 급히 착륙하려 하였으나 랜딩기어 고장으로 동체착륙을 했고, 이것은 미육군항공대로 하여금 더글라스 B-18 볼로 253대를 구매하게 만들었다. 볼로는 DB-1의 파생형 DC-2수송기에서 개량된 것으로서, B-18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Y1B-17의 계약은 파기되지 않았다. 미 국회가 Y1B-17의 성능에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담으로 보잉은 모델 299와 그에 대한 개량, 개수에 3,823,807달러를 쏟아 부었다. 이는 보잉이란 회사에게 있어서 심각하게 무리가 가는 숫자였다. B-17이 선택되지 않았다면 보잉은 파산했을지 모른다.

1937년과 38년 사이 랭글리 비행장에 있던 Y1B-17은 홍보도 할 겸 아르헨티나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나 페루, 파나마, 브라질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iero)등 남미 도시들의 순회와 미국 주요 도시들의 순회 비행을 돌았다. 이 과정에서 Y1B-17은 대륙횡단 최단기록을 깨버렸다.

육군 항공대는 오래전부터 육군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육군 장교들은 항공단은 오로지 육군의 지원을 위한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개념은 정부해군에게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해군이 육군 항공단의 독립에 관여해 압력을 넣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해군이 Y1B-17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1938년 5월, 이탈리아 원양 여객선 REX호를 시범 요격하는 실험에 성공하고 육군이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 후였다. 앤드루스 대장의 명령 하에 이뤄진 이 작전은 커티스 르메이 중령의 항법지도하에 이루어졌다. 해군은 자신들이 미국의 해안을 지켜야한다고 굳게 믿었다. 주제넘게 육군의 항공기가 미 해안을 지킨답시고 돌아다니는 꼴은 곱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뜻에서 해군은 Y1B-17이 자신들의 임무영역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압력을 넣은 것이었다.

해군은 화난 정도가 아니라 노발대발했다. 육군항공대의 Y1B-17은 미국 앞마당에 나간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1,125km를 날아가 REX를 요격했고, 미 해군은 자신들의 몫을 가로챘다고 항의했다. 그 결과 미 육군 항공기는 미 해안으로부터 160km(100마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임무영역이 대폭 축소된 것이었다.
이 규제는 1938년 9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과정에서 빚어진 뮌헨위기가 지나서야 해제되었다.

지상에서의 실험을 위해 생산된 14번째 Y1B-17은 갈수록 고고도의 작전환경이 요구됨에 따라 R-1820-51 엔진에 배기터빈식 터보차저(Exhaust turbocharger)[6]가 장착, 실험되었다.

이 실험기는 Y1B-17A로 명명되었다. 과급기는 엔진 나셀(nacelle) 상부에 장착되었다. 1937년 말, 비행시험 대기 중이었지만 소진식 터보과급기에 자잘한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실험시기는 늦춰졌다. 엔진 나셀 위에 장착된 과급기는 공기의 흐름을 방해했고, 진동을 일으켰다. 보잉은 이것을 나셀하부에 장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1938년 4월 29일에야 재개된 실험에서 Y1B-17은 괄목할만한 성적을 내주었다. 과급기로 인해 31,000피트(9,450m)의 상승한도가 38,000피트(11,580m)까지 늘어났고 출력 또한 늘어나 속력은 412km/h에서 500km/h 이상으로 빨라졌다. 3만 5천 피트에서 엔진하나를 끄고 임무를 완수하기도 했다.

미 육군 관계자들은 이 실험성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이 터보과급기를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에 적용시켰다.

역시나 여담이지만 보잉은 이 개량형에 다시 1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이것은 터보차저에 대한 개량을 전적으로 보잉이 떠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회사로선 치명적이었다.

3. 'B-17'의 각 형식

3.1. B-17B

(ɔ) United States Army Air Corps from


1937년 8월 3일, 이미 육군 항공대는 보잉과 터보과급기가 장착된 B-17에 대한 계약을 한 바 있었다. 10대를 주문한 육군 항공대를 위해 보잉은 Y1B-17A에 개량을 하는데, 이것은 주로 기체의 생존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1935년까지만 해도 B-17의 방어무장은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보잉과 미 육군 항공대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B-17의 생존성이 뒤떨어지고 있다는 걸 절감했다.
1938년에는 미국을 방문한 영국 공군 준장 아서 해리스가 B-17을 시찰하다 무장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재설계 된 기수는 투명도가 높고 내열 밑 충격에 강한 플렉시 유리(Plexi glas)로 대체되었고 기수의 버블형 회전총안이 볼 소켓형식으로 교체되면서 전방에 설치된 7.62mm 기관총의 사용이 좀 더 용이해졌다. 또한 주 조종실공간 확장과 기체 상부를 관측할 수 있게 캐노피 후미에 방탄유리를 이용한 돔(Dome)형 캐노피를 추가 설치하였다. 폭격수의 활동성을 위해 좌석을 기수앞부분으로 옮겼으며 평면으로된 전용관측창이 설치되었다.

그밖에 항법사의 위치가 더 나은 시야를 위해 조종사 뒤쪽으로 배치되었고 방위측정용 DF 안테나가 동체 하부로 이동되었다. 엔진 나셀 하부에 위치했던 에어스쿠프와 배기구가 측면 및 하단으로 변경되었다. 플랩(Flap)과 방향타의 크기를 늘리는 개량을 했고, 연료장치가 개선되는 등 소소한 개량과 설계변경을 거쳤다.

육군 항공대는 이것을 B-17B라 명명했다. 육군 항공대는 이후 29대의 B-17B를 주문했다. 바야흐로 우여곡절을 끝내고 B-17이 정식으로 등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아직 숫자면으로서 한참 부족했다.

B-17B가 초도비행에 성공한 것은 1939년 6월 27일이었다. 39대의 B-17B는 1939년 7월 생산이 시작되어 1940년 3월에 모두 납품되었다. 이 폭격기들은 2개의 폭격그룹으로 분리되어 하나는 대서양 해안에, 또 하나는 태평양 해안에 배치되었다.

3.2. B-17C


B-17B가 초도비행도 실시하기 전에, 이미 육군항공대는 1938년 9월, 38대의 B-17 강화형 B-17C를 주문한 상태였다. 이 B-17C는 모델 299H형의 변용형으로, B-17C는 생존성이 강화된 모델이다.

동체 양 옆의 사수석의 창이 동체 뒤쪽으로 옮겨짐과 동시에 물방물형 창으로 바뀌고, 동체 상부의 총좌는 개폐식 플랙시 글래스로 바뀌었다. 동체 하부의 총좌는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놓은듯한 욕조 모양의 총좌로 바뀌었고, 사수는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총을 쏘는 방식이었다. 기수의 싱글 소켓의 총탑이 삭제되고 기총은 기수 양옆으로 배치되었다.

1940년 12월 21일 발주를 시작으로 영국군형 20대, 미군형 18대로 38대만 생산되었고 1941년 3월부터 영국에게 공여되어 '포트리스 I'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3.3. B-17D

(ɔ) U.S. Air Force from


B-17D는 미국에 남은 18대의 B-17C의 개장형으로, 엔진 덮개의 플랩이 설치되어 엔진의 냉각을 용이하게 해주었고 장갑의 향상으로 인한 방호력 증가와 12V에서 24V로 전환한 전자장비 시스템의 개량. 더불어 연료 탱크의 개량과 외부 폭탄창의 받침대 삭제, 저압산소 시스템의 장착 등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B-17D는 1941년 2월 3일 초도비행을 가졌으며 같은 해부터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42대가 생산되었으며 생산된 7할이 태평양에 배치되었고 하와이에도 배치되었는데, 1941년 11월 일본군진주만 공습 때문에 18대가 파손되었다.

3.4. B-17E

(ɔ) U.S. Air Force photo from


B-17E는 B-17 시리즈에서 최초의 대량 생산형 버전이었다. 엔진이나 기타 기본 장비 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우선 지난 모델 299계열보다 7이나 몸집이 불었고, 동체는 3m 길어졌다. 또한 수평꼬리 날개가 대형화되어 조종성이 향상되었고 수직안정판이 대형화되는 등 이전 버전보다 대형화되었다. 늘어난 동체 덕에 후방에 후미 총좌가 신설되었고 B-17C부터 내려온 동체 하부의 욕조 모양 총좌가 삭제되고 벤딕스 50구경 2연장 회전총탑이 신설되었는데, 안에서 원격 조종하는 본격적인 볼 터렛이었지만 잠망경으로 조준하는 탓에 사수들은 극단적인 멀미 증세를 참아내야 했다. 때문에 113번째 생산된 B-17E는 유압으로 움직이는 격납식 스페리 반구형 총탑으로 교체되었고. 이 스페리 총탑은 B-24에도 사용된다.

무전수실 상부와 조종실 후미에 2연장 50구경 총좌가 생겼고, 동체 측면의 물방울형 사수창이 사각형으로 교체되었다.
승무원은 총 10명으로, 기수의 총좌와 상부총좌는 특별한 사수가 맡지 않았고, 기수총좌는 항법사나 폭격수가, 상부총좌는 항공기관사가 맡았다.

1940년 말부터 미 육군 항공대는 277대의 B-17E를 주문하였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생산은 지연되었고 1941년 9월 21일부터 다시 생산이 시작되었다. 총 512대가 만들어졌고, 곧바로 1942년 8월 17일, 제97 폭격비행단(BG)에 배속되어 프랑스하늘을 날았다

3.5. B-17F

(ɔ) U.S. Air Force from


B-17 시리즈의 본격적인 양산 버전으로. 무려 3405대가 생산되었다. 전시생산을 맞추기 위해 B-17F 부터 회사 간 본격적인 분담 생산이 이루어졌으며, 보잉, 록히드의 베가, 더글러스의 B.V.D가 맡았고, 이런 생산라인은 다른 폭격기 생산에도 이어진다. 보잉은 캔자스의 위치타, 더글러스는 캘리포니아산타 모니카, 그리고 B-17 생산을 위해 새로 만든 롱비치 공장에서 생산했다. 이러한 생산방식은 B-17E부터 고안되었으나 두 회사는 당시 참여하지 않았다. 보잉이 2,300대, 록히드의 베가공장이 500대, 더글러스의 롱비치 공장이 605대를 생산했다.

B-17F는 B-17E 초기 버전의 확장 버전이라 할만큼, 외관상 E형과 뚜렷한 차이는 없으나. 오직 기수의 디자인 변경만이 주요한 개량의 특이점이다. 기수의 플렉시 글래스를 나누던 금속 뼈대가 사라지고, 원통형의 유리가 기수 전체를 덮게 되었다.
기수의 측면사수의 사격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 유리를 좀 더 늘렸고, 후기형에 이르러서는 바깥으로 튀어나온 형태의 "Cheek"형 총좌로 바뀌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후기형에서 기수를 보호하기 위해 기수 아래에 "벤딕스" 총좌가 설치되었고, 이것은 B-17G형에도 이어진다.

최신형 라이트 R-1820-97 사이클론 엔진이 탑재되었으며 폭이 더 넓어진 프로펠러날을 새로 탑재하여 비행성능이 훨씬 향상되었다.

사이클론 엔진은 이륙시 1,200마력의 힘을, 고공 2만 5천 피트에서는 1,000마력의 성능을 내었으며 최고속도는 2만 5천 피트에서 299mph(약 491km/h)의 속도를 내었고, 비상시 최대출력을 높였을 때 2만 5천 피트에서 1,380마력을 내며 325mph(520km/h)의 속도를 냈다. B-17F의 무게는 6만 5천 파운드에서 후기엔 7만 2천 파운드로 늘어나지만, 그 전의 B-17 시리즈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이른바 "도쿄 탱크"라 불리는 외부 연료 탱크와 자동 방루식 연료탱크의 장착과 함께 항속거리가 6,791km로 늘어났으며 외부 폭탄래크(외부 폭탄창 좌우 각각 2000파운드 적재)으로 인해 폭장량도 10000파운드로 늘어났다. 1942년 5월 30일, 하늘을 난 B-17F는 곧바로 유럽의 B-17E를 밀어냈으며, 1943년 1월 27일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 공습때 처음으로 참여했다.유명한 멤피스 벨의 기체 또한 B-17F이다.

3.6. B-17G

(ɔ) U.S. Air Force photo from


여러 잡스러운 B-17의 후기 시리즈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B-17 시리즈의 최종 개량형이며, 가장 많이 생산되었고 가장 많이 활약한 기종이다. 보잉이 4,035대, 더글러스가 2,395대 록히드가 2,250대를 생산하여 총 6,680대가 생산되었다.

© Kogo from

B-17G의 샤이엔 총좌

B-17F 후기형부터 고정화된 기수 하부의 벤딕스 총좌는 고정되었으며. 후미총좌는 '샤이엔'이란 별명을 가진 와이오밍 유나이티드 항공사가 개발한 좀 더 시야가 넓어진 신형 후미총좌가 신설되었다. 샤이엔은 종전의 링형 조준기를 대신해 신형 투영조준기가 장착되었다. 고고도에서의 추위를 방지하기 위해 밀봉형 총좌가 설치되었다. '포메이션 스틱'이라 불리던 전기구동식 조종간도 도입되어 고고도에서의 조종성이 향상되었다.

생산형 후기엔 나란히 일렬로 배치되었던 측면사수창이 사격시 사수끼리 방해받지 않기 하기 위해 우측 총좌가 약간 전방으로 옮겨졌고, B-17E형부터 내려온 무전수 상부 총좌가 폐지되었다.
G형은 총 13개의 총좌를 가지고 있었으며, 50구경 기관총은 개량된 K-6 총탑을 사용하였다.

강력한 1,200마력 Wright R-1820-97 엔진을 장착하였으며 제너럴 일렉트릭의 B-22 터보슈퍼차저를 장착, 2만 5천 피트에서도 1,000마력의 힘을 낼 수 있었고, 2만 6천 5백 피트에서 1,380마력을 낸 적도 있으며, 속도는 평시에 2만 5천 피트에서 약 423km/h, 비상시에 3만 피트에서 482km/h를 내었으며, 일반적인 순항속도는 2만 5천 피트에서 240km/h이었다.

다만 상승한도는 F형보다 떨어졌다. 1,300km 순항시 2,000kg(4,500파운드), 600-700km 사이의 단거리 폭격시에는 4,500kg(9,000파운드)의 폭탄을 적재하였다. 1943년, 미 제 8공군과 제 15공군에 소속되었으며, 영국공군은 연안 방어를 위해 85대를 도입, '포트리스 III'라 불렀고 영국공군 제 100비행대대(100SQ)에서는 밴딕스 총좌자리에 구름을 뚫어볼수있는 H2S BTO(Bombing Through Overcast) 레이더를 장착, 야간폭격에 써먹었으며, 조기경보기 역할도 하였다. 연안 경비 사령부 또한 수색레이더를 탑재해 잠수함 탐색에 써먹었다.

B-17G는 'BQ-7'이란 무선 유도폭탄으로 개조되어, 이른바 아프로디테 계획에 사용되었다. 조종사가 목표지점에 이 폭탄 비행기를 몰고 간 후, 적정한 궤도에서 조종사 둘은 탈출, 비행체는 다른 모기에서 무선조종되어 목표지점에 2천 파운드의 폭약을 싣고 자폭하는 계획이었는데, 기술적인 한계와 오발 우려로 사장되었다.

B-17G는 나치독일에게도 노획되어 KG-200 비행단에서 훈련, 혹은 적을 교란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보잉이 1945년 4월 13일을 기점으로 생산을 중단하였으며, 록히드의 베가공장이 1945년 7월 29일 마지막 B-17G를 생산하면서 사실상 B-17의 생산은 종결되었다. 전후에 이스라엘군이 3대를 사용했고 한국전쟁에 정찰형과 해상구조용(B-17H, SB-17로 개칭)이 투입된 후 전장에서 자취를 감춘다.

3.7. Boeing 307 스트라토라이너

© Charles M. Daniels (cc0) from


여객기 형식으로 소음을 빼면 큰 문제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4. 실전투입

B-17이 실전에 투입된 것은 1941년 7월 8일,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에서 영국에게 공여된 B-17C '포트리스 I'이었다. 포트리스 I은 B-17C의 성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독일 요격기를 피하기 위해 적정고도보다 높은 3만 피트에서 독일 해군 병영을 목표로 폭격을 실시하였다.
당연하게도 폭격은 성공하지 못했고 높은 고도에서의 낮은 기온 때문에 기관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7월 24일정신 못차린 육항은다음 목표에 대해 다시 한 번 폭격에 들어갔으나 또 실패하고 말았다.
9월까지 영국 공군은 별다른 성과 없이 8대의 B-17C를 잃었고,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B-17C의 주간 폭격을 금지하였다.[7] 미군만큼은 B-17C의 강력한 방어력에 주목, 주간 폭격을 중지하진 않았지만, 영국 공군이나 미 육군 항공대나 B-17C가 더욱 개량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노던 폭격조준기(Norden bombsight)

그러한 고고도에서의 명중률은 노던 폭격 조준기의 본격적 배치로서 가능해졌다.

1904년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칼 노든(Carl Norden)이 1921년 개발을 시작해 1931년 완성시킨 것으로, 이후 개량이 이어져 마크 16(Mark XV)에 이르러서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가공할 만한 성능의 조준기를 완성시켰다. 폭격수 교육만 16주가 필요한 이 물건은 원형공산오차(CEP) 30m 안에 100발을 정확히 꽂아 넣을 수 있는, 당시로서는 가공할만한 정확성을 가지고 있었다.

기압이나 고도 등 폭격에 필요한 수치를 조준경에 입력하면, 조준경 내의 회전 안정식 컴퓨터가 입력된 정보를 종합해 최적의 폭격 정보를 산출했고, 그에 따라 폭탄을 떨어뜨리면 되는 획기적인 장비였다. 이렇기에 초기의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볼 수 있다.

진주만 공습 이후 대량생산된 노던 폭격 조준기는, B-17 뿐만 아니라 B-24나 B-29 등 여러 폭격기에 쓰였으며 베트남전까지 사용되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한 이후, 제8공군은 1942년 5월 12일, 영국 하이 위컴(High Wycombe)에 도착하여 제97폭격단을 조직하였다. B-17E로만 이루어진 이 폭격단은 스핏파이어의 엄호를 받으며 프랑스 루앵소트빌(Rouen-Sotteville)의 철도 조차장을 폭격했으며, 이 폭격은 전래의 B-17의 성과와 비교해 큰 전과를 냈다. 이 폭격에서 단 두대의 B-17E만이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스핏파이어와 연계한 호위 폭격 작전이 이루어졌고, B-17이 개량되어 가면서 폭장량도 늘어나 독일에 대한 더욱 활발한 공습을 가능하게 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B-17을 야간에 쓸 것인가, 주간에 쓸 것인가를 두고 대립하였으나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Casablanca Conference)에서 합의점을 이끌어내어, 보다 본격적인 공습이 이루어졌다.
영국군 스핏파이어와의 공조는 B-17의 생존성을 보다 높여주었지만, 요격기가 베이스인 스핏파이어의 항속거리는 B-17을 끝까지 호위하기엔 당연히 부족했기에 언제나 중간에 기를 돌아와야 했다.

폭격의 목표가 적의 활주로에서 전투기 생산 공장 같은 산업적인 목표로 바뀌면서 폭격기들은 더욱더 위험에 노출되었고 1943년 4월 17일, 브레멘(Bremen)의 포케볼프 Fw190 전투기 생산공장을 폭격하는 도중에 115대의 폭격기 중에서 16대가 손상되고 48대가 파손됨을 시작으로, 이른바 "검은 목요일"이라 불린 1943년 10월 14일,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 폭격에서 291대의 B-17 중에서 77대가 격추당하고 122대의 폭격기가 손상을 입었으며, 2,900명중 650명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

이는 B-17을 끝까지 에스코트할 전투기의 부재로 인한 현상으로, 루프트바페는 호위기가 사라지면 늑대떼처럼 올라와 B-17을 물어뜯었다.

미 육군 항공단은 자체조사 결과, 피격당한 B-17의 대부분이 무리를 이탈했다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누우처럼, 진형에서 벗어나 변을 당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거기에 대한 대비책으로 "상자형 폭격 대형"을 구상했는데, 상차처럼 조밀하게 밀집해 자체 방호 기관총으로 일종의 십자포화를 구성하고, 적 전투기로 하여금 쉽게 달려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병신 같은 미 육군 항공대의 생각과는 다르게이러한 대형은 폭격기로 하여금 직선으로만 진행하게 하여 회피기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대공포의 좋은 먹잇감이 됨과 동시에 독일이 새로운 공격전법으로 맞서자 B-17의 손실률은 25%까지 치달았다.

때문에 미 육군 항공대영국 공군은 적당한 호위기가 새로 만들어질 때까지 B-17의 주간 폭격을 잠정 중단하고 만다.


B-17이 다시 주간에 고개를 내민 것은 신형 전투기, P-51 머스탱이 전장에 등장하고 나서부터였다. 약 3,700km에 이르는 긴 항속거리는 지닌 머스탱은 폭격기의 폭격 전 과정을 호위할 수 있었고 1944년 2월 24일, 4달 전에 폭격을 시도했다가 사실상 실패한 슈바인푸르트에 대한 공습에서 231대중 단 11대만이 손실되었으며 3,500대의 B-17 중에 단 244대만이 격추되었는데, 이는 손실률을 7%로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 주는 대단한 주(Big week)라 불리며 호위 전투기와 폭격기의 공조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증명했다.

B-17의 생존성은 매우 뛰어나서, B-17 조종사였던 월리 호프먼(Wally Hoffman)은 적의 포화로 비행기가 거의 박살이 나도 승무원은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고 할 정도였으며, Fw190의 충돌 전법으로 엔진이 박살나고 좌우측 안정기가 작동 불능이 되었음에도 멀쩡히 귀환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했다. 기록에는 엔진1기만 작동한 상태에서 귀환한 기체도 있다.

Fw190를 몰던 어느 조종사는 B-17을 처음보고 "과연 저걸 내 알량한 전투기 무장으로 격추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Fw190의 화력은 최소 7.7mm 기관총에 20mm 기관포 4문, 최대 13mm 기관총에 20mm와 30mm 기관포를 2문 장착. 이놈들이 불을 뿜어대면 어징간한 폭격기들도 한큐에 작살이 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Fw190의 무장을 알량하다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그것은 폭격기라기엔 너무나 컸다. 엄청나게 크고 넓고 무거운, 그리고 단단했다. 그것은 마치 요새였다." 수준.

결국 포케볼프의 조종사들은 B-17의 압도적인 방호력에 질려 다른 부분에 대한 공격을 삼가고 오로지 폭격기 기수부분만을 공격했으나, 기수가 거의 박살난 상태로도 귀환하는 B-17도 많을 정도로 B-17은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후에 30mm MK 108 기관포나 R4M 로켓의 등장으로 B-17은 더욱더 쉽게 격추되었지만, 이미 대전은 끝나 가는데 그러한 독일공군의 노력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45년까지 B-17은 사실상 독일 하늘을 "지배"했으며, 본격적인 폭격기간인 44년 말에서 45년 초까지 B-17의 손실은 거의 없었다.

독일은 노획한 B-17을 특수작전에 써먹었고, 'Do200'이라 불렀다. 잘 알려진 독일의 B-17 부대 KG200에서 연합군인 척 접근했다 쏘고 튀는 작전을 수행했다.(B-17부대의 무전방수를 이용하여 박스 편대 하부에 접근)게 흡수되었다.


물수제비 폭격(Skip Bombing)은 미 제5공군 소속의 조지 케니(George Kenney) 중장이 도입한 새로운 폭격전법으로(도버 해협을 도약폭탄으로 터뜨린 바니스 월리스가 최초) 고고도에서의 수평폭격으로는 명중률이 1%도 채 나지 않았던 것을, 물수제비뜨듯, 폭탄을 수면에 튕겨 공격하는 전법을 창안해냈다.[8]

실험에는 B-17이 이용되었는데, 1943년 12월 23일 실험에서 제64비행대의 B-17 12대를 이용하여 각각 10,000피트와 1,000피트에서 선박의 용골을 공격하는 실험을 가하였다. 그 결과 물수제비 폭격의 효율성이 증명되었으며 중형폭격기로는 물수제비 폭격에 적합하지 않아 B-25이나 A-20 같은 소형 폭격기가 전담하게 되었다.

B-17 개발의 본래의 취지였던 대서양에서는 단 5개 비행대 168대의 B-17만이 운용되었고, 태평양 전선의 미 제5공군은 일본 군수시설에 대한 폭격이 아니라 일본함선 공격이나 항로 방해 등을 주로 맡고, 본토 폭격은 B-29가 전담하고 있었기에 태평양에서 B-17은 그리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였고, 태평양 전쟁 초기 남방전선에서 활주로에 주기되어 있다 파괴된 B-17들을 제외하면 다른 전투에서 B-17을 손실한 경우도 별로 없었다.

B-17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총 32개 비행단의 총 12,731대가 배치되었고, 유럽에서의 폭격에서 640,036톤의 폭탄을 쏟아 부었으며, 이는 B-24가 투하한 452,508톤보다 많고, B-25 같은 다른 폭격기가 투하한 폭탄의 합계인 463,544톤보다 많았다. 총 12,731대 중에 3분의 1인 약 4,500여대가 격추되었고, 또한 승무원의 피해도 다른 폭격기보다 훨씬 많았다.

B-17은 전후에 많은 미국 병기들이 그랬듯 상당히 많은 수가 타국으로 수출/공여되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무기 판매 금지법을 피하기 위해 밀수입을 감행(찰리 윈터스 항목 참조)해 3대의 B-17을 빼돌렸고, 브라질, 프랑스, 소련, 도미니카 공화국 등 다양한 국가들이 B-17을 50년대 중후반까지 이용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상당한 활약을 했으나 기관총좌는 발전된 제트엔진 전투기들을 막지 못했다. 때문에 검은색으로 도색해 야간작전에만 투입되었다. 그러나 현대전에 투입되기엔 이미 성능이 많이 떨어지는지라 곧 퇴역하고 만다.

5. 제원

(B-17G 기준)
승무원 10명
전장 74피트 4인치 (22.66m)
전폭 103피트 9인치 (31.62m)
높이 19피트 1인치 (5.82m)
익면적 1,420제곱피트 (131.92제곱미터)
공허중량 36,135파운드 (16,391kg)
만재중량 54,000파운드 (24,500kg)
최대 이륙중량 65,500파운드 (29,700kg)
엔진 4x 라이트 R-1820-97 사이클론 레시프로, 기당 추력 1,200마력 (895kW)
최대속도 249노트 (462km/h, 287mph)
순항속도 158노트 (293km/h, 182mph)
항속거리 2,000마일 (3,219km, 1,738nmi)
실용 상승한도 35,600피트 (10,850m)
상승률 분당 900피트 (4.6m/s)
익면하중 제곱피트 당 38파운드 (제곱미터 당 185.7kg)
추중비 0.089마력/파운드 (150W/kg)
무장 13x 12.7mm 기관총
최대 17,600파운드(7,800kg) 탑재 가능

6. 기타

  • 'B-17 Flying Fortress: The Mighty 8th'라는 게임이 있다. 대놓고 "이 게임은 B-17 시뮬레이션이요~" 하는 놈. 이륙부터 귀환까지 머리 싸잡고 쥐어뜯게 만드는 괴물이다. 너무 현실적으로 해서 IL-2(게임) 시리즈를 즐기는 유저 중에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9]
  • 문명 5에선 폭격기를 대신하는 미국의 특수유닛으로 등장한다.
  • 삼국지 천명에서는 유비군 폭격기로 나온데, 날개가 위로 접혀 격납된다.
  • 430달러를 내면 25분간 체험 비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http://www.libertyfoundation.org/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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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캔틸레버식 날개 : 널빤지처럼 생긴 구조로 날개가 모든 힘들 다 받는 구조이다. 현대항공기에서 많이 쓰인다.
  • [2] Y1은, 정식 즉, 정상적인 회계 연도의 군수품조달이 아닌, 외부 자금조달에 의함을 의미함.
  • [3] 스트림라이닝(Streamlining) : 둥글둥글하고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어는 유선형의 구조를 지칭하는 것으로 Streamlining은 20세기 초, 선박, 항공기, 자동차 등에서 항공역학, 유체역학적인 성능개선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유선형의 "미래 디자인"은 후에 선박이나 항공기뿐만 아니라 냉장고와 같은 가전적인 분야로 확대되었다.
  • [4] 제빙부츠(de-icer boots) : 팽창 가능한 고무재질의 제빙장치를 날개에 달아 그 속으로 고압공기를 불어넣어 팽창, 수축을 통해 얼음이 깨지도록 하는 장치
  • [5] 미 육군은 육상과 연계한 해안방어용 폭격기를 계획했기에, 기자들은 모델 299의 무장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모델 299 자체를 두고 "해안을 지킬, 나는(飛行) 요새"로 감탄사를 붙여 별명이 생겼다는 말도 있고, 미국의 고립주의적 정책에 기반을 두어 "우리는 적을 공격할 뜻에서 만든 게 아니라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 "라는 타이틀을 붙여 탄생했다는 말도 있다.
  • [6] 배기가스 강제 작동식 과급기(Exhaust-driven turbocharger) : 배기가스에서 발생하는 추력을 공기 중으로 날리지 않고, 별도의 터빈실로 보내 내장된 임펠러를 돌린다. 그리고 그 흡기에너지로 공기를 강제로 빨아들여 엔진에 공급해 출력을 높이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 [7] 콜 오브 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에 나오는 폭격기 미션은 이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의 편대는 전멸 당한다.
  • [8] 만화 지팡구에도 나온다. 지팡구에서는 해상 자위대의 이지스함 미라이가 이 공격을 당했고, 이를 요격하려던 미라이의 VTOL기가 기총이 고장 나자 몸으로 막아서(...) 미라이를 구했다.
  • [9] 그냥 조종은 컴퓨터에게 맞기고 방어총좌를 이동해가면서 적기 격추시키기 놀이하다가 폭격수 역할도 하면 상당히 즐겁게 즐길 수 있다. 다만 피격되어서 손상이 심해지면 컴퓨터가 바보가 되기 때문에 (한군데서 빙빙 돌기만 하기도 한다) 조종간을 직접 잡아서 기지까지 귀환시켜야 하는데 이게 상당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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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10 11: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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