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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last modified: 2015-04-12 20:21:02 by Contributors

KBO 리그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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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Samsung L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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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센 히어로즈
(Nexen Her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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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
(NC Di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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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LG Tw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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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
(SK Wyver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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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Doosan B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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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Lotte Gi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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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KIA Ti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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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Hanwha Eag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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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위즈
(kt wiz)
과거에 참가했던 구단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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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엠블럼 팀 마스코트
호돌이
KIA 타이거즈
KIA Tigers
창단 1982년 1월 30일
팀명 변경 2001년 8월 1일
구단 법인명 ㈜기아타이거즈
영문명칭 KIA TIGERS CO.,LTD
업종명 스포츠 클럽 운영업
상장유무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대기업
연고지 광주광역시[1]
구단 연고지 변천 광주광역시 (1982~)
구단명 변천 해태 타이거즈 (1982~2000)
KIA 타이거즈 (2001~)
구단주 정몽구
사장 박한우[2][3]
단장 허영택
감독 김기태
홈 구장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22,244석)
월명야구장[4]
(11,000석)
2군 구장 기아 챌린저스 필드
워드 마크
KIA_Tiger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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킷 스폰서 마제스틱
홈페이지 공식 트위터

최종 우승
10회[5]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1996, 1997, 2009
역대 우승 엠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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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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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6] 1993년 1996년 1997년 2009년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
전북 현대 모터스
(남자 축구)
KIA 타이거즈
(야구)
울산 모비스 피버스
(농구)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남자 배구)
수원 현대건설
(여자 배구)
현대제철 레드엔젤스
(여자 축구)
현대제철 남자양궁단 현대모비스 여자양궁단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1982-OB 베어스 해태 타이거즈 1984-롯데 자이언츠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1985-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 1990-LG 트윈스
1991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1990-LG 트윈스 해태 타이거즈 1992-롯데 자이언츠
1993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1992-롯데 자이언츠 해태 타이거즈 1994-LG 트윈스
1996년,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1995-OB 베어스 해태 타이거즈 1998-현대 유니콘스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2008-SK 와이번스 KIA 타이거즈 2010-SK 와이번스

Contents

1. 개요
2. KIA 타이거즈의 탄생
2.1. 갑자기 치솟은 선수 연봉
2.2. 닥쳐온 경제 한파
2.3. 팔고 팔고 또 판다
2.4. 제발 사가 주세요
2.5. 탄생, KIA 타이거즈
3. 우승 경험
4. 팀의 역사
4.1. 연표
4.1.1. 인수 초창기 (2001~2004)
4.1.2. 타이거즈의 2차 암흑기 (2005~2008)
4.1.3. 어메이징 타이거즈 (2009년)
4.1.4. 2010년
4.1.5. 2011년
4.1.6. 타이거즈의 3차 암흑기 (2012~2014)
4.1.7. 김기태 부임 (2015~)
4.2. 관련 기록들
4.2.1. 역대 성적
4.2.2. 역대 감독
4.2.3. 역대 단장
4.2.4. 역대 유니폼
4.2.5. 역대 등번호 리스트 (해태 시절 포함)
5. 선수단
6. 영구결번
7. 외국인 선수 선발
7.1. 투수
7.2. 타자
8. 이모저모
8.1. 선수 육성 체계
8.2. 인기도
8.3. 라이벌 팀
8.4. 신인왕 잔혹사
9. 홈 구장
10. 지역 연고 학교
11. 각종 이야깃거리
11.1. 사건 사고
11.2. 유명 타이거즈 팬
12. 관련 항목

1. 개요

KBO 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광주광역시. 본격 2위가 없는 팀.

한국 시리즈 10회 진출-10회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온 희귀한(…) 성적이다. 게다가 시즌을 2위로 끝마친 적도 전혀 없다. 엄밀히 따지면 1983년의 정규리그의 전후기 성적을 종합한 순위가 2위이며 단일 시즌 전에 전기리그나 혹은 후기리그에서 2위를 한 적은 있다. 또한 2002년과 2003년에는 페넌트레이스 2위를 기록했다.

또한 2014년 현재, 한국 프로야구 최다 우승팀이다. KBO는 공식 프로야구 우승을 한국 시리즈 기준으로 하기에, 2014년 기준으로, 프로야구 최다 우승팀은 페넌트레이스 최다 우승팀인 삼성 라이온즈가 아닌, 기아 타이거즈가 맞다.

팀 컬러는 초기에는 야수와 투수의 조화를 지향하였으나, 선동열의 등장 이후 투수에 올인하는 투수 위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통산 타점 기록도 무시무시하다.

팀의 상징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호랑이이며, 2010년 2월 2일 CI와 마스코트를 변경했다. 마스코트는 호돌이와 호순이. 88 올림픽의 호돌이가 아니다. 호순이는 핑크색. 혹자는 흰 색의 가짜 호돌이를 경기장에서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다.

해태 타이거즈의 경영 악화로 인해 (구)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인수하여 2001년 8월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굳이 기아라고 한글로 팀명을 표기하지 않는 것은 굶주린다는 의미의 기아(飢餓)가 연상되기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존재한다. 물론 KIA는 Killed In Action의 약어로 사용되는데 어차피 여긴 영미권 국가도 아니고 그럼 KIA가 아니라 기아여야지 애초에 내수시장을 염두한지라 그런 것까지 굳이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거 일일히 따지면 작명자체를 못한다. 어찌되었든 한글 내지는 한문인 기아는 영문자로, 영문 기반인 'Tigers'는 한글로 적혀있는 희한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맞춤법도 틀렸다. 타이거가 아니라 타이거로 써야 한다.

참고로 기아자동차에서의 '기아'는 '아시아에서 일어나다.'(起亞)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단어인 Gear를 일본식 발음대로 옮겨적은 것이기도 하다. 왠지 후자가 먼저고 전자는 나중에 만든 의미인 것 같지만 넘어가자 자세한 사항은 기아자동차 항목 참고.

2011년 모 기업이 새 CI 통합으로 인해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바뀜에 따라 팀명도 울산 현대 호랑이 현대 타이거즈로 바뀔 수도 있다는 예상이 있었으나 루머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는 모기업 이름이 아닌 모기업의 계열사명 중 하나를 딴 셈이 됐다. 두산그룹을 모기업으로 하는 구단이 한때 두산이 아닌 OB라는 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슷한 셈.

이는 현대자동차그룹 내부의 '1사 1구단' 정책에 따른 것이다. 모기업 중 가장 중심에 있다고 볼 수 있는 현대자동차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밑에 설명하겠지만, 덕분에 기아자동차가 타이거즈 구단을 맡으면서 본래 기아자동차 밑에 있었던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농구단을 같은 계열인 현대모비스에 넘겨야 했다.

2. KIA 타이거즈의 탄생

1990년대까지의 역사는 해태 타이거즈 항목 참조.

2.1. 갑자기 치솟은 선수 연봉

KIA 타이거즈의 탄생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1990년대의 야구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진원지는 당시 야구단을 창단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현대그룹이었다. 현대그룹은 프로야구 창설 당시 인천/경기/강원을 연고 삼아[7] 야구단을 창단할 것을 제안받았으나 당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88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한 직후라서 올림픽에 전념하기 위해 거절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의 거절이후 마땅한 연고가 없어서 고민했으나 인천에 공장을 가지고 있던 삼미그룹이 자진해서 나서면서 결국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되었다.

그 후 프로야구단 창단의 야욕을 드러냈으나 제 9구단으로 창단하기도 모호하고, 다른 팀을 인수하려고 해도 신통치 않아 현대 피닉스라는 실업야구단을 창단, 유망주들에게 당시로는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문자 그대로 선수들을 싹쓸이 해가는 일을 벌인다.

프로에서 족히 4~5년은 뛰어 지명도를 얻어야만 가능했던 꿈의 액수라고 알려진 1억대의 연봉이 프로 데뷔를 하지 않은 선수들에게 뿌려졌고 대다수의 유망 선수가 실업팀 쪽으로 전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통에 타 구단들은 유망주들을 모셔오고자 현대의 에스컬레이터식 금액을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충분한 선수를 확보한 현대 피닉스는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여 프로야구에 참가한다. 즉, 이젠 대놓고 선수를 비싸게 살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이다.

애초에 해태가 청와대의 압박에 의해 들어왔다라는 이야기가 많지만 사실과 다르다. KBO 리그 문서를 참조해보면 애초에 호남권은 금호그룹이 들어오기로 하였으나, 금호그룹의 회장이 '자녀가 내게 보고도 없이 추진했다'며 계획을 백지화해 졸지에 호남권에 야구단이 없어질뻔 했다. 태제과에서 호남 야구단을 하겠다고 하면서 가까스로 창단된 것. 당시 해태제과 회장이 야구에 관심이 많았고 이로 인해 창단했다. [8][9][10]

해태가 프로야구에 들어오자 부산·경남지역을 배정받은 롯데는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애초에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 업계 라이벌은 들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들어왔는데 롯데와 제과업계 라이벌인 해태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만 모종의 사건[11] 뒤에 롯데는 찬성을 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당시 재계 순위권으로 따져도 중위권인 해태 타이거즈가 제대로 된 운영을 할 리가 만무했고[12] 이는 매년 연봉협상에 난항을 거듭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지역위주의 신인 선발로 인해 당대 최고의 고교 야구팜중 하나인 호남팜을 모조리 휩쓸어 갈 수 있었고 김응룡 감독의 리더쉽, 그리고 열성적인 호남 지역 팬들의 응원등이 합쳐지며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2.2. 닥쳐온 경제 한파

돈싸움은 시작 되었고 마침 IMF가 슬슬 터지려고 해서, 구단주인 해태 그룹의 경제가치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해태와 상당한 친분이 있던 대우그룹이 인수를 시도했지만, IMF로 사이좋게 재정위기가 오자, GG치고 포기하였다. 그리고 대우그룹은 IMF 직격탄을 맞고 진짜로 그룹해체가 되었다.

2.3. 팔고 팔고 또 판다

팀의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해태가 선택한 방식은 선수의 재판매였다. 팀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선동열이종범일본에 팔아[13] 스카우트 머니로 어찌어찌 일년은 버텼지만 모기업인 해태그룹이 1998년에 부도가 나버려서 있는 선수, 없는 선수 모조리 팔아치우는 상황에 직면했다.

삼성 라이온즈가 이 시기에 선수를 대량으로 세트 덤핑구입을 하는 통에 '돈성'이란 이름을 굳히게 되었다.

2.4. 제발 사가 주세요

선수를 팔아치워, 정상적인 경기운행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오자, 한국 프로야구가 4팀 2리그제로 운영된다는 사실이 대두되었다.

간단히 말해, 한 팀만 빠져도 전반적인 밸런스가 엉망이 되는 상황에 빠진다는 것인데 프로야구 관계자들이 해태 타이거즈의 새 주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리그 판이 박살난 상태였고, MLB붐으로 인한 프로야구의 상징성이 약화되어 인수처는 나타나지 않았다.

포스코전라남도 광양시에 제철소를 가지고 있어 연고지 조건을 아슬아슬하게 갖추었기에 인수시도가 있었으나 포스코의 재정이 파탄난데다 포스코의 대주주들이 손해보는 행동을 하려한다며 업무상 배임으로 고발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기본적으로 포스코의 대부인 박태준 회장이 야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14] 프로야구 출범 시에도 대구·경북지역 연고구단으로 포스코가 거론되었으나 거부했던 역사가 있다. 그리고 IMF 이후 외국 펀드들이 주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별다른 수익도 없고 생산재 기업으로 뚜렷한 홍보효과도 기대하기 힘든 프로스포츠 투자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15]

광주시민들은 광주를 발판으로 성장한 금호그룹이 인수하기를 원했으나 금호그룹은 프로리그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금호그룹은 호남 지역색을 지우려 하는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KBO 창설 때도 삼양사와 함께 호남권 구단 1순위 기업이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거부했고, 97년도에 서울을 연고지로 한 프로리그 팀을 찾아보다가 관두었다고 한다. 뒤에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을 창단하지만 투자는 좆망. 결국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은 산업은행 산하 KDB생명으로 인수되어서 현재 구리 KDB생명 위너스가 되었다.

2.5. 탄생, KIA 타이거즈


타이거즈의 새 주인을 구하느라 하루하루 속을 태우는 와중에 구원의 손길은 갑자기 나타났다.

2001년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 회장이 오늘내일 할 즈음,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둘째 아들인 정몽구 회장이 현대카드,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등 일련의 계열사를 분리시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을 설립하는 속칭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는 금융법상 사소한 절차가 무시 되었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는데 정부가 OK사인을 내주어 왕자의 난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은 돌연 해태 타이거즈의 인수를 선언했다. 참고로 당시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기아차 측에서 인수를 거절했으나 이후 마음을 바꿔 인수하기로 결정 내린 사항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룹 설립 과정에서 사소한 절차가 무시된 것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정부에서 해태 타이거즈 인수를 요청했다는 카더라가 있지만, 실제로 정몽구 회장은 인천을 떠나 수원에서 유랑 생활을 하던 자신의 동생 구단인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려고 접근했다고 한다. 허나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는 그야말로 오늘내일 하던 상황이라 인수 대금으로 현대 유니콘스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했을 때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었던 900억원을 불렀는데, 이것에 정나미가 떨어진 정몽구 회장은 현대를 쌩까버리고 비교적 싼 가격을 부른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당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지불한 인수 대금은 채권은행인 조흥은행에 180억, KBO 가입기금 30억으로 총 210억원이었다. 광주기아자동차 공장(구 아시아자동차 본사)[16]이 있어서 지역 연고 요건을 갖추었다.[17] 이에 따라 1사 1팀 정책 때문에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농구단은 현대모비스로 이관되어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로 탈바꿈했고 현대자동차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만 전담하게 되었으며, 현대자동차 배구단[18]대캐피탈로 이동, 현재의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로 탈바꿈했다.

안티팬들의 경우 KIA 타이거즈의 출범을 놓고 어째서 KIA가 해태의 V9를 가져가려고 하는거임? KIA가 우승하면 V1 아님? 이라는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KIA 타이거즈의 출범 경로는 SK 와이번스넥센 히어로즈같이 해체된 의 선수들과 계약해서 신규창단한 것이 아닌 과거 LG그룹MBC 청룡인수해서 창단한 전례를 따르고 있어,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계승한다.[19] 넥센과는 다르다 넥센과는

즉 KIA 타이거즈는 해체 후 신규창단이 아닌 인수 후 창단 형식이기 때문에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가게 되는 것.

그런데 창단 30주년이 되는 2011년에 구단에서는 창단 10주년이라는 드립을 쳤다. KIA로 이름이 바뀐 것만을 기념하면 10주년이 맞지만, 엄연히 해태를 계승한 구단이기에 의아하게 생각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MBC를 인수하고 홈페이지 역사관에서도 전신 시절 언급을 하지만 구단사를 가리켜 23년이라고 하는 LG와 같은 식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인수/인계 경험이 있는 구단 중 전후 모두 우승 경험이 있는 구단은 타이거즈가 유일하다. 현대는 우승을 한 적이 있으나, 삼미, 청보, 태평양 시절에 한 적은 없다. 역시 트윈스도 청룡 시절 우승 경험은 없다.

3. 우승 경험

전신 해태 타이거즈 시절을 포함하여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10회 우승을 일군 팀이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의 우승은 선동열 버프로 얻었단 평을 받아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고 있으나 선동열 이전에도 1983년에 우승한 적이 있고, 선동열이 팀을 떠난 후에도 이종범 등 다른 선수들의 활약으로 인해 1996~1997년에 다시 2연패를 달성했고, 의외로 선동열은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해서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에 대해 선동열 버프를 거론하는 것은 미묘하다.

한가지 확실한 건 페넌트레이스에서 선동열 버프를 쪽쪽 빨아먹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무엇인고 하니 잘 던지는 선동열을 선발로 하루 등판시켜서 며칠씩 쉬게 하느니 선발, 불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막 써먹었다는 것이다. 선발이 일찍 무너지거나 무너질 기미가 보이면 바로 올려서 몇이닝씩 던지게 하고 심지어 컨디션이 엉망인 날에도 상대팀 기죽이기를 위해 불펜에서 몸을 풀게 했을 정도. 실제로 선동열은 프로 통산 367경기에 출장했지만 선발로 출장한 경기는 109경기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 당시에는 에이스 투수고 나발이고 마구잡이로 굴리는게 관례였다.

역대 우승 년도는 1983년, 1986~1989년, 1991년, 1993년, 1996~1997년, 2009년이고,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한국시리즈 4년 연속 우승 기록은 깨지기 힘들 기록이라는 평을 받았었다. SK 와이번스가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이렇게 4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3번 우승하며 이 기록에 도전하였으나 2009년엔 바로 KIA 타이거즈가 SK의 승리를 막으며 타이거즈의 V10을 찍었다. 그러나 결국 이 4년 연속 우승 기록은 후에 2011년~2014년까지 한국시리즈를 연속 우승한 삼성 라이온즈가 타이 기록을 세웠다.[20]

2009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만 하면 한번도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는 징크스가 있다.[21] 즉, 우승은 무려 10번이나 했는데 희한하게도 준우승이 한 번도 없다. 홍진호이(가) 싫어합니다.

4. 팀의 역사

4.1. 연표

4.1.1. 인수 초창기 (2001~2004)

2001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KIA 타이거즈로 출범하였다. 출범과 동시에 농구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서 경험을 쌓은 프런트를 대거 이동시키며 해태 타이거즈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훗날 타이거즈에게 최하위를 선사하고 짤려버린 정재공 전 단장이 처음 부임한 것도 이 시기.

그 다음 날 인천 도원구장에서 KIA 타이거즈의 이름으로는 첫 경기를 가졌다. 상대는 SK 와이번스. 그리고 이 경기는 이종범이 타이거즈로 돌아오는 경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동명채종범의 맹활약으로 2:6으로 패배했다. 그리고 채종범은 2008년에 KIA로 오는데.. 2001년 시즌은 유례없는 4강전쟁의 해였다. 삼성, 현대, 두산의 3강은 일찌감치 굳혀졌고 나머지 한자리를 놓고 5개구단이 싸움을 벌이던 해였다. 타이거즈가 해태유니폼을 입을 때는 6월까지 두산과 엎치락거릴정도로 선전했으나 7월이후 급격히 힘을 잃었다. 장성호김종국. 그리고 해태의 마지막 4번타자 산토스에다 이종범이 돌아온 타선은 강했으나, 선수층이 얇았던 투수진이 과부하에 걸림으로써 10점을 내고도 11점을 내주며 지는 경기가 많아졌다. 결국 한화와의 마지막 2연전 중 첫 게임에서 패배, 그 다음 경기에서 이겼지만 0.5게임 차이로 한화에게 가을잔치티켓을 넘겨주며 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2002년부터 일본에서 돌아온 이종범, 한참 전성기에 돌입한 장성호,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그 시즌 도루왕을 했던 김종국 등이 팀의 주축이 되며 시즌 초반부터 상위권에 랭크되며 잘 나갔다. 투수진에서는 7억 신인 김진우와 용병 듀오 다니엘 리오스, 마크 키퍼, 암흑기 에이스였던 최상덕, 삼성에서 돌아온 이강철이 있었다. 8월 들어 5년만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달리기도 했으나 9월 들어 폭풍 연패를 하며 결국 삼성 라이온즈에 1위를 내주고 페넌트레이스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22]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던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패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당시 김성한 감독은 고질적인 마무리 문제 때문에 김진우를 마무리로 돌렸는데,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말았던 것. 마지막 5차전이 압권인데, 장성호의 투런으로 앞서가던 KIA는 김진우가 구원으로 올라와서 폭풍처럼 두들겨맞으며 패배한다. 김진우는 마운드에서 불을 질렀고, 박용택에게 홈런 맞은 후에 열받은 KIA팬 아재들은 관중석에 진짜로 불을 질렀다.(…)

2003년 시즌을 앞두고는 정성훈과 현금 10억을 현대 유니콘스로 보내면서 박재홍을 영입하였고, 이 트레이드가 성사된 다음날 은퇴 파동을 일으킨 손혁김창희두산 베어스에 내주고 진필중을 영입하는 등 스토브리그의 큰 손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

하지만 어째 시즌 초반에는 엇박자를 내며 중위권에 랭크되었다. 재계약한 마크 키퍼의 부진이 두드러졌고, 박재홍 역시 시즌 초반에 가벼운 부상을 당하며 썩 페이스가 좋지 못했던 것. 허나 반전이 일어났다. 마크 키퍼를 두산으로 넘기고 대체 용병으로 들어온 마이클 키트 존슨이 후반기에만 8승을 거두며 팀의 상승세를 주도했던 것. 그 덕분에 당시 승승장구를 달리던 현대 유니콘스를 잠시 제치고 1위를 하기도 했으나, 결국 0.5게임 차로 선두를 뺏겼다. 흔히 KIA가 이 시즌 막판에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해서 선두를 빼앗겼다고 아는 팬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시즌 자체가 순위는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를 택한 시즌으로 기아는 손해를 보았다.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SK전에서 승리하면 승률에서 현대를 앞설 수 있었지만 다승제였기 때문에 승리에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그해 전경기 출장이었던 이종범도 결장했다.[23]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했던 경기는 5월 27일 경기였다.[24]

플레이오프에선 당시 조범현 감독이 지휘하던 SK 와이번스에 3패로 쳐발리며 또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였다.(…) 이렇게 캐발린데에는 김성한 감독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한몫을 했다. 김봉근 투수코치를 의견 충돌로 잘라버리자, 조범현 감독은 짤린 김봉근 투수코치를 낼름 영입했던 것. 그덕에 KIA 투수들의 약점이 속속히 조범현 감독에게 들어갔고 그 덕에 조범현 감독은 KIA를 농락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2004년에는 FA로 풀린 마해영을 영입하며 또다시 스토브리그에서 총알을 소비하여 팬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안겨줬다. 허나 마해영은 삽질을 거듭했고, 김성한 감독이 경질되는 등[25] 어수선한 시즌을 보내다 페넌트레이스 4위로 마감. 허나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 2패로 탈락했다.[26]

그러나 극악의 2차 암흑기가 도래할 줄 누가 알았으랴...

4.1.2. 타이거즈의 2차 암흑기 (2005~2008)

2005년 시즌 들어서는 팀 캐미스트리를 저해하던 박재홍SK 와이번스로 보냈고, 2003년 시즌 후반기에 활약했던 마이클 키트 존슨을 다시 데려오는 등 의욕적으로 시즌을 맞이했다. 그리고 소소경과 이원식을 내주고 홍현우를 다시 데려오는 트레이드도 했는데, 이 트레이드는 훗날 KIA팬들이 LG팬들에게 사랑해요 LG라고 놀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홍현우 덤으로 껴온 선수가 바로 이용규.

하지만 시즌 초반부터 영 좋지 못하더니 결국 5월에는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FA로 영입했던 선수들은 거대한 똥을 싸 버리고 말았고, 그나마 LG에서 트레이드 된 이용규와 전년도 부진(AVG 0.260)에서 벗어난 이종범이 3할-20도루를 하며 분전했지만 붕괴된 투수진은 어찌 막을 도리가 없었다.[27] 결국 유남호 감독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 서정환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2005년 시즌을 꾸려갔다. 이 와중에 다니엘 리오스를 두산에 넘겨주고 전병두를 받은 후 세스 그레이싱어를 새 용병으로 데려오기도 했다.[28]

팀은 개박살난 상황에 그나마 얻은 수확은 우익수 자리를 꿰찬 이용규, 중간에서 노예질을 하던 윤석민이었다.

2006년 시즌엔 서정환 감독이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고, 골칫거리였던 마해영LG 트윈스로 보내는 데 성공했으며[29] 10억 신인 한기주가 입단하는 등 나름대로의 기대를 품게 했다. 상대적으로 약한 공격력[30] 을 투수력[31] 으로 상쇄하며 시즌 내내 4, 5위를 왔다갔다 하다가 시즌 막판 두산 베어스와의 3연전을 모두 승리하면서 4강행 막차에 탑승했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 1승 2패로 패하며 탈락하였다.[32]

2007년 시즌에는 시즌 도중 메이저리그에서 최희섭이 돌아왔으나[33], 투수진의 줄부상과 공격력 약화로 인한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서정환 감독의 서머리그 우승이라는 무의미한 목표를 향한 선수 혹사 및 부상이 겹쳐, 최하위의 원인이 되었다. 대들보였던 장성호의 3할 커리어가 끊기는 등 경기 외적인 악재도 수더분하였으며, 이 당시 성난 팬들은 단장인 정재공의 퇴진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걸었다가 정재공 단장이 보낸 용역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기도 했다. 급기야 훗날 LG 프런트들이 쌍둥이마당을 닫아버린 것처럼 호사방을 폐쇄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저지르고 말았다. 2004년 이후 롯데가 4연꼴 사슬을 끊자마자 2년 간격으로 LG와 꼴찌를 나눠먹기 했는데, 결국 이로 인하여 엘롯기라는 고유명사가 생겼다. 그래도 2000년대에 엘, 롯보다는 포스트시즌을 많이 갔건만.. 역시 꼴찌 나눠먹기가 컸다. 결국 정재공은 2007년 시즌을 끝으로 경질당했고, 후임으로 김조호가 취임하게 되었다.

2008년 시즌에는 서재응이 팀에 합류하고, 조범현이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나, 일찌감치 선수층이 무너져버린 터라 팬들도 좋은 성적보다는 리빌딩이나 잘 하길 기대하였다. 물론 해태 성골도 아닌데 어떻게 감독 자리를 맡겼냐며 비난하는 호사방 아재들도 있었다 출발은 좋지 못했다. 시즌이 시작되자 최희섭이 뇌진탕 후유증으로 인한 두통으로 삽을 들었고, 장성호 역시 잔부상에 시달렸다. 게다가 김상훈 역시 큰 부상당해 차일목이 주전포수로 써야하는 등 팀에 먹구름이 잔뜩 꼈고, 팀은 5월 초까지 쭉 꼴찌를 달렸다. 하지만 5월 중순부터 최희섭을 대신해 재주리게스이재주가 4번타자를 맡기 시작하고 윤석민이 에이스로 등극, 유망주 수준이었던 이범석이 호투를 펼치며 선발진에 진입하며 점점 순항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5월 말부터는 히어로즈LG 트윈스를 제치고 5-6위권을 형성했다. 심각하게 부족했던 공격력을 투수력으로 상쇄하는 야구를 펼치며 4위를 내다보나 했으나,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힘이 떨어졌다. 시즌 막판에는 무리한 4강 싸움 대신 1.5군을 돌리면서 경험을 주는 형태로 운영하였고 6위로 시즌을 마쳤다. KIA로 바뀐 이후 2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하지만 손영민, 양현종이 급부상했고 전반기에 부진했던 대졸신인 나지완이 후반기에는 맹타를 휘두르며 팀에 가세했으며 고졸신인 김선빈이 그간 공백이었던 키스톤 자리[34]를 메꿀 유망주로 기대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성적은 8486. 가을야구를 했던(2004년, 2006년 시즌) 이듬해에 최하위를 찍은 양상이 반복되었다. 그 덕분에 양현종안치홍을 얻었다.[35]

4.1.6. 타이거즈의 3차 암흑기 (2012~2014)

조범현 감독이 준플레이오프 탈락을 빌미로 경질당하고,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선동열이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조범현 감독이 16연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롯데와 4강을 두고 다투는 뒷심을 발휘한 반면, 선동열은 선수단을 아예 새로 짜는 수준의 개혁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암흑군주라는 평만 듣고 말았고, 재계약을 확정지었다가 팬덤에 밀려 3일 만에 자진사퇴했다. 후임으로 김기태감독이 취임하였으나 2015년 3월 특별지명으로 이대형 지명, 연습경기 9경기 103실점 등으로 분위기는 좋지 않다.
2015년에도 포스트시즌 탈락을 하게 된다면 1998년부터 2001년까지의 4년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 기록(5-7-6-5)과 타이기록을 세우게 된다.

4.1.7. 김기태 부임 (2015~)

588이라는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선동열과 재계약을 추진하자 결국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선동열 감독은 자진 사퇴라는 모양새로 퇴임하고, 그 자리에 김기태 전 LG 감독을 선임하였다. 애초에 김성근 감독을 원했던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일부 팬들은 김기태 감독이라면 그래도 팀을 잘 수습해 줄거라는 기대아닌 기대를 표하는 중이다.

4.2. 관련 기록들

4.2.1. 역대 성적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시즌
­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연도 페넌트레이스 순위 최종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1982년 4위/6팀[36] 4위 해태 타이거즈 80 38 42 0 0.475
1983년 2위/6팀[37] 우승 100 55 44 1 0.556
1984년 5위/6팀[38] 5위 100 43 54 3 0.443
1985년 3위/6팀[39] 3위 110 57 52 1 0.523
1986년 2위/7팀[40] 우승 108 67 37 4 0.644
1987년 2위/7팀[41] 우승 108 55 48 5 0.532
1988년 1위/7팀[42] 우승 108 68 38 2 0.639
1989년 2위/7팀 우승 120 65 51 4 0.558
1990년 2위/7팀 3위 120 68 49 3 0.579
1991년 1위/8팀 우승 126 79 42 5 0.647
1992년 2위/8팀 3위 126 71 54 1 0.567
1993년 1위/8팀 우승 126 81 42 3 0.655
1994년 3위[43]/8팀 4위 126 65 59 2 0.524
1995년 4위/8팀 4위[44] 126 64 58 4 0.524
1996년 1위/8팀 우승 126 73 51 2 0.587
1997년 1위/8팀 우승 126 75 50 1 0.599
1998년 5위/8팀 5위 126 61 64 1 0.488
1999년 7위/8팀[45] 7위 132 60 69 3 0.465
2000년 6위/8팀[46] 6위 133 57 72 4 0.442
연도 페넌트레이스 순위 최종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2001년 5위/8팀 5위 KIA 타이거즈 133 60 68 5 0.469
2002년 2위/8팀 3위 133 78 51 4 0.605
2003년 2위/8팀 3위 133 78 50 5 0.609
2004년 4위/8팀 4위 133 67 61 5 0.523
2005년 8위/8팀 8위 126 49 76 1 0.392
2006년 4위/8팀 4위 126 64 59 3 0.520
2007년 8위/8팀 8위 126 51 74 1 0.408
2008년 6위/8팀 6위 126 57 69 0 0.452
2009년 1위/8팀 우승 133 81 48 4 0.609
2010년 5위/8팀 5위 133 59 74 0 0.444
2011년 4위/8팀 4위 133 70 63 0 0.526
2012년 5위/8팀 5위 133 62 65 6 0.488
2013년 8위/9팀 8위 128 51 74 3 0.408
2014년 8위/9팀 8위 128 54 74 0 0.422
2015년 -/10팀 -위 144
KBO 통산 33시즌 V10 3795 1978 1734 83 0.525

그외 사항은 KBO 리그/역대 팀 스탯 항목 참조.

4.2.2. 역대 감독

역대 이름 재임기간 재임시 성적
초대 김동엽 1982년 시즌[47]
2대 김응용 1983년 시즌 ~ 2000년 시즌[48] 1164승 934패 51무
3대 김성한 2001년 시즌 ~ 2004년 시즌[49]
4대 유남호 2005년 시즌 [50]
5대 서정환 2006년 시즌 ~ 2007년 시즌
6대 조범현[51] 2008년 시즌 ~ 2011년 시즌 267승 254패 4무
7대 선동열 2012년 시즌 ~ 2014년 시즌 167승 213패 9무
8대 김기태 2015년 시즌 ~

김응용 감독의 장기 집권으로 코치나 2군 감독들이 기를 펴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실제로 김응용 감독이 코치와 2군 감독을 꽤나 돌봐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간에 한 감독이 징하게 오래한 건 사실이다.

4.2.3. 역대 단장

  • 정재공 - 2001 ~ 2007
  • 김조호 - 2008 ~ 2013
  • 허영택 - 2014 ~

정재공 단장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적극적으로 프런트가 현장에 개입하도록 하는 스타일이었다. 이 시기에 모기업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많이 얻어내고 FA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등 구단 운영에 대한 열정만은 진짜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나친 현장 개입으로 김성한 전 감독이 알력다툼 끝에 옷을 벗는 일이 있었고 FA로 영입한 선수들이 먹튀가 되면서 평가가 급락하기 시작, 2007년에 팬들과의 충돌로 퇴진 압박을 받으면서 경질되고 말았다.

김조호 단장의 경우, 정재공과는 달리 현장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내부 행정에만 신경쓰는 스타일이라 비난의 목소리가 크지는 않은 편이다. FA 영입에 소극적인 편이지만, 현장에서 꼭 필요로 한다면 과감히 영입하고 있다. 오히려 FA에 너무 소극적이라며 김조호구라고 놀림받는다 다만 2013년 전라북도 연고지 문제[52]로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 2013년 시즌 종료 후 단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상근 자문직을 맡게 되었다.

기아자동차 슬로바키아 공장 관리직에 있었다 단장으로 들어온 허영택 기아자동차 상무는 2005년 10월부터 2007년 1월까지 타이거즈 부단장으로 있었던 임직원. 선동열 감독의 2014년 시즌 이후 재신임 관련 인터뷰에서 무책임한 발언으로 KIA 팬들의 미움을 사고 있어서 부단장 시절 정재공 단장에게 안 좋은 것을 배웠다는 반응이 거세다.

4.2.5. 역대 등번호 리스트 (해태 시절 포함)

6. 영구결번

KIA 타이거즈 영구결번
No.7 이종범

KIA 타이거즈 영구결번
No.18 선동열

영구결번에는 7번과 18번이 있는데 이종범이 달고 뛰었던 7번은 영구결번이 확실하나, 18번의 경우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18번은 해태 타이거즈의 영구결번이었으나 구단이 KIA에 매각되면서 눈치 없는 KIA의 프런트진이 해태잔재 없애기의 일환으로 영구결번을 없던 걸로 하고 당시 유망주이자 신인 최고액 계약금을 받았던 김진우에게 주려고 했던 것. 하지만 이를 알게 된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면서 결국 KIA에서도 영구결번으로 남게 되었다. 정작 18번을 잠깐 받았던 김진우도 구단이 주니까 받기는 했지만 부담이 되었던 눈치. 선동열 본인이 KIA 감독으로 복귀할 때 이 번호를 되살리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영구결번의 취지를 살리고자 감독 선동열에겐 90번이 갔다. 다행

7. 외국인 선수 선발

7.1. 투수

과거 해태 타이거즈의 팀 컬러였던 투수 위주의 팀 컬러답게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는 투수 용병을 잘 뽑기로 유명하다. 해태 시절을 포함, 투수 용병에 있어서는 게리 레스[53], 약쟁이다니엘 리오스, 변화구 구사가 뛰어났던 마크 키퍼, 캐나다 국가대표 마이클 키트 존슨, 일본으로 건너가 더 좋은 활약을 한 세스 그레이싱어, 2009년 KIA 타이거즈의 V10을 이끌었던 아킬리노 로페즈릭 구톰슨 등 쟁쟁한 외국인 선수들이 많았다. 게다가 2010년 이후 야구계의 용병농사가 외국인 투수에 집중되면서 더욱 돋보인다. 타선이 시망이라서 그렇지 매년 10승급 외국인 선수를 데리고 올 정도.

2012년에 아킬리노 로페즈를 포기하면서까지 데려온 앤서니 르루호라시오 라미레즈가 시즌 초반 부진하고, 결국 호라시오 라미레즈헨리 소사로 교체되면서 팬들을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이후 앤서니와 소사 모두 선발로서의 제 역할을 다해주면서 어느 정도 우려는 불식되었다. 하지만 팀 성적은 시망... 2013년에는 희대의 설레발 디버프로 본인들 성적마저 수직하락했다.[54]

2014년에는 NPB 다승왕 경력이 있는 데니스 홀튼을 선발 투수로, 마이너리그에서 수년간 마무리로 경험을 쌓았던 하이로 어센시오를 영입하였다. 홀튼은 시즌 초부터 선발진의 한 축을 이루며 좋은 성적을 낸 반면, 어센시오는 마무리로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기대보다는 불안한 피칭 내용을 보이며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그래도 시즌을 거듭할수록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제대로 망한 2013년을 제외하면 그래도 외국인 투수를 보는 스카우터의 능력은 좋다고 평가받았다.

그리고 헨리 소사가 넥센에서 다시 대활약을하며 역시 투수는 잘 뽑는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선수 활용은 별개의 문제지만 각동님이 까이고 있는건 덤

7.2. 타자

투수 쪽에서는 꾸준히 평타 이상을 쳐주는 반면 타자 용병은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뽑기운이 없었는데, 그나마 해태-KIA 역사상 제 몫을 해줬던 타자 용병이라면 1999년 해태에서 뛰었던 트레이시 샌더스, 윌리엄 브릭스, 2000년에 대체 용병으로 들어와 쏠쏠한 활약을 했던 준족의 똑딱이 헤수스 타바레스[55], 3할에 20홈런을 넘겼던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 그리고 2012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소유자인 2014년 외국인 타자 브렛 필 정도밖에 없다.(…)

이로 인해 이름이 로 끝나는 외국인 타자를 데려오면 성공한다고 말했지만 밑에 서술된 윌슨 발데가 그 전통을 깨뜨리고 말았다.(…)

해태-KIA 타이거즈의 타자용병 잔혹사를 설명하자면, 이미 전설이 된 숀 헤어는 일단 논외로 두고, 2000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던 호세 말래브와 에디 피어슨부터 시작해야 할 듯 싶다. 호세 말래브는 입국 당시 총기를 소지하였던 것이 들통난 데다 실력마저 신통치 못해 시즌 시작도 전에 짐을 쌌으며 에디 피어슨은 1999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면서 실력은 검증받았지만 당시 해태의 열악하기 짝이 없는 대우에 실망해 자기 스스로 짐을 싸서 나왔다.(…) 그 대체 용병으로 제이슨 배스와 일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뛰었던 내야수 아르키메데스 포조를 데려왔으나 제이슨 배스는 좀 하다 싶더니 부상으로 짐을 쌌고, 포조는 시즌 초반 부진하자 곧바로 쫓아냈다. 여담으로 포조는 해태에서 쫓겨난 후, 해태의 열악한 대우에 대해 자신의 에이전트를 통해 항의하기도 했다.

2002년 KIA 타이거즈로 바뀌고 첫 풀시즌을 치렀을 땐 멕시칸리그 홈런왕 출신 워렌 뉴선을 데려왔는데, 이 선수는 키는 엄청 작은데 거포스윙을 남발하다 폭삼만 당하며 결국 퇴출. 후임이었던 루디 펨버튼도 마땅한 수비 포지션이 없어 지명타자로만 나왔으나 성적은 썩 좋지 못했다.

그 후 KIA 타이거즈는 외국인 타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2006년 참으로 오랜만에 영입하게 되었는데, 그 주인공은 중장거리포 내야수 마이크 서브넥이었다. 그러나 서브넥 역시 실패하고 말았는데, 타율도 타율이지만 특히 한국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컸다.[56] 그 후임이었던 스캇 시볼은 1할대의 타율을 보여주며 서브넥보다 더 못했다.(…)[57] 웃기는 건 시볼의 경우는 KIA 타이거즈를 나온 후 2007년엔 AAA에서 뛰며 박찬호에게 홈런을 뽑아내기도 했고, 2008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성호이용규이런 대화를 한 적도 있다. 나중에 시볼 본인이 "한국에서의 생활은 괴로웠다. 한국어에는 나의 이름과 비슷한 욕이 있다. 그것이 연호될 때 정신적인 데미지는 상당한 것이었다. 특히 혼자 한국에 갔기 때문에 더욱 힘든 시간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저것이 부진의 이유였는지도...

2007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에서 홈런왕을 했던 래리 서튼을 영입했다. 나이가 많고 무릎이 좋지 않아 전년도엔 지명타자로 뛰었으나 KIA로 오면서 좌익수 수비에 들어갔고, 그나마 타율은 괜찮았으나 득점권 타율이 처참했고 장타력마저 떨어지면서 최희섭이 KIA에 입단하자마자 퇴출되었다. 서튼은 KIA 타이거즈를 끝으로 은퇴했는데, 2008년 시즌 종료 후 새로운 외국인 선수를 물색하던 KIA 타이거즈에 이 선수를 추천해줬다.

2008년에는 유격수 홍세완의 공백 때문에 메이저리그 경력이 있던 윌슨 발데스를 영입했다. 시범경기만 해도 빠른 발과 쏠쏠한 타격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똑딱이인 주제에 큰 스윙을 가져가고 수비마저 정줄 놓은 수비를 보여주며 일찌감치 퇴출되고 말았다. 이 선수는 KIA에서 퇴출된 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대체 용병으로 입단하였으나 거기서도 퇴출. 이후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거쳐 신시내티 레즈에서 활약하였다.(…) 그냥 동양 야구와 안 맞았던 모양.

2014년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가 3명 보유 2명 출장으로 늘어나면서, 6년만에 타자 용병을 영입했다. 그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뛰던 브렛 필. 이전까지의 타자 외국인 잔혹사 때문에 의혹을 가지기도 했고 실제로 시범경기까지는 부진했지만, 그리고 나지완은 미디어데이에서 필을 까며 흑역사를 제조했다.

브렛 필은 현재 5월 13일 경기까지 리그 최상위급 스탯에(OPS가 무려 1.000 이상) 중요한 시점마다 영양가 넘치는 홈런을 때려내며 말라 죽어가는 기아 타선에서 돋보이는 타격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정도로 잘해주니 팬들 사이에서는 샌프에서 대려갈까봐 살살 치라는 의견까지 생기는 중이다.

아무튼 필은 마침내 타자 잔혹사에 마침표를 찍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2014년 61게임을 치른 지금.. 페넌트레이스에서도 딱 중간인 현재 타자들 타율이 .296이다.. 타고투저라곤 하지만 이건 역대 타이거즈 기록인 1988년의 .283을 능가할듯..

8. 이모저모

8.1. 선수 육성 체계

일단은 KIA 타이거즈는 2010년부터 8개 구단 최초로 3군 체제를 시작한 팀이다. 하지만 창설 초기에는 무늬만 3군이라는 성격이 매우 강했다.(...) 일단 2군 시설부터가 낙후되어 있던 상황이니 막 생긴 3군 시스템의 모습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12년 말에 완공된 함평 육성전용구장이 완공되기 전까지 함평 전남야구장#을 임대하여 2군 구장으로 사용하였던 기아 타이거즈 2군은 그야말로 이었으며(...) 전용구장이 완공된 이후에도 함평군의 훈련시설이 아직 완공 전이라 육성체계가 완성되지 못한 탓에 2012년까지는 잔류군 및 재활군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선동열 감독 체제 이후로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신인들을 많이 뽑고 신고선수들도 많이 영입하여 3군 체계를 강화시켜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하면서 경쟁을 통해 훌륭한 팜 시스템을 구축하여 제 2의 이준호나, 넥센의 서건창 등을 발굴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12년 시즌 후반기에 고양 원더스 소속의 외야수 강하승을 신고선수로 영입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군 총괄코치가 3군까지 전체적으로 선수단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또한, KIA는 코칭스태프 체계에서 2군 감독이 따로 없고 1군 감독이 2군, 3군까지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따른다. 대신 2군 총괄코치라는 일종의 수석코치 및 감독대행을 두어 관리하는 체계. 그만큼 1군 감독이 2군과 3군까지 세밀히 점검을 하면서 모든 선수단의 운영을 관리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더욱이 선동열 감독 체제가 들어서면서 선수 육성에 대한 의미를 더욱 강조하면서 경쟁 시스템 구축이 가속화 될 전망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함평에 좋은 시설이 들어서고 무한 경쟁체제가 확립되어 좋은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야지만, 그리고 선동열 감독 이후의 코칭스탭진이 2군 및 3군 육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2012년 시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선 감독이었지만, 그의 부임 이후 육성군 체질 개선으로 2군이 좋은 성적은 얻은 것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일단 최초로 3군이라는 단어를 도입하고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산물이었던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가 완공되면서 선수 육성의 하드웨어는 갖춰진 상태이다. 다만 그 선수를 발굴하는 코치나 스카우터가 좋지 않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챌린저스 필드 클럽하우스 완공이 늦어진 상태에서 2군 코치진들이 새로운 선수 발굴에 실패한 결과 2013년 시즌의 참담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그나마 2군 시스템과 인프라는 어느정도 개선은 된 편이지만 별개로 재활시스템은 9개 구단중 최악으로 꼽힌다.아직 갈 길이 멀다...

8.2. 인기도

프로야구가 태동한 1980년대에 5번의 우승을 거머쥐었으며 한국 최초의 어린이 야구단 사업을 시작, 철저한 팬관리를 통해 전성기에는 원정가서 홈경기를 벌이는 팀이었다.

하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몰락과 더불어 성적이 예년만 못해지자 예전에 비해 팬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전국구 인기구단이며, 잠실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엄청난 관중 동원을 보장하고 있다. 오랜만에 승승장구하며 1위를 달렸던 2009년에는 잠실, 문학, 목동 가릴거 없이 엄청난 관중이 모여들었다.

잠실의 경우 농담삼아 제2의 홈구장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이고 그 외에 목동, 문학에서도 공격 때 응원소리가 홈팬들 못지 않게 크게 들린다. 그리고 2015년부터 추가된 수원 원정 때 역시 마찬가지. 한마디로 수도권에서는 사실상 중립경기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홈 구장 관중 동원이 원정보다 적어 이것을 떡밥으로 물은 안티 팬들이 홈도 못 채우는 주제에 무슨 인기구단이냐? 라는 이야기를 한다.[58] 어마어마한 원정 관중에 비해 상대적으로 홈 구장 관중이 적은 이유는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과 맞먹는 열악한 무등야구장의 시설과 상대적으로 적은 광주광역시 인구 탓이라고 할 수 있겠다.[59] 그리고 원정 KIA팬들이 잠실이나 문학구장을 잔뜩 채울 경우 이 관중수는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고 죄다 홈팀 관중으로 집계되는 문제도 있어 관중 집계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원정관중 동원은 2011년에 1위로 나타났다.

그리고 박동희 기자가 쓴 기사라든가 여타 을 보면 기아가 프로야구 중계 시청률 1위를 달린다는 집계가 종종 등장한다.

이런 근거를 내놓아도 몇몇 어그로나 안티팬들이 여전히 상황을 부정하는 탓에, KIA 타이거즈 갤러리 같은 곳에서는 아예 스스로 비인기구단 드립을 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구단이 인기가 없잖아요

2014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가 완공된 후 평균관중수 1위를 기록중. 성적도 좋지 않지만 팬들이 이정도로 몰려오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울 따름. 호갱들 그간 열악했던 경기장 시설 때문에 팬들이 경기장을 안찾은 것일 뿐이라는게 확인 되었다.

성적 하락에 가속화가 붙은 6월부터는 관중수 감속화 역시 가속화 되었지만 66만으로 총 관중수 5위를 기록. 성적만 좋으면 80~90만도 가능할 듯. 지역특성상 100(평관 14,000명)만은 인구수나 원정관중 버프가 없기 때문에 힘들듯 싶다. 구도라고 불리우는 부산도 인구 350만에서 100만 넘길려면 4강 싸움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는데 (우승권 들어가면 200만도 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한데 홈관중 전경기 매진시켜도 200만은 안된다는게 함정 아닌 함정) 120만 인구에 광주가 100만을 넘긴다면 뭐 더이상 할말이 없다.

8.3. 라이벌 팀

1980년대 중후반은 번번히 한국시리즈에서 붙어서 승리한 삼성 라이온즈가 라이벌팀이었다. 삼성으로서는 정규 시즌에서 1위를 하고도 항상 한국시리즈에서 물먹었기 때문에 더더욱 억울했을 듯.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는 비슷한 콩라인으로 전락한 빙그레 이글스가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다.[60] 같은 제과업계 맞수였던 롯데 자이언츠 역시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중반 에는 90년대 급격히 떠오른 LG 트윈스와 라이벌 관계가 섰다. 특히 이 시기 잠실구장에서 LG와 해태의 대결에는 주중에도 매진이 될 때가 많았다.

KIA로 넘어가서는 딱히 라이벌팀이라고 할만한 팀은 없는 것 같다. 클래식 라이벌이라는 삼성은 기아와 라이벌이 되기에는 이미 너무 막강해졌고 1993년 이후로 서로 바이오리듬(..)이 맞지않아 포스트시즌에서 만난적이 없다.[61] 롯데와는 모기업이 바뀌어 제과업과 별 상관이 없고, 빙그레의 전신인 한화는 2010년대 완전히 몰락했고[62], 90년대 성적이나 최고인기팀에서 1,2위를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엘지와는 2000년대 들어 성적으로 접점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63]

다만 SK 와이번스가 4연속 한국시리즈 제패할 뻔 했던 것을 막았던 2009년에 사제 간의 대결로 라이벌 플래그가 생성된 적은 있었다.[64]

8.4. 신인왕 잔혹사

의외로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1982년 리그가 시작된 이래 가장 최우수 신인왕과 연이 지지리도 없는 팀이다. 1985년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거머쥔 이순철이 배출된 이후 2015년까지 30년동안 타이거즈에서 신인왕을 배출해내지 못했다(...) 10번의 우승을 거머쥐는 동안에도 빼어난 신인이 나오지 못하거나, 그 해에 신인왕에 버금가는 활약을 했음에도 그 해에 더 괴물같은 선수들이 타 팀에서 나오면서 인연을 맺지 못했다.
  •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이종범의 케이스로, 1993년에는 걸출한 스타급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한 해였고 특히 삼성 라이온즈의 교타자 양준혁과의 라이벌 구도가 그려졌다. 결국 신인왕 투표에서 양준혁에 밀려 신인왕 타이틀을 놓치게 되었다. 대신 이종범은 그 해 한국시리즈 MVP와 이듬해 리그 MVP로 신인왕의 설움을 풀기는 했다.
  • 2006년 최고 계약금 10억을 쥐고 입단한 한기주의 경우에도 데뷔후 선발 및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수준급의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 해에 혜성처럼 나타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거머쥔 괴물급 투수의 등장으로 묻혔다.
  • 2009년 최연소 올스타전 MVP와 한국시리즈의 숨은 공신으로 활약했던 안치홍 역시 그 해에 유일한 순수 신인으로 신인왕에 도전했으나 후반기에 접어들어 약점이 노출되어 삽질을 거둔 끝에 0.235라는 멘도사 라인 급의 타율을 기록했고, 결국 중고 신인인 이용찬에게 자리를 내줬다.

9. 홈 구장

KIA의 홈 구장으로 사용중인 곳은 다음과 같다.

11. 각종 이야깃거리

  • 2012년 시즌 들어서 롯데 자이언츠넥센 히어로즈 등 각 팀의 여성 경기보조요원(흔히 말하는 '배트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야구의 인기가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아지면서 또 다른 화제거리를 만드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구단의 인기요소가 되기 때문인데, KIA는 그런 거 없다. KIA의 경우에는 경기 보조요원을 지역의 유소년 야구 선수들을 활용하는데, 구단 측에서는 유소년 야구선수들이 경기에 보조로 참여함으로써 선수가 되기 전 프로야구 경험을 축적하여 선수 생활의 바탕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눈요기거리로써의 흥행보다도 유명한 야구 선수들을 직접 그라운드 안에서 보면서 선수로써의 꿈을 키우는 경험을 해준다는 차원에서는 나름대로 실속있는(?) 방침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보조요원으로 참여한 학생들에게는 소속 학교에 일 수당 5만원을 지급한다고 한다...였는데 2015 시즌부터 배트걸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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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2011년 올드 유니폼 데이 당시의 이종범.)

  • 다른 구단들과 달리 KIA는 유니폼 이벤트 데이에 매우 인색한 구단이다. 명문구단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잇는 구단임에도 불구하고, 해태 팬들의 올드유니폼데이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그 외에도 기타 특별 이벤트를 펼칠 때에도(타이걸스 데이 등) 두산 베어스롯데 자이언츠처럼 별도의 유니폼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다 2011년 KIA가 전반기를 1위로 마치면서 야심차게 프론트에서 처음으로 검정색-빨간색 조합의 올드유니폼 데이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하지만 이날 삼성 라이온즈에게 패하면서 좋지 않은 날로 남아있다.(...) 이후 유니폼이 바뀐 2012년에는 올드 유니폼데이를 실시하지 않았다가 2013년 8월 11일 또 다시 삼성 라이온즈 전에 실시했고, 이 경기에서는 이종환의 활약으로 승리하면서 올드 유니폼 착의 시 1승 1패를 기록했다.
    그 외에도 유니폼데이는 아니었지만 이종범의 은퇴 헌정경기로 열렸던 2012년 5월 26일 LG 트윈스와의 홈경기에서는 모든 선수가 7번 이종범 유니폼을 입고[66] 경기를 하기도 하였다.[67]

  • 2005년 이래로 시즌 개막전에서 전패를 기록하면서 2012년까지 8연패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보니 초반에 팀 분위기가 꼬이는 경우가 계속 발생하였으며 그 분위기가 계속 진행되면 팀 운영에 차질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그나마 2013년 무등야구장에서의 마지막 개막전에서 연패를 끊었지만, 그러다보니 KIA 타이거즈의 개막전 승률이 2012년까지는 0.393으로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고.#

  • 여담으로 한동안 재정이 어려워서 선수를 팔아야 했던 모 구단처럼 구단 상품들이 정말 안습한 수준이다.(...)##

  • 예전에는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감독을 뽑을때 해태 타이거즈 출신을 선호하는 일명 해태순혈주의를 고집하였다. 역대 감독들과 현재 김기태 감독, 조범현 전 감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태출신이였다. 하지만... 2009 시즌을 우승시킨 비해태출신 조범현감독은 2011년 전반기 1위에서 후반기 16연패에 따른 빗발치는 팬들의 원성. 결국 정규리그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결국 패배로 이어진 결과는 팬들의 원성에 조감독은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를 한다. 자진사퇴라 쓰고 경질이라 읽는다 그러나 구단과 팬들에게 이를 깨게 만든 장본인이 있었으니 2012~2014년 3시즌 감독을 맡은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해태출신인 선동열. 일명 감동님 하지만 3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과 처참한 성적은 감독 출신이 꼭 해태출신이 아니어도 된다는 해태순혈주의를 깨는 표본이 됐다.

11.1. 사건 사고

그 외에도 롯데, LG와 더불어 팬 많기로 유명한 구단이기에 그만큼 얘기거리도 많은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KIA 타이거즈/사건사고 항목 참조.

11.2. 유명 타이거즈 팬


유난히 KIA 팬들 중에서 코미디언이 많이 눈에 띄는 편이다. 일부 호남 출신 연예인 및 유명인사들이 KIA 팬일 가능성은 있지만 별도로 KIA 팬임을 밝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12.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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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도시연고는 광주광역시지만 광역연고로 보게된다면 전라남,북도 전체가 광주광역시의 연고다.
  • [2] 구단주 대행 겸임. 기아자동차 국내 판매부문 사장이 KIA 타이거즈의 사장도 겸한다.
  • [3] 현대차그룹은 계열사 대표이사가 구단 대표이사직을 겸임하는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회사 업무만으로도 업무량이 막중한 회사 대표이사 입장에서 회사 산하 스포츠구단의 운영에 간섭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과 관련해서 이사회에 2번 연속으로 KIA 사장이 불참한 것을 놓고 억측기사가 오가는 문제가 있었다. 같은 산하 스포츠구단인 전북 현대 모터스의 경우도 현대자동차 국내 판매부문 사장이 구단 대표이사도 겸하고, 나머지 현대차그룹 산하의 구단은 사장=구단주 체제.
  • [4] 이전에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제 2구장으로 쓰였다.
  • [5]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다 기록. 2위는 삼성 라이온즈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8회.
  • [6] V6이니까 별이 여섯 개여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별이 일곱 개다. 모기업이 KIA로 바뀌면서 엠블렘을 재정리했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이 말이 맞다면 엠블렘을 다시 그리다가 우승을 너무 많이 해서 실수로 별 개수를 착각한 듯하다. 자세한 경황을 아시는 분 추가바람.그리고 자세히 보면 Series가 아니라 Serise라고 써있다(…) 세리세
  • [7]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 강원도 통천군.
  • [8] 청와대 지시라고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 청와대에서는 야구에 관심이 없었다. 왜냐면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이 워낙에 축구를 좋아했다고. 그래서 처음에 프로리그 계획안을 보고 받았을때 "어? 야구였어? 난 축구인 줄 알았지." 라는건 그 당시의 비화다. 축빠야빠의 갈등은 여기서 시작된 건가 어차피 둘 다 3S 정책의 일환
  • [9] 데스리가를 생각해보면 전두환도 일단은 '군인'이므로 야구보다는 축구에 익숙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장병 체련 활동으로 가장 값싸게 먹히는 게 축구였으니까...
  • [10] 전두환은 실제로 중학교때부터 축구선수였으며 육사 축구팀에서도 골키퍼였다
  • [11] 조용히 사장님이 청와대로 갔다 오시더니...
  • [12] 지금도 거의 대부분의 기업이 기업의 홍보 수단으로 매년 200~300억씩 쏟아 부으며 운영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정도로 프로야구단을 운영할 기업이면 대규모의 업집단이 되어야 하는데, 당시 해태는 그러지 못했고 그 뒤로도 그러지 못했다. 오죽하면 '브라보콘 몇 개나 팔아야 너희 연봉이 나오는 줄 아느냐'하는 이야기가 있을까.
  • [13] 김응용 감독의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의 명언(?)이 여기서 나왔다.
  • [14] 박태준 회장은 역시 군인 출신답게 축구를 선호했다.
  • [15] 실제로 60%에 달하는 외국펀드 주주의 제동으로 포항 스틸러스에 점점 지원금이 줄어들고 행정도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더블을 달성한 황선대원군이 놀라울 따름.
  • [16] 아시아자동차는 1965년에 광주에서 설립되었으며 1976년에 기아가 인수한 이후에도 줄곧 본사를 광주광역시로 적어왔다. 오히려 모기업이 된 기아자동차 본사를 서울사무소 취급할 정도였다.
  • [17] 기아는 광주에 공장과 출고사무소를 두고 있다. 특히 공장의 영향이 크다.
  • [18] 옛 현대차서비스 배구단
  • [19] 실제로 LG 트윈스의 1700승 기념 행사 역시 MBC 청룡의 역사를 따랐기에 가능했던 것.
  • [20] 농담이 아니고 저 해태의 4연속 우승은 삼성 라이온즈가 큰 지분을 담당했다. 86년과 87년에 모두 해태에게 셧아웃 당했던 것. 뿐만 아니라 빙그레 이글스도 마찬가지로 1988, 1989년에 해태에게 연속으로 패했다. 4연속 우승 이후에도 삼성은 93년에 다시 한번 패하여 준우승, 빙그레도 91년에 패하여 준우승, 알고 보면 해태 왕조 건설은 이 두 팀의 희생이 컸다고 볼 수 있다.
  • [21] 7차전까지 가더라도 꼭 마지막에 이겼다. 2009년 한국시리즈 참조.
  • [22] 이 때 삼성의 김응용 감독은 KIA를 잡으려고 3선발 체제에 임창용을 애니콜 체제로 투입했다.(…)
  • [23] KIA가 현대에게 선두를 아깝게 빼앗긴것은 맞으나, 실제로 1위 결정전은 9월달에 있었던 광주 현대전에서 결정됐다. 초반부터 5-0으로 끌려다니며 현대의 투수진에 압도당하면서 싱겁게 끝났던 게임이었다. 사실, 2003년 당시 KIA는 2위에 머물고 있다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연승을 달리며 현대를 잠시 제친 것이었고, 그 뒤 연승의 부작용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 1위를 내준 제일 큰 원인이다.
  • [24] 당시 현대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선발로 올라온 정민태가 난타당하며 KIA에게 1회 6점 2회 4점을 헌납하며 10-1로 뒤진 상태였다. 그러나, 현대는 김동수의 연타석 홈런과 이숭융의 홈런으로 추격했고, 9회말에 진필중이 3점차를 지키려 올라왔지만 2점을 내준 뒤 심정수에게 15호 끝내기 장외 쓰리런을 맞고 그만 참고
  • [25] 성적은 크게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 단장이었던 정재공과 선수단 기용을 놓고 트러블이 잦았다. 프런트의 수장인 정재공이 선수단을 장악하고 흔들며 현장의 권한인 선수단 기용에까지 손을 뻗치며 김성한 감독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 그러나 김성한 감독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SK에게 캐발린것 때문에 뜬금없이 데이터 야구를 하겠다고 방동민을 줄창 올려서 불바다를 만든 것.(…) 당시 KIA팬들은 진필중 만큼이나 방동민이 올라오면 뒷목을 잡아야했다. 거기다 김지영폭행한 사건때문에 대외 이미지도 안좋았던 상황이였다.
  • [26] 빵 사건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
  • [27] 시즌 초에 유남호 감독의 구상은 리오스-김진우-존슨-강철민-최상덕 순의 선발진이었으나, 김진우가 스프링캠프에서 지나치게 체중감량에만 신경을 쓴탓에 훈련량 부족으로 1군에 오르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자 유남호 감독은 리오스-존슨-강철민-최상덕의 4선발 체제라는 말도 안되는 선택을 했다가 선발진이 와르르 무너진 것. 5선발로 이동현을 투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불펜 난조로 이강철-조규제 듀오는 노쇠화와 부상으로 일찌감치 물러나고 신용운은 한남자의 실수가 트라우마가 되어 클로져를 못하게 돼버리는 총체적 난국이 도래했다. 상황이 이리되자 유남호 감독은 신인 투수 2명을 필승조로 삼았는데 그 중에 한명이 바로 윤석민이었다.
  • [28] 당시 리오스가 KIA에서의 마지막 선발 등판 후 포수 김상훈과 포옹하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 [29] 사실상 양 팀 전부 폐품 처리 트레이드라고 봐도 무방한 트레이드였다. 마해영과 최상덕은 2006년 시즌 후 전력 외가 되었으며, 그 때 낑겨간 유망주 서동욱은 백업으로 활동하다 2013년 넥센으로 다시 트레이드. KIA로 넘어온 장문석은 2006년 시즌 초반 마무리를 맡았으나 똥줄 세이브를 계속 보여주며 중반 이후 윤석민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주고 방황하던 김진우에게 노장진을 소개시켜주며 김진우가 팀을 이탈하는데 엄청난 공헌을 했다. 장문석과 함께 KIA로 넘어온 한규식, 손상정 역시 별 활약 없이 조용히 팀을 떠났다.
  • [30] 극단적인 상하위타선이 분리된 공격을 하였다. 이용규-김원섭-장성호-이재주가 버틴 상위타선은 2006년 시즌의 미친 투고타저를 감안할 때 리그 최상급 상위타선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5번을 맡아주거나 이재주를 밀어내고 4번을 차지했어야 할 용병이 전부 망했고, 이종범은 커리어 멸망의 신호탄을 쏘았으며, 그나마 손지환과 이현곤은 포지션 및 타순 대비 감내할 만한 수준의 성적을 냈다.
  • [31] 2006년 시즌 기아의 젊은 투수진이 커리어가 폭발한 결과로, 그레이싱어와 장문석을 제외하면 30살이 넘는 투수를 찾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아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대들보들은 바로 다음 해에 감독의 혹사 및 무분별한 기용이 겹쳐 윤석민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가 박살이 난다.
  • [32] 한기주의 10억 보크 사건이 바로 이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나왔다.
  • [33] 여담으로, 홈 복귀전이 522 대첩으로 기억되고 있다. 9:10으로 KIA 승리.
  • [34] 당시 홍세완은 부상병동을 들락거렸고 김종국은 서서히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손지환이나 이현곤 등이 키스톤 알바를 뛰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유격수 용병이었던 윌슨 발데스를 영입하기도 했으나 역시 리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 [35] 양현종과 안치홍 둘 다 2차 1지명. 양현종은 2005년, 안치홍은 2007년에 최하위를 기록한 대가로 얻은 것이었다.
  • [36] 전기리그 4위, 후기리그 4위
  • [37]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4위
  • [38]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3위
  • [39]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3위
  • [40]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
  • [41]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2위
  • [42]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1위
  • [43] 빙그레 이글스와 공동 3위
  • [44] 왜 4위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냐면 3위인 롯데 자이언츠와 3경기 이상 벌어져 준플이 생략되고 대신 플레이오프가 7전 4선승제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 [45] 드림리그 4위/4팀
  • [46] 드림리그 4위/4팀
  • [47] 정규 시작 개막 후 13경기만에 중도사퇴. 후에 조창수 코치가 감독대행.
  • [48] 무려 18년동안이나 했다. 그중 9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
  • [49] 중도사퇴 후 유남호 기아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
  • [50] 중도사퇴 후 서정환 기아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
  • [51] 김응용 이후로는 처음으로 비 해태출신 감독. 2007년 시즌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KIA 감독으로의 데뷔전은 2007년 시즌에 치렀다. 자세한 내용은 슈퍼 한국시리즈 항목 참조.
  • [52] 1차지명이 부활하면서 지역연고 고교 5개를 선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시기 타이거즈의 뿌리와도 같은 군산상고가 빠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KIA에서 선정한 고등학교는 광주일고, 광주동성고, 광주진흥고, 순천효천고, 화순고. 프런트 측에서는 어떻게든 군산상고의 지명권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군산상고는 NC 다이노스가 가져갔다.(어디까지나 1차지명을 할 수 있는 권한이지 홈 경기를 치를 권한까지 가져간 것은 아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KIA는 신생 야구단이 있는 전북 정읍의 인상고를 가져갔다.
  • [53] 2001년에 대체 용병으로 해태에 입단했으나 정작 해태에선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다음 시즌 두산으로 이적해서 확 터졌다.
  • [54] 앤서니 르루는 팀 사정상 마무리로 전환했다가 무너졌고(결국 시즌 도중에 퇴출되었다), 헨리 소사는 2012년에 비해 자주 난타를 당하였다.
  • [55] 2000년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1년에도 재계약을 맺었는데, 발바닥 부상을 당해 퇴출되었다. 그런데 웃기는 건, 계약 내용 중 부상을 당해 퇴출되어도 잔금을 받지 못한다는 노예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역시 대우가 개판인 해태 아니랄까봐..
  • [56] 구단에서 회식을 하는데 나온 메뉴중 하나가 선지해장국. 이걸 보고 특히 기겁을 했다고..
  • [57] 당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새벽까지 미국에 있는 부인과 화상채팅을 하며 밤잠을 계속 설쳤다고 한다. 그러니 낮에 당연히 힘이 없지
  • [58] 해태 시절부터 홈구장인 무등야구장 관중 동원은 어디까지나 원정에 비해서는 좋지 못한 편이었다.
  • [59] 단적으로 비교해봐도 광주시 인구는 2009년 기준으로 약 150만명 정도. 그런데 서울 및 수도권 인구는 2천만이 넘어가니 그 중에 KIA 원정팬이 많은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 [60] 실제로 포스트시즌 횟수를 보면 클래식 라이벌이라는 삼성보다 빙그레/한화이글스전이 더 많다. 한국시리즈 횟수도 삼성전과 같은 3번이고..
  • [61] 다만 삼성 류중일 감독은 기아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어서 80년대의 빚을 갚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근데 선동열이 무능하자나..안될거야 아마..
  • [62] 기아도 마찬가지로 성적이 안좋지만 그래도 09년 우승도 있고 한화보다는 낫다..
  • [63] 기아가 잘나갈때 LG는 중하위권에서 멤돌았고, 2013년 LG가 잘나가자 기아는 하위권을 전전했다..
  • [64] 당시 에스케이 감독이었던 김성근은 당시 기아감독 조범현이 충암고 재학당시 감독이었다.
  • [65] 군산상고와 전주고는 NC 다이노스의 지역연고학교로 편입되었다.
  • [66] 선수들이 뒤섞이는 일이 적은 야구라서 가능한 얘기. 농구나 축구에서는 아무리 기념이라도 같은 번호를 달고 경기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 [67] 공교롭게도 이 날은 대체 외국인선수 헨리 소사의 한국 첫 데뷔경기였는데, 데뷔 경기를 본인의 유니폼이 아닌 남의 배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던지게 되었다.
  • [68] 과거 해태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이었다고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 인증한 적이 있다. 김유식 항목 참고.
  • [69] https://twitter.com/Kiatigers/status/581241131658145793 연예인 야구단 恨 소속 연예인들 특히 정준하는 KIA 창단초기부터 이벤트-기아타이거즈 창단행사, 챔피언스 필드 개막행사등-에 빠지지 않는 연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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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2 2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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