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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4 프로그램

last modified: 2015-04-05 00:39:07 by Contributors

T-4 프로그램을 재연한 내용이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영화 속의 대사는 영어로 나온다.

600년 동안만이라도 육체적으로 퇴화되어 있는 자나 정신적으로 병이 든 자로부터 생식 능력과 생식 가능성을 저지하는 일은 생각할 수록 헤아릴 수 없게 건강 회복에 공헌할 것이다. 그와 같이 민족의 가장 건전한 담당자의 출산력을 의식적, 계획적으로 촉진하는 일이 실현된다면, 그 결과 적어도 현재 우리의 육체적인, 동시에 또 정신적인 퇴폐의 싹이 완전히 제거된 인종이 생길 것이다. -히틀러 나의 투쟁에서

Contents

1. 정의
2. 실시 이전
3. 실시 이후의 행보
4. 전쟁 이후
5. 여담
6. 픽션에서

1. 정의

나치 독일장애인 말살 프로그램.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우생학적 사상관을 추론할 수 있는 사건.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히틀러가 1939년 9월 한 극비 지령 문서에 서명하면서 T-4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T-4 프로그램은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등의 부적격자에 대한 집단 살인 허가 명령이었다. 나치 정권은 이러한 부적격자를 사회로부터 제거함으로서 게르만 민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지킬 수 있다는 인종위생학(독일 버전의 우생학.)을 나치즘의 뼈대로 삼았다. 나치 정권은 이러한 살 가치가 없는 밥벌레들(useless eater)을 죽이는 것을 자비로운 안락사로 간주했다.

"병자나 기형아를 절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병적인 인간을 보호하려는 미친 짓에 비하면 몇 배나 자비로운 일이다."-히틀러

무슨 지거리야? 이러한 나치의 우생학적 견해에 따르면, 안락사 프로그램은 이후 체계적으로 자행된 유럽홀로코스트로의 진화를 대변하는 것이다. 역사학자 이언 커쇼는 이를 "현대적 야만으로 가는 필수 단계."라고 표현했다.

T-4라는 이름은 사무국이 있던 베를린 티어가르텐 4번지에서 유래했다. 병원 4개가 집단 살해 장소로 쓰였으며 가장 큰 병원에는 사령부가 존재하기도 했다.

2. 실시 이전

1930년대 나치당은 안락사를 선호하는 선전 캠페인을 실행에 옮겼다. 국가사회주의인종정치사무소(NSRPA)가 독일인들에게 불치병과 정신병자를 위한 보호시설을 유지하는 비용을 다루는 팸플릿과 포스터하고 극장에서 상영되는 단편영화를 제작했다. 자신들의 환자를 죽이는데 반발하리라 예상된 가톨릭 단체들은 점차 폐쇄되었으며, 요양 중이던 환자들은 북적대는 국립 기관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의 더러운 환경은 이후 안락사를 선호하던 캠페인에 기폭장치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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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선전포스터. "이런 사람들(장애인) 한사람당 6만 제국 마르크가 국고에서 나가고 있습니다."

1932년 독일에서는 단종법(斷種法)이 제정되어 이들 부적격자를 자율적으로 거세토록 했다. 이듬해 나치정권이 들어서자 이 법은 더욱 더 강화되어 1933년 7월 14일 유전적 질환의 자손 예방법으로 공표되었다. 이 법 하에서 유전적 질환을 가진 45세 미만의 여성은 의사들의 판결에 의해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게 되었으며, 의사들의 판결에 불순응할 시 벌금형이 내려질 수 있었다.

법률 시행의 첫해에 약 4000명의 사람이 불임화 인가의 판결에 대해 항소했고 그중 3559명이 패소했다. 나치 정권 말까지 200여 개의 유전 건강 법원(Erbgesundheitsgerichten)이 만들어졌으며 이 법원에서의 판결에 의해 40만 명 이상이 강제로 불임시술을 받았다.

1935년에 히틀러는 제국 의사들의 리더였던 게르하르트 바그너에게 부적격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물었고, 그는 "그러한 문제는 전쟁 상황에서는 좀 더 쉽게 처리될 수 있다."고 답했다.[1] 이후 전쟁의 발발은 히틀러에게 그가 오랫동안 바래왔던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3. 실시 이후의 행보

1940년 병원에 입원한 많은 복구 불가능한 신체적 손실을 입은 장애인들과 정신병자들의 유가족들에게 일제히 폐렴이나 뇌질환 등을 사인으로 적은 사망 편지가 도달한다. 부적격자에 대한 살인은 후에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샤워실이라 불린 가스실에서 이뤄졌다. 초반에는 아예 굶겨 죽이거나 약물 주사로 이루어졌으나 굶겨 죽이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쟁이 지속되면서 물자가 점점 귀해져갔으니 독극물조차 점차 희귀해져버려 결국 일산화탄소 등을 비롯한 가스가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히틀러 본인이 가스를 쓸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히틀러의 주치의 중 하나이자 위생학자인 카를 브란트가 담당했다. 히틀러의 장애인에 대한 견해를 가감없이 주워섬긴 브란트는 가스실과 병행해 실시한 약물주사처럼 효율적인 안락사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별도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가스와 약물을 재료로 멩겔레를 방불케하는 잔인한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렇듯 인간말살 프로젝트라는 형태로 그 죄악이 전면에 대두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사건도 독일 자국민에 대한 나치의 전쟁범죄로 분류되어 전후 생체실험 혐의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회부된 23명의 의사에 대한 재판의 명칭이 Karl Brandt et al.(카를 브란트 등.)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이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실행된 지 2년이 지난 1941년 여름, 이번에는 노인들을 겨냥한 새로운 질의서가 각 가정으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가 안락사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충격에 빠진다.

그뿐만 아니라 너무 못생겼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2]도 표적이 되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가기도 했다. 이 경우,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는 그 아이들이 특별 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속이는 전단지가 배달되었고, 치료소라고 쓰고 인간 푸줏간이라 읽는다로 보내져 비밀리에 각종 의료 연구라고 쓰고 생체 실험이라 읽는다에 이용되다 목숨을 빼앗긴 후, 부검되어 그야말로 갈기갈기 고깃덩어리가 되어 사라져갔다. 게다가 이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939년 후 더 심해져 청소년기에 다른 아이들까지도 끌려가게 되었다.

문제는 점차 장애를 입은 참전용사에게도 예외없이 이러한 T-4 프로그램이 실시된다는 뜬소문이 돌자 군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으며[3][4] 종교계가 저항을 시작했다. 클레멘스 폰 갈렌[5] 주교는 공개 강연을 통해 T-4 프로그램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연설에 감명받은 순수한 학생들은 백장미단을 만들어 저항 운동을 벌이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41년 히틀러는 T-4프로그램의 중지를 명령했다. 정확한 중단의 이유는 불명확하나,[6] 이 조치 이후로도 은밀한 살인은 계속되어 이전의 7만보다 많은 9만여 명이 중지 선언 이후에 희생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41년에 종료되었지만 가장 마지막 아이가 희생된 것은 독일이 항복하고도 3주가 지난 1945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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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티어가르텐 4번지 중심가의 잊혀진 희생자들의 추모명판.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외할아버지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카를 에두아르트[7]가 T-4 프로그램에 가담했던 흑역사가 존재한다.

사실은 이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히틀러와 그의 똘마니들은 반대 여론이 높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고, 이 덕분에 T-4프로그램에 관한 문서 기록이나 명령서 등을 사전에 작성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었고, 최초 시행시 히틀러가 보낸 서신 정도 외에 공식적인 명령이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당시 관료 중에서도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반대의 의지를 표명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쫓겨나 버렸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로타어 크라이시크(Lothar Kreyssig) 판사. 어찌되었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T-4프로그램 자체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족을 요양원으로 보낸 사람들은 갖은 수를 써서 다시 찾아오려 했고, 여러 방면으로 페티션을 내는 등 저항을 하게 된다. 특히 이런 운동은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활발했다. 그리하여 결국 공식적으로 1941년 폐지를 선언하였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행됨과 동시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인력들(의료인력, 관리, 경비원 등)은 절멸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홀로코스트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게 된다. 즉, 수용소에서 학살을 자행할 때 일을 할 수 없는 인력을 따로 분류해 죽였던 것이 이들 작품이었다.

4. 전쟁 이후

이 끔찍한 흑역사 때문에 독일에서는 안락사 문제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매우 강하여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나치 잔재 청산을 최우선시하는 독일에서 안락사 허용은 자칫 나치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0년에 대법원에서 환자의 동의 아래 안락사를 허용하였지만, 완전히 논쟁이 일단락될지는 미지수이다.

T4센터 기간 총 희생자 수
그라페네크 1940년 1월 ~ 1940년 12월 9839
브란덴부르크 1940년 2월 ~ 1940년 10월 9772
베른부르크 1940년 11월 ~ 1943년 7월 8601
하르트하임 1940년 5월 ~ 1944년 12월 18269
조넨슈타인 1940년 6월 ~ 1942년 9월 13720
하다마르 1941년 1월 ~ 1942년 7월 10072
공식적으로 발표된 T-4 프로그램 희생자 수. 출처 : Document 87, P. 232 cit. in Ernst Klee. Dokumente zur "Euthanasie", 1985.

또한 이 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현대 독일어에서는 장애와 정신병을 갖고 욕설을 만드는 것이 터부시된다. 사실 세계 어느 나라나 다 그렇지만 특히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해 가족을 강제로 잃어야 했던 아픔을 겪었던 나라인지라...

오스트레일리아의 철학 교수 피터 싱어도 이로 인해 입국이 거부되었다. 싱어 교수는 공리주의에 기반한 윤리학의 석학인데,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고통의 최소화가 윤리다로 정리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을 느끼는 임산부가 원하지 않은 임신을 중단하고 싶을 경우,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초기 태아의 낙태는 문제가 되지 않고, 심각한 고통이 확실한 병을 가지고 태어날 태아의 낙태나 환자의 안락사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 사실 우리도 일상에서 사지마비로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본인이나 가족에게도 좋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독일은 이와 관련된 너무 끔직한 역사를 겪었기에 싱어의 학설은 나치의 범죄를 정당화한다하여 입국이 거부된 것. 독일이 얼마나 나치시대에 학을 떼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5. 여담

웃긴 건 히틀러의 심복인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이만 7명이나 될 뿐 더러 오히려 장애인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이에 대해선 그의 자기혐오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자신이 장애인이니 장애인들에게서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상기하고 이를 지우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최후에는 정말로 자기 자신도 제거했으니까

나치당은 이 같이 모순적인 사례가 매우 많다. 당장 히틀러부터도 자신이 말한 이상적인 '아리안족'과는 거리가 멀었고[8] 독일군의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만 해도 유대인 혈통이 상당히 섞여있다는 주장이 있으며 폴란드 혈통와 리투아니아 혈통은 확실하게 섞여 있었다., 나치당이 상당히 미화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나중에 나치당이 연구를 하다가 그에게 유대인 혈통이 있는 것을 알고 경악하였다. 이에 대한 나치당의 대응은 족보 위조(…)였는데, 부모에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지시했다.

루돌프 헤스의 어머니 같은 경우 나치당의 인종론에 강하게 지지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리스계 독일인였고, 공군 장성 밀히의 경우 유대인이란 이유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자 그를 아낀 헤르만 괴링"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란 말을 하며 풀어주게 했다(…)는 등 이러한 사례는 나치당 내부에서 숱하게 발견 할 수 있다. 심지어 힘러외모가 은근히 일본인스러웠다(...)

이러한 사례는 나치당이 주장한 인종주의가 독일의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그들의 '관념'에만 근거를 둔 피상적이고 맹목적인 주장, 간단히 말해서 바보짓이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 때문인지 몰라도 문학 작품에서 인종차별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캐릭터가 정작 자신들이 혐오하는 인종의 피가 섞여있다는 일종의 클리셰가 있다. 볼드모트, 세베루스 스네이프,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의 아돌프 히틀러와 아돌프 카우프만 등. 한나 아렌트의 저서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러한 모순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6. 픽션에서

  • 은하영웅전설에서 열악 유전자 배제법이 이것을 모티브로 한 듯.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 적나라하게 묘사 된다. B.J. 블라즈코윅즈가 입원해있던 병원[9]에서 주기적으로 나치 병사들이 와선 장애인들을 넘길 것을 강요했고 마지막에 병원 폐쇄가 명령되자 환자들을 다 죽여버린다. 저항군의 멤버 중 클라우스 크로이츠는 원래 독일군 출신의 순수 아리아인이었지만, 자신의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자 나치에게 아내와 아이를 잃고 나치에 대항하여 싸우게 된다.

  • 은하!에서 히틀러가 [10] 영혼 수확을 목적으로 시작했다는 설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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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막상 바그너 자신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6개월 전인 1939년 3월에 51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 [2] 주의가 산만해 인식력이 떨어지거나 다운 증후군을 보이는 경우 등.
  • [3] 당연히 나치도 자기들을 위해 목숨걸고 싸워주는 이들에게 사기가 떨어질 게 뻔한 이런 짓을 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T-4 프로그램의 정의는 나치의 기준에서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일 뿐,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유전자에 문제가 없는 일반 군인에게까지 손대진 않았다. 이런 소문이 퍼진 이유는 PTSD에 의한 정신질환 때문이다. 게다가, 나치는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혹은 산업 현장에서 일하다 상해를 입은 사람들을 일종의 "영웅"으로 우대해 줬지 결코 내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부상자들이야 유전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하등 문제도 없고, 되레 부상당했다고 하대하는 순간 국민들이 몸만 사리지 열심히 복무 및 노동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 [4] 이런 소문이 퍼지는데에 기여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기 부상참전군인들이었다. 이들은 대공황 등 악화된 독일의 상황에 노숙자로 전락하거나 했으며 이들 중 유대인도 섞여 있었으므로 T-4프로젝트를 제외하더라도 부상참전군인이 나치의 손아귀에 걸려들 이유는 많았다.
  • [5] 이 양반의 이념은 사실 나치즘에 가깝다. 친 나치 인사가 이렇게 저항을 했을 정도면...
  • [6] 일반적인 설명은 범종파적인 종교계의 저항이 전국민적 봉기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는 설이다.
  • [7]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이며 원래는 영국 왕자로 올버니 공작 찰스 에드워드로 불렸다. 그가 16세가 되던 해 삼촌이자 역시 영국 왕자출신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프레트(前 에든버러 공작 앨프리드)가 사망하면서(똑같은 이름의 아들이 있었지만 먼저 사망했다.) 공작령은 영국 왕실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상속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왕위계승자가 훗날 조지 5세가 되는 요크 공작 조지밖에 남지 않았던 에드워드 7세는 당연히 거부했으며, 코넛 공작 아서와 그의 아들에게 돌아갔지만 조국을 떠나 외국의 군주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공작령의 상속을 포기했다. 그래서 결국 찰스 에드워드에게 공작령이 돌아갔는데, 어머니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나는 어린 아들이 독일의 군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남편 앨버트 공이 자란 곳이기도 했던 코부르크를 잃고 싶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이 "공작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왕족의 의무다."라고 설득하면서 결국 공작령을 상속했으며 이름도 찰스 에드워드에서 카를 에두아르트로 바뀌었다.
  • [8] 나치즘에서 말하는 '아리안족'이란 사실상 스칸디나비아계 형질을 가진 게르만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제는 히틀러의 경우 바이에른-오스트리아계 형질이 짙었다는 것(...)
  • [9] 이 병원의 원장 크르지토프 올리바 박사는 이 공로로 훈장도 받는다. 하지만 결국 병원폐쇄 명령때 사살된다.
  • [10] 정확히는 히틀러의 몸속에 들어간 악당 외계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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