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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p연합

last modified: 2014-10-08 03:20:18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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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4일 DJP 공동합의문을 타결하고 악수하고 있는 DJ 와 JP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합 을 말한다

Contents

1. 계기
2. 과정
3. 진통
4. 연합 그리고 정권교체
5. 관련 항목


1. 계기


1992년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 패한 후 DJ 는 영국으로 떠나지만 이후 아태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만들며 정치 복귀에 의지를 드러낸다. 이후 1995년 정치 복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지만 그가 속했던 민주당은 그의 복귀에 아주 부정적이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YS는 물론 민주당 이기택 총재 등 14대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야권 인사들까지 대놓고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한편, 기존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것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호남이 있었기에 이를 기반으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이로써 90명이 넘던 민주당 의원은 50여 명 정도가 국민회의가 이동했고 40여 명 정도가 당에 잔류하게 된다.

이는 사실상 야권 지지표를 분열시키는 행동이었고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표가 갈라지며 신한국당이 제1당이 되고 국민회의는 불과 70여 석에 그쳤으며 민주당은 몰락하게 된다. 이 선거의 패배로 DJ는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지게 되고 당시 DJ의 정치참모였던 이강래 아태재단 연구원은 김종필과 연합해야만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DJP 연합 초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조언하게 된다. DJ는 이를 수락하며 2년간에 걸친 협상 과정이 시작된다.

2. 과정

김종필은 기존 신민주공화당을 이끌고 3당 합당에 참여하여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으나 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던 YS에 의해 민주자유당에서 사실상 쫒겨나는 신세가 된다.그는 자신을 따르는 민정계 일부 세력을 이끌고 독립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고 15대 총선에서 지역 기반인 충청도를 싹쓸이했으며 대구,경북,강원도 등 지역까지 모두 승리하는 기염을 토한다.대구에서는 1석만 빼고 전 의석을 휩쓸기도 했다.이는 YS의 민정계 쳐내기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이었다.그는 애초에 자신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걸 알고 있었기에 누군가와 함께 공동정권을 창출하는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차기 대권 1순위였던 DJ는 첫번째 협상 대상이었다.

당시 자민련 안에는 3개 계파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김종필 직계 세력인 충청파,TK를 중심으로 한 민정계,그 외 비김종필 세력이 있었다. 충청파의 중심인물은 김용환 부총재였고 TK민정계는 박철언 의원, 비김종필 세력은 한영수 부총재였다.
당초 충청파와 비김종필 세력은 DJP연합에 매우 부정적이었으나 TK민정계는 연대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김종필의 결단으로 충청파가 이에 찬성하며 DJP연합은 본격 시동을 걸게 된다.

3. 진통


DJP연합은 정치 성향이 상반된 DJ 와 JP 의 연합이었기에 필연적으로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무엇보다 국민 여론이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무려 70퍼센트가 넘는 국민들이 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DJ 자신도 자신의 지지기반이 날라갈 것을 우려했고 독일의 신호등 연정 등 이론적 기반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이는 현재도 야권이 안고있는 숙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김종필은 연대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갈짓자 행보를 보이며 DJ 측을 초조하게 했다.(아무래도 몸값 올리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4. 연합 그리고 정권교체


1997년 11월 4일 김종필의 청구동 자택에 김대중 후보가 찾아왔고 사실상 연합을 마무리짓는다.(DJ가 나갈 때 JP가 90도 인사를 했다고 한다.당시 한광옥 DJ 비서실장은 이를 보고 진정한 정치 고수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연합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하고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총재로 한다.
둘째.제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합의하며 실세형 총리로 한다.
셋째.모든 경제부처의 임명권은 총리가 가지며 지방선거 수도권 광역단체장 중 한 명을 자민련 소속으로 한다.

이는 어마어마한 영향을 가져왔는데 충청에서 무려 43만 여표차를 벌리며 대선 승리의 기폭제가 된다.(당시 표차는 39만여 차였다.)또 대구,경북에서 14프로가 나오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DJ가 동진 정책을 펴는데 자민련 측 인물들이 선봉장이 된다.IMF 당시 경제관료들도 전부 자민련계 인물들이었고 이들은 뛰어난 능력으로 IMF를 넘기는데 큰 힘이 된다. 또한 지긋지긋하게 DJ를 괴롭혔던 색깔론에서 방파제가 되었고 중도보수층의 지지를 받아 2002년 정권 재창출로 나아가는 큰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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