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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평

last modified: 2015-11-01 12:18:35 by Contributors




Contents

1. 소개
2. 행적
2.1. 투항
2.2. 북벌전쟁
2.3. 낙곡대전
3. 평가
4. 창작물
4.1. 삼국지연의
5. 미디어 믹스

1. 소개

王平, ? ~ 248년. 삼국지의 인물.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자는 자균(子均).

어릴 적 고아가 되어 외가인 하(何)씨 집안에 양육되어 한 때는 '하평(何平)'이라고 불렸다가 성인이 되어 다시 왕평으로 개명했다. 즉, 하평=왕평이다.

문맹으로 쓸 수 있는 글자가 10여 자 내외였지만 글을 구술(口述)하여 타인에게 그것을 적게 하는 방법으로 조리있게 작성하였다. 또한 사기와 한서의 본기와 열전들을 읽게 하여 듣고 그 대의를 알았으며, 왕왕 논설하면서도 요점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책을 외웠다느니 하는 설도 있는데 이는 약간 논란이 있지만 오전(誤傳)이라고 한다.

2. 행적

2.1. 투항

본디 의 무장이었으나 한중 공방전에 투항했다. 이후 제갈량의 북벌에 종군하며, 촉한의 핵심 무장으로 자리잡았다.

2.2. 북벌전쟁

아직 지위가 낮았던 1차 북벌때는 가정을 수비하던 마속의 부장으로 종군해서 산위에 갈림길의 요충지에 진을 치지 않고 산 위에 진을 치려는 마속을 만류했다. 하지만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성격에다 전공에만 미친 마속은 왕평의 조언을 왕평이 문맹이란 이유로 경멸하고 자기 생각에만 치우쳐 그대로 산위에 진을 쳤다가 크게 패했다. 그래도 패주하는 와중에도 왕평 만이 홀로 천 여 명의 병사를 데리고 대오를 유지하며 장합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흩어진 촉병들을 수습해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이 공으로 마속이 참수당하고 제갈량조운의 벼슬이 자진해서 깎이는 와중에 왕평만은 승진했으며 이민족들로 구성된 촉한의 최정예부대 오부를 지휘하게 된다.

231년의 4차 북벌에서는 후방에 주둔하며 사마의가 노성에서 제갈량에게 밀리고 있자 제갈량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 보낸 장합을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대응해 물리쳤다.

234년에 위연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큰 피해 없이 위연군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2.3. 낙곡대전

244년에는 의 조상이 대대적인 침공을 계획하고 하후패, 곽회, 사마소 등과 함께 10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오자 다른 장수들은 낙성 및 양안 관구 부근까지 후퇴, 성에 의존하여 수비를 하면서 성도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1] 이에 왕평은 낙성과 양안관구, 특히 양평관까지 밀리는 것은 위험하다 주장하여 촉의 산악 지형을 이용해 적을 지연시키자고 주장한다 유비가 제시했던 한중수비전략[2]에 따라 직접 3천 병력을 이끌고 출병해 위군을 저지하고 비의 등이 본대와 함께 적군을 요격해 괴멸시켰다.

3. 평가

유비 사후 조운, 오의, 위연, 장억, 마충, 강유 등과 더불어 촉한 최고의 명장으로 꼽힐만한 인물.

4. 창작물

4.1. 삼국지연의

촉한 장수 가운데서 연의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평가받는다. 현대의 평가에서는 명장으로 여겨지는데 연의에서는 이상하게 평가가 나빠서 "부장으로서나 쓸만한 인재"라는 소리를 듣는다. 굴욕 크리. 그래도 촉장이라 그렇게 심하게 굴욕당하지는 않는데 연의에서는 2세 무장이나 강유 등에게 이리치이고 저리치여서(…) 평범한 장군 수준으로만 나온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중공방전서황의 선봉장으로 등장. 처음엔 서황에게 나아가서 자신이 길을 알려주겠다고 자청했고, 이에 서황은 왕평을 부장으로 삼았다. 헌데 성질 급한 서황이 배수진을 쳐서 유비군을 공격하려 하자 왕평은 '그건 지모가 없는 군대에나 쓰는 작전이며 지금은 군사가 그렇게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닙니다'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서황은 그렇다면 왕평에게는 진채나 지키고 있으라며 자신이 직접 무작정 군사를 이끌고 배수진을 쳤고, 당연히 졌다. 그래놓고 본진으로 돌아와서는 왕평에게 '왜 강을 건너와서 도와주지 않았냐'라고 따졌고, 왕평이 "미리 위험성을 알려 드렸으며 자신이 출전했으면 이곳 진채도 빼앗겼을거다" 고 가만히 반박하자 그를 죽이려 들었으나 주위의 만류로 포기한다. 이에 왕평은 서황의 억지에 원한을 품고 유비군에 투항했다.

남만 정벌에서 축융, 북벌에 종군하여 하후무를 생포한다.

제갈량 사후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는데 이 때 한정으로 하평으로 나온다. 문제는 삼국지연의를 포함해서 창작물은 왕평이 외가에서 양육되었던 일이 언급되지 않아서 왕평과 하평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하기 힘들다. 단,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하평이 나올 부분을 왕평으로 바꿔서 오류를 바로 잡았다.

낙곡대전은 실제 역사에서 촉이 위를 상대로 거둔 가장 큰 승리 중 하나였고, 이를 지휘한 장본인임에도 낙곡대전이 통채로 짤려나가서(…) 최대의 공적을 상실했다.

5. 미디어 믹스

왕평/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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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 한중의 병력은 3만 내외였다.
  • [2] 위연에서 왕평으로 이어진 수비전략으로, 촘촘하게 배치된 소규모 부대들이 험한 지형에 의지해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면 후방에서 온 지원군이 이를 요격하고 그 사이에 수비군이 퇴로를 차단하는 방식. 훗날 강유에 의해 좀 더 공세적으로 수정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때 강유가 공세적으로 수정한 방식이 바로 낙성과 양안관구까지 후퇴하는 방식으로서, 당시 양평관이 장서의 항복으로 종회에게 뚫리자 촉은 검각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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