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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 촉한이 아닌 사천지방에 세워진 다른 촉나라의 경우 항목 참고.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시대/육조시대
후한(동한) 삼국시대 서진
   촉한   

© Ian Kiu (cc-by-3.0) from


위의 지도 중 초록색 국가. 중국의 삼국시대 국가 중 가장 작았고 주로 위와 대립했다. 221~263, 2대 43년.

목차

1. 개요
2. 역사
2.1. 군사
2.2. 정치
2.3. 경제
2.4. 이민족
3. 역대 황제
4. 여담
4.1. 명칭
4.2. 촉한정통론
4.3. 창작물
4.4. 쓰촨성의 관광유산

1. 개요

인구 5,520,000명
8,800개

국호는 한(漢). 수도는 성도(221).

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이자 후한의 마지막 계승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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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40.71 KB)]

실제 통치 영역

2. 역사

208년 적벽대전
214년 유비가 파촉을 점거
218-219년 한중 공방전
219년 유비가 한중왕으로 즉위, 형주 공방전
221년 한 멸망 이후 유비가 황제로 즉위, 한나라 재건을 선포.
222년 이릉대전
225년 남만 정벌
227-234년 제갈량의 북벌
253-262년 강유의 북벌
263년 위나라의 침공 → 에 병합

촉한의 시발점은 대개 적벽대전으로 잡는다. 적벽대전 이전의 유비 세력은 사실상 방랑하는 객장이 이끄는 소규모 군벌에 불과하였고, 형주에 정착한 뒤에도 독자적인 세력을 꾸린 것은 아니었다. 적벽대전 이후 안정적인 영토를 확보하면서 점차 체계적인 정치 세력이 갖추어지게 되며, 유비가 한중왕으로 즉위하면서 실질적인 국가 체계를 선언하게 된다.

2.1. 군사

유비가 생전에는 이리 저리 돌아다녀서 기록이 적지만, 안정된 후에는 기록이 늘어나 많아지는데 이것들만 봐도 촉은 비록 세력은 약하지만 결코 얕볼 수는 없는 국가였음을 시사한다.

유비의 형주에 보냈던 세월 까지는 고생이 많아 그에 대한 기록인 선주전을 비롯한 다른 문헌들을 보면 "흩어졌던 사병들이 다시 모였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예를 들어 정사의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한 뒤 한 달쯤 지나 흩어져 달아났다는 병사들이 다시 모였다."는 정사의 기록이 나온다. 이를 바탕으로 영웅 삼국지는 촉의 군사는 소수강병에 서바이벌 스페셜리스트로 표현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유비가 이끈 병사는 다른 세력에서 빌려온 군을 그대로 증여받거나(혹은 탈취하거나) 특정 세력의 잔존병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유비의 휘하에 '촉군'으로 일반화할 만한 군이 출현한 시점은 유비가 유장을 배신하고 그의 군대 일부를 손에 넣음으로서 그때까지 유비 전력의 대다수였던 형주의 유표 잔존군세와 촉의 군세가 결합된 시기라고 보는 것이 옳은데 그렇다면 그전까지 정말 소수의 직할/잔존병력 외에는 상황에 따라 구성이 바뀌는 혼성부대로 안정적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 버텼다는 것인데 이것은 유비군이 전투력은 몰라도 최소한 생존성 및 부대 재편성, 교육면에서는 확실히 뛰어난 군대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파란만장한 1세대(관우장비 등)에 비해 2세대는 이릉대전에서 대부분 죽어버렸고, 제갈량이 이끄는 소수의 2세대와 3세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들 상당한 능력을 지녔다. 사실 1세대의 인물들이 워낙 대단한지라 관우와 장비 이후 무용이 높은 무장들은 모조리 관우 또는 장비와 비교되었을 정도이다. 이전에는 한고조 유방과 싸운 인간흉기와 비교했다. 특히 맹장을 가리켜 관우, 장비에 비견하는 것은 남북조시대에 자주 보인다. 더 나아가서 양대안이라든가 남조 유송의 명장인 단도제의 부장인 고진지와 설융 등도 좋은 예이다.

1세대 장수들의 기록이 상당히 무협지스럽다. 관우는 조조에게 의탁하던 도중 관도대전 당시 1만 명의 군사 속에 뛰어들어 안량을 베어낸다던가, 또는 장비는 장판파에서 20명만의 병사를 대동한 채 조조군 수천 명의 적을 막아냈는 기록이나. 이러한 기록들은 놀랍게도 연의를 쓴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내용만이 아니라 정사의 기록들이다. 아무래도 군세가 많이 약했던 만큼 상장급들도 일선에서 피 묻히며 싸울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대규모 회전을 많이 경험한 탓에 전략가, 지휘관 타입이 많은 위나라나, 소규모 유격전에 특화된 오나라와는 또 다른 차이점. 다만 1세대 장수들중에서 장비를 제외하면 지휘관으로서 커리어가 훌륭했던 인물이 적다는 것이 단점. 관우의 경우 여러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조운위연의 경우 미묘하며 황충은 기록이 적다.[2]

그외 2, 3세대 장수들 중에도 1세대나 위나라의 명장들 못지않게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상당했다. 촉 멸망 후에도 나헌은 2천 군세만으로 오나라의 군세를 반년간 막아냈다. 이때 오나라 최후의 명장이라고 불리는 육항도 3만 병력을 이끌고 왔지만 성을 넘지 못했다.

즉, 2세대부터 좋은 지휘관들은 배출되었지만 쪽수가 안 돼서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마지막 재상이었던 비의의 사후, 유선환관 황호를 총애하면서 국가의 체계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결국 위에게 멸망당한다.

이 부분에 전적으로 황호 & 유선에 책임을 두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는 의견 또한 있는데, 비의 사후 군정의 1인자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기대받았던 강유가 촉내부의 정치적 기반을 다잡지 못하고 안정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북벌을 시도했던 것 또한 촉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비의가 암살당하기 직전 비의는 유선으로부터 개부를 허락받고 한수 일대로 출병했고, 마침 20만 대군을 모아 움직이려 하던 제갈각과의 공동 북벌의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비의가 곽순한테 암살당하자 후계자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하는데, 그러한 일은 무시당하여 실행되지 못하였다. 한편 오의 제갈각은 촉에서 장억 등이 우려하는 가운데서도 꿋꿋히 북벌을 실행시키면서 강유에게 출병을 종용했다.[3] 강유도 어쩔 수 없이 오나라에 호응해 북벌을 나서고 결국 깨져서 권력도 완전히 이어받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2.2. 정치

촉한 정치의 특징은 재상의 활약이 대단히 많았다는 것이다.

황제 유선은 내정이나 외치 면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 주로 황실 의례적인 면을 담당하거나,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나설 수 밖에 없는 사안을 제외하면 그냥 소소하게 놀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고대 중국의 황제는 진행해야 하는 의례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의례적인 역할이라고 해도 할 일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사실 황제의 권위가 위축되고 귀족의 권위가 상승한 점은 위, 오도 비슷했다. 이에 덧붙이자면, 이러한 그 당시의 상황은 황제가 유명무실했던 시대상황 때문일 것이다. 오대시대에도 특출난 몇몇을 제외하면 바보 같은 황제가 줄줄이 이었다. 하지만 촉한의 독특한 점은 이런 황제가 우두머리이면서도 나라의 정치가 안정되고 상당기간 국정이 순조롭게 잘 돌아갔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승상이자 상국으로써 집권 하였고, 제갈량을 구심점으로 두는 정치가 행해졌다. 이 부분은 유선의 모자란 점을 인식한 유비가 제갈량에게 당부했던 일이기도 하다. 더하여 유선도 제갈량에게 상당히 의지한 면도 있었다. 유비의 죽음 이후에도 나타나는 촉나라의 정치적 특징은, 재상의 권력이 강했음에도 이들 모두 근면성실하고 황실에 충성하며 권력을 이용한 부정부패와 자리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일한 경우가 제갈량 사후에 일어난 양의위연의 대립이었지만 위연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고 얼마 후 양의도 실각하면서 곧바로 수습이 되었다. 비의동윤도 갈등을 빚었지만 이는 업무 스타일의 충돌[4] 때문이었고 권력다툼은 아니었다. 그나마 이러한 갈등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한 제갈량이 곽유지를 둘 사이의 중개자로 배치하면서 별탈없이 해결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단순히 제갈량 개인의 정치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제갈량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탁고대신으로써 비록 구두상이긴 하지만 유비로부터 황제가 되도 좋다는 윤허까지 받은 제갈량인지라, 제갈량이 승상이던 시절에는 그의 정치력으로 국가가 안정되게 운영되었다고 풀이할 수는 있어도, 제갈량 사후에도 큰 혼란없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 것은 그만한 시스템이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촉한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장완, 동윤, 비의가 차례로 죽고 난 이후였고 기우는 와중에도 위나 오처럼 바람이 불지는 않았다. 또 사마의사마염이 행정처리 문서를 보고 감탄했다는 기록, 개인이 처리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업무가 재상에게 집중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제갈량은 당대 기준으로는 수준이 매우 높고 복잡한 현대의 그것과 비슷한 관료제 체계를 만들어 국정 운용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으로 많은 국정을 제갈량 본인이 직접 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아, 재상에게 많은 직무와 권한이 집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아쉽게도 기록이 부족하여 상세한 고증은 하기 어렵다.

재상 생몰년도 재직
제갈량 승상 녹상서사 영익주목 181~234 223~234
장완 대장군/대사마 녹상서사 영익주자사 188~246 235~246
비의 대장군 녹상서사 영익주자사 ?~254 246~254
강유 대장군 녹상서사 영양주자사[5] 202~264 256~263

여기에 강유를 제외하고 동윤까지 더해 촉의 사상(四相), 사영(四英)이라고 부른다.
비의가 장완의 익주자사직을 승계하면서 상서령이 되어 조정의 사무를 책임졌다.

남아있는 기록만 보면 특이한 점이 있는데, 바로 위나 오에 비하면 사상/처벌이 관대했다는 것이다. 삼족을 멸한 예는 위연 정도이며 그나마도 양의의 개인적 감정이 들어간 것이고[6] 유선이 나중에 부분적으로 복권을 시켜주었다. 역모를 꾀한 팽양의 경우는 그 당시로서는 놀랍게도 오직 팽양 본인만 처형당하는 정도로 정리. 그 외에는 대부분 귀양이나 좌천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제갈량과 마찰을 빚은 이엄 등도 겨우 귀양 정도로 끝났고(당시 위나 오에선 권력자와 마찰을 빚으면 피를 봤다) 그런 그들도 자신들을 내쫓은 제갈량이 자신들을 다시 불러주기를 바랬다[7]. 심지어는 위에 정통이 있다고 주장한 인물들을 탄압한 기록도 없다. 사상과 처벌 면에선 아주 자유로웠다는 점에서 꽤나 특이했던 국가.

다른 특이점이라면 관리가 많았다는 점. 무슨 소리냐면 동맹이었던 오나라에 비해 인구는 2분의 1도 안되는데[8] 관리 수는 오나라가 3만 2천일때 촉은 오히려 4만으로 더 많았다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다소 농담이 섞인 말이긴 하지만 '과로사가 많다'는 것이 특징으로 꼽히기도 한다. 관밀레

부정적인 특징은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후한의 병폐인 '환관의 전횡'이 재현된 국가라는 점이다. 위나라-진나라, 오나라는 환관이 전횡하는 일이 없었는데, 촉한은 황호의 전횡이 나타났다.(오나라의 잠혼은 실제 역사에서는 환관이 아니다.) 유선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위나라-진나라, 오나라에도 결점이 많거나 막장스러운 군주는 있었다. 그럼에도 환관이 국가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록은 이 시대에는 오직 촉한에만 나타났다. 이는 촉한의 정치체계가 후한을 답습하여 환관의 전횡에 대한 대비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원인을 생각해보자면 위나라-진나라는 문벌귀족이, 오나라는 호족 세력이 각각 정치적으로 강력하여 환관이 세력을 키울 환경이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촉한은 후한의 정치체계를 전반적으로 답습하면서 국내의 호족 세력이 약하다보니 유약한 황제 아래 환관이 전횡하는 후한 말의 병폐도 재현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진 탓으로 볼 수 있다.

2.3. 경제

원래부터 그 옛날부터 익주, 지금의 사천땅은 초한대전 당시 한고제의 중요 기반이 되었을 정도로 물자, 특히 식량이 풍부한 지역이었지만, 거기에 더해 촉한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제갈량의 능력 덕분인지 나라의 규모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번영했다. 파촉땅은 산이 많지만 관개 농업을 통해 계단식으로 개간했고, 분지가 많아 농사를 짓기에 알맞고 기름졌다. 그리고 날씨는 온후하여 일년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제갈량의 통치하에 소금 수입을 막기 위해 을 개발했다. 암염이라고 되어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정염으로써, 이는 지하수에 녹아있는 소금을 끓여서 결정화 시키는 것이다. 제갈량은 당시 우연적이고 경험적으로 행해지던 정염 생산을 본격화 시켰다. 고대에는 소금이 전략물자였으므로, 공명은 이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쓸데없는 지출을 줄임과 동시에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든 것이다.

또 파촉 땅에는 전한기부터 제철 사업으로 갑부들이 많았다. 공명은 이 좋은 쇠와 무릉의 석유 그리고 천연가스를 이용하여 무기와 갑옷 따위를 비롯한 쇠붙이를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켰다고 한다. 여기에 원래 유명하던 촉의 비단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규모를 넓혀서 이를 나라의 특산물로써 삼았다. 촉의 비단은 삼국의 귀족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오나라와 위나라가 촉한으로부터 수입하는 중요한 수입품 중 하나였다.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사천땅은 서쪽으로는 차마고원을 통하여 티벳과 인도 그리고 중동으로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당대에 남만이라고 불렸던 운남성과 베트남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좋은 차와 농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운남성의 무릉에서는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어 등갑옷을 만들때나 쇠를 주조할때 연료로써 쓰여왔다. 앞서 언급했지만, 무후는 이러한 특산품들의 이점을 이용하여 강한 무기와 갑옷을 만들었다. 이러한 점을 봤을때, 촉한의 경제력과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국방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더하여 촉의 화폐는 위나라의 서북 지역, 오나라의 남부 지역에도 통용될 정도로 신뢰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촉한이 삼국 중 가장 국력상 열세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일부에선 촉이 오나라보다 더 경제력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인구가 삼국중에서 젤 적었다. 중국의 기록에도 위나라 인구는 약 400만, 오나라는 200~250만, 촉나라는 약 100만으로 남아 있는데, 전근대 사회에서 인구는 곧 생산력이고, 경제력이기 때문에, 촉나라의 경제 규모가 가장 작았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제갈량의 국가운영이 매우 효율적이었고, 사천분지가 곡창이며, 오나라의 주요 영역인 장강 이남지역은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았지만, 오나라 역시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장강북부 일부와 양쯔강 삼각주를 장악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땅이 좁은 촉나라가 오나라를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9] 당시 기록이 명백하게 남아 있기에, 이것은 논쟁의 여지도 없는 사실이다.

2.4. 이민족

위의 경우는 이민족을 노예화시켰고,[10] 는 이민족과 아옹다옹 칼질하며 살았던 것과 달리, 무릉만사마가를 동맹으로 삼거나 반란을 일으킨 남만맹획을 정3품의 고위관직에 임명하고 맹획의 일가쯤 추정되는 맹염은 후에 5차 북벌에 참가하는 등 상당히 이민족을 잘 포용한 편이다.

물론 수탈이 없던건 아니지만 남만 지역에 제갈량에 호의적인 전설 등이 남은 것으로 봐선 시간이 지나도 원한이 남을 정도의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던 듯하다.

북벌 때는 제갈량이 가비능 등의 이민족 대장들도 잘 포섭했었고 서융족 등의 협력을 얻기도 했으며, 왕평이 이민족 부대의 대장이 되고 좀 더 올라가면 유비 휘하에 이민족 기병이 있었다는 기록도 볼 때 이민족에 대한 군사적 포용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민족들을 기병 전력으로 활용하는 것은 당대에도 위에서도 했고, 전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촉한도 이런 예를 따랐다고 볼수 있지만 촉의 경우 이민족에게 가장 친화적인 국가였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당장 위에 언급되는 맹염만 하더라도 직위가 호보감, 즉 근위보병사령관이었다. 당시 위와 오가 이민족에게 저런 고위 관직을 주면서 중앙관서에 편입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3. 역대 황제

대수 재위기간 묘호 시호 성명 약력
1대 221-223년 열조(烈祖)[11] 소열황제(昭烈皇帝)유비(備)한나라의 계승을 표방.
161년 출생, 223년 사망. 63세.
2대 223-263년 후주(後主)효회황제(孝懷皇帝)[12]유선(禪)제갈량, 이하 생략. 그리고 촉빠공적.
207년 출생, 271년 사망. 65세.

4. 여담

4.1. 명칭

후한을 이은 왕조라는 정통성을 주장했으므로 정식 국호는 단지 (漢)이었다. (蜀)은 이 나라의 별칭인데 촉한 스스로는 잘 안 썼고 위나라나 오나라 내부에서 주로 썼다고 생각된다.

중국사에서는 국호를 漢이라고 쓰는 나라가 많은 탓에 국가의 위치인 지방의 이름을 붙여서 촉한이라고 부른다. 사실 위진남북조시대에도 이 지역에 (漢)이 또 생긴다. 이쪽은 이민족 국가. 이건 흔히 (後蜀)이나 성한(成漢)이라 부르지만, 이쪽도 "촉한"이라 부르지 못할 것도 없기 때문에 촉한이라는 표기에 문제가 없지는 않다.

이 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역사가들은 계한(季漢, 전한,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이라는 의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촉한에서는 스스로를 정통 한나라로 보아 한나라로 불렀기 때문에 이를 존중하여 삼국지평화에서는 그냥 한(漢)이고 해도 한이라 불려 판소리등에 "한말 위한오 시대 때"라고 부르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역사서 삼국지에는 그냥 촉으로 기재돼 있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도 촉이라고 불렀다.

여러 모로 국공내전대만으로 이주해 정통성을 주장한 중화민국의 처지와 비슷하다. 실제로 제갈량의 출사표에 등장하는 말인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한나라(촉한 포함)와 도적(역적)[13]은 양립할 수 없다)이라는 용어는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말로 인용해 왔고 지금도 강경한 사람들은 이 말을 사용한다.

4.2. 촉한정통론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세간에 알려진 '서진의 실정으로 촉한정통론이 생겨났다'는 설은 중국 역사에서 이어졌던 정통론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지어낸 망상에 가깝다. 실제로는 역시나 정치 문제.

4.3. 창작물

작은 세력으로 계속 노력했다는 이미지덕분에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선 주역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잦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망해버린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비장함을 부여하기도 좋은데다가 역사상의 본인들이야 죽을 맛이었겠지만(...) 인재가 적다는 것은 문학등으로 창작했을때 여러 인물에 포커스가 흩어지는게 아니라 한두사람에 집중되서 주인공으로 띄워주기 좋다. 특히나 파보면 강력한 모습은 보기 힘들어도 의외로 튼실한 면도 보여서 이런 점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대부분의 창작물이 전쟁을 다루다보니 위에서 언급된 촉의 다른 장점인 정치 체계나 경제력은 무시되는 경우가 잦다. 아니 대부분이다. 대부분 제갈량이 정치를 잘했다 정도로만 끝난다. 하지만 정작 촉한은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30여 년을 더 존속했고, 게다가 위가 전력을 다해 수십년을 더 싸우고도 오와 달리 힘으로 정면대결해서 멸망시킨 게 아니라 간첩을 엄청난 규모로 보내고, 강유를 철저하게 묶고, 여기에 유선의 병크까지[14] 줄줄이 운이 따른 결과임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억울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4.4. 쓰촨성의 관광유산

쓰촨성에는 난세가 오면 나라가 하나씩 세워졌다. 그런데 이 세워진 나라들이 대체로 혼란기에 지방 실력자가 한 몫 잡고 험준한 산악에 의지해서 버티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나태해지다가 대륙의 정세가 정리되어 천하대세가 갈리면 흐지부지 멸망하는 일을 자주 보여준다. 그래서 인지도도 낮고 관심도 덜 받는다. 당장 촉한이 멸망한지 40년 이후 촉 땅에 성한이라는 이민족 왕조가 세워지는데 이런식으로 망했다. 물론 촉한에 비해선 아웃 오브 안중 취급(...).

쓰촨성지정학적인 상황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듯 한데, 촉한은 망하기 직전까지 공세를 펼친 특이케이스이다.[15] 유비의 한중 공방전, 이릉대전,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 등 끝없이 싸워왔다.

이 때문에 촉한은 쓰촨성 관광계의 희망이자 별이자 모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다른 지방에서는 완전 듣보잡 수준인데 촉한만은 삼국지의 영향으로 인기가 높기 때문이다.

대충 이 동네 전통 관광 유산의 90%가 촉한 관련이라고 한다. 무후사는 물론이고, 낙봉파 같은 연의에 나온 가상의 지역까지의 도로도 만들어져 있다.

예외적인 것은 전촉 황제 왕건 묘나 진(秦)나라에게 멸망당하기 이전 고대 파촉 문명 정도? 그나마 이쪽도 촉한 관련 유적보다는 인기가 없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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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유비가 한 황실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후한의 계승국이라고 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한의 멸망을 서한-동한-촉한으로 보아 263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 [2] 이건 위에도 설명하였듯이 촉군 자체가 상당히 늦게 성립된 것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장수 혼자서 돌격해서 다 썰어버리는 연의와 달리 실제 전쟁은 장수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병사들의 전투력이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
  • [3] 오서 제갈각전 배주 제갈각별전 中.
  • [4] 비의는 업무의 큰 줄기만을 잡고 그 외는 아랫사람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스타일인 반면 동윤은 자신의 업무를 직접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죽어라 일하는 동윤의 눈에 당연히 비의가 일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훗날 동윤이 비의의 뒤를 이어 상서령이 된 후 무지막지한 업무를 받아 본 후에야 "사람의 재능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인가!"하고 비의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더욱 무지막지하게 일을 해서 업무를 처리해나갔다.
  • [5] 강유는 일단 비의 사후 대장군이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린데다, 비의 사후에는 조정을 유선이 황호와 진지(상서령. 직임이 강유의 녹상서사와 겹친다!) 등을 내세워 직접 통할했으므로 제갈량, 장완, 비의와는 그 역할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난다. 다만 군부와 조정의 어른격인 대장군 녹상서사직에 올라 있었고, 한중방어체제 개편이나 건국공신들의 추증 등 국사에는 강유가 개입한 바 있으므로, 강유 또한 재상 계보에 드는 것이 가능하다.
  • [6] 그 양의도 상당히 중대한 죄를 지어 나중에 제재를 받지만 그냥 본인만 자살하게 하는 걸로 끝났다.
  • [7] 이엄같은 경우는 제갈량이 죽자 자신이 복권될 일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 통곡했을 정도였다. 보통 이런 경우 쫓겨난 자들은 쫓아낸 자들이 죽고나서야 돌아갈수 있다고 안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촉한에선 반대였던 특이 케이스. 그리고 이엄의 아들 이풍은 아버지가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태수로 승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 [8] 오의 호구가 230만 정도였을때 촉은 90만이었다. 다만 오와 달리 촉은 명백한 중앙집권국가고 그 집중도만 따지면 오히려 위보다 결속력이 더 강했다는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장 나라가 망할 당시에도 위는 촉을 멸망시키기 위해 그 엄청난 우위의 국력에도 불구하고 불과 두 배의 병력만 동원했고, 그나마도 운이 겹치고 또 겹친 결과 멸망시키는 게 가능하였다. 게다가 원래 위의 1차 목표는 유엽의 건의에서 보듯이 촉이 아니라 오였다.
  • [9] 왜 사마소가 오나라가 아닌 촉나라부터 먼저 정복했는지를 생각해보자.
  • [10] 이때 (중국 입장에선) 이민족이었던 우리 고구려도 작살이 났었다.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을 PO정벅WER. 이때 고구려는 수도가 불타고 거의 멸망했었다.
  • [11] 촉한에서 붙여준 묘호는 아니고 오호십육국때 전조의 유연이 붙인 묘호. 잘 인정하진 않지만 조선왕조실록에도 열조가 유비의 묘호라고 쓴 기록이 존재한다. 인조 참조.
  • [12] 이 역시 전조의 유연이 붙인 시호.
  • [13] 당장은 위나라를 가리켜서 賊이라 표현했겠지만 내심 오나라도 賊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목표는 삼국을 통일해서 옛 한나라의 정통을 승계하는 것이니깐.
  • [14] 유선을 안락공으로 봉하고 잘 대해준 것도 실상은 촉 내부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로 보인다.
  • [15] 물론 전한도 여기에 들어간다면 갈 수도 있겠지만 애시당초 전한 왕조는 파촉에서 몇년 있다가 바로 관중을 주 거점으로 삼아 활동한 케이스라 장기간 파촉을 거점으로 삼고 활동한 촉한과 분위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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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8-15 14: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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